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유일한 유대교 국가,
"이스라엘"- 수도는 예루살렘
이스라엘은 인구 약 750만 명의 중동에 있는 국가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좁은 지역에 위치해 있다.
다양한 기후조건을 보이는데, 북부에는 만년설이 덮인 산이,
남부에는 건조한 황야가 공존하며
현대적인 도시와 고립된 지역이 모두 공존한다.
인구의 대다수가 유대인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유대교 국가며,
깊은 역사와 유일신 사상으로 인해
많은 역사적, 종교적 유적지가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사람이 거주한 것은
적어도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BC 10000년경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한 증거가 남아 있다.
고대 팔레스타인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선형(線形)문자의 개발이다.
선형문자는 BC 2000∼1000년에 가나안인들이 창안한 것으로,
BC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찾아냈다.
이스라엘인(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알려졌던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한 때는 BC 13세기말경으로 추측되며,
BC 1550∼1200년에는 이집트인들이 지배했다.
해양 민족들의 출현으로 아시아 속국들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팔레스타인에서는
펠리시테인들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에 팽창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정복을 당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BC 10세기 중반 솔로몬 시대에 최고의 번영을 이룩했으며,
최초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이스라엘로 알려진 북왕국과 유다로 알려진 남왕국으로 분열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아시리아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했으나,
유다 왕국은 BC 625년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남아 있었다.
BC 587년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다 왕국을 침략했으며
많은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
키루스 2세(BC 550∼529) 때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다.
그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뒤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 지역을 헬레니즘화하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도와
안티오코스 4세(BC 175∼164)의 성전 모독에 반발한
유다 마카베오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BC 141년
하스몬 왕조 때 이스라엘은 독립을 얻었다.
그러나 BC 65년 왕족의 내분으로 내란이 일어나
로마 제국이 개입하게 되었는데,
로마 점령기에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리스도는
AD 30년경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2차례의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35년 마지막 반란 이후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은
극소수 집단으로 위축되어 이스라엘은 더이상
하나의 국가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뒤 팔레스타인은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도교 성지 보호로 인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다. 7세기에는 이슬람교도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691년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세웠다.
그결과 예루살렘은 3대 주요종교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이 지역은 1100∼1291년 이슬람교도들과 십자군에게
번갈아 점령되었으며, 1517년에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1798∼99년 일시적으로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고
다시 이집트의 지배 아래 들어가 무하마드 알리의 통치를 받았다.
무하마드 알리를 통해 서유럽의 영향을 받던 팔레스타인은
1840년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갔다.
19세기 후반 팔레스탄인에 유대국가를 세우려는 '시온주의'가 시작되어,
1882년 최초로 시온주의자들의 정착촌이 세워졌으며,
1917년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영국이 1918년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1922년 국제연맹으로부터 위임통치를 승인받아
정치적 책임을 떠맡게 된 후 이 정책은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초 아돌프 히틀러의 박해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이에 유대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으로 분할하자는
제안도 있었으나 거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시온주의 국가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가운데 1947년 국제연합(UN)은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의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되었고,
이스라엘과 이집트·트란스요르단(뒤의 요르단)
·시리아·레바논·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이 1967, 1973년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중동은 지금까지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1967년 전쟁을 전후로 팔레스타인 국가와 그 영토 내의
이스라엘 점령지인 유대인 정착촌 문제로
여러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1982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속한
게릴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다.
1987년 이후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이
'인티파다'(intifadah : '봉기'라는 뜻)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 당국은 1992년 이후 아랍의 여러 국가와
팔레스타인 대표들과 직접 평화 교섭에 나섰다.
이듬해 이스라엘과 PLO는 5년 동안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의 자치를 점차 확대 이행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스라엘은 1994년 요르단과 평화협상을 맺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팔레스타인과 휴전을 선언한 후
그 해 12월에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인 가자지구를 공습하여
세계 여러나라로 부터 질타와 압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은
더욱 더 이웃나라들과 불편한 관계이며
이번 이집트 사태로 인하여 이웃나라들과 맺은 평화협정에도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충분하다.
"비우호적 아랍국에 ‘포위’…
무바라크 퇴진땐 남서국경도 불안하다."
