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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에 패한 이스라엘
삼상 4:1-11
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삼상 4:1-11 /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벌] 그 당시에 블레셋 족속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왔다. 그러자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 족속과 싸우기 위하여 국경 지역으로 나아가 에벤에셀에 진을 쳤다. 블레셋 족속은 바로 맞은편의 아벡에 진을 치고 있었다. 2) 블레셋편에서 열을 지어 공격해 오자 이스라엘 백성도 이에 맞섬으로써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전사자가 무려 4천 명이나 되었다. 3) 이스라엘의 패잔병들이 진지로 돌아오자 장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렇게 상의하였다. `여호와께서 왜 우리 편이 이토록 크게 패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블레셋 족속이 어떻게 우리를 이길 수 있었습니까?'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법궤를 가져다가 우리의 영내에 둡시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셔서 적군을 쳐부수어 주실 것입니다!' 4)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의 성소로 사람들을 보내 법궤를 모셔왔는데, 그 법궤 위에는 의자 모양으로 새겨 놓은 그룹이라는 천사들이 있었다. 그 의자는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를 지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앉으시는 자리였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항상 법궤를 모시는 제사장으로 그 곁에 함께 하고 있었다. 5) 여호와의 법궤가 진지에 도착하자 이스라엘 군인들은 땅이 울릴 정도로 환호성을 질렀다. 6) 그 엄청난 함성은 블레셋 족속의 진지에까지 울려 퍼졌다. 놀란 그들은 서로 의아해서 물어 보았다. `히브리 족속의 진지에서 저런 함성이 들리다니 웬일일까?' 그러다가 여호와의 법궤가 이스라엘의 진지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7)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이스라엘의 진지에 하나님이 들어오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망하였다! 우리는 일찍이 신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8)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저 무서운 신의 권세에서 건져내 줄 수 있겠는가? 그 신은 바로 애굽 사람들에게 온갖 재앙과 전염병을 퍼부었던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9) 블레셋 군인들이 이렇게 수군대며 떨고 있자 그들의 사령관이 이렇게 군인들을 독려하였다. `너희 블레셋 용사들아,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너희는 용맹을 떨쳐 사나이답게 싸우기만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히브리 족속이 지금까지 너희의 노예가 되어 강제 노동에 시달렸던 것처럼, 이제는 너희가 그들의 노예가 되어 강제 노동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결전을 다짐하며 용맹스럽게 싸워 너희가 누군가를 보여주어라!' 10) 과연 블레셋 군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공격하자 이스라엘이 크게 패하여 군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저마다 집으로 도주하였다. 싸움이 끝난 벌판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시체가 3만이나 뒹굴고 있었다. 11) 이스라엘은 이 싸움에서 블레셋 족속에게 법궤를 빼앗겼다. 제사장으로 법궤를 모시고 참전하였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날 전사하였다.
이스라엘이 승리를 위해 언약궤를 진영에 모셨지만 블레셋 군대에게 더 큰 패배를 당합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패배(1-2) 사무엘의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자 온 이스라엘이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아직 미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에게 묻지도 않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곧 여호와의 전쟁이었습니다. 참전 여부를 결정하는 분도 여호와이시며, 승리를 가져오실 분도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께 묻지 않은 결과 사천 명 가량의 군인들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언약궤와 함께(3-4)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전쟁에서 진 이유를 분석하기 위해 토론을 벌였으나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궤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에서 패배하였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진영으로 모셔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궤 곁에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과연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와의 궤 곁에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진노케 한 죄악의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한 아무리 여호와의 궤를 모셔온들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사 59:2).
두 번째 패배(5-11)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의 진영에 들어온 순간 표면적으로 분위기가 역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기는 높아졌고 블레셋 사람들의 사기는 떨어졌습니다. 여호와의 명성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블레셋에서도 높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들답게 여호와의 궤를 여호와와 동일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들도 많은 신들 가운데 일부라고 생각하였고, 자기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이 운 좋게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전의를 불태웠습니다. 결과는 블레셋의 바람대로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보병 삼만 명이 죽었고, 여호와의 궤는 빼앗겼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는 죽지 않으셨고, 또한 죽으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곧 여호와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여호와의 궤를 우상처럼 숭배하였고, 그 여호와의 궤가 상징하는 여호와에게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패배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징물이 아니며 그것이 가리키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적 용 : 교회 안에만 있다고 주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진실한 회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당신은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변화와 혁신은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많이 보고 듣고 생각을 한다고 해도 결국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어떤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어떻게 실행 할 것인가 는 일을 이루어 나가는 키가 됩니다. 구체적인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실행을 용이하게 합니다. 먼저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구한 후 아이디어를 찾아야겠습니다. 시작 단계에서 멈춰버린 일들은 아마 어려움 앞에 포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호크마 주석
=====4:1
사무엘의 말이 전파되니라 - 이 말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대언자(선지자)로서 그 권위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이끌어 나갈 사무엘의 모습을 부각시켜 주는 3장 하반부(19-21절)에 연결되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실제로 벌겟역(the Vulgate)이나 수리아역(the Peshitta)에서는 이 말을 전장에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혹자들(Keil, Gerlach)은 이 말을 블레셋 전투를 다루고 있는 본장(4장)과 연관시켜, 곧 사무엘이 블레셋 전투를 위해 이스라엘 군사를 소집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아스라엘이 사사요 대제사장인 엘리의 주관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타당치 않다(Pulpit Commentary). 아울러, 만일 사무엘의 소집하에 출전(出戰)했다년 이후 전쟁의 대패(大敗) 책임도 분명 사무엘에게 돌아갔을 것이고, 따라서 사무엘의 권위도 형편없이 추락되었을 터인데, 이후 전개되는 상황에서 그러한 점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엘리 사후 사무엘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이 모든 점은 위의 어구가 사무엘의 선지자 직의 권위를 요약 정리하는 말로서, 곧 3장의 결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 여기의 '블레셋 사람'(the Philistines)은 본래 해양 생활을 하던 민족으로서, B.C. 13세기 말에 헬라 본토인들의 압력에 의하여 자신들의 본거지 에게 해(海) 지역을 떠나 애굽으로 침입해 들어갔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애굽 왕 라암세스3세(Ramses )에게 쫓겨 다시 가나안 땅의 지중해 쪽 해안으로 건너와 거기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Burrows, What means these stones, p. 277). 한편 아모스 9:7은 그들이 갑돌(그레데 섬) 지역에서 왔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이 B.C. 2000년 경의 아브라함 시대에 성경의 무대에 처음 등장할 때에는(창 20:1, 2;26:1), 그레데 섬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그 이후 블레셋 족속은 특히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는 가나안 땅의 남서쪽을 완전히 장악하여(삿 3:3) 끊임 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다(삿 13:1-16:31). 그런데 당시 이들은 높은 수준의 문명을 소유했었다. 즉 이들은 가나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제철기술을 보유하여(13:19-22;17:7), 이 기술을 기반으로 잘 무장된 강력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다른 금속에 대한 제련 기술 및 공예 기술도 뛰어
나 패했던 곳으로(2,11절),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한 곳이며, 또한 법궤를 빼앗긴 곳이다. 오늘날 그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야파(Jaffa) 북동쪽의 '마이델 야바'(Majdel Yaba)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에벤에셀'은 후일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쳐부수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돌에다 사무엘이 명명한 '미스바'와 '센' 사이의 '에벤에셀'(7:12)과는 다른 곳인 것 같다.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 여기서 '아벡'(Aphek)은 이스라엘이 진 쳤던 에벤에셀 서쪽 약 3.2km 지점인 아르곤 강의 근원지 근처로서, 샤론 평야의 한 지점이었다(29:1). 그런데 이곳은 원래 가나안 족속들의 아성(牙城)이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블레셋 족속들이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얼마나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블레셋 족속들이 이곳에 진(陣)을 친 이유는 자신들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취한 이스라엘에 보복하기 위함이었다.
=====4: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 여기서 '쳤더니'(* , 라함)는 '싸우다', '삼키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마음의 배수진을 치고 마치 삼킬듯이 결사적으로 싸웠음을 보여 준다.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 '각기 장막으로 도망가다'라는 표현은 전쟁에서 처참하게 완전한 패배를 당하여 뿔뿔이 자신들의 집으로 흩어져 숨는 모습을 묘사할 때 성경에서 자주 사용된 표현이다(13:2;삿 20:8;삼하 18:17;19:8;20:1;왕상 12:16). 따라서 이와 같은 양상은 들에서 마주쳐 싸웠던 첫번째의 싸움(2절)보다 훨씬 처참한 패배였음을 시사한다. 이스라엘 보병 -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기병이자 전차병없이 보영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R. Payne Smith). 엎드러진 자가 삼만 - 이같은 전사자(戰死者)의 숫자는 이스라엘 한 지파의 장정 숫자와 거의 비슷하였다(민 26장). 따라서 이 처참한 패전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이 받은 심리적 충격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한편 발굴 탐사에 따르면, 이때 블레셋 사람들은 이 아벡(Aphek) 전투에서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 본토로 쳐들어 갔고, 심지어 실로(Shiloh)의 성소까지도 파괴한 듯 하다(렘 7:12;26:6). 뿐만 아니라 이때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 처음으로 지역 수비대를 상주케 하였고(10:5;13:3), 아울러 자신들의 제철 산업을 독점적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소유했던 제철 공장을 파괴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제철 산업에 전적 의존토록 만들었던 것같다(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특히 20세기 초 덴마크 발굴 탐사대에 의하여 조사된 실로(Shiloh) 유적지는 B.C. 11세기 어간에 심하게 파괴된 흔적이 드러났다고 한다(Albright).
=====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 하나님의 시내 산 계시에 의존하여 모세가 법궤를 제작한 이후로(출 25:10-22;37:1-9), 그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생각케 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확인시켜 주는 지극히 거룩한 상징물이었다. 그러므로 금번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 족속들에게 법궤를 탈취당한 사건은 이스라엘 성막사에 있어서 극히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여하튼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긴 일은 상징(象徵)을 마치 본질(本質)인 양 생각했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징계였던 것이다. 아울러 법궤 탈취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일깨워 주셨다. (1) 전능하사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여하한 상징물, 또는 공간적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2) 하나님의 임재(臨在)가 떠난 법궤는 아무 쓸모 없는 단순한 궤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3) 범죄로 인해 언약이 파기된 곳에서는 그 어떠한 의식(儀式)을 치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전혀 방패와 도움이 되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엘리의 두 아들 죽임을 당하였더라 - 이같은 사실은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이자, 또한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적 예언의 준엄한 실제적 성취였다(2:33,34).
< 설 교 >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가
삼상 4:1-11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 있는 3:19-21과 이어지는 오늘 본문의 첫 문장을 함께 읽어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잠자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을 통해 제사장이며 사사이면서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 엘리의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것임이 예고되었고, 반면에 사무엘은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도록 세우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은 주전 12세기 전반기에 그리스의 섬들로부터 이스라엘의 남서쪽 해안지대에 이주해 와서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과 골칫거리가 된 족속입니다. 그들은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군사적으로 잘 조직되었으며 힘이 넘쳤고 아주 호전적인 민족으로서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한지 반세기만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억압할 수 있을 만큼 강성해졌던 것입니다. 이들과 싸우기 위해서 다시 이스라엘은 나가서 에벤에셀 곁에 진을 쳤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이란 곳에 진을 쳤습니다(본문 1절). 블레셋 사람들이 먼저 이스라엘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했고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스라엘이 사천 명 가량의 전사자를 내며 블레셋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본문 2절). 패전한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했습니다(본문 3절). 그래서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거기 있던 하나님의 궤를 에벤에셀 곁에 있는 진영으로 가져왔습니다(본문 4절).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은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환호했습니다(본문 5절). 그 환호성은 블레셋 진영에까지 들렸으며 블레셋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영문을 몰라 서로 묻기를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온 사실을 알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하기를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했습니다(본문 6-8절). 그런데 이렇게 두려움에 떨던 블레셋 사람들은 놀랍게도 이스라엘 침공을 포기하고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죽기 살기로 싸우기로 작정을 하고는 군사들을 독려했습니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본문 9절). 이스라엘을 자기들 밑에 굴복시키던 상황이 반전되어 자기들이 이스라엘에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반작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공격을 했고 이스라엘은 패하여 뿔뿔이 흩어져 도망했으며 삼만 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본문 10절).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욕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궤를 이방 블레셋 사람의 손에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본문 11절).
