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5년 9월 13일 주일오전
성경봉독 : 스4:1-6; 5:1-2; 마22:34-40
본문 : 학1:1-4
제목 :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는가?”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35편 1,2,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75편 1,4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27편 1,3
설교 후 찬송 - 시128편 1,2,3
성찬식 찬송 - 시103편 1,4
폐회찬송 - 시97편 1,4,5
----------------------------------------------
2022년 10월 16일 주일 오전 예배
낭독설교
성경낭독 : 렘 31:27-34; 눅 18:1-8
본문 : 학 1:1-4
제목 :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는가?”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35편 1,2,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75편 1,4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27편 1,3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128편 1,2,3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 받는 성도 여러분!
학개서는 B.C. 586년에 남유다가 멸망함으로 나라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후에, 바벨론이 페르시아, 즉 바사에게 패하고 바사왕 고레스가 사로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본토로 귀환하라고 명령을 내린 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까지 하박국 말씀을 들었는데, 하박국의 시대는 바벨론이 쳐들어오기 전입니다. 하박국의 주제가 갈대아인, 즉 바벨론이 들이닥치는 것에 대한 경고였지 않습니까? 학개의 시대는 이 하박국에서의 경고가 실제로 이루어져 바벨론이 쳐들어왔고, 이스라엘을 나라를 빼앗겼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거기서 돌아오게 된 때의 시대가 배경입니다.
이렇게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이 바사왕 고레스의 조서를 통해 포로로부터 귀환하게 된 때가 B.C. 538년입니다. 에스라서에 이 이야기가 잘 나오는데, 오늘 학개 1장 1절에도 나오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 이 두 사람이 이 1차 포로귀환을 이끈 사람들입니다. 대략 방금 들은 년도를 통해 생각해보면 아시겠지만, 포로로 잡혀간 것이 586년이고 포로로부터 귀환한 것이 538년이면, 포로귀환은 약 50년 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학개의 배경이 되는 때는 1절 말씀에서 보시는 대로 “다리오 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라고 되어 있는데, 이 때를 지금의 년도로 계산을 하면 정확히 B.C. 520년이 됩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아들이 캄비세스이고, 이 캄비세스가 죽고 나서 왕이 된 사람이 다리오입니다.
고레스는 538년에 포로 귀환을 명령한 후, 530년에 죽었고, 아들 캄비세스는 왕이 되어 8-9년 밖에 되지 않아, 522년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게 죽었습니다. 캄비세스가 죽자 캄비세스의 친척이자 장군이었던 다리우스가 왕의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이 때가 522년이니까, 학개서가 쓰여진 520년은 다리우스가 왕이 된 지 2년째가 됩니다. 그래서 1절 말씀에 보면 “다리오 왕 이년 유월”이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년도 계산이 좀 복잡해 보이지만, 이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지금 학개서가 씌어지고 있는 이 때가 포로로 잡혀간 때로부터 계산하면 거의 70년(586-520), 포로 귀환한 때로부터 계산하면 18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은 이방 땅에서 70년을 살고 있는 때이고, 포로로부터 돌아온 사람들은 이제 이스라엘 땅에 다시 정착한지 대략 20년 가까이 된 그런 시점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에서 손을 뗀 사람들
우리가 학개서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이야기는 학개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1절), 그 전한 내용은 “이 백성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 한다(2절), 그러나 성전이 황무했는데 너희가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3절)”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읽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와서 성전 건축을 해야 했는데, 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을 건축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가 학개의 이 메시지를 통해서 다시 성전 건축이 진행되는 이야기가 에스라 5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하여 돕더니”(스5:1-2)
그런데 사실 에스라서 앞부분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은 포로로부터 돌아와서 성전 재건에 곧 착수했습니다. 538년에 이들이 귀환을 했는데, 에스라 2장 끝부분을 보면 그들의 숫자가 나오고(회중의 합계가 42,360명, 노비가 7,337명,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 그러니까 귀환한 총 숫자가 49,897명), 3장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포로 귀환했던 사람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던 때가 대략 3,4월로 추산됩니다. 그렇다면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그들이 예루살렘에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 지 이년 이월에 ....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역사를 시작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들이 성전 재건에 곧바로 착수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538년에 귀환해서 2년 만에 성전 공사에 들어갔으니 536년 쯤에는 성전 짓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까 살폈듯이 학개의 이야기는 520년의 이야기입니다. 536년에 짓기 시작한 성전이 왜 520년에까지 지어지지 않아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에스라 6장 15절에 보면 이렇게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로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한 후에 “다리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학개서에서 다리오 왕 이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15절 말씀에 보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스라엘은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이십 사일”에 성전 짓기를 시작합니다. 학개에게 말씀을 들은 것이 유월 초하루이니까, 말씀을 들은 지 20 여일 만에 바로 공사를 시작한 것이고, 완공도 4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학개가 이렇게 말하기 전에 거의 20년 가까이나 성전을 짓다가 내버려 둔 것일까요?
