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性淵源譜)의 허구성(虛構成)
1880년생 김경대(金景大)가 평안북도 벽동(碧洞)에서 족보를 갖지 못하였다가 1924년에 경김족보갑자년(慶金族譜甲子年)이라는 허황(虛荒)된 족보를 처음 만들면서
“내가오직 을묘가을에 족보를 이루겟다는 뜻을 굳히고 이에 7.8.년에 이르러 각도를 유람하여 고적 등본 김충한공 서문 오래된 묵보초본 및 6세조 대우공 집에 있는 문적을 살펴보고 의문없이 떳떳하게 편집할 마음을 굳혔는데 나의 중손 적선공 차증손 영진씨 후손은 전라 함평군에 살고 있으므로 다 기록 할 수는 없으니 후세 자손들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계보를 찾아주고 양해를 바란다” (김경대가 본인 족보에 기재함)
(惟我乙卯秋 成譜趣旨令至七八年 各道遊覽古蹟 腾本 金冲漢公 序文上古 墨譜草本及 六世祖大佑公家所 文蹟可考一遵編緝心常無 疑吾中祖積善公次 曾孫永珍氏后孫則 全羅咸平郡 仍居故不 可盡記後世子孫先代來系 詳尋以此諒解)라고 설명하고는 자신을 김충한의 32세손으로 밎추기 위하여 직계조상을 작명 조작 계대하고 사실(史失)로 조상계보가 밝혀지지 않아서 보결(譜缺)로 비워둔 계림군파와 태사공파의 조상계보를 임의작명날조(任意作名捏造)하여 영분공파, 계림군파, 태사공파 합보를 2권으로 만들었는데(국립도서관한58-가5-5-126) 국사인 시조 대보공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는 오자만 있을뿐 대과없이 국사(국사)인 정보와 같았으나
그 이후로 터무니 없는 임의 조작과 날조를 하였다.
일언방구 설명이나 근거도 제시하지않고 임으로 날조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전부다 열거 하지는 못 하겠지만 중요한 일부분만 지적하면 경순왕비 죽방부인 박씨소생이 정보에는 생 3남1녀인데 여기 에서는 생8남1녀로 태자 일(太子 鎰). 전(佺). 요(瑤). 곤(琨). 영(英). 분(奮).등 5형제가 더 있다고 하였고 태사공 인관(太師公 仁琯)을 대안군은열(大安君 殷說)의
12세 장손(長孫)으로 장군공 순웅(將軍公 順雄)을 대안군의 5세손 한공(漢公)의 동생 연공(沇公)의 손자로하여 대안군의7세손으로,대안군의5세손 품언(稟言)의 아들 4형제 금영. 한남, 용담, 김씨선대 순보(順輔) 순거(順擧) 순서(順瑞)순단(順端)을 한공의 아들로 뒤바꾸고
계림군파와 태사공파의 적장 종통마져 뒤바꾸어 놓고 10년후인 1934년에는 의주(義州)로 옮겨와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性淵源譜)라고 하는 괴상한 족보1권을 발행 하였는데 박(朴) 석(石) 양씨는 설명을 줄이고 우리들의 시조이신 대보공(大輔公) 후예만을 살펴보면 국사(國史)인 시조 대보공부터 28세손 경순왕까지의 계보중 경순왕의 19세조부터 16세조까지 정보(正譜)상에 습보(習寶) 지증왕(智證王) 진종(眞宗) 흠운(欽運)을 사도(斯道) 구해(九解) 이천(伊天) 미휴(美休)로 뒤바꾸고
14세조이신 법선(法宣)의 아들이 경순왕의 13세조이신 의관(義寬) 한분이신데 진지왕(眞智王)의 후예인 연충(蓮忠) 충필(忠弼) 필긍(弼肯) 긍현(肯玄) 4대를 법선의 큰아들 계보로 조작 하였고 정보에는 경순왕의 6세조이신 문성왕(文聖王)의 큰아들이 안(安)이시고 민공(敏恭) 실홍(實虹) 이자효종(二子孝宗) 경순왕으로 이어졌으며 문성왕의 둘째아들 식(軾)이고 식의 아들이 인경(仁慶)이신데,
