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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곤 신당에 안치된 언약궤
삼상 5:1-5
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3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삼상 5:1-5 / [재앙을 당한 블레셋의 다곤 신] 블레셋 족속은 법궤를 전리품으로 처리하여 에벤에셀에서 자기 나라의 중심지에 있는 도성 아스돗으로 가져갔다. 2) 그곳에는 그들이 섬기는 신 다곤의 신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이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까지도 자기들의 신에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여호와의 법궤를 다곤의 신전으로 메어다가 신상 곁에 갖다 놓았다. 3) 아스돗 사람들이 그 다음날 아침에 신전으로 들어가보니 다곤의 신상이 거꾸러져서 여호와의 법궤 앞에 엎어져 있었는데, 그 얼굴이 땅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들은 즉시 신상을 일으켜서 제자리에 세워 놓았다. 4) 아스돗 주민들이 그 다음날에도 아침에 일찍 다곤의 신전으로 들어가 보니 다곤의 신상이 또 여호와의 법궤 앞에 거꾸러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머리와 두손이 부러져서 문지방 위에 뒹굴고 있었다. 5) 그래서 다곤을 섬기는 제사장들이나 그 신전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오늘날까지 다곤 신전의 문지방을 밟지 않고 다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여호와의 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다곤 신당에 전리품으로 바쳤는데 다곤 신상이 엎드러지고 파괴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으로 옮김(1) 블레셋은 아벡 전투(삼상 4:1)에서 이스라엘로부터 여호와의 언약궤인 여호와의 궤를 빼앗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궤를 빼앗긴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저희들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빼앗은 여호와의 궤를 아스돗으로 옮겼습니다. 아스돗은 블레셋의 주요 5대 성읍의 하나였습니다. 블레셋이 여호와의 궤를 이곳으로 가져온 이유는 그들이 섬기는 다곤 신전이 그곳에 있었기에 여호와의 궤를 전리품으로 다곤 신에게 바치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곤 신상의 파괴(2-4) 다곤은 고대 셈족의 풍요의 신으로 널리 숭배되어 온 우상입니다. 블레셋족은 팔레스틴에 정착한 후 이 우상을 받아들여 민족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다곤의 상체는 상아로 꾸민 원추형의 왕관을 쓴 사람의 모습이고, 하체는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궤를 다곤 신전에 둔 것은 전쟁을 승리하게 한 다곤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또한 여호와를 포로로 잡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곤 신상의 머리와 두 손이 끊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다곤 신전의 금기(5)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다곤 신상의 끊어진 머리와 두 손이 문지방에 있었기에 신전의 문지방을 밟지 않는 금기사항이 생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만 신성하게 여겼던 것이 아니라 신전의 문지방까지 신성하게 여겼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 즉 사무엘상이 기록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또한 그 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습 1:9).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적 용 : 하나님의 법궤가 우상의 신전에 바쳐지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높임을 받으시도록 오늘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고대의 문헌들을 보면 당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단순히 군사들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그들이 믿는 신들의 전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긴 나라는 그 나라의 신이 패배한 나라의 신을 이긴 것이라 여기고 상대국의 신상을 부수거나 빼앗으므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긴 블레셋의 신은 형편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궤 앞에서 엎드러졌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누가 참 신인지를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5:1
블레셋...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 '하나님의 궤'(the Ark of God)는 블레셋 족속에게는 자신들의 역사 이래 최대의 전리품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블레셋 족속이 아벡 전투에서 하나님의 궤를 탈취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담대하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들의 처음 염려(4:6-8)와는 달리 그 궤가 어떤 능력을 나타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그 궤로 인한 공포에서 벗어났기 때문인 듯하다. 아스돗에 이르니라 - '아스돗'(Ashdod)은 원래 여호수아에 의해 유다 지파에게 분배되긴 하였으나(수 15:47) 그 지파에 의해 정복되지는 못했다. 이 도시는 강대국 애굽과의 교역을 위한 근거지였고, 또한 애굽으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점에서 블레셋의 도시 중 중요하게 여겨졌다. 수 11 :22;13:3 주석 참조. 한편 블레셋 사람들이 이때 여호와의 궤를 이곳으로 가져온 가장 큰 이유는, 이곳 신전(神殿)에 모셔진 자신들의 다곤(Dagon) 신에게 그 궤를 일종의 예물로서 바치기 위함이었다. 법궤의 이동 경로 - 여호수아시며 이래 계속 실로(Shiloh)에 있었던 법궤는 마침내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르러 옮겨졌다. 즉 엘리의 두 아들의 주관하에 법궤는 실로로부터 에벤에셀(Ebenezer)과 아벡(Aphek)사이의 전쟁터로 이동되었다(4:4, 5). 그러나 이 싸움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블레셋 족속에게 범궤를 빼앗겼다(4:11).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족속은 처음 그것을 아스돗(Ashdod)으로 가져갔다가, 곧 가드(Gath), 에그론(Ekron)으로 옮기었다(5:1-10). 그 이유는 법궤가 가는 성읍마다 독종 재앙이 발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블레셋 방백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숙의(熟議) 결과 암소 두 마리가 모는 수레에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 땅의 벧세메스(Bethshemesh)로 돌려보내게 되었다(5:11-6:15). 이후 법궤는 곧 기럇여아림(Kiriath-jearin)땅의 엘리아 살의 집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법궤는 이곳에서 근 20년 동안 안치되었다(7:1, 2).
=====5:2
다곤( , Dagon) - 고대로부터 이 우상은 메소보다미아, 앗수르, 베니게 지역 등지에서 널리 숭배되어 온 우상인데(The New Bible Dictionary), 블레셋 족속은 이 우상을 베니게 족속들에게서 수입하여 자신들의 민족 수호신(民族守護神)으로 삼은 듯하다(H. Schmokel). 그것은 이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 '아스돗' 뿐만 아니라 '가사'(삿 16:23) 등 블레셋의 주요 성읍 여러 곳에 세워진 사실로 미루어 보아 분명해진다(R. Payne Smith). 한편 이 다곤( )의 어원(語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상호 이견이 있는데, 크게 다음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될 수 있다. 즉 (1) '다곤'을 '물고기'란 뜻을 지닌 '다그'( )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보고, 곧 '다곤(Dagon) 신'은 '물'과 '물고기'를 토템(Totem)으로 한 신으로서, 자연의 활력 및 무수한 번식력을 상징하는 '풍요의 해양신'으로 보는 견해(Jerome, Kimchi, Keil, Bochart, Fay), (2) '다곤'을 '곡식', '곡물'이란 뜻을 지닌 '다간'( )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보고, 곧 '다곤(Dagon) 신'을 땅의 비옥과 땅의 열매를 상징하는 '풍요의 농경신'으로 보는 견해(Albright, Ewald, Bunsen, De Groot, Gaubert) 등이 있다. 그런데 다곤 신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바, 레이야드(Layard)에 의해 콜사밧(Khorsabad)에서 출토된 양각(陽刻) 조각품의 그림에 따르면, 몸의 상반신은 수염이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왕관을 머리에 쓴 형상이고, 몸의 하반신은 물고기의 형상으로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Layard, Nineveh, ii. p. 466).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전자의 견해대로 다곤 신이 '물' 또는 '물고기와 밀접히 관련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마리(Mari), 우가릿(Ugarit) 등지에서 발견된 고대 문헌을 살펴보면 블레셋 족속은 분명 이 우상을 곡식의 풍작을 위하여 숭배한 것으로 보인다(M. J. Mulder).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블레셋 족속은 이 다곤 신에 해양 민족의 특성을 가미시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가나안의 농경신의 영향을 받아 이 우상을 '곡식의 풍작을 위해' 숭배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L. Wood). 특히 우가릿(북부 가나안) 문헌(Ugaritic Texts)에 나타난 바, 다곤 신이 가나안의 농경신인 바알 신의 아버지로 기록된 사실은 이러한 점을 보다 분명히 뒷받침해 준다. 삿 16:23 주석 참조. 다곤의 당 - '다곤 신당'(Dagon's Temple)은 블레셋 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았으나, 고대 우가
후 그 지역의 여러 관습 및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보여 준다.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 블레셋 족속이 아벡 전투에서 탈취한 여호와의 궤를 자신들의 '다곤의 신당' 에 가지고 들어가 그 곁에 놓은 것은 (1) 자신들에게 숭리를 가져다 준 다곤 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Keil), (2)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다곤 신의 우월성을 나타내려는 상징적 행위 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Smith).
=====5:3
다곤이...엎드러져...땅에 닿았는지라 - 여기서 '엎드러지다'( , 나팔)는 주인 앞에서 종이, 군왕 앞에서 봉신이, 신 앞에서 사람들이 경배할 때의 자세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20:41;25, 24;수 7:6;삿 13:20;에 7:8) 더구나 이 단어는 '항복하다'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왕하 7:4). 따라서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곧 다곤 신이 여호와 앞에 항복했음을 상징한다. 이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확증하신 것이다(갈 6:7;출 20:7). 다곤을...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 이것은 블레셋 족속이 본절 초반부의 사건, 곧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진 사건을 우연으로 보았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사실상 본절의 사건은 블레셋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징계였으며, 또한 블레셋의 우상 다곤에 대해 당신의 우월성을 확증하시기 위한 신적인 행위였다.
=====5:4
그 이튿날...다곤이...끊어져 - 전날에 일어난 사건(3절)보다 블레셋 족속들에게는 더 심각한 양상으로 비쳐진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1) 블레셋 족속이 첫번째 싸움 때(4:2)보다 두번째 싸움 때(4:10) 더 많은 이스라엘 군인을 살륙한 것에 대향 묵시적 징계이며, (2) 블레셋 족속이 하나님의 우월성이 현시된 첫번째 사건의 의미(3절)를 깨닫지 못한 데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었다. 머리 - '상상', '생각', '지혜'를 상징한다(계 13:16). 손목 - 이 단어( , 카포트, 문자적으로는 손바닥)는 '활동', '능력'을 의미한다(계 13: 16). 한편 우가릿 문헌(Ugaritic Texts)에는 여신 아낫이 자신의 허리에 달린 머리와 손바닥으로 적과 싸우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머리'와 '손목'이 뜻하는 바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Pritchard).따라서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란 말의 의미는 전투에서의 완전한 패배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17:51;31:9). 문지방에 있고 - 이 말은 고대 중근동 지역의 미신적(迷信的)풍습을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고대 중근동 사람들은 문지방(threshold) 밑에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진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 집안 사람들을 보호해 주고 있는 여러 종류의 귀신들이 살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곤의 목과 손을 부러뜨린 채 문지방에 걸쳐 놓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공격에 대해 잡귀 따위의 도움이나 받아야 하는 다곤 신의 비겁한 모습을, 다곤 신의 우월성을 믿는 블레셋 족속들에게 분명히 보이시려는 의도 때문이었다(삿 19:25-27). 아울러 다곤 신을 경배하기 위해 다곤 신전의 문지방을 넘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곤 신의 무능력함을 똑똑히 보여 줌으로써 경멸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5:5
그러므로...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 하더라 - 다곤의 숭배자들이 이처럼 다곤 신당의 문지방을 밟지 않고 피해 넘어간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숭배하는 다곤 신상의 머리와 손이 일시 놓여져 있었던 곳이므로 그곳을 신성시했기 때문이요, (2) 다곤 신도 보호를 요청하는 만큼, 그 문지방 밑의 귀신들을 성나지 않도록 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같은 풍습은 그 후에도 이방인들에게서 계속되었다(습 1:9). 오늘까지 - 이 말은 사무엘서가 기록된 때까지를 가리키며, 따라서 본절의 사건이 있은 지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난 후 본서가 기록되었음을 암시한다. 결국 이는 본 사건과 관습의 역사적 사실성을 확증하는 표현이다.
