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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초불>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so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세상 (욕계의 다른 사람의 재물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지나친 燃燒와 惡意를 버리고서
열심인 자, 즉시 알아차리는 자, 기억을 지닌 그는 몸에 대해서 몸을 지켜보면서 산다.
먼저 vineyya는 vineti에서 파생된 단어이고 '1.~하고서, 2.~하면서'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러면 앞의 번역처럼 abhijjhā를 '욕심'으로 번역하면 貪(rāga)을 연상하게 되는데
여기서의 abhijjhā(abhi - jhāyati/dhyāna, 禪/燃燒)는
貪(rāga) 계열에 속하는 것(rāga-dhamma)일지라도 貪(rāga)이라는 法(dhamma)은 아닙니다.
만약 貪과 瞋(cetasika-vedanā인 domanassa를 dosa)으로 해석한다면
2.~하면서(버리면서)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싶습니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1.~하고서(버리고서)로 대부분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4념처 수행을 하기도 전에 貪과 瞋을 이미 버린 것이 됩니다.
그러나 abhijjhā는 아래 자료와 같은 문맥에서 그 의미가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이 외의 설명은 없습니다.
즉 身口意 3業(10不善業道) 가운데 意行으로 나타납니다.
戒에도 속할 수 있는 殺盜 등의 身(口)業에 이어 나타나는
意業은 욕계 (인간) 세상에서(loke)
盜에는 이르지는 않았지만 타인의 것에 대한 지나친 '드러냄(禪, 燃燒/불이 남)'
혹은 생명체에 대한 殺에는 이르지는 않았지만
타인에 대한 '저주(삿된 思惟 - 語行이 아닌 意行)'라고 이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삿된 見이 意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意行은 (나쁜 의미의) (發)心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이해합니다.
반면에 여기서의 正見은 業自性正見(kammassakata-sammādiṭṭhi)이 대표적입니다.
<kammassakā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paṭisaraṇā
중생들은 업이 바로 그들의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들의 권속이고, 업이 그들의 의지처이다.
*saka: one's own. one's own property>
이하 자료입니다.
“‘manosamācāraṃpāhaṃ, bhikkhave, duvidhena vadāmi — sevitabbampi, asevitabbampi;
tañca aññamaññaṃ manosamācāran’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bhagavatā.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나는 마음의 행위61)를 두 가지로 설한다.
받들어 행해야 할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의 행위는 서로 상반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연유로 이와 같이 설하셨을까요?
61) “'마음의 행위(mano-samācāra)'에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와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는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견해의 획득(diṭṭhi-paṭilābha)이라는 문단(10)에서 별도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MA.iv.100)
yathārūpaṃ, bhante, manosamācāraṃ sevato a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kusalā dhammā parihāyanti evarūpo manosamācāro na sevitabbo;
yathārūpañca kho, bhante, manosamācāraṃ sevato akusalā dhammā parihāyanti,
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evarūpo manosamācāro sevitabbo.
세존이시여, 어떤 마음의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면, 그런 것은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마음의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하면, 그런 것은 받들어 행해야 합니다.
“kathaṃrūpaṃ, bhante, manosamācāraṃ sevato a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kusalā dhammā parihāyanti?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마음의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듭니까?
idha, bhante, ekacco abhijjhālu hoti, yaṃ taṃ parassa paravittūpakaraṇaṃ taṃ abhijjhātā hoti —
‘aho vata yaṃ parassa taṃ mamassā’ti;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탐욕을 부립니다.
그는 '오, 저 사람 것이 내 것이라면.'하고 남의 재산과 재물을 탐합니다.
byāpannacitto kho pana hoti paduṭṭhamanasaṅkappo —
‘ime sattā haññantu vā vajjhantu vā ucchijjantu vā vinassantu vā mā vā ahesun’ti —
evarūpaṃ, bhante, manosamācāraṃ sevato a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kusalā dhammā parihāyanti.
그의 마음은 악의로 차있습니다. [50]
그는 '이 중생들이 죽어버리기를, 파멸되기를, 파괴되기를, 멸망해버리기를, 없어져버리기를.'하고
타락한 생각을 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마음의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듭니다.
