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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는 2017년 ‘콜센터 현장실습생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영화는 뜻밖의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정주리 감독은 “그 한 장면을 위해 영화 전체를 만든 거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도희와 소희. 정주리 감독이 연출한 두 편의 장편영화 주인공 이름은 둘 다 ‘희’로 끝난다. 〈도희야〉의 도희는 학대받는 소녀다. 감독의 중학교 때 친구 이름에서 따왔다. 〈다음 소희〉의 소희는 권여선 작가의 소설 ‘손톱’에서 가져왔다. 판매원으로 일하며 받은 월급에서 월세와 대출금을 제하고 남은 18만원으로 한 달을 사는 스물한 살 여성이다. 소설을 읽고 감흥을 받아 영화에 그 이름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소희〉의 소희도 돈을 번다. 고등학생이지만 콜센터에서 일한다. 더 이상 ‘다음의 소희’가 없길 바라며 쓰고 찍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정주리 감독을 만났다.
〈다음 소희〉는 2017년 전주에서 일어난 ‘콜센터 현장실습생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전반부는 소희가 현장실습에 나가며 겪게 되는 일을 다루고, 중반부터는 소희의 죽음을 조사하는 형사 유진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기업 취업을 ‘뚫었다’며 고무된 교사의 말을 듣고 소희도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하지만 실제로는 하청업체인 데다 서비스 해지를 방어하는 ‘고강도’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첫날부터 ‘고객님’의 욕설과 마주한 소희는 언어폭력과 성희롱이 만연한 이곳에 방치된다. 방어막이 되어주던 팀장이 자살한 뒤 소희도 변해간다.
2020년 정주리 감독은 제작사로부터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시나리오와 연출 작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도희야〉 이후 3년을 들여 작업한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투자가 잘 안 됐고, 그걸 완전히 단념하는 데 3년이 더 필요했다. 그사이 영화판에서 ‘잊혀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제안을 받고 사건을 찾아보니 2017년 초, 현장실습 도중 자살한 특성화고 학생이 있었다. 그때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였고 감독 본인도 온 신경이 거기에 가 있어 이런 일이 일어난 사실을 몰랐다.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고등학생이 왜 이런 데서 일할까, 학교는 왜 이런 곳에 아이들을 보낼까?
제작사는 규모 있는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는 힘들지만 꼭 해보고 싶다, 제대로 된 이야기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작은 규모로라도 만들어보자며 전적으로 힘을 실어주었고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이 사건 이후에도 현장실습에 나간 특성화고 학생들이 제주도 생수공장에서, 감독의 고향이기도 한 여수의 요트업체에서 죽었다. 왜 사고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해야겠다는 결심이 확고하게 섰다.
완성한 시나리오를 〈도희야〉에서 함께 작업했던 배우 배두나에게 보냈다. 통 연락이 없어 감독이 이민 간 줄 알았던 배우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반했다. 첫 작품을 결정할 때와 마찬가지였다. 〈다음 소희〉 시사회에서 배두나 배우는 말했다. “감독이 다루려는 소재와 주제 의식에 다시 한번 반했다. 무슨 역을 맡기든 서포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편영화 첫 주연을 맡은 김시은 배우가 소희 역을 맡고, 배두나 배우가 소희의 흔적을 좇는 형사 유진을 연기했다.
첫 장면에서 운동화를 신고 춤 연습을 하던 소희는 영화 중반부,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저수지 근처를 맴돈다. 한겨울, 맨발이 인상적이다. ‘가맥집’에서 맥주를 시켜 컵에 따르는데, 밖에서 한줄기 빛이 들어와 시린 발을 비춘다. 그 빛을 따라 저수지로 올라간 소희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실제 인물이 맨발로 집을 나섰다는 사실이 감독에게 크게 다가왔다. “배경이 추운 겨울이고 전체적으로 모노톤인데 그 장면에선 밝은 빛이 들어온다. 빛 한 줄기가 발에 닿을 때 영화적으로는 따뜻한 순간이지만 이 친구의 찬 발에 닿으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그 순간만이라도 위로가 될까, 아니면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할까. 해 저물기 직전의 마지막 빛이었다.”
유진을 형사로 구상한 이유
영화에서 유진은 이렇게 말한다. “힘든 일을 하고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을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을 안 써. 그러면 더 혼자가 돼.” 감독은 평소 직접적인 메시지를 꺼리는 편이다. 함축적인 대사를 선호한다. “그래도 그 대사는 왜 아이들이 고립되어가는지, 유진이 얼핏 이해하는 모습을 담고 싶어서 썼다.” 유진은 학교, 콜센터, 교육청을 찾아간다. 콜센터 책임자는 소희의 행실을 문제 삼고 취업률에 집착하던 학교는 학교도 피해자라고 항변한다. 교육청에서 들은 말은 “적당히 해라”였다. 절망감을 느낀 유진은 소희가 마지막으로 들렀던 가게에 앉아 맥주를 주문한다. 그때 다시 빛이 찾아온다. 그 순간만은 유진이 소희의 존재를 느꼈을 것 같다고 감독은 말했다.
사건 자체는 가급적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했다. 월급명세서에 적힌 액수가 대표적이다. 다만 창작자로서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해 실제 콜센터를 찾거나, 유가족을 만나지는 않았다. 앞서 나온 여러 기사와 자료를 바탕으로 상상했다. 유진을 형사로 구상한 이유는 있다. “사실 (실제 사건에서) 경찰이 한 일이 없다. 단순 자살로 마무리했는데 안 그랬으면 좋았을 거라는 불만도 담겼다.”
정 감독은 촬영을 준비할 때 사무실로 가는 지하철에서 이승환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영화 속 장면처럼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자주 울컥했다.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인 것 같았는데 이야기를 해나가다 보니 나 역시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한 사회의 일원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주 52시간 노동이 도입돼 8년 전 첫 영화를 찍을 때와 제작 환경이 굉장히 달라졌더라. 돌아보니 첫 영화 때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 배우들이 소희였다.”
밤마다 비디오테이프를 쌓아놓고 보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정주리 감독은 대학에서 영상과 영화를 공부했다. 두 편의 연출작 모두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국내외 다양한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했다. 공통적으로 약자에 대한 시선이 읽힌다.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화를 만드는 일밖에 없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인물이 느끼는 감정, 영화가 주는 감정은 굉장히 현실적이어야 한다. 도희와 소희도, 그 인물이 느꼈을 감정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약자나 피해자라서가 아니라 그런 게 하나의 조건이 되어 결국 인물이 느꼈을 감정, 필설로 설명하기 힘든 그런 바를 영화로 표현하고, 같이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영화를 만드는 동력이 되는 것 같다.” 어쩐지 결말이 다 정해진 것 같아도 〈다음 소희〉는 뜻밖의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 한 장면을 위해 영화 전체를 만든 거나 다름없다”라고 정주리 감독은 말했다.
첫댓글 좋은 영화... 얼른 보자...
개봉날에 봤었었는데 많이 봤으면 좋겠어
보다가 너무 속상해서 울었어
엄청 울었어
어제 보고 왔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