< 설 교 >
파괴되고 말 우상
삼상 5:1-5 / 이수영목사
우리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4천 명의 전사자를 내며 패배하자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싸우러 나가면 이길 것으로 생각하고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가져왔으나 다시 치룬 전투에서 오히려 3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대패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궤를 이방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당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소 의아함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요단강물을 갈라지게 하고 여리고성을 무너지게 하던 그 언약궤가 방약무도한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어쩌면 그렇게 무력한 채로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놀라운 일들을 행해오신 하나님께서 그 이방인들 앞에서 어쩌면 그렇게 침묵하시며 수수방관하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의 무반응과 하나님의 수수방관은 오직 쇠락한 영적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향해서였을 뿐이고 결코 방약무도한 블레셋에게도 그런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 곧바로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록의 일부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에벤에셀에서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아스돗은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로서 그들의 우상 다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예배중심지였습니다. 다곤은 수천 년 동안 근동지역 전체에서 큰 신으로 여겨졌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의 신상 곁에 두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그들이 승리했으며, 따라서 패배한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섬기듯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곤 신을 섬겨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상징적 조치였던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묵과하실 리가 없는 하나님의 반응이 당장 나타났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그 얼굴이 땅에 닿은 채 엎드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경배와 굴복의 표시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곤을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을 일으켜 다시 제 자리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또다시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그 얼굴이 땅에 닿은 채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번에는 그 머리와 두 손목이 잘려 있었던 것입니다. 머리나 손목을 자르는 것은 전투에서 적을 이기거나 처형할 때 흔히 있는 일입니다. 다곤은 하나님의 적수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아 파괴되고 사라져야 할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첫날 아침 다곤의 신상이 엎드려져 있었던 것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 사람들이 그것을 다시 세우려 해봐야 헛일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 하나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당신만이 참 신이시며 사람들에 의해 신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실상 아무 것도 아님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대승을 거두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탈취하는 뜻밖의 전과를 올렸다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궤로 하여금 말없이 블레셋의 손에 의해 블레셋 땅으로 탈취당해 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정신과 삶의 중심인 다곤의 신전으로 들어가 그들의 신 자체를 굴복시키고 파괴해버림으로써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참 하나님이시며 주권자이심을 알리는 역사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징은 블레셋의 우상 다곤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곤을 섬기며 하나님의 궤를 함부로 빼앗아 가져온 블레셋 사람들 또한 응징하셨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6절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받을 저주에 대하여 모세를 통해 경고하시며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라"(신28:27)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블레셋도 같은 재앙으로 응징하신 것입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5:7) 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방백들은 대답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했습니다(5:8). 가드 또한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가드로 옮기라고 한 것은 아마도 그 주민 중 일부가 이스라엘 사람이었든가 적어도 이스라엘과 호의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서 하나님의 공격을 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계산은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궤를 가드로 옮겨 간 후에 하나님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셔서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 것입니다(5:9). 블레셋 사람들은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에그론 또한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르자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5:10) 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말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을 면하게 하자" 했습니다(5:11). 이렇게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6:1) 동안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했고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셔서 많은 사람이 죽었거나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합니다(5:11-12).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는 것은 그 이방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고 섬기지도 않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땅과 모든 족속의 주권자이심을 여실히 보이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겨보았으나 하나님의 재앙이 갈수록 더 심해지자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의 땅으로 돌려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6:1-12).
이 하나님의 궤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궤는 언약의 궤이고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의 궤를 앞세우시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성실할 때에는 비록 그 백성이 하나님의 궤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갈 때에는 이스라엘을 이길 족속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는데 언약궤만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은 어떤 족속도 싸워 그들을 이기고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을 이긴 것이 곧 하나님을 이긴 것은 아니며 언약궤를 빼앗은 것이 곧 하나님을 굴복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하나님에 의해 그의 백성을 징치하시는 도구로 사용된 족속이라 하드라도 그들 자신의 우상숭배와 악행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따로 엄히 응징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싸움의 궁극적인 승리자이고 유일한 승리자인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땅에서 거짓 신들을 다 파괴하시고 참 하나님으로 경배를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동시에 크나큰 위로와 경고가 되는 사실입니다. 먼저 지금 우리의 저 북녘 땅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북한 땅은 이 지구상의 가장 고약하고 우스꽝스러운 우상숭배의 공장이 되었습니다. 평양의 장대현교회가 섰던 자리에는 지금 거대한 김일성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북한 땅에는 무려 29,000개 이상의 김일성 동상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태양신으로 불리며 절대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또 하나의 태양신이 만들어졌습니다. 김정일입니다. 한 때는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하던 평양은 지금은 아스돗의 다곤 신전처럼 되었습니다. 거기서는 공식적인 교회라고 하는 것들도 다 김정일을 섬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궤를 다곤 신상 곁에 갖다 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북한주민들은 마치 블레셋에게 패한 이스라엘과 같이 되었습니다.
남쪽의 우리 대한민국의 사정은 또 어떻습니까?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추구해온 대한민국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에 있어서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남북 간의 엄청난 격차를 이루게 한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종교의 자유를 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교회를 세우며 전도를 힘쓴 일과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박멸시키기에 혈안이 되어온 것 사이의 차이가 그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만유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 대한민국 땅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의 우상들을 숭배하는 자들이 점점 그 세를 확장하더니 이제는 그들 천하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청와대를 비롯해서 정부 여당뿐 아니라 사회, 문화계의 핵심요직에 있는 많은 인물들이 주체사상 추종자들이며 김일성-김정일 태양신숭배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전에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평양을 향해 절부터 하고 서로 만나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줄인 "위수김동"을 인사말로 주고받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현대판 다고니스트 즉 다곤숭배자들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철저한 독재권력자이고 가장 가혹하고 악랄하게 인권을 유린해온 자이며 자기들은 온갖 사치와 부귀영화를 다 누리면서 수백만 동포를 굶어 죽게 만든 철면피이고 특히 동양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과 북한 땅에서 주의 몸 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무자비하게 멸절시킨 장본인인 자들을 민족의 태양이고 영웅이며 해방자라고 추앙해온 자들입니다. 지금은 누가 과연 이 나라의 통치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연이은 두 정권의 권력자들은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국민의 뜻을 살피기보다는 김정일의 눈치를 살피고 그에게 아양 떠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비아냥 아닌 심각한 우려가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습니다. 최근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인권운동가가 전한 지금 외국에 비친 한국의 초상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우발적인 사고로 숨진 두 여중생의 죽음에는 끊임없는 촛불시위를 벌이면서도 굶어 죽고 맞아 죽는 수백만 동포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려하는 이상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무인도인 작은 섬 독도 때문에는 어마어마한 분노를 쏟아내면서도 이천여 만 명의 동포가 사는 북녘 땅에서의 인권유린 때문에는 분노할 줄 모르고 오히려 부인과 모르는 체함으로 일관하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고 북한인권문제에 대하여 침묵과 부인과 국제회의에서의 의사표명기권뿐 아니라 북한의 참상과 인권유린 실태를 알리는 일은 온갖 권력을 동원해 기를 쓰며 방해하는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범죄적 태도를 견지하는 사악한 정권은 반드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요덕 스토리](The Yoduk Story)라는 것이 있습니다. 평양연극영화대학 영화연출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국립영화대학 영화연출학과를 유학했으며 탈북해서 다시 동국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한 정성산 감독이 제작하고 감독한 뮤지컬입니다. 정감독은 충신교회 교인이며 장편대하소설 [장백산]의 저자이고 영화 [쉬리], [공동경비구역JSA]의 시나리오 각색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뮤지컬 [요덕 스토리]는 북한 함경남도 요덕군 제15호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랑과 용서와 희망의 대서사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저 북한 땅에도 임하기를 간구하며 막을 내리는 감동의 선교뮤지컬입니다. 그런데 현 정권이 이 뮤지컬 공연을 방해합니다. 예약되었던 공연장소들이 예약을 취소하게 만들고 공연자금을 대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이 물러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그 요덕정치범수용소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김정일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것을 막으며 교회의 선교활동을 억압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현 정권이 하는 짓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는 3월 15일부터 4월 2일까지 양재동에 있는 서울교육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이 뮤지컬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서 관람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정권이 이것마저 막는다면 영락교회를 위시해서 전국의 모든 대형교회에서 공연하게 만들 것입니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공연할 수 있도록 초청을 받게 할 것입니다. 이 뮤지컬의 공연이 있는 곳마다 몰려가서 관람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반자유민주정권의 부당하고 비겁한 탄압과 김정일독재정권의 폭정에 맞서 싸우는 일입니다. 이들 정권은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정권을 잡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법도 다 바꾸고 사람도 다 바꾸고 감사원과 국세청과 각종 언론매체 등을 정권의 시녀화하여 비판세력을 옥죄는 데에 무차별동원하고 자유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교회까지도 압박하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 같이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들이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 무너져가던 김정일 정권을 지난 정권이 햇볕정책으로 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북한동포들의 극심한 고난을 지금까지 연장시켰고 더 많은 생명들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나 현 정권이 아무리 김정일 정권을 계속 세워주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엎드러진 다곤 신상을 다시 제 자리에 세워놓았지만 또 다시 엎드러져 목과 손목이 잘렸던 것처럼 그 정권은 결국 무너질 것이고 파괴되고 멸망할 것입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의 궤를 노획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우상 다곤을 엎드러지게 하시고 그 목과 손목을 자르신 것처럼 친김정일 정권 또한 이 땅의 교회를 에워싸고 억누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을 이길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추종하며 숭배하는 그 태양신 우상들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바로 그들의 신전 안에서 파괴되고 사라지고 말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다곤의 신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곧 오늘날 우리에게서 머지않아 일어날 역사적 사건의 예언과 약속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다곤우상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라 다곤을 숭배한 블레셋주민들에게도 닥쳐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내지 않은 채 그들의 도시 사이에서 전전하는 동안 그들이 당한 재앙은 갈수록 극심해졌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신앙과 선교와 교육의 완전한 자유를 하루 속히 되돌려주지 않는 한 이 정권은 크나큰 재앙을 자초할 것입니다. 진정한 민족공조가 아닌 김정은 정권과의 공조에 매달리는 정권은 그들과 함께 동반자멸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현 정권은 스스로에게 비극을 초래할 뿐 아니라 온 국민과 우리 민족 전체에게 화를 부르는 일을 도모하기를 당장 중지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파괴되고 말 다곤의 신상 곁에 끌어다 놓으려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언약궤와 같은 상징물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그의 뜻을 잘 받들어 민족의 살 길을 찾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언약궤 앞에 무릎 꿇은 블레셋
삼상 5장 1~12절 / 조영태목사(임마누엘교회)
비느하스의 아내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 곧 영광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동원하기까지 했던 전투에서 수만 명이 엎드러졌고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고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궤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우상과 같이 믿었던 무지로 인하여 잠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발하시기 위한 반전의 시간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는 길은 매우 가벼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전리품으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을 이겼다고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와서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 다곤 곁에 두었습니다.
