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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한수면 연안이씨-명암가문의 가계와 인물
<고문서집성 55> -제천 한수면 연안이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 명암가문의 가계와 인물
명암가문이 관동파(館洞派; 大宗)‧청호공파(靑湖公派; 小宗)로부터 독자적인 가계를 형성한 것은 李海朝 때였다. 이해조는 1681년(숙종 8) 사마시에 합격한 다음에 출사하여 빙고별제, 조운 판관, 龍宮‧永同현감, 전주판관 등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고,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시관이었던 이세백은 아들 이의현에게 이해조의 재능을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로 발전하였고, 이해조 사후에는 이의현이 묘지명을 찬하기까지 했다.
문과 합격 이전에도 이해조의 詩才는 익히 알려져 있었는데, 한국한시사의 거장으로 <鳴巖集>을 산정하고 서문까지 찬한 김창흡도 그의 시문을 극구 칭찬했을 정도였다.
이해조가 문과에 응시한 것은 활동상의 제약에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의 제도에 따르면, 아무리 문재가 있어도 문과에 합격하지 않으면 문신으로 대접받을 수 없었고, 한림 또는 홍문관에서 근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1702년 이후로는 그러한 제약에 구애되지 않고 사간원 정언‧사헌부지평‧이조정랑‧시강원문학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그는 문신이라면 누구나 선망할 독서당(호당)에 선발되었고, 훙문관의 부교리‧부수찬을 거쳐 부제학에까지 올랐다. 최종관직은 전라도 관찰사였는데, 1711년 (숙종 37)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숙종은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는데, 지금도 賜祭文의 원본이 남아있다.
그는 김창흡‧이희조‧조상우‧이의현‧김숭겸‧홍수주‧서종태‧임방‧김유‧정호‧김창집‧김창업‧김창즙‧이택‧이재‧조유수‧이관명‧이건명‧민진후 등 노론 기호학파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김창흡‧이의현‧이희조(종형)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였다.
전언에 따르면, 명암가문은 이해조 대부터 黃橋 부근에 京第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관동에서 황교로 분가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여기에 대한 문헌기록이 부족하여 더 이상의 추정은 어렵지만 관동에서 멀지 않은 서울 모처에 거주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한편 이해조는 서울에 기반을 두면서도 선영이 있던 용인의 文秀山이나 廣州 五浦面 일대에 자주 우건한 것으로 보인다. <명암집>에 보이는 {水村新屋}은 문수산에 마련한 가옥이며, 그의 아호 명암은 광주 文暎山 아래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문영산 역시 연안이씨의 선영이 있던 곳으로 문수산과 더불어 주된 退官處의 하나였으며 사후에는 여기에 안장되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문수산‧문영산에는 이해조의 田庄‧別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손들이 이 일대의 토지를 주로 매득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해조는 두 부인 남원윤씨‧파평윤씨와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두었다. 초배의 처부 尹以健은 三學士로 유명한 尹集의 조카였고, 후배 파평윤씨 가문 역시 노론명가의 하나였다.
장자 徵臣은 문과출신은 아니었지만 경학에 박통하여 學薦으로 선공감감역‧제용감‧사옹원주부‧의금부도사 등을 지냈다. 이처럼 그는 고관을 지내지는 못했지만 학행이 있었고, 영조조에 영의정을 지낸 金若魯가 그의 매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적인 지위는 매우 높았다. 그는 동래정씨 鄭受先의 딸과 혼인하여 혼반도 매우 견고하였는데, 정수선은 현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정태화의 종손이다.
징신은 동래정씨와의 사이에서 器輔‧珪輔 등 4남 2녀를 두었다. 기보는 벼슬은 없었지만 효종의 국구 張維가문에 장가를 들 정도로 지위가 탄탄하였고, 규보는 1735년(영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황주목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는 학행이 있어 문집(隱齋)을 남기기도 했다.
명암가문은 기보의아들 萬源 대부터 출계관계가 매우 잦아지게 된다. 기보는 아들이 없어 아우 규보의 장자 만원을 양자로 들였는데, 외아들 만원을 출계시킨 규보는 熙輔의 아들 祥源을 양자로 들인 것이다. 만원의 초명은 弘源으로 본서에 수록된 고문서에서는 홍원‧만원이 혼칭되고 있는 바 연구자들은 이 점을 유의하기 바란다.
이만원은 1768년(영조 45)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사옹원봉사, 사재감직장, 장악원주부, 중부 도사, 사헌부감찰, 형조정랑, 직산현감, 의성현령, 순창군수, 무안현감, 공주판관 등을 거쳐 벼슬이 남원도호부사에 이르렀다. 이해조 이후로는 가장 화려한 환력이었다.
