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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4-17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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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카르야 예언자는 시온에게, 만군의 주님께서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에 따르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어렵게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세 살 되던 해에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성전에서 아이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봉헌하는 날 사제가 아이를 받아 들고 입을 맞추며 축복을 한 뒤 제단의 셋째 층계에 앉히자, 은총이 내려 아이가 두 발로 춤을 추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를 뒤돌아보지 않고 스스로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성전에서 지내도록 합니다.오늘날 동방 교회는 이 사건을 기념하며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입당 축일’로 지내고, 가톨릭 교회는 성모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셨다고 하여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지냅니다.오늘 제1독서인 즈카르야 예언서는 오늘 기념일의 기쁨을 잘 드러내 줍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그러나 오늘 복음은 축제 분위기를 조금 흐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이야말로 참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셨던 분, 곧 예수님의 참된 어머니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잉태되실 그 순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그리고 초대 교회 때에도 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이유가 단순히 육신을 낳아 주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신 분이시기 때문임을 선언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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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신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여 복음의 순수함을 잃었다고 비난하곤 합니다. 특히 성모님을 공경하는 전통은 오직 믿음과 은총, 성경만을 강조해 온 한국 개신교계가 우리를 가장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복음에 등장하는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란 표현에서 성모님의 평생 동정을 의심하거나, 아들을 만나러 온 어머니와 가족을 박대하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성모님에 대한 우리의 공경심을 비하하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앙도 성경을 신앙의 최고 규범으로 삼습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 성령의 감도를 받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칩니다. 누구나 성령을 받아 성경의 말씀을 삶에서 체험할 수는 있지만, 성경의 유권적 해석에 관해서만큼은 교도권, 곧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의 가르침에 맡겨져 있다고 가톨릭 교회는 가르칩니다. 그것은 교회의 권력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사도전승의 참된 의미를 지켜 가기 위함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은 마리아의 다른 자식이 아닌 ‘친척들’이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미 사도들과 함께 사시며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교회가 세상에 선포되는 순간부터 언제나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성모님께서 공경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만큼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분이 역사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육을 취하신 말씀을 잉태하셨고, 그분의 믿음의 응답을 통하여 말씀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리적 논쟁을 떠나, 예수님의 성심과 결합되어 십자가의 길을 평생 함께 걸어가신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위대하고 공경받으셔야 합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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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행동을 하십니다. 모처럼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이 찾아왔는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신 다음,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친척들을 무시하려는 의도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요.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혈연보다도 더 중요한,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모두 혈연만큼 강한, 신앙으로 굳게 맺어진 새로운 형제자매라 하겠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저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실천하려면 서로 도와주고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오늘 묵상하고 싶은 점은, 세례를 받았다는 자체로 하느님 나라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은 채, 그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데 그친다면, 주님의 참된 자녀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신앙으로 맺어진 새로운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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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께서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S. Maria Nuova)의 봉헌일(543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날 동방과 서방의 교회는 함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순간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셨던 성모님께서, 어린 시절에도 성령의 영감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했던 것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또한 이 축일은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도 매우 뜻깊은 축제입니다.
성모님의 어린 시절과 오늘 기념하는 봉헌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많은 전승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부모님이 이미 봉헌한 약속에 따라, 세 살 때에 다른 소녀들과 함께 손에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성전으로 인도됩니다. 마리아는 아직 어렸지만, 성전의 열다섯 층계를 올라갔고, 다른 소녀들과 함께 앉지 않고, 대사제들이 일 년에 한 번 자리하는 지성소에 앉았다고 교회의 전승은 알려 줍니다.
마리아의 봉헌은 실제로는 훨씬 더 겸손하면서도 영광스러웠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친 이 봉헌을 통하여, 마리아는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특히 마음을,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려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새겼을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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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과 관련된 축일이나 기념일에서 오늘 말씀은 상당히 자주 발견되는데, 여러 가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인 것도 사실입니다. 가족을 소홀히 하는 듯한 예수님의 태도를 불편해하기도 하고, 가족을 떠나는 예수님의 결연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모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셨으므로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틀림없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말씀하실 때에, 성모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의 조건을 채우셨습니다. 인간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라 해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깨달으셨을 때에는 남김없이 그대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도, 단순히 계보상으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사실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그 뜻이 실현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이로써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도, 성모님께서 당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라는 사실보다는 그분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셨다는 사실이 더 우선이었지요.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성모님의 뒤를 이어 모두 예수님의 가족이 됩니다. 어머니를 홀대하시는 듯한 태도를 취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가 되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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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사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요구하곤 하였습니다.
이 처럼 지금 표징을 청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었다고 그들을 비난하면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마태 12,1-8), 또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까지 하였습니다(마태 12,9-14). 더욱이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헐뜯었습니다(마태 12,22-32).
예 수님께서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부르셨습니다(마태 12,33-37). 그들은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면서 당신을 계시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아주 특별하거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믿 음은 무엇으로도 강요되지 않습니다. 표징도, 기적도, 말씀도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믿음도 싹틔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다면 과연 그들이 정말로 믿었을까요?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보냈듯이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다음에 그들이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결단입니다. 결단을 내린 뒤에도 우리는 결단이 눈에 보이는 명백한 증거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압니다. 흔들리는 음을 굳건하게 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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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떠돌이처럼 사시는 아들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친척 형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오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만나 뵐 생각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복음 말씀을 들어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배척하시는데 왜 그렇게 천주교는 성모님을 지극히 공경하느냐고 되물을지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고 공생활을 하시면서 혈연에 얽매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발 더 복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잘 실현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는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이신 것도, 아들을 살리려고 헤로데의 폭정을 피해 이집트 피난 생활을 하신 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셨던 것도, 성모님의 믿음과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과 한 몸이나 다름이 없으십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실천을 한 어머니가 어디 있습니까?
자식을 낳았다고 다 부모인 것은 아닙니다. 혈육에만 집착하면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 예수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자녀에게 세상에서 먹고사는 수단만 가르치면, 결국은 부모가 헛된 인생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온갖 풍파를 겪게 마련인데, 부모에게 신앙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나갈 힘이 있습니다. 믿음 깊은 하느님의 가족이 되면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고, 하늘 나라에서도 영원히 함께하는 가족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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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혈연을 승화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의 공생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가족 안에서 ‘그 뜻’을 실천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하지만 어렵습니다. 어떤 행동이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가족을 ‘자기 뜻대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가족과 부딪히고 있다면 이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을 찾는 첫걸음입니다.
가족을 ‘주님의 뜻대로’ 사랑하려면 ‘계산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작은 계산으로 가족을 대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잘 키운 부모’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남편의 후광을 얻고 싶어 합니다. 아내의 덕을 보고 싶어 합니다. 가족은 보험이 아니건만 그런 무의식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형제들이 왜 찾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도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자고 하셨습니다. 내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법으로 ‘가족 사랑’을 실천하자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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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애정은 사람을 눈멀게 합니다. 사랑하고 있는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의 앞날을 위하여 종교를 바꿔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인의 마음을 잡으려고 범죄에 뛰어드는 것도 더 이상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더 많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눈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방법대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마찰이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그분의 뜻 안에 있어야 인생의 힘이 되고 아름다움이 됩니다. 주님의 뜻을 벗어나면 맹목적인 사랑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스러운 자식이 고통의 원인으로 바뀌고, 남편과 아내가 인생의 멍에가 된 가정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단란했으나 살아가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원인은 단순합니다. 서로가 자기 방법대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공통분모인 주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부모다울 때 힘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역시 조화를 이룰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살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제대로 지키는 것도 덕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지속적인 노력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오키나와섬 북쪽에 있는 오기미 마을은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세계 최고의 장수촌’으로 인정받아 1993년 ‘일본 제일 장수 선언촌’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선언비에는 “80살은 사라 와라비(오키나와 어로 어린아이라는 뜻)이며, 90살에 저승사자가 데리러 오면 100살까지 기다리라고 돌려보내라.”라는 오키나와의 옛 속담이 쓰여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곳 주민들의 장수비결을 찾기 위해 그들의 생활 법칙을 연구했습니다. 연구 결과, ‘아침에 눈을 뜨는 이유’를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목적의식, 다시 말해 사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목적의식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길과 연관이 있습니다. 목적의식이 있으면 목표 지향성이 생기게 됩니다. 이는 어려움에 직면해도 포기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지요. 나 자신에게 목표를 달성할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사라지게 되면 목적의식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면서 건강한 삶도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89세의 나이에도 현역 모델로 왕성히 활동하는 카르멘 델로피체(Carmen Dell`Orefice)의 말이 생각납니다.
“나이가 들어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사라져서 나이가 드는 것이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아들의 죽음을 직접 당신 품으로 안으셔야 할 때까지 믿음을 놓고 의심하고 부정할 수도 있는 수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성모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실행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우리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목적의식을 가지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의 명언: 지금 당신이 무엇을 못 가졌는지가 아니라 당신이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떻게 변화되시겠습니까?
어느 날, 딸이 엄마를 찾아와서 나빠진 경제 사정으로 힘든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합니다. 묵묵히 들어주다가 엄마는 딸을 주방으로 데려가서 세 개의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는 것입니다. 첫 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두 번째 냄비에는 달걀을, 세 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냄비 속의 세 가지는 모두 끓는 물이라는 역경을 만났어. 단단했던 당근은 한없이 부드럽고 약해졌지. 깨지기 쉬운 달걀은 끓는 물을 견디며 스스로 단단해졌어. 마지막으로 커피는 끓는 물 자체를 변화시켰단다. 힘들지? 너는 지금 당근으로도, 달걀로도, 커피로도 변화될 수 있단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방법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은 스스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럽고 약해지든, 단단해지든, 아니면 주위 전체를 변화시키든 스스로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떤 변화 없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 앞에 또 다시 마리아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브리엘 천사가 아기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을 알린 수태고지 사건은 마리아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충격적인 대사건이었습니다. 사건 당시 마리아는 오늘 날로 치면 중학생 나이였습니다.
수태고지 사건은 아직 어린 시골 소녀,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했던 마리아에게 있어 감당하기 벅찬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로 그녀가 얼마나 당혹스러워했는지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자 영광스런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신 마리아였지만, 당장 마리아 앞에 펼쳐진 상황은 참으로 난감하고 비호의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리아는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출산후 8일째 되는 날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갔습니다.
