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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서울에서 열린 고구려의 정체성에 관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이라고 합니다. 출처는 고구려 연구회입니다.
출처: http://www.koguryo.org/old_board/board.cgi?db=board2&mode=read&num=230&page=3&ftype=6&fval=&backdepth=1
An Irresoluble Dilemma of Histories Past and Present:
Kogury in Chinese Historiography
해결되지 않은 과거와 현대사의 딜레마: 중국 사서속의 고구려
Mark E. Byington(Harvard University)
본고는 중국 사서에서 고구려에 대하여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요약하려고 한다. 본고의 목적은 고구려와 다른 비중국계 나라들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전근대의 nation-state 개념이 발달됨에 따라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본인은 고구려를 중국의 일부로 인식하는 중국의 관점이 20세기의 현대적인 nation과 nation-state의 개념이 발달한 결과라는 점을 시사할 것이다. 본인은 또한 고구려를 중국의 일부로 증명하려는 중국학계의 최근의 강조가 영토의 안전에 대한 염려, 특히 중국과 북한 사이에 국경의 안정 문제에 의해 일어났음을 제시할 것이다.
배경: 근대 이전의 사서
청의 건룡황제가 현재 쓰이는 고대의 혈통 개념으로 만주족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시도한 18세기 이전까지는, 전근대 중국에서 nation 또는 nation-state에 대한 현대적 개념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인종학적, 또는 민족적 용어로 확실하게 인식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중국 황제와의 관계에서 고려하는 일정한 세계관은 존재하였다. 몇몇 현대 서구 역사학자들은 인종적이거나 민족적인 면에서의 유대관계보다는, 유교적 도덕적 지배에서 단정된, Chinese-ness이라는 관념은 존재하였을지 모른다고 제시하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특정 국가나 민족의 지배자가 중원지역의 조정에서 행해진 유교적 관념에 따른 도덕적 지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에 따라 이들 나라나 국가가 전근대 시기에 중국 안으로 포함되어지는가가 결정되어질 것이다.
도덕적 질서에 기반이 된 Chinese-ness의 개념 외에, 서구 학자들이 중국적 세계 질서라고 부르는 관념이 있다. 그것은 중국 황제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고, 모든 민족과 states들이 계급화된 질서 안에서 황제를 중심으로 움직여진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민족들과 나라들이 황제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에서 공식적으로 중국 조정과 관계맺는 조공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조공 국가가 자발적으로 택한 종속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반면, 실제로는 이 관계는 조공에 연관된 불평등한 교역을 수반했다. 그리고 비중국계 나라들의 왕들이 단순하게 자신을 이러한 세계 질서의 구성원으로 여겼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들 왕들은 중국 조정과 조공 관계에서 큰 이익을 보았다. 이는 그들의 영토안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또한 중국 조정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이미 수립한 이웃나라들이 줄지 모르는 위협을 막을 수 있었다. 중국 조정이 제공하는 물질적 그리고 비물질적 이익에 대하여 비중국계 왕들은 중국 황제들이 공물로 여기던, 지방의 산물을 바치도록 요구되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들의 유교적 관념에 의해 규정된 용어로 공적인 교환을 수행하도록 요구되어졌을 것이다.
그러한 절차는 중국 역사에서 적어도 당대 말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전근대 중국이 고구려를 조공국으로 여긴 것과 고구려와 중국의 지도가들 사이의 교류가 이상화된 조공 질서를 강화하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리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외교술의 공식 용어 이면을 본다면, 고구려 지도자들이 중국 조정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는 한편, 중국 황제의 명령과는 달리 독립적으로 일을 처리한 예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고구려왕들은 그들의 계획과 중국 황제들의 명령이 일치할 때에는 그 명령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왕들은 중국 황제가 내린 직접적인 명령들을 대담하게 무시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중국적 세계의 복속된 구성원으로 여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 중국의 정치가들 중에서는 역사적 전례에 기반하여 고구려의 영토에 대한 중국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잘 알려진 예는 황제의 조언자였던 수나라의 장수 裴矩이다. 그는 고구려가 고대에 주나라 황제에 의해 箕子에게 봉토로 주어진 孤竹이었다고 주장하여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였다. 비록 裴矩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정확치 못한 것이지만, 역사적 전례를 들어 고구려 영토에 대해 우선적인 권한이 있음을 요구한 대표적인 시도라 하겠다. 전근대의 중국 역사 사료에서 유사한 사례를 들어 고구려에 대한 중국의 소유권을 확립하려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한반도나 일본에 세워져 있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중국 황제에 속하지 않았다고 여겨졌다는 점을 시사한다.
