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하기 하루 전인 9월 19일, 야마모토 신이치(이케다 선생님)는 오전 9시
반부터 인민대회당에서 부총리이기도 한 리셴녠(李先念) 부주석(공산당)과
회견했다. 첫 중국 방문 때 약 2시간 동안 부주석과 대화한 적이 있다.
신이치는, 평소 격무에 시달리는 부주석의 건강을 염려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치가가 아니니, 부주석께서도 오늘은 느긋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이야기해주십시오." 그리고 신이치가 부주석에게 일본 방문을 바란다고
전하고, 그렇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 지금은 예정이 없지만 "저도
가보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회견장에 큰 박수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에 관한 질문에 부주석은 이렇게 답변했다.
"사회주의 건설이 계급투쟁인 이상, 격동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도 단결하고 있습니다. 투쟁을 그만두면 안 되지만, 앞으로는
이러한 방법은 쓰지 않겠지요." 또 현재 중국이 추진하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에 걸친 '4대 현대화'의 기둥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먼저 농업
입니다. 두번째가 공업입니다. 이 두가지 현대화가,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간은 밥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중국에는 밥을 먹는 입이 8억이 훨씬 넘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농업 생산량
을 높여야 합니다. 농업은 국민경제의 기초이고, 공업은 국민경제를 이끄는
수단입니다. 공업이 없으면 농업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 합니다. 그것을 위해
선진적인 과학기술이 필요합니다. 모두 이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현대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과학기술을 배우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유학생이나 연수생을 귀국에 파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에서도 이곳으로 강의하러 와주시기 바랍니다."
교육은 국가 건설의 초석이다. 교육 교류는, 미래를 함께 만드는 공동작업
이다.
신이치는 리셴녠 부주석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중요한 의견입니다. 그럼 유학생 수는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유학생은 수백에 그치지 않고 수천, 아니 1만명 정도가 될지 모릅니다."
"그것은 일본에 보내는 학생만입니까?"
"그렇습니다. 일본이 받아준다면 보내고 싶습니다."
"대찬성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문화대혁명 때 지식인이나 학생은 지방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충분한 고등
교육을 받지 못했다. 10여 년 동안 몰아친 '문혁'의 폭풍우는 겨우 잠잠해
졌지만, '4대 현대화'를 추진하는데 심각한 인재 부족에 부닥쳤다. 신이치는
지금이 바로 일본이 중국 유학생을 전면 지원해, 교육 교류를 실시할 중요한
때라고 생각했다. 중일 간의 유학생 교류는 역사가 깊어, 1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견수사, 견당사라는 사절단을 대륙에 파견해 국제
정세나 문화를 배웠다. 또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대에 해당하는 메이지
후기부터 중일전쟁을 시작하기 전까지, 이번에는 일본이 많은 중국 유학생을
받아들였다. 많은 때는 1만 명에 가까운 유학생이 일본에 왔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인 1975년에 다시 일본이 정식으
로 중국유학생을 받아들였다. 국교정상화를 이룬 뒤에 소카(創價)대학교가
처음으로 유학생 6명을 받아들인 것이 그 시작이었다. 만일 리셴녠 부주석의
말이 실현된다면, 역사상 세번째로 중일 유학생 교류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일본 유학이 중국의 국가 건설에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청년들이 서로
신뢰 관계를 맺는다면, 정치나 경제가 어려운 국면을 맞아도 시대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우정을 키우고, 그것이 만대에 걸친 우정의 토대가 될 것이다.
그러려면 유학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받아들이는 일본인도 또 유학생도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벗'으로 대하자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신이치는 회견 자리에서 리셴녠 부주석에게 중국과 미국의 관계도 솔직하게
물었다. "국교정상화를 전제로, 중미조약 같은 것을 맺을 생각은 있으십니
까?" 미국과 중국의 국교는 1972년 2월에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그때까지 적대하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국교정상화를 향해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서로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대사급 사무소장을
두는 등 발전 양상을 띠었다. 1975년 12월에는 포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하면서 두 나라는 국교정상화를 위해 노력할 의사를 다시 확인한다.
1977년 1월,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미중 국교수립을 추진하지만, 교섭이
난항을 겪자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신이치는 중일 평화우호조약을 조인한
지금, 교착상태인 미중 관계가 정상화되기를 강하게 바랐다. 리 부주석은
신이치의 질문에 단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국교정상화를 전제로 중미조약을
맺을 용의는 있습니다. 조약은 상대가 있는 만큼 카터 대통령의 마음에 달렸
습니다." 신이치는 두 나라 관계가 정상화되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신이치는 '중국은 제네바 군축위원회에 참가할 것인가' '사회주의 민주화의
기초인 법률 정비에 관해' '4대 현대화에 호응한 종교정책' '핵무기 폐기를
위한 방도' 등 잇따라 질문하고 의견을 나눴다. 신이치는 회견 마지막에
이렇게 물었다. "일본에 가장 바라는 점은 무엇입니까?"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내는 일입니다. 우리 세대뿐 아니라 자자손손 사이좋게 지냈으면 합니다.