정결 예식 때에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쳐야 했는데, 그 가격이 상당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들은 어린 양 대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두마리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어린 양 대신 비둘기를 바친걸 봐서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크고 위대하신 주님께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작고 가난한 마리아를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의 가장 첫째 가는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어린데다, 못배웠지, 가난하지, 보통 사람들 눈에 백번 깨어나도 이해못할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혼전 잉태 오명까지 뒤집어 쓴 마리아였습니다. 이토록 보잘 것 없었던 시골 소녀였지만, 지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인이자 성인 중의 대성인,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인류의 어머니로 자기매김하고 계십니다.
수태고지 복음을 천천히 묵상하다보니 마리아께서 크게 성공하신 비결이 있더군요. 주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보낸 메시지 앞에 그녀가 보인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몹시 놀라워하면서도 천사의 인사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무 생각도 개념도 없는 철부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렸지만,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 앞에 나름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신비 앞에서 나름 이해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의구심을 솔직히 표현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마리아는 절대로 어수룩하거나 어리버리하지 않았습니다.
의심스런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따지는 당차고 야무진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의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건전한 의심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의구심에 참으로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는 아무런 인간적 고민이나 갈등도 없이, 본인의 의지적 결단도 없이, 그저 힘있는 존재가 시키는대로 응답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거듭나기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고민은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동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셨던 마리아께서 예수님 거처로 찾아갔습니다. 뜻밖에도 예수님은 밖에 한번 나와보지도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49절)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 앞에 또 다시 마리아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그녀의 신앙이 성장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마리아의 의문과 고민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위대한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쥐어졌습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우리는 비록 나약하고 무력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할 때, 하느님 권능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강건해집니다. 그분과 함께 할 때 불가능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어리고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던 나자렛 산골 소녀 마리아가 위대해진 것은, 그분이 찾아오셨을 때 가장 진지하게, 가장 겸손하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 부단히 의심했고 또한 순종했습니다. 틈만 나면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가 하느님의 어머니였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거푸집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세계적은 베스트셀러입니다. 기요사키는 운이 좋은지, 나쁜지 두 아빠 밑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책 제목대로 한 아버지는 가난했고 한 아버지는 부자였습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진짜 아빠는 박사 학위는 가졌지만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의 아빠는 고등학교도 끝내지 않았지만 부자였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기요사키는 두 아빠에게서 각기 다른 부자가 되는 법에 대한 조언을 듣습니다. 가난한 아빠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취직하여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부자 아빠는 사람이 돈을 위해 일해서는 안 되고 돈이 자신을 위해 일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돈이 돈을 벌게 해야 한다는 마인드입니다.
좋은 직업을 가진 진짜 아빠는 은퇴 후에도 가난하게 살다가 돌아가십니다. 그런데 부자 아빠는 하와이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기요사키는 어떤 아빠를 따르기로 결심했을까요? 기요사키는 부자 아빠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물론 가난한 아빠는 매우 섭섭해 했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기요사키는 부자 아빠를 따라서 많은 돈을 버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자녀는 정확히 자신이 부모라고 믿는 사람의 크기만큼 자랍니다. 사람은 스스로 변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다만 닮고 싶은 사람이 그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종을 만들 때 거푸집 먼저 만들고 쇠를 녹인 물을 그 거푸집 속에 쏟습니다. 그러면 그 거푸집만한 종이 탄생됩니다. 부모가 딱 그 거푸집의 역할을 합니다. 자녀는 어떤 모양으로 성장하고 싶은가에 따라 부모를 결정합니다. 자녀가 크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커져야합니다.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성모님만큼 크게 되신 분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낳았으니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성모님만 꼭 붙들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으셨을까요? 성모님의 부모님의 역할이 매우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자헌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은 3살 때 성전에서 봉헌되어 요셉과 결혼하기 전까지 성전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아기를 임신하기 어려운 나이에 기적적으로 마리아를 잉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리아가 자신들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부모가 된 것에 대해 만족하고 3년이나 그 부모노릇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성전에서는 아이 때부터 동정녀들을 모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걷고 의사표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안나와 요아킴은 찢어지는 마음으로 예쁜 딸을 성전에 봉헌한 것입니다.
만약 안나와 요아킴이 마리아를 직접 키웠다면 어땠을까요? 행복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보통의 아이들처럼 부모의 뜻을 따라 열심히 공부하며 일하며 시집갈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쩌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에 부적절한 환경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하게 만든 큰 힘은 바로 부모님이 마리아를 자신의 자녀가 아닌 하느님 것으로 봉헌한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나자렛의 작은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는 집과 같아서 아이들은 부모의 집에 자신의 크기를 맞춥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나자렛의 집에서 자랐다면 인간으로서는 훌륭하게 자랐겠지만 하느님의 집에서 자람으로써 하느님만큼 크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책 선전을 좀 하자면 일주일 정도 뒤에 출판될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 개정판에는 어떻게 부모가 유태인들보다 더 큰 자존감으로 자녀를 키울 수 있는지를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해 놓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모가 자신들의 지위를 포기하고 참 부모가 하느님임을 알려주고 믿게 하는 것이 자녀 교육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머리가 좋아서 특출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창조자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자녀를 하느님의 것으로 내어놓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이라는 자존감이 결국엔 그 자녀를 성모 마리아 처럼 역사에 길이 남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자존감은 행복과도 비례하는데 그 자존감은 자신이 부모라 믿는 대상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성모 마리아의 부모처럼 자녀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 봉헌하여 자녀가 애초부터 하느님의 것이었음을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성전에 봉헌하는 목적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우리에게 ‘천자문’의 서체를 전해준 한석봉의 이야기입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서체를 배운 한석봉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온 걸 기뻐하면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나는 평생 떡을 만들어 팔아왔단다. 내가 서예를 배웠다니 우리 서로의 실력을 겨루어보자. 네가 나의 떡 써는 실력보다 글을 더 잘 쓰면 나는 너를 진정한 서예가로 인정하겠다.’ 한석봉은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벼루와 붓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색다른 제안을 추가하였습니다. ‘나는 불이 없는 데서도 떡을 썰어왔다. 그러니 불을 끄고 해보자.’ 한석봉은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어둠 속에서도 어머니가 썰었던 떡은 모두 한결같이 똑같은 크기였습니다. 한석봉의 글은 엉망이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이 반가웠지만, 어머니는 다시 공부하고 오라고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한석봉은 더 노력하고, 공부하여 빼어난 서체를 우리에게 남겨 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일본강점기에 태어나셨고, 한국전쟁을 겪으셨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깊이는 신학을 배운 저보다 더 깊으셨습니다. 이기적인 저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어머니는 영신수련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영신수련의 핵심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기도는 신학을 배운 저보다 훨씬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도 가족을 위해서, 외국에 있는 저를 위해서 9일 기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에는 늘 묵주가 있었습니다. 전교도 신학을 배운 저보다 더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대녀는 수십 명이 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대녀들은 어머니와 꾸준히 영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도 가끔 강의하지만, 어머니의 열정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해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으로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틀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틀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누가 ‘내 형제요 어머니인가?’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병원에서 채혈을 위해 대기하다가 주변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늙은 노모가 어찌나 큰 목소리로 말을 하는지 모든 이의 시선과 청각이 집중되고 있었다. 노모는 “자식한테 한푼도 주지마라” 는 말을 여러번 하고 있었다.
채혈이 끝나고 자리를 옮겼다. 지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조금 전의 그 노모가 물건을 살려고 상점에 들어왔다. 주인은 노모에게 “현금 영수증 해 드릴까요? 하고 묻자, 노모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나 그년놈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었어요. 주민등록과 이름까지 완전히 바꿔서 재산도 물려주지 않을겁니다.” 노모는 나와 지인 사이를 파고 들어 길게 늘어진 산통깨진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노모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귀를 열고 경청하는 자세로 들어주었다. 아야기는 길게 늘어졌고 복잡한 집안사부터 자식과의 소원한 관계, 자식의 배은망덕, 남편과의 이혼, 보험사기, 자살극, 등등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참을 지났을까 노모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나를 바라보며 몇번이나 반복하며 둘어주어 고맙다고 했다.
뒤틀린 가족관계, 상심함, 답답한 마음 달래려 노모는 이야기 대상을 병원 곳곳에서 찾았고, 드디어 나를 찾았나 보다. 푸념같은 푸념을 나에게 했고, 나는 끝까지 들어 주었으니 무척이나 감사했던 모양이다. 오랫동안 들어주어 미안하다며 덕분에 좀 속이 시원하게 풀렸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나는 노모와 아들, 딸의 관계성이 심각하게 망가졌음을 읽었다. 다른 집들은 온전할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많은 가정도 그럴 것이다. 노모가 집 밖에서 상심의 해소를 이런 식으로 풀어가고 있으니 답답함이 이어졌다. 노모의 이야기는 망가진 가족간의 관계성이 복원되어 건강한 가정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속마음까지 읽었다.
예수님은 그런 상심한 사람들 속에 계시다. 수많운 사람들의 망가진 내면, 그리고 관계가 회복되고 복원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로 예수님 주변에 가득했다. 아무도 관심이 없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전혀 없고 그런 속에 예수님께서 계신다. 그런데 방해꾼이 나타났다.
“밖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기다립니다.” 그 소리는 예수님과의 친교를 이루고 복원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껸지듯 그런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예수님의 위치는 관계의 회복을 바라며 친교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들과의 틈새를 갈라놓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는 곳이 아니다. 관계성을 잘 이루고 사는 사람들은 그 반대의 사람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에 관계의 판을 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9-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12, 49)
곽승룡 비오 신부님
사람들 보다 친밀한 관계가 가족들이다. 그런데 갈라진 혼인과 나뉜 가정 때문에 서로 하나가 되는 가족의 친밀함도 그렇게 사람들에게는 많이 해당되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9)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면, 우리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과 함께 또한 하느님의 영을 지닌 모든 이들과 더불어 우리 안에 신적인 부모님이 자란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인 듯싶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서로서로 하느님 안에 아버지, 어머니, 형제가 된다. 이처럼 영적으로 하나 되는 일치로 이뤄진 부모는 혈연의 부모이면서 동시 초자연적인 영적인 부모로 나타난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12,49)
하느님가족 될 시간이 지금입니다.
이기정 시도 요한 신부님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47~50)”
우린 모두 누군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고독하겐 살기 힘들죠.
짧은 세상 인생도 소속감 없이 못 사는데 영원살이는 더더구나 그렇죠!
이 영원살이 때에 소속관계 지금 만들어야지 죽어 만들 수는 없습니다.
세상서 미리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가족 돼 있어야 영원히 지속됩니다.