이 사실은 이스라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 전쟁을 잃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한 시대가 그 막을 내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예고하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였습니다. 바로 엘리의 가문이 일시에 몰락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의 손에 넘어갈 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 악한 제사장 형제의 죽음은 줄줄이 온 가족의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대패했으며 하나님의 궤를 지키던 두 아들 제사장들이 죽고 그 궤는 블레셋 사람의 손에 빼앗겼다는 소식은 그날로 엘리에게 전해졌습니다(삼상4:12-13). 엘리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앉아있던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삼상4:18). 엘리 가문의 비극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죽은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때가 가까웠었는데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들은 그녀는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아들을 낳고는 죽고 말았습니다(삼상4:19-20). 그녀가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녀에게 "아들을 낳았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용기를 주려했으나 그녀는 그 사실에 대답도 하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은 채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는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부르게 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삼상4:20-21). 그녀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지은 것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단지 자기 가문에서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엘리의 가문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갔음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한 그녀 자신의 마지막 말을 통해서 분명한 것입니다(삼상4:22). 이렇게 엘리 가문의 몰락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잃은 이스라엘의 한 시대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사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 앞에 서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가지고서도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승리나 성공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족속이 하나님의 궤의 초자연적인 위력을 다 알면서도 인간적인 전의를 불태우고 맹렬히 싸워서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놓고는 승리를 확신하던 하나님의 백성을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믿음이 없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궤는 그저 하나의 나무상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어떤 마술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할 뿐이지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궤를 갖고 있다고 해서 곧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언약궤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셔서 안전과 승리와 만사형통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나 그들이 언약에 불성실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실 것임을 알게 하는 증거의 궤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3-5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먼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한 말을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그들의 패배의 원인을 자기들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실수나 부주의로 여긴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궤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지 않은 것뿐이었습니다. 그것만 있다면 자기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이 말 속에서도 그들의 잘못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여쭙지 않고 스스로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자체가 자기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도 그가 역사하실 자리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들에게서 시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진정한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실이 4절에서 나타납니다: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한 데에 주목하게 됩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신분이 제사장이었으면서도 온 백성이 다 아는 망나니들이었습니다. 언약궤를 갖다놓았으면 뭘 합니까? 거기에 함께하는 자들이 언약궤와 함께할 자격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언약궤를 가져다 놓는 변화는 있었지만 언약궤와 함께하는 자들에게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시정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쇠락한 이스라엘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변화로만 승리를 기대한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행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궤는 하나의 궤짝에 불과한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몰락하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들은 많이 있습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제일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그 많은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나라이고 유교의 나라인 줄로 알고 온 외국인들의 눈에 교회의 십자가 말고 다른 종교의 상징물들은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어디에나 있고 즐비하게 세워진 교회건물 위에 걸린 십자가는 우리나라를 강력한 기독교국가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물들도 많습니다. 신학교가 그렇게 많은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신학지망생이 그렇게 많으며 신학교입시경쟁률이 그렇게 센 나라도 지구상에 없습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위한 준비학원이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열 교회 중 적어도 대여섯 교회는 한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 제2의 선교대국이고 가장 활발한 성서공회가 있는 나라입니다. 국토의 면적이나 인구의 수나 경제력을 고려해볼 때에 우리나라는 사실상 제1의 선교대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어디냐고 말한다면 단연 한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들을 갖고 있는 이 나라의 요즘 형편이 어떻습니까? 교회가 사회로부터 얼마나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오히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 서있는 그 많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들이 힘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반기독교적인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옥죄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 앞에서 소리 높여 외치며 대항해보지만 반기독교세력들은 오히려 더욱 맹렬히 달려들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개정 사학법을 위시해서 자유로운 신앙교육을 봉쇄하고 교회의 선교사역을 억압하는 조치들을 취하며 갈수록 교회에 대하여 적대감을 드러내는 권력 앞에서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망하게 내버려두시겠느냐?"는 식의 안이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몇 번씩 몰락하고 멸망하게 하신 바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언약궤를 갖고 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때가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가득 찬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들이 우리에게도 아무 쓸모가 없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높이 단 교회는 많으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온전히 응답하는 믿음이 함께하고 있는지를 냉정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으며 낳은 아들에게 붙여준 이름 [이가봇]의 뜻은 "영광이 없다" 또는 "영광이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외치기는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하는지를 곰곰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가봇]이 오늘날 우리에게 붙여지는 이름은 아닌지, 한국교회가 몰락하는 엘리의 가문과 같은 처지에 이른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들이 아닌지를 냉철히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언약궤를 빼앗긴 까닭
삼상 4:5~11, 행전 8:14-24 / 안효관목사
유태인인 미국의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만든 영화 가운데 '인디아나 존스'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시리즈로 나온 영화인데, 제1편은 <레이더스-잃어버린 성궤(Raiders of the Lost Ark, 1981년 작품)>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성궤는 성경의 표현으로 하면 언약궤를 말합니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가르치는 인디아나 존스 박사는 정부로부터 성경에 나오는 성궤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이 성궤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 있는 것인데,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에 보관해 오던 중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980년 경에 예루살렘을 침략한 이집트의 시셉 왕이 그것을 '타니스'라는 곳으로 옮겨 '영혼의 우물'이라고 불리우는 비밀의 방 속에 감추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타니스'라는 지역이 어디인지, '영혼의 우물'이라고 불리우는 비밀의 방에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타니스'의 위치를 알아낸 것입니다. 독일의 나치군들이 성궤를 찾아내려 한 것은 그 성궤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성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무서운 힘이 지니고 있다고 믿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 성궤를 찾아내, 그 성궤를 앞세우고 나가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이루겠다는 속셈 때문에 성궤를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또한 어떻게 해서든지 그 성궤를 독일 나치군에게 빼앗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존스 박사를 그곳에 보내 성궤를 먼저 찾도록 한 것입니다. '타니스'에 도착한 존스 박사는 나치군과 사투를 벌인 끝에 '영혼의 우물'을 찾아내 성궤를 발굴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 성궤를 미국으로 가져오려고 하자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독일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고고학자 벨로크에게 성궤를 빼앗기고 존스 박사는 '영혼의 우물'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간신히 그곳을 탈출한 존스 박사는 성궤를 운송하는 트럭을 추격하여 그것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성궤를 미국으로 운반하기 위해서 화물선에 성궤를 싫고 미국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수함을 타고온 나치군에 의해서 다시금 성궤를 빼앗기게 되고 존스 박사도 사로잡혀 끌려갔습니다. 나치군은 한 동굴 안에서 그 성궤 개봉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길래 성궤가 그토록 무서운 힘을 가졌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존스 박사는 기둥에 묶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궤를 여는 순간 성궤 안에서 나온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서 그 동굴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성궤가 개봉될 때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고 있었던 존스 박사와 일행 한 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교훈해 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성궤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기적인 욕심의 도구로 사용하려 할 때에는 오히려 불행과 심판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도 바로 그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는 사사시대 말기였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습니다. '사사'가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대에는 엘리라고 하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엘리는 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사무엘상 4:1절 이하에 보면 첫날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패배했습니다. 그 날 이스라엘 군사 가운데 전장에서 죽임 당한 사람이 무려 4,000명이나 되었습니다. 대패(大敗)한 것입니다.
첫날 전쟁에서 대패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이길까를 궁리하다가 얻어낸 결론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로에 모셔놓았던 언약궤를 전장터로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언약궤를 가져오는데 주동 세력이 홉니와 비느하스였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언약궤가 홉니와 비느하스의 인도로 전장에 도착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러댔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언약궤가 전장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있는 곳에 도착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열광을 했던지 땅이 울릴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열광을 했습니까? 왜 땅이 울릴 정도로 그렇게 좋아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왔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7-8절)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그 광야에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궤를 중심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에도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물에 닿자 물이 갈라졌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도 맨 앞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었습니다. 그건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지금 이스라엘 진중에 이르렀다고 하니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더욱 힘을 내서 전쟁을 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먼저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우리 중에 있기 때문에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쟁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블레셋의 승리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전날 첫 번째 싸움에서는 이스라엘 군사가 4,000명이 죽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놓고 치룬 전쟁에서는 무려 3만명이나 죽고 말았습니다. 언약궤를 지키고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던 언약궤를 블레셋 군사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빼앗기고 두 아들마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의자 앉아 있다가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뒤로 자빠져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언약궤를 빼앗겼고, 시아버지와 남편까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통 가운데 해산을 합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어주고는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가봇'이라는 말은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갔다'는 뜻입니다.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면서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도 두려워할만큼 놀라운 능력과 신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전쟁터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참패를 당해야 했습니까? 전날에는 4,000명밖에 죽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르렀을 때에는 왜 3만 명이나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까?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언약궤가 없었을 때에는 3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하더라도, 언약궤가 이르렀을 때에는 승리를 하던지, 승리는 못한다 하더라도 사상자 수가 더 적어져야 하는게 이치적으로 맞는 것인데, 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쟁에서 져야 했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야만 했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언약궤까지 블레셋에게 빼앗겼고,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엘리도 죽임을 맞아야 했고, 며느리도 죽었으며, 그 아이의 이름까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나갔다'는 비통한 뜻을 가진 '이가봇'이라고 지어야만 했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이었기에 이런 엄청난 재앙이 연속해서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떤 경우에도 이기적인 욕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뿐만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전쟁터에까지 가지고 온 것은 신앙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전쟁에 이기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가져온 것뿐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2: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엘리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그들은 사사요 제사장이요, 당대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엘리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량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신앙이라곤 조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얼마나 망나니였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신앙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로 성소에 와서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가로채 갔습니다. 제물로 드린 고기를 삶을려고 하면, 사환을 시켜서 좋은 부분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사환을 시켜서 '우리 제사장은 삶은 고기보다 날 것을 더 좋아하니 빨리 내 놓으라'고 협박을 해서 제사를 드리기도 전에 제물을 빼앗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제사를 멸시하고 제물을 자기들 마음대로 빼앗아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 2:17)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신 제사를 멸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신앙도 없는 바로 그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믿음 때문에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이길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언약궤를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언약궤는 하나의 부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믿음도 없이, 신앙도 없이 부적과도 같은 용도로 쓰려고 언약궤를 가져왔으니 징벌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4:4절에서는 그 언약궤를 가리켜서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런 거룩하고 성스러운 언약궤를 부적과 같이 쓰려고 가져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혹 신앙생활하면서 신앙적으로 살아가려 하지 않고 신앙적인 것을 부적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모습은 없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 안에 성경책을 넣고 다닙니다. 그 성경책이 마치 자동차 사고를 막아주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는 성경을 읽지도 않고, 성경말씀대로 살아가지도 않으면서 성경책을 차 안에 넣고 다님으로서 마음에 안위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장식품으로, 또는 사고를 막아주기 위해서 차 안에 넣고 다닌다면 그것이 바로 비신앙적인 행태이고, 부적과 같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가지고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좋은데, 하루에 성경을 한 구절이라고 읽지 않으면 꼭 무슨 큰 재앙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마음 때문에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 역시 성경이 우리에게 부적과 같은 도구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건 비단 성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이 유행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는 상실한 채 그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면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생각으로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요 우상의 종교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나의 사치나 쾌락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욕망을 못박는 곳이어야 하고, 우리의 삶을 바르게 세워주는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십자가를 내 욕망을 위해서 이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경한 행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어떤 직분도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는데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직분은 섬김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섬기고 헌신하는 일을 위해 직분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신앙적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남용하거나 악용해서 내 이기적인 욕망을 얻으려 한다면 그 직분이 우리에게는 부적과 같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을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시몬은 사마리아 성에서 마술을 행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마술을 잘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마리아 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빌립이 전한 복음을 듣고는 마술 행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빌립을 따라다니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마리아 성에도 복음이 전해지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는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파송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니까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시몬이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성령이 임하심은 지금까지 자기가 행한 마술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행한 마술은 사람의 눈을 속이는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눈속임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근본적으로 사람을 바꾸는 능력이었습니다. 그의 눈에는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게 한 베드로와 요한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돈으로 그런 능력을 사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그 능력만 자신에게 있다면 이전에 누렸던 인기와 영화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이면 뭐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시몬은 자신이 가진 돈으로 성령의 능력까지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과 함께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게 한 것은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사도라는 직분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맘몬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 없이 돈을 내세운 시몬은 돈과 함께 망하는 길을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믿음 없이 언약궤만 가져오면 이길 수 있다고 착각했던 홉니와 비스하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의 패배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도 믿었던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수많은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믿음 없이 행한 모든 것은 멸망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믿음으로 살아오셨습니까? 혹 우리가 살아온 삶에 믿음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 것에조차 믿음이 아닌 나의 세속적인 욕망과 이기적인 탐욕이었던 것은 없으셨습니까?