다곤은 ‘곡식’을 의미하는 말과 ‘고기’를 의미하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생산의 번성을 위하여 만들어진 우상인데 그 상체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고 아랫부분은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우상은 사람들이 곡식의 풍작을 얻으려고 섬긴 것으로 두로와 시돈지역에서 섬겼던 ‘바알신의 아버지’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곤 옆에 두고 신성한 것으로 숭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을 바꾸려고 하진 않았지만 신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은 결코 손해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들의 신인 다곤을 더욱 영화롭게 하려고 하나님의 궤를 노략물로 그 곁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신정도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예배를 받아야 마땅한 분이며 만홀히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 22:27-28
아스돗 사람들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신전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일 입니까? 다곤이 엎드러져 있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겼지만 곧 다시 그 자리에 세워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아침 일찍이 신전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랄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곤 신상이 어제와 같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엎어져 있고 머리와 두 손목이 잘려서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통 일부와 아래 물고기 토막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1) 이스라엘의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시는 것 같았으나 그는 살아계신 분이며 그분의 영광을 다른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는 분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다곤의 목과 손목이 끊어진 것은 모든 우상은 볼 수도 말 할 수도 없고 어떤 능력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임을 드러내 준 것입니다. 실제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신을 자신 스스로가 세워서 다시 올렸습니다. 그리고 깨진 신을 이제 어찌 해야 할지 매우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약궤가 힘이 있어 다곤을 넘어뜨렸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경홀이 여김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십니다.
소년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담대하게 달려갔던 것도 하나님의 이름이 할례 없는 이방인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칼과 창과 단창 거대한 몸집으로 무장한 골리앗에 대항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년 다윗을 사용하여 하나님 자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군대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세워드리지 못하자 하나님 자신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아스돗에 독한 종기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6절
메르스 하나로 대한민국 사회가 흔들리고 있는데 그것보다도 더욱 큰 재앙인 독한 종기 곧 페스트 전염병과 같은 무시무시한 질병이 아스돗 사람들을 해친 것입니다.
다곤이 쓰러진 것은 경고였으며 블레셋 사람들이 그 경고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그 은혜를 구했더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그 큰 재앙 앞에서 여호와의 궤를 멀리 보내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을 모아 대책회의를 하고 나서 다곤 신전에서 멀리 있는 가드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가드는 힘센 사람이 사는 지역입니다. 골리앗이 가드사람입니다. 거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나 늙은이 할 것이 없이 그 성 사람들은 더욱 심한 종기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젊은이는 힘을 상징합니다. 늙은이는 경험을 상징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앞에서 힘도 안 되고 경험도 소용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만큼 약한 존재도 없습니다. 어떤 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산에서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망간다. 나무위로 올라간다. 죽은척 한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맹수를 만나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맹수 만날 일이 몇 번 없다고 본다면 만약 개미가 사람을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요? 작은 개미이지만 우리가 개미를 감당해 내기도 힘듭니다.
공중에 나는 새들이 사람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모기와 같이 작은 것이며 그로 인하여 큰 해를 받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작은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지금 메르스로 온 나라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입니다.
기억해보면 사스, 신종풀루, 조륙독감 등 치명적인 바이러스 등이 휩쓸고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이러스가 갑자기 생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수만 종의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피해를 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면 안전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몸의 면역력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면역력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바다의 경계를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붙들어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바다를 놓아두면 바다는 육지를 침범하게 되고 큰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붙드시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잠시 놓으시면 지진대가 부딪혀서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만약 비행기가 자기 궤도로 날지 않는다면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제를 붙들고 계십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도이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고 한국이기 때문에 안전하고 하는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는 곳이 안전한 곳 인줄 믿습니다.
지금 메르스 앞에 고통을 당하는 한국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할 때가 아니라 기도해야 할 때 인줄 믿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한국사회에 회개의 경종을 울리고 계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기자가 궤를 표현할 때는 ‘여호와의 궤’, ‘하나님의 궤’라고 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표현할 때는 7,8절 11절 등에서 ‘이스라엘 신의 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궤가 이스라엘의 신의 궤라는 뜻입니다. 우상의 헛됨, 독종과 징계 속에서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장소만 계속 옮겼습니다.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징계는 점점 더 강해집니다. 더욱 거세집니다. 결국에는 부르짖습니다. 10절에서 부르짖고 12절에서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외침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의 부르짖음이었으나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고통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함께 두십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렴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두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인애를 받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 번성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 7:12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15절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은혜를 적용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언약궤가 블레셋 지경에 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합이 그랬습니다. 라합이 여리고 성에 있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만 생각하고 있을 때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래서 정탐꾼이 여리고에 왔을 때 생명을 걸고 살려준 것입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도 어떤 부족한 사람도 하나님 앞으로 나오면 구원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심판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분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한 독종을 다스린 것인데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징계의 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은 심판의 손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손은 보호의 손, 생명의 손, 회복의 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임재와 보호를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의 사건 사고에 시선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멀리 두려고 했습니다. 떠나보내려고만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스스로를 하나님과 단절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그것이 바로 특별은총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인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3 이 말씀이 우리가 누리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 그가 탄 배가 파선을 해서 멜리데 섬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이었지만 하나님의 예언을 받고 모든 사람이 무사할 것이라고 하면서 안심을 시켜서 섬 안 쪽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불을 피우고 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독사에게 물리게 되고 그 곳 사람들은 이 사람이 배에서는 구원을 받았으나 이 곳에서 죽게 되는 구나 하면서 다 죽을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바울은 조금도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보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특별은총에 대해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자신을 분리시키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메르스 확진이 되면 격리됩니다.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혼자 따로 병동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 곳에 들어가는 간호사는 몸에 몇 겹이나 보호 장비를 하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메르스 환자가 사망시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는 것도 제제를 받고 참석하지 못하게 됩니다. 간단한 절차 이후에 화장을 하는 것이 지금 상황입니다.
여러분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시고 회개해야 할 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시기 바랍니다. 언약궤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온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흉내만 내지 마시고 온 인격으로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실로에서 가럇여아림까지
이영택목사(동해명성교회) / 삼상 5:1~4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들께 성령과 진리의 은혜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실로에서 기럇여아림까지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01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들어와 최초로 정착한 곳은 실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궤가 정착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의미하는 것이고, 최초의 하나님의 성전이 실로 라는 뜻이고 실로는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든 면에서 집중된 곳이 실로입니다.
02 실로 라는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곳은 창49:10절인데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라는 말씀입니다.
실로 라는 뜻은 (hl¿yvi Shiyloh )평정한, 메시야의 특징을 나타내는 총칭으로 어근은 (hl;v; shalah) 평온하다. 형통하다. 행복하다. 번창하다. 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느냐 하면 평화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신 메시야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실로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은 복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의지하는 성도는 무엇이든이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예수중심이 되어야 하고, 성령중심이 되어야 하고, 말씀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03 평화의 메시야를 가리키는 실로라는 뜻이 수 18:1절에는 지명으로 나오고 있는데 실로 라는 지명이 가진 어근이 창세기에서 언급한 실로의 뜻과 어근이 동일합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 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실로에 모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의 법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백성들은 실로에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중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법궤가 실로에서 에벤에셀로 이동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한 일인데
04 삼상 4: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에벤에셀은 이스라엘 군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이고 아벡은 불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이곳은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고 하였는데“에벤에셀”이라는 에벤은 짓다의 뜻이고 에셀은 둘러싸다, 즉 방어하다. 의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지명이 그렇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05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한 번도 폐한 적이 없지만 에벤에셀의 전쟁은 이스라엘완전 대패 당하는 전쟁이었고 가장 비참하고, 부끄러운 전쟁이었습니다.
1차 전쟁에서 패한 백성들은 실로로 전령을 보내 전쟁의 위급함을 알리고 엘리의 두 아들이면서 당시에 제사장이던 홉니와 비느하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에벤에셀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에벤에셀에 이르자 군사들의 사기충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법궤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2차 전쟁에서 또 다시 대파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군대에 넘어가고 하나님의 법궤 옆에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도 같이 죽음을 당합니다.
06 블레셋 군대는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들의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대환호를 합니다. 자신들에게 어떤 재앙이 닥쳐올지도 모르고 말합니다. 본문에 이럴게 말합니다.
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3)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하나님께서 블레셋 아스돗땅에서는 블레셋 우상인 다곤 신상만 치셨습니다.
처음에는 신상을 쓰러지게만 하였으나 이튼 날에는 다곤 신상을 완전 파괴시키셨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난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가라고 말합니다.
07 (삼상 5:8)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삼상 5:9)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가드라는 곳으로 옮겨가는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드에 재앙을 내리셨는데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이 일을 겪는 가드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는 에그론이라는 곳으로 옮겨가게 하였습니다.
08 (삼상 5: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삼상 5:11)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삼상 5: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궁리하고 의논한 끝에 하나님의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기로 하고 돌려 보내는데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돌려보내야 할지를 의논하였습니다.
09 (삼상 6:1~5)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3)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갑니다.
10 (삼상 6:7~12)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9)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까지 두 암소를 계속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확인하고 돌아갑니다. 무엇을 확인하고 돌아갔느냐 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이 법궤 가는 곳마다 재앙이 일어난 것이 우연히 아니고 하나님의 재앙을 것을 확인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11 (삼상 6:16~18)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12 하나님의 법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법궤를 가져온 두 소를 각을 뜨고 수례를 화목으로 삼아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구경하려고 몰려들다 엄청난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삼상 6:19~21)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 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고 말합니다.
13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법궤가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이십년동안 하나님의 법궤가 머무르게 됩니다.
(삼상 7:1~2)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기럇여아림”은 합성어인데 기럇 이란 뜻은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아림 이란 뜻은 숲, 삼림, 수풀이란 뜻입니다. 초목들로 이루딘 상태를 의미하므로서 아비나답의 집은 산골 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본문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아비나답의 모습을 가진 이 시대의 올바른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교회 소문을 듣고 교회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예수를 바로 믿고 잘 믿는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아는 척, 잘난 척, 잘 믿는 척, 성경 많이 아는 척하지 말고 예수 잘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생각대로 행동해도 안 되고 내 생각대로 말해도 안 되고 오직 말씀을 믿음으로 믿고 믿음으로 행동하고 믿음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며, 죄며, 불순종입니다.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고 하였습니다.
말씀대로 믿어 의에 이르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과 은혜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언약궤 교훈
이선영목사(덴버연합감리교회) / 삼삼 5:1-7
1. <견물생심>이라고, 좋은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요. 누구나 좋게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까지 있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눈이 멀어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와는 눈에 보이는 선악과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보이시지 않으십니다. 한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면, 아마도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큰 하나님상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두기보다는 신기한 하나님 형상을 찾아 다닐 것입니다.
언약궤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우상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십계명의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를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신 물건들이기에, 거룩하게 잘 보관하고자 하였습니다.
십계명의 말씀의 돌판이 그 안에 있기에 <언약궤-언약상자>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 하여, <하나님의 언약궤>라고 하였습니다.
2.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빼앗아 다곤 신전의 다곤 신상 곁에 두었습니다.
다곤 신상은 상체는 사람의 형상이고, 하체는 물고기 꼬리의 형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곤이란 물고기를 뜻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귀하게 여기고, 아무 곳이나 두지 않고 그들의 신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다곤의 신상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넘어져 있는 것입니다. 얼굴이 땅바닥에 자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세워놓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음날 보니, 또 넘어졌는데, 이번에는 머리가 끊어지고, 두 손목이 짤라지고, 몸뚱이만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어찌 지금까지 아무런 일이 없다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신전에 두었더니, 다곤 신상이 넘어져 부서진 것일까요? 언약궤에 손이 있어서 넘어뜨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3.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1) 왜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두었을까요? 남의 나라에서 빼앗아 온 전리품이지 않습니까? 아무렇게 창고에 보관해도 될터인데, 다곤 신상 곁에 두었을까요?
(2) 둘째로, 어떻게 다곤 신상이 넘어져 부서진 것일까요? 하나님의 언약궤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일까요?
(3) 셋째로, 언약궤에 신비한 힘이 있다면, 언약궤를 사령부로 가져온 이스라엘은 어찌 전쟁에서 패한 것일까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언약궤를 사령부의 본부로 가져왔으면 전쟁에서 이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전쟁에서 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긴 것일까요?
4. 언약궤에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 능력이 있는 것인가요?