목숨 자유 존엄은 하늘 하느님께 받은 선물인데 세상살이에 다 쓰다뇨?
목숨가치 자유가치 존엄가치 잘 써서 하느님가족 될 시간이 지금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살다 가신 25세 청년 김대건신부 세계기념인물 선정됐죠.
목숨 자유 존엄성을 세상살이에 다써버리면 죽어 천국귀향 절대불가죠!
하느님의 가족이 되려면?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축일은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성당의 축성을 기념하는 이 날,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히 내리신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바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가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봉헌하였다고 한다. 세 살 된 마리아가 선전으로 올라갈 때, 계단에는 성모님의 발자국 마다 장미가 피어났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되돌아오는 악령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는 선한 영 일곱과 악한 영 일곱이 있다. 선한 영은 지혜, 분별, 경륜, 용맹, 지식, 경건, 하느님을 두려워함의 영이며, 악한 영은 어리석음, 오류, 무모함, 비겁, 무지, 불경과 하느님을 두려워함과 반대되는 교만의 영이다.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45절)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반박하기 위해, 악마는 교활하게, 예수님의 육에 따른 친척들을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그 친척들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 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 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47절) 이 말은 인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며, 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악마인 그 자를 보시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48절)고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49절)고 하신다. 즉 그분은 순종하는 이들을 가리키신다. 순종하는 친족관계로 당신과 맺어진 이들에게 가족관계에 따른 모든 이름을 붙인다.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신앙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바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주님을 낳아, 듣는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의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생겨나도록 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셨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시다. 그분의 어머니이신 것은 그 진리를 말씀을 실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를 닮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뜻>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이 말씀에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나의 참 가족이 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나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도대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무엇을 실행해야 하는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바라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래서 마침내 구원받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하느님 뜻’의 첫 번째 실행입니다.
두 번째 실행은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실행은 똑같이 중요한 일이고,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라는 말은 구분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똑같이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똑같이 실행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는 것을 ‘사랑 실천’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남이야 구원을 받든지 말든지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과 태도는 사랑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또 “나는 죄가 너무 커서 구원을 못 받겠지만(못 받더라도) 네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말은 말 자체가 모순되는 말입니다.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남의 구원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흙탕물로 흙탕물을 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남의 구원을 도와주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최선을 다하는 법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이들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신 분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은, “하느님의 뜻이 저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종처럼 헌신하겠습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마치 종이 주인의 뜻을 실행하듯이 주님의 뜻을 실행하겠습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원’이라는 당신의 뜻이 마리아를 통해서 실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느님의 그 뜻에 응답했고, 순종했고, 협력했습니다.
(전 생애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생애였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성모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분이 아닐까?”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분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사람도 없고, 태어나기 전부터 구원이 예정되어 있었던 사람도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주신 은총에 능동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즉 ‘응답의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함으로써 그 은총의 열매를 맺으신 분입니다.
(성모님을 본받자고 말하는 것은, 그 응답, 순종, 노력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고 믿고 있는데, 성모 마리아는 당신 자신의 구원을 위한 노력을 바탕으로 해서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뜻, 또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꼭 필요한가? 예수님 없이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은가?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혹시라도,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는 대답 외에는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살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있어서도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 나오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라는 성모님의 말씀은,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고, 예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행하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종합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내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을 완벽하게 ‘삶으로써’ 실행하는 사람이 곧 나의 참 가족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특별한 기념일을 맞이해서 그동안 루카 복음의 말씀을 차곡차곡 들추어 만나던 흐름이 잠시 끊기었습니다. 어쩌면 끊기었다기보다 말씀께서 어머니의 기념일을 맞아 잠시 그분께 길을 내어드렸다고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오늘은 마리아께서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제1독서를 먼저 보겠습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즈카 2,14).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위로하십니다. 버려졌던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어 옛 영화를 되찾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개인 차원으로도, 공동체적 차원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신부인 예루살렘일 수도 있고, 우리가 모여 이룬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일 수도 있습니다.
"한가운데"!
중심을 말합니다. 사람은 무엇을(누구를) 중심으로 사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방식이 크게 달라집니다. 자기 내면에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사는지도 이 중심이 좌우하지요. 하느님께서 그 한가운데에 들어와 머무르시겠답니다. 우리 존재를 관통해 들어오셔서 차지하시겠다는 뜻이지요.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즈카 2,17).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외치던 목소리는 이제 침묵을 명합니다. 오시는 그분을 맞는 영혼에게 지금 필요한 건 고요입니다. 개인이건 공동체건 주님께서 존재 가장 깊은 곳을 뚫고 들어오시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더 이상 구구절절 변명이나 설명이 필요없는 신비입니다. 이천 년 전 주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몸과 영혼을 관통해 들어와 한가운데에 자리하시도록 터를 내어드리셨지요.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허용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이 신비로운 순간, 하느님의 뜻, 말씀께서 그분 안에 심겨지셨지요. 마리아는 이렇게 존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열 달은 몸으로, 나머지 시간은 마음으로 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관통과 현존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존재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으신 순간, 그도 그분 심장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하디 귀한 신부가 되어 그분을 사로잡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꽂혀 서로의 한가운데를, 중심을 차지합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마태 12,4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기다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요.
"밖에"
분명 공간적으로는 예수님과 제자들 무리에서 소외된 자리입니다. 육으로 맺어진 가족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씀을 듣는 이들 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그분을 만나고자 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
이는 물리적인 안과 밖을 초월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밖에 계시지만 하느님 한가운데에 자리하신 마리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영과 육을 통째로 하느님과 그분 뜻에 바치신 분이니까요.
성모님의 봉헌일에 우리 각자의 봉헌을 떠올려 봅시다. 교회 제도 안의 공적 신분으로 자신을 봉헌한 이도 있고, 제도 밖에서 주님과 자기만 아는 봉헌으로 스스로를 묶은 이도 있을 겁니다. 제도적으로야 안과 밖이 분명하지만, 봉헌의 자취는 그 영혼 한가운데에 주님께서 거하심으로 새겨집니다. 기준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입니다.
주님께서 존재 한가운데로 들어오시도록 허용하고, 자기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거룩한 처소로 살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귀한 봉헌을 축하드립니다.
더 깊이 알고 실천하자<마태오,12/46-5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예모다워야 하고 상호간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잘안다고 예모를 잃고 버릇없이 말하고 행동하면 가까운 것 같아도 서로 사이가 멀어지고 원수가 된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 한 것 같이 경고 망동한 해위는 서로 간격을 멀리하게 된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부모 형제보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더 가깝다는 말씀이 아니고 아무리 친한 사이도 가추어야 할 덕을 가추라 하심입니다.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인자하고 자비롭고 성실하고 거룩하고 인간괸계를 덕스럽게 사심으로 모든 이의 어머니 되시어 사랑을 받습니다 . 주님의 어머니 되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모든 이의 참 어머니 되셨습니다.
사회적 지도자와의 관계를 가질수록 그 품위를 나타내야지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지위가 오를수록 법을 지키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온유하고 순수하고 만인을 위하여 나눔으로 사랑을 받듯이 우리는 가난한자에 대한 배려가 요구되며 명성이 높은 수록 겸손하고 자신을 나추고 모든 이와 함께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친교가 이루어지고 모든 이 안에 모든 이가 됩니다.
서로 관계가 깊을수록 더 깊이 상대를 알고 예모 다워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조금 알고 관계있다고 한부로 반말을 하거나 명령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면 관계는 균열이 일어나고 감당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창세기 카인은 시기 질투로 동생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 쫒겨 났고 오늘도 형제의 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제적 문제 재산 분할 문제로 부자들의 싸움을 보고듣고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 예모를 잊어버릴 때 서로 사랑과 존경을 주지 못하고 갈등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오래전에 부부가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사는 가정의 내면을 보니 서로 존대 말 회가 났을 때 더 존경의 말을하는 것을 듣고 보니 저는 그현실을 보고 가까울수록 말과 행동이 예모를 가추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사랑과 덕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느님을 찾고 알고 섬기는 사람은 가정 안에 더 행복하고 성스러운 가정으로 이어 갈수 있습니다. 한 아버지 하느님을 모시고 그 뜻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참 어머니요 형제여 자매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행보한 가정을 이루도록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함승수 신부님
사회 경제학 용어중에 ‘리콜’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어떤 기업에서 판매한 제품에 결함이 있을 때 제조업체가 그 제품을 회수해 점검한 후, 수리나 교환을 해주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런 ‘리콜’은 그 주도적 시행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자발적 리콜’과 ‘강제리콜’로 나뉩니다. ‘자발적 리콜’은 제조업체가 제품상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스스로’ 리콜을 실시하는 것으로, 자사의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에게 서신 및 기타 방법으로 문제점을 알리고 물품을 거둬들입니다. 2016년 삼성전자가 야심차게 내놓았던 최신 스마트폰이 배터리에 결함이 있음이 발견되어 대대적인 리콜과 보상을 실시했던 적이 있지요. 이로 인해 당장은 금전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지만,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과감하게 시정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통해 기업에 대한 호감도와 신뢰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이에비해 ‘강제적 리콜’은 정부가 먼저 결함을 파악하고 제조업체가 리콜을 하도록 ‘강제로’ 지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소비자들은 정부마저 문제점을 알고 있는데 제조업체가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 그 업체에 불신을 갖게 됩니다. 또한 업체가 문제를 숨기고 은폐하거나 ‘내가 뭘 잘못했느냐’는 적반하장식의 태도로 나오며 소비자를 기만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제품 하나의 문제로 끝날 일이 기업 전체의 이미지 추락이라는 큰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지요. 그렇기에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하는 ‘리콜’은 버티고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시행하는 것보다, 가능한 신속하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제로, 수동적으로 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더 좋은 예는 이 외에도 많습니다. 주님께 내가 가진 것과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봉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일’입니다. 교회에 전해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의 양친인 요아킴과 안나는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던 자신들에게 딸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리아의 나이 3세 되던 해에 그녀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하느님께 봉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일은 세살배기 어린아이였던 마리아가 평생토록 동정을 간직하고 살 것과 자기의 영혼과 육신을 하느님께 바칠 것을 스스로의 뜻과 의지로, 즉 ‘자발적으로’ 결정하셨다는 점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의 그런 모습을 본받고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지내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봉헌하는 사람은 신앙생활도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마지못해’ 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는 일이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되기에 ‘기꺼이’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의 참 가족’입니다. 말로만 ‘하느님의 가족’이어서는 그분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행동으로, 삶으로도 그분의 참된 가족이 되어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주는 참된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김성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Presentation of Mary)은 매우 오래된 이 기념일입니다. ‘야고보의 원복음’으로 알려진 외경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신심 깊은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마리아는 3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어 다른 소녀들과 함께 거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동방에서는 6세기에 이미 이 사건을 기념하였고, 13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이 축일에 관해 들었고 아비뇽에서 11월 21일을 기념일로 정하였습니다.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는 기념일을 보편 교회에 확대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념일의 주제는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 온전히 봉헌함을 의미합니다.