중국에서의 민족주의의 도래
역사적 전례를 들어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 중국 정권은 20세기까지는 고구려를 중국의 국가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본인은 그러한 주장의 출현은 도덕적인 지배보다는 민족에 의해 묶여지는 실체로 나라의 본성을 현대에 와서 재개념화한 결과라고 믿는다. 다민족 중국 국가의 형성은 혁명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최초로 시도되어졌다. 이러한 시도들은 청나라 말의 인종적, 사회적 진화론과 청대의 사서 전통에서 기원되었다. 초기의 예는 18세기 후반에 쓰여진 滿洲源流考에 나타난다. 이 책은 만주족의 혈통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고 있다. 그 결과 部와 族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고대의 숙신에서 청나라의 만주족까지의 혈통을 잇고 있다. 청나라 말기 개혁주의자들과 혁명주의자들이 민족을 논할 때 사용한 언어들은 대개 여기의 이론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청제국이 와해되면서, 嚴復와 康有 같은 학자들은 인종과 민족에 대한 이론들을 발달시켰고, 한족과 만주족을 포함한 黃種과, 그에 대치되는 白種의 개념을 만들었다. 또한 외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황족이 황폐화되거나 멸종당하지 않도록 이전 제국의 모든 민족들을 단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후에 개혁주의자 章炳麟과 같은 다른 이론가들은 黃帝로부터 계승된 漢族과, 만주족과 몽고족과 같은 청 제국을 구성하는 여타 종족의 분류를 사용하였다. 청나라 말에는 새로운 중국의 구성에 관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nation-state가 될 것이라는 데에는 일반적 동의가 있었지만, 민족적 구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章炳麟은 새로운 중국에 대하여 한족만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생각하였고, 梁귑超와 같은 이들은 다민족을 포함한 중국을 꿈꾸었다. 孫中山에 의해 세워진 nation-state는 한족이 중심이 되는 5개의 민족(한족, 만주족, 몽고족, 티벳족, 이슬람)에 의해 구성된 다민족 공화국이었다.
소수민족 정책과 고대사 I - 공화국시대(the Republican Period)
공화국 초기부터 고대사의 서술은 나라의 공식적인 정책과 연관되어있었고, 그 목적은 Chinese nation-state의 비한족 구성원들을 하나로써 나라 안에 통합시키는데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蔣介石의 통치아래에서는 제대로 발달되지 못했으나, 장의 정부는 비한족 민족들이 점차적으로 문화적 독자성을 잃고 한족과 융합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문화적 동화를 주창하는 동시에, 나라 안의 다민족 국가의 성질을 강조하였다. 공산주의자의 지배 아래에서의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소련에게서 모델을 가져온 것이었고, 변경의 소수민족들에게 민족자결권과 나라로부터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1949년 이후 소수민족들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자결권을 보장받았으나, 분리는 더 이상 보장되지 않았다.