두 나라는 전쟁을 하면 안 됩니다." 대화는 1시간 10분에 달했다.
일본 각 신문은 '유학생 1만명 파견'(아사히), '중미조약 맺을 용의'(요미우리)
라는 표제로 회견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직후에 카터 대통령은
워싱턴 주재 중국연락사무소장과 접촉하고, 석달 뒤인 12월 16일(한국시간)
두 나라는 국교 수립을 전격 발표한다.
리셴녠 부주석과 회견한 19일 오후 6시 반, 신이치는 중국 측 관계자를 초대해
답례연을 베풀었다. 장소는 고궁박물관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베이하이공원
(北海公園)의 충화섬에 있는 음식점 '팡산판좡(仿膳飯莊)'이었다. 베이하이
공원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왕궁의 정원으로 10세기에 만들었다. 약 70만
제곱미터나 되는 공원은, 반 이상이 인공 호수로 연못도 있다. 1000년에 걸쳐
역대 왕조의 정원이었지만,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일반인에게도 공개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는 폐쇄했다가 이해 봄부터 다시 개방했다고 한다.
일행이 팡산판좡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빛에 하늘과 호수가 주황색으로 물들
어 있었다. 신이치는 그 아름다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늘이 마치 '중일의
미래여, 이와 같이 빛나라! 아름다운 우정에 물들어라' 하고 말하는 듯했다.
신이치와 미네코는 음식점 입구에서 손님들을 일일이 맞으며, 머무는 동안
신세를 진 것에 감사하고 굳은 악수를 나눴다. 답례연에는 중일우호협회
랴오청즈(廖承志) 회장과 부인인 징푸춘(經普椿) 이사, 장샹산(張香山)과
자오푸추(趙樸初) 부회장, 린리윈(林麗韞) 이사, 쑨핑화(孫平化) 비서장,
베이징대학교 지셴린(季羡林) 부총장, 통역과 차량의 운전 담당자 등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또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부인이자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인 덩잉차오(鄧穎招)가 초대에 응해, 환영연에 이어
다시 참석했다. 국가적 지도자와 회견은, 체재 중에 한 번이라는 관례를 깬
이례적인 참석이었다. 자리에 앉을 때 신이치가 덩잉차오에게 가운데 앉도록
권했다. 그러자 덩잉차오가 완강히 사양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오늘은
당신이 주인이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을 축하하러 왔으니까요."
신이치는 그 겸허함과 배려에 황송했다. 겸허함은 고결한 인격의 증거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존경심, 넓은 마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치는 답례연 인사에서, 관계자의 후의로 9일 동안 많은 성과를 얻었다고
사의를 표하고 이야기를 이었다. "이번에 우리는 인민의 활기찬 모습에서
'4대 현대화'를 향한 늠름한 전진과 함께, 그것이 훌륭한 결과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베이징대학교, 후단대학교, 상하이 소년궁을 방문해
미래 세대가 쑥쑥 성장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일본에 돌아가면 마음속에
비춰진 이 모든 것을,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인민과 인민'의 우정과 연대를 성실히 착실히 쌓아, 중일 사이에 '다이아몬드
의 길' '금의 다리'를 단단히 구축하고 싶습니다. 신의와 우정을 관철해,
중일우호의 '제2장'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함께 써가길 염원하는 바
입니다. 양양한 미래를 향해 우호의 손을 잡고 상쾌하게 전진하지 않겠습니
까." 신이치는 끝으로 참석자의 건강을 기원하고 건배를 제창했다.
이어서 중일우호협회 랴오청즈 회장이 인사에 나섰다. 회장은 신이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중일 두 나라는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지만 진정한 우호
관계의 발전은 지금부터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양국의 우호와 우정이 해마다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방중단의 귀로가 안전하기를 기원한다고 말을
끝맺었다. 평화우호의 길도 '장정(長征)'이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때도 미래를 향해 신의의 발걸음을 옮겨야, 끝까지 돌파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다. 식사를 시작하자 덩잉차오가 이렇게 말했다. "음식이 매우 맛있군요.
인민대회당에서는 늘 똑같은 음식이 많아, 다른 요리가 먹고 싶던 참이었습
니다. 바람이 통했군요. 야마모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오늘
메뉴는 서태후가 말년에 먹은 식사를 모방한 것이라, 노인이 먹기 쉽도록
부드럽게 만들었군요. 제게 꼭 맞는 식사입니다."
꾸밈없고 유머가 넘치는 말이었다.
식사 도중에 랴오청즈 회장의 부인 징푸춘이 남편에게 살짝 약을 건넸다.
덩잉차오는 그 모습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랴오청즈는 좋은
'간호사'가 곁에 있어서 행복하겠군요." 그러자 징푸춘이 이렇게 말했다.