여러분, 그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내 욕망과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욕망을 위해서 믿음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큰 능력을 가진 언약궤라 할지라도 믿음 없이 내 욕망을 위해서 그것을 도구로 전락시킬 때에는 그것과 함께 우리 자신이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행동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삶에 중심이요 기준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 욕망의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성경 말씀이 우리의 욕망을 채우려는 도구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또는 시몬처럼 믿음 없는 삶을 살지 않고 - 믿음을 내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셔서,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로 축복을 누리시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잔인한 진실, 친절한 거짓
삼상 4장 1~11절 / 김영준목사(기쁜소식교회)
잔인한 진실, 친절한 거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령 누가 불치병을 선고받았을 때 가족들이 그 사실을 차마 알릴수가 없기 때문에 병이 곧 나을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 친절한 일입니다. 잠시나마 마음에 평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거짓말쟁이 야콥>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차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점령 치하에 있는 유태인 게토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 게토(ghetto)는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단절돼 있습니다. 외부 세계의 소식을 들을 길이 없습니다. 신문도 없고 라디오를 소유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습니다. 사람들이 외부로 나갈 수도 없고 외부에서 누가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토에 갇혀있는 유태인들은 현재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독일이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연합군이 과연 이들을 해방시켜 줄 것인지, 언제 그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 도리가 없는데 야콥이라는 사람은 자기에게 비밀 라디오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절망 중에 빠진 유태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인데 그는 라디오로 외부에서 들려오는 뉴스를 듣고 있다고 말합니다. 연합군이 게토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하더라, 연합군 탱크부대의 소리가 들리더라, 연합군 탱크 위에 재즈밴드가 연주하는 소리까지 들리더라, 이런 식으로 소식을 전합니다. 야콥은 이 게토가 해방되기 전에 사망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정말로 연합군에게 해방되는데 해방된 유태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이렇습니다. 정말로 연합군 탱크가 게토를 향하여 진격하고 탱크 위에 재즈밴드가 연주를 하는 장면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이 영화의 제작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짐작됩니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태인들의 신앙적인 위기를 말하려는 것 같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선지자의 역할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선지자가 야콥과 같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야콥이 있지도 않은 라디오를 가지고 외부소식을 듣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야콥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인데 그 영화 끝 장면에 정말로 탱크를 탄 연합군이 이들을 구해준 것을 보니 야콥이 정말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정말 비밀 라디오가 있었던 것인지 아리송하게 영화가 끝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현대인의 고민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말을 한 것인지 이러한 각도에서 성경을 읽어보는 것이 성경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성경말씀을 날카롭게 해석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필독하는 분도 계시고 그것을 쓰는 분도 계시지만 성경을 예사롭게 읽지 말고 각도를 조금만 달리 읽어도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성경말씀은 의외로 친절하지 않습니다. 무뚝뚝합니다. 영어로 하면 blunt - 무뚝뚝한 진실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직설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본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외국생활을 많이 해서가 아니고 본래 성격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적인 성격이에요. 예스는 예스, 노는 노.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의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로 하라 그 이외의 것은 악을 좇아 나느니라’ 성경 어디에서 죽을 사람에게 살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망할 자에게 흥하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잘 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습관인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을 찾아가서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졌습니다. ‘네가 낫지 못하고 죽으리라’ 어쩜 그렇게 냉정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어요. 또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찾아가서 한마디 했습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너희는 멸망한다.’ 얼마나 직설적이고 불친절한 말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여운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죽는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안 죽었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15년을 더해 주셨습니다. 니느웨가 멸망하리라고 말씀을 들었지만 멸망 안 했습니다. 니느웨가 임금으로부터 짐승까지 금식하고 회개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사해주셨습니다. 그 여운 속에도 하나님의 진실이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보장해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람이 결코 보장해줄 수 없는, 사람의 친절함이나 사람의 선한 의도로 이를 수 없는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진실을 찾아야 됩니다. 친절함과 선한 의도로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데 그 말씀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진리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친절함이나 따뜻한 말을 통하여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원리를 잘 간파했습니다.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기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놀라운 말입니다. 권하는 말이 없어도 됩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을 변증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변증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 중에 하나님의 진리를 변증할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의 진리가 사장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변증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의 지혜를 동원해서, 친절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실과 하나님을 사람들 앞에 변증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불필요한 일이요, 오지랖이 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을 변증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방법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기업체나 사설단체처럼 PR 업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기업체들은 기업 이미지를 홍보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랑해요 LG’라든가, ‘철이 사람을 만듭니다. POSCO’ 라든가 기업체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어서 사람들이 그들의 제품을 구매하게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어서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을 홍보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인기를 관리해서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기 전의 한 에피소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영토문제로 블레셋과 자주 전쟁을 했습니다. 요즘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영토문제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자주 전쟁을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한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습니다. ‘우리가 언약궤를 들고 전쟁에 나가자. 언약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징표이기 때문에 언약궤를 들고 전쟁에 나가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실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내서 정말로 언약궤를 메고 전쟁에 나갔어요. 그 소식을 블레셋이 듣고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열심히 싸웠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이 대패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적나라한 진실을 성경이 가감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일을 자기가 주제넘게 행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그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시키시지도 않은 일을 자기 생각대로 주제넘게 행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 언약궤는 어떻게 하느냐? 언약궤를 빼앗겼는데 그건 마치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 같지 아니하냐? 언약궤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 대하여 염려하시는 것이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지 성도가 교회를 위하여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요즘에 교회가 염려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마는 교회를 사랑해야 될 필요는 있지만 교회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어요. 만일 교회에 대해서 염려해야 된다면 교회는 큰일 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이 반석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교회가 아니고 목사의 교회도 아니고 교단의 교회도 아니고 예수님의 교회요, 예수님이 친히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역할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믿음만 지키면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당신이 세우시고 지키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람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기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미지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일만 하면 됩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아 갔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읽지는 않았지만 5장 3절을 보면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블레셋 우상의 이름입니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밤에 다곤의 신전에 언약궤를 갖다 놨더니 아침에 보니까 다곤이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세워놨는데 그 다음 절에 보니까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든지 변증하십니다.
이제 블레셋이 언약궤를 빼앗아 오기는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될 차례에요. 다곤이 그 앞에 넘어지고 머리와 손목이 깨져서 몸뚱이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 독종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 몸에 독종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건 여호와의 궤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노하셨다, 그래서 결국은 그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는데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속건물을 가득 담아서 돌려보냈다는 얘기입니다. 언약궤를 찾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블레셋이 스스로 돌려보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변증할 수도 없고 또 변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을 변증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갈려도, 세상 문화가 아무리 바뀌어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고 믿을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것을 분명히 믿어야 됩니다. 살기 좋아지고 과학이 발달한다고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은 더 속이 허망하고, 더 고독하고, 인생이 줄 수 없는 해답을 찾기 때문에 세상 문화가 아무리 바뀐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른 염려시키지 않았어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네게 당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그것만을 명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성경말씀은 친절한 거짓도 아니고 잔인한 진실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다보니까 그런 논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실을 말씀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 다름에서 하나님의 저작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건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 다름에서 하나님의 저작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에게는 정말로 비밀의 라디오가 있습니다. 육신의 귀로 들을 수 없지만 영혼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있고 그 저편에는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불신이 그것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잔인한 진리도 아니요 친절한 거짓도 아니요 하나님의 진리에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할렐루야!
언약궤를 빼앗긴 이스라엘
삼상 4장 1~22절 / 조영태목사(임마누엘교회)
본문은 사무엘서 기록중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투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 블레셋은 아벡에 진치고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강한 블레셋 군대에게 패하며 사천 명 가량 죽임을 당합니다.
남은 군인들이 진영으로 들어오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하게 했는지
안타까워하면서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오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3절에 여호와의 언약궤는 증거의 궤, 주 여호와의 궤라고도 불렸던 장방형 상자였습니다.
언약궤의 뚜껑에는 양 옆에 서로 마주보고 날개를 펼치고 있는 두 그룹이 있었으며,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신 10:1)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히 9:4-5)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막을 만들게 하셨고 그 중심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안치했습니다.
지성소에 있었던 언약궤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출25:22절에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곧 사람들을 보내서 언약궤를 가져왔습니다. 올 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같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진영으로 들어오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치며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궤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궤가 들어오면서 사기가 충천한 이스라엘과 반대로 블레셋 진영은 매우 긴장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궤가 들어온 것이 신이 들어온 것으로 여겼고 그들이 들었던 대로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지휘관들이 병사들에게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고 독려했습니다.
예전에 자신들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의 종이 되지 않도록 죽을 힘을 다해 싸우라고 했습니다.
곧 2차 전쟁이 벌어졌는데 결과적으로 블레셋의 거센 공격 앞에 이스라엘 군은 대항하지 못했고 도망하면서 삼만 명이나 죽임을 당하고 크게 패하고 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기까지가 1-11절까지의 간략한 스토리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봅니다. 언약궤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에게 대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방인에게 빼앗기도록 내버려두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과 전쟁하기에 앞서 대제사장 엘리를 위시하여 제사장들이 회개하였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또한 첫 번째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원인이 자신들의 죄악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고 실로에 있는 법궤를 그 전장으로 운반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실로와 에벤에셀은 직선 거리로 50~60km나 되는 거리였습니다. 그 말은 이동하는 시간이 꽤 걸렸다는 것이고 그 시간에 자신들을 돌아보고 성찰했다면 2차 전쟁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곧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고 올 때 홉니와 비느하스도 같이 따라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엘리의 두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름만 제사장이었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배교자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을 경멸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당시의 이스라엘의 최고의 종교지도자처럼 형식은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회개하지 않은
그들의 그런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더욱 가증한 것이었기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아닌 언약궤 자체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과 장로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언약궤를 전장으로 내보낸 엘리는 노심초사하며 그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서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장로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기를 원했습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언약궤 자체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생각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당시 이방 사람들의 미신적인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다는 것을 대변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극히 거룩한 물건이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런 것이지 만약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자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로들의 말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이 지극히 이기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절 중반부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우리에게로 가져와서 우리 중에 있게 하여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짧은 구절에 우리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말은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관심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입니다. 매우 인본주의적인 태도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그 언약궤의 힘을 빌어서 복을 얻는 것 곧 요행을 바라는 것이며 언약궤 자체의 힘을 의지하는 주물숭배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에 힘이 있는 것처럼 숭배하거나 절하는 것을 주물숭배라고 합니다. 지금도 토속신앙으로 돌이나 나무에 영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 31장에 야곱이 가족들과 라반의 집을 도망쳐 나올 때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해서 가져나온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드라빔은 나무 목각 인형같이 생겼는데 가정 수호신 같은 것이며 그 드라빔을 소유한 자에게 상속권도 주어지는 물건이었습니다. 라반의 가정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에 얼마나 많은 주물사상이 있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든지 주물숭배 사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 또는 성경책 자체가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구약에서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로마시대의 십자가는 부끄러움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그것이 바로 죄의 크기, 죄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하고 처참한 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의 결과는 부끄러움이며 십자가에 죽는 것과 같은 처참한 심판인데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서 우리는 용서를 받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의미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리가 기도를 하고 나서 마지막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고 붙입니다. 이것도 의미를 알고 해야 합니다. 주문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의 이름은 인격과 특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특성은 구원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할때 첫 번째,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동기와 내용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 이렇게 기도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은 오랜 기간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케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자 19:13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들린 자들에게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고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행하곤 했습니다. 그러자 15절에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그들이 상하여 옷을 벗고 도망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에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람들은 바울이 행하는 능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신 명단에 예수님을 올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흉내 내는 것으로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이러한 미신적인 신앙이 팽배해있었습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 앞에 나를 산 제물로 올려드리는 것이지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언약궤에 매여 있으시겠습니까?
외부적인 법궤의 이동에 따라서 하나님도 운반되신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경기를 할 때 잘하는 사람 센 사람을 자기 편에 붙여서 이기고자 하는 심사하고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자신의 편에 이동시킨 것입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링컨의 일화가운데 하나를 소개합니다.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 전쟁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남군에는 막강한 지휘관들이 많았고 반면 유능한 지휘관 부족으로 북군은 계속적으로 남군에게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민심이 분열되고 일부 진영에서 탈퇴의 기미가 엿보이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패전 소식에도 링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했습니다. 오직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북군의 전세가 크게 불리할 때 참모가 말했습니다. “각하!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주실까요? 걱정입니다.” 그때 링컨은 말합니다. “오직 나의 염려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일세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서 있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네.” 하나님께서 나의 편으로 서계시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왔기 때문에 복을 받거나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4:5
세 번째 언약궤를 가져오고도 패한 이유는 블레셋 군대의 지휘관들이 용맹스럽게 지도했기 때문이고 또한 언약궤 앞에서도 마음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쟁은 당시까지도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절에 보면 블레셋이 먼저 싸움을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2절에서는 블레셋 군대는 이미 항오를 정렬하고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들어와 군사들이 동요할 때도 사기를 잃지 않고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고 하면서 지휘를 잘 하는 것을 봅니다.
두려움이 사람들을 사로 잡을 때 담대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입에서도 나왔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얼마나 담대해야겠습니까?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잠 28: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결론적으로 이 전쟁은 하나님께로 말미 암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군대에게 붙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사기의 연속선상에서 그들의 죄와 무지함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준비되었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엘리가문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엘리는 길곁 자기 의자에 앉아서 전쟁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궤를 내보낸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과 전쟁결과에 대한 불안함이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깊이 빠져 버리면 그 죄 때문에 닥쳐오는 환난 가운데서 자기의 문제를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55:6-7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고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19-22절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스라엘의 패전 비보를 듣고 갑자가 해산하고 죽고 맙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사실에 탄식했습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영광이 없다’, 또는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 야말로 당시 사사시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사람입니다. 타락한 가족들 중에서 고요히 탄식하던 숨은 성도였으며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했던 경건한 성도였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의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흑암의 역사 속에서도 빛줄기를 남겨두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쓴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당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영광의 주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광채와 빛남을 의미합니다.
그 분의 소리는 온 우주에 퍼져있으며 그분은 여전히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득차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영광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유한한 고난과 무한한 희망
송기성목사 / 삼상 4:1-5, 19-22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받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이 고난의 세월 속에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유한한 고난은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은 잃지 말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든 고난도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은 무한합니다. 무한한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유한한 고난에 굴하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의 전쟁 패배와 비느하스의 아내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죽어가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Ichabod)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뜻입니다. 비느하스의 아내, 그녀는 유한한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무한한 희망도 품지 못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녀가 그 유한한 고난을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 귀한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으로 짓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한한 고난을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이가봇과 같은 인생이 되지 않을 줄 믿습니다.
1.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천 명이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라며 말하였습니다. 이는 전쟁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종의 원망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그 원인이 자기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많은 사람이 전사를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소위 제사장 비느하스의 아내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해산할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라며 그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이는 ‘절망하지 말라!’ (Don’t despair!),
‘용기를 내라’ (Be brave!) 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위로를 거부한 채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절망적인 한탄만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약에 그녀가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회개하였더라면 그 유한한 고난을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전쟁 패배는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산 10조 원을 넘어 재계 순위 32위에 오른 하림그룹 회장 김홍국(62)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열한 살 때 그는 외할머니가 잘 키워서 몸 보신하라고 주신 병아리 10마리를 키워 30배에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병아리를 다시 샀고 돼지도 키웠습니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이미 사업자 등록을 한 그는 4,000만 원을 모았습니다. 당시 그가 살던 전북 익산 시내의 단독주택 한 채 값이 300만 원쯤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업이 항상 승승장구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죽을 만큼 힘든 세 번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스물한 살 때 축산물 파동이 나서 망했고, 외환외기 때 부도 직전까지 갔으며, 2003년엔 공장 화재에 조류 인플루엔자까지 겹쳐 거래처가 다 끊겼고 2년간 적자가 났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절망적인 시련을 겪다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김홍국 장로님은 “하나님의 원리에 어긋나면 어려움이 닥친다. 어려움이 닥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고생하고 느끼고 연단하고 반성하고 돌아오라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라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2003년엔 인생이 끝나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고 회개했다. 그때부터 눈물이 많아졌다. 새벽기도를 가게 되고 회개하고 더 열심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더 견고해졌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련이나 어려움도 하나님의 일은 모든 게 좋은 일이다.” (2019년1월17일 국민일보, 이명희 종교국 부국장) 아멘!