1949년 이전, 공화국의 역사학자들은 고대 동아시아 민족들을 청대 동안 발달된 linear descent model을 연상시키는 식으로 서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단일한 민족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 새로운 다민족 국가의 모든 민족의 기원을 그들의 고대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한 식의 역사서술의 초기 예는 王桐齡에 의한 中國民族史이다. 이 책에서는 고대의 비한족들의 역사를 현대까지 추적하고 中華民族 안으로의 흡수에 대하여 서술하였다.1930년대 이전에는 그러한 역사 연구가 드물었고, 커다란 중국이라는 나라 안에 비한족들을 포함시키는 데 대한 역사적 정당화를 제공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범으로 공화국은 만주지역과 민족들에 대한 권리의 역사적 정당성을 제공해야하는 과제에 당면했다.
만주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처음 나타난 중국의 역사서술의 하나는 1932년 쓰여진 傅斯年의 東北史綱이다. 이 책은 만주지역의 일본 지배에 의해 촉발된 위기의식의 결과였고, 중국의 만주지역과의 역사적 연관을 부인하는 일본의 주장에 대한 과학적 논박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저자는 역사, 고고학, 신화 분야에서, 만주와 그 지역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중국 황제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배된 중국의 일부분이었다고 주장했다. 顧푘剛과 같은 학자에 의해 영향을 받은 저자는 民族이 역사의 주체이며, 현대 중국의 민족들이 다수의 기원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의 초기 저작에서 그는 다수 기원에 강조를 두었으나, 그의 시대에 있어서 중국이란 나라는 한의 나라 안으로 다른 민족들이 흡수된 과정에 의해서기보다는, 많은 민족들의 문화적 공헌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러한 초기 개념들을 Dongbei shigang에서 발달시키지 않았다. Dongbei shigang는 급하게 준비되어진 나머지 많은 역사적 오류와 모순을 포함시켰다. 그는 한편 상나라의 기원이 만주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초기의 생각을 발달시켰고, 상이 주나라에 멸망한 후, 몇몇 상나라인들이 만주지역으로 돌아갔으며 그 지역의 문화적 발달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기자조선의 수립으로 남부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통제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箕子의 전설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고구려인의 기본 인구를 구성한 貊족이 상의 멸망 후 북부 중국으로부터 이주해왔으며, 고구려와 부여의 지배자들이 유목민과 북부중국으로부터 온 농경민족의 혼합인 것으로 믿었다. 그는 한반도 남부의 三韓이 맥과 연관되지 않은 토착민인 것으로 보았으며, 후의 고려가 고구려보다는 신라로부터 정치적으로 발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많은 역사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Dongbei shigang은 고대 민족의 역사와 중국 안에서의 위치를 다루는 점에서 다른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만주의 역사를 주로 다룬 저작 가운데, 1941년의 金毓銓의 東北通史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요녕성 遼陽 출신으로 일본에서의 만주지역 연구의 높은 수준에 영향을 받아, 중국어로 만주의 역사에 대하여 쓰게 되었다.1936년부터 저술을 시작하여 1941년 책을 출판하였다. Fu Sinian과 다른 이들처럼, Jin은 역사의 주체가 민족이라고 믿었으며 이전에는 만주라고 불리던 현재의 북동지역이라는 명칭을 현대의 동북삼성 지역(遼寧, 吉林, 黑龍江)을 차지한 민족들의 개념에서 설명하였다. 진은 고대 북동지역에 거주하던 네 개의 민족을 분류하였고, 이들 네 개의 민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서 동북지역을 정의하였다. 따라서 북동지역의 지리적 범위는 이들 민족들이 영토를 획득하거나 잃는데 따라서 변화되고, 때에 따라서 북동지역은 한반도의 일부를 포함하였다.
진이 분류한 네 개의 민족은 고대부터 북동지역으로 이주한 한족; 柶婁와 여진족, 만주족이 계승한 肅톅族; 鮮卑, 契丹, 몽고족이 계승한 東胡; 그리고 부여, 고구려, 백제를 세운 夫餘族이다. 진은 중원지역의 민족들과 고대 북동지역의 민족들이 문화적으로 동일하였다고 주장하였고 고대 중국 국가 안에 그들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거대 국가를 제대로 정의하지 않았고, 그가 존재했다고 주장한 문화적 동일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인정된 사실로 이를 서술하였고, 이는 그의 시대의 지적인 추세였다.
