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엘리의 죽음
삼상 4:12-22
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14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15 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삼상 4:12-22 / [충격을 받아 죽은 엘리] 베냐민 지파에서 출전하였던 군인 한 사람이 그날 싸움터에서 빠져 나와 이스라엘의 패전 소식을 실로의 성소에까지 전하였다. 3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온 그는 전사한 사람들을 슬퍼하는 표시로 자기 옷을 찢고 머리에다 흙을 끼얹으면서 실로로 들어갔다. 13-15) 이때에 엘리는 98세된 노인으로 눈이 흐려져 소경과 다를 바 없었으나 성전의 문밖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멀리 성읍을 가로질러 성밖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궤가 걱정이 되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싸움터에서 달려온 군인이 성안으로 들어와 패전 소식을 전하자, 온 성읍 사람들이 놀라서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엘리가 그 소리를 듣고 물었다. `저게 웬 아우성이냐?' 그 사람이 급히 엘리에게로 뛰어가서 소식을 전하였다. 16) `저는 지금 싸움터에서 달려오는 길입니다. 적진의 포위망을 뚫고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때에 엘리가 말을 막으며 조급하게 물었다. `어서 사태가 어찌되었는지부터 말하여라!' 17) 그 군인이 이렇게 보고하였다. `우리 편이 패하여 많은 군인들이 전사하였고, 살아 남은 이들은 모조리 도주하였습니다. 제사장님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하였고, 하나님의 법궤도 블레셋 군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18) 엘리는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리를 듣고 앉았던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 그는 너무 늙은 데다가 살이 쪄서 몸이 무거웠던 것이다. 그는 40년 동안을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민족을 이끌어 오다가 이렇게 끝을 맺었다. 19) [갑자기 죽은 비느하스의 아내] 엘리의 며느리 가운데 비느하스의 아내는 해산이 가까운 만삭된 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족속의 손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와 남편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갑자기 진통을 일으키며 쓰러져 아이를 낳았다. 20) 갑작스런 진통 끝에 아이를 낳은 비느하스의 아내는 사경을 헤맸다. 그녀의 곁에서 시중 들던 여인들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 하고 위로해 주었으나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21-22) 그녀는 죽어 가면서도 빼앗긴 법궤와 죽은 시아버지와 남편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으니 남을 것이 무엇이냐?'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갓난아기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는 뜻이다.
본문은 엘리 가문의 완전한 몰락을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엘리의 죽음(12-18) 엘리 대제사장은 길로 나아가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아마도 성문 앞길에 서있던 엘리는 매우 두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성소 밖으로 나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의 종교도 무너질 것이며, 대제사장의 존재의 이유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전령이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달려와서는 패전을 알렸습니다. 눈이 어두운 엘리가 상황파악을 못하자 전령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세하게 전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것, 둘째,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는 끔찍한 일들을 순차적으로 들으면서 큰 슬픔에 빠졌고, 여호와의 궤를 빼앗겼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었습니다. 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으면서 남긴 일은 전쟁의 패배와 함께 여호와의 궤를 빼앗긴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아들들을 더 위하였고,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보이는 여호와의 궤를 우상처럼 숭배하였습니다.
이가봇(19-22) 사무엘서 기자는 엘리 가문의 총체적인 몰락을 한 단어로 요약합니다. 그것은 영광이 없다는 뜻인 이가봇입니다. 이가봇은 엘리의 며느리이자 비느하스의 아내가 충격 속에 죽어가면서 낳은 아들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이 여인은 평소에 대제사장 가문의 며느리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남편도 시아버지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비록 아들을 낳았지만 몰락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생각에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궤를 빼앗긴 사실 앞에서 그는 절망하면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여인의 오해를 바로잡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말대로 여호와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에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거룩한 제사제도를 더럽혔을 때, 그리고 엘리가 이를 바로 잡지 않음으로 두 아들의 악행이 계속되었을 때 이미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광은 떠나고 말 것입니다.
적 용 : 교회의 영광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각자의 생각을 말해 보세요.
미국의 한 연구기관에서 약 천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가능하면 언제 죽는지 알고 싶은가”라는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96%의 응답자가 “알고 싶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옵니다. 죽음의 순간이 불과 수십 년, 수 년 내에 벌어질 사건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를 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는 톨스토이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찾아올 죽음의 준비를 말씀 속에서 찾아야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4:12-15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배한 슬픈 소식이 "엘리"에게 전달되었을 때에 그의 뜨거운 관심은 법게에 있었다. 그는, 그의 책임문제 때문에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었고(13절), 그에게 보고하는 자가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자기 의자에서 자빠져...목이 부러져"죽었다. 그는 자기의 두 아들의 죽음보다 법궤를 빼앗긴 것 때문에 더욱 놀랐던 것 같다. 법궤에 대한 그의 실책은 죽을 지경으로 비통(悲痛)한 일이었고, 그는 그 때문에 극도의 슬픔에 빠졌었다. 사람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깊이 빠져 버리면 그 죄 때문에 닥쳐오는 환란 가운데서 자기의 문제를 수습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브르라"고 하였다(사 55:6). 우리는 엘리의 태도에서 그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길곁 자기 의자에 앉아" 전쟁 소식을 자기다린 잘못이다(13절). (1) 그는 왜 그런 위기에 회개하지 않고 초조하게 어떤 요행수를 바랐던가? (2) 그는 왜 그 때에 기도하지 않았던가?======4:19-22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스라엘의 패전 비보(법궤를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식)를 듣고 갑자기 해산하고 죽었다. 그는 운명하기 직전에 그 낳은 아들에 대해서는 관심치도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난 사실을 심히 슬퍼하여 갓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 )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영광이 없다', 또는 '영광이 떠났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깨달을 것이 있다. (1) 그는 신앙이 타락한 가족들 속에서 고요히 탄식하던 숨은 성도였다는 것, (2) 그의 심령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불타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희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 설 교 >
아! 이가봇
삼상 4:12-22 / 홍문수목사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정말 잘 살아보려고 합니다. 성공하고 싶어 하고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 한번 사는 인생인지라 서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잘 배워야 합니다. 인생의 지혜를 얻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은 무엇보다 체험 학습일 겁니다. 직접 경험해 보면 인생의 지혜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시험을 앞두고 열심히 노력했더니 좋은 성적이 나왔어요. 그러면 “아하!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성적이 나오는구나.” 깨닫게 됩니다. 다음부터 계속 열심히 노력하게 되고 결국 성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직접 경험이 항상 유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좋은 것은 직접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게 유익하지만, 나쁜 것을 직접 경험하면 위험하고 오히려 큰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간접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게 훨씬 더 유익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안전띠를 매는 게 좋을까? 안 매는 게 좋을까? 직접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한번은 안전 띠 매지 않고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당해보고, 또 한 번은 안전띠 매고 운전하다 교통사고 당해 보면 됩니다. 아마 확실하게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해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런 경우는 간접 경험을 해 보는 게 좋습니다. 자동차 충돌 실험을 하는 겁니다. 자동차에 사람 대신 마네킹(전문용어로는 ‘더미’dummy인데 개당 1억 원도 넘는다고 함)을 태우고 교통사고를 내 봅니다. 그러면 얼마나 충격이 심한지 얼마나 위험한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안전띠를 매는 게 안전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간접 경험이죠. 이게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런데 더 지혜로운 것은 그런 사실에 대해 전해 듣고 금세 깨닫고 실천하는 겁니다. 간접경험 중에서도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전해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상해요. 성경에서 말씀하는데도 잘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접 경험해 보는 사람이 있어요. 실컷 고통을 당하고 얻어터지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직접 경험을 통해 배우기는 했는데 손해가 막심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좋은 내용은 무조건 믿고 순종하십시오. 반드시 승리하고 축복을 얻게 됩니다. 나쁜 내용은 절대로 직접 경험하지 마시고 간접 경험으로 배우십시오. 그게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승리의 지름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생의 지혜를 배우는 것을 가리켜 “타산지석(他山之石 -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기의 구슬을 가는 데 소용이 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덕(知德)을 연마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을 삼는다” 혹은 “반면교사(反面敎師 - 극히 나쁜 면만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라는 뜻으로, 따르거나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나쁜 본보기로서의 사람이나 일을 이르는 말)로 삼는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 가문과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실패한 이야기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런 건 절대 직접 경험하지 마십시오. 간접 경험으로 배우십시오. 그래서 모쪼록 엘리 가문이나 이스라엘처럼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엘리 가문의 몰락 : 이스라엘의 심판 경고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는 왕이 아니라 사사(士師 Judge)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인데, 여호수아 사후부터 이스라엘의 초대 사울왕의 직전까지 3백여 년입니다.(B.C. 14세기~11세기) 당시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행자지하던 영적 암흑시대였습니다.