이스라엘은 언약궤에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언약궤를 가져오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언약궤에 신비한 힘이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에게 빼앗겼습니다.
1차 전쟁에서 패하였으면, “하나님,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전쟁에서 패하게 하시나이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였나이까?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으면 이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틀린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언약궤를 믿느냐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신처럼 믿는 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5. 프로 야구선수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십자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십자가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시합을 할 때마다 십자가를 만지작거렸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서인지 시합마다 이겼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만졌습니다. 어떤 날은 지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십자가를 만졌습니다. 연습하는 시간보다 십자가를 만지는 횟수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점 지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럴수록 더 십자가에 집착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왜 십자가를 만지느냐고 물었습니다. 시합에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충고해주었습니다. “자네가 십자가만 만지고 연습에 게으르기 때문에 시합에 지는 것을 모르는가?”
십자가는 시합을 이기게 하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요술방망이로 생각하는 것은 우상인 것입니다.
교회에 십자가가 있는 것은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생각하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떤 신비한 힘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6. 블레셋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능력이 언약궤에서 나온다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서 오직 언약궤를 빼앗고자 하였습니다.
언약궤를 빼앗았기에 전쟁에서 이겼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언약궤를 신비하게 생각하여 그들의 신전에 두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로 잘못된 신앙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언약궤를 빼앗았기에 전쟁에서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언약궤가 다곤 신전에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처럼, 다곤 신상이 넘어져 부서진 것입니다.
다곤 신상이 넘어졌으면 “쿵”하는 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밖에서 지키는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소리도 없이 다곤 신상이 넘어져 부서진 것입니다.
소리 없이 넘어지고 깨어졌습니다. 이것은 보이지 아니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7. 다곤 신전이 있는 아스돗 지역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5:7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하고”
“하나님의 손이 우리와 우리의 신 다곤을 친다”고 말하였습니다. 아주 정확한 표현입니다. 언약궤를 우상의 집에 두었더니 하나님이 싫어하여 다곤신상을 깨어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그렇게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드 지역으로 옮깁니다. 이제 가드지역에 도착하니, 가드지역에 애 어른 할 것 없이 독한 종기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에그론으로 옮깁니다. 그러니 에그론 사람들이 “이번에는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고 하였습니다.
5:10절,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8. 이제 우리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알게 됩니다.
참 신앙은 언약궤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언약궤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으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통하여 2가지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 제1계명으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제2계명은, “어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우상을 절대적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곤 신상을 넘어져 깨어지게 하심으로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물건에 불과함을 나타내보이셨습니다.
다곤 신상이 넘어져 깨어진 것은 언약궤에서 신비한 힘이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상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기신 것입니다.
9.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몸에 담고 사신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속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속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로 참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으로 참되게 살게 하는 것은 자신 속에 참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살아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참되신 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참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2)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에 눈 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되게 살지 않으면 자칫하면 우상에 빠져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언약궤를 믿지 말고, 언약궤를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0. 두번째 깨달음은 거룩한 것은 거룩한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언약궤의 뚜껑은 속죄소입니다. 성전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마다 용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가 속죄의 역할을 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는 것, 성공하게 하는 것, 권세를 누리게 하는 것으로 이용되는 것은 잘못된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궤가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게 되니,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아나돗에서는 다곤 신상이 깨어졌습니다. 가드에서는 독종이 발생하였습니다. 에그론에서는 자기 지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거룩한 것은 거룩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거룩함이 지켜져야 합니다. 거룩함을 상실하게 되면, 모두가 아픔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만한 것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거룩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롬1: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웠나니”
롬1:23,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지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거룩함이 지켜지지 않음으로 사람 사는 세상이 점점 더 타락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1. 심판보다 무서운 것은 거룩함을 상실하고 한 번의 내 인생을 참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우리 인생을 귀하게 살게 합니다.
거룩함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이 인생의 추함과 더러움을 이기는 하늘의 능력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인생을 타락하고 부패하게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욕심과 탐욕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식으로도 안되고, 제도로도 안되고, 심지어 감옥이 있어도 안됩니다.
어떤 분이 노름을 끊고자 하여 손가락을 잘랐습니다. 그렇다고 노름을 안하게 되는가요? 그의 영혼 속에 있는 노름의 유혹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 속에 있는 죄악의 근성을 어찌 없앨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거룩함만이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능력이 아니고는 인생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생명이고 속성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2. 기독교 작가이자 상담 심리학자인 레리 크렙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강연을 초청 받아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 학교의 친구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연 중에 자네를 찾는 급한 전화가 왔었네. 학교에서 강연한다는 것을 알고, 학교로 전화가 왔었네. 자네 아들이 학교에서 사고를 친 모양이더군. 퇴학을 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부모에게 알린다고 하더군.”
친구의 말에 레리 크랩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강연을 다니면서 좋은 이야기를 하지만, 막상 자기 자식 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에 들어가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정말 최선을 다 했음에도 아들을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 제가 가르치고 꾸짖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이제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 좋은 방법을 알려달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아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제 아들을 만나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아들을 만나달라고 기도하고 나자, 그의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집에서 아들을 만났을 때 신기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아들을 만날 때,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의심이 있었는데, 그날은 평안하게 아들을 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는데 아들의 얼굴도 달라보였습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기색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들이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지금껏 잘못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신 것 같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사고 치던 날 저녁, 평안함으로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마음도 평안해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아버지가 믿는 예수님을 밀어내려고만 했는데, 그날 저녁에는 그 예수님이 좋아지더랍니다. 그래서 그대로 인정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13. 거룩함으로 대하였더니 거룩함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속이 상하고 힘들 때, 기도하였더니, 막말이 나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거룩함이 거룩함을 낳습니다. 거룩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것에 속지 마시고, 우리의 속사람으로 참되게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약궤를 믿지 마시고, 언약궤를 만들게 하신 하나님을 사모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참 신과 거짓 신
이강웅목사 / 삼상 5:1-12
서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그들에게 행복과 안녕이 약속 된 땅입니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이 저주와 심판을 불러 오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잊고서 우상을 섬기게 될 때 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서에서 모세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잊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합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 현대인들도 이런 시험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의 행복, 자녀들의 장래, 돈과 재물, 성공과 출세, 건강과 장수, 이것들은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들이고, 이를 위해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들 자체가 나쁜 것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사람들은 간과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상’ 하면 대개 나쁜 것들을 먼저 연상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이 그런 것처럼 그 자체가 나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일 수록 그것이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을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감 또한 커집니다. 그래서 좋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최고의 것을 갈망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무리하다가 결국 우상숭배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일 수록 더욱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록 그들의 욕망은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바알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농사에 꼭 필요한 비바람을 바알이 몰고 온다는 가나안 풍습을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제사는 드렸습니다. 동시에 바알에게도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큰 부와 풍요를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행복과 안녕이 보장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져 갔고, 결국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비록 고대인들처럼 형상화된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는 않을지 몰라도, 마음 속에 갖가지 우상들로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우상이란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내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내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 특히 행복과 안녕과 부와 만족과 기쁨을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서 얻으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현재 그것이 워낙 내 자신의 삶의 중심이자 필수적인 것이어서, 그것 없이는 살아갈 의미와 가치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고 가짜 신입니다.
가령 내가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바라보면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그게 곧 우상입니다.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아주 의미 있게 될 거야. 저것만 되면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저것만 이루면 내가 행복해지고, 안정을 얻게 될 거야.’ 이런 식의 관계 속에 있는 상태를 가리켜 ‘우상숭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상숭배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시는 방법은 주변에 있는 이방국가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들에게 침략과 압제를 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지를 직접 맛보게 하십니다. 그러면 고통에 못이겨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사가 다스리는 몇십년 동안에는 이스라엘에게 샬롬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다시 서서히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고,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그러면 주변 이방사람들이 다시 쳐들어와 곡식을 약탈하고, 그들을 학대하며 압제합니다. 이런 악순환이 350년 동안 반복되는 시대가 사사시대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징계 받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던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삼만사천여명이 죽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두 제사장이 죽었고, 하나님의 언약궤 마저 빼앗겼습니다. 일순간에 엘리 제사장 가문이 절단 났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하나님 백성 편이 아닙니다. 그들이 언약을 어기고, 우상을 섬길 때 다시 돌아오도록 징계의 채찍을 드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채찍은 아주 매섭습니다.
그렇다고 블레셋이 예뻐서 그들이 승리하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서 잠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이방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블레셋의 신 다곤 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증해 주십니다.
1. 인간의 도전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의 스토리와 아주 흡사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바로가 보기에 그들은 한낱 천한 노예 백성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들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애굽에서 압제를 당하며 고통 당하는 것을 보실 때에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이제 내 백성을 내 보내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바로는 완강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가 누군데 감히 애굽의 바로인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거야?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노라” 바로는 세계 최강의 왕임을 자랑하던 자입니다.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습니다. 즉 반신반인으로 추앙 받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교만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노예인 히브리인들의 신 여호와는 가소롭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런 바로에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 내리라”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하나님의 손은 강한 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바로가 강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손입니다. 천지를 조성하신 손입니다. 바로를 비롯해서 모든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신 손입니다. 시편 89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13절)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11)”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6)” 하나님의 강한 손이 펼쳐지기 시작하면 누구도 감히 살아 남을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하며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본격적으로 바로에게 보여 주십니다.
첫 번째 재앙으로 나일강을 쳐서 피로 변하게 하셨습니다. 둘째 재앙은 개구리 재앙입니다. 세 번째 재앙은 이 재앙입니다. 네 번째로 파리 재앙입니다. 다섯 번째로 돌림병 재앙입니다. 여섯째로 악성종기 재앙입니다. 일곱번째로 우박 재앙입니다. 여덟째로 메뚜기 재앙입니다. 아홉째로 흑암 재앙입니다. 열 번째로 장자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장자 재앙을 통해서 바로의 숨통을 조이셨습니다. 지금까지 버티던 바로도 장자 재앙 앞에서는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자기 집을 비롯해서 온 애굽이 초상집으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쫓다시피 하면서 한 밤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냈습니다.