"실은 늘 약을 챙겨 주는데, 집에 돌아온 남편의 주머니를 보면 그대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랴오 동지에게 자주성을 갖도록 좀 지도해야겠군요"
그 말에 근엄한 랴오 회장조차도 볼을 붉혔다. 누나에게 꾸지람을 들은 동생
처럼, 쑥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신이치는, 사람들이
왜 덩잉차오를 '덩다졔(큰 누나, 큰언니)'라고 부르며 경애하고 따르는지
알 것 같았다. 세심한 마음 씀씀이와 깊은 배려가 있고, 소박하면서도 유머가
넘치고, 사람을 감싸는 따뜻함과 쾌활함이 있다. 그것은 인민 해방을 위해
신중국 건설에 몸을 던져 사회의 부정과 차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싸우며
연마하고 단련한 인격에서 발하는 빛이라 할 수 있다. 그 아름다움은 몸치장
을 하고 겉모습을 꾸며 만드는 아름다움이나,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아름다움
이 아니다. 인생의 연륜을 더할수록, 더욱더 빛나는 아름다움이다.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혼(魂)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혁명의 길과 같다. 덩잉차오는 이번에 신이치의 통역으로 동행한
저우즈잉(周志英)에게도 마음을 썼다. 인민대회당에서는 주로 중국 측 통역
으로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저우즈잉은 이때 처음으로 덩잉차오와 신이치의
통역을 본격적으로 맡았다. 덩잉차오는 저우즈잉이 쓰는 중국어(베이징어)
를 듣자 바로 물었다. "당신은 홍콩 출신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미묘한 발음 차이로 베이징어 통역이 익숙하지 않다는 점과, 출신지까지
꿰뚫어 보았다.
2p입니다
이케다 SGI 회장과 함께 신시대를 달린다 [23]
후계를 이끌 미래부를 모두 함께 응원!
드디어 미래부를 육성하는, 청춘의 생명이 타오르는 여름이 왔습니다.
믿음직스러운 장년부와 부인부의 육성부장, 마음 뜨거운 남녀청년부 21세기
사명회, 또 교육본부와 대학부 그리고 미래부를 지원하고 격려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우정은 세계입니다.
우리의 비원(悲願)은 평화입니다.
미국 SGI 미래부 연수에서는, 모든 참석자가 눈앞에 놓인 과제에 도전하기로
서로 약속했다고 들었습니다. 미래부가 좌담회를 북돋우는 인도 SGI와,
마음의 장벽 없이 젊은 연대를 넓히는 독일SGI 등, 북중남미와 아시아, 유럽,
나아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서도 미래부가 쑥쑥 성장하고 있습니다.
미래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인류의 보배입니다.
'앵매도리(櫻梅桃李)'라고 있듯이 벚꽃은 벚꽃, 매화는 매화, 복숭아꽃은
복숭아꽃, 자두꽃은 자두꽃의 개성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만 있는
'자신의 꽃'을 반드시 피울 수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불법(佛法)입니다.
희망 있는 인생은 강합니다. 지지 않습니다.
이해하면 할수록 끝이 없는 영원한 샘, 그것이 신심입니다.
특히 여름은 가족끼리 신심 이야기를 깊이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도다(戶田) 선생님도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식이라고 해서 어린 아이 취급하면 안 된다. 신심의 후계자다."
진지한 기원을 담은 말은 반드시 통합니다. '있는 그대로' 우리 가정의
광포사(廣布史)를 말하는 점도 중요합니다.
성훈에 "사자왕(師子王)의 자식은 사자왕" (어서 1216쪽)이라고 씌어 있습
니다. 일시적으로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더라도 '어본존이 불자(佛子)를
불행하게 만들 리 없다. 반드시 좋아진다'는 깊은 확신과 기원을 근본으로,
긴 안목으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창가가족의 크나큰 자애와 마음으로,
후계를 이끌 보배를 육성합시다!
첫댓글 반년 전 남편을 잃고 다섯 명의 자녀와 함께 절망에 빠져 있던 저에게 이케다 선생님은
"울면 안 됩니다. 괴롭겠지만 어본존을 만난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라고 격려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중략)
"이 몸을 법화경과 바꿈은 돌을 금으로 바꾸고, 분을 쌀로 바꾸는 것이니라." (어서 910쪽)
이케다 SGI 회장은 수필 <신 인간혁명>에 이렇게 쓰고 있다. ㅡ "나는 전부 버리고 앞을 향해 전진했다.
망설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외쳤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벗을 격려하기 위해, 항상 새벽녘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라고.
이케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중략) 사람들을 책임집시다! 인생에서 이것 이상의 기쁨은 없습니다.
결의를 새롭게 하고 전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략)
"스승이 지켜보는 가운데 싸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한계의 벽을 부숴라!' 17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