“kathaṃrūpaṃ, bhante, manosamācāraṃ sevato akusalā dhammā parihāyanti,
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마음의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합니까?
idha, bhante, ekacco anabhijjhālu hoti, yaṃ taṃ parassa paravittūpakaraṇaṃ taṃ nābhijjhātā hoti
— ‘aho vata yaṃ parassa taṃ mamassā’ti;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는 '오, 저 사람 것이 내 것이라면.'이라고 남의 재산과 재물을 탐하지 않습니다.
abyāpannacitto kho pana hoti appaduṭṭhamanasaṅkappo —
‘ime sattā averā abyābajjhā anīghā sukhī attānaṃ pariharantū’ti —
evarūpaṃ, bhante, manosamācāraṃ sevato akusalā dhammā parihāyanti,
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그의 마음은 악의가 없습니다.
'이 중생들이 적의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해악에서 벗어나고,
그들 스스로 행복하게 지내기를!'하고 타락하지 않은 생각을 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마음의 행위를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합니다.”
‘manosamācāraṃpāhaṃ, bhikkhave, duvidhena vadāmi — sevitabbampi, asevitabbampi;
tañca aññamaññaṃ manosamācāran’ti — iti yaṃ taṃ vuttaṃ bhagavatā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나는 마음의 행위를 두 가지로 설한다.
받들어 행해야 할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의 행위는 서로 상반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설하신 것입니다.”
“‘cittuppādaṃpāhaṃ, bhikkhave, duvidhena vadāmi — sevitabbampi, asevitabbampi;
tañca aññamaññaṃ cittuppādan’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bhagavatā.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나는 마음의 일어남을 두 가지로 설한다.
받들어 행해야 할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의 일어남은 서로 상반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연유로 이와 같이 설하셨을까요?
yathārūpaṃ, bhante, cittuppādaṃ sevato a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kusalā dhammā parihāyanti evarūpo cittuppādo na sevitabbo;
yathārūpañca kho, bhante, cittuppādaṃ sevato akusalā dhammā parihāyanti,
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evarūpo cittuppādo sevitabbo.
세존이시여, 어떤 마음의 일어남을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면, 그런 것은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마음의 일어남을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하면, 그런 것은 받들어 행해야 합니다.
“kathaṃrūpaṃ, bhante, cittuppādaṃ sevato a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kusalā dhammā parihāyanti?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마음의 일어남을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듭니까?
idha, bhante, ekacco abhijjhālu hoti, abhijjhāsahagatena cetasā viharati;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탐욕스러워서 탐욕에 찬 마음으로 머뭅니다.
byāpādavā hoti, byāpādasahagatena cetasā viharati;
vihesavā hoti, vihesāsahagatena cetasā viharati —
evarūpaṃ, bhante, cittuppādaṃ sevato a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kusalā dhammā parihāyanti.
그는 악의를 가져 악의에 찬 마음으로 머뭅니다. 그는 잔인하여 잔인한 마음으로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마음의 일어남을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듭니다.
“kathaṃrūpaṃ, bhante, cittuppādaṃ sevato akusalā dhammā parihāyanti,
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마음의 일어남을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합니까?
idha, bhante, ekacco anabhijjhālu hoti, anabhijjhāsahagatena cetasā viharati;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탐욕스럽지 않아서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 머뭅니다.
abyāpādavā hoti, abyāpādasahagatena cetasā viharati; avihesavā hoti,
avihesāsahagatena cetasā viharati —
evarūpaṃ, bhante, cittuppādaṃ sevato akusalā dhammā parihāyanti, 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탐욕스럽지 않아서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 머뭅니다.
그는 악의가 없어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머뭅니다.
그는 잔인하지 않아서 잔인하지 않은 마음으로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마음의 일어남을 받들어 행할 때
그에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합니다.
‘cittuppādaṃpāhaṃ, bhikkhave, duvidhena vadāmi — sevitabbampi, asevitabbampi;
tañca aññamaññaṃ cittuppādan’ti — iti yaṃ taṃ vuttaṃ bhagavatā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나는 마음의 일어남을 두 가지로 설한다.
받들어 행해야 할 것과 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두 가 지] 마음의 일어남은 서로 상반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설하신 것입니다.”
“kathañca, cunda, tividhaṃ manasā asoceyyaṃ hoti?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으로 [짓는]<*manosaṅkhāra> 세 가지 불결함인가?
idha, cunda, ekacco abhijjhālu hoti.
yaṃ taṃ parassa paravittūpakaraṇaṃ taṃ abhijjhātā hoti —
‘aho vata yaṃ parassa taṃ mamassā’ti.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간탐한다.