바로는 세상에 모든 것을 가진 위대한 자였지만 “여호와가 누군대?”하면서 하나님 앞에 교만하였을 때에 결국 티끌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신과 같이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탁월해서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잘 나서 큰 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들어 쓰셔서 위대한 역사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2. 우상의 정체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이렇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서도 언약궤를 빼앗아간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용과 엄위로우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들에게 큰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블레셋을 들어서 채찍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이런 상황을 오판했습니다. 자신들의 신 다곤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 보다 우월하기에 전쟁에 이겼다고 생각하며 의기양양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인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곤신의 발아래 두고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다곤의 곁에 둔 것이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다음날 그들이 다곤 신전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 굴복하여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혹시라도 바람이 불어서 이런 불길한 일이 일어났는가 싶어서 그 자리에 다시 세워 두웠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보니 아예 다곤신상의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서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아리만 신전 마룻바닥에서 나뒹글고 있었습니다.(4절) 출애굽할 때 애굽의 신들을 치셨을 때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다시 임했습니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다곤이 승리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언약궤 앞에 엎드려져 얼굴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아예 살해 당한 것처럼 머리와 두 손이 끊어지고, 몸 둥아리는 나뒹글고 있습니다. 손과 머리가 잘려서 이제 어떤 힘도 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각인시켰습니다.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를 명명백백하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다시 일으켜 세워주어야 하고, 자신을 스스로 방어 조차 하지 못하는 이 우상이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시편 115:4-8을 보면 우상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것인지를 아주 실감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이런 우상을 ‘신’이라고 부르며 그 앞에 절을 하고, 복을 빕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구해도 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우상과 함께 파멸로 가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3. 하나님의 지존하심
재앙이 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언약궤를 옮겨간 아스돗을 치시자 독종 재앙이 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과거에 여호와의 강한 손이 애굽인들을 재앙으로 쳤듯이 이번에는 아스돗과 그 지경에 사는 불레셋인들에게 독종을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여호와 신의 능력과 다곤의 무능함을 블레셋인들을 절저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7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그들은 여호와의 능력과 주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엄중한 것을 보고서, 승리의 전리품으로 취급했던 언약궤가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언약궤를 남쪽 가드로 옮겨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언약궤를 가드로 옮겨 간 후에 큰 재앙이 그곳에 엄습했습니다. 9절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더하사 성읍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하신지라”
여기서 ‘환란’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메후마’는 하나님께서 만들어내는 ‘혼란, 공포’를 가리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사람들이 공포심에 사로잡히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예외없이 독종이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가드 사람들은 신속히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에그론 사람들이 죽겠다고 부르짖습니다. 10절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가로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결국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다시 돌려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11-12절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종으로 치심을 받아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엄청난 재앙을 겪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찾지 않습니까?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저들의 신 다곤에게 전혀 호소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곤이 여호와 언약궤 앞에서 무능하기 그지 없다는 사실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강한 권능을 행사하시니 그들은 대항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길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블레셋 가운데 재앙을 베푸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이스라엘만의 민족신이 아니라, 온 세상 만민의 하나님이요, 만유의 주가 되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뭐 좀 잘났다 싶으면 자신들의 이름과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기 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처럼 자기들의 신인 다곤을 자랑하기 원합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바벨탑을 쌓아서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기 원합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왕처럼 금신상을 만들어서 자신의 영광을 자랑하기 원합니다. 오늘날에는 세계 최고층 빌딩을 지어서 자신들의 경제력을 과시하고자 합니다. 높은 기술력과 과학, 문화 문명을 자랑합니다.
각종 인본주의 사상과 물질주의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견주어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인간들의 교만한 시도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사상이나 이론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교만을 철저하게 파하시고, 당신 자신의 유일하심과 지존하심을 나타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야 말로 우리 인생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고, 순종해야만 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오, 천지와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 하나님은 그 어떤 우상이나 지식이나 기술과도 비교될 수 없는 참 하나님이시오, 전능자가 되십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오직 유일하시고 참된 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각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하시고 존귀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신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짜 신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우상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과 안녕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를 파멸로 끌고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화려함과 잠시 잘나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진리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이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만을 전심으로 구하고, 진심으로 섬기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고
양인국목사 / 삼상 5:1-12.
1. 사무엘상5장은 특별한 장이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결국은 패자가 된 경우를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모든 시대 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모습에서는 인생의 승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패자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째서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자로서 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하여 본문이 주고 있는 대답에 귀를 기울일 때 이와 같은 불행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고 또한 승리를 위하여 실로로부터 모셔왔던 법궤까지 빼앗겼다. 물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한 직접적인 원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했을 때 얻은 것은 승리가 아니었고 패배뿐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패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쟁에서 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의 상징이 되고 있는 법궤까지 빼앗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패배를 통하여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신 말씀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날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패배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전쟁사를 살펴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언제나 패했다. 이것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반면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지만 승리를 얻었다(삼상4:7,8).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승리의 원천으로 믿고 있던 법궤까지 빼앗았다. 그러므로 블레셋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얻은 승리는 완전한 승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완전한 승리라고 믿었던 이 승리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패배에 이르게 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어째서 그들이 완전한 승리로 믿었던 그 승리가 그들을 패배자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얻은 승리로 인하여 축제를 열었다. 물론 그 축제는 그들의 신앙으로 표현 되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얻은 최대의 전리품인 법궤를 그들이 숭배하고 있는 다곤에게 감사의 제물로 바쳤는데. 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표현이었고, 그 신앙의 내용은 그들이 얻은 승리는 다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축제는 시작부터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5:2-4)” 여기 아스돗은 블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다곤의 신전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다곤의 위세(威勢)가 가장 큰 곳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곳에서 오히려 다곤으로 하여금 언약궤 앞에 엎드려지게 하심으로 다곤을 숭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모습을 직접 보도록 하셨다. 물론 이렇게 하신 것은 다곤을 숭배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계시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 사건을 우연으로 돌리고 엎드려진 다곤을 다시 세워놓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주시기 위하여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세워 놓은 날 밤에 또 다시 다곤의 목과 팔다리를 부러뜨리심으로 이와 같은 일들이 우연이 아니고 능하신 하나님께서 다곤을 굴복시키신 것임을 알려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 만일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듣고 다곤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을 경외했더라면 그들 가운데 일어났던 이와 같은 일들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통하여 직접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이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5:6,7)” 여기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라는 말은 그들이 직접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격하여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들이 본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자신들이 의지하고 있는 다곤을 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와 같은 결론 역시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고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 하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재난만 피하려고 하였고 하나님을 경외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확실한 증거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궤를 가드로 보내기로 했다. 이처럼 그들이 여호와의 궤를 가드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언약궤로 인하여 아스돗에 일어난 일들이 우연인지 아닌지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거나, 아니면 그들은 자신들이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예물로 바쳤기 때문에 재앙이 임했다고 생각하고, 이런 일에 참여하지 않은 가드로 보내면 재앙이 멈출 것으로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빗나갔다. 언약궤를 가드로 옮긴 후 그곳에 큰 재앙이 임하여 언약궤를 더 이상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궤를 에글론에 보냈다. 이때 그들의 행동은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재난을 피하고자 한 것이지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궤가 에글론에 이르렀을 때 에글론 사람들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고 부르짖으며 궤를 에글론에 가져오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에글론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굴복한 것이다. 여기 아스돗과 가드와 에그론은 블레셋의 중요 도시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궤 앞에 굴복했다는 것은 블레셋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굴복했다는 의미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5:11-12)” 에글론 사람들은 블레셋의 모든 방백을 소집하고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논했다. 그 결과 그들이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그 궤를 본처(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즉 그들이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법궤는 그들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였지만 스스로 그 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 것은 그들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한 승리를 얻었지만 그 승리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패배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법궤를 빼앗은 일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우리는 전반부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패배의 원인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함으로부터 온 것임을 들었고 후반부에서 블레셋의 승리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넘어지게 했다는 말씀을 들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패배를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승리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을 넘어지게 한 것이 언제나 이와 같은 이유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통하여 블리셋이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승리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일은 블레셋에게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실패한 대부분의 왕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넘어졌다. 어쩌면 이와 같은 것으로부터 자유했던 왕들은 다윗과 여호사밧,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 정도였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여호사밧과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부(富)가 극에 달했을 때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고 교만에 빠졌을 때 넘어졌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을 재확인하게 하고, 삶의 여정에서 패했을 때는 하나님을 멀리했던 것으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승리했을 때는 그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권고하고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언제나 가져야 할 바른 태도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의 여정에서 승리를 얻을 때마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셨다”라고 고백하여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고, 이로 인하여 언제나 감사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바울은 언제나 “나의 나된 것은 은혜로 된 것이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해 주시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잊지 않게 해 주옵소서. 이로 인하여 삶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때마다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우리의 것으로 삼음으로 넘어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아멘
헛된 우상과 하나님의 손
삼상 5장 1~12절 / 이용효목사
맹인 목사님 중 이ㅇㅇ목사님이 계십니다.
6.25동란 때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병으로 몸져 누웠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종일 구두를 닦아 겨우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십일조를 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화를 내며 어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나요 아버지 죽었지요 어머니 병들었지요 내 눈 실명되었어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애야 아버지 잃어버리고 내 건강 잃어버리고 너 눈 시력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믿음을 잃어버리면 영원한 것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야"라고 했답니다. 그 목사님은 어머니의 그 말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언약궤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영광도 잃어버렸습니다.
성도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우리들은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블레셋은 그들이 전쟁에서 빼앗은 언약궤를 [아스돗]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아스돗]은 블레셋 5대 도시 중 하나로 블레셋의 우상 [다곤]을 섬기는 중심지였습니다.
다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앗수르, 베니게 등에서 널리 숭배되어 온 우상으로 가나안 사람들이 주로 섬긴 농업 신 [바알]의 아버지로 알려진 신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다곤]을 자기 민족의 주신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아스돗]에는 엄청난 규모의 [다곤]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자신들의 신 다곤에게 바치려고 신전 안 다곤 신상 곁에 안치하여 두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그들의 신상이 땅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엄중한 신전 안에 분명히 문이 닫혀 있었고 아무도 들어 온 사람이 없는데 신상이 엎드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시 그 자리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신전에 들어가 보니 이번에는 [다곤]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아스돗]에 들어 온 뒤 [아스돗]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의 재앙이 임하여 그 지역전체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의 지도자들이 모여 이 사태를 의논한 뒤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드]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드] 라는 도시 전체에 하나님의 엄중한 손이 더하자 질병의 고통이 온 성에 임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이 언약궤를 [에그론]이란 도시로 보냅니다. 그러자 이번에 [에그론] 사람들에게 사망과 독한 질병이 임하여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여기서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우상은 헛된 것이요 결코 숭배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곤이 엎드러져 있었다는 히브리어 [나팔]은 ‘항복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너희들이 섬기는 민족신 다곤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넘어져 일어나지도 못하는 우상이 무슨 복을 주며 어떻게 그들을 지켜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은 깨닫지 못합니다.
4절에 보면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다곤의 목과 손목이 다 끊어져 해체 되었습니다. 비록 우상이었지만 보기에 끔찍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신상의 머리가 끊어졌다는 것은 다곤은 생명이 없는 헛된 우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고, 손목이 끊어졌다는 것은 다곤이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무능한 우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온갖 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합니다.
이집트에서는 태양신을 섬겼고 송아지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인도에서는 온갖 짐승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고, 동남아 일대에서는 주로 뱀을 신으로 섬기면서 집집마다 뱀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 때 자기 나름대로 상상해서 만들어 세웁니다. 힌두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은 많은 사람을 도와야 하니까 손이 많겠지 하고 한 몸에 수많은 손을 붙여놓기도 하고, 신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겠지 하면서 불이 타는 듯한 눈을 그려 넣습니다.
성경은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 보다 못한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무지한 인간들은 온갖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바위나,나무,태양이나 , 온갖 짐승들 그리고 상상속의 수많은 신들을 주물로 제작하고 조각하여 세워놓고 복을 달라고 빌고 또 비는 것입니다.
일본 같은 나라는 사람도 신으로 숭배합니다. 자기들의 왕을 천황이라고 하여 신으로 섬깁니다. 일본의 어느 마을에는 욘사마도 신으로 섬긴다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3만개나 만들어 세워 놓고 신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이사야44장에 보면 나무를 가지고 땔감으로 사용하여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하다가 그 나무로 신상을 만들어 세워놓고 그 앞에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너는 나의 신이라 하여 나를 구원하라고 하니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이라고 하는 것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허상에 불과 합니다(시 135:15-17; 고전 8:4). 그런데 안타까운 현실은 많은 사람이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신문에서는 대한민국이 “미신 공화국”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목사, 전도사를 합치면 약 10만 명인데, 역술인과 무속인은 그 4.5배인 약 45만 명에 달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점치는 것을 단순히 재미로 여기고, 신문광고와 인터넷 광고를 보면 운세와 점술광고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도 싫어하십니다. 출애굽기23: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
짐승의 띠를 말하거나,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빈다는 말을 하거나, 조상의 신위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행위는 모두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출애굽기20:4~6절에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하나님이 질투하는 분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속이 좁고 옹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하여 질투를 느끼실 필요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모자라서 우리 같은 피조물의 사랑을 받으려고 질투까지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와 당신의 관계가 특별한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질투가 무엇입니까? 질투는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일어납니다. 내 남편을 사랑한다면 남편 곁에 어떤 여자가 어른거리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내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 주변에 다른 남자가 어른거리면 질투가 일어납니다.