‘야고보 원복음’으로 알려져 있는 이 고대 문헌은 예수님의 유년기를 다루는 이른바 ’유년기 복음’ 외경 그룹에 속합니다. 이 문헌들은 경전 복음서(정경으로 인정된 4복음서)가 여러 가지 면에서 열심한 신자들의 더 알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기에 이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습니다.
‘야고보 원복음’의 주요 관심사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로서, 복음서들에 충분하게 묘사되지 않은 그분 생애의 여러 부분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작품의 내용을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유하고 신심 깊으나 자식이 없어 괴로워하는 요아킴과 안나(바로 여기서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성모님의 부모 이름이 등장한다)에게 신비로운 방식으로 마리아를 점지해 주셨다. 불임의 여인 안나는 마치 한나와도 같이(1사무 1장 참조) 하느님께 신세를 한탄하며 간절한 청원의 기도를 바치고, 마침내 천사가 나타나 안나의 기도가 들어 허락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리하여 요아킴과 안나는 마리아를 얻게 되고, 기쁨에 넘친 이들은 마리아를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그래서 마리아는 세 살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살게 되고, 그곳에서 천사가 그를 양육하였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할 마리아의 몸 그 자체가 신령한 성전이므로, 그분이 성전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것은 지당한 일이라 하겠다. 열두 살이 된 마리아에게서 성숙한 여인의 표징이 생기게 되었을 때 대 사제 즈가리야는 천사의 명에 따라 온 나라의 홀아비들로 하여금 각자 지팡이를 들고 성전에 모이게 하였다. 그때 요셉의 지팡이에서 비둘기가 튀어나와 그의 머리 위에 앉았다. 이리하여 요셉이 동정녀 마리아의 보호자요 배우자로 간택되었다. 당시 요셉에게는 이미 장성한 아들들이 있었다. 이후 마리아가 다른 동정녀들과 함께 성전의 장막을 짰다는 이야기와 함께,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전갈을 받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은 대체로 루가복음의 묘사와 비슷하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나서 임신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요셉은 오랜 기간 이어진 다른 지방의 토목 공사 작업에서 돌아와 사태를 보고 몹시 근심하고 당황하였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천사의 이야기로 안심을 얻어 계속 마리아를 보호하였다. 이 후 요셉은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는 도중에 해산의 기미를 보이는 마리아를 베들레헴 근방 동굴에 데려다 놓고 산파를 찾으러 나섰다. 산파는 아기의 놀라운 탄생을 요셉과 함께 체험하며, 아기를 낳은 뒤에도 마리아는 여전히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살로메라는 이름의 다른 산파는 이 이야기를 의심하며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토마처럼 손으로 직접 확인하다가 손이 말라 비틀어지는 횡액을 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천사의 말에 따라 살로메가 손을 뻗어 태어나신 아기를 만졌을 때 즉시 치유되었다. ‘야고보 원복음’은 헤로데에 의한 즈가리야의 순교 이야기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자신을 찾아온 성모님과 형제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답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만 들으면 성모님을 배척하는 듯이 들리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이야말로 성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응답으로 인류구원의 초석이 되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통하여 아들 성자 예수를 기르고 사랑하고 기다리고 따르며 상경을 받아 마땅한 모범을 보여주셨음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우리의 어머님이기도 한 성모님을 오늘 다시 묵상하며 그분께 우리 나약함을 주님께서 보듬어 주시기를 전구하는 날이 되시길 희망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순례 여정중인 주님의 참 좋은 교회공동체 -형제애, 전우애, 학우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로마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 동시에 축일로 지냅니다. 이 축일은 외경 야고보 원복음서에서 유래하며 요아킴과 안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딸 마리아를 낳은 후 3세 정도 되던 나이에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다 합니다.
오늘 축일에 잘 어울리는 복음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리아 성모님을 모시고 주님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금 태국을 사목방문중이며 이어 일본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교황님은 사목방문을 떠나기에 앞서 로마의 성모 마리아 성전에 들려 기도하셨고 방문후 귀국하시면 같은 성전에 들려 기도하시는 것이 관례라 합니다. 떠나실 때나 도착하실 때 마리아 어머니의 전구를 청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교회가정공동체에서 마리아 어머님의 위상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문득 예전 할머니를 모시고 사시던 큰 숙부님이 아침 저녁 할머니께 절하며 문안드리던 모습이, 또 출타하실 때나 귀가 하셨을 때 할머니께 절하며 인사드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효자였던 큰 숙부님처럼, 교황님도 참 효성스런 마리아 어머니의 아드님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교회가정공동체에서 마리아 어머님의 위상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순례여정중인 주님의 참 좋은 교회공동체’입니다. 말씀과 독서의 배치도 오늘 축일은 물론 강론 주제에도 잘 어울립니다. 제1독서 즈카르야서의 ‘딸 시온’은 그대로 마리아 성모님을, 또 주님의 참 좋은 교회공동체인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듯 하여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즈카르야의 예언은 마침내 실현되어, 오늘 우리는 주님을 중심으로한 참 좋은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한가운데 영원히 머무르시는 파스카의 주님은 우리 공동체의 살아 있는 중심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공동체로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세차원의 공동체를 생각했습니다. 이와 관련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시중 한연을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형제(兄弟)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행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참 좋은 교회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주님의 집, 수도공동체입니다. 수도형제들뿐 아니라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주님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그대로 오늘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참으로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항구히, 충실히 시종여일 실행할 때 비로소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고 서로간에는 형제자매들이 되며 상호간에는 깊은 형제애가 형성됨을 봅니다. 특히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성체를 모실 때 은혜로이 깨닫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형제에 앞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주님의 전사입니다. 주님의 집, 교회공동체는 영적 전장戰場이요 우리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역시 죽어야 제대인 평생 영적전쟁중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물론 주님의 전사는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전사로서의 필수수행이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더불어의 순례여정중인 참 좋은 교회공동체에 끊임없는 기도와 항구하고 간절한 믿음은 영적전쟁에 절대적 영적 전력戰力이 됩니다. 더불어 주님의 전우들간에 형성되는 영적 전우애입니다.
이어 주님의 학인입니다. 주님의 형제이자 주님의 전우만 아니라 주님의 학인으로서 우리의 신원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잘 알아야 실행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우리 주님의 학인들 간에 형성되는 학우애입니다.
평생 죽어야 졸업인 주님의 학교에 몸담고 살아가는 평생 주님의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하여 죽을 때까지 말씀을 공부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며, 이와 더불어 강조되는 것이 렉시오 디비나의 수행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경청과 겸손이 주님 학인의 필수적 자질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주님을 중심으로 주님의 형제로 교회가정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버지를, 주님이신 예수님을 항구히 열렬히 사랑할 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에도 더욱 힘을 쏟을 것이며 더불어 형제애는 물론 전우애, 학우애도 날로 끊임없이 성장 성숙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애, 전우애. 학우애가 조화되고 균형잡힌 주님의 참 교회 공동체는 얼마나 아름답고 바람직하겠는지요.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형제애. 전우애, 학우애를 북돋아 주시며, 주님의 자랑스러운 형제로, 전사로, 학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성모님은 신덕의 힘으로 믿고 신덕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Sermo 25,7-8: PL 46,937-93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하신 다음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나를 보내 주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신덕의 힘으로 믿으시고 신덕으로 잉태하시며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낳게 해주실 여인으로 간택되시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창조되시기 전 그리스도께서 창조해 주신 동정 마리아께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는 분명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모님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신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신 것은 더 큰 영예이고 더 큰 행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스승을 낳으시기 전 그분을 모태에 모시고 계셨기 때문에 정말 복되셨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정말인지 한번 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군중과 함께 두루 다니시고 신적 기적을 행하실 때 한 번은 어떤 여인으로부터 다음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행복”은 육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마리아는 당신 태중에 모신 육신보다 마음에 지닌 진리를 더 열심히 간직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 태중에서 육신이십니다. 그러나 태중에 있는 것보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거룩하시고 마리아는 복되십니다. 그러나 동정 마리아보다 교회는 더 그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는 교회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부분, 뛰어난 부분, 엄위로써 다른 모든 지체들보다 더 고귀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온 몸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지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몸이 한 지체라면 물론 그 한 지체보다 그 온 몸은 더 보배롭습니다. 주님은 머리이시고 그리스도의 전체는 머리와 몸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신적인 머리를 모시고 있고 우리의 머리로 하느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잘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지체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인지를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형제들이여, 보십시오. 여기에서 형제 그리고 자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산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한 분이셨지만 당신의 자비심으로 홀로 계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 모두 아버지의 상속자, 그리고 당신과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8.50)
김성민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성모님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전해져 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로 간택된 분이셨기 때문에 원죄에도 물들지 않으셨고,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또한 하느님의 어머니로써,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로써 한 생을 사시고, 하늘로 들어 올려지시는 영예을 누리셨습니다.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우리 삶의 모범이요 모델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간택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의 온 삶을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늘 기억하고, 그 뜻에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매순간 그렇게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부족한 모습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고, 늘 오늘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제의 첫째도 아니고, 내일의 첫째도 아니요, 그리스도인에게는 늘 오늘의 첫째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늘 오늘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 바로 첫째입니다.