바로 이 사사시대 말엽에 제사장 겸 사사였던 엘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의 지도자요 귀족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가문이 비참하게 몰락합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닥쳐왔습니다.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수시로 침공해 옵니다. 그런데 본문에 기록된 전투에서 아주 참패를 당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참전했습니다. 엘리가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달려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루 아침에 이스라엘이 참패를 당했는데, 3만 명이나 전사했습니다.(삼상4:10)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게다가 하나님의 궤(언약궤)까지 빼앗겼다는 겁니다. 언약궤는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는 것으로 그 속에 십계명 돌판,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해 주신다는 증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고 무한하신 분으로 꼭 언약궤 안에만 계시는 게 아니죠. 그런데 무지한 제사장과 백성들이 언약궤를 전쟁터에 갖고 간 것입니다. 이것은 미신적 신앙입니다. 상황이 급하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겠다는 심산으로 그랬겠지만 난센스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로 참패하고 언약궤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그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18절.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 ” 충격을 받고 비둔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져 목이 부러진 채 죽었습니다. 비참한 최후입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비느하스의 아내가 있었는데 만삭입니다. 마침 해산하게 되었는데 모든 소식을 듣고 충격 받아 죽어갑니다. 해산을 돕는 여인들이 아들이라도 해도 너무 슬퍼서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아들을 낳는 것이 큰 경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슬퍼서 그랬을 겁니다.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고 죽었습니다. 20절~21절. “20 ...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 ” 여기서 ‘이가봇’(d/bk;Aya)이란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영광이 없다’ 혹은 ‘영광이 떠나다’(No Glory)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더 이상 이스라엘과 함께 해 주시지 않고 이스라엘을 떠나셨다는 탄식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비참한 일들이 미리 예언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엘리 가문이 몰락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삼상2:31~36) 그 중에 삼상2:34을 보면 두 아들이 한 날이 죽을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이 예언대로 두 아들이 동시에 죽고 온 가문이 망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도 블레셋에게 참패를 당하고 굴욕의 역사가 전개됩니다. 문자 그대로 “아! 이가봇” “아! 영광이 떠났도다!”입니다. 정말로 큰 비극입니다.
2. 엘리 가문 몰락의 원인 : 하나님을 멸시한 불신앙
여러분, 왜 엘리 가문이 이렇게 비참하게 망했을까요? 이스라엘이 굴욕을 당했을까요?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한 불신앙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분과 척지면 당연히 인생이 망가질 수밖에 없죠. 삼상2:6~7,10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 ” 인생만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을 거역하면 산산조각 나듯 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삼상 2:30 보면 더욱 분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엘리에게 경고한 말씀입니다.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엘리 가문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신앙으로 인도해야만 하는 제사장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멸시하기에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엘리 가문이 멸망하고 이스라엘이 쇠하게 된 이유는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별게 아닙니다. 국가도 별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붙잡아주셔야, 함께 해 주셔야,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설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별수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안 될 일도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될 일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잘 따르는 게 인생의 지혜요 승리의 비결입니다. 엘리 가문과 이스라엘은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대신 멸시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망하죠. 마치 기름을 뿌리고 불구덩이에 들어간 격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했나요?
① 예배 소홀 / 그들은 예배를 소홀히 함으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엘리도 두 아들도 제사장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 인도자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소홀히 했습니다. 특히 두 아들은 백성들이 갖고 온 제물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예배를 능멸했습니다. 삼상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가장 큰 죄악 중 하나가 예배 방해죄입니다. 하나님께 얻어터집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게 예배입니다. 참 예배자를 좋아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될 게 바로 예배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유명한 실화입니다. 영국 성공회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1888~1944)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유럽 대륙이 속속 독일의 손에 들어가는 가운데, 영국도 독일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윈스턴 처칠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국민들의 불안감은 극도에 달했을 겁니다. 그 때 처칠의 부탁으로 윌리엄 템플이 대국민 연설을 했습니다. “대영제국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입니다. 전쟁은 큰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더 큰 일입니다. 만일 우리 국민이 이와 같은 때에 진정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다면 전쟁은 결코 큰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을 승리할 것입니다." 주일 날 영국의 모든 교회는 종을 울렸고, 교회마다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마침내 승전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배 태도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예배를 소홀히 하면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에 충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매일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 1993년 10월 10일 주일날이었습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가 있었습니다. 서해의 위도에서 부안군 변산으로 항해하던 배가 침몰하면서 사망자 292명, 부상자 70명을 낸 최악의 해난 사고입니다. 사망자 중에 정부 중앙 부처 공무원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모 교회 교인도 그들과 함께 낚시 가려고 했는데 부인이 말렸습니다. 마침 그 날 세례 받는 날이라 부인이 강력하게 말렸습니다. 하도 그러니까 마지못해 교회에 갔는데, 바로 그 날 사고가 터진 겁니다. 그 교인은 아내 말을 듣고 화를 면한 겁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살았습니다.
우리 삶 속에 이런 태도가 중요합니다. 예배를 귀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귀히 여겨주십니다. 그러므로 엘리 가문처럼 예배를 소홀히 여기다가 후회하지 말고, 예배를 귀히 여김으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② 말씀 무시 / 엘리 집안과 이스라엘은 말씀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엘리와 두 아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씀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사 시대 풍조가 그랬습니다. 삿21:25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예비합니다.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겁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죠. 엉뚱한 짓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고, 축복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 ” 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증거가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의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된 인생을 원하면 당연히 말씀 안에서 살아야 됩니다. 말씀의 노선에 충실해야 됩니다. 고전4:6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말씀 안에서 살라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보장하는 승리의 인생이 됩니다.
■ 며칠 전 인천의 모 여고에서 학생 4명이 체육시간에 죽었습니다. 너무 놀라지는 마십시오. 피구하다 금 밟아서 죽었답니다. 이래서 한국말이 어렵죠. 우스갯소리 같지만 여기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면 망합니다. 죽습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존중하기에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세상 욕심 : 엘리 집안과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사람이 세상 욕심을 너무 부리면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 인생을 흔들리기 마련이고, 결국은 망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그랬어요. 삼상2:22 “ ...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끔찍한 일이죠. 육신의 정욕을 위해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제사장이란 작자들이 성소에서 여인들과 더러운 짓을 한 겁니다.
그뿐이 아니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백성들이 제물을 갖고 오면 중간에서 가로챘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운 마음에 거부해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진노하신 하나님이 엘리를 책망합니다. 삼상2:29 “ ...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하나님보다 아들들이 욕심내는 것을 좋게 여기 방치했다는 겁니다. 보나마나 자기도 나눠 먹었겠죠. 얼마나 한심하고 비참한 모습인지! 이건 정말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집착하는 게 있으면 그게 바로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우상입니다. 그런 게 우리 인생 가운데 있으면 안 됩니다. 심지어 자식이라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엘리를 보세요! 하나님보다 자식 위하다가 함께 망했잖아요.
물론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니까 세상에 살면서 필요한 게 많죠. 하지만 지나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욕구 채우는 것은 오히려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지나쳐서 욕심을 부리는 것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하나님은 우리의 욕구는 채워주시지만, 욕심을 채워주시지 않는다.”
부디 엘리와 이스라엘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고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장 귀히 여기는 참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승리하는 인생의 지혜입니다.