부부사이에 무엇이 끼어들면 질투와 분노가 생기고 살인까지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죄와 저주로 말미암아 형편없이 망가진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셔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보배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흘린 아들의 그 피로 나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고 나를 멸망에서 건져주셨고, 너는 내 것이라고 성령으로 인을 쳐 당신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롬5:8)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훨씬 진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서 어떤 우상숭배의 행위도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하나님을 사랑을 많이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아론에게 신상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론이 백성들이 가져온 금으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이것이 애굽에서 너희들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자 그들이 음란하게 그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우상은 물질입니다. 배금사상은 우상입니다. 주님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6:24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재물을 맘몬이라고 하셨는데 돈을 사랑하는 것이 곧 돈을 신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돈이면 다 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돈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인색한 사람도 돈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또 현대인들은 쾌락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성경은 정당하고 건강한 즐거움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가족이 함께 하는 즐거움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쾌락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었을 때 이런 쾌락은 이미 우상입니다. 빌3:19에서 바울은 먹는 쾌락에 빠진 사람들을 가리켜 “배로 신을 삼은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유형의 중독은 쾌락의 신에게 복종하는 행입니다. 술이나 도박, 마약, 인터넷 개임, 음란한 행위에 빠져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것 자체가 곧 그들의 우상입니다.
또 현대인들에게는 인기와 명예가 그들의 우상입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합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연예인이 그들의 우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도 자기 이름을 내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흩어 버리셨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절대로 우상숭배하지 맙시다.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 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하나님만을 섬깁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은혜요, 최고의 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질병과 고통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여호와의 손이 그 지역을 쳤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여호와의 손으로 표현 된 것은 성령의 나타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스돗] 온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 땅에 주민들이 무서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다.
망할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그 길을 가서는 안 될 줄 알면서도 간다는 것입니다.
7절에는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일을 하나님이 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다른 여러 민족의 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고 인간의 방법을 여전히 강구합니다. 그래서 다시 가드로 궤를 옮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9절에 보면 [가드]로 옮겨간 후 가드에도 무서운 재앙이 임하여 성읍 모든 사람들이 이 병에 걸려 죽거나 고통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언약궤를 [에그론]이란 지역으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11절에 보면 그 성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였다고 하였고 12절에는 성읍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미워하여 멸망시키려고 이렇게 독한 질병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여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니느웨는 블레셋 같이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이었고, 오히려 블레셋 보다 더 악독한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어 요나를 보내어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겔18:23,32. 33:11)
사르밧의 과부는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 사람 즉 이방여인이었지만 엘리야의 말을 믿고 순종하므로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주 예수님은 이스라엘에도 가뭄이 있었고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한 과부도 이런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였고 오직 이방여인인 이 사르밧 과부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람나라 사람이었지만 그가 나병에 걸려 죽어갈 때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로 와서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믿고 순종하여 나병에서 놓여나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깨끗함을 받지 못하였고 오직 이방인인 나아만 한 사람만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민족이나 인종을 차별하시는 하나님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우상 다곤을 심판하신 사건이나 블레셋 여러 도시에 언약궤가 옮겨갈 때 마다 재앙을 내리신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천지간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심이었습니다.
당신 가정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납니까? 실직이나 질병이나 가족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나요? 하나님이 부르시는 신호로 아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돌아오시기만 하면 그 넓은 품에 안아주시고 새 힘주실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
삼상 5:1-5 /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란 제목으로 말씀전하겠습니다.
본문1절을 보면 ‘블레셋’이란 나라가 나오는데, 블레셋이 어떤 나라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가나안 서남부 지중해해변에 자리 잡은 나라입니다. 틈만 나면 동진해서 땅을 확장하려 했던 민족입니다.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런 민족이었던 거죠. 특별히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사사로 있을 때부터 다윗이 블레셋을 완전히 복속시킬 때까지, 블레셋은 무려 100년 이상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습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그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하기 위해 전열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죠? 이스라엘이 패합니다.
사천 명 가량의 군사가 전사할 정도로 크게 패합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이스라엘 진영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어 패배했다”고 말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실로로부터 언약궤를 가져와, 이스라엘 진영에 두고, 두 번째 전쟁을 벌입니다. 첫 번째 전쟁보다 더 크게 패합니다.
대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비롯해 이스라엘 군사 삼만 명이 전사하고요.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빼앗깁니다.
그 비보를 들은 아버지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사사 시대의 말기의 대제사장이 사망을 한 것입니다.
평소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품을 것입니다.
“혹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대신 블레셋을 택하신 것은 아닌가?”란 의문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사무엘상 5-6장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해답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2절을 보면 두 번의 전쟁에서 대승한 블레셋 군사들이 당당하게 귀환합니다.
전리품들도 많지 않았겠습니까? 그 중에 가장 훌륭한 전리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들이 빼앗은 겁니다.
그들은 빼앗은 언약궤를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 다곤의 신전에 들여 다곤 곁에 두었습니다.
당시 블레셋이란 나라는 아스돗, 가드, 에그론, 가사, 아스글론 등, 다섯 방백으로 이뤄진 연방 국가였습니다. 그 도시들 중에 아스돗으로 간 것입니다.
블레셋 군대는 왜 아스돗이란 지방으로 갔을까요?
블레셋의 주신 다곤을 숭배하는 신전들 중에 가장 큰 신전이 아스돗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둔 것도 고대근동지방의 전쟁 관습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패배한 자의 신을 취하여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의 신전에 안치시켰거든요. ‘패배한 자의 신이 승리한 자의 신의 지휘 아래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가짜 신을 믿는 자들이 진짜 신을 믿는 사람들을 이겼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사무엘상 4:5-8을 보면 사실, 블레셋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영으로 들어올 때,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외침으로써 땅이 울렸거든요.
그 소리를 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의 진영에 들어온 줄을 알고, 크게 두려워했던 겁니다. 두려워 떠는 그들의 외침을 들어볼까요?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근데 여러분! 두려워 떨던 블레셋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는 이겼잖아요?
그래서 ‘자기들의 신, 다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 하나님을 이겼다’는 표시로 다곤의 신전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여놓은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차지하다니요?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럽고, 뿌듯했겠습니까?
반면, 그런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이 맨 먼저 무엇을 해야 하죠?
하나님 앞에 범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어서 회개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패해 심한 자괴감에 빠져있을 것이므로 더욱 자기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로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의존하여 다음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모의했습니다. 그들의 모의가 굉장히 어리석죠?
그들은 소위 shamanism적인, 주술적인 발상을 모의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패배할 수밖에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그와 유사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게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너도나도 십자가를 세우죠.
그러나 십자가가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님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 받죠? 십자가에 달려 몸 찢고,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 받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강조해선 안 되고, 예수님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당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십자가를 세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행복을 가져다주거나, 믿음생활을 증진시켜 줄 것이란 생각에 부적처럼 몸에 붙이고 다니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도 주술적인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20:4 말씀처럼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고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가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크게 낙심합니다.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대패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의 패배!
그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깊은 실의와 좌절에 빠지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큰 반전이 일어납니다.
본문3-4절 보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둔 다곤 신전에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보니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 다곤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얼른 다시 일으켰겠죠?
여러분! 다곤은 반인반어로 된 모양이거든요.
그런 모양의 다곤을 아스돗 사람들이 다시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정하기 싫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전쟁에서 이기게 한 신, 다곤이 전쟁에서 지게 한 신, 하나님 앞에 엎어져 있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다곤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튿날 아침에도 또 다시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다곤이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다곤이 하나님의 언약궤에 납작 엎드려, 절을 하는 모양새입니다.
다곤을 절대적인 신으로 숭배해 온 아스돗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절대적으로 믿었던 신, 다곤의 머리와 손목마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요.
다곤의 몸뚱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겁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 다곤의 몰골을 본 것입니다.
더욱이 다곤의 머리와 손목마저 끊어져 문지방에 있던 장면이 그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당시에 행해졌던 형벌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숭배하던 다곤이 끔찍한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신체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머리이죠.
또한, 사람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은 두 손목입니다.
근데,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잘린 것입니다. 그것은 “다곤이란 신에게는 어떤 사고나 인식도 없고, 아무 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우상단지에 불과해서 형벌을 받았다”란 뜻입니다. 그 사실이 그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설교모두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사람들은 신들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이 이긴 것입니다.
분명히 이겼음에도 어찌하여 승리의 신, 다곤이 패배의 신,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비참한 모습이 되어 있는가? 하는 겁니다.
애당초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숭배하는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 다곤의 포로로 굴복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이 다곤을 굴복시켜 경배를 받고 있었으니, 그 광경을 본 아스돗 사람들은 아마도 큰 충격에 빠져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다곤은 몸뚱이만 남았다”고 본문4b절은 증거 합니다.
이 증거는 ‘다곤’이란 신과 ‘하나님’이란 신이 어떤 존재인지 잘 비교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다곤이 몸뚱이만 남았다’고 하는 증거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몸뚱이만 남은 다곤의 모습은 상자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곤의 몸뚱이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언약궤와 비교가 되겠죠?
그렇습니다. 다곤의 몽뚱이와 하나님의 언약궤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극과극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다곤은 아무런 생명력도 없고,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상자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닥칠 재앙에서도 블레셋 사람들을 구할 수 없는, 무력한 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곤은 신으로서 갖춰야 할 어떤 요소도 갖지 못한 가짜 신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언약궤는 다곤의 몸뚱이처럼 상자처럼 보이기는 하나, 거기엔 생명과 권능의 신, 유일하고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면, ‘다곤 신상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새삼스레 자기들이 믿고, 섬겨왔던 하나님에 대해 새삼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다곤 신상이 그렇게 된 것이 우연하게 넘어져 파손된 게 아니란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곤이란 우상단지를 무참하게 훼파하시어, 신당의 문 입구까지 나뒹굴게 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우상은 아무런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헛됨과 무능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빠른 속도로 회복될 거고요. 그런 회복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났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3m절을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단어들이 나옵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에서 ‘엎드러져 닿다’와 사무엘상 4:18a의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에서 ‘넘어지다’와는 뜻이 같습니다.
게다가, 성경의 인물 중에 다곤 신상처럼 엎드리진 인물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7:49에서 다윗이 던진 물매 돌을 이마에 맞은 블레셋의 대 장수 골리앗입니다. 그가 자기 아마에 돌이 박힌 채로 땅에 엎드러지지 않습니까?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상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들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즉, ‘저와 여러분이 왜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 사건으로 인해 본문5절의 증거처럼, 다곤의 제사장들은 물론, 다곤의 신전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까지도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 보면 다곤의 신전이 있는 곳은 ‘가사’와 ‘벧산’과 ‘아스돗’입니다.
그 중에 가장 중심지가 바로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이었고요.
본문말씀이 기록될 당시까지도 문지방을 밟지 않는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요즘 짓는 집이야 문지방을 만듭니까? 아예 문지방이 없죠.
그러나 이전의 집들은 다 문지방 곧, 문턱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로부터 ‘문지방을 밟으면 복이 나간다’며, 문지방을 못 밟게 했습니다.
문지방을 밟고 있으면 ‘빨리 내려오라’고 야단이었어요.
지나가다가 밟아도 꾸중을 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었습니다. 모두가 미신입니다.
고대사회사람들은 문지방 밟는 것을 신의 머리나 문지방에 있는 영혼을 밟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밟기라도 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저주를 피하기 위해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의 신전문지방을 밟지 않고, 뛰어넘었던 겁니다. 하물며,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이 국신으로 숭배했던 다곤을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문지방에 나뒹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뛰어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리를 신성시했을 정도로 다곤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그런 모습은 고스란히 후대사람들에게 전해지고, 하나의 관습이 됩니다.