“이집트가 없다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친구 하나 없는 국가로 남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30년 이상 평화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이런 관계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이집트 사태를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위기감을 반영하는 말들이다.
국제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된 이집트 사태에
가장 노심초사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이다.
1981년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83)은
지난 30년간 적대적인 아랍국가로 둘러싸인 중동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무바라크가 이번 사태로 9월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영향력을 잃게 됨에 따라 이집트 민주화 시위는
이스라엘에 ‘발등의 불’이 됐다.
무바라크의 퇴진과 민주화가 이집트의 현안이라면
현상 유지야말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바라는 현상 유지의 핵심은
79년 3월 체결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제의 유지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은 이집트에 과격 이슬람 또는
반 이스라엘 정권이 들어선 뒤 평화협정을 파기하는 것이다.
평화협정은 미국의 지원과 함께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을 지탱해준 안전판이었다.
협정의 파기는 48년 5월 독립선언 이후 4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형성해온 ‘불안한 평화’가 깨질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스라엘로서는 79년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활적 이해가 걸린 문제다.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 첫 아랍국인 이집트를 제외한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국 환경은 지금도 비우호적이다.
북쪽 레바논에는 적대적인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있다.
그 뒤엔 지난해 5월 가자 구호선 공격사건으로
관계가 소원해진 터키가 있다.
동쪽엔 하마스의 팔레스타인이 버티고 있다.
시리아와 이란이 그 뒤를 떠받치고 있다. 한마디로 사면초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협정이 파기될 경우 그동안 안전지대였던
남서쪽에서 이집트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팔레스타인과의 최대 현안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에 대해 이집트가 적극적으로 나올 경우
이스라엘의 입지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의 중동전문가 로저 하디는 BBC 웹사이트 기고문에서
“이집트 사태는 약화된 중동평화 과정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면서
“이집트의 정권 변화는 이스라엘 지도자에겐 경종이 되고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더 포위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민국 - 이스라엘
1948년 이후의 한국과 이스라엘의 공통점은
당하기만 하던 민족이 단결해 국가를 건설하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번영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감동적인 逆轉(역전)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한국은 日帝(일제)식민 통치, 분단, 전쟁을 극복하고
민주적인 경제대국을 건설했다.
이스라엘은 2000년의 유랑생활과
나치에 의한 600만 유대인 학살을 딛고 섰다.
건국 후 네 차례 전쟁을 외국의 도움 없이 승리로 이끈
자주국방의 나라이기도 하다.
닮은꼴이던 한국과 이스라엘은 1990년 무렵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차이는 “국방은 美軍(미군)에 맡기고 즐기면 된다”는
한국의 사대주의적 의존성과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는
이스라엘의 自主(자주)국방 의지이다.
2010~2011년의 한국은 국방도 外注(외주)를 주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는 나라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니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도발과 국가지도부의 대응방식에
화가 나는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과 전혀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여론조사에 따르면 自主국방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의 행복도가 外注국방을 하는 한국인보다 훨씬 높았다.
안보에 대한 불안과 불신도 미국에 국방을 맡기고
행복을 찾으려는 한국에서 더 높았다.
안보 불안으로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비율은
한국이 이스라엘보다 열 배나 많았다.
도전을 피하려고 하면 불행해지고
도전을 받아들이면 행복해진다는 증거이다.
한국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구적 평화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한 손엔 총을, 다른 손엔 망치를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야 하는’ 宿命(숙명)을 타고 났다.
괴테도 “위험하게 살아라! 그것이 잘 사는 길이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 전쟁 중인 우리는 남태평양式(식)이 아닌
‘이스라엘式’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우리가 그런것을 닮자는 말은 아니다.
무엇을 닮아야 할 것인가?
스스로 자문해 보자!
-공존(평화)을 의심케 하는 적대적인 사진들-
▲ 중동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가장 위대했던 시민 혁명이 성공했다.
30년 철권통치를 펼쳐온 독재자는 국민의 뜻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었다.
11일 저녁 6시(현지시각) 국영방송을 통해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자,
그동안 시위의 메카였던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은 폭발했다.
시민들은 환호하고, 눈물 흘리고, 기도했다.
이 순간을 위해 18일 동안 노숙하며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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