신라삼성연원보에는 인경을 한 대 내려서 민공(敏公)의 둘째아들로 하여 경순왕의 조부이신 실홍(實虹)대신 인경(仁慶)으로 뒤바꾸었는데 김경대(金景大)자신이 10년전 처음 발행한 경김족보 갑자년에서는 국사의 정보와 같이 발행하였고 10년후에 발행한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국사를 뒤바꾸었으면 근거의 사료(史料)를 제시하고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임에도 일언방구 설명도 없이 계보만 바꾸어 놓았으니 어찌 미친놈의 잠꼬대라 아니할 것이며
신라삼성연원보를 근거없는 잡보(雜譜)라 아니할 것인가(비교표후첨) 또한 정보에는 경순왕비 죽방부인 박씨가 생3남1녀하고 낙랑공주 왕씨가 생5남2녀 별빈안씨 생1남이신데
김경대가 1924년에 처음 발행한 경김족보 갑자년에는 죽방부인 박씨 생8남1녀 낙랑공주 생5남2녀라 하고는 동일인 김경대가 10년후인 1934년에 발행한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송희부인석씨(松希夫人昔氏)생5남 죽방부인박씨 생3남1녀 낙랑공주왕씨 생5남2녀라하여
경순왕비 한분을 더만들고 우리들의원조 순웅장군공을 1924년에 만든 경김족보 갑자년에는 경순왕의 넷째아들 대안군 은열(殷說) 태화(泰華) 정구(正矩) 계령(繼苓) 연공(沇公) 수서(壽西)
순웅(順雄)으로 대안군7세손이라 하더니 싱라삼성연원보에서는 마의태자의 둘째아들이라 하여 5세를 줄였으며 태사공파의 증조인 태사공 김인관(太師公 金仁琯)을 1924년 경김족보 갑자년에서는 대안군 은열(殷說) 태화(太華) 정구(正矩) 계령(繼苓) 한공(漢公) 경보(景輔) 세린(世麟) 태서(台瑞) 약선(若先) 미(敉) 인관(仁琯)으로 대한군의 12세손이라 하더니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대안군 은열을 감(鑑)이라하고 은열의 아들을 심(深)이라 한 다음 정구(正矩) 계윤(繼尹) 양검(良儉) 인관(仁琯)이라 하여 태사공 김인관이 대안군 6세손으로 6세를 줄였고 판도판서공 김장유(版圖判書公 金將有)를 1924년의 경김족보갑자년에서는 소목의 기록이 없었는데 신라삼성연원보에서는 감(鑑) 심(深) 중구(重矩) 원개(元槪) 지공(之恭) 여생(麗生)필손(弼孫) 언보(彦輔) 익정(益精) 덕립(德立) 수(秀) 장유(將有)라 하여 중구부터 수까지 9대를 작명(作名) 삽입한것,
이외도 수도 없이 많으므로 신라삼성연원보가 털끝만큼도 참고 가치가 전무(全無)한 잡보(雜譜)라는 것은 명확 할 것인바, 1880년생인 김경대는 족보도 갖지못한 가계(家系)였으나 한일 합방후 왜정에서 침탈의 목적으로 호적을 편재할때 성(姓)과 본관(本貫)을 본인의 희망대로 부여 하니까,
경주김씨로 등재하는 1924년초 평안북도 군남답동(郡南沓洞)에서 주인없는 큰무덤을 발견한다음
그 무덤을 자신의 입벽중조(入壁中祖=처음벽동에 들어온증조) 병판공 김보남(兵判公 金甫南)묘로 하여 족보를 처음 만들었음은 경김족보 갑자년의 서문과 병판공 묘지와 발행동기를 후기로 써놓은 내용으로 보아 능히 짐작 할것이며 1924년에 족보를 처음 만들면서 고려말기 예의판서 김충한(禮儀判書 金冲漢)공이 명나라 홍무28년 을해인 서기1935년에 영분공(永芬公)부터 자신의 조부까지 벼슬한 직계조상들만의 관작을 적어놓은 근지(謹誌)를 입수하고