하나님께서 역대하7:14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다 선한 길로만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들의 땅도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절망하지 않을 것이며, 유한한 고난을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을 잃어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난당한 것이 오히려 유익이 되었노라고 (시119:71) 찬송하며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생각될 때일수록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유한한 고난을 유익한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을 무궁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체험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고 순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실로에 사람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궤를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법궤와 함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외치며 기뻐하였습니다.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은 그 큰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 알고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로 성소에서 전쟁 진영으로 옮겨 온 이스라엘은 승리를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는커녕 삼만 명이나 죽임을 당하였으며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 승리의 수단으로 이용하였을 뿐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라고 절망하며 한탄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실로의 성막 안에 안치해두고 일반 백성은 그 언약궤에 접근하지도 못하도록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성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을 거룩하게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출29:43-44).
그런데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성소에서 그들의 제사장직을 이용하여 저주를 자청할 정도로 타락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삼상2:13-17,22). 그들이 전사를 당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긴 것은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였을 뿐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만약에 당시의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언약궤와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복하였더라면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한한 고난을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1980년 ‘시인과 촌장’으로 데뷔해 포크음악의 선두 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백석예술대에서 기독교 음악을 가르치는 하덕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명한 대중가요 가수로서 큰 인기를 얻었지만 공허감과 우울증, 술과 대마초 등으로 인생의 의미를 모른채 방황하며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하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 가득한 욕심과 이기심, 너무나 더러운 죄악된 마음 때문에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누나에게 끌려가다시피 해서 송구영신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예배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영적 괴리감에 빠져있는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의 죄악된 마음을 볼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주시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내면 안에 있는 죄악들을 통회하며 수도 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후 가시나무 덩쿨 가운데 피흘리고 계신 예수님의 형상이 그의 머리 속을 스치듯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장 곡을 쓰기 시작하여 10여 분만에 <가시나무> 라는 곡을 완성했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하덕규 교수, 그는 <가시나무>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곡이라고 확신하며, 그가 만든 노래 가운데 최초로 그의 영혼으로 부른 노래라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죄악된 마음 때문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가시나무와 같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내 가시에 찔리시면서 끝까지 품으셨습니다.” 아멘!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선지자의 말씀대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찔림과 상함과 징계를 받음과 채찍에 맞으심은 다 우리의 죄악 때문이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순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절망하지 않을 것이며, 유한한 고난을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을 잃어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가시나무와 같은 자기를 버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기 가시에 찔리시면서도 끝까지 자기를 품어주시는 주님을 찬양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고 생각될 때일수록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고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유한한 고난을 유익한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을 무궁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찬양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 그녀는 아들을 낳고 죽어가면서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단정하며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서 떠난 것이 아니었고, 그녀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생각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빼앗아 간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뿐이었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간 후 독한 종기 (tumors) 의 재앙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상5:6).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 이가봇의 어머니처럼 삶이 너무 어렵고 힘든 지경에 처하다 보면 하나님이 영광이 떠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한한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무한한 희망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가시나무와 같은 존재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 가시에 찔리실지라도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시고 도리어 함께 하시며 품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할 때일수록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고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유한한 고난을 받아들이고 무한한 희망을 잃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함께 하심을 감사하며 찬양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이가봇과 임마누엘
이강웅목사(몬트레이한인교회) / 삼상 4:1-11
이스라엘 민족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다른 민족들과 비교하여 보면 그들이 더 특출 난 것은 없습니다. 세계 4대 문명 발생지, 이집트의 나일강 문명,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의 인더스 문명, 중국의 황하 문명 등에서 보듯이 그들보다 문명과 문화에서 앞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수효가 다른 민족을 압도할 만큼 많거나, 땅과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430년 종살이하던 그들이 그 당시 최강국이던 애굽을 이기고 민족 전체가 출애굽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번째 관문인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정복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7부족들의 연합군과 싸워 압도적인 승리로 제압했습니다. 7부족들은 이미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저들의 간담이 다 녹았다고 했습니다. 과연 적들의 간담을 녹일 만큼 압도적인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출애굽한 후 시내 산에 머물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는 이 언약 속에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언약에 충실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모든 일에 형통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심지어 재앙과 질병으로부터 지켜 주실 것입니다. 적국이 침입해 와도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들과 함께 하시면 아무도 이스라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대적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싸우겠다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기겠습니까?
이렇듯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그러함에도 우리 삶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실제 삶에 믿음을 발휘하여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의 한계 안에서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경험과 자기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만나면 쉽사리 손을 놓고 맙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숙고해 보세요. 자기의 경험, 자기의 지식 안에서 용기를 내기도 하고, 절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만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Ⅰ. ‘이가봇’ 인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음란한 이방 문화를 없애고, 대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이를 끊질기게 대적하고, 군림하며 압제했던 불구대척의 원수가 블레셋이라는 족속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의 서부해안지대에 다섯 도시를 근거지로 하고, 그 세력을 확장해 갔습니다. 그들은 이미 철을 사용하여 철 병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압제 아래 있던 이스라엘은 철을 다룰 수 있는 대장간이 허락되지 않아 철로 된 농기구를 벼리려면 블레셋 지역으로 내려가야 할 상황입니다. 그래서 사울왕 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철로 된 무기를 가진 자는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농기구를 들고 나가할 형편이었습니다. 반면에 블레셋은 철병거가 3만이고, 기병이 6천명이고, 군인 수는 바다의 모래같이 많다(삼상 13:5)고 표현할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다윗 왕과 솔로몬 왕 때에 비로소 그들을 압도하기 까지는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블레셋 앞에 크게 패하여 사천명의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원망하듯이 하나님께 책임을 돌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3절)
사실 이런 질문은 오늘날에도 흔히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 나는 가난하고 고생하며 사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무개는 하는 일마다 잘 되는가!’ 평소에는 세상에 정신이 팔려 있어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없고, 마음이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는 것을 은근리 불편해 합니다. 가령 밤새도록 연속극에 빠져서 눈알이 빨간데, 주님이 곁에서 “아무개야, 내가 널 사랑한다.”고 하신다면 아주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술집에 가려는데 “아무개야, 내가 널 좋아한다. 나는 너와 함께 하길 원한다.”고 하신다면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배 드릴 때만 하나님을 모시려고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 없이 자유 분방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곤경에 빠집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없던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에게는 이 질문이 필요합니다. 원망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정직하게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진짜 원인을 알고자 믿음으로 질문한다면 이에 대해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 성 정복이 좋은 사례입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 사람들을 아이 성으로 보내서 그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 성보다 규모가 작았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거둔 놀라운 승리로 인해 기세가 올라있던 정탐꾼들은, 아이 성은 작고 그 거민들은 소수이니 번거롭게 모든 백성이 다 올라갈 필요 없이,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면 충분히 그곳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수 7:3) 그래서 여호수아는 군사 삼천 명을 아이로 보내어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기세가 올라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5절)
이 때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수 7: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자신들을 낮추고, 하나님께 질문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떠나 있던 그들은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잘못된 결론을 내렸습니다.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것으로 자신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고 결의한 것입니다. 아마도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 강을 건널 때 강물이 갈라졌던 사실을 기억해 냈을 것입니다. 또 언약궤를 매고 여리고성을 돌았을 때 그 견고한 성이 무너졌던 것을 기억해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투에 임했을 때 승리를 이끌어 냈을까요? 5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아마도 홉니와 비느하스는 마치 자신들이 모세나 여호수아가 되는 양 언약궤를 진중에 모셔가며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먀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들은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큰일 났다’는 식의 두려움이었습니다. 7-8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애굽과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명성을 듣고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이 그 진에 이르렀다고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누가 이 능한 신의 손에서 우리를 건지겠느냐’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저버렸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출애굽의 놀라운 역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각종 재앙을 내리시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신으로 인정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반응은 두려움과는 정반대의 반응입니다. 9절에 보면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이 전쟁에 져서 종이 될 바에야 죽기 살기로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블레셋의 전투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 독려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왜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임했는데도 참패를 당하였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단지 그들의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을 뿐,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승리를 가져다 주는 수호천사 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언약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적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아무때나 이용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아무곳에나 그냥 들이대면 승리를 가져다 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나갔다는 외형적인 면을 보시지 않고,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영적인 상태를 보십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마차 끌고 나오듯이 질질 끌고 나왔지, 그들의 마음속에 전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경외심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구와 소원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그 내면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가나안 땅에 살면서 죄와 타협하며 살아온 이스라엘의 죄악을 철저히 드러내어 깨닫게 하시고자 가만히 뒷짐지고 계셨습니다. 조금도 도와주시거나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이후 역사에서도 반복되던 일입니다. 하나님이 남쪽 유대왕국에게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경고했음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설마 하나님께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실까? 하나님 백성이 멸절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거야’라고 헛된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성전을 불탔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수단적으로 이용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불순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유익을 얻고자할 때 철저히 실패와 패배를 맛보게 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영광스럽게 여기던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도 앉아있던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때마침 아들을 낳고 있던 엘리의 자부 비느하스의 아내조차도 해산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일순간에 엘리의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하며 그 가정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엘리의 며느리는 아이를 낳다 죽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이렇게 말하고는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가봇”이라는 이름의 뜻은 “영광이 어디 있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으로 살았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였을 때 이스라엘도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단지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도 영광스럽게 되고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거두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일은 없습니다.
비즈니스하는 사람들은 가게에서 손님들이 떠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주식시장에서 큰 손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내 곁을 떠날 때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나를 멀리할 때 고독과 배신감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염려하고 두려워해야만 할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 가운데서 ‘이가봇’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내 인생 가운데 관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돌봐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내 인생에 관심을 보이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내 인생은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기를 쓰고 노력을 기울려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들은 어떤 결말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울 왕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한 번 떠나고 나자 그는 낙심하여 쓰러졌고, 이어서 전쟁터에서 아들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그의 최후는 비참하였습니다.
2. ‘임마누엘’ 인생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할 때 어떻게 됩니까?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순종했을 때 어떠했습니까? 3장 9절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저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사람이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런 인생을 가리켜서 ‘임마누엘 인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현재 어렵고, 힘들고,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인생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가정이 아무리 지금은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고, 보잘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시면 그 가정은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손에 의해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애굽 시위대장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했습니다. 이를 본 주인 보디발이 가정 총무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보디발의 처에 의해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모든 일이 형통함을 보고 전옥이 그에게 모든 일을 다 맡깁니다. 그리고 드디어 감옥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불우한 환경에 있을지라도 그 인생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그 개인의 인생이나 그 가정이나 그 모임이나 그 민족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처럼 ‘그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가봇 하시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3. 결론
우리 가정과 교회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엘리 가정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방자하게 행할 때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이가봇’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시간 나의 삶이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이 도저히 함께 하실 수 없는 이가봇의 상태인가? 스스로 점검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주변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을 보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 것이 분명하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말씀과 기도의 등불을 밝혀서 임마누엘의 축복을 덧입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
삼상 4:1-22 / 이한규목사
< 바른 믿음을 가지라 >
믿음 생활을 할 때나 교회 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 교회가 내 편이 되어달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님 편과 교회 편이 되려고 하라. 어떤 성도는 무조건 내편이 되어 줄 교회를 찾느라고 여기저기 교회를 쇼핑하듯 다닌다. 그러나 인간관계나 하나님 관계에서 계산적인 목적이나 청탁을 위해 그 관계를 활용하지 말라.
믿음과 예배와 기도 같은 성스러운 것들도 자기 복을 위한 이용 도구로 삼으면 안 된다. 기도한 후 “빨리 해결해 주세요.”라고 독촉하며 하나님께 강요하면 하나님은 더 해결을 늦추신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리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부리려고 하거나 교회를 도구화하지 말라. 기도도 자기 이기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삼지 말라.
이런 기도를 앞세우라. “하나님! 무엇이 당신의 뜻입니까?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그런 마음을 바탕으로 눈물로 기도해야 최선의 응답이 허락된다. 기도를 오해하지 말고 오용하지 말라. 기도하면 문제가 잘 풀리는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는 기도하면 문제가 잘 풀리지만 때로는 기도해도 문제가 안 풀릴 수 있다. 결국 기도하면 문제가 다 풀린다는 주장은 기도에 대한 맹신을 낳고 결국 영혼을 시험과 심판에 빠뜨린다.
기도를 너무 믿으면 하나님이 빠진 기도가 되고 그렇게 기도 자체를 믿는 것은 일종의 미신이다. 물론 기도하면 놀라운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 그래도 기도한다고 문제가 다 좋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무조건 “기도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미신을 버리라. 무속인들도 “기도하면 된다.”라고 말하고 기독교 이단들도 “기도하면 된다.”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을 앞세운 진실한 믿음의 기도를 드리라. 포장만 있는 형식적인 믿음은 미신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한 믿음에만 반응하시고 역사하신다.
<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 >
본문에는 전쟁에 이기겠다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전쟁에서도 지고 언약궤도 빼앗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이가봇의 비극(21절)에 처한다. 그런 이가봇의 비극을 막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라
본문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아벡 전쟁이 나온다.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해 4천명이 죽었다(2절). 그 패배의 근본 원인은 자신들의 죄 때문인데 그들은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렸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3절).” 문맥과 어조를 보면 원인 분석이 아닌 원망 토로다. 사람은 미련함으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도 마음으로는 여호와를 원망할 때가 너무 많다(잠 19:3).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오자.”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최고 성물이었다. 백성들은 그 언약궤만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대적 블레셋을 전멸시킬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에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나갔다. 누가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갔는가? 간통과 제물 도둑질로 비난받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와 그의 수하들이다(4절).
홉니와 비느하스로부터 풍기는 죄의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전쟁터로 운반되는 언약궤를 상상해 보라. 그들이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는 모습에는 강제로라도 복 받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해 먹겠다는 신성 모독적인 자세가 깃들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일하실 수 없고 하나님의 역사와 영광도 나타날 수 없다. 절대자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주권을 쉽게 탈취당하고 농락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실에는 감동하시지만 인간의 거짓된 장단을 따라서는 춤추시지 않는다.
언약궤는 드라큘라를 쫓아내는 십자가 같은 상징 도구가 아니다. 언약궤라는 상징을 신봉하는 모습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자세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는 아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인 사람을 위해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교회를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과 교회를 순수하게 범사에 감사하며 섬기라.