진의 linear racial descent 이론은 두 가지 점에서 지나치게 모호하고 단순하다. 첫 번째는 북동지역에 대한 그의 이론에서 백제의 위상이다. 비록 부여족에 의해 수립된 것이지만, 그 기본 인구는 진이 믿기에는 한반도 남부의 토착민들이었다. 게다가, 백제의 영토는 한반도에만 놓여져 있었고, 진이 현재 북동 삼성에 사는 민족들이 거주한 곳이 북동지역이라고 정의한 것과 다소 어긋난다. 진이 백제를 부여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라고 포함시킨 반면, 북동의 영토 범위 밖에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론에서는 백제의 위치가 제대로 정의되어지지 못했다.
진은 또한 고구려와 현대 한국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모호하게 서술하였다. 고구려와 고려 사이에 구분을 하였고, 진은 고려를 신라의 정치적 후예로 보았다. 그는 668년 고구려의 멸망 이후, 부여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는 더 이상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고구려와 이후의 한반도에 세워진 나라들 간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암시하였다. 그러나 진은 부여족의 이후의 역사 자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부여족이 한반도로 남하하여 朝鮮民族이 되었다고 분명하게 서술하였다. 그는 숙신과 동호족의 후손들이 한족과 동화되거나 현대의 만주족과 몽고족이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부여족은 한반도로 이주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북동'이라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linear descent 이론과 그에 대한 설명은 고구려와 현대 한국인이 연관되지 않았으며, 고구려를 세운 부여족이 현대 한국인이 되었다는 것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명백한 모순의 원인들 중 하나는 진이 nationalities 와 states를 혼합하였다는 것이다. 또는 적어도 그가 그의 이론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둘 사이에 구분을 짓는데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한국인들이 부여족과 한반도 남부의 韓과의 혼합이라고 믿는 듯이 보인다. 그는 고려를 부여족 출신이 아닌 신라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으므로 그는 후대의 한반도의 국가들이 고구려보다는 신라의 정치적 후예라고 명백하게 결론지었다. 그러나 후대의 한국 민족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부여족의 후손이다.
그의 이론의 논리적 비일관성의 다른 원인은 진이 현대의 정치적 국경에 기반하여 북동지역의 실체를 정의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진의 관심은 그의 시대에 북동지역이라고 불린 특정 지역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그 영토와 그 지역에 거주한 민족들 사이에 연관을 만듬으로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러한 지역적 특성을 서술하려고 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그가 정의한 민족들은 역사의 발전 속에서 특정한 경계선을 유지했어야만 하며, 그는 이들 경계선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의 이론은, 불행하게도, 백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론적인 함정을 피할 수 없었다. 백제의 지배자는 진의 이론에서 부여족의 일원이었고, 그 인구 다수는 한반도 남부의 한 민족이었다. 같은 식으로 현대 한국인이 부여족과 한반도의 韓족에서 온 것이라는 그의 결론은 그의 이론의 결점이 된다. 그 결과, 진이 나라에 대해 논의할 때는 고구려와 현대 한국인은 연관되지 않았으나, 반면, 그가 민족에 대해 논의할 때에는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소수민족정책과 고대사II-새로운 중국에서의 역사와 역사서술