그는 '오, 저 사람 것이 내 것이라면.'이라고 남의 재산과 재물을 탐한다.
“byāpannacitto hoti paduṭṭhamanasaṅkappo —
‘ime sattā haññantu vā bajjhantu vā ucchijjantu vā vinassantu vā mā vā ahesun’ti .
그의 마음은 악의로 차있다.
그는 '이 중생들이 죽어버리길, 파멸되기를, 파괴되기를, 멸망해버리길, 없어져버리길.'하고
타락한 생각을 품는다.
“micchādiṭṭhiko hoti viparītadassano —
‘natthi dinnaṃ, natthi yiṭṭhaṃ, natthi hutaṃ, natthi sukaṭ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natthi ayaṃ loko, natthi paro loko, natthi mātā, natthi pitā, natthi sattā opapātikā,
n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paṭipannā
ye imañca lokaṃ parañca lokaṃ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
evaṃ kho, cunda, manasā tividhaṃ asoceyyaṃ hoti.
그는 삿된 견해를 가진다.
'보시도 없고 공물도 없고 제사(헌공)도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없고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다.'라는 전도된 소견을 가진다.
쭌다여,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불결함이다.
idha, bhikkhave, ekacco abhijjhālu hoti byāpannacitto.
ayaṃ vuccati, bhikkhave, cittavipat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간탐하고, 악의에 찬 마음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의 결함이라 한다.
“katamā ca, bhikkhave, diṭṭhivipatti?
idha, bhikkhave, ekacco micchādiṭṭhiko hoti viparītadassano —
‘natthi dinnaṃ, natthi yiṭṭhaṃ, natthi hutaṃ, n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natthi ayaṃ loko, natthi paro loko, natthi mātā, natthi pitā, natthi sattā opapātikā,
n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paṭipannā
ye imañca lokaṃ parañca lokaṃ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
ayaṃ vuccati, bhikkhave, diṭṭhivipatti.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견해의 결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보시한 것도 없고 제사지낸 것도 없고 헌공(獻供)한 것도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결실도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는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다.'라는
삿된 견해를 가졌고 전도된 견해를 가졌다.
“ye te, bho bhāradvāja, bhikkhū bhāvitakāyā bhāvitasīlā bhāvitacittā bhāvitapaññā,
tesaṃ taṃ sukaraṃ hoti.
ye ca kho te, bho bhāradvāja, bhikkhū abhāvitakāyā abhāvitasīlā abhāvitacittā abhāvitapaññā,
tesaṃ taṃ dukkaraṃ hoti.
appekadā, bho bhāradvāja, asubhato manasi karissāmīti subhatova āgacchati.
“바라드와자 존자여, 몸을 닦고 계를 닦고 마음을 닦고 통찰지를 닦은
비구들에게는 그것이 쉽습니다.
바라드와자 존자여, 그러나 몸을 닦지 못하고204) 계를 닦지 못하고 마음을 닦지 못하고
통찰지를 닦지 못한 비구들에게는 그것을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나는 부정함을 마음에 잡도리하리라.'라고 생각하지만
아름답다고 보기 일쑤입니다.”
abhijjhālu kāmesu tibbasārāgo byāpannacitto paduṭṭhamanasaṅkappo
욕심이 많고 감각적 욕망들에 깊이 탐닉하고 악의에 찬 마음을 가졌고 타락한 생각을 품었으며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思已 Cetayitvā> 몸과 말과 마노로 업<*manosaṅkhāra>을 짓는다.
첫댓글
思(cetanā)도 作意(manasikāra)도 모두 심행이지 의행이 아니지 싶습니다.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思已 Cetayitvā> 몸과 말과 마노로 업<*manosaṅkhāra>을 짓는다.
