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프랑스 혁명(The French Revolution, 1789~1794) 혁명 전쟁

프랑스 혁명의 사상이 전파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프랑스는 《필니츠 선언》과 왕당파와 망명 귀족(에미그레 : 이민이라는 의미)의 선동 활동은 혁명 정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국은 1792년 2월 대(對)프랑스동맹을 체결하였고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하기 위해 대외 전쟁을 단행한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에는 1792년 4월 20일, 그리고 프로이센에는 같은 해이지만 약간 지체하여 7월 8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장교들은 보수적인 귀족 계급이기 때문에 혁명 정부에 대한 협력에는 소극적이었고, 혁명군은 각지에서 전투에서 패배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국과 동맹국에게 프랑스 왕실을 위협하는 혁명군의 움직임을 서신으로 전했다.
8월 10일 사건
튈르리 궁전의 습격, 카루젤 광장에서의 전투
프로이센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침입하자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전국에 호소하고, 이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 조직된 의용병들이 파리에 집결했다. 이때 마르세이유의 의용병이 노래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후에 프랑스 국가(國歌)가 되었다. 파리 시민과 의용병은 프랑스군이 패배한 원인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8월 10일에 튈르리 궁전을 공격하여 왕권을 중지시키고, 내부의 적인 국왕 일가를 모두 떵플 탑에 유폐했다.
당시 튈르리 궁전에는 스위스 용병대가 국왕 일가의 신변 경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민중에게 발포를 금지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이 민중에게 학살되었다. 스위스 용병대 이외에도 일부 귀족이나 군인이 국왕 일가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분전했는데, 그 중에는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과 프랑스와 드 샤레트, 루이 드 레스큐르, 장 니콜라 스토프레 등 후 방데 반란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학살
8월 26일에 롱위가 프로이센군에 의해 공략되고, 파리 침공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높아졌다. 의용병을 모집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이 의용군의 출병 후 파리에 남은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9월 2일 아침 혁명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베르덩 요새를 함락시키고, 그 패전 소식이 파리에 충격을 가져왔다. 당통은 의회 연설을 통해 시민을 선동하였다. 그리하여 반혁명파의 사냥이 시작되어 프랑스 전역의 반혁명 용의자를 체포하고, 특별형사재판소를 설치하였지만, 약식 재판만으로 9월 2일부터 반혁명파 사냥을 시작하여 며칠 동안 학살이 이뤄졌다.
발미 전투
프랑스군은 9월 20일 발미 전투를 계기로 반격에 성공하여 적군을 국경 밖까지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의용병에 참가한 많은 하층민 계급(상퀼로트, 무산자 계급)의 정치적 발언권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상퀼로트는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한 자코뱅파를 옹호했고, 혁명은 극좌화되어 갔다. 자코뱅파에는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의 혁명전쟁의 시작과 함께 발행한 아시냐 지폐(교회의 토지 등을 담보로 한 불환지폐)의 증발(액면가의 57%로 급락)은 나중에 1794년 최고가격령 폐지와 함께 발생한 급격한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전 유럽 수요의 절반 이상을 공급한 설탕이나 커피의 재배로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오고 있던 카리브 해의 식민지 생 도맹그(Saint - Domingue)에서는 인권 선언에 의해서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에게 자유인으로 선거권이 인정되는 지를 둘러싸고 현지의 백인 크리올과 물라토 사이에 항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1791년 8월 22일에 부두교의 고위성직자 듀티 브쿠만이 흑인 노예를 이끌고 해방을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생 도맹그는 영국, 스페인의 개입을 불러 대혼란에 빠졌다. 생 도맹그가 혼란스런 정세에 빠져있는 동안 프랑스 입법 의회는 1792년 4월 4일에 유색인 자유인의 평등을 결의하여, 물라토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식민지의 대다수를 차지한 흑인 노예의 불만은 수습되지 않았다.
공화국의 성립
처형되는 루이 16세
한편 혁명 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시켜 지방에서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모이게 하였고, 프랑스군은 마침내 9월 20일에 프로이센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날 입법의회가 해산되었다. 그리고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제도화되고,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791년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공화국 정부는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국왕이 전쟁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많이 제출되어 1793년 1월 14일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이 26표를 반대표로 의결하면 찬성 361 대 반대 360로 찬반 동수가 되기 때문에,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 찬성 380 대 반대 310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확정됐다. 1월 21일,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 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도 뒤로 손이 묶여 퇴비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다.
국왕에게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국왕 살인"으로 이후 보복을 받게된다. 그들은 이후의 왕정복고에서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원수로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