직접적 원인 : 신앙적 선택이 반드시 잘 되는 것은 아님
에스라 4장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멈춘 직접적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 봉독에서 읽었습니다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성전을 건축하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에스라 4장 1,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이 말씀을 들어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전을 건축하는 이스라엘을 도와서 함께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3절 말씀을 보면,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절을 보면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왔고, 그들이 함께 건축하자고 했는데,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이것을 거절했고, 이 거절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뒷부분을 읽어보면 사마리아 사람들 외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합니다. 성전 건축이 중단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이런 주위 사람들의 방해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사마리아인들의 협조를 거절하여 결국은 성전 건축이 중단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한 것일까요? 왜 이스라엘은 도와주려는 사마리아를 거절한 것입니까? 이 장면은 제가 예전에 몇 번 설교 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복음서 설교에서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살핀 적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7장입니다. 먼저 24절을 보십시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이어지는 25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처음으로 거기 거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 고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 가운데 보내시며 몇 사람을 죽인지라.”
사마리아 지역이 소위 잡종이 된 것이 이 때문입니다. 앗수르 왕이 여러 지역의 사람을 사마리아에 거주민으로 보냈고, 이들과 섞이면서 사마리아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혈통이 섞인 것이 아니라, 이들이 여호와 신앙에서 엉망이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데서 이렇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아 하나님이 몇을 죽이셨다 했죠? 그래서 26절과 27절을 한 번 보십시오.
여기를 보면 이렇게 사람들이 죽으니 신하들이 왕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열방 사람이 이스라엘의 신을 섬기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냉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하나를 거기 보내서 그 땅 신의 법을 가르치게 하라!”
그래서 파송된 제사장이 사마리아에 온 이방 사람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여호와 신앙을 알게 된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제사장이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것은 소위 ‘전도’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29절부터 32절까지를 눈으로 쭉 읽어보십시오.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신들 만든 이야기) ......” 그래서 33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사마리아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문제는 그들이 ‘여호와를 받아들이되’, 여호와를 ‘유일한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의 많은 신들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요, 믿습니다. 그런데 부처도 함께 믿고, 하나님을 믿는데 알라도 함께 믿는 것입니다. 소위 ‘혼합주의’입니다! 종교다원주의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사마리아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스4:2)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보기에는!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지요? 우리가 주변에서 믿는다는 사람들인데 만나서 교제를 해 보면 자주 느끼는 일들입니다. 같이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이 달라요. 같이 하나님을 말하는데, 그 하나님의 내용이 달라요.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같은데, 그 이름 안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바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거절했습니다. 함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잘한 것입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신자가 참 신앙이 아닌 혼합 신앙을 가진 신자와 “우리는 같은 신앙이니 한 교회가 되자”, 잘못입니다.
소위 오늘날 WCC의 교회 연합 운동을 보는 듯 합니다. 너나 나나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을 섬기고 있으니 같이 사역하자, 하나가 되자! 이것이 교회 역사상의 매 시대마다 항상 있어왔던 사탄의 혼합주의적 책동입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는 바른 선택을 한 것이고 정확하게 자기들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칭찬받을만한 일을 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사마리아가 적대 관계가 되고, 그 때부터 그들의 본성이 드러났습니다. 애초에 성전을 함께 짓자고 한 것부터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의 놀음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성전을 함께 짓자고 했던 이들이 성전 짓는 것을 훼방하는 자들이 되는 시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듣고 나니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왜 학개 시대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20년 가까이나 성전 건축을 멈추고 있어서 하나님께 책망을 듣는지를 살피는 중에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그들은 성전 건축을 멈추었습니까?