3. 인간의 흥망성쇠 : 하나님에 대한 태도(신앙, 영성)에 달려 있음
인생의 승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별게 아닙니다.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흥망성쇠,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 안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느냐로 인생이 판가름 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바로 신앙이고 영성입니다. 신앙이 좋아야 영성이 풍성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승리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권면하며 약속합니다. 시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겁니다. 다른 데 신경 쓰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사33:6 보면 아주 귀한 말씀이 나오죠. 사33:6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엘리 집안과 이스라엘이 이렇게 불신앙으로 망해가던 어두운 암흑시대에 샛별같이 사무엘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는 기도로 태어나고 평생 기도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사사가 되자마자 미스바에 백성을 모아놓고 성회를 개최합니다. 말씀 듣고 기도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높여드립니다. 그 틈을 타서 블레셋이 침공합니다. 그러나 화가 복이 되었죠. 큰 힘 들이지 않고 블레셋을 대파하는 기회가 됩니다. 사무엘은 승리한 후 기념비를 세우고 이름을 ‘에벤에셀’(삼상7:12)이라 붙였습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고백입니다. 그 후 블레셋이 얼씬거리지 못하고 빼앗견전 모든 땅을 되찾습니다. 주변 국가들도 덩달아 두려워서 꼼짝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조공까지 갖다 바치고 평화의 시대가 열립니다. 사무엘의 생애 내내 태평성대를 이룹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인생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입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 안보 위기, 사회 혼란 등. 이런 모습들을 보면 짜증도 나고 걱정도 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귀히 여기는 신앙을 회복하면 다 해결됩니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 전 6.25 전쟁 59주년이 지났죠. 잊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잊어갑니다. 잿더미였던 우리나라가 이 정도 살게 된 게 누구 덕입니까? 원래 한국인은 머리가 좋고 뛰어나서 그런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일제의 지배는 받았나요? 6.25 때 참전한 16개국 UN 군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는 영영 서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기억하는데 정작 도움 받은 우리가 잊어버리면 곤란합니다.
워싱턴 D.C에 가면 한국전쟁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 있죠. 오래 전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둘러보면서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 비석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겁니다. 잊지 말자는 겁니다. 터키 앙카라에 가면 한국공원이 있는데, 거기에도 ‘한국 참전 토이기 기념탑’이 있습니다. 전사자 명단이 죽 적혀 있어요. 6.25 때 전사한 한국 군인과 외국 군인이 수십만 명에 달합니다. 미군 전사자만 해도 5만 명이 넘습니다. 이건 인류 역사 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한 나라를 위해 이렇게 여러 나라 군인들이 희생한 예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죠. “체력은 국력!” 맞는 말입니다. “경제력은 국력!” “군사력은 국력!”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영력은 국력!” “신앙의 힘은 국력!”입니다.
우리 개인이든 우리 가정이든 우리나라든 엘리 집안과 이스라엘처럼 “아, 이가봇!” “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도다!” 이런 비극이 없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을 존중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신앙의 병을 고치자
삼상 4:12-18, 마 4:23-24 / 박한응목사
할렐루야!!
오늘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한량없는 은혜와 축복을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내려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예> 어느 날 쥐 한 마리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그만 사나운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쥐는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쥐는 구석으로 몰려 더 이상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고양이는 점점 더 살기등등하여 입맛을 다시면서 한 걸음씩 쥐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쥐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순간 쥐는 아침에 읽은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쥐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 환난과 시험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쥐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쥐는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한 듯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아니 저 쥐가 겁도 없이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고양이는 자신에게 겁을 내기는커녕 미소까지 지으면서 다가오는 쥐가 이상했습니다. 그렇게 다가온 쥐가 고양이의 귀에다가 무엇인가 은밀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쥐의 이야기를 들은 고양이는 갑자기 풀이 죽어서 쥐를 두고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그 쥐가 고양이에게 무엇이라고 하였을까요.
“저 고양이님! 사실은 나 조금 전에 쥐약을 먹었어요” 라고 말했답니다. (인터넷 kcm 예화 방에서 인용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말씀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간구하고 부르짖을 때에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다 같이 한 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병을 고치자”
오늘 본문 말씀은 구약과 신약에서 읽었습니다. 구약 삼상4:12절 이하의 말씀은 엘리 제사장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에 불레셋의 침략을 받아서 온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선봉장이 되어서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웠지만 연전연패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나가서 싸우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나가 싸웠으나 그 법궤도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사를 당하고 모든 군대는 전멸 당하였습니다.
한편 전장에서 무슨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리던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그만 비둔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엘리 제사장은 나이가 98세나 되고 그의 눈은 당뇨가 심하여 합병증으로 인하여 어두워 보지 못하고 몸은 비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전형적인 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마태복음 4:23-24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 온갖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와 허물을 단번에 사하여 주셨고, 또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환자와 병자들을 고치고 또 고쳐도 끝없는 병자들을 고치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질병에서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 멘>
요즘 사람들은 전에 없이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전에는 들어 보지도 못하던 질병들이 있고 또 원인도 모르는 병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굴지의 대학병원의 박사들도 알지 못하는 신종 병들이 많이 생기게 되고 이와 같은 병을 알 길이 없어서 ‘원인 모를 ○○병’ 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인들도 많은 사람들이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 요즘에는 ‘농부병’ 이라는 병도 생겼습니다. 온몸이 아프고 견딜 수가 없어서 병원에 가서 X-Lay를 찍어 보고, MRI를 찍어 봐도 아무 이상이 없고 그래서 며칠 놀면 좀 괜찮아지고 다시 일을 하면 또 아파지는 병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바로 건강입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도 “요즘 건강하시지요?” 라고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관심이 지나칠 정도로 과민해 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는 것이면 안 먹는 것이 없고 못 먹는 것도 없습니다.
어떤 음식은 기를 도와서 좋고, 어떤 보약은 혈을 도와서 좋고, 또 어떤 것은 몸을 따듯하게 해서 좋고, 무엇을 잡아먹으면 양기가 좋아진다고 해서 기를 쓰고 입에다가 쑤셔 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국 같은 동남아 나라에 가서 곰 발바닥이니, 원숭이 골이니, 곰쓸개, 또는 해구신, 뱀, 등등 마구잡이로 먹어치웁니다. 그래서 국제적인 망신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개구리가 좋다는 말이 퍼지자 개구리의 씨가 마를 지경으로 남획을 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병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병이란 심장병, 고혈압, 뇌졸중(중풍), 당뇨병, 동맥경화, 신경통, 각종 암, 과 같은 병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병이 전에는 주로 노인들에게서 발병이 된다고 하여 「노인병」 이라고 하였으나 노인뿐만이 아니라 30대 40대 사람들도 발병이 되어서 「병」이라고 하다가 근래에 와서는 들만이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발병이 되므로 요즘은 「현대병」이라고 합니다.
이 병은 주로 우리 몸의 밖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에서부터 발병이 됩니다. 그래서 이 병의 특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체내에서 서서히 진행이 되고 자신이 그 증세를 느낄 때에는 이미 병세가 상당히 진전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병이 조기 발견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발견이 되면 회복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망률도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중풍)을 보더라도 일단 사고를 당하면 죽지 않으면 대개 일생동안 불구의 몸이 되는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위험률은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높다고 합니다.
2. 그러면 병이 발생하는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의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은 아닙니다. 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 교수인 황수관 박사의 말에 의하면 병이 생기는 몇 가지의 이유를 알게 됩니다.(황수관 지음.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연세의대 출판. 참고)
(1) 운동부족으로부터 병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들의 신체는 사용하지 않으면 약화되고, 너무 무리하게 사용하면 그 기능이 감소되고, 적당히 활용을 해야 신체의 기능이 증대 또는 강화가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을 때부터 신체 활동을 해야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생계수단이 바로 신체적인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건강 증진을 위한 별도의 운동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기계문명의 발달로 모든 것이 자동화됨에 따라서 신체적 활동이 급속히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농사도 기계가 해주기 때문에 허리 아프게 모심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또 농약이 좋아서 김매지 않아도 되고, 타작도 콤바인이 모두 해줍니다. 자동차가 보급이 되어서 걸어 다니지 않고,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는 청소기가 해주고, 모든 기계가 우리들의 신체활동을 대신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바로 운동부족입니다. 1950년 영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국은 2층 버스가 있는데 운전을 하는 운전사보다 2층을 계속 오르내리는 차장의 건강 체크를 해본 결과 운전사보다 차장이 더욱 건강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우유를 받아 마시는 사람보다 더 건강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사무를 보는 사무직보다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더욱 건강한 것은, 그만큼 신체활동을 통해서 운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참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신체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는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급한 일에만 매달리다가 중요한 일에 소홀히 하지는 않는지 한 번 자신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 중요한 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건강을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먼저 땅을 경작토록 한 것(창2:5)은 단순히 먹는 식량을 얻는 것 이외에 경작이란 신체활동을 통해서 건강을 스스로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창3:19) 라는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땀이 날 정도로 신체활동을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모든 기계가 자동화되어서 우리들의 신체활동을 대신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현대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전하는 데도 병이 늘어만 가는 것은 바로 신체적 운동량 부족에서 오는 것이 중요한 원인입니다.