이만원은 관력에 더하여 가계경영에도 주력하였는데 본서에도 이만원 관련 문서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가계경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토지의 매득이다. 본서에 수록한 명문에 따르면, 이만원은 용인 모현, 양주 남면‧동면 등지에 다수의 토지와 紫場을 매득한 것으로 나타난다. 용인모현의 草下里는 문수산 일대로서 일찍부터 관동파의 선영이 조성된 지역으로 이해조가 퇴관‧은거한 곳이기도 하다. 양주 동면의 海等村(지금의 서울시 창동일대)과 남면의 接洞은 이회림의 산소가 있는 우이동과 멀지 않은 지역이다. 명암가문에 1713년(숙종 39)에 작성된 楊州牧 海等村 堤堰關聯문서가 소장된 것으로 보아 해등촌은 이해조‧이징신 대에 일정한 기반이 조성되어 있었고, 이만원이 이를 확충한 것으로 파악된다.
만원은 청주한씨와의 사이에서 5남 1녀를 두어 자손이 매우 번창하였다. 장자 철수는 1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지만 차자 현수는 학행이 있었고, 3자 인수는 사마시에 입격했고 4자 준수는 사마를 거쳐 창녕‧안산군수 등의 관직을 지냈다. 특히 준수는 개화사상가로 알려져 있는 박규수(좌의정)의 장인이었다.
공교롭게도 器輔를 계후한 상원이 아들을 두지 못하자 이번에는 만원의 차자 賢秀가 상원의 아들로 출계하게 되었다. 계통상 이철수와 이현수는 재종간이었지만 혈연적으로는 형제사이가 됨으로써 두 가계는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다. 현재 명암종가에 賢秀->知愚->觀益으로 이어지는 가계의 문서가 다수 소장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여겨진다.
이런 흐름 속에서 명암가문은 이철수의 아들 謙愚 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변화란 다름 아닌 거주지의 이동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명암가문은 서울의 관동‧황교에 세거해 왔으며, 용인‧광주‧양주 등지의 田庄은 일시적인 寓居地일 뿐이었다. 결국 이 가문은 조선초기 이래로 서울‧경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 京華士族이었던 것이다.
겸우의 생가는 관동파가 아니었다. 겸우는 이석형의 손자 대호군 효장의 후손이었으니, 관동파의 ‘愚’자 항렬과는 22촌간이었다. 현재로서는 이철수가 이렇게 먼 촌수의 겸우를 양자로 들인 이유는 미상이다.
이철수의 양자가 된 겸우는 서울서 살지 않고 충주에 정착하였다. 사실 그는 생가의 연고가 충주에 있었고, 양자가 된 이후에도 서울로 이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경우는 양자의 거주지(충주)를 따라 명암종가가 이동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용인‧ 광주‧양주 일대의 기반을 처분한 것은 아니었다. 고문서에 따르면, 용인‧광주‧양주지역의 선영‧ 토지에 대해서는 한말까지도 기록이 이어지고 있고, 서울집도 이구영 선생의 先考(徽菴) 대에 처분했다고 한다.
고문서(明文)에 따르면, 이겸우의 거주지는 충주 乷味面 公耳谷 이대로 파악된다. 이런 정황은 1816‧1823‧1836년에 작성된 토지매매 명문과 현존하는 유물(암수바위‧四老亭碑) 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겸우는 公耳谷에서 그리 오래 산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공이곡은 경치는 좋았으나 골짜기가 깊어 자손만대를 기약할 세거지로는 부적격하다는 판단에서 1842년(현종 7) 경에는 세아들을 데리고 청서(淸風 遠西面)의 노촌(北老里)으로 이거했기 때문이다. 이거 당시 공이곡에는 장자 瑗翼(후일 及愚에게로 출계함)만 체류하다가 그 역시 1850년(철종 1)에 노촌 으로 이주하였다.
사실 이겸우는 1827년(순조 27)부터 원서면의 노탄원 일대에 토지를 구입하는 등 일찍부터 이거 계획이 있었고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842년에 이거가 실행된 것이다.
하지만 살미면 일대의 전장은 청풍 이거 후에도 그대로 잔존하였고, 심지어 이거 이후에 명암가문에서는 살미면의 행화동 내화동(진촌) 등지에다 토지를 계속적으로 증식시켜 갔다.