히느님께 봉헌되신 성모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성모님처럼, 성모님과 함께, 겸손하게 그리고 기쁘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교리 교육은 말씀의 선포이고 언제나 그 말씀을 중심으로 합니다. 또한 적절한 환경과 호소력 있는 표현이 필요하고, 생생한 상징을 사용하고 더 폭넓은 성장 과정으로 들어가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66항)
<당신의 가족이 되어드릴게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제 힘내요
당신의 가족이
되어드릴게요
함께 함으로써
활짝 웃어요
당신의 가족이
되어드릴게요
보듬음으로써
실컷 울어요
당신의 가족이
되어드릴게요
닦음으로써
다시 일어나요
당신의 가족이
되어드릴게요
섬김으로써
편하게 말해요
당신의 가족이
되어드릴게요
들음으로써
맘껏 가져요
당신의 가족이
되어드릴게요
나눔으로써
늘 그렇게 있어요
당신의 가족이
되어드릴게요
살림으로써
제약의 의미
김효석 요셉 신부님
대신학교에는 면회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평일에는 오후 몇 시간으로 한정되고, 주일이라도 저녁 시간은 제외됩니다. 또 신학생들의 외출도 고학년들에게만 허락됩니다. 저녁 시간에는 외부와의 통화도 삼가며, 대침묵을 지키도록 규제합니다. 이는 일종의 인간관계의 단절을 초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제약엔 적극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머물라는 뜻입니다. 다양하고 활발한 인간관계가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우선 힘을 쏟아야 할 대상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바탕에 두지 않으면, 사목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소홀히 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사명은 인간적 애정을 넘어서야 하며, 때로는 그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오해를 감내해야 할 만큼 우선적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집중할 때, 오히려 세상일에도 더욱 의미 있게 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런 자세를 가르치시며,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십니다. 자신의 인간관계, 이해관계에만 매여 있는 사람은, 더 큰사람이 되기 힘듭니다. 신앙과 영성의 깊이는 얼마나 하느님께 충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나이가 들면서 정리해야 하는 관계가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반갑고 편안하고 도움이 되는 관계는 유지하되, 귀찮고 불편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를 끊으라는 취지의 이야기였습니다. 누구누구를 관계 안에 넣고 누구누구를 끊게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문득 나 자신은 누구에게서 포함이 되고 배제가 될까 하는 생각도 겸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화두를 던지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그러시고는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49-50절)
사람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몇 번째 사람일까? 내가 결정을 내릴 때, 주님의 뜻과 말씀을 몇 번째에 놓고 결정을 내리는가? 나는 몇 시간짜리 사람일까? 나는 주님과 하루 중 몇 시간 기도하고, 몇 시간 생각하고, 몇 시간 염두에 두는 관계일까? 나는 누구의 사람일까? 나는 주님의 사람인가? 악마의 사람인가? 아니면 나만의 사람일까? 늘 주님 사랑 안에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씀드리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습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사실 형제들과는 물론이고 부모자식간에도 원수처럼 지내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정을 가만히 살펴보자면 거의 공통적으로 그 가정이 갖고 있는 가치관 자체가 인간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공동체든지 그러한 인간적 욕심으로 치닫게 될 때 그 종말은 언제나 파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 씀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가치를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참된 친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가치가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친교를 살아가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아름다운 움직임'(마태오 12장 46~50)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아버지뜻을 실행하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도와 인내로 하루를 봉헌하며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모습!
동정마리아의 봉헌이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위한 예비였던 것처럼 ~
알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에 답답해하기보다 오늘 내 눈앞에 있는 일을 하는것이 봉헌의 삶을 제대로 사는것입니다.
억지로, 누가 시켜서 하는것은 힘이 들지만 스스로 찾아서 움직일때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적극적 봉헌은 주님 사랑받기에 충분!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당신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기다립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우리에게 봉헌의
참된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참된 봉헌의
길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봉헌의 삶은
활짝 열리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봉헌의 삶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봉헌의 삶이
가로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봉헌하는 삶은
서로를 살립니다.
봉헌하게 되는 삶은
서로를 새롭게합니다.
봉헌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내어드리는 삶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습니다.
서로를 풍요롭게
합니다.
늘 정직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거룩해지고
온전해지는
삶이 바로
봉헌입니다
봉헌으로
우리모두는
하나가 됩니다.
어렸을 때의 제 모습을 떠올려보면 숫기도 없고 또 자신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 역시 자신 있게 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누구에게 말을 거는 것 역시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지요. 소위 짝사랑이라는 것을 하게도 됩니다. 숫기 없는 저였지만 저 역시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음에 드는 아이가 생겨서 짝사랑도 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마디의 말도 걸어보지 못한 채 마음 앓이만 했습니다. 그 아이의 앞에만 서면 얼굴이 벌겋게 되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군요.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보려고 기타도 배워보았지만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친한 친구들에게도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친구들은 신학교까지 들어간 제가 이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사제로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 역시 성소라고 하면 성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우연히 옛날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벌써 30년 전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 속에는 제가 짝사랑을 했던 여자 아이가 있더군요. 사진 속의 이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패션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입고 있는 옷과 머리 모양 등이 왜 이렇게 어색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더군요. 또한 그렇게 예쁜 얼굴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마음을 두고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에 따라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변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녀의 기준 역시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계 역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동서양을 대표한다는 절세미인 양귀비, 클레오파트라가 지금의 미녀상과 비교하면 아주 볼품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판단이 무조건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화되는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변화지 않는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가족이 찾아오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은 혈연관계를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얼마나 잘 따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실행해 나갈 때,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서 차츰 벗어나 주님의 기준을 따르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 안에서 참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의 진정한 길은 순간순간을 낭비하지 않는 기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기적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되풀이되지 않습니다(마가렛 제임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소후원회 회원 분들과 의정부 한마음 청소년 수련장에서 피정을 하였습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을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신앙 때문에, 신앙 안에서 고통과 슬픔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신앙의 어머니들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이야기를 묵상하였습니다. 남편 황사영은 순교하였고, 정난주 마리아는 2살 된 아들과 제주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정난주 마리아는 관비가 되어서 유배를 갔기 때문에 2살 아들 황경한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제주도 최초의 신앙인이었던 정난주 마리아는 그 모든 슬픔을 가슴에 담고,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의 어머니 황 안나의 이야기를 묵상하였습니다. 함께 유학을 갔던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는 사제가 되어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아들 최방제 프란치스코는 먼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컷을 것입니다. 다른 두 아들까지도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황 안나는 오직 충실한 신앙으로 모든 것을 참아냈다고 합니다.
안중근 토마스의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의 이야기를 묵상하였습니다. 조성녀 마리아는 아들 안중근 토마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으니 즉 죽는 것이 영광이다.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게 말할 수 있으랴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조성녀 마리아 역시 신앙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어머니들을 묵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차가운 바다에 묻어야 했던 어머니들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그 무엇도 어머니들의 슬픔을 대신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다섯 분의 미수습자 가족들도 이젠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슴에 묻고 고인들을 위한 장례를 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유족들의 마음은 깊은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성모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입니다. 단지 그 모습만으로도 지극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묵주기도를 마치면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추석부터 몸이 많이 아프셨습니다. 한 평생 가족들을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방황하는 아들 때문에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보내셨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진 아들 때문에 늘 노심초사 하셨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의 길을 걷는 자식들을 위해서 매사에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셨고, 기도 중에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수호천사’입니다. 그분들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와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악기,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저를 선택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한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그럴 때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것 보다 아픈 것도 은총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가족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공동체-
기꺼운 봉헌을 통한 영원한 동행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께서 성령의 영감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부모는 자식을 낳으면 아들은 40일 만에, 딸은 80일 만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봉헌하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부모도 아기 마리아를 안고 봉헌 예식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념하는 성모 마리아 자헌은 부모에 의해 봉헌된 것과는 다른 봉헌입니다. 열심한 유대인들은, 남녀 구별 없이,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성전에서 살면서 봉사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나자레오”라 불렀습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성전에 데리고 가서 그렇게 살도록 봉헌하는 일도 있었지요.
이러한 봉헌된 삶은 부모가 자녀를 가지기 위해 서원을 한 경우, 또는 어려서부터 굳은 신앙을 자녀에게 심어주고, 하느님 공경을 몸소 익히며, 성전의 일을 돕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세 살 때에 자신의 원의로 스스로 성전 생활에 봉헌하셨다고 전해옵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부모님이 이미 봉헌한 약속에 따라, 세 살 때에 다른 소녀들과 함께 손에 등불을 들고 성전으로 인도됩니다. 마리아는 성전의 열다섯 층계를 올라가 대사제들이 일 년에 한 번 자리하는 지성소에 앉았다고 전해옵니다. 봉헌되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봉헌하신 것이지요.
우리도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시어 하느님 가까이 머물며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실행한 성모 마리아의 삶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성모님은 어떻게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셨을지 생각해봅니다. 그분은 말씀을 받아들이시고, 말씀을 되새기셨습니다. 그분의 봉헌의 뿌리와 힘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말씀을 들으셨을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철저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봉헌의 삶은 말씀을 따르는 삶임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봉헌은 물질을 봉헌하는 것도, 일시적으로 흉내만 내는 것일 수 없습니다. 봉헌은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진심어린 되돌림입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동행’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품고 그분과 함께 일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의 순례에 늘 함께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품은 임마누엘의 어머니로서 ‘영원의 봉헌’을 하신 것이지요.
오늘도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신 성모님을 본받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12,50) 주님의 참 형제 자매들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떠밀려 내놓은 삶이 아니라 기꺼이 주님께 내 삶을 되돌려드리는 참 봉헌의 날이길 기도합니다. 아프고 힘들고, 불의와 차별과 배척으로 고통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가 ‘영원한 동행’을 이어가야겠습니다.
최원석 님
요즘에는 논문 심사로 인해서 매주 화요일은 간이 많이 많이 쪼글어듭니다. 심사를 받는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에 일찍일어나서 성서묵상하고 그리고 이곳에 글을 올리고 나누는 것이 유일한 낙인데 내일은 심사때문에 금일 글을 올립니다. 기도 많이 해주세요. 천국과 지상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묵상하여보면 지상은 순혈주의가 우선인 사회이고 천국은 순혈주의 혹은 특권이 없다는 것이 천국의 사회이겠지요 예수님도 하느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그 말씀은 천국과 지상의 차이점은 우리는 하느님과 일대일의 관계라는 것이지요 모든것의 중심은 하느님이 계시고 모든것은 그분을 중심으로 움직여 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사는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서열이 있고 순혈주의가 있고 주님을 앞서는 것이 있는 것이지요 ..천상의 것에 꿈을 꾼다면 우리는 천국의 법칙에 맞도록 주님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밖에서 가족이 찾아왔다는 것은 지상의 인간 중심으로 보았을때와 천상의 것을 중심으로 했을 때와 충돌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시지요 모든것의 중심은 아버지 하느님의 것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요구하십니다. 중심은 아버지 하느님의 것이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어느순간이나 하느님과 주님을 앞설수 있는 것은 없어요 ..모든 피조물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묵묵히 매일 매일 바라보면서 나의 십자가의 길을 가야겠습니다. 아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모두는
은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은총을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봉헌에이르게됩니다.
봉헌은 우리의 삶을
의미있는 삶으로
바꾸어줍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삶은 끝없는 봉헌의
여정이었습니다.