직접적인 원인은 대적의 방해입니다. 사마리아인들과, 또 주변의 적대 세력들이, 하나님을 올곧게 믿고, 바른 목표를 향해 전진해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훼방한 것이지요. 그런데 대적 사마리아인들이 그들을 훼방했을 때, 이스라엘이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그들이 불신앙적으로 대응했습니까, 신앙적으로 대응했습니까? 신앙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바르게 대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작 신앙적으로 대응은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비슷한 종류의 어려움들이 계속 몰려오자, 결국에는 성전 건축을 그만둬 버린 것입니다!
신앙적 결단과 이후의 실패
여러분! 이 일이 2천 몇 백 년 전의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이런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흔히 신앙의 실패를, 내가 ‘신앙의 실패의 선택을 할 때에만’ 실패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와 의 중에 ‘죄를 선택할 때에만’ 실패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는 ‘하나님을 위한 선택’, ‘말씀을 따른 선택’, ‘그리스도를 위한 선택’을 할 때에도! 분명 실패한 상황과 같은 것이 올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적으로 옳기 때문에 선택을 하면, 우리는 자주 그 미래가 곧 장밋빛으로 빛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인내에 대한 시험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고, 사탄의 유혹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끈질깁니다!
우리는 자주, 바른 선택을 했지만 곧 힘 빠지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주일을 악착같이 지키기 위해서 회사에서 신앙적 선택을 했는데, 그것이 칼이 되어 날아올 때가 있습니다. 친구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적 결단으로 어떤 일을 행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문제에서 내 손을 들어주시고 좋게 결론을 내려 주실 것이라고 기대를 했는데, 오히려 일이 망쳐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짜 인생이요, 은사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이 거짓으로 꾸며대는 성공적인 신자의 삶과는 전혀 다른, 우리가 실제로 만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신자가 신앙적 선택을 할 때에, 신앙적 선택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는 젯밥”이라는 식의 사고를 싫어하십니다. “결론이 잘 되면 다 잘된 것”이라는 생각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 자체가 바르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가 바른 선택을 했다면 그 바른 선택 자체에 만족하기를 원하시지, 거기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바라는 신앙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성공할 수도 있지만, 때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실패했다면 내 선택은 틀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일이 그르쳐진다고 할지라도, 신앙적 선택이었다면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내 선택의 결과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 자체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택하시겠습니까, 세상을 택하시겠습니까?”라는 문제가 코앞에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선택했으니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더라”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스라엘은 신앙적 선택을 했더라도 사라지지 않았던 위협에 대해서, 성전 건축을 그만두지 말았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에 기쁘고 실패에 힘이 빠집니다. 그건 포로귀환기의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다 매한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육신을 입은 우리는 무엇을 더욱 더욱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모든 시대의 신자들은 혹 내 선택이 신앙적이었던 것으로 인해 그 후에 더 좋지 못한 결과가 오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신앙적 선택을 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욱 더욱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시험을 겹겹이 주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십년이 지나서야 그 일의 결과를 깨닫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종의 결과로는 항상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하나님을 믿고 ‘단지 꾸준히 견지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바라보고 좌지우지, 과정 중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이 시키시는 목표를 향하여, 꿋꿋이 걸어가야 합니다. 동요될 만한 일이 생기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주께서 말씀하신 길을 향하여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그 결과가 당시의 삶에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이탈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는 신앙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곧 의기소침해져 버렸고, 곧 성전 건축을 지속하기를 그만둬 버렸습니다. 이들이 책망 받고 있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판벽한 집에 살아서는 안 됨
그리고 여러분! 오늘 말씀에 보면 이들이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있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성전 건축을 중단했던 사람들에게서 찾아보아야 할 두 번째 교훈은 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호사스러운 삶’에 두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짓지 않고, 자기들은 떵떵거리면서,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 먹고,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그 다음에 나오는 5절부터의 말씀을 쭉 읽어보면,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뒤의 내용들을 보면 그들은 “많이 뿌려도 수입이 없는 상태”에 있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상태”에 있었고, “마셔도 흡족하지 못한 상태”, “입어도 따뜻하지 못한 상태”, “부지런히 일했지만 삯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는 꼴”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들에 의하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경고성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풍족하고 부유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호사스럽게 살지 않았다면 4절의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무엇을 책망하신 것입니까?