(2) 공해 때문에 병이 생깁니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서 전국의 곳곳에는 공장이 생기고 그 공장에서 뿜어대는 가스와 자동차에서 발생되는 매연가스로 인하여 대기가 오염이 되었습니다. 각종 생활하수와 쓰레기, 그리고 공장에서 불법으로 방류하는 유독성 폐수 때문에 환경이 오염되고,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자랑거리였던 식수마저도 오염이 되어서 물도 외국에서 수입을 해다 먹게 되었습니다.
청정해역으로 이름난 곳들이 유조선의 난파와 좌초로 인하여 흘러나오는 기름으로 오염이 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환경오염과 공해로 인하여 우리들의 신체에 질병이 발생하게 됩니다.
(3) 너무 잘 먹고, 많이 먹어서 병이 생깁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에게는 오늘날의 이와 같은 병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현대병입니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주로 채식을 많이 하였고 육식을 별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체내에 지방이 축척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나 잘 먹고 삽니다.
생활이 윤택해 짐에 따라서 영양가 높은 음식을 많이 섭취하다 보니까 비만현상이 일어나고 체내에는 콜레스테롤이 누적이 되어서 동맥경화증과 협심증이 발병이 되기도 합니다. 또 당뇨병도 생깁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살빼기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언제는 못 먹어서 병이 나드니 이제는 너무 잘 먹어서 병이 나서 걱정입니다. 너도나도 모두다 살을 빼느라고 야단들입니다.
비만은 들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아이들까지도 급속도로 증가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현대적인 음식문화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늘어만 가는 패스트푸드점과 고 단백 인스턴트식품들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비만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4) 나쁜 생활습관 때문에 병이 생깁니다.
사람은 생활 습관이 매우 중요합니다. 건강을 지키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의 신체활동을 무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엿새 동안 하시고 하루를 안식하셨습니다. 이 날을 안식일이라고 정하시고 이날을 복 주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그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면서 하루를 안식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육체적으로도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고 주일날도 아등바등 일하다 보니까 몸살이 나고, 거기서 더 지나쳐서 농부병이 들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병까지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활습관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맞추어서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자신의 몸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혹사시키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 고전6:15절에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셨고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 이와 같이 귀중한 것을 알지 못하고 음주 또는 흡연 마약 등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음주와 흡연을 하는 사람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병에 걸릴 확률이 40배 이상 높다는 것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서양 속담에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모두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을 잃은 후에 건강의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후회합니다. 나의 건강이 나 하나만의 건강이 아니라 온 가족의 건강이요 나가서는 국가적인 건강을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것입니다.
3. 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병을 일컬어 불치병 또는 난치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병이라고 해서 불치병도 아니고 난치병도 아닙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병은 치료보다 예방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병은 치료보다 예방이 100배 더 중요합니다. 다행히도 병은 건전한 생활습관과 적당한 운동을 하면 65세 이전에는 90%나 예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하루에 한 번 정도는 혈관이 많이 열릴 수 있도록 몸을 데워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몸을 잘 관리해야할 의무이며, 또한 사명입니다. 모쪼록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제부터라도 건강관리를 잘 해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반듯이 이루어 나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4. 그런데 오늘의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병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현대병 즉 병은 우리들의 육체적인 병이고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들의 신앙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병이 심각한데도 자신이 지금 무슨 병에 걸려 있는지 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 더욱 큰 문제입니다. 대개의 병이 초기에는 자각증상이 없다가 나중에 병세가 악화되어서야 증세를 알게 되고 그때는 이미 손쓰기가 너무 늦어버린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만성적인 신앙의 병이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증세를 알지 못하고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에는 무슨 병이 걸려 있습니까?
우리 사람들의 신체에 고혈압, 당뇨, 신부전증, 심장병, 뇌졸증, 동맥경화, 신경통, 비만, 만성 소화불량, 등등의 병이 있듯이 우리들의 신앙에도 이와 유사한 병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병은 교회를 처음 다니는 사람에게는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교회를 좀 많이 다녀서 교회에 대하여 무엇인가 좀 아는 것 같고, 성경에 대해서도 무엇인가 아는 것 같은 사람들이 신앙의 병이 잘 걸립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니까 들은 것은 많고 아는 것도 많고 해서 머리통만 커진 기형적인 비만 환자가 있습니다. 이런 신자는 교만과 자만심으로 가득한 비만을 빼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많이 아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뭐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잘못하게 되면 바로 신앙적으로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아는 것을 신앙생활을 통하여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봉사와 헌신을 통하여 행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신앙의 병을 먼저 치료받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하나님을 잘 믿고 율법을 잘 알고 계명을 잘 지킨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눅11:43-46)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 하심이니이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
5. 그러면 신앙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신체에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하여 적당한 운동과 건전한 생활습관이 필요하다고 하였듯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병들기 전에 미리 미리 예방을 하여서 우리의 신앙이 병들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이미 걸린 병도 치료하기 위해서는 경건 된 믿음생활을 가져야 합니다.
(1) 적당한 신앙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① 우리가 해야 할 신앙운동은 기도운동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땀이 나도록 기도하는 운동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방울 같은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눅22:44)
② 찬양운동을 해야 합니다. 뜨겁게 찬양을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③ 봉사운동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몸으로도 봉사하고 물질로도 많이 봉사를 해야 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많이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신자들 중에는 하나님께 드릴 것도 드리지 않고 감사치도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④ 전도운동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 천하에 전파하기 위하여 열심히 전파하는 운동입니다.
이와 같은 운동으로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이 기도할 때에 땀이 흘렀듯이 오늘의 우리들도 땀이 흐르도록 이 신앙운동을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2) 경건된 믿음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경건 된 믿음생활을 한 사람을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고넬료에게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고 로마의 백부장이었지만 온 가족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 사업을 많이 하고 주야에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어느 날 기도할 때에 주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나타났습니다. 두려움에 고넬료가 물었습니다. (행10:4-5)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바로 고넬료와 같은 경건 된 신앙생활을 하면 절대로 신앙의 병은 걸리지 않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건강하게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육체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신앙과 건강한 믿음의 영적 건강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건전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범사에 잘되는 생활의 축복을 받게 되고 또 육신의 건강의 축복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신앙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믿음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수십 년 동안 고질적으로 잘못되어온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지금 자신이 영적으로 무슨 병에 걸려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으면 안 됩니다. 빨리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서 병든 부분은 잘라내고 고침 받아야 합니다.
(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 시간 성도 여러분들이 모두 영적으로 건강한 믿음, 건강한 신앙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희극 인생인가? 비극 인생인가?
삼상 4장 12~18절 / 백장흠목사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에프스키가 28세 때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영하 50도 되는 몹시 추운 겨울날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총살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5분 있으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5분을 잘 선용하기로 하고 계산을 합니다. 2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2분은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남은 1분은 자신이 발붙이고 살았던 땅을 둘러보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옆에 있는 두 사람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는데 3분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하니 그만 눈앞이 아찔한 것입니다. 나는 지난 28년간 보람되게 살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가 되었습니다. 철커덕 하며 총알을 장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시 한 번만 살 수 있다면 허송세월은 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죽음의 공포로 몸이 뒤틀리는데 그 순간 요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눈을 떠보니 흰 수건을 흔드는 병사가 보입니다.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는 죽음 직전에 살아났습니다. 그는 그 순간을 기억하면서 인생을 최선 다하여 살았다고 합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이 찬란하고 행복하게 끝나는 사람은 인생 승리자, 희극적으로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족한 것 없이 잘 살았어도 마지막을 어렵고 비참하게 끝나면 비극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사사요, 제사장이었던 엘리라는 사람의 마지막 인생을 마감하는 내용입니다. 시작은 희극이었는데 마지막이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처음에 잘못되어도 마지막이 좋으면 그의 인생, 삶은 희극입니다. 우리는 희극의 주인공은 될지라도 비극의 역할은 맞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다가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까? 엘리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사사였습니다. 국정을 책임지는 지도자였습니다. 무명의 사람이 아니라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을 살펴보면,
1) 불안한 중에 여생을 보냅니다.