마리아를 살게한 것은
분명 봉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봉헌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와 하느님 사랑은
더욱 깊어지는
실천이 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봉헌입니다.
우리 또한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 우리의
일상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메말라가는
우리의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봉헌은 가장 살아있는
실천의 빛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첫 시작도
가장 마지막도
봉헌이길 바랍니다.
가장 아름다운 은총은
우리자신의 봉헌입니다.
자동차 바퀴의 바깥 둘레에 끼워져 있는 고무를 ‘타이어(Tire)’라고 합니다. 원래 이 타이어의 정식 명칭은 러버 힐(Rubber Wheel)로, 고무바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타이어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자동차 부품 중에서 가장 피곤한(Tired) 곳이 타이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이어의 움직임이 가장 많기 때문에 보통 5만 Km 주행 후나 제조 후 4년 정도가 되면 타이어를 교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비사들은 이 타이어의 마모 상태를 보면 운전자가 어떻게 운전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를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 운전하는 차의 타이어는 아주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나 안전운전과 모범운전을 하는 사람들의 타이어는 일정하고 깨끗하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을 듣다가 문득 내 삶을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잘못된 운전으로 인해 형편없는 타이어의 상태를 만드는 것처럼, 잘못된 삶으로 이끌어서 내 몸의 상태를 형편없이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잘못된 운전이 타이어에 흔적이 모두 남는 것처럼, 우리 삶을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내 영혼에 그 흔적이 모두 남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죄로 물들수록 영혼이 피폐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어린 시절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억하는 날인 것이지요.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부모님이신 요아킴과 안나 성인은 성모님을 세 살 때에 성전에 봉헌했다고 하지요. 그때부터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봉헌된 몸으로 거룩한 삶을 사셨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원하는 모습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 자신의 영혼을 누구보다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를 부정하는 듯 이야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가리키면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신 것이지요. 정말로 어머니를 몰라보시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충실했고 또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모습처럼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라는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봉헌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셨던 성모님 기념일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을 통해 내 영혼에 나쁜 흔적이 아니라, 아름다운 흔적들이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 앞에는 많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무조건, 그냥, 무슨 일이 있어도(이창현).
자식 모르게 사는 보청기(‘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인터넷에 떠 있는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한 늙은 노인이 몇 년 동안 귀가 잘 안 들려서 고생을 하다가 의사를 찾았다. 의사는 노인에게 귓속에 쏙 들어가는 보청기를 주며, 사용해 보고 한달 후에 다시 찾아오시라고 했다.
한 달이 지나고 노인이 의사를 찾아왔다.
“어떠세요?”
“아주 잘 들립니다.”
“축하합니다, 가족 분들도 좋아하시죠?”
“우리 자식들에겐 이야기 안 했지요.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며 그냥 대화 내용이 저절로 들렸소. 그래서 그동안 유언장을 세 번이나 고쳤다오.”
우리는 누군가가 듣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면 때로는 부정적인 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소위 ‘뒷담화’라는 것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런데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모두 세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남에 대한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 사랑이 가득한 말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니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토요일에 대모산을 다녀왔습니다. 36년 만에 처음 만난 본당 후배도 있었습니다. 산행을 하면서 우리는 금세 학창시절로 돌아갔고, 지난 일들을 추억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오랜 시간 함께 하지 못했어도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깜빡 졸아서 종로 3가에서 내렸고, 길을 가다보니 광화문이었습니다. 길에는 양초를 파는 사람, 방석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유인물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당에서 동원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나왔습니다. 학생들, 어린아이들, 가족들, 연인들도 자리를 잡고 함께 했습니다. 부정과 불의를 몰아내려는 의지를 느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열망을 느꼈습니다. 시민들의 모임이 하나의 축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몰아내고, 쫓아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 모든 이들이 자유와 평등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꿈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권력을 이용해서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권력의 힘에 눌려서 제대로 된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진실을 외면하던 언론은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았던 수사기관은 양심과 정의에 따라서 공정한 수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세대, 이념, 종교라는 벽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입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이고, 누이이고, 어머니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리아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는 것입니다. 읽으면 성모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그분은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그분은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셨네.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당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돌보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그분의 자비 영원하리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삶의 기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끔 형제들과 면담하다 보면 아내를 ‘집사람’이라 일컫는 말마디가 신기했습니다. ‘왜 아내를 집사람이라 부르는가?’ 어제 어느 부부에게 고백성사를 주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아내는 집이자 집을 지키는 사람이구나!’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어제 방문했던 형제도 계속 아내 곁을 맴돌았고 그 아내가 흡사 집같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러니 집사람인 아내이자 어머니가 없는 집은 텅 빈 집같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자매님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그 형제의 아내인 자매에게 써드린 고백성사 처방전 말씀입니다. 집사람인 자매가 이렇게 살아야 집식구들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면초가같은 역경 속에서도 기적같이 살아가는 자매입니다. 삶이 힘들수록 이 말씀을 환영하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 기도해야, 감사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외치는 것도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왔을 때의 절망적 상황의 유다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딸 시온이 상징하는바 절망적 상황중에 있는 믿는 모든이들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날이 오늘입니다. 즈카르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어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살고 있는 오늘의 세상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중심 한가운데에 머무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진정 집사람은, 집주인은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일치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도 바로 이런 진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참가족’임을 깨달아 살 때 비로소 기쁨의 성가정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예수님은 반문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공동체 가족이 예수님의 참가족입니다. 그대로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 줍니다. 진정 예수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며 살 때 비로소 성가정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가 기적입니다. 온갖 시련과 역경중에도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기도의 공동체,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중심의 성가정 공동체로 끊임없이 성장, 성숙시켜 주십니다.
아멘.
말씀의 실행을 통한 봉헌의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충만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세 살 때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셨다고 전해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내놓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챙기는데 몰두할 때가 많지요. 그러나 성모님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먼저 성모님의 자헌(自獻)은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기 뜻이나 자기중심적 사고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느님을 뜻을 따라 봉헌된 것입니다. 계산된 기부나 봉헌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어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내놓은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다음으로 성모께서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자발적으로' 봉헌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바치신 것입니다. 그분은 말과 행동으로 전 생애 동안 하느님 뜻에 스스로 순명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나 관계에 매여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내놓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지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자발적인 봉헌은 참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그 말씀의 힘으로 일생 동안 충만한 봉헌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말씀이 되어 오신 구세주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이집트 피난의 고통을 받아들이셨으며, 나자렛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로 아드님을 돌보셨으며, 아드님의 갈릴래아 여정에 늘 말없이 동반하셨고 죽음에 이르는 수난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말씀을 실행하는 삶의 봉헌을 통하여 살아있는 말씀이 되시고, 예수님의 참 어머니가 되셨으며(마태 12,50)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은 말씀을 경청하고 그에 순응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전 여정에 늘 함께하며 모든 것을 견디고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기꺼이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놓음으로써 기쁨과 평화 가운데 머물러야겠습니다. 자신의 삶을 내놓고, 시간을 내놓고, 마음을 내놓는 것이 생명의 이치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가르쳐주는 사랑과 생명의 진리임을 상기해야겠지요. 이해타산하지 않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꺼이 봉헌할 때 주님께서는 그 봉헌의 정점에서 우리를 축성해주실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봉헌 없는 축성, 희생 없는 봉헌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순수하고 온전한 봉헌을 하도록 힘써야겠지요. 뿐만 아니라 봉헌은 정의 실천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인식하여 하느님의 뜻대로 바치고 나누는 것이 정의입니다.
오늘도 사랑의 결정체이자 정의의 실현이며 아름다운 기도인 내어놓음의 발걸음을 이어가야겠습니다. 나의 삶과 시간과 만남을 하느님께 기꺼이 되돌림으로써 말씀을 실행하는 축성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채비된 순종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오늘은 마리아가 자신을 봉헌하였다는 성모 자헌 축일입니다.
그런데 이 축일의 근거는 복음에 있지 않고 전승에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어렸을 때 그것도 어느 전승에는 세 살 때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저는 믿지 않고 여러분도 굳이 믿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싶으신 분은 물론 믿어도 되고 믿는 것이 좋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 살 때 당신을 봉헌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안 믿어도 되지만 언제인지는 우리가 모르지만 분명 당신을 봉헌하셨다는 것은 믿어야 하고 그 봉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라고 이 축일이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긴 전에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 전에 당신을 스스로 봉헌치 않으셨다면, 다시 말해서 먼저 스스로 봉헌치 않고 그래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면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을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머뭇거림이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수락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참된 순종은 준비된 순종이고, 완전하고 자유로운 순종도 준비된 순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에 망설임과 숙고의 시간을 거친 다음 순종하는 것도 훌륭한 순종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어떤 말씀이건 순종하겠다고 미리 자신을 준비시킨, 달리 말하면 채비된 순종이야말로 참되고 완전하고 자유로운 순종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초기 프란치스칸 형제들의 순종에 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순종을 매우 잘하는 이 기사들은 거룩한 순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순조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들은 명령을 수행할 채비를 차렸다.
그들은 명령 앞에서 좌지우지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모든 방해물을 치우고 명령받은 바를 서둘러 수행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도 하느님께서 어떤 말씀을 내리시건 순종하겠다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겠다고 자신을 봉헌했기에 말씀을 잉태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봉헌하지 않은 사람은 채비된 순종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봉헌이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고 자신을 내어주지 않은 사람은 순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인격적인 순종도 그러하지만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에 자신을 투신하는 사명적인 순종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기 싫은 일이나 소임이 내게 주어졌을 때 자신을 내어주려는 자세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즉시 그 말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건 장상의 말씀이건.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준비된 순종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준비된 순종을 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좋기 때문에 행복한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런 면에서 행복합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봉헌의 순종을 잘 살 수 있었고, 어떤 일이나 소임이 주어져도 기쁘고 즐겁게 최선을 다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나 소임은 그럴 수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몸의 고통을 주신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몸 상태를 주신대도 제가 잘 순종할 수 있을지.
그것은 모르겠고 이것이 사실 걱정이고 두려움입니다.
주님, 이런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나자렛의 마리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수도회의 종신서원식에 참석했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보통의 수도자들은 종신서원식 때 교회와 웃어른 앞에서 청빈, 순명, 정결 세 가지를 서원합니다. 그런데 그 수도회에서는 두 가지를 덧붙이더군요. 세상 사람들에게 수도자로서 신분을 알리지 않겠다는 서원, 그리고 그 어떤 명예직이나 고위직도 맡지 않겠다는 서원 말입니다.