저는 이 부분에서 선지자가, 그래서 일부러 여기 “판벽한” 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판벽한”이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이 말은 “화려한”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마 화려하다는 것을 나타내려면 다른 단어를 썼을 것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덮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여기에서 “판자를 대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판벽한 집”이란, 적어도 지붕과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집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집의 모양새를 갖춘 것, 하늘 보고 별 보고 잠드는 곳이 아니라 무언가로 덮여 있는 집, 그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성전에는 투자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호사스럽게’ 지낸다는 것을 야단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황폐화된 성전을 두고도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자체를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지난 주일 설교에서 하박국 말씀은 신자가 두려워해야 할 일로 ‘하나님의 은혜가 마르는 것’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말씀합니다.
신자에게 마른 무화과나무는 절망일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계시니까요. 우리에 양이 없는 것이 절망일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계시니까요. 하지만 유일하게 신자가 절망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면 ‘거기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말라버린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 하나님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전은 황무한데 너희는 지붕이 덮인 집에서 살고 있느냐?”라고 추궁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입자의 설움을 자택 보유자에게 하소연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집도 절도 없는데 너네는 집 있으니 참 좋겠다.” 그렇게 투정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없는 데도’ 잘 사는 것입니다. 뚜껑 덮인 집 안에서 삼시 세끼 밥 먹고, 꼬박 꼬박 일 가고, 자식 손주 보면서 너무나 정상적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이 황무했을 때는 너희의 삶이 정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포로로부터 돌아온 사람들은 나름 신앙적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들었듯이 포로 귀환 명령이 내렸어도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아까 제가 숫자를 말씀드렸지만, 1차 포로귀환 때 겨우 5만명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땅 전체에서 잡혀간 사람이 얼마일텐데, 겨우 5만 명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5만 명은 정말 이스라엘 중에 그나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돌아와서 성전을 지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안 따라 준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쳐서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변명의 여지가 너무 많지요. 내가 게을러서도 아니고, 내가 안 하려 해서도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하나님의 전이 황무했을 때, 정상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무너져 있다고 울며 기도하셔 본 적이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채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애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끊을 수 없는 간구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전이 황무해있는데 내가 부자가 아니라 해서! 나는 겨우 지붕 덮인 집 정도에 살고 있을 뿐이야 하면서! “어쩔 수 없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슬프고 힘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 것에 대해서 괴로워야 하고, 그 때문에 날마다 어떻게 하면 이 황무한 하나님의 집을 바로 세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한 때 나이 마흔이 되니까 기억이 이십 대 같지 않아서, “이제는 열렬히 공부하는 때는 지났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이제는 좀 적당히 쉬면서 살아도 되는 거지......라고 안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신대원에 교수님을 만나러 가서 어떤 분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크게 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연세가 90이 다 되어 가시는데, “지금도 여전히 일할 수 있다”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예전에는 많이 해 본 것’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20대 때는 황무한 성전을 위해서 열렬히 애를 썼지만, 이제는 시기가 지났다......해서는 곤란합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산 때가 있다......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건강을 허락해 주셨습니까? 놀러 다니고, 삶을 즐기고, 그렇게 나를 위해서 투자하면서 살라고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를 위해 사십시오. 주께서 주신 삶입니다. 하나님의 전이 황무해 있음을 안다면, 황무한 전을 위해, 내게 벽돌 한 장 들 힘밖에 없다면 벽돌 한 장 드는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것 하지 아니하고, 능력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온갖 핑계로 자신을 방어하면서, 그렇게 “판벽한 집”, 곧 “나는 겨우 먹고 살고 있어요!”라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이 지어지고 있지 않다면 내 삶이 정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이 황무한데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묻고 계시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이 한 주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내가 서 있는 이 작은 자리에서 주를 위하여 살기 위하여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닫게 해 주시는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께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