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스팀
정우신
세계는 옷차림만 달라졌을 뿐
누가 말하는 걸까 충분하다고 뛰어내리라고 누가 부르는 걸까
눈의 자리를 더듬었다 안개처럼 강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알루미늄을 씹었다 뱉었다
어느 무당의 말처럼 물을 멀리했다면 미래는 가벼워졌을까 슬픔이 덜했을까
손끝으로 어둠을 두드리다 보면 가끔 별똥별이 보이지 당신의 입속에 있는 자두 익어가는 소리 들리지
초점은 지금부터 잠자리의 몫 초록 눈꺼풀에 감겨 보이지 않는 가을의 몫
―시집 『홍콩 정원』 2021.1 (『시산맥』 2019 가을호, '한강대교'를 개작)
끝나지 않은 이야기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요
감나무와 가로수와 하천을 옮겨가며 체온을 바꾸는 햇살과 바람과 걸음 소리와 기찻길을 모두 줄게요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우월해지는 사람 유전되는 사람
어느 날은 그림자가 신의 귀 같아요
신은 우리집에 사랑과 우울을 흘려놓고
그것을 훔쳐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것을 죽어가는 병아리처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세상의 징검다리에 대해 썼어요
신은 구름으로 퍼즐 놀이를 하며 폭설을 일으키거나 무지개를 띄워놓고 긴 잠을 잡니다
우리는 새끼오리들을 옮겨주거나 물 위에 나뭇잎을 띄우고
멀리 간 바람과
우물 바닥 이끼를 향해 손가락을 뻗어보는 아주 오래된 햇살에 발등을 적셔보고
서로에게 가진 것을 모두 주었습니다
말을 잃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식으로부터
반복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등이 간지러워지는 가난한 소년의 이야기가
—시집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 2022.11 ---------------------------- 정우신 / 1984년 인천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비금속 소년』 『홍콩 정원』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