그들의 특별한 서원을 바라보던 저는 무릎을 ‘탁’ 칠 정도의 깨달음 한 가지가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서원은 바로 ‘나자렛의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30년 동안 묵묵히 공생활을 준비하신 예수님의 영성, 예수님 못지않게 더 깊은 침묵과 희생 속에 구세사에 기여한 마리아의 영성 말입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자렛에서 삶이었지만 하느님을 향한 굳센 믿음과 샘솟는 기쁨을 간직한 채 꿋꿋이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나자렛의 마리아를 기억해봅니다. 그녀의 삶은 마치도 깊은 산속에 홀로 피어난 ‘숨은 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바라봐주던 그렇지 않던 환한 얼굴로 그리고 묵묵히 제 자리에 서 있던 작은 풀꽃 같은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나자렛 영성은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일원이 되어 생활하고 계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하느님께서 때로 구차스럽고 때로 죄 투성이인 우리 인생에 매일 동행하심을 확신하는 영성입니다. 나자렛 영성은 매일 되풀이되는 작은 사건들과 매일일 일상적으로 맺고 있는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를 하느님과 연결시키는 영성입니다. 나자렛 영성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삶이 내게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개의치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영성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나자렛 영성의 원조이자 여왕은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평생토록 나자렛에 몸담고 살았습니다. 어찌 보면 나자렛은 심심하기 그지없는 한적한 동네였습니다. 정치·경제·문화의 일 번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제 같은 오늘이 매일 반복되는 그저 그런 동네였습니다. 몇 달이 지나가도 신나는 일도 특별한 구경거리도 없었습니다. 대단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세상, 그렇지만 삼시새끼 먹고 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이 작은 몸짓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상을 반복하는 각자 삶의 자리와도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그곳, 대단한 변화나 특별한 광경이 없는 바로 그곳 나자렛에 하느님께서 숨어계셨습니다. 오늘도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첫째가는 협조자이신 마리아께서 우리들의 지루하고 고달픈 나자렛에 함께 살아가십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께서는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영성으로 변화시킬 줄 아셨습니다.
때로 자질구레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의 일들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줄 아셨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는 매일 삼시새끼 성가정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매일 쌓이는 빨래 감을 머리에 이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 공동 우물로 향했습니다. 매일의 가난과 노동, 은둔과 침묵, 인간적 상처와 갈등들도 하느님과 연결시킬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각별히 칭찬할 신앙인들이 지닌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하다는 것입니다. 삶이 내게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상관없이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몸이 성하거나 병들거나, 순탄한 오솔길을 걷거나 폭풍속의 험한 길을 걷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자렛의 마리아가 걸었던 길처럼 말입니다. 참된 신앙, 참된 영성은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 반복되고 매일 걸어야할 삶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가 서있는 일상의 자리가 또 하나의 나자렛이자 주님이 현존하시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이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 벌어지는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겪는 매일의 고통과 상처 그 틈 안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앞에 펼쳐지는 매일 삶은 하느님의 신비와 은총으로 가득 찬 기적의 현장입니다.
흔히 벌어지는 큰 착각
윤경재 요셉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오 12,48~50)
학교나 경찰서에서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러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하면 부모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답니다. ‘내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는 하소연입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못된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런 것 같다는 말이 곧바로 튀어나오고요.
우리는 흔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익히 안다고 착각한다고 심리학에서 말합니다.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되는 원인을 살펴보면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신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내린 판단에 오류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내성착각’이라고 부릅니다. 자기관찰을 할 때 전체 정보를 통찰하기보다는 일부 부각되는 정보에 의존하기 쉽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그릇된 자신감으로 연결되어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또 인간은 자기가 속한 내집단에 긍정적 판단을 내리고 외집단에는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편향이 있습니다. 또 자기의 평소 선입관에 따라 몇 가지 마음에 드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곤 합니다. 이런 것을 선택적 지각이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이후 모든 사상과 철학에서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던 이 명제가 100%정답이 아니라는 것이 최근의 심리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인간은 이성과 분석을 중시하는 사고체계와 감성과 직관을 중시하는 사고체계를 동시에 가동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이 중에 어떤 사고체계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최근 행동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행동 양식을 연구하여 혹시라도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나 않은지 한번쯤 의심해 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그 당시 청중들과 지금의 우리에게 알쏭달쏭한 의아심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어떤 이의 말은 아주 일상적이고 대수롭지 않으며 그러나 호의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기상천외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인간의 심리를 꿰뚫고 인간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탁월한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계신 주님을 뵙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감성과 직관을 우선 사용합니다. 그래야 사태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으며 또 쓸데없는 심리 에너지 낭비를 막고 능률적으로 다른 데에 힘을 쏟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분석의 방법은 시간이 걸리고 경우의 수를 따지는데 많은 연습이 필요하여 에너지 낭비가 소요됩니다. 그럼에도 정확한 판단과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이성적 의심 과정을 한번쯤 꼭 거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승 예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감성과 직관에 너무 안일하게 빠지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눈을 일부분이 아닌 우주 전체로 돌려 과연 어떤 행동양식이 하느님의 뜻에 맞을는지 생각해보라고 유도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는 말씀은 이제 우리에게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나만의 것, 내 뜻, 내집단에서 벗어나 전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로 볼 여지가 생겼습니다.
내성 착각과 긍정 편향, 내-외집단 편향 등등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벗어날 수 있는 오류와 착각을 스승 예수님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날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49-50)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여왕이나 왕후를 가리켜 국모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성모라고 부릅니다.
어찌 여왕이나 왕후가 백성들을 낳지도 않았는데 국모라 불립니까?
그것은 백성의 뜻을 하늘의 뜻으로 받들고 섬길 때만 붙여질 수 있는 타이틀입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로 불린다는 것은 감히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늘 마음 속으로 곰곰이 되새기며 묵묵히 실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아들딸을 하느님이 보내주신 귀한 선물로 받아들이며 그를 하느님 뜻대로 키우는 한 나는 그 아이의 진짜 엄마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를 내 부속물로 여기며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여기는 순간 나는 계모가 되고 맙니다.
나 또한 가난한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으로 알아듣고 그들을 섬긴다면 나도 여왕이고 왕후가 됩니다.
나 또한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행에 옮기는 한 나도 예수의 어머니가 되고 그분의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
이 혼란의 시대는 모두가 제 뜻만 추구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조차 않는 가짜 어머니, 가짜 성도, 가짜 지도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는 진짜 어머니인가요?
나는 진짜 신자인가요?
나는 진짜 성직자인가요?
나는 진짜 수도자인가요?
나는 진짜... 대통령인가요?
우리 각자가 진솔하게 고백해야 하는 오늘입니다.
누가 내 형제들이고 어머니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영적 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이 문밖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한 이에게 물으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야?”(마태 12,48)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마태 12,50)
이 말씀은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어머니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째서 진정한 어머니인가를 말해줍니다. 곧 마리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여 진정한 어머니가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십니다. 이토록,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는 스승을 낳기 전에 그분을 모태에 모시고 계시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셨기 때문에 정말 복되십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모님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신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신 것은 더 큰 영예이고 더 큰 행복이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자매로 초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요, 우리의 아버지인 그분의 뜻을 실행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러니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누가”라는 말은 ‘어떻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곧 어떤 이가 내 어머니고 형제들인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지만 당신의 자비심으로 홀로 계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 아버지의 상속자가 그리고 당신과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기를 원하신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란? 그 실행이 노예처럼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로서 사랑으로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참 가족을 이루고,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 딸이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마태 12, 4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머니의 여정은
봉헌의 여정입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며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여정이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이끄시고
보호해 주시는
주님을 깨닫게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게됩니다.
봉헌은 사랑의
가장 깊은
본질로 우리자신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듯
봉헌이 있습니다.
봉헌의 여정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장 강력한 행위입니다.
봉헌은 우리모두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함께 머무르는
기쁨이듯
봉헌은 사랑을
더욱 충만케합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결합시키는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봉헌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봉헌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성호 이익 선생님을 찾아와서 야생 거위를 기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위에게 불에 익힌 음식을 먹이자 거위는 몸이 점점 뚱뚱해져서 날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거위가 음식을 전혀 먹지를 않고 한 열흘쯤 굶더라는 것입니다. 뚱뚱해졌던 몸이 점점 가벼워졌고 그리고 얼마 뒤에 스스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성호 이익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지혜롭구나. 스스로를 잘 지켰도다.”
사람이 주는 음식을 계속 먹다보면 자신의 야생성이 사라졌겠지요. 물론 굳이 먹이를 찾아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고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육되면 될수록 자신의 소중한 자유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삶이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고생하지 않는 편안한 삶이 좋을까요? 아니면 많은 수고를 동반해도 자유로운 삶이 행복할까요?
우리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하고 쉬운 삶을 살고 싶지만, 이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은 아닌 것입니다. 스스로를 잘 지키면서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때 비록 편하고 쉬운 삶은 아니더라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편하고 쉬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잘 지키는 삶, 그래서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러면서 성모님의 봉헌에 대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과연 저절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성모님께서 선택하신 것이고, 스스로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성모님과 친척들을 향해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시지요. 분명히 서운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이미 하느님께 봉헌되신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에 대해 어떤 서운함의 표시를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받아들이시고, 그 뜻을 따르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곧 온전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사시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믿음 없이 제대로 봉헌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봉헌 없이 주님과의 완벽한 일치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결국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노력이 정말로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노력은 어떠했는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잘 지킬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만 느끼지 못할 뿐, 당신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다(데스몬드 투투).
두 친구가 주고받는 말
나이가 꽉 찬 노처녀인 두 친구가 만났습니다. 한 친구가 먼저 이렇게 말했지요.
“결혼을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결혼하자는 사람도 없고....”
그러자 다른 친구가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난 이제까지 제발 결혼해달라는 부탁을 수없이 받았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받을 걸?”
친구는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아니! 너에게 나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 있었어? 그래, 그런 부탁을 한 사람이 누군데?”
이에 고개를 푹 숙이면서 말합니다.
“우리 부모님!”
부모님께 당연히 결혼하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청혼을 하는 남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깜짝 놀랄 수박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결론을 미리 내리고서 판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올바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릇된 관점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어쩌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요?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주님의 뜻이 맞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또 다시 길 떠나는 성모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서에 등장하는 성모님 관련 일화들을 종합해볼 때 그분은 한 마디로 침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가브리엘 천사의 예수님 탄생 예고 앞에 마리아가 보인 일관된 자세는 침묵과 기도였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하느님의 초대였습니까? 동시에 얼마나 은혜롭고 감지덕지한 초대였습니까? 이토록 엄청난 하느님의 초대이기에 마리아는 시종일관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브리엘 천사와의 대화에 임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란 마리아의 응답, 간단히 줄여서 “예!”란 응답은 그분의 기도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충만한 기도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달한 것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였습니다. 마리아는 어렸지만 온전한 자유의지를 지난 한 인격체였습니다. 당연히 천사의 초대장을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라고 응답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예!”였으며 위대한 “예!”였습니다.