2. 상징보다 회개를 앞세우라
참된 믿음의 원리도 모르고 자신들의 죄와 허물은 외면한 채 언약궤가 전쟁터에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마음이 붕 떠서 크게 외쳤을 것이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 우리가 분명히 이긴다.” 그처럼 언약궤와 같은 상징에 대한 무분별한 확신은 무책임하고 허황된 사람을 만들어 사람을 더 실패와 패배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헛된 확신에 사로잡힌 이스라엘과는 달리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의 도착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서로 믿음의 격려를 했다.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대장부처럼 싸우라(9절)” 누가 참된 믿음의 백성인지 혼동될 지경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대패해서 언약궤가 없을 때는 4천 명이 죽었지만 언약궤가 있을 때는 3만 명이 죽었다(10절). 더 나아가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겼다. 이 장면은 내면의 믿음이 없는 외적인 상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교훈을 준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상징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할 때 위대한 정신적 지주였고 광야에서 그들을 지켜준 놀라운 은혜의 상징물이었지만 아무리 위대한 외적인 상징물도 내면의 믿음이 수반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실패나 패배를 겪었을 때는 언약궤 같은 외적인 상징들을 앞세우지 말고 진실한 내면의 회개를 앞세우라.
3.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
언약궤를 빼앗긴 후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고(11절) 그 모든 소식을 들은 엘리는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고(18절)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낳고 죽어가면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라고 하며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했다(21절). 결국 이스라엘의 패배와 엘리 가문의 연이은 비극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 행위에 대한 심판이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겠다는 말을 잘 한다. 그러나 그 말이 말로만 끝나지 않도록 성도다운 행위를 수반시키라. 경건한 삶이 없는 기독교는 허무한 것이다. 경건한 삶은 대개 인간적인 유익을 멀리하는 삶인데 나중에 보면 오히려 풍성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 전 인류가 죽는 상황에서도 노아 가족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노아가 경건한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인들은 작품 하나를 만들 때마다 심혈을 쏟는다. 작가가 책 한 권 쓸 때도 탈진할 정도로 내면의 모든 생각 조각들을 정성껏 모아서 쓴다. 필자도 설교 한편 작성하려면 평균적으로 새벽 설교는 최소한 8시간, 주일설교는 최소한 16시간이 든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잘 전해서 삶을 변화시킬까?” 하고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한다. 그런데 설교 준비보다 더 어려운 것은 설교한 대로 사는 것이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고 습관이 믿음보다 앞설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이 볼 때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훨씬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노아처럼 의롭게 살려고 힘쓰라. 믿음으로 천국에 가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축복과 사랑을 받으려면 성도답게 살려고 하라.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 의롭게 살라.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런 기본 위에 남들로부터 “믿는 사람답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도록 자기 관리를 하라.
4.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라
언약궤가 아무리 중요한 상징물이라도 하나님이 빠진 상태에서 언약궤를 앞세우는 것은 미신이다. 하나님은 언약궤 때문에 도와주시는 것은 아니다. 언약궤가 없어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도와주신다. 아무리 소중한 상징물도 그 상징물 자체가 불의한 사람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언약궤 같은 상징물은 그저 미신 대상이 될 뿐이다.
물론 믿음이 있어도 문제와 시련이 수시로 생긴다. 그때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고 믿음으로 씨를 뿌리되 거둘 것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라. 거둘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씨를 뿌리는 데 전념하면 언젠가 풍성하게 수확할 날이 반드시 온다. 씨를 뿌릴 생각보다 거둘 생각이 앞서서 “내가 이렇게 많이 심었는데...”라고 하는 보상 심리가 보상을 막는 핵심 원인이다. 신앙생활을 할 때 “제가 이렇게 잘 섬겼는데 왜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보상 심리를 품고 하나님과 거래하지 말고 순수한 믿음으로 헌신하라.
왜 범사에 감사하는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왜 불평이 잦은가? 믿음을 잃었다는 증거다. 믿음은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고 상처를 상급으로 만들고 불평하는 삶을 감사하는 삶으로 만든다. 기도할 때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믿음이 있으면 유익도 얻지만 이미 있는 유익을 발견하는 시야도 생긴다. 그런 시야가 생기면 점차 생각과 태도도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복도 따라온다. 항상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복된 인물 성도가 되라.
진정한 능력은
삼상 4장 1~11절, 삼하15:24-26 / 이동규목사
어떤 분들은 성경을 신비화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베고 자야 잠이 잘 온다나요? 귀신 들린 사람에게 성경을 들이대면 물러간다고 합니다. 마치 드라큐라에게 십자가가 약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이든 십자가든 그런 신비한 능력이 발휘되려면 결국은 사람의 문제이겠지요. 아무나 성경을 베고 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나 십자가를 내세운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그 정도의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의 손에 들려 졌을 때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겠지요.
아무나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내리친다고 홍해는 갈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졌을 때, 하나님이 필요하실 때 그 지팡이는 홍해를 가르는 지팡이가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오늘 사무엘서를 보면서 이런 원칙들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법궤가 누구의 손에 어떻게 들려져 있느냐에 따라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무용지물이 되기도 합니다.
원래 법궤 안에는 세 가지의 축복된 성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 두 돌판입니다. 이 증거의 두 돌판은 법의 창설자이신 성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둘째는 만나 항아리(출16장)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주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음식입니다. 이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성자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셋째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수기16장)입니다.
민수기 16장에는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족장이 지팡이를 취하여 그 사람들의 이름을 지팡이에 쓰라. 그리고 그 지팡이들은 증거궤 앞에 두면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보니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아론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권위를 하나님은 확약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역 사건과 하나님의 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그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법궤 안에 비치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죽은 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시는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기구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행진 중에 가장 앞에 섰던 기구입니다. 그리고 법궤가 가는 곳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와 보호가 있었습니다. 법궤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출에굽기에 보면 요단강을 가를 때 법궤가 사용되었습니다. (수3:11-17)
11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12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 이명을 택하라 13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14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15(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17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이스라엘은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40년의 방황이 끝나는 시점입니다. 하지만 그 40년의 방황을 끝내려면 요단강을 넘어야 합니다. 60만이 요단강을 넘으려면 기적이 필요합니다. 이 절체절명의 시간에 법궤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제사장들은 대오의 제일 앞에 서서 법궤를 메고 행진했습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의 발바닥이 요단강을 밟는 순간, 요단강물은 끊어졌습니다. 법궤가 맨 앞에 섰다는 이야기는, 야훼 하나님 스스로가 길을 인도하고 이스라엘을 요단강 물로부터 보호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통해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밟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위력 있는 법궤를 대하는 두 사람의 자세를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바로, 엘리의 경우와 사무엘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엘리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사사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말년에 블레셋의 대 침공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 진을 쳤고, 블레셋은 아벡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은 다급해 졌습니다. 전력이 현저히 기울고 있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이스라엘은 그 전부에서 4천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합니다. 이스라엘 진영에 일대 파란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와의 군대가 이처럼 처참하게 패배한 것은 드문 경우였거든요.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엘리와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제사제도를 문란시키고 있었습니다. 제사제도는 여호와 경외의 핵심인데 이게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더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제사장인 엘레의 가문을 비롯해 전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그 결과 전쟁이 일어나자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볼 생각도 않고 그저 자신들의 의지와 결정으로 전쟁을 치릅니다. 똑 같은 것 같지만 아주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전쟁이 있을 때 꼭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서 했습니다.
여리고 성은 하루 한 바퀴 돌고 칠일 째 되는 날 일곱바퀴에 큰 함성을 지르는 전법을 썼습니다. 기드온은 항아리와 횃불을 들고 300명이 전투에 나서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그대로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알말렉과의 전투에서는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고 이스라엘이 나가 싸우는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 방법과 시기를 정확히 지시하시고 이스라엘은 그 지침에 따라 정확히 행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1,2절에 보니 그 어디에도 이스라엘이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묻는 구절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가발전입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한 전쟁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 없이 행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4천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게 되니까 갑자기 법궤를 찾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습니다. 아주 불신앙의 극치입니다. 그러니 언약궤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기적의 능력을 믿고 실로에서 언약궤를 실어 왔지만 허사였습니다. 언약궤의 보호와 능력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4천명이 전사할 때도, 이스라엘이 3만명 전사할 때도 하나님의 보호와 기적은 없습니다. 법궤가 있어도 패배한 경우입니다.
그 다음 다윗의 경우를 봅시다!
다윗은 말년에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 하루 아침에 황급해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피신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황망히 감람산을 넘어 유대 광야로 피신하려는 시점에 사독 제사장과 모든 성전 맡은 레위인들이 법궤를 메고 왔습니다. 도피 망명길에 오르는 왕을 위해 법궤를 메고 나온 것입니다.
망명 길에 오르는 다윗이 법궤를 가져가면 여러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법궤를 가지고 있는 자가 정통성이 있으니 정통성 시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고, 법궤와 제사장이 모두 다윗에게 있으면 백성들의 민심을 모을 수 있고, 마지막은 법궤의 실제적은 기적의 효력 즉 요단강을 가르는 것과 같은 기적과 보호를 얻을 수 있으니 일석삼조(一石三鳥)인 셈이지요. 쫓기는 처지, 위기의 순간, 불리한 위치에서 다윗은 스스로 유리한 상황을 차단합니다.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고 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으면.. ” (25절) 궤와 그 계신데 즉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이 법궤를 가져가지 않아도 내 속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데를 보이시리라 ” (삼하 15:25)
반대로 “ 내가 너를 기뻐아니한다 하시면.. ” 그러면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 길에 인도도 없을 것이요, 보호도 없고, 기적도 없을 것입니다.
“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 (삼하15:26)
법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선히 여기느냐 아니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문제입니다. 믿음의 순도의 문제입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사오정 이야기입니다.
손오공 면접이 면접을 먼저 봤습니다.
“축구선수 누가 좋아합니까?” “예전엔 차범근 요즈음엔 안정환입니다. ”
“산업혁명이 일어난 때는 언제입니까?” “18세기 말입니다”
“UFO가 있다고 믿습니까?” “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진 않았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
사오정이 손오공을 졸라 면접시험을 달달 외어 그대로 대답합니다.
“이름이 무업니까?” “예전엔 차범근 요즈음엔 안정환입니다. ”
“그럼 언제 태어났소?” “18세기 말입니다”
“당신 바보요?” “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진 않았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
외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따라 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흉내 내고 무늬 갖춘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내적 진정성의 문제입니다. 내용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법궤를 다루는 두 경우를 보았습니다. 한 쪽은 법궤를 실제로 동원하고 모십니다. 그래도 엄청난 패배를 당합니다. 한 쪽은 법궤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법궤의 효력을 조금도 빌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인도, 보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무엇이 능력을 발휘합니까? 무엇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무엇이 위력을 발휘합니까? 바로 믿음의 내용(內容)입니다. 믿음의 형식(形式)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의 순도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순도가 얼마냐 높으냐의 문제입니다. 속 중심의 문제입니다. 겉 태도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외식(外飾)과 내식(內飾)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안을 꾸밀 것입니까? 겉을 꾸밀 것입니까? 예수님은 내식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바리세인 서기관들과 그리도 치열한 싸움을 하신 것은 바로 안을 꾸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 하나남과의 관계에 집중하라! 믿음의 순도를 높이라! 내용이 중요합니다. 겉 형식이 중요한 게 절대 아닙니다. 겉 형식은 아무리 갖추어도 내용이 마음이 부실하면 능력이 나가지 않습니다.
까닭에 지금 우리는 시급히 믿음의 내용을 정비합시다.
믿음의 순도를 끌어 올립시다. 믿음의 순도를 높입시다.
믿음의 순도가 높을수록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순도가 탁하면 아무리 해도 헛일입니다.
사울은 가장 좋은 것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건 순도가 탁한 것입니다. 좋은 것을 드리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을 빠트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세가 관계가 불순한 것입니다.
“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15:19-22)
어떤 열쇠가 더 잘 열립니까? 금열쇠? 은열쇠? 다이아몬드 열쇠? 철 열쇠? 해답은 간단합니다. 맞는 열쇠가 잘 열립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입니다. 주님을 진실로 의지할 때 위력이 나타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바를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순도 높은 믿음에서 기적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믿음의 위력입니다. 무늬만 가지고는 백날을 해봐야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생만 할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부의 옆전 두 렙돈과 바리세인의 금화 헌금의 차이를 아시지요? 십일조도 많이 하는 것보다 철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저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와 감사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능력을 발휘합니까? 무엇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무엇이 위력을 발휘합니까? 믿음의 내용입니다. 믿음의 형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의 순도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순도가 얼마냐 높으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르면 능력이 나갑니다. 속 중심의 문제입니다. 겉태도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속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뭐든지 중심이 중요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삼상16:7)
하나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절대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절대 환경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남과의 관계에 집중하십시오! 절대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비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으십시오.
믿음의 순도를 높이십시오! 믿음의 순도가 탁해져서 나온 패배입니다. 믿음의 순도만 높이면 무조건 승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고조가 되게 하십시오!
믿음의 내용을 정비합시다.
