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30리 (12km)거리를 무거운 나를 업고 음성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인가가 없는데 신작로 옆에 여인숙이 한채가 있었고 사방은 논입니다.
우리는 여인숙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 잠을 자며 나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우리는 여인숙을 나와 음성 기차역 까지 가는데 아마 2km는 되는것 같습니다.
안적이 없는 신작로를 가는데 우리 앞에는 늑대의 무리가 7마리정도가 오고 있었고 옆의 논둑길로 또 그만한 숫자의 늑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엄마 늑대야"
작은 형이 말을 합니다.
무극에서는 날만 어두어지면 늑대무리들이 동네로 내려와 `우우.....` 하고 소리를 내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무서워 합니다.
마실을 갈때는 괭가리를 치고 가거나, 횃불을 들고 가기도 합니다.
동네의 돼지까지 물어가기도 합니다.
우리 앞으로 오는 늑대들은 몸집이 큰데 우리들을 흘켜 보듯이 하며 그냥 옆으로 태연하게 지나갑니다.
우리가 음성 기차역에 이르러 충주에서 오는 기차를 기다립니다.
나는 기차철로를 처음 봅니다.
한참 기다리자
"삐익.....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가 나타나는데 저 큰 쇳덩어리가 어떻게 작은 철길로 올 수 있는가? 나는 놀라워 합니다.
기차가 서자 우리는 기차에 올라타는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트럭이나 버스처럼 심하게 흔들리지도 않고 미끌어지듯이 가는것이 너무 신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창밖의 산과 집들이 지나가고 청주에 이르기까지 나는 정신없이 밖을 내다보며 너무나 신기해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일본의 역사를 보면 이미 17세기에 서구와 문물을 교환하고 일본유학생들이 유럽에 많이 간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발달한 서구의 과학문명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일본에서도 과학문명을 발달시켜
전기를 생산하고, 차를 만들고, 기차도 만들고, 배도 만들고, 나중에는 비행기 까지 만드는데
그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쇄국정책으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하늘천 따지만 배우고 있었는데, 그나마 양반집 자녀들만 서당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다니 기가 찹니다.
일본국민들은 호전적이어서 이미 임진왜란으로 우리나라를 수도 없이 침공하고 귀중한것들을 다 가져 갑니다.
이때 일본의 과학자가
"일본은 지진대이기에 장래 바다밑으로 가라앉을 것"
이라고 예언을 하자
일본 정부가 깜짝 놀라며
"우리가 살 곳은 이웃 조선밖에 없다"
라고 하며 기어코 우리나라를 점령합니다.
국모이신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미국과 프랑스 대사관을 돌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햇다고 하지만, 그들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불태워 버리며 그의 가족들을 찾아 삼족을 멸합니다.
얼마나 잔인한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아예 일본국으로 만들기위해 자기들 나라의 정부청사보다 더 큰 중앙청을 서울에서 가장 좋은 명당자리에 지었고, 시청을 지었고 우체국,신세계, 척식회사, 은행까지 지었는데
기술이 얼마나 좋은지 건물이 아름답고 튼튼합니다.
서울역도 얼마나 잘 지었는가?
그리고 전국의 농토를 관리하고 길을 만들고 전기 전화를 가설하고 기차가 다니게 하고, 서울에서는 전차도 다니게 하는등 급속도로 우리나라를 일본화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잠에서 개어나지도 못합니다.
이조 500년의 역사가 나라를 이렇게 만든 것은 바로 자기들 세력을 위하여 전근대적인 양반제도를 만든것이 우리나라가 발전을 하지못하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즈음에 내가 무극에 있었을때 총각들은 머리를 길게 여자처럼 따고 댕기까지도 달고 다니는 것을 봤는데,머리에서 냄새가 얼마나 나는지 모릅니다. 어느날 일본인들이 단발령을 내려 모두 잘라버렸습니다.
우리니리 각 가정에는 자식들이 적어도 7~8명이 보통이었는데, 그중의 한명이나 두명은 어렸을때 죽습니다.
우리나라는 위생관념에 대하여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고 일본인들은 고도로 세균학이 발달 했음에도 한국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아이들이 빨리죽어 한국의 인구수가 줄어들기를 바라는 악독한 정책 때문입니다.
그때의 한국 부엌에는 부뚜막에 설거지 하는 자신물 그릇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조그만 옹기 항아리입니다.
그곳에서 모든 그릇을 닦는데 다시 맑은 물에 행구지도 않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시꺼먼 더러운 행주로 물끼를 쓰윽 한번 닦으면 설거지 끝입니다.
비누도 없습니다.
그런 그릇에 밥과 국을 담으면 퀴퀴한 냄새가 납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늘 배앓이를 하고 설사를 하는데 아이들 뿐만이 아니고 어른들도 다 설사를 합니다.
그러기에 나이가 환갑만돼도 장수했다고 까지 합니다.
일본이 얼마나 악독한가!
우리가 탄 기차가 청주역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간 곳은 수동이라는 동네의 길가의 네모진 기와집입니다.