위는 아래와 같이 우리말로 옮겨도 괜찮을 듯 합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통하여 업을 말하노니
몸을 통하여 의도하고서, 말을 통하여 의도하고서, 마노를 통하여 의도하고서(몸으로 말로 마노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思已 Cetayitvā> 몸과 말과 마노로 업<*manosaṅkhāra>을 짓는다.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AI의 분석, 번역, 해설
1. Cetanāhaṃ:
- Cetanā (의도) + ahaṃ (나는)
- Cetanā: 여성 단수 대격
- ahaṃ: 대명사, 1인칭 단수 주격
2. bhikkhave - 명사 bhikkhu의 남성 복수 호격 - "비구들이여"
3. kammaṃ - 명사, 중성 단수 대격 - "행위를"
4. vadāmi - √vad (말하다)의 현재 1인칭 단수 - "나는 말한다"
5. Cetayitvā:
- √cit (생각하다, 의도하다)의 절대분사
- 이 형태는 주절의 동작에 선행하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 "의도하고 나서", "생각한 후에"의 의미
6. karoti - √kar (하다)의 현재 3인칭 단수 - "한다"
7. kāyena - 명사 kāya(몸)의 남성 단수 구격 - "몸으로"
@봄봄
8. vācāya - 명사 vācā(말)의 여성 단수 구격 - "말로"
9. manasā - 명사 manas(마음)의 중성 단수 구격 - "마음으로"
Cetayitvā는 동사 ceteti(의도하다, 생각하다)의 절대분사 형태입니다.
절대분사는 주절의 동작과 시간적 또는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부사절을 형성합니다.
이 경우, "의도한 후에" 또는 "생각한 다음에"라는 의미로,
행위(kamma)가 의도(cetanā)에 뒤따른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업(行)이라고 말한다.
의도한 후에 사람은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행위를 한다."
이 구절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을 나타냅니다.
행위(kamma)의 본질이 단순한 물리적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의 바탕이 되는 의도(cetanā)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윤리적 행위와 그 결과(업보)의 근본이 마음의 상태,
특히 의도에 있다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반영합니다.
@봄봄 AI의 분석, 번역, 해설
1. Cetanāhaṃ:
- Cetanā (의도) + ahaṃ (나는)
- Cetanā: 여성 단수 대격
- ahaṃ: 대명사, 1인칭 단수 주격
Cetanā는 여성단수주격입니다. Cetanā가 여성단수대격이 되려면 Cetanaṃ이 되어야 합니다. 해서 AI의 분석, 번역, 해설인- Cetanā: 여성 단수 대격은 잘못입니다.
그러면 경문의 Cetanā가 여성단수주격인가? 경문의 Cetanā가 여성단수주격이라면 말이 안됩니다. 왜냐면 Cetanā의도는 ahaṃ나는, bhikkhave비구들이여, kammaṃ업을(행위를) vadāmi말한다.로 되니, 즉 의도는 나는 비구들이여 업을(행위를) 말한다.로 되니 말이 안됩니다. 해서 경문의 Cetanā는 여성단수주격이 아닙니다.
그러면 경문의 Cetanā는 과연 무엇인가? 경문의 Cetanā는 ceta: [nt.] (mano-group), thought; intention; purpose.。의 단수 구격입니다. 의미는 '의도를 통하여, 의도로' 입니다.
@넘어서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위의 구절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법에 맞지 않게 번역되어서는 안됩니다. 문법에 맞지 않는 번역은 문장이 아닌 非文입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통하여 업을 말하노니
몸을 통하여 의도하고서, 말을 통하여 의도하고서, 마노를 통하여 의도하고서(몸으로 말로 마노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
이 번역이 문법에 맞는 번역입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업(行)이라고 말한다.
의도한 후에 사람은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행위를 한다."
이 번역은 문법에 맞지 않는 번역이어서 非文입니다.
@넘어서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
1. Kāyena cetayitvā kammaṃ karoti. 身에 의해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
2. Vācāya cetayitvā kammaṃ karoti. 口에 의해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
3. Manasā cetayitvā kammaṃ karoti. 意에 의해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
...라는 의견이시지요?
@봄봄 수단격이 '~에 의해서' 라는 의미를 가질 때는, 동사의 과거분사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cetayitvā 는 동사 cetayati: perceives; thinks.의 절대체인 만큼 이와 함께 쓰인 수단격- kāyena vācāya manasā-는 -身에 의해서 口에 의해서 意에 의해서-로 옮기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위 경문에서의 kāyena vācāya manasā 는 '~통하여, ~로' 라는 의미의 수단격으로 옮기는 것이 타당합니다.