불안의 반대말은 평안입니다. 사람이 지위가 높고 경제가 풍성하여도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복된 사람입니다. 머리에 열 받으면 대머리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불안하게 살면 건강에도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말 중에 “샬롬”합니다. 평안합니까? 입니다. 우리의 “안녕하세요”라고 묻는 인사말과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항상 불안합니다. 각종 사고에 대한 불안, 질병이나 전염병, 성인병에 대한 불안, 전쟁과 재난에 대한 불안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불안을 많이 느끼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1)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2) 완전주의자들입니다. 무엇이던지 완벽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면 불안해집니다. (3) 의지 할 곳이 없는 이들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탁하거나 맡길 데가 없습니다. 패기 넘치는 한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인간이 평생 동안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명예입니다. 법학도가 대답하였답니다. 재산입니다. 갑부 한 사람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수성가한 눈물겨운 자기의 추억을 떠올리며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건강입니다.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암환자가 수술 후 겨우 거동을 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 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다들 맞는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중요한 것 하나를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가치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는 동안에도 평안이 필요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평안이 필요합니다. 가진 것 없고, 명예도, 권세도 없어도, 마음의 평안이 있으면 복된 사람입니다. 평안은 행복이고 불안은 불행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가 든 후에까지 평안하게 지내는 희극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제2차 대전 후 20세기를 불안의 시대(Age of anxiety)라고 하였다면 21세기는 우울의 시대(age of melancholy)라고 부릅니다. 현대인들은 불안이 겹쳐 정서적인 우울증과 실리적 침체로 치료대상자들이고 이 증세가 심하면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현대인들 4명중에 한 명은 불안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비행기를 타보세요. 스튜어디스들이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늘 그렇게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겁니까? 비즈니스 하기 위하여 웃는 것입니다. 가짜 웃음이지요. 정직한 웃음은 아닙니다. 우리가 웃고 자랑하면서 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항상 마음이 평안합니까?수없이 울고 괴로워하는 이들이 얼마입니까? 비록 불안이 일시적이라 해도 힘든 건데 지속적으로 불안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불행입니다.
2) 슬픈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듣는 말들 속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뉴스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세요. 여러분과 직접 관계되는 일이 몇이나 됩니까? 뉴스 중에 좋은 소식이 얼마나 됩니까? 아들이 전장에 나갔다가 죽었답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닙니다. 둘이나 죽었답니다. 자식이 잘된다는 말만 들어도 부모는 엔돌핀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패하였다. 웃으니까 웃을 뿐이지. 진정 웃으면서 좋은 소식을 들으면서 사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말씀 안에서 좋은 소식을 들으면서 살아가는 희극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희극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1. 가장 귀한 것을 상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의식을 잃으면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어느 여인이 비행기를 기다리며 상점에 들어가서 책 한 권과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대합실에서 기다립니다. 잡지책을 뒤적이면서 과자봉지를 뜯어서 과자를 먹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옆에 앉아있는 남자가 과자를 집어서 먹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내어 먹는 중에 마지막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 남자분이 과자를 반으로 쪼개서 주는 것입니다. 별 남자가 다 있네. 남의 과자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집어 먹더니 이제는 반을 쪼개어 나에게 줍니다. 이런 강심장이 있다니 한참 앉았다가 안내 방송을 듣고 비행기를 타려고 안경을 넣고 크리넥스를 꺼내려고 가방을 열어 보니 과자봉지가 가방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먹은 과자는 자기 것이 아니라 그 남자 것이었습니다. 누가 강심장이었습니까? 자신이 착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분명한 삶의 목적의식이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절대 필요한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심리학자들의 말입니다. 흔히 ‘세 가지 필요’(Three Needs)를 말합니다. 첫째, Need of Significance 의미의 문제요-삶의 뜻이 무엇이냐, 보람의 문제요-삶의 질의 문제입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나? 경제적으로는 예전보다 풍요로운데 왜 예전같이 행복한 마음이 들지 않느냐?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왜 사고를 치고 말썽을 부립니까? 이것은 우리 집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이고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를 알아보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깨달았다면 삶의 질도 가치도 상승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Need of Security 안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불안을 싫어합니다. 위험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정신적인 안정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셋째, Need of Belong입니다. 소속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고독을 싫어한답니다. 소속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디에 소속한 사람이다. 여기에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사람이다. 친구나 동기생이다. 동향 사람이다. 나이가 똑같다 이런 것들을 찾는 것은 소속감의 안정을 얻기 위함입니다.
의미도 찾고 믿음도 얻어야 합니다. 엘리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심리학자 ‘롤로 메이’(Rollo May)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가장 큰 무서운 병은 “불안과 공허”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불행의 원인에 대하여 첫째가 가치관의 상실을 들었습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돈이 제일 귀한 것이라고 알면서 돈을 위해서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자신이 병이 들었습니다.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건강이 중요하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둘째, 자아의식의 상실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나 없이는 가정도 없습니다. 내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중요한 것은 대화를 위한 언어의 상실을 들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할 사람도 없다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신과 통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는 것 그래서 불행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상실했습니다. 엘리는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최소한의 권위는 가지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지도자의 생명은 권위입니다. 권위가 있을 때 사람들이 존중히 여깁니다. 권위가 있어야 사람이 따릅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만드는 권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웅시 하도록 만듭니다. 어느 분이 그런 말을 합니다. 북한사람들에게 전도하기가 쉽더라는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에 하나님을, 김정일국방위원장을 예수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가 있습니다. 그에게 영적인 힘을 얻게 하시고 은사를 주셔서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스스로 세우는 권위가 있습니다. 인격에서 세워집니다. 진실합니다. 입으로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은 항상 푸짐하게 잘하는데 실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권위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섬김입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답니다. 수녀님은 당신이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사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들로 시기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녀는 말하기를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어요” 라고 말했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에게 권위가 주어집니다. 사람들로부터 따르게 하는 게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권위가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낌없이 주고 섬길 때 권위가 주어집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희극적인 생애를 살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자기관리에 성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관리자는 사람에게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관리능력이 없거나 관리 소홀로 인하여 지구가 많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지구까지 갈 것 없이 엘리는 자신을 바르게 관리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면 자신을 잘 관리하라. 토머스 J. 스탠리가 한 말입니다. 만일 자기관리가 충분하지 못하면 많은 재산을 모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관리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관리하지 못한다는 이론이 된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인가?” 답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 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건강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핀란드 보건당국의 조사결과입니다. 두 집단으로 같은 인원 600명을 나누어 한 집단은 담배, 술, 설탕섭취를 제한하고 매일 운동을 하게 하였고 다른 집단 600명은 마음대로 먹고 살게 하였습니다. 15년 후에 건강을 관리하지 아니한 집단에는 심장병 고혈압 사망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좋은 것 보약만 먹으면 되고 육류는 무조건 피하면 건강하다고 믿습니다. 주어진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느 날 건강이 나빠지면 마지막 보기가 흉하게 마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도 마음과 생활의 영향이 있습니다. 영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항상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걱정거리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감사하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두려움이나 걱정이 찾아오면 쫓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관리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고 미래를 위하여 바르게 투자하는 것입니다. 유용하게 시간을 사용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TV을 보거나 잡담하는 시간은 시간가는 줄 모르면서 예배 시간을 아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늙으면 잘해야지. 그때는 주일성수도 하고 공 예배 안 빠질 거야? 그때는 늦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세요. 바쁘다는 이유로 안 하면서 기도시간이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잘못하는 것입니다. 가정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가정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엘리는 가정과 자녀를 잘 관리하지 못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자녀들을 완전히 자유개방형으로 길렀습니다. 말씀으로 바르게 훈련시키지 않았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미래 희망입니다. 어느 가정이든 부모들의 관심은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자녀 교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돈으로 교육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적으로 자녀들에게 투자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자녀교육 때문에 고민합니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여자들의 공통점은 “능력이 없어서” 라고 말합니다.