"와 우리집이 기와집이라니 !"
방으로 들어가자 반듯한 방이 너무나 깨끗합니다.
무극의 집에는 벽과 천정이 파리똥과 빈대를 죽인 피로 매우 더러운데 여기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이 너무 깨끗한 것입니다.
"와 "
내가 마치 천국에 온 기분입니다.
어머니는 아침에 회사에 나가시는데 `영단`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농협의 전신입니다.
형들도 큰 형은 중학교에 다니고 작은 형은 국민학교를 다닙니다.
나는 지금 8살이지만 나이에 비해 자라다만 아이처럼 키가 작고 6살 정도로 보이고,다리가 아파 내년에 학교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일이 오면 우리가족들은 어머니 따라 북문로 3가에 있는 성당으로 미사하러 갑니다
이렇게 하여 내 생애에 가장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잠깐이지만...
(계속)
첫댓글 일제 강점기 시대에 힘들게 살아오신 산 증인의 역사속에서 .
고생 많이 하신 흔적이 보입니다,
청주 수동은 옛날 古宅 들이 많아 조용한 동내입니다,
잊고 있었던 옛 생활을 생생하게 기억 하시고~
아이들은 좋겠지만 엄마께서는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셨을까
엄마 고생 하신것은 말 할수 없지만
자식 사랑이 지극하신것 같아 감동입니다 ,
요즘 세상에는 경제력이 힘들어 지면 자식 팽개치고
가출 하는 그런 엄마도 있는데~
행복 생활이 잠깐 이라니 ~~
다음을 기대 합니다,
어서오세요 수지니님 찾아주심에 감사드려요,
청주 수동을 아시는 군요 반갑습니다.
@형광등등
청주 모충동이 고향이고 중 고등 학교 졸업후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형광등등 님. 오래전 날들을 어쩜 이리도 선명하게 회상하실 수 있을까요?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어머님께서 정말 훌륭하신 분이셨군요.
한 편 한 편 잘 읽고 있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좋은 나날 맞으세요.
송초님 어서오세요 너무 과찬이십니다.
아버지 없는 엄마가 불쌍한 생각도 들었어요 감사
일제강점기때의 피폐한 삶의 모습들과
그런 가운데 자식들을 가르치려 노력하신 모친의 노고가 눈물 겹습니다. 그당시 여자의 홑몸으로 자녀 세명을 돌본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였을까요?
교육을 받아야 나의 삶을 내가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어 지고 사고가 유연해 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공부라는 것을 하는겁니다.
어머님은 직장을 계속 다니시며 자녀분은
안정적인 생활을
계속 누리게 될는걸까요?
왜 불행한 예감은 한번도 빗나가는적이 없는건가요?!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어서오세요 자하님 감사합니다.
지금이 가장 행복할때입니다.
왜정시대의 실상을 어느 역사보다도 잘 그리고
세세하게 써주셨네요.
저도 처음 읍내역전에서 기차를 보았을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시커먼 쇳덩이에서 불을 뿜듯이 수증기가 요동치는
모습이 어찌나 거칠게 보이던지요.
이제 서서히 생활의 안정을 찿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무악산님 오셨어요?
옛날 그런 기차가 그립지요? 하하하
칙칙폭폭 소리가 듣고 싶고 굴뚝에서 연기나는 것도 보고 싶답니다.
@형광등등 저의 선친께서 역장이셔서
아부지 진지 잡수시라고
호므에 나가신 아버지 찾으러 댕겼던 유년의 기억이..
역사앞 개나리 울타리도 아버지가 만드셨고
라일락 나무도 아버지가 심으셨다는..
하두 성실하셔서
이승만대통령이 상을 주기시도^^;;
기찻길 너머로 가믈가믈했던 아지랑이가 지금도 눈에 선연..
앗, 현깃증납니다^^;;
1945~6년경 오류동역사에서의 아버지(앞엣분)
@자하 아부지 ! 정겨운 소리입니다,
저는 아부지 보다 할아버지가 더 보고 싶어요.
기찻길 라일락 이상하게 눈에 선합니다. 감사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예 환타스틱님 다리를 평생 앓아요
그러다가 2004년에 치유를 받게 되고
이제가지 한번도 아픈 적이 없어요 감사
신이 여러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던 말처럼 이 세상의 모든 엄니들은(일부 극소수 제외임) 참으로 위대한 분들이심을 다시 한 번 더 느끼게 됩니다.
예전 저의 고향 옆 집 아저씨께서는 흙으로 옹기를 만드시는 분이 사셨드랬습니다.
흙으로 신기하게 그릇을 빚어 가마 속에 넣고 장작불을 때고 나면 이쁜 항아리등이 나오는게 신기해서 지칠 줄 모르게 구경했던 유년기 기억이 떠오릅니다. ^^~
순수수피아님 어서오세요,
엄미라는 말이 가슴을 찡하개ㅔ 하네요, 우리 엄니만 생각하몀ㄴ 죄송하고 눈물만 납니다.
저도 한때 옹기만드는 옆에 살았어요 아이고 그리워라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