믿음의 순도를 끌어 올립시다. 믿음의 순도를 높입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비합시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큰 능력이요 기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위기를 극복한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을 가르는 힘이 될 것입니다. -아멘_
언약궤를 잃은 자, 되찾은 자
삼상 4장 5~11절, 6:12-16 / 최종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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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백성들에게도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기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용기와 힘을 얻게 하시고 때로는 우리들에게 내리막의 아픔을 주셔서 그 가운데 깊은 인생을 음미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복을 이루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때로는 우리의 삶의 장면에서 승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실패함으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서 안타깝게 이스라엘은 대패하고 블레셋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사사시대이후로 길고 긴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이 블레셋 민족이 생성되게 된 원인자체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가나안에 입성하게 될 때 그 가나안에서 이방신상을 섬기고 있는 모든 잡족들을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멸이라는 말이 사실 상당히 어려운 말이죠. 모두 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죽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어른 아이 남자 여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 가나안에 잔존하고 있는 잡족 백성들을 어떻게 이렇게 다 죽여 없애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매우 잔인하신 하나님 같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다 죽이라는 의미가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게 될 때 그 사람들이 남아있게 되면 결국 그들이 섬기고 있는 이방신상도 함께 이들과 동화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그들과 교통하게 될 때 그들과 통혼하게 되고 통혼하게 되면 그들이 섬기던 이방신상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넘어오게 되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같이 섬기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됐죠?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하나님을 버리는 역사가 있게 되었고 하나님을 버린 결과로 이들은 큰 고통을 겪는데 그것이 사사시대의 고통의 순환과 그리고 열왕시대에 들어서도 끝없는 블레셋과의 쟁투였습니다. 이 블레셋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정복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가다보니까 두 가지 이유에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첫째는 철기문화의 영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 이들은 아직 청동기문화 속에 살고 있었어요. 모든 무기, 모든 기구들이 다 청동기 시대에 속했던 청동문화도구였습니다. 그런데 가다보니까 철기문화를 받아들인 이와 같은 가나안의 잡족들이 있었어요. 보니까 거기는 철병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철병거뿐 아니라 철병거로 대표되는 모든 철기문화의 예리한 병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들은 간담이 서늘해서 그들을 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회하게 되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입니다. 이전에 이들이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한 것이었지 이들이 청동기병기를 가지고 있는가, 이들이 마병이 많은가, 아니면 이들이 힘이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 승리하게 되는 역사였지만 이들은 그만 철병거와 철기문화의 모든 병기를 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 마음이 두려워서 우회하여 그들을 남겨두고 갔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들에게 항복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항복한 사람이고 뭐고 그들을 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했지만 이들은 욕심이 생겼어요. 그들을 데려다 물을 긷게 하고 그들을 데려다 나무를 하게하고 그들의 종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었죠. 결국 그들이 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성경 뒤로 조금 가게 되면 이제 이 하나님의 언약궤 즉, 법궤가 블레셋 땅에 머무른 지명이 나오게 됩니다. 처음에 아스돗 가드 에그론. 이와 같은 지역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하여 그 잡족들을 진멸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었습니다. 그 민족들이 곳곳에서 형성되어서 생긴 백성이 블레셋 백성이에요. 그러니까 블레셋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생긴 민족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적으로 부딪힘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과 쟁투하고 전투하게 되는 장면이 연속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화근을 남기게 되었던 거죠. 그런데 오늘도 그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가 이어졌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갔던 이스라엘이 대패합니다. 무려 군사가 4천명이나 살상을 당하고 이와 같이 초토화되어버렸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너무 슬펐어요.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 우리가 저 할례없는 잡족 블레셋 백성에게 이와 같이 대패를 당할까’ 그들은 너무나 큰 낙담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회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결정을 합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길을 걸을 때 법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앞서갔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고 우리가 가나안에 입성할 때도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먼저 진행함으로 말미암아 이 제사장들의 발목이 요단강에 담기는 순간 요단물이 갈라지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우리가 그 많은 가나안의 잡족들과 전투를 통해서 우리가 나라를 세우는데 법궤를 메고 가는 곳마다 역사가 있지 않았느냐 특별히 여리고성 앞의 그 난공불낙의 성 앞에 우리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앞서가고 백성들이 따라가고 우리가 일곱 바퀴 돌고 ‘와’하고 외칠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외칠 때 그 여리고성이 우르르 무너지지 않았느냐 법궤를 가져오자 그러면 우리가 승리하리라‘
그럴듯한 얘기였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한 가지 함정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은 법궤라는 경건의 형식의 주술적인 힘을 요구했지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전투에서 패배하게 했는지 하나님이 전투에서 패배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전투의 상황이라는 상황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와 같이 법궤를 가지고 와서 그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재차 전투가 붙었어요. 여기서는 그야말로 민족의 국운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전에 4천명이 살상되어서 그와 같이 낙담하던 이들에게 이스라엘 군사가 3만 명이 죽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초토화되었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국기처럼 여겨졌던 국운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법궤마저 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빼앗기는 허탈한 사람이 되었어요. 실로에서 법궤를 가져와서 그것을 앞세워서 전투했는데 3만 명이 죽고 그리고 초토화되고 법궤까지 뺐기고 그리고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홈니와 비누아뜨는 죽게 되고 그 고통의 순간에 비누아뜨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어요. 이가봇이라고 고통 중에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가봇’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뜻이에요. 이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겁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이상이 희긔하던 때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엘리도 하나님의 영역을 상실하게 되고 홈니와 비누아뜨는 불경하다하여 이와 같이 죽게 되었고 법궤는 빼앗겼고 사람들은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것은 땅에 떨어진 이와 같은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법궤가 가는 블레셋땅 지역마다 하나님이 스스로 역사하심이 임하게 됩니다.
이 법궤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은 처음에는 의기소침하고 다 쭈그러들었어요. 그런데 블레셋에서 더욱더 사람들을 북돋습니다.
“자, 법궤가 왔다고 하자. 만약에 우리가 이 전투에서 힘을 내지 않으면 히브리사람이 우리의 종 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저들에게 종이 되어서 우리는 평생 종살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힘을 내서 싸우자 블레셋 용사들이여” 결과적으로 기를 쓰고 싸움으로 말미암아 이기고 법궤까지 빼앗아갔어요. 그 법궤를 처음에는 아스돗을 가져가게 됩니다. 아스돗에 가져갔을 때에 법궤를 다곤 신상 옆에 두니 다곤 신상이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엎드러져 깨져있어요. 독종이 일어납니다. 백성들에게 온 전염병이 퍼져요.
“야, 이거 큰일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드로 옮겼어요. 가드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 에그론으로 옮깁니다. 에그론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의 원성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여호와라는 신이 어떤 신이냐 우리가 그 얘기를 듣지 못하였느냐 우리가 그 법궤를 가져와서 이런 재앙을 당하니 법궤를 빨리 도로 이스라엘로 보내자.”
그래도 이 방백들은 마음에 미련이 남아요. 이런 제안을 합니다.
수레를 하나 만들고 그것을 새끼가 있는 어미 암소에게 메되 두 마리를 메어서 뒤에서 새끼들이 울면 그 소들이 돌아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그래서 소들이 다시 돌아오면 이것은 자연에 합당한 것이니 우리가 당한 재앙은 자연이 이룬 우연한 것이라고 하자. 그러나 만약에 그 새끼들이 욺에도 불구하고 그 어미소가 앞을 바라보고 가서 이스라엘 지방으로 들어간다면(그곳이 바로 이스라엘의 변경지방인 벳세메스 지역이었습니다.) 들어간다면 이것은 자연을 능가하는 것이니 이것은 여호와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법궤를 넘겨주자.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되었냐하면 새끼소들이 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미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은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법궤를 되찾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 가운데 하나님은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고 혼자 스스로 역사하시는 분이에요. 스스로 있는 자, 스스로 그 영광을 선포하며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에 동참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즉 법궤를 빼앗긴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그 법궤를 도로 되찾은 이스라엘 백성,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법궤를 잃어버린 자, 법궤를 빼앗긴 자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실패는 무엇입니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하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아 그들은 그들의 모습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법궤를 가지고 온 결과 즉, 경건의 형식을 차용하여 그들은 경건의 능력은 없는 채로 그들은 그 일을 진행한 결과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대량 살상당하고 민족의 국운의 상징인 하나님의 법궤, 언약궤까지 빼앗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지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의로 하나님을 마침내 요술지팡이처럼 휘둘러 사용하려는 자신의 뜻을 성취하려는 이와 같은 자들의 공경과 아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에게 영향받지 않고 스스로 존귀함을 선포하고 스스로 영광을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영광이 선포된 곳에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이런 참혹한 실패가 원인이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에서 생각할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 백성들은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을 돌아보지도 않고 상황 속에 매몰되어 어떻게 해서든지 이 상황만을 해결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상황을 만드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이 상황만을 해결해서 내가 이것을 이루어보고자 그들은 이와 같은 마음으로 법궤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삶의 기대치 못한 어려움이 있을 때 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아니면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 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통해서 원하고 이루시는 것이 무엇인가 대한 묵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볼 때는 딱 한가지였어요.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할게 되었도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능과 좌절을 느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 속에 하나님이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본 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자는 하나님 앞에 다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그 지존과 온유하심 가운데 우리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볼 때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아무런 의사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이 상황만을 해결하길 원했던 결과 하나님과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궤, 이 언약궤를 마치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였죠. 하나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뜻으로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용당하고 통제당하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그런 정도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주의 지존자요 통치자로서 피조물인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전혀 앞뒤가 바뀌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애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에게 사용 당해지는 엉뚱한 상황이 벌어질 리가 없습니다. 결과는 예상조차 못한 참극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법궤를 뺏기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건데 그 법궤를 블레셋 백성이 빼앗아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그렇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내게 종속된 분이 아니라 내 인간이 하나님께 종속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가지고 있는 확신가운데 하나는 우리 인생이 안전하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언제나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호흡할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종속되었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다루듯이 우리를 쥐락펴락하며 마음대로 우리를 휘두르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가 종속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불안한 대신 하나님의 크심 넓으심을 믿고 하나님을 기대하며 그 평안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감사하며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내가 지금 경건의 능력가운데 있는 것처럼 착각되는 경우에 우리는 참패와 낙망의 지경에 빠질 위험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법궤라는 경건의 모양은 차용되었어요. 그런데 당장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는 이와 같은 경건의 실제능력은 아무것도 없는 상실된 상태였습니다. 모양만 가지고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다하고 성경∙찬송가지고 교회 나오고 집에서 기도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고 하지만 그와 같은 모든 모양위에 더하여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께 관심 있는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 내가 하나님께 종속되어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영광임을 아는 것이죠. 인본주의라는 것은 내 생각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영적인 무지함과 하나님을 무시함입니다. 내가 해야 될 일에 머리가 분주하니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이루실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 미처 가지 못하고 결국 내가 마음에 원하는 계획과 지혜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죠. 이게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이럴 거야.’ 라고 하나님의 생각까지 내가 결정해버리는 불경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나는 내 뜻대로 한다는 하나님을 거역하고도 두려워하지 않음. 이와 같은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나를 살펴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뜻과 의중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하나님께 비추어진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항상 무엇인가 나 아닌 다른 것에서 불평이나 아니면 내 마음의 섭섭함이나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의 요인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의 나를 바라보아 고치지 않고 무엇인가를 이루려하기만 하고 진행하기만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 인생은 아픔과 고통이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하나님 앞에 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는 거예요. 나중에 나오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을 겪었을 때 미쓰바에 모여서 사무엘 선지자가 대성회를 가지지요. 그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광을 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게 주어진 어려움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원하심으로 우리가 다시 달려가는 것입니다.
전에 체육대회를 1년마다 한 번씩 했습니다. 큰 운동장에서 같이 해요. 실내운동장에서 한 적도 있지만 대부분 매년마다 학교를 하나 빌려서 거기서 계주도 하고 농구도 하고 피구도 하고 여러 가지를 하는데 그래도 역시 보니까 스포츠의 묘미는 스피드인거 같아요.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빨리 달리는 것에 집중해서 굉장히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아요. 계주를 볼 때 사람들은 다 집중되더라고요. 그런데 계주는 몇 사람밖에 못하잖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뛸 수 있도록 모든 남자성도들 다 경기에 임하도록 했어요. 그래서 4~5명 정도 한 팀으로 해서 쭉 줄 세워서 달리기를 해서 조별로 시상도 하고 했는데 그해만 하고 다음해는 안했어요. 왜 그러냐하면 100m좀 못되게 단거리를 하는데 남자성도들이 쭉 왔는데 40대, 50대 이런 사람들도 다 서있단 말이에요. 거기에 아내도 보고 아이들도 보고 그러니까 이분들이 힘이 나고 용기가 나고 그래서 남자들은 뭔가 누군가 응원해주면 뭔가 이루고 싶은 게 있잖아요. 그래서 ‘땅’ 하면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리는 거예요. 그런데 40대, 50대 이런 사람들이 과연 잘 달릴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마음에 있으니까 다리보다 팔이 더 많이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가속도가 생긴단 말이에요. 그런데 가속도가 생겨버렸는데 다리가 그 속도를 못 따라 가는 거예요. 여러분, 이해하시겠죠?
그러니까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이 가다가 넘어지더라고요. 그런데 가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넘어지니까 많이 다쳤어요. 그래서 그 다음해부터는 남자 단거리는 안했습니다.
이게 왜냐하면 내 능력을 과신한 거예요.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만 다리가 안 쫓아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과 똑같은 모양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백성으로 모양은 가질 수 있어요. 여러분 모양도 중요하고 능력도 중요합니다. 두 개 다 중요합니다. 모양은 필요 없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으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이렇게 넘어지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 거죠. 나도 모르고 내 상태도 모르고 가속도만 붙이니 크게 다칠 수밖에 없죠. 하나님 앞에서 내 상태를 아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뜻과 자비와 하나님보시는 영원한 모습을 바라보는 거죠.
그러면 두 번째, 언약궤를 되찾은 사람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이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에요. 언약궤를 잃어버린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는데 그 언약궤를 다시 찾은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언약궤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와같이 자신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모양만을 차용하여 과신하여 나가다가 어려움을 겪었는데 언약궤를 찾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들은 자기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언약궤를 찾기 위해서 자신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순전하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이스라엘 지경까지 직접 갖다 놓아주신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칼빈주의에서 구원의 5대교리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불가항력적인 은혜’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실 때 우리는 누구도 그것을 항거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실 때는 누구든지 불가항력, 항거할 수없이 우리는 그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요소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거룩한 구원의 은혜를 다 안 받으려고 차치하려고 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그 은혜를 받으려고 우리는 받을 수밖에 없어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 겁니다.