교육에 대한 방침을 수없이 바꾸어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의 미래는 자녀들을 낳지 않아서 장래가 밝지 않은 나라에 들어갑니다. 자녀들에게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잘 교육한다고 하는데 왜 청소년들에게 문제가 있고 가출하고 탈선합니까? 엘리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잘못 사랑하였습니다. 문제의 인물이 된 것은 몸만 길렀고 인격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양육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먼 곳을 다녀옵니다. 비행기 안에 들어가면 1등석도 있고 비즈니스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비행기를 타고 어느 칸을 탔느냐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느 목적을 가지고 다녀왔느냐 그 목적대로 일을 하고 돌아왔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되는 인물로 키웠다면 자녀를 잘 키운 것입니다. 가정관리를 잘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위대한 인물로 키우려고 합니다. 유치원에서부터 너 무엇이 되려느냐? 대통령이요, 대법원장이에요. 그러면 좋아합니다. 경찰관이에요. 공군 조종사에요. 그러면 화를 내고 그것밖에 안돼. 실망스러운 마음을 갖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 아닌가요?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길러야 합니다. 적어도 남에게 고마운 사람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녀 관리를 잘한 것입니다. 일곱 살짜리와 4살짜리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돌아오면서 보람을 느낀 어머니의 고백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큰 회사 부사장 비서까지 하면서 20년간 일하였다가 전업주부가 되었습니다. School Bus 주차장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딸아이 학교 행사를 돕고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지난 6개월 이상 지났습니다. 어느 날 어린 딸과 대화합니다. 희야, 너는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축구선수? 아니야. 그러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엄마를 바라봅니다. 나는요.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만들고 가족들 옷을 깨끗하게 세탁도 해주는 엄마가 될 거에요. 그 말에 엄마는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어야 대통령도 되고 국무총리도 되는 것 아닙니까!! 엘리는 관리를 잘못했습니다. 비극의 주인공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관리에 성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적인 존재입니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의 저서 『소명』(The Call)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 중에 어느 부자가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하였습니다. 그가 어느 중요한 곳에서 연설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 중 나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업도 잘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많은 돈을 모으고 많은 사람을 거느리면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평안하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맡길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누가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내 인생의 목표를 세우는 거였습니다. 내게 맡겨주신 사명이나 직분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반드시 희극의 주인공이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직분이나 맡은 사명의 귀중성과 소중함을 잊으면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이 희극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가장 소중한 것, 가치관을 상실하지 맙시다. 자기관리에 실패하지 맙시다. 주어진 사명을 다 합시다.
영광이 떠나가기 전에
전승문목사 / 삼상 4:17~22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기회는 지나가는 겁니다. 기회는 지나가기 전에 붙잡아야지 놓쳐버리면 큰일 납니다. 우리의 운명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범하고 죄인이 된 우리들의 운명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결정됐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우리의 운명은 이미 사망으로 결정된 겁니다. 나는 선악과를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범할 때 이미 우리도 함께 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담과 하와 개인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대표입니다. 아담과 하와 안에 모든 인류가 다 담겨있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다는 의미는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는 의미입니다 :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시간을 따라 차례차례 한 사람씩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한 번에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다만 시간을 두고 태어나게 하실 뿐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다 존재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 모두의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죄를 지은 우리는 지옥에 가야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유일한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회를 놓치면 끝입니다. 그러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판결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렇게 운명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악과를 범하지 않았다고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 안에 선악과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임의대로 선과 악을 결정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다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셔도 자기가 보기에는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셔도 자기가 보기에는 악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알게 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는 사람 그것이 깨달아진 사람 그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자기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완성된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를 아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런 죄인인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걸 아는 것 그래서 그것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기회라는 이유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인 겁니다. 신앙생활만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 14:6)”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기회를, 유일한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꼭 명심하십시오. 인생은 기회입니다. 지나가는 기회입니다. 그 기회가 다 지나가기 전에 신앙생활 제대로 하십시오.
엘리 제사장은 그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기회를 유일한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이면서도 이스라엘의 사사이면서도 그토록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엘리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겁니다. 참 기가 막힌 말입니다. 대제사장인데 사사인데 그런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 7:21~23)” 엘리가 그런 겁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사사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많은 권능도 행한 겁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불법을 행하는 자였을 뿐입니다. 이래서 신앙생활이 참 중요한 겁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게 정말 중요한 겁니다.
엘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만 알았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던 겁니다. 엘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저 항상 좋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어떻게 행동하든 항상 좋게만 대해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는 하나님이 아무리 경고를 하셔도 흘려들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니까 끝까지 좋게 대해주실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을 미신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신적인 신앙! 정말 조심해야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미신(迷信)이라는 말은 미혹하는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속이는 신앙 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속이는 것일까요? 누가 미혹하는 것일까요? 마귀가 미혹하는 겁니다. 마귀가 속이고 미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신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귀를 믿는 겁니다. 마귀에게 미혹 당해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줄 알지만 사실은 마귀를 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겁니다. 미신적인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얻고자 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미신은 다 아는 대로 무당이나 점쟁이들을 쫓아다니는 겁니다. 그런 것이 미신이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을 왜 미신이라고 할까요? 귀신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힘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는 진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신앙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은 도둑놈이든 사기꾼이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복채만 많이 내놓으면 다 복을 빌어줍니다. 어떻게 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겁니다. 물론 제대로 된 방법은 아닙니다. 미혹하는 겁니다. 악인들의 꾀를 죄인들의 길을 오만한 자들의 자리를 알려주는 겁니다. 그게 미신입니다. 귀신의 힘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진리에도 영생에도 구원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돈이면 돈, 명예면 명예, 권력이면 권력, 그것을 얻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 신앙을 미신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복(祈福)은 복을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복을 바라는 건 당연한 겁니다. 문제는 그 복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귀가 주는 복에 미혹을 당하는 겁니다. 세상적인 복에 유혹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세상의 영화를 누리면서도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이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을 너무너무 잘못하는 겁니다.
엘리 제사장의 믿음이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그런 식의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 없고 그저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이었던 겁니다(딤후 3:5). 하나님은 그런 엘리에게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지 말라고,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늘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지 않았던 겁니다. 좋은 하나님이니까 언제까지든 계속 좋으신 분일 줄만 알았던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좋은 분입니다. 너무너무 좋은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좋기만 한 분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기회의 시간이 다 지나가면, 엄중하게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렇게 계속 경고하셨지만 엘리는 다 흘려들었습니다. 아무리 경고하셔도 엘리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그렇게 엘리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가요? 여러분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안 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인생은 기회입니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너무너무 중요한 기회입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기회는 오직 신앙생활로만 붙잡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신앙생활, 그 신앙생활만이 인생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겁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십시오.
엘리는 기회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심판의 날이, 무서운 심판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엘리의 시대는 블레셋이 강력한 힘을 갖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시대입니다. 블레셋은 갑돌 곧 크레타 섬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철기문명을 소유한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청동기문명이었는데 블레셋은 철기문명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사시대는 계속해서 블레셋에게 압제 당하는 시기였습니다. 앞선 철기문명을 가진 블레셋 민족에게 이스라엘이 계속 압제 당하는 시기였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전쟁을 선포한 겁니다. 물론 엘리 제사장이 허락한 일이었을 겁니다. 엘리는 대제사장이었고 사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엘리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기도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엘리는 영안이 막혀버리고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하는 무능한 제사장이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홉니와 비느하스 그의 아들들은 타락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로 있는데 전쟁을 일으킨 겁니다. 인간적인 생각만 앞세우고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겁니다.