자기들이 숭배한 신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목도하고서도 되레, 신성시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아이러니한 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번에 걸쳐 전쟁이 벌어졌던 아벡에서는 분명히 블레셋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 다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 하나님을 훨씬 능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두 번 다 대패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응징하시게 됩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자비 없이 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신 걸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크게 패하게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만 의존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하며, 하나님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 마음에 쏙 들어서 블레셋을 이기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노골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 아닙니까?
그런 그들을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서 가만둘 리 없습니다.
다곤을 심판하신 것에 그치지 않고, 다곤을 숭배하던 블레셋 사람들까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옮겨지는 지방마다 하나님께서 재앙으로 그들을 치시지 않습니까?
즉,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 가는 곳마다 하나님은 사망과 독종이란 재앙으로 그 곳의 사람들을 사정없이 치신 것입니다.
참소망교회를 섬기는 여러분!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 우리들에게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만 의존하지 않으면 블레셋과 같은 원수들의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는 점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 블레셋과 같은 대적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시간 버려야 합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 말고도 의존하는 대상은 무엇인지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블레셋과 같은 대적원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블레셋 같은 원수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만 의존하는 것이 낡은 종교적 관습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배제해 버리고, 대적마귀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월이 말세지 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요즘은 더욱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주일이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교회당을 향해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 중에 과연 몇 %가 블레셋 같은 대적마귀로부터 자유 하여 하나님만 의존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좀 더 솔직해지십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하나님만 의존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드뭄을 인정하십시다.
왜요? 사탄이 자신의 마지막 때가 너무 가까워왔음을 알기 때문에 블레셋 군사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쉼 없이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대체 어떻게 했길 래 오랜 세월동안 블레셋으로부터 정복당하여 그 밑에서 고통당하며 살아야 했습니까?
하나님만 의존하는 상태로부터 한참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만 말고도 이방인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을 고민 없이 섬겼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만 의존하는 데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처럼 타락하니 정치적, 군사적으로도 쇠퇴하여 숙적 블레셋에 정복당해 고통 받은 것입니다.
그 원수마귀가 오늘날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을 공격하지 않습니까?
마치 끊임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여 무너뜨린 블레셋 군사처럼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9:27을 보면 사도바울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예수 만나 변화된 후로는 결혼도 마다한 채, 오직 예수만을 증거 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사도바울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전하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데 정작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할까봐 늘 염려한 것입니다.
하물며,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죄악이 들 끊는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만 의존하고 살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렵다 하고 그냥 있으렵니까? 사도바울처럼 자기 자신을 하나님 말씀 앞에 쳐서 복종시킴으로써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베드로전서 5:8 말씀처럼 대적마귀는 하나님만 의존하며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며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 미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오는 금요일 27일이면 남북의 정상이 만나 회담하는 꿈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2007년 10월2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당시 김정일 조선노동당위원장과 정상회담 한 후로 만11년 만에 열리는 역사적인 회담입니다.
그저께 20일 북한은 조선노동당전원회의에서 핵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시험발사 중단, 핵 시험장의 폐기를 선언했습니다. 야당 중 한 정당만 정치적인 쇼라고 하고, 다른 야당들은 다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회담입니다.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들의 내막을 잘 모릅니다.
다만, 오늘 이 시간에도 자유를 잃은 채, 기아까지 겹쳐 고통당하며, 신음하고 있는 북한의 동포들을 생각하면서 어서 통일이 되어 그들도 우리처럼 압제와 기아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들도 신앙의 자유를 얻어 우리처럼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전쟁에 대한 공포가 사라짐으로써 사람들의 타락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덩달아 그리스도인들마저도 타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만 의존하는 신앙을 위협하고 있는 대적마귀의 유혹이 많은데, 통일이 되어 전쟁에 대한 두려움마저 사라진다면, 그나마 전쟁의 공포 때문에 기도하는 일조차 없어지지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는 대신 자신의 내면에 있는 탐욕을 따라 하나님 외의 우상들을 의존하며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저와 여러분이 정말로 기도해야 하는 것은 통일이후의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모양의 미혹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모두 부정해버리는 블레셋과 같은 공격이 있고요.
자신이 가진 이성과 생각과 명철이나 논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하나님만 의존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회나 정치적인 조직이 교회를 얼마나 공격하는지 모릅니다.
오직 성경말씀을 듣고 가르치고 배우고 기도하고 주 안에서 교제하고 섬기는 교회 대신 어떤 조직이나 규칙이나 모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들이 교회의 본질을 대신하고, 진리인양 자처하며,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권세를 마귀가 예수님으로부터 넘겨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강력한 권세로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만 의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요인들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협하는 대적원수들을 엎드러지게 하십니다. 마치 다곤 신상을 엎드려지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외의 다른 모든 우상은 사람이 없이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십니다. 영원히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존하시는 유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 그 하나님만 의존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그렇게 결단하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곤 신상을 무너뜨리시듯, 우리 주변의 대적원수들을 모두 물리쳐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고, 살아가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몽뚱이만 남은 다곤
삼상 5:1-5 / 남산다눔교회
오늘 말씀을 보면 다곤의 형상은 언약궤 앞에 엎드러집니다. 그래서 몸뚱이만 남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곤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곤의 정체는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사람이 세운 다곤, 스스로 존재하신 하나님
3절을 봅시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렇습니다. 다곤은 인간이 만든 신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다곤의 신전에 놓였지만 다곤을 엎드러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이용할 수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블레셋이 전리품으로 취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세운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출3:14).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은 시작되지 않은 원인이요 부동의 동자"라고 말했습니다. 신은 영원토록 그 자신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곤과 하나님의 싸움은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다곤은 하나님의 궤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만든 신들은 다 엎드러집니다.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 현대사회도 고대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나 경기장 같은 신전이 있어,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면 거기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미모와 권력과 돈과 성취의 신이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한 이것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무엇이든지 우상이 될 수 있고 ‘좋은 것’일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고 말합니다.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의미 있을 거라 생각되는 것,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마음 속에 우상이 삶 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짜 신들의 악 영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참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만이 오직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가 만든 신의 배신을 당하지 않으며 사탄의 손 아귀에서 가짜 신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참된 존재를 목적을 발견하고 진짜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두려움으로 섬기는 다곤, 사랑으로 교제하는 하나님
4,5절을 봅시다.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다곤은 여호와께 드리는 전리품이 되었고, 머리도 손도 발도 없이 몸뚱이만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섬기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블레셋 사람들과 다곤의 관계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신을 두려워했고 두려움에 기초해서 섬겼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속에 계셨습니다. 마이클 리브스는 “선하신 하나님”이란 책에서 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명합니다. 왜 하나님은 창조하셨는가? 모든 것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리브스는 창조는 흘러넘치는 성부의 사랑이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선합니까? 이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창설하십니다. 이 사랑을 배신한 아담에게 하나님은 가죽 옷을 입히십니다. 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증거합니다(요3:16).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는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등 모든 관계의 기초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어제 새벽기도 메시지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로마서 8장의 결론 부분을 읽으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이 시간 우리가 만들어진 신의 지배를 당하며 두려움에 떨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공존을 거부하신다
삼상 5:1-5 / 윤영천목사
여러분, 혹시 ‘인생 진열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우리 마음속에는 저마다 근사한 진열장이 하나씩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진열장의 가장 좋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죠. ‘대기업 합격증’, ‘서울에 있는 내 이름으로 된 집문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연인과의 커플 사진’, ‘인스타그램 핫플에서 찍은 수많은 ‘좋아요’를 받은 사진’. 우리는 이런 것들로 내 인생의 진열장을 빽빽하게 채우며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신앙이 좋은 우리 청년들은, 그 진열장 한쪽에 근사한 자리 하나를 더 마련해 둡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깔끔한 십자가상이나 예쁜 성경책을 올려두고, 내 인생 컬렉션의 품격을 높여주는 아이템처럼 여기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단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입니다.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외쳤을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신, 야훼도 우리 국가 진열장의 컬렉션에 추가됐다!" 그리고 그들은 언약궤를 자신들의 신전, 자신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다곤 신의 진열장 안으로 옮겨 놓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신전 안에서, 온 세상을 뒤흔들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인생의 진열장을 멋지게 꾸며주는 컬렉션이 되기를 거부하시는 하나님, 내 삶의 유일한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세상의 신전에 갇힌 하나님
먼저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다곤 곁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다곤은 반은 물고기, 반은 사람의 형상을 한 신으로, 풍요와 번영을 상징했습니다.(사진01-다곤) 블레셋 사람들에게 성공과 부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그들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이었죠. 그들은 바로 그 다곤 ‘곁에’ 하나님의 궤를 둠으로써 선언한 것입니다. “야훼, 너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이제부터 우리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 네 자리는 우리 신, 다곤 옆자리야.” 하나님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수많은 신들 중 하나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내 삶이라는 신전에 모셔 들이지만, 가장 중요한 센터 자리, 내 마음의 왕좌는 다른 신에게 내어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청년에게는 ‘성공’이 바로 다곤 신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 시험에만 합격하면, 이 회사에만 들어가면, 이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그때 가서 정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성공이 주인이 되고, 하나님은 그 성공을 돕는 유능한 조력자가 됩니다.
어떤 청년에게는 ‘사람들의 인정’이 다곤 신입니다. SNS에 올린 사진에 ‘좋아요’가 몇 개나 달리는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더 두려운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이 이 모든 다곤 신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 제 성공의 신을 더 잘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곤 곁에’ 하나님을 두려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2.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옆자리’에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제사장들이 맞이한 아침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첫째 날 아침, 문을 열어보니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 얼굴을 박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마치 살아계신 하나님께 경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그들은 “어젯밤에 지진이라도 났나?” 하면서 낑낑대며 무거운 다곤 신상을 다시 제자리에 세워둡니다.
그리고 둘째 날 아침, 문을 열었을 때 상황은 훨씬 더 처참했습니다. (사진02-쓰러진다곤) 다곤 신상은 또 엎드러져 있는데, 이번에는 머리와 두 손목이 ‘박살’이 나서 문지방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머리’와 행동하는 ‘손’이 잘려나간 것입니다. 신으로서의 모든 기능이 완벽하게 파괴된 채, 이제는 우스꽝스러운 물고기 몸통만 덩그러니 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 자리가 정해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일어서시며, 스스로 자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증명하시는 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내 안의 다른 모든 가짜 신들은 경배하든지, 아니면 박살 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공존이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들인다는 것은, 귀여운 반려묘를 입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자 한 마리를 풀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자는 우리 삶을 뒤집어엎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박살 낼 수 있습니다. 내가 왕으로 섬기던 성공에 대한 집착이 깨지고, 쾌락의 덧없음을 알게 되고, 사람들의 인정에 목매던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 안의 다곤 신들을 제거하시는 은혜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수많은 컬렉션 중 하나가 아니라, 삶의 유일한 주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3.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무게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6절부터 보십시오. 영적인 현실이 이제 끔찍한 물리적 현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머무는 곳마다 독한 종기가 퍼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그들은 공포에 질려 언약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깁니다. 마치 ‘폭탄 돌리기’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최고의 승리 전리품이었던 언약궤가, 이제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끔찍한 재앙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가진 ‘거룩한 무게감’을 보여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와 우상과 절대로 함께 계실 수 없습니다. 회개 없이, 내 안의 다곤 신상을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을 내 삶에 두려고 할 때, 그분의 임재는 위로와 축복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심판과 재앙으로 느껴집니다.