우리 인간들을 다루신 하나님의 은혜도 그러해요. 하나님은 우리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시켜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능력이 있어서 은혜를 입은 게 아니에요. 수고를 해서 은혜를 입은 게 아니라 자격이 있어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스스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법궤를 되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해서 4주에 걸쳐서 법궤 언약궤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강권적인 일방적 은혜였어요. 그러므로 법궤를 되찾은 자는 어떤 능력이 있고 여건이 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로 법궤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입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것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입는 것도 지금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였다라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이 다른 것은 간단합니다. 호흡의 길이차이에요. 우리 인간들은 눈앞에 있는 상황에 매몰되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서 벗어나기를 원해요. 그러나 조금 거기서 벗어나보면 이 상황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분, 우리가 1년 뒤를 알겠습니까, 2년 뒤를 알겠습니까, 3년 뒤를 알겠습니까?
내 마음에 1년, 2년, 3년 뒤에 어떻게 변할지 압니까?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1년, 2년, 3년 뒤에 어떻게 될지 알아요?
내 앞에 있는 상황이 1년, 2년, 3년 뒤에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아요?
5년 10년에 어떻게 될지 압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내 마음도 내가 모르는 거예요.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뜻과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거대하고 원대한 계획 속에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하나남의 그 복잡하고 그 많은 우주의 운행원칙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와 같은 것을 우리 인간의 작은 머리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가야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나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가는 우리의 유일한 방법은 호흡을 길게 가져야 합니다. 지금 이 상황이 내 눈앞에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 뒤에 있어질 또 다른 일, 또 다른 일을 통해서 어떻게 흘러갈까를 바라보며 우리는 조금 뒤에서 그 일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는 보다 긴 하나님의 은혜를 이룰 수가 있어요.
이 상황이 지금 내 눈앞에서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 뒤에 있어질 또 다른 일, 또 다른 일을 통해서 어떻게 흘러갈까를 바라보며 우리는 조금 뒤에서 그 일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는 보다 긴 하나님의 은혜를 이룰 수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보다 긴 호흡을 가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상황 때문에 울고 웃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며 지금 저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라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또 나를 어떤 존재로 아는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인식하는, 그리고 내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를 인식하는 정체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관계에 우리의 모든 목숨을 건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가변적이에요. 시간 지나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데 내 마음도 내가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인간관계에 우리 목숨을 건다면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내 상황에 모든 것을 건다면 그것도 위험해요. 내가 원치 않아도 바람 불면 그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위에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일이에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백성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가장 큰 중심사상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주권사상이에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셔서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섭리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제1번째 원칙입니다.
‘하나님 주권사상’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잊고 지내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근본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상황과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상황을 왜 그렇게 만드셨고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 가시려는가에 대한 우리의 조심스런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시려는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 순간에 끝내지 않아요. 이 순간을 통해서 또 다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내 눈앞에 이루어지는 순간과 상황이 전부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 최선을 다해야 돼요. 그러나 인생은 지금 순간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지금 상황 때문에 나의 마음의 모든 걸 결정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으로 이런 상황이 열 번 있을지 백 번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상황에 최선은 다하되 이것이 내 인생에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넘어져도 이게 전부는 아니다. 흥해도 이게 전부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며 순간 속에 최선은 다하되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께 뜻과 섭리를 바라보는 거예요.
영화 속에서 눈물, 슬픔, 웃음들이 있어요. 우리는 빠져 들어갑니다. 영화관에 가면 두 시간동안 그 가운데 빠져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영화는 두 시간분량이다 생각하고 그 안에서 즐기는 거예요. 그러다가 나오면 우리는 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돌아오는 겁니다. 집착하지 않아요. 영화 화면에서 악한이 정말 비겁하게 주인공의 등 뒤에서 총을 쐈어요. 화가 나서 화면으로 쫓아가서 발길질하고 주먹으로 그 화면 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 시간짜리 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마치 현실로 느껴져 영화가 끝나도 주인공 뒤에서 총 쏜 악한에 대해서 분노하고 영사실로 들어가서 그 필름 끊어내야 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우리의 본향이 어딘가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삶의 현실은 지금이 전부 현실은 아니에요. 지금이라는 세상을 건너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허구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뭐라고 어떻게 하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드릴까. 말씀을 안 드려도 하나님이 내 마음을 아시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하나님께 내 삶을 하나님께서 보실 수 있도록 내 삶을 구성할까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늘 제가 두 가지 트랙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라는 트랙이 있어요. 여기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답답함도 있고 애환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자꾸 상황에 매몰되다 보니까 하나님의 뜻을 자꾸 잃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이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정말 너무너무 진저리나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 때 여러분은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른 트랙으로 들어가셔야 돼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는 삶이라는 트랙으로 들어가셔야 돼요. 그 트랙에서 나오지 않는 한은 그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해결 안 되고 거기서 빨려 들어가서 그 일은 점점 저 고민하게 할거고 점점 더 잠이 안 오게 할거고 점점 저 괴로워지고 관계는 점점 더 꼬이게 되고 해결이 안돼요. 그리고 해결됐다고 하면 조금 있다가 또 뒤집어져요. 그게 우리 인간의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트랙에서 벗어나 우리 나름대로의 트랙을 가져야 돼요. 그게 뭐죠? 우리는 하나님 바라보고 가는 겁니다.
여긴 어려운 건 어려워도 나는 또 기쁜 대로 하나님 바라보며 지금 내가 행동하는 것도 트랙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보다 긴 호흡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제가 이렇게 쉽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여기 보면 부부가 많이 사세요. 결혼한 분들이 많은데 여러분 살다보면 인생에 어떻게 좀 말다툼 하고 살지 않겠습니까?
여기는 그런 적이 없나봅니다. 아까 1부 예배 때는 다 말다툼도 하고 사나 봐요. 살다보면 어쩌다가 인생에 한 두 번은 다투고 살죠?
그러면 제가 설교하기 굉장히 머쓱해지는데요, 제가 그럼 이렇게 여쭤볼게요.
여러분, 살다보면 수천 번 싸우고 살죠?
아, 제가 잘못 여쭤봐서 그렇군요. 매일 싸우고 다투고 사니까.
밥 잘 먹었어요. 과일 깎아주는 것도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차 마시다가 갑자기 무슨 한 마디에 부르르 끓어올랐어요.
아, 이게 뭐야 도대체. 다정하게 밥 잘 먹고 과일도 먹고 갑자기 차 마시다가 말 한마디에 부르르 끓어올랐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좋다. 오늘 어쨌든 끝장을 내봅시다. 우리 전에도 이런 적 많으니까 여기서 오늘 정리합시다.
정리가 돼요, 안돼요?
정리가 안 되죠. 정리 안 됩니다. 그 때 우리가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가 뭡니까?
그런 순간에는 한 마디 딱 하면 벌써 딱 알아차리고 “여보, 우리 사흘 후에 다시 이 문제가지고 다시 의논합시다.” 사흘 후에 이 문제가지고 싸웁시다 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돼요. 사흘 후에 싸울까요, 없던 일같이 될까요?
사흘 후에 또 그 문제 가지고 싸우자고 테이블에 앉으면 그 사람은 독한사람입니다.
대부분 잊어버리죠. 그게 무슨 큰 문제예요. 다만 잠시 감정이 또 끓어올랐던 거겠죠. 그런데 거기서 끝장내려고 한다면 정말 끝장나요. 그 식탁에서 차 마시다가 괜히 말 한마디고 말미암아 화난 게 그게 3일짜리 싸움되고 일주일짜리 싸움되고 한 달 짜리 싸움돼서 친정에 가버려요.
이 트랙에서 벗어나야 돼요. 사단이 이 트랙으로 우리를 함몰시키는 겁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고 괴롭게 하면 빨리 벗어나서 다른 트랙가운데 가야해요.
우리 상황이라는 것은 늘 돌고 있는 트랙가운데 우리는 또 다른 트랙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의 트랙을 운행해 나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계략에 말려드는 거예요. 사단의 계략은 뭐죠? 어떤 것이든지 우리를 번민하고 괴롭게 하는 거예요. 진리에 대한 싸움은 고민이 없고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다툼이든 괴로움이 있다는 건 진리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에요. 시간 가고 지나가면 어떻게 하겠어요. 혹시라도 한두 마디 조짐이 그렇다면 “여보 미안해 내가 지금 빨리 샤워 좀 하고 올게.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리고 다시 들어오면 그러면 다시 말도 거론도 할 필요도 없잖아요.
승패는 인간이 생각하는 시점과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장 부끄러웠던 때가 있지요. 이기려고 했던 때, 내가 우수한 것을 입증하려고 했던 때, 다른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내가 증명하려고 했던 때.
정말 우리는 내가 치졸했구나. 내가 이정도 수준밖에 안됐나 라고 우리는 너무 그 순간을 생각하면 부끄럽잖아요. 힘이 없으니까 이기려고 하는 거예요. 힘이 없는데 뭐하러 이기려고 하겠어요. “아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져주는 겁니다.
내가 논리적으로 우승한다고 생각하면 상대에게 져주는 거예요. 내가 깜빡 생각 못했네. 미안합니다라고 얘기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게 잘 안돼서 괴로움을 겪고 사는 것이 우리인생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짜증내도 남편이 아내에게 짜증내도 내 주변사람이 나에게 짜증내도 그 때 조금 맞춰주면 되잖아요. 어디 힘든가보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생각가지고 조금 더 배려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도 그렇잖아요. 다른 트랙에 들어서야 돼요. 아이들이 가끔가다 보면 부모의 마음을 상심하게 할 때가 있어요. 논리 세우고 빠닥빠닥 대들 때가 있잖아요. 내 인생 내 건데...
이러고 이거 뭐 세계 청소년의 공통된 거잖아요. ‘내 인생 내 건데.’
그 때 부모가 논리 내세우고 뭐 이런 저런 거 하고 내가 뼈 빠지게 일해서 돈 주고 밥해주고 옷사주고 잠자리 재공해주고... 그래서 걔가 마음이 설득이 되겠습니까?
그 때 우리는 또 다른 트랙으로 들어서야 돼요.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참 고맙다. 네가 이만큼 커서 이제 나를 능가하는구나.”
자, 따라서 합시다.
“부모를 이기는 모습으로 이 세상도 그렇게 이겨라.”
그래요. 우리 자식들에게 그렇게 축복할 수 있잖아요. 자식들에게 맞딱 들이는 가장 큰 우주는 일단 부모예요. 부모라는 우주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의 힘으로 그 부모라는 우주를 깨트리고 나가야 세상을 향해 나가는 거예요.
“그래. 내가 너하고 그렇게 말다툼하다보니까 내 능력으로는 네 논리를 도저히 못 깨겠다. 정말 네가 이렇게 논리적으로 발달했네. 네 말이 이렇게 조리가 있냐. 아빤 못 당하겠다. 엄만 못 당하겠어. 이제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날 좀 도와다오. 그리고 네가 이 부모를 이기는 힘으로 세상을 이겨라.”
그 자녀들을 축복하면 자녀들이 얼마나 용기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거기서 내가 논리를 가지고 말을 가지고 그 자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증해서 자식의 입에서 “예, 부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 말이 꼭 나와야 되겠어요? 그런 말 나오면 자식은 그렇게 말하고 부모하고 끝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항상 두 가지 트랙을 가지고 움직여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고통스럽고 괴로운 트랙에 있을 때 얼른 빠져나와서 그건 그대로 흘러가게 하고 나는 내 트랙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 앞에 해결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사의 문제를 인간이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마음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은혜를 주시야죠. 여러분 블레셋 진영에 가서 법궤를 탈취해 온 것이 아니에요. 법궤 스스로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은혜를 간구하고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하는 일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은 우리를 어떤 상황으로 함몰시키는 거예요. 그 상황에 함몰시키고 그 상황만을 해결하자하면 어느새 하나님은 우리에게 간곳이 없고 상황 속에 빠져서 내가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예요.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어져 버려요. 그래서 우리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우리는 또 다른 트랙가운데서 들어서야 하는데 그것이 믿음의 트랙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전투에서 패배라는 상황 속에서 전투의 승패를 따지기 전에 일단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왜 하나님이 전쟁에 실패하게 하셨을까, 왜 하나님이 이런 아픔을 겪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그 전투의 승리만을 생각했던 거예요. 그 결과 이와 같은 아픔이 있고 그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의 아픔이고 실패고 고통이에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역사하시는 분이에요.
누구의 도움도 원치않고 스스로 역사하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우리가 그 은혜에 동참하여 그의 자비와 은총을 입게 되면 우리는 은혜에 동참한 자로써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많은 군상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단 한순간이라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을 때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 속에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잃어버린 법궤
삼상 4장 5~11절 / 김형준목사
일제통치 아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4년간 옥고를 치루며 헌신하셨던 분이 있습니다. 최초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수라고 볼 수 있는 이 분은 한국 교회 분열을 비판하고 순수복음을 위해 헌신하신 목사님입니다. 바로 김인서 목사님이십니다. 1948년 공산정권의 압제를 피해 월남하신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민족을 향한 남다른 사랑과 열정으로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다음과 같이 통곡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불탄 성읍을 향해 우는 것이 아니라 이 백성의 죄를 통곡 하옵고, 무너진 예배당을 곡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통곡 하나이다. 당신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우리는 당신의 채찍 아래 공손히 엎드리나이다. 번화한 거리에서 범한 죄악을 폐허에 엎드려 회개 하옵고 벽돌 예배당에서 지은 죄를 재위에 앉아 회개 하나이다.”
무너진 교회와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보고 슬퍼함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배후에 원인인 우리 민족의 죄와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함께 묵상할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법궤를 빼앗기게 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첫 전투에서 4천명이나 죽게 됩니다. 전세를 만회할 자신이 없었던 이스라엘은 법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자는 결론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패배했고 법궤는 오히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무엇이 패배의 원인이 되었는지 법궤를 빼앗기고 난 후 통곡하며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특별히 법궤를 빼앗기게 된 것은 새삼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음을 관찰해 보고자합니다. 이미 이스라엘 삶 속에 법궤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전쟁에서의 패배와 법궤를 빼앗김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지치고 힘들 때마다, 죄를 짓고 괴로워하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마다, 법궤가 있는 성막에서 용서하시고 베푸시고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또한 법궤를 가지고 나가면 어떤 전쟁이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이스라엘의 과거를 말해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는 흩어진 12지파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임을 보여주는 정체성의 상징이었습니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도 그들의 인도자가 되실 것을 말씀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법궤를 잃었다는 것은, 법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그들의 과거 현재 또한 다가올 미래까지 상실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법궤를 빼앗기고 난 다음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습니다.