이런 바탕위에서 李玟翼 4형제는 문장과 학식을 바탕으로 청풍 일대의 유풍을 주도해 나갔다. 이를 형젠즌 복로리로 이주한 이후 각기 老川(瑗翼), 老岡(玟翼), 老灘(瑾翼), 老湖(璜翼)로 자호하여 세칭 四老로 불렸으며, 1853년 경에는 자신들의 생장지인 공기곡의 암수바위(자웅암) 부근에 四老亭을 건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풍으로 이거한 후에도 별다른 사환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玟翼->元宰->冑承으로 이어지는 종손계열에서는 단 한명도 사환한 사람이 없었고, 황익의 아들 직재(생부 元宰)만 內部主事를 지냈을 뿐이다. 하지만 원재는 청풍일대에서 상당수의 문인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사환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악식은 꾸준히 유지되었다.
그러나 명암가문은 이원재의 두 아들 冑承‧肇承에 의해 민족사에 혁혁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의병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충주‧제천 일대는 위정척사운동의 거두 화서 이항로의 제자였던 김평묵‧유중교‧류인석을 중심으로 의병항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1896년(건양 1)에는 제천을 거점으로하는 유인석의 湖左倡義軍이 충주를 점령하는 쾌거를 세우기도 했다. 이 전투는 이른바 을미의병이 거둔 최대의 전과로 꿉힌다.
유중교의 문인이었던 이주승, 유중교‧유인석의 문인이었던 이조승 형제 역시 호좌창의군에 참여하여 대일항쟁의 선봉에 섰다. 이주승은 조모와 부모를 봉양하고 집안을 건사하기 위해 몸소 의진에 투신하지는 못했지만 자금을 조달‧제공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의병활동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이조승은 약관을 겨우 넘긴 2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895년부터는 유인석의 호좌창의군의 종사관으로 활동하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西行日記>라는 의병사연구의 보고를 남기게 되는데, 현재 이 자료는 <호서의병사적>(이구영 편역)에 수록(원문‧번역)되어 있다. 이 외에도 명암종가에는 이주승‧이조승이 의병진과 왕래한 방대한 분량의 간찰이 소장되어 있다. 이 간찰 역시 호서의병연구의 일차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관련 학자들의 관심어린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이조승의 이런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1900년 28세의 나이로 사망함으로써 의병활동도 여기서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으니 국가적인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형 이주승은 의병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제시대에는 요주의인물로 지목되어 사실상 칩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에도 지우들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사회적인 활동을 이어나갔고, 학문과 종사에 힘쓰며 명암종손으로서의 인격과 품위를 유지해 나갔다.
그의 장자가 바로 현종손 李九榮 선생이다. 선생은 명암 이해조의 9세 종손으로서 어릴 적 부터 전통학문을 익힌 한학자인 동시에 신학문도 수학한 엘리트이기도 하다.
본서에서도 수록하였지만 1940~41년 사이에 아버지(徽菴)와 종형에게 보낸 서간에서 선생의 선비로서의 소양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선생은 신구를 겸비한 학자라 할 수 있으며, 지금도 종로구 낙원동에서 이문학회를 운영하며 한문의 올바른 쓰임과 의병정신의 선양에 노력하고 있다. 선생의 字는 成一, 號는 老村이다. 요사이 노환이 심하시기는 하지만 최근 필자가 뵌 선생은 82세의 노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욕적으로 활동하고 계셨으며, 용모에서는 아정함과 꼿꼿함이 함께 풍겼다. 마지막으로 선대의 珍藏文獻을 본원에 대여하여 자료집으로 발간하도록 협조해 주신 선생의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한편 본서에는 명암종손계열이 아닌 李知愚계열의 문서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이들 자료가 종가에 소장된 경위는 자세하지 않으나 일제시대 이후에 후손 누군가가 종가에 위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지우는 李珪輔의 증손으로 옥천출신이다. 혈통상으로는 이만원의 생가 종손에 해당하나 양자로 들어온 상원이 무후하자 만원의 아들 현수가 계후하였으나 역시 무후하였다. 이에 상원의 생가쪽 종손이었던 지우가 현수를 계후하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지우의 생가는 옥천 등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문과방목에 따르면, 지우의 차자로서 1858년(철종 9) 문과에 합격한 泰翼의 거주지도 옥천으로 나타난다.
지우는 효행이 있어 1965년에 효자정문이 내렸고, 장자 관익은 문행이 있어 다수의 시문이 전하고 있다. 차자 태익은 문과에 합격하여 응교를 지냈으나 40세에 사망하여 고관에 오르지는 못했다. 다만 아들 絅宰가 사마시에 합격하는 등 당시로서는 드물게 과거가 이어진 경우였다. 이들 가계와 관련된 주요 자료는 1858년(철종 9) 이태익의 문과 합격시를 기념한 축하시첩인 <榮到試帖>, 1865년 李知愚의 효자정문 하사에 즈음하여 작성된 <延旌試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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