1784년에 대안군묘지가 발견됨으로서 영분공이 경순왕의 셋째아들인 김명종(金鳴鐘) 이라는 것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자 김경대 본인의 가계를 예의판서 김충한의 후예로 계대하면서 예의판서공의 조상계보를 영분공파의 기존 족보와 비숫하게 수록 하였으나 10년후에 만든 신라삼성연원보 에서는 자신과 계대를 맞추기 위하여 예의판서공의 조상계보를 뒤바꿈으로서 영분공 기존 족보와도 판이(判異)하게 다르기 때문에 신라삼성연원보를 경주김씨 영분공파 대종회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직접 물어보지 않아도 계보연구회에서 신라삼성연원보를 국립도서관에서 복사한 다음 즉시 영분공 예하의 계보를 기존 족보와 같게 재조작하여 판매 하였던 것만 보아도 명확 하다,
할 것인데.(영분공후손 계보연구회 계림지 편집장 김용석 소행으로 간주) 자칭 경주김씨 대장군공파는 희귀본 이라고 맹신 하고 자칭 대장군공파 대종회에서는 조원수도 얼마 되지 않는
일부 지파에서 그 계보에 따라 족보를 만들었는가 하면 앞으로 순웅장군공의 조상계보를 조작된 신라삼성연원보의 계보에 따라 대동보를 편찬 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인데 명문 거족인 경주김씨 계림군파 종원으로서 어찌 동의 할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기 짝이없는 일이다.
참고사항 : 고려조말 예의판서 김충한의 조상 계보지 홍무28년 을해=1395년.
김경대는 1880년생 이며 1935년에 신라삼성연원보 발간 고로 김경대가 만든 족보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
http://www.gyeongkim.co.kr/ 경김회관3층
우리겨레 姓氏 이야기
족보의 허구성에 대한 좋은 예로 <신라삼성연원보>를 들 수 있다. 신라계 김씨, 박씨, 석씨 왕과 그 후손들의 계보를 엮은 책이다.
그 내용은 실제 우리의 국사책이나 학자들의 문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큰 차이가 난다.
어디서 꿰맞추었는지 마치 소설 같은 허구적인 기록이 많은 것이다.
엮은이는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김경대(金景大)란 사람이다.
그의 찬술 1권을 보면 신라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큰 아들 김일(金鎰 마의태자)을 다섯 번째 아들로 기록해 놓았다.
또한 경순왕의 부인 박씨(죽방부인) 소생의 아들이 3명이 있고 앞서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 소생의 아들이 5명이 있었다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경순왕 재위때 오로지 박씨성의 죽방부인만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여 <신라삼성연원보>의 내용과는 차이를 보인다. 마의태자 위로 요, 곤, 영, 분 4명의 형이 있었다고 기록해 두었는데 역사학자들은 그 자체가 분명한 허구라고 밝힌다.
어떤 학자는 <신라삼성연원보>에서 보는 왕자들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왜? 4명의 형을 제쳐두고 마의태자가 경순왕 앞에 나서서 ‘고려국에 나라를 그냥 내 주는 것은 불가(不可)하다’는 간언을 했을까? 문제를 제기한다.
<신라삼성연원보>는 1934년에 출간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의 족보 발행을 허용했던 시기이다.
이당시에는 가짜족보 출판이 성행했다.
<金丁鉉 著> 우리겨레 姓氏 이야기(2009년 지식산업사 간) 중에서...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