1949년 이후 진의 북동지역의 역사서술은 이후 북동지역 역사 서술의 기반이 되었으며, 그의 이론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채택되어 최근까지 그 명백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거의 바뀌어지지 않은 채 유지되게 된다. 그의 이론이 존속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지역사라는 것이 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에 관한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소수 민족은 현대 역사 교과서에서 흔히 왕조 역사에서 서술된 민족들의 직계후손으로 서술된다. 그들의 조상들이 중국 안에 편입되는데 자발적이고 의식적이었다는 식으로 서술함으로써 中華民族 안에서 현대의 소수민족의 위치가 정당화되고 확인되는 식이다.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는 정치적 의도는 명백하다. 그들이 조상이 중국에 속해있었다는 역사적 전례를 들어서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linear descent model은 오늘날 중국의 정치적 영역 밖의 민족들을 포함하려고 시도할 때는 실패하게 되어있으며, 고구려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고구려는 현재 중국의 요녕성과 길림성의 일부인 땅을 한때 차지했었으므로 진의 이론의 북동지역에 포함된다. 진은 아마도 고구려가 천 년 동안 한국 사서에서 주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이론을 만들 당시에는 한국과 한국인들이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위상에 대한 그의 이론에 대한 반론이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한국이 독립하게 되면서 한국의 민족주의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고, 진의 이론과 한국측 역사서술간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고구려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견해 차이는 1960년대에 들어 나타났다. 발해 유적을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조사할 때에 북한 학자들은 발해를 한국의 나라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당의 regional authority였다고 주장하여 기본적 견해차가 드러났다. 중국인들은 이후부터 발해를 唐朝渤海國 으로 부르기 시작하였지만, 고대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를 내릴 것인가에 대하여는 심각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사실 중국 출판물에서 고대민족은 少數民族이나 단순히 古老民族으로 서술되었다. 1980년대에, 이들 고대 민족을 서술하는 전문용어는 1982년의 인민공화국 헌법, 특히 1984년 Minority Region Autonomy Law에서 따왔다. 이는 고대 과거사 역를 현재의 다민족 국가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서술하는 것이었다. 고구려와 같은 비중국 국가들을 소수민족의 전근대의 전례로서 묘사하였다.
중국과 한국 간의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서술의 불일치는 1993년 집안에서 열린 고구려 국제학술회의에서 터져 나왔다. 이 학술회의 도중, 북한 역사학자 박시형은 고구려를 중국의 일부로 서술한 중국측의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수세기 동안 중국과 한국이 고구려를 한국의 나라라고 여겨왔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박은 고대 중국국가를 보는 중국의 관점은 전적으로 현대의 정치적 국경에 기반해 있다고 비난하고, 역사적인 증거들이 그러한 관점을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중국의 학술지에서 고구려를 다루는데 있어서,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소수 민족 중의 하나라는 점을 점차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또한 북동지역의 중국 학자들은 처음으로 진유푸의 linear descent model에 있는 개념적인 결점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박시형의 비판에 대한 중국측의 첫번째 대응은 1994년 孫進己가 쓴 논문에서였다. 손진기는 박의 주장을 반박하고 고구려가 한의 현도군에서 발달하였으며, 고구려의 왕들은 중국황제에게서 책봉받던 중국국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 국가라고 주장하는 손진기의 이론은 Jin Yufu의 linear descent 이론에서 기반하고 있었다.
손진기는 진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고구려가 고대중국의 구성원이었다고 하였으나, 그는 진이 그의 연구에서 부여족이 고구려족이 되었다고 한 말은 무시하였다. 손의 주장은 또한 진의 이론이 가진 결점들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북동지역에서 백제의 위치에 대한 것이다. 고구려가 한의 군현으로부터 발달했고 중국 황제에게서 책봉받던 고대 중국 국가에 포함된다는 그의 주장은 백제의 경우에도 같이 적용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손진기는 백제를 고대 중국의 일부로 주장하지 않았다. 손의 주장은 그러므로 Jin Yufu의 이론이 남긴 논리적 결함을 벗어날 수 없다.
