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 이야기] 석양은 한없이 좋은데, 다만 황혼이 너무 가깝구나
2024.10.18.
가을이다. 서리 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더 붉고, 익으면 익을수록 벼는 더욱 누러 진다. 지는 노을은 한없이 좋으나, 다만 황혼이 너무 가까이 있구나.
모닥불은 안다. 쇠잔한 불빛 사이로 화려한 불꽃이 불끈 솟으면서 사그라진다는 것을. 세상에 늦은 때란 없는 법, 아무리 시시한 삶이라도 언제나 하이라이트는 있게 마련이다.
여기 한 남자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다. 그때는 그랬다. 이발사가 의사를 겸했다. 빨강, 파랑, 흰색이 빙빙 도는 이발소 간판을 달 때 “난 의사요”라는 의미도 있다.
일곱 살이 되자 집은 압류당해 전 가족이 떠돌이 생활을 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 부끄러움과 비참한 삶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는 인생 역전을 꿈꾸며 해군에 입대한다. 오스만제국과 맞붙은 레판토해전이다. 조국은 승리했지만, 그는 여기서 왼팔을 잃었다.
결코 그의 인생에서 행운은 없는 듯, 귀국길에 해적에게 붙잡혀 5년 동안 감방 생활을 한다. 그때가 33살이었다. 누이가 돈을 주고 풀려나자, 이제는 허락 없이 교회의 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또 감방에 간다.
그는 한 권의 소설을 구상한다. 무려 20년 동안, 어디 남아나는 것이 있었을까? 바로 ‘돈키호테’였다. 첫 원고가 탈고할 무렵 이미 다 산 듯한 58세였지만, 초 대박이 났다. “시대를 초월하는 최고의 명작”이라 하였지만, 명성만큼 돈은 따라오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다.
누가 이 사람에게 희망을 걸겠는가? 학력은 의심되고 외팔이에다 해적질 사기꾼이라 놀림받은 이 사내에게 황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또 한 남자가 있다.
노론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집은 가난했다. 젊었을 때 우울증이 심하여 너나 할 것이 어울렸다. 장사치는 물론 지나가는 거지, 똥 지게꾼, 돼지 치는 상놈 등 닥치는 대로 저잣거리로 나아가 만나기 시작했다.
이런 삶이 오래 되자, 주위에는 외로움 가득한 불운한 천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한 서얼들, 이제 그들마저 슬그머니 벼슬길로 떠나자 44세에 삼종형을 따라 청나라로 떠난다.
집안 살림을 도맡았던 큰 형수가 죽는다. 아내가 살림을 맡기 시작한다. 살림이 점점 궁색해지자, 마지못해 절친의 도움으로 종 9품 ‘선공감역’에 임명된다. 그때가 50세였다. 어쩌면 다 산 나이가 된 나이에 생계형 공무원을 시작했고, 이제 이밥에 고깃국 정도는 먹게 될 만 하자, 그만 1년 만에 아내가 죽는다. 이듬해에 또 맏며느리마저 죽는다. 주위에는 땟거리를 끓여 줄 사람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그의 나이 55세에 겨우 지방 현감 종 6품이 되고, 57세에 임금으로부터 글을 잘못 썼다고 질책을 받고, 63세에 속죄하는 양으로 책 한 권을 지어 바치고, 66세에 벼슬을 그만둔 지 3년 만에 죽는다.
드디어 그가 죽은 후 127년 만에 문집이 인쇄되고 세상에 전모가 드러나자, 조선 제일의 문장가라 칭송한다.
삶이란 결코 늦은 법이 없다. 해가 지려 한다. 노을이 찬란하다. 해가 땅 아래로 사그라들자 밋밋한 하늘이 이어진다. 이제 "끝났구나"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은은한 노을이 서쪽 하늘에 번지면서 주황빛으로 물든다. 홀 황한 황혼이다. 나는 황혼이 여명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언제나 안다.
*사진은 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