그러니 패배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참패한 겁니다. 4천 명이나 목숨을 잃고 참패한 겁니다. 안타깝지만 그러나 당연한 겁니다. 무능한 지도자와 타락한 제사장들이 중심된 전쟁이니 패하는 게 당연한 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패하게 하셨는고?” 하나님이 패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보고만 계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면 이겼을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면 블레셋이 아무리 강해도 능히 이겼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실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었지만 회개하지도 기도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은 이유를 엉뚱한 것에서 찾았습니다. 법궤가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런 것이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는 거였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는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만 했던 겁니다. 그들은 법궤만 가져오면 하나님이 함께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실로에서 법궤를 가져왔습니다. 지성소에 있어야할 법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온 겁니다. 이건 엘리 제사장이 반드시 막았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법궤를 이용하는 건 반드시 막아야만 하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엘리는 막지 않았습니다. 막을 힘도 없었고 막을 마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앞장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그 두 아들이 앞장을 선 겁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그들은 하나님이 죽이기로 뜻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 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2장 25절)”
그러니 그 전쟁은 이미 끝난 거였습니다. 아무리 법궤를 가져와도 하나님은 절대로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참담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 3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궤 곧 법궤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 그들도 마침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98세의 나이를 끝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처참하게 망한 겁니다.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완전히 망한 겁니다.
엘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으로, 사사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그 영광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신적인 신앙으로, 기복적인 신앙으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후에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어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가봇!” 이가봇(אִי־כָבוֹד)은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엘리 가문의 영광은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기회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잃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그 기회를 잃어버리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기회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그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신앙생활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교회
이삼규목사 / 삼상 4:19-22
소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주님의 편지 가운데 에베소교회가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소아시아의 모교회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물론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주님으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만일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늘날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가 존재할까요?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기에 그 촛대가 그 자리에서 옮겨진 것입니다.
오늘 현대교회에게도 엄중하게 주시는 경고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경에 제시된 본에 부합하는 교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철저한 개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부흥(復興), 하나님의 숨결
역사 속에서 일어난 부흥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그분께 다시 끌어당기기 위해 그들 중에서 일하심으로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부흥을 갈망하지만 방향을 잘못잡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되돌리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났던 곳, 처음 사랑을 버렸던 곳으로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본질적인 것입니다.
부흥은 새로운 생명을 들이마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생명이나 들이마시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신자들의 모임 위에 임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초대교회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이 바로 부흥의 모델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만 일어날 수 있고, 오직 성령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교회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고 책망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근처 ‘파묵깔레’(목화성)(성경지명은 히에라볼리)라는 곳에 있는 온천물을 파이프로 연결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뜨겁던 물이 파이프를 통과해서 집으로 배달되면서 미지근한 물로 바뀐 것입니다. 그들은 제대로 출발했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올바른 길을 갔지만,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상 큰 부흥운동은 1904년에 웨일즈라는 작은 지역에서 시작된 ‘웨일즈 부흥운동’입니다. 에반 로버츠라는 사람의 지도 아래 부흥이 일어났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하셔야 할 일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셔야 하지만 우리는 성령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을 내어 드리지 않습니다. 웨일즈 부흥이 일어났을 때는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주일 아침에 심지어 목회자가 설교를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친히 행하심으로 목회자가 설교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회중은 <예배용 시편집>에 담긴 찬양을 드렸고, 성령께서 회중 가운데 일하셨으며, 그 누구도 일어나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께서 워낙 놀랍고 압도적으로 일하셨기 때문에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경외의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훈련을 통해 그들의 하나님 인식은 고상해졌고,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고상한 하나님 인식을 통해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러한 고상한 하나님 인식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거 부흥이 일어났을 때에는 사람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예배가 몇 시에 끝날까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입니다. 예배가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을 내고 다른 교회로 옮길까 고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가 빨리 끝나서 세상의 진짜 세계로 어서 돌아가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그들이 머리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과거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그 교회마다 설교가 달랐습니다. 이런 교회의 설교는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경배하게 했습니다. 설교의 초점이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제목이 붙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는 뉴잉글랜드를 뒤흔들어 놓았고 대 각성운동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이 설교, 그리고 이와 유사한 설교들 때문에 교회들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그분을 경외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을 우리의 친구요, 우리의 가능성을 최대한 살려 멋진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분쯤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설교는 어떻게 하면 청중을 재미있게 해주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교회에 계속 출석하게 된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면 교회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가 가장 힘을 쏟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인들을 교회로 계속 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중을 재미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기독교에서 아주 불경스러운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게 필요한 설교는 과거에 교회에 감동을 주었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와 같은 그런 설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나 복음성가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나 복음성가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의 심령을 깨우는 은혜로운 찬송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쓰레기 같은 노래들이 불려 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의 찬양이 경박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대 지휘자나 찬양리더들은 찬양을 선택할 때 깊이 생각하고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교회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바알에게 입 맞추거나 그의 신상에 절하지 않은 그분의 칠천 명을 남겨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든 ‘성장’이라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부터 똑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손실의 근본 원인은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히1:3)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엘리 제사장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장이 아니라 망나니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에게 엘리 집안에 임할 재앙을 말씀하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해 왔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법궤를 앞세우고 전장에 나갔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모시고 전쟁에 나갔는데 그만 법궤를 빼앗겼고 두 아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슬픈 소식이 엘리 제사장에게 전해집니다. 엘리 제사장은 그 비극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의자에 앉았다가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국고 맙니다. 마침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때가 가까웠는데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토록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며느리가 갑자가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해산이 난산이었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인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 여인은 그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관념치도 않고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라고 하여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던 이 쉐키나 영광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마도 더 이상 그들을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위엄을 거두셨고, 쉐키나가 그분과 함께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극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는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는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고 마십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잃어버린 것들
오늘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아주 큰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천지를 만드셨고, 우리 조상들이 경배했던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친구처럼 지내면서 그분을 어떤 위원회의 위원장 정도로 대우하기 원하는 ‘절반만 구원받은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입니까?
1)경건한 두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경건한 두려움이 사라지다 보니 우리 조상들이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향한 경박함과 허물없음’이 생겨났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다른 많은 신들은 어떤 면에서든 그분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신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빈 머리에서 만들어진 ‘사고(思考)의 하나님’입니다. 이런 신(神)은 아무도 놀라게 할 수 없고,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없으며, 누구도 제압하거나 깨뜨려버릴 수 없고, 고양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냥 곁에 있으면 친절하고 편한 신(神)일 뿐입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후일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긴 바알이 바로 이런 신입니다.
2)참 예배를 잃어버렸습니다.
위엄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진 것은 예배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진정한 경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소중이 여겼던 ‘하나님을 향한 공경과 놀라운 경외’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유일한 예배는 그분의 거룩한 성품과 본성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배 대상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3)내면성(內面性)을 잃어버렸습니다.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되려면 내면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두꺼운 겉껍질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의 햇살을 듬뿍 받으며 즐거워하는 내면의 시간을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겉만 번지르 하고 속은 더러운 시체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겉보다 내면이 더욱 중요합니다.
4)영원한 것들에 대한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의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은 완전히 망각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영원한 것들을 의식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죽었을 때에만 잠깐 의식합니다. 우리는 현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지나가는 것에 현혹되어 영원한 것을 놓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것들을 늘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신실한 어떤 노인이 임종하게 되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가족들은 집안에 있는 모든 불을 다 켰습니다. 마침내 밤이 깊어 창밖이 칠흑처럼 어두워졌을 때 노인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불을 끄시오. 해가 떴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밤에 해가 떴다니, 가족들은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알았다.
‘영원히 지지 않는 찬란한 천국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5)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렸습니다.
교회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을 상실한 이유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 인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를 느낄 때가 더러 있지만, 교회를 떠나면 더 이상 느끼지 못합니다. 그분에 대한 의식을 교회에 두고 나오면 안 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경외심과 경이감과 거룩한 두려움과 영적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분을 높이는 그분에 대한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식이 우리에게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영광의 회복
주바나바목사 / 삼상 4:19-22
골프 귀재 신지애 선수의 지난날의 숨겨진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골프를 시작했는데 박세리의 세계제패로 골프바람이 불 때였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박세리 키드’라고 부릅니다. 개척교회 목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동생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2003년 11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두 동생마저 중상을 입고서 병원에서 1년여 동안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주의 종의 가정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커다란 시련이 불어 닥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만 붙잡고서 동생들의 병수발과 운동을 병행해나갔습니다. 넉넉한 가정형편이었던 또래 선수들이 개인레슨과 꾸준한 대회참가, 해외전지훈련 등을 할 때, 그녀에게는 그야 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지애 선수는 2005년 아마추어로 프로대회에서 우승한 데 이어, 2006년부터 3년 연속 국내 여자 그린을 싹쓸이 하면서 일본 대회는 물론이요, 마침내 LPGA 메이저대회까지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한국 선수로서 세계 랭킹 1위 선수가 됩니다. 아마도 한참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여윈 그녀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떠났다!”라고 얼마든지 불평하고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큼은 잃지 않고서 도리어 하나님만을 꼭 붙잡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삶 속에 나타나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삶속에 임한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 제사장의 몰락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엘리는 아론의 아들 이다말 계열의 대제사장으로서, 사사시대 말엽에 대제사장 겸 사사로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도한 인물입니다.