1998년 역사학자 張博泉은 진유푸의 주장을 약간 변형시킨 이론으로 이들 문제들을 풀려고 시도하였다. 장은 고구려를 고대 중국 국가 안으로 포함하려는 손진기의 주장들을 반영하면서, (진이 말한 부여족이 濊貊족으로 재명명되어진 것을 제외하고) 진의 이론에서 발달한 lineage model을 제시한다. 중요한 점은 그가 예맥족으로부터 백제를 분리하였고, 668년 고구려의 멸망 후, 예맥족은 사라졌으며, 다른 중국 민족안으로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개선된 이론을 만들어냄으로 장은 진유푸의 이론에 있는 백제의 문제를 풀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왜 백제가 그의 이론에서 제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고, 단지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언급을 하였다. 동시에 장은 고구려의 혈통이 668년 이후 사라졌다고 주장함으로써 고구려와 한국인과의 연관을 없애려고 시도하였다. 기본적으로 부여, 예맥족이 현대 한국인으로 발달하였다는 진유퓨의 주장을 부인하였으나 또한 이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도 제시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손진기 등의 중국학자들이 이론상의 결점을 해결하기 위해 논점들을 개선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논점에 여전히 남아있는 결점은 고구려를 중국의 나라로 포함시키려는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가 없는데, 그것은 백제를 포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고구려를 중국에 포함시키려는 주장이 민족에 기반한 것이라면 (진우퓨의 이론과 그 후의 다른 변형된 이론들에서 보듯이), 백제와 고구려를 포함하지 않고서는 중국 민족으로서 부여, 예맥족을 이야기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만약 고구려를 포함시키려는 주장이 정치적인 것에 기반한 것이어서-- 한의 군현으로부터의 정치적 발달과 황실 책봉-- 백제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고구려만 소유권을 요구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중국학자중 어느 누구도 백제를 중국 국가의 일부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반대로 중국학자들은 백제가 한국의 나라이며 민족이라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다.
중국의 주장에 내재한 딜레마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대의 states와 민족들을 엄격하게 결합된 고대 중국의 super-nation에 속한 소수민족으로서 서술하려는 시도는(현대의 multi-national state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실패하게 되어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에서 민족 집단들은 엄격하게 결합된 실체가 아니라, 시대를 따라 융합되어지고 발달되어진 집단이었다. 둘째는 고구려와 백제의 문제는 중국측의 주장이 현대의 정치적 국경선 문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한 풀릴 수가 없다. 백제는 제외시키면서, 고구려만 중국의 일부로 주장한다는 것은(지금까지 만들어진 주장들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영토는 현재 중국의 일부였고, 백제의 영토는 한반도에만 있었다는 사실에 기반할 때만 정당화되어질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고구려가 중국 소수민족인 이유가 이전 영토가 현재 인민공화국의 영토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한 중국측 주장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사실 현대의 정치적 국경 문제는 중국측 주장에 내재하는 기본적인 이슈이다. 고구려는 진유푸 이론의 북동지역에 포함되는데 이는 고구려가 동북삼성 지역을 차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현재 한국의 영토 역시 차지했었다는 사실은 문제를 야기하고, 진의 단순한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 중국과 한국의 고구려에 대한 관점은 그러므로 중국의 이론이 기본적으로 결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타협될 수 없다.
역사학자 譚其珌은 1981년 이 문제를 인식하고 중국과 한국간의 민감한 문제를 둘다 수용하려는 노력으로, 고구려가 427년까지는 중국의 역사이고,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으로 옮긴 이후부터를 한국사로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의 타협적인 이론은 더 이상은 중국측 주장의 문제점에 대한 해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의 1998년 논문에서 Zhang Boquan은 譚其珌의 이론이 비과학적이라고 거부하였다. 그러면서 고구려는 중국의 나라였다는 주장을 고집했고, 현대의 정치적 국경선은 이 문제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왜 중국측 주장자들은 현대의 정치적 국경선 문제가 고구려를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기본적 이유라는 점을 부인하는가? 본인이 믿는 바로는, 그 점을 인정한다면 중국 변경지역의 안정을 원하는 중국측 입장의 배후에 놓인 진정한 주 동기를 내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그들의 주장이 고구려의 영토가 현재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에 기반된 것을 인정한다면, 한국인들이 똑같은 주장을 해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을 표현하는 것은 아무런 정치적 이득이 없을 것이다.