해서
1. Kāyena cetayitvā kammaṃ karoti. 몸을 통하여(몸으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
2. Vācāya cetayitvā kammaṃ karoti. 말을 통하여(말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
3. Manasā cetayitvā kammaṃ karoti. 마노를 통하여(마노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
라는 의견입니다.
@넘어서
(몸으로) 의도하고서 = 身에 의해서 의도하고서
.... 같은 것 같습니다.
@넘어서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위 경문에서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는 문법에 맞게 옮기면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통하여' 업을 말한다'로 됩니다.
여기서 Cetanā는 중성명사 ceta의 단수 수단격입니다. 의미는 '의도를 통하여, 의도로'입니다. 세존께서는 업을 말씀하시는데 '의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는- 중생들은 업을 짓는 데 '의도를 통하여' 업을 짓는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노로 업을 짓는다.라고 천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에서 Cetanā가 수단격입니다.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에서 kāyena vācāya manasā가 수단격입니다.
@넘어서 이렇게 Cetanā와 같이 kāyena vācāya manasā가 수단격으로 쓰인 의미는, 업을 말씀하시는 데 '의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업을 짓는 데 ' 몸을 통하여 말을 통하여 마노를 통하여 의도하고나서' 업을 지음을 명백학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가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노로 업을 짓는다.-라고 잘못 읽히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넘어서
본 카페에서는 가능하면 문법적인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AI의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정확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참고하는 정도로 읽으시라고 전제하여 왔습니다. 앞의 댓글도 마찮가지 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질문하고 ...
[Cetanā는 중성명사 ceta의 단수 수단격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주격은 어떻게 되면 대격은 어떻게 되며 ... 처격은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실수 있는지요?
이 단어의 격변화는 본 적이 없어서 질문합니다.
@봄봄
@넘어서
@넘어서 이 책의 122~123쪽에 걸쳐 있습니다.
@넘어서
정확하게 읽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음이 원래 -s인 단어인 경우 -anā형이 있다는 설명 아닙니까?
@봄봄 말음이 원래 -s인 중성 단어인 경우, 격변화시 -s가 떨어지고 -nā가 붙으면 수단격이거나 탈격이다,라는 설명입니다.
cetas의 격변화는 위의 ② n. 예) vacas(말)의 격변화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N.은 주격, V.는 호격, Ac.는 목적격, I.는 수단격 또는 구격, Ab.는 탈격, D.는 여격, G.는 소유격, L.은 처격입니다.
@넘어서 manassa kho, brāhmaṇa, sati paṭisaraṇan”ti (바라문이여, 마노[意]는 문지기(sati)를 의지한다.)”라는 S48:42 <운나 바라문경(M43)>
mana가 나오면 반드시 D2<사문과경> 에서의 "감각기능이 결여되지 않은 상태인 마노意로 만든 몸(意成身)"을 연결하세요,
그래서 M10 념처경(satipatthanasutta)에서의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분명히 알고... 육경을 분영히 알고... 육내외입처 결박을 분명히 알고... 그 결박의 사라짐을 분명히 알고...."와 같이 경문에서의 의意와 법의 결박이 있고 그 결박으로 전향하는 '마노意로 만든 몸(意成身)'이라는 意門에서 일어날 삼법인을 염두에 두고서 실천적 의미에 살펴보게 됩니다
선정에서 감각기능이 결여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비로소 감각기능根들인 눈과 그 대상 형색(귀와 소리, ... 몸과 촉)의 결박들로서 전향(門)이 일어나고 동시에 마노意와 법의 결박이라는 전향이 일어나므로 여섯 감각장소(ayatana)에 대한 법들의 인식과정이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선정을 개발하지않으면 그 mana뜻을 알지못해서 意門에 갖지 않고 위 본문에 '마음'처럼 오류로 해석합니다
M43 “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nānāvisayāni nānāgocarāni,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i,
seyyathidaṃ — cakkhundriyaṃ, sotindriyaṃ, ghānindriyaṃ, jivhindriyaṃ, kāyindriyaṃ.
imesaṃ kho, āvuso, pañcannaṃ indriyānaṃ nānāvisayānaṃ nānāgocarānaṃ,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ānaṃ,
mano paṭisaraṇaṃ, mano c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ti.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인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시여, 이들 다섯 감각기능이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고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는데
마노[意]가 그들 각자의 의지처이고, 마노가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다."
오근은 마노에서 법으로 경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