사역 말년에 나이 많은 엘리는 이선으로 물러나 앉고, 그의 젊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서 활동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활동하던 때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곳곳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나 됩니다. 이런 소식에 접한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같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전쟁에서 패한 것이 우리의 잘못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는가! 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며 엎드리기보다는 인간적인 방법론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쟁터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나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런 결정은 내린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동안 이스라엘을 지켜주고 승리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요단을 건널 때에도 언약궤를 앞세우니까 요단이 육지처럼 마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도 언약궤를 앞세우니 여리고 성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짐으로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기억을 생각하며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가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를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맡겼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블레셋과의 전쟁은 이제 곧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가 달려와서 소식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이스라엘 보병들이 삼만 명이나 죽었으며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했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빼앗겼다”라는 보고였습니다.
이때 엘리 제사장은 전쟁터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성문 입구에서 의자에 앉아 승전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앉았던 의자는 제사장만이 앉는 의자로서 히브리어로 ‘키세라’고 하는데, 그의 직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의자입니다.
하지만 엘리 제사장은 나이가 98세나 되었고, 눈은 침침하여 앞이 잘 안보였으며, 몸도 비둔한 상태였습니다. 엘리는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듣자마자 그만 앉았던 의자에서 고꾸라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한 날에 아버지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었습니다.
이 같은 죽음은 여기서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그 당시 엘리의 며느리이자 두 아들 중에 하나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산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요한 때에 기쁜 소식은커녕 오히려 남편과 시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충격적인 죽음의 소식을 듣자마자 맥이 빠지고 기운이 없어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구부리며 복통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런 비느하스의 아내를 바라보며 출산을 돕던 여인들이 그녀를 위로하며 말합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도다. 너희 집안이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네가 아들을 낳았단 말이야!”
하지만 비느하스의 아내는 그 어렵고 힘든 고통 속에 출산한 아들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힘도 없었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떠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참으로 두려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가정이요 교회인가? 아니면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 영광을 거두시지는 않으셨는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들에게 임하신다면 왜 임하고 계시다고 확신하며, 거두셨다면 왜 떠나실 수밖에 없었는가?
참으로 스스로 물어 보기도 두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보기에는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듭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은 아닌가 물어 보게 합니다.
엘리 가문의 몰락은 한 가장의 몰락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이가봇의 나라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의 문제이지만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드물어서 매우 진귀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이가봇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서가 지난날의 기록이지만 오늘 이 시대를 대변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이가봇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그 상징물이 ‘알파고’입니다. 지금까지 보도 듣도 못하던 것들이 경이와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사람들 역시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신세대가 아닌 ‘신인간’들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신인간’은 기존의 방식과 행동양식을 거절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는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신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에 나타난‘네피림’종족입니다. 영성을 거절하고 스스로 신적 존재임을 자인하며 기독교의 가르침을 배격합니다.
천국이나 지옥,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죄 사함과 칭의, 성화, 영화 등의 교리는 구시대 껍데기로 내동댕이칩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인의 자손이며 가인의 문화를 부활시켜 현대판 바벨탑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가봇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와 성도들은 다음 시대의 재앙을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셋의 자손들을 키우고 그들로 가인의 후손들의 불신앙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다음세대는 온통 어둠의 세력들이 조종하는 타락한 지구세상이 될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영광이 회복되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합니다. 막힌 담을 무너뜨리며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화목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영광의 회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구약성서에 이가봇의 반대되는 용어‘쉐키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쉐키나 영광’은 모세가 광야 시절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봉헌하였을 때 ‘쉐키나’가 구름 속에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쉐키나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자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복음의 시대는 쉐키나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쉐키나의 은총이 있습니다.
이가봇인생이 복음으로 쉐키나인생으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가 살아있는 쉐키나 인생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납니다.
쉐키나 인생의 대표적 인물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입니다. 그는 120세가 되어도 전혀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고 눈도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영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육도 강건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쉐키나가 있는 인생입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었어도 엘리 제사장처럼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성도가 있을 뿐입니다. ‘이가봇인생’과 ‘쉐키나인생’입니다. 같은 시대에 살고, 같은 교회에 다녀도 어떤 사람은 엘리 제사장처럼 이가봇 인생을, 어떤 사람은 모세처럼 쉐키나 인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은 어떻습니까?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쉐키나의 가정인지 또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쉐키나가 드러나고 있으신지요?
신약시대는 이가봇인생이 쉐키나인생으로 바뀌는 은혜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은혜는 복음을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언약궤의 회복이 ‘쉐키나인생’이 되는 길입니다.
본문의 주된 관심사는 언약궤를 이방인들에게 빼앗겼다는 내용입니다. 언약궤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4절)라고 표현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궤’를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언약궤는 이스라엘에게 중심이며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과 만남의 방법이 바로 언약궤였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를 이방인들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뜻을 말합니다.
때문에 언약궤에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감당하는 제사장 엘리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약궤를 우상화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언약궤를 우상화하는 이스라엘에게 중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본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답게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궤에 피 뿌림으로 인해 거룩하게 성별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본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들에게 우선 닥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활 속에 믿음. 회개, 그리고 순종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약궤를 우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의 패배가 하나님의 징계인 줄 알지 못했기에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지도자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쟁에 사용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게 결정합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여호와를 조정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언약궤가 그들에게 우상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우상을 이용하여 그들의 개인적인, 혹은 집단적인 이익을 추구하듯, 여호와를 조정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어 보겠다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조정하거나 이용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패역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도 우상숭배로 빠지게 되면 이교도 못지않게 더욱 악할 수 있습니다.
이미 로마 가톨릭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이 성상이나 제단 혹은 소품들에 집착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과 성경의 인물들을 우상화하였고 그 우상을 당연한 듯이 섬기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그러한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사물이던 사람이던 그 어떤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구원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지 않는데 어떻게 언약궤를 갖다 놓는 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패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언약궤가 그들을 승리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들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데, 어떻게 언약궤가 모든 위험과 악령과 원수들에게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길을 구했어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성공한 역사뿐 아니라 실패한 역사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라 하여 늘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실패하는 때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때때로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영광이 떠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들이 정신을 바로차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그렇게 된 원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난 원인은 큰 죄악을 행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블레셋과의 싸움에만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우상과 같이 여겼습니다.
사람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 버리면 닥쳐오는 환난에서 스스로의 문제를 수습할 길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고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영광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고 하여 하나님을 빼앗긴 것은 아닙니다. 궤는 물건이기 때문에 빼앗길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물건이 아니기에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시면서 우리를 위해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작곡가 헨델의 이야기입니다. 헨델은 별다른 계획 없이 겨울을 보내려고 계획했지만 챨스 제닌스(Charles Jennens, 1700-1773)이 자신이 정리한 시를 보내어 작곡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낸 가사 중에 특별히 이사야 40장1절과 5절을 인용한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헨델은 이 시를 읽으며 자신의 이전 작품들과 다른 대작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가 보내준 작사를 가지고 오선지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헨델은 침식을 잊고 24일간 하나의 오라토리오를 만들어냈습니다. 마침내 그의 생애 중 성경말씀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 탄생하였습니다. 헨델이 작곡한 수많은 다른 성경 오라토리오를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 걸작만큼은 해마다 즐겨 연주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헨델의 ‘메시야’(1741년)입니다. 헨델이 메시야를 작곡하던 어느 날 그 집의 일꾼이 들어갔을 때 헨델의 두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일꾼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헨델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가 뵈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쉐키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이가봇의 시대에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쉐키나의 은혜가 항상 있으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