현재 중국인의 고대 역사에 대한 인식은 modern Chinese multi-national state 개념을 반영한다. 현대의 모든 소수민족들이 중국 국가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으로 여겨지는 것처럼(변경 지역의 안정을 위해), 현재의 중국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나라와 민족들도 고대 중국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부분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식의 과거 역사 서술은 (글자가 깨짐). 이러한 방식이 중국 정치가나 학자들이 전근대의 중국 국가를 서술하도록 선택한 방식이기 때문에, 고구려도 반드시 고대 중국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서술되어야 하는 것이다. 북한과 한국측의 민감한 반응을 고려해서 고구려의 경우를 예외로 만든다면, 전근대 중국 역사 서술의 틀이 흐트러지기 시작할 것이다. 과거 역사 서술의 이러한 틀은 대부분의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중국의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접한 나라에서 고구려에 대해 역사적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허용할 경우, 중국의 국가적 안정을 위협할 것이고, 북동변경만이 아니라 전체 변경지역의 안정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결 론
20세기 이전의 중국 사서에서 고구려는 비중국계 조공국으로 서술되었다. 청의 멸망후부터 중국 학자들은 새로운 Chinese nation state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이는 유교적 관념에 기반한 도덕적인 통치보다는 인종적 집단이나 nation에 기반한 것이었다.
(손중산이 세운) 공화국 시기 동안 발달시킨 multi-national state는 한족과 그 외의 여러 민족들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초기에는 중국의 과거사를 새롭게 구성하는데 있어서, 황제들(왕조사)보다는 각각의 민족 집단에 중점을 두었다. 공화국의 대부분의 비한족들은 변방지역에 거주했기 때문에, 중국의 과거 역사를 서술할 때에 현대의 소수민족 정책을 반영하게 되었고, 이는 다민족 중국 국가를 만드는데 있어서 역사적인 전례들을 들음으로써, 변경지역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역사학자 진유푸는 북동지역 역사를 linear ethenic descent 모델을 이용하여 써냈고, 그의 이론은 현재 동북지역 학자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용되어지고 있다.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다민족 국가의 일부분으로 묘사되어왔는데,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현재 인민공화국의 지역 일부를 차지했던 고대의 모든 민족과 나라들이 고대중국의 민족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식의 과거 역사의 서술은 역사적 증거가 없는 것이지만, 이들 지역이 과거에도 항상 중국의 일부분이었다고 서술함으로써 중국 변경지역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어왔다. 고구려는 특수한 경우인데, 그 이유는 고구려의 영토가 현재 중국-북한 경계에 있었을뿐더러, 천년 이상 한국과 북한의 사서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은 고구려가 중국의 나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이 고구려가 중국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채용하고 있는 논리는 백제의 경우에 있어서도 반드시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백제는 여전히 한국의 나라라고 주장함으로써 모순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지금까지 반복되어 제시된 중국측의 주장에 계속 드러난다.
이 모순은 단지 고구려 땅이 한때 현재 중국 땅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중국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중국측이) 인정한다면 (서로간에)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중국측이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중국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된다. 또한 고대 multi-national Chinese state에 대한 현재의 서술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거기에다가 중국 변경 지역의 안정에도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본인의 견해로는 지금의 역사적 논쟁에 접근하는 방법은, 고구려에 대한 중국측 입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중국측의 주장은 현재의 영토의 안정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훌륭한 논문 잘 봤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신 저자의 정보를 좀 알 수 있을까요? 흥미가 생기는 군요.
소속은 harvard university korea institute군요. 하버드대학 한국학 연구소이고 지위는 post doctoral fellow로 나오는군요. 흔히 말하는 포닥과정인 것 같은데 박사학위 취득후에 연구소의 연구원 자격으로 있는것 같습니다. 어떤 사이트에선 교수라고 말하는 곳도 있던데 professor는 아닌것 같네요. http://www.fas.harvard.edu/~korea/ 여기가 한국학 연구소 홈페이지이니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시면 한번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