혹시 교회에 오면 왠지 마음이 불편하고, 말씀을 들으면 찔리기만 하고, 찬양을 해도 기쁨이 없는 청년이 있습니까? 어쩌면 내 안에 아직 무너지지 않은 다곤 신상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하나님과 가까이하려는 것은, 불덩이를 맨손으로 끌어안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론] 내 삶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신, 다곤과 공존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다곤을 무너뜨리시며 공존을 거부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언약궤를 자신들의 땅에서 완전히 밀어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 신전, 그 가장 중앙에는 무엇이 서 있습니까?”
성공입니까? 안정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더 이상 하나님을 내 인생의 수많은 다곤 신들 옆자리에 세워두려는 시도를 멈춥시다. 오히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자가 되시는 주님, 내 삶에 들어오셔서 당신이 아닌 모든 것들을 부수어 주십시오. 그 과정이 아플지라도, 내 삶의 왕좌에 있던 모든 다곤들의 머리와 손목을 잘라내시고, 오직 주님만이 홀로 서 주십시오.”
그렇게 내 삶의 다곤 신전이 무너지고, 하나님만이 홀로 나의 주인이 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유와 평안, 그리고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 내 삶의 주인 자리를 놓고 하나님과 씨름하며, 마침내 그 자리를 온전히 내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파괴되고 말 우상
삼상 5:1-5
지난주에 우리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4천 명의 전사자를 내며 패배하자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싸우러 나가면 이길 것으로 생각하고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가져왔으나 다시 치룬 전투에서 오히려 3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대패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궤를 이방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당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소 의아함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요단강물을 갈라지게 하고 여리고성을 무너지게 하던 그 언약궤가 방약무도한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어쩌면 그렇게 무력한 채로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놀라운 일들을 행해오신 하나님께서 그 이방인들 앞에서 어쩌면 그렇게 침묵하시며 수수방관하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의 무반응과 하나님의 수수방관은 오직 쇠락한 영적 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향해서였을 뿐이고 결코 방약무도한 블레셋에게도 그런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 곧바로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록의 일부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에벤에셀에서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아스돗은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로서 그들의 우상 다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예배중심지였습니다. 다곤은 수천 년 동안 근동지역 전체에서 큰 신으로 여겨졌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의 신상 곁에 두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그들이 승리했으며, 따라서 패배한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섬기듯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곤 신을 섬겨야 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상징적 조치였던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묵과하실 리가 없는 하나님의 반응이 당장 나타났습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그 얼굴이 땅에 닿은 채 엎드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경배와 굴복의 표시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곤을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을 일으켜 다시 제 자리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또다시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그 얼굴이 땅에 닿은 채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번에는 그 머리와 두 손목이 잘려 있었던 것입니다. 머리나 손목을 자르는 것은 전투에서 적을 이기거나 처형할 때 흔히 있는 일입니다. 다곤은 하나님의 적수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아 파괴되고 사라져야 할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첫날 아침 다곤의 신상이 엎드려져 있었던 것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 사람들이 그것을 다시 세우려 해봐야 헛일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 하나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당신만이 참 신이시며 사람들에 의해 신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실상 아무 것도 아님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대승을 거두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탈취하는 뜻밖의 전과를 올렸다고 좋아했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궤로 하여금 말없이 블레셋의 손에 의해 블레셋 땅으로 탈취당해 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정신과 삶의 중심인 다곤의 신전으로 들어가 그들의 신 자체를 굴복시키고 파괴해버림으로써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참 하나님이시며 주권자이심을 알리는 역사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징은 블레셋의 우상 다곤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곤을 섬기며 하나님의 궤를 함부로 빼앗아 가져온 블레셋 사람들 또한 응징하셨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6절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받을 저주에 대하여 모세를 통해 경고하시며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라"(신28:27)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블레셋도 같은 재앙으로 응징하신 것입니다.
아스돗 사람들은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5:7) 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방백들은 대답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했습니다(5:8).
가드 또한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가드로 옮기라고 한 것은 아마도 그 주민 중 일부가 이스라엘 사람이었든가 적어도 이스라엘과 호의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서 하나님의 공격을 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계산은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궤를 가드로 옮겨 간 후에 하나님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셔서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 것입니다(5:9). 블레셋 사람들은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냈습니다. 에그론 또한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르자 에그론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5:10) 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말하기를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을 면하게 하자" 했습니다(5:11).
이렇게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6:1) 동안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했고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셔서 많은 사람이 죽었거나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합니다(5:11-12).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다"는 것은 그 이방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고 섬기지도 않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땅과 모든 족속의 주권자이심을 여실히 보이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겨보았으나 하나님의 재앙이 갈수록 더 심해지자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의 땅으로 돌려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6:1-12).
이 하나님의 궤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궤는 언약의 궤이고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의 궤를 앞세우시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성실할 때에는 비록 그 백성이 하나님의 궤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갈 때에는 이스라엘을 이길 족속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는데 언약궤만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은 어떤 족속도 싸워 그들을 이기고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을 이긴 것이 곧 하나님을 이긴 것은 아니며 언약궤를 빼앗은 것이 곧 하나님을 굴복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하나님에 의해 그의 백성을 징치하시는 도구로 사용된 족속이라 하드라도 그들 자신의 우상숭배와 악행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따로 엄히 응징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싸움의 궁극적인 승리자이고 유일한 승리자인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땅에서 거짓 신들을 다 파괴하시고 참 하나님으로 경배를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동시에 크나큰 위로와 경고가 되는 사실입니다. 먼저 지금 우리의 저 북녘 땅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북한 땅은 이 지구상의 가장 고약하고 우스꽝스러운 우상숭배의 공장이 되었습니다. 평양의 장대현교회가 섰던 자리에는 지금 거대한 김일성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북한 땅에는 무려 29,000개 이상의 김일성 동상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태양신으로 불리며 절대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또 하나의 태양신이 만들어졌습니다. 김정일입니다. 한 때는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하던 평양은 지금은 아스돗의 다곤 신전처럼 되었습니다. 거기서는 공식적인 교회라고 하는 것들도 다 김정일을 섬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궤를 다곤 신상 곁에 갖다 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북한주민들은 마치 블레셋에게 패한 이스라엘과 같이 되었습니다.
남쪽의 우리 대한민국의 사정은 또 어떻습니까?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추구해온 대한민국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에 있어서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남북 간의 엄청난 격차를 이루게 한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종교의 자유를 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교회를 세우며 전도를 힘쓴 일과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박멸시키기에 혈안이 되어온 것 사이의 차이가 그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만유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 대한민국 땅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의 우상들을 숭배하는 자들이 점점 그 세를 확장하더니 이제는 그들 천하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청와대를 비롯해서 정부 여당뿐 아니라 사회, 문화계의 핵심요직에 있는 많은 인물들이 주체사상 추종자들이며 김일성-김정일 태양신숭배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전에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평양을 향해 절부터 하고 서로 만나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줄인 "위수김동"을 인사말로 주고받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현대판 다고니스트 즉 다곤숭배자들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철저한 독재권력자이고 가장 가혹하고 악랄하게 인권을 유린해온 자이며 자기들은 온갖 사치와 부귀영화를 다 누리면서 수백만 동포를 굶어 죽게 만든 철면피이고 특히 동양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과 북한 땅에서 주의 몸 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무자비하게 멸절시킨 장본인인 자들을 민족의 태양이고 영웅이며 해방자라고 추앙해온 자들입니다.
지금은 누가 과연 이 나라의 통치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연이은 두 정권의 권력자들은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국민의 뜻을 살피기보다는 김정일의 눈치를 살피고 그에게 아양 떠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는 비아냥 아닌 심각한 우려가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습니다. 최근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인권운동가가 전한 지금 외국에 비친 한국의 초상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우발적인 사고로 숨진 두 여중생의 죽음에는 끊임없는 촛불시위를 벌이면서도 굶어 죽고 맞아 죽는 수백만 동포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려하는 이상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무인도인 작은 섬 독도 때문에는 어마어마한 분노를 쏟아내면서도 이천여 만 명의 동포가 사는 북녘 땅에서의 인권유린 때문에는 분노할 줄 모르고 오히려 부인과 모르는 체함으로 일관하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고 북한인권문제에 대하여 침묵과 부인과 국제회의에서의 의사표명기권뿐 아니라 북한의 참상과 인권유린 실태를 알리는 일은 온갖 권력을 동원해 기를 쓰며 방해하는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범죄적 태도를 견지하는 사악한 정권은 반드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요덕 스토리](The Yoduk Story)라는 것이 있습니다.
평양연극영화대학 영화연출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국립영화대학 영화연출학과를 유학했으며 탈북해서 다시 동국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한 정성산 감독이 제작하고 감독한 뮤지컬입니다. 정감독은 충신교회 교인이며 장편대하소설 [장백산]의 저자이고 영화 [쉬리], [공동경비구역JSA]의 시나리오 각색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뮤지컬 [요덕 스토리]는 북한 함경남도 요덕군 제15호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랑과 용서와 희망의 대서사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저 북한 땅에도 임하기를 간구하며 막을 내리는 감동의 선교뮤지컬입니다. 그런데 현 정권이 이 뮤지컬 공연을 방해합니다. 예약되었던 공연장소들이 예약을 취소하게 만들고 공연자금을 대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이 물러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그 요덕정치범수용소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김정일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것을 막으며 교회의 선교활동을 억압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현 정권이 하는 짓입니다. 새문안의 성도 여러분, 오는 3월 15일부터 4월 2일까지 양재동에 있는 서울교육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이 뮤지컬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서 관람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정권이 이것마저 막는다면 영락교회를 위시해서 전국의 모든 대형교회에서 공연하게 만들 것입니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공연할 수 있도록 초청을 받게 할 것입니다. 이 뮤지컬의 공연이 있는 곳마다 몰려가서 관람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반자유민주정권의 부당하고 비겁한 탄압과 김정일독재정권의 폭정에 맞서 싸우는 일입니다. 이들 정권은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정권을 잡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법도 다 바꾸고 사람도 다 바꾸고 감사원과 국세청과 각종 언론매체 등을 정권의 시녀화하여 비판세력을 옥죄는 데에 무차별동원하고 자유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교회까지도 압박하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 같이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들이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 무너져가던 김정일정권을 지난 정권이 햇볓정책으로 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북한동포들의 극심한 고난을 지금까지 연장시켰고 더 많은 생명들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나 현 정권이 아무리 김정일정권을 계속 세워주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엎드러진 다곤 신상을 다시 제 자리에 세워놓았지만 또 다시 엎드러져 목과 손목이 잘렸던 것처럼 그 정권은 결국 무너질 것이고 파괴되고 멸망할 것입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의 궤를 노획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우상 다곤을 엎드러지게 하시고 그 목과 손목을 자르신 것처럼 친김정일 정권 또한 이 땅의 교회를 에워싸고 억누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을 이길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추종하며 숭배하는 그 태양신 우상들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바로 그들의 신전 안에서 파괴되고 사라지고 말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다곤의 신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곧 오늘날 우리에게서 머지않아 일어날 역사적 사건의 예언과 약속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다곤우상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라 다곤을 숭배한 블레셋주민들에게도 닥쳐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내지 않은 채 그들의 도시 사이에서 전전하는 동안 그들이 당한 재앙은 갈수록 극심해졌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신앙과 선교와 교육의 완전한 자유를 하루 속히 되돌려주지 않는 한 이 정권은 크나큰 재앙을 자초할 것입니다. 진정한 민족공조가 아닌 김정일정권과의 공조에 매달리는 정권은 그들과 함께 동반자멸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현 정권은 스스로에게 비극을 초래할 뿐 아니라 온 국민과 우리 민족 전체에게 화를 부르는 일을 도모하기를 당장 중지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파괴되고 말 다곤의 신상 곁에 끌어다 놓으려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언약궤와 같은 상징물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그의 뜻을 잘 받들어 민족의 살 길을 찾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