오늘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에서 잠시 지나가려던 역이 그만 인생의 종착역으로 변한 사람들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눈물을 봅니다. 사건을 보는 우리도 민족 전체의 운명이 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무엇을 향해서 계속 걸어가고 있다면, 본문의 사건을 거울삼아 돌이키고 회복해야 할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심판의 역사로 나아가던 방향에서 돌이켜 회복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비전을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이 법궤를 빼앗기고 나서야 깨닫게 된 자기 사회의 문제점, 빼앗기기 이전에 그 사회 속에서 이미 잃어버리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비전과 꿈을 잃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과 모습을 잘 전해주는 말씀이 있는데 바로 사무엘상 3장 1절부터 2절까지 말씀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성경은 엘리라는 한 제사장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면서 그 시대 어두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백성의 현실을 직시하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해 주어야 할 제사장의 눈은 점점 어두워 갔습니다. 백성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제사장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자신의 처소에 누웠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당시 어두운 역사를 잘 표현해 주는 상징적인 본문입니다.
이를 좀더 포괄적이고 전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말씀은 사사기 21장 25절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의 가장 혼란스러웠던 사사기 시대를 핵심적이면서도 대표적으로 나타내주는 구절입니다. 왕이 없었다는 말은 섬길 왕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섬김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을 따라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두실 때에는 당신의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출애굽기 19장 6절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노예인 그들을 구원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둔 목적은 이 세상 속에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백성들 눈에 눈물이 씻겨지고 구원과 참된 소식이 증거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각각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내 집 마련의 꿈, 2세를 위한 꿈 등.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과 저주에서 이유 없이 건지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나 뿐 아니라 우리 가정과 우리 가정뿐 아니라 이 한반도,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를 구원하여 주셔서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복음의 나라, 경제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한 나라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우리를 통해서 죄와 사망 속에서 눈물 흘리는 백성의 눈물을 씻기시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일을 위탁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꿈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의 꿈을 간직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부르신 꿈을 잃어버리셨다면, 본문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당하는 어려움을 동일하게 겪게 됩니다.
인간이 가진 꿈은 희망을 준 적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60년대 우리 민족의 꿈은 ‘잘 살아 보세’ 이었습니다. 부르는 노래도 ‘새벽종이 울렸네’, ‘어서 어서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같은 가사의 노래였습니다. 정말로 새벽부터 나가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허리띠를 졸라 맸습니다. 뜨거운 사막의 나라에 가서 잘 살기 위해 땀 흘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게 되었습니다. 잘 살게 되고 보니 어떻습니까? 뭔가 새로워지고 달라질 것으로 상상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경제적 성장은 더 큰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70년대 우리의 꿈은 민주화였습니다. 군사 독재가 지나가고 민주화가 되기만 한다면 노동자 농민이 새롭게 살게 되고 장애인들이 가슴을 펴고 살게 될 줄로 꿈꾸었습니다. 80년대 초, 제가 운동권 학생들과 대화할 때만 해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민주화가 빨리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살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민주화되고 난 다음에는 뭐 할래?” 그랬더니 “그것은 그때 가 봐야 알겠습니다.” 그러나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를 맞이하고 이제는 대중의 정부, 참여의 정부 시점에 와 있습니다만,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독재를 보지 않습니까?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인간의 비전은 인생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은 통일의 꿈을 꿉니다. 한때 통일을 반대하면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는 분위기였습니다.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통일의 꿈이 우리 민족에게 진정한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통일은 분명한 사명입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 이후에 무엇을 이룰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통일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통일이 되던 통일이 되지 않던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삶에서부터 가정과 민족, 교회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에 의와 희락과 화평이 넘치며 참된 평안과 기쁨이 있고 조화와 화합을 이룰 수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도록 우리에게 그 꿈과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점차 풍요로움과 편안함을 누리는데 비해서 하나님의 꿈은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현상들을 보십시오.
중풍이 와서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는 56세의 한 사람이 이번 대구 화재 참사의 범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분에 대해서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50대가 되면 성한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퇴출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현실과 장애가 왔을 때 방치되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아 볼 수 없는 절대 절망이 그의 삶 속 깊이 찾아 왔을 것 같습니다. 절망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기가 죽든지 남을 죽이든지 함께 죽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옹호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많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조금씩 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세상의 꿈 때문에 스스로 짓밟히고 희망을 빼앗기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상 참담하게 느껴졌던 때가 우리 민족에게도 있었습니다. 한일 합방이 되고 우리의 젊은이들은 기가 꺾였습니다. 자주 독립의 마음은 있었지만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삶의 철학으로 믿어왔던 유교와 불교는 절대 절명의 상황 앞에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꿈은 젊은이들 가슴속에 생명력을 불어 넣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가슴에 하나님께서 다시 이 나라에 주권을 허락하실 때에는 생명의 나라로 만들리라는 꿈이 약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의 일꾼을 부르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한걸음 내딛으며 절망의 역사를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3.1 운동이 일었습니다. 3.1 운동이 기독교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통해서 우리 가정에 아버지의 나라가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통해서 아내의 눈에 눈물이 씻겨지기를 원하십니다. 남편의 절망과 좌절이 해결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가정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우리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와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그 나라가 증거되기를 원하십니다. 한국 교회가 부해지면서 이 사명을 잃어 버렸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을 다시 찾아야합니다. 내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찾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꿈을 잃은 시대의 결론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암흑으로, 암흑으로 치닫게 됨을 본문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두 번째로 법궤를 빼앗기기 전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죄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습니다. 사무엘상 2장부터 4장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망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한사람 엘리 제사장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망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에 엘리 제사장, 그 중에서도 특별히 그의 두 아들의 행위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릴 재물도 먼저 취하였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에 대하여 “내가 이들의 행위를 반드시 갚으리라 이들 때문에 이스라엘을 심판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법궤를 들고 나가서도 이스라엘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의 첫 질문은 ‘내 아들은 어떻게 되었느냐?’였습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질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마르티아’라 해서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고 빗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기를 원하시는 모습에서 빗나간 것이 죄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죄가 들어오면 공동체가 나누어집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남편의 길을 걷지 않고 아내가 아내의 길을 걷지 않는 죄가 그 가정에 들어오면 가정이 깨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나누는 역할을 합니다.
죄는 분별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분별력이 없습니다. 욕망에 이끌려 판단하게 됩니다. 한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첫 전투에서 실패했을 때 그들은 깨달았어야 됩니다. 그러나 ‘법궤를 가지고 나가자’ 합니다. 이는 종교의 형식적인 모습으로 자기 욕망과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법궤까지도, 하나님까지도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분별력을 상실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선조 임금이 1590년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일본에 통신사절로 보냈습니다. 일본의 도요도미 히데요시를 만나 전쟁에 대한 불안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황윤길은 돌아와서 이야기합니다. “임금님, 도요도미 히데요시를 보니까 이 사람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사람입니다. 전쟁을 준비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김성일은 “임금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그 사람은 전쟁을 일으킬만한 위인이 못됩니다. 전쟁 걱정은 안하셔도 괜찮습니다.”라고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 사실은 이미 온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성일의 안이 채택된 이유는 당시 동인서인의 당파싸움에 있어서 김성일이 속한 동인이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곧 바로 임진왜란은 터졌고 한반도는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김성일은 회개하고 전쟁에 나가 전사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를 보고 어떤 분들은 삼국시대라 부릅니다. 호남 영남 이북으로 나누어진 삼국시대. 그래서 여러분은 옳고 그름을 잘 살펴보기보다 지역에 따라 무조건 지지하지 않습니까? 무조건? 무조건 방어하지 않습니까? 미국 방문 후에도 외신과는 보도가 달랐습니다. 앞에서 두 사람이 다르듯이 달랐습니다. 무엇이 현실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분별력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회 속에 자기 욕망의 꿈을 이루려는 죄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또한 사회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사회를 개혁하고 역사를 새롭게 만들겠다고 공언합니다만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될 수가 없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대통령도, 부정부패를 척결하고자 했던 그 사람도 역시 같은 논리 속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 전 제가 ‘진단과 처방’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나누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그 당시 사회를 바르게 진단했던 선지자 사무엘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데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인생 깊은 곳에 있는 죄의 문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모든 문제의 총체적인 원인은 바로 죄에 있다.’ ‘죄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길에서 벗어나 욕망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우리의 죄를 내려놓자.’그러면서 제안했습니다. ‘단장품을 다 내려놓으라!’ 내려놓고 금식하며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바른 진단을 했을 때 올바른 처방을 내렸고 비로소 그 사회는 다시 소생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에 앞서 우리도 모르게 채워진 단장품은 없습니까? 저는 별로 가구 같은 것을 사지는 않는데, 집에서 보니까 뭐가 많이 있습니다. 제 것도 있고, 아이 것도 있고 언제 짐이 이렇게 많아졌는가 싶습니다. 예전에 조그만 교회 목회자로 혹은 부목사로 있을 때에는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제는 ‘동안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면 ‘아, 그렇습니까? 목사님!’하며 다시 인사하는 모습을 봅니다. 뭔가 좀 이상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큰 교회 담임 목사로서 제 속에 단장품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작은 교회 목사님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어려운 교회 목사님을 보는 눈이 전처럼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이 아닙니다. 무언가 줄 것이 내게 있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단장품들이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직분이 주는 단장품 가지고 계십니까? 물질적인 부로 인해 가지게 된 단장품 가지고 계십니까? 건강이 주는 단장품 있습니까?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걸림돌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이 회개 운동입니다. 회개운동만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구원받을 때 고백했던 ‘하나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이 생명 드립니다. 내 삶을 드립니다. 내 소유를 드립니다.’ 원래의 그 모습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단장품을 제거하십시다. 나도 모르게 내 삶 깊게 박힌 단장품을 버리며 고백하십시다. ‘이 폭풍이 나의 연고나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나보다 죄가 커서 그러한 참사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제껏 살려 두셨을까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기대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지금까지 붙들고 계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찬가지로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이스라엘과 같이 법궤를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법궤를 빼앗기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잃는 것과 같은 고통과 아픔을 당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겨 두신 이유를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별할 줄 아는 영적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엘리의 집을 심판하시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시행하셨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삼사천이나 되는 이스라엘 군대가 죽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빨리 돌이켜야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연고인지를 살펴야했습니다.
니느웨 성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하기 전, 요나의 외침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회개할 때 성의 멸망을 하나님께서 거두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습니다. 후에 작은 아이성을 점령하고자 삼천 명으로 공격하였는데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패배의 원인을 적은 군사, 부족한 지원 등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지도자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치 못한 것을 찾는 영적 감각이 있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아픔과 패배를 주셨을지, 패배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간의 배신을 보여주셨고,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난 다음에야 아이 성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민족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된다 하셨는데, 역사의 주관자의 장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 속에 주님의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구 참사 사건을 우연한 사건으로 보십니까? 남의 일로 보십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에 마지막에 극적으로 구출된 사람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모두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으로 구출된 박승현씨는 구출되기 직전에 스님이 나타난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구출되고 나서 부처님께서 살려 주셨다는 그녀의 말은 전 세계 매스컴을 탔습니다. 짤막한 고백이었지만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나라 선대에 놀라운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신실한 고백을 사용하셔서 주님의 역사가 전 세계에 퍼지도록 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가장 복음이 왕성한 나라로 알려져 있는 한국에서 불교 신자를 통해 전 세계 매스컴을 타게 하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여기서 깨달았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깨달음을 놓치고 한국교회가 회개하기를 늦췄을 때 성수대교가 붕괴됐고, 씨랜드 화재참사건,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옷 로비 사건으로 연루된 권사 집사님들, 나라의 부정과 부패 속에 교회 지도자들이 관계되었고 그 후로 교회는 점점 영향력을 잃어 버렸던 일들을 기억하십니까?
반대로 1999년도 미국 콜로라도 주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총기 사건의 캐시 버넬이라는 10대 소년은 범인이 총을 가져다 대고 “하나님을 믿느냐?”는 질문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고백했기에 총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 짧았던 대화는 이내 전 세계에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1999년 5월31일자 타임지에 한 기자는 바로 이 사건이 미국 전역의 10대 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일상 속 사건 중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면 그 시대 역사의 멸망과 함께 우리도 같은 흐름에 휘말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음성을 듣게 되면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영적 감각은 어떤 상태냐?” 하늘을 보며 날씨는 예상할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같습니다. 그날에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하는 일을 계속하는데, 그 중에 한사람은 들림을 받고 한사람은 남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경성하여 기도해야합니다. 시집 장가가고 먹고 마시는 일에 분주하게 될 때, 우리 영적 감각은 어두워지고 육의 감각은 점점 뛰어나 세상에 젖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인도 읽지 못하고 심판 날이 임할 그때서야 후회하게 됩니다.
오늘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연이라고 보지 마십시오. 정말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이 지금 심각한 전쟁 일보직전인데도 불구하고 담담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지하철에서 매캐한 연기가 들어오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코 막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진의 다섯 사람이 다행히 모두 살았다고 합니다만, 상황을 분별하지 못할 때 죽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영적 감각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무언가 잃고 있다는 느낌을 요즘 많이 받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큰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필연코 어떤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어두운 시대를 살아갈수록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우리 속에 하나님의 꿈을 회복하십시다. 내 상황에서 오는 이야기도 내 욕심에서 오는 이야기도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다시 우리 마음속에 품으십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나 비대한 단장품을 제거하십시다. 우리의 기도하는 시간을 더하여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향해 외치는 소리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를 기억하며 모두가 믿음의 증인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