마리아의 응답과 관련해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것 것은 그분의 “예!”가 예수님 탄생 예고 때 단 한번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한평생에 걸쳐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 출산 앞에서도 그분의 대답은 “예!”였습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라는 전갈 앞에서도 그분의 대답은 지체 없는 “예!”였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겪은 다양한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 앞에서도 그분의 대답은 항상 “예!”였습니다.
성모님의 침묵이 유난히 돋보이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이후 성모님의 촉각은 온통 아들 예수님께로 쏠려있었습니다. 어머니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삼시새끼 굶지 않고 지내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내가 아들을 위해 뭐든 할 일은 없는지...
그러던 어느 날 친척을 통해서 들려오는 충격적인 이야기 하나...“아드님이 미쳤답니다. 목숨 두려운 줄 모르고, 이스라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권력자들과 언쟁을 벌인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큰 봉변이라도 당하겠습니다. 한번 찾아가봐야 되지 않을까요?”
아들 걱정에 뜬눈으로 밤을 지센 성모님은 친척들을 앞세워 예수님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부탁을 좀 했겠지요. “나는 예수의 어머니인데, 너무 걱정되어 찾아왔답니다. 한번 만나게 해주세요.”
스승님의 어머니라는 말씀에 제자는 한 걸음에 달려가 예수님께 이 상황을 알렸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 같았으면 반가운 마음에 만사 제쳐놓고 어머니를 만나러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안심을 시켰을 것입니다.
“어머니, 제가 걱정이 돼서 이 먼 길을 찾아오셨군요.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세요. 지나가는 길에 꼭 한번 들를게요.”라고 말씀 드리며 용돈이라도 손이 좀 쥐어드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고금과 동서양을 막론하는 통상적인 예의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태도는 우리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뛰어넘습니다. 어머니가 걱정되어 찾아오셨다는 데도 밖으로 나와 만나지도 않습니다. 그러고는 하시는 말씀을 더욱 난해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복음 12장 48~50절)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성모님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침묵하십니다. 그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십니다. 또 다시 성모님은 또 다시 자신의 내면을 비워냅니다. 또 다시 가장 밑바닥에서 또 다른 신앙 여정을 출발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께서는 좀처럼 제게 전화를 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바쁠 것 같아서 그러십니다. 제가 그다지 정겨운 태도로 전화를 받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며칠 전, 어머니께서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의정부에 사시기 때문에, 의정부 교구입니다. 교구에서 사제총회를 하는 관계로 본당에는 미사가 없고, 공소예절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레지오 단원이십니다. 활동으로 미사참례를 하시는데, 공소예절을 미사참례로 여겨도 되는지 물어 보셨습니다. 저는 미사참례는 아니지만 공소예절도 미사참례처럼 활동으로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학적인 지식은 제가 조금 더 알지 모르지만 신앙의 깊이는 제가 따라갈 수 없는 분이 어머니이십니다.
사제들과 사제들의 부모님이 있습니다. 사제들도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사제들이 하는 기도보다 훨씬 많이 기도합니다. 동료 사제들의 부모님을 보아서도 알 수 있고, 저의 어머님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시고, 새벽미사 가시기전까지 기도를 하십니다. 묵주기도, 성무일도, 성서쓰기, 미사참례, 피정과 같은 신앙생활을 기쁜 마음으로 하십니다. 손자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특히 사제나 수도자인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그분들은 온 정성을 다해서 기도하십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직무에 충실하고, 기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부모님들의 기도가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 중에 정진석 추기경님이 계십니다. 매년 신앙인들이 읽고 묵상할 수 있는 책을 출간하시고, 매일 교구의 구역장, 반장, 사제들의 부모님, 사제들을 위해서 2시간씩 기도를 하십니다. 기도의 힘이 추기경님께 지혜와 건강을 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열심히 기도하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십니다. 언제나 이른 새벽에 성당에 오셔서 미리 기도를 하시고, 미사에 참례하십니다. 성당이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것도 그런 어르신들의 기도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하느님을 찬미하고,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참된 가족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위한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됩니다. 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인류의 영원한 꿈 -새 가정 공동체(new family community)-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류의 영원한 꿈은 새 가정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새 가정 공동체입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삶의 목표를 잃음과 동시에 허무주의의 유령이 전염병처럼 나돌아 급진적 극단의 폭력적 테러리스트들의 온상이 됩니다. 요즘 파리에서 끔찍한 테러의 만행을 저지른 IS의 젊은이들도 이런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것은 빛이요, 옷을 벗게하는 것은 따뜻한 햇볕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폭력으로는 악은 결코 퇴치할 수 없습니다. 발본색원, 악의 뿌리를 뽑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며 악순환의 사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바로 인류의 영원한 꿈, 새로운 가정 공동체의 건설입니다. 바로 폭력의 악순환에 대한 유일한 장구적 대안은 이런 공동체의 복원이자 건설뿐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쳤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본디 이 날은 6세기 중엽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며,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습니다. 14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참으로 유구한 전통의 기념일입니다.
요아킴, 안나 부부 가정 공동체를 통해 은연중 계시되는 새 가정 공동체의 비전입니다.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새 가정 공동체의 설립을 위한 필수 조건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혈연가정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그리스도중심의 공동체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합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의 비전을 환히 보여줍니다.
사람 중심도, 돈 중심도, 일 중심도 아닌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진정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요 ‘오래된 미래’의 영원한 공동체요 우리 수도공동체의 이상입니다.
이미 1독서의 즈카르야를 통해 예언된 공동체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 가운데에 머무르리라.”
밖에서 주님을 찾지 마셔요. 주님은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오늘 지금 여기 이 공동체 중심에 계십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 장면이 상징하는 바요, 이미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그날은 바로 오늘이며 딸 시온은 교회공동체의 성원인 우리 모두입니다.
둘째,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이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평생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데 온 힘을 다했던 우리 공동체의 중심인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된 성모님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믿는 누구나 기억하는 성모님의 고백입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던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표지이자 이정표인 예수님이요 성모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은 주님의 말씀 모두를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불이요 우리의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가 된 공동체의 성원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의 말씀을 실행할 때, 우리는 주님의 형제가 되고 누이가 되고 어머니가 됨으로 하느님 가정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영원한 꿈의 하늘나라 공동체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언젠가 실현될 공동체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태동하기 시작한 새 가정 공동체입니다.
영원한 꿈의, 희망의 공동체를 찾는, 소속 욕구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보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꿈도 없습니다.
이런 공동체를 통한 위로와 치유요 내적성장과 성숙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찾지 못해 방황이요 혼란이요 허무주의의 전염병에 감염입니다.
날로 붕괴되고 파괴되어 가는 혈연의 가정공동체 및 세상의 온갖 공동체에 대한 유일한 대안공동체가 주님 중심의 새 가정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으로 이런 영원한 꿈의 새로운 하늘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루가11,28참조). 아멘.
자신을 바치고 되돌리는 참 가족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모님께서 성령의 감도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자헌(自獻) 기념일’에 항구한 삶의 봉헌을 통해 예수님의 참 가족으로 살아가는 길을 묵상해봅니다. 인생은 자기중심적 인생과 타자중심적 인생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 초점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내 인생도 수도 소명의 삶도 영성생활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피붙이 아니라 하느님을 따라 다른 이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서 사셨던 성모님을 생에 내 삶의 모습을 비추어봅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품고 말씀이 되어 걸어가시며 온전히 당신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되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마리아께서는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고, 예수님을 낳으셨을 뿐 아니라 아드님의 갈릴래아 복음선포에서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는 구원의 전 여정에 함께 하신 온전한 ‘말씀의 실천가’이셨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의 참 어머니가 되셨고(마태 12,50) 우리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이 되어 오신 구세주를 품으시고, 이집트 피난의 고통을 감수하셨으며, 나자렛의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로 아드님을 돌보시고, 갈릴래아 복음선포 여정을 가난한 어머니로서 함께 걸으셨으며 아드님의 죽음을 바라보며 가슴이 찔리는 듯한 고통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7,21)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면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 그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멈춰 그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주 피곤하고 해야 할 일이 쌓이고 맡겨진 일을 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닫지 못하고 머리로는 알아도 망각하곤 하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내놓는 구체적인 움직임 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아버지의 뜻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내 중심에서 벗어나 타자(他者) 중심으로 옮겨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서약이나 수도서약은 어떤 지위나 명예를 보장해주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자신을 떠나 더 사랑하며 자신의 온 삶을 내놓는 삶의 출발신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희생 없는 축성과 봉헌은 있을 수 없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런 진리 앞에 서면 때때로 사랑 없이 수도복만 입고 덩그렇게 앉아 있는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순수함을 잃고 누군가에 대한 싫은 감정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보면 마음이 아파오기도 합니다. 자신을 내놓는 일은 자기 존재를 포기하고 죽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것같습니다.
오늘도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께로 돌아가 자기중심이 아니라 타자중심이 되어 소유가 아닌 사랑의 되돌림을 항구히 실행하는 예수님의 참 가족으로 살아갔으면 합니다. 늘 무언가를 붙들고, 얻으려 바삐 움직이는 발걸음을 멈추어 말씀을 경청하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손과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가족
-김정일 신부님-
예수님 시대의 군중들은 예수님의 출신에 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도대체 그분의 근원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로 자처하면서 신성과 인성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으로 그분의 친인척과 가족, 특히 어머니에 관해서도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만약 역사적 예수가 신이라면, 도대체 그분을 세상에 낳은 어머니는 누구란 말인가?
결국 예수님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는 문제는 성모님의 신원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군중들이 먼저 예수님께 물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당신의 어머니고 누가 당신의 형제들인가?’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아예 가족의 개념을 확대 혹은 전복시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과연 같은 지향을 두고 살아가는가,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기실 가족 아닌 가족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란 그렇습니다.
저마다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결국엔 같은 곳에 뿌리를 두고, 같은 곳에 마음을 두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만나 가정을 꾸리고 공동체를 꾸미며 교회를 이뤄가는 것.
그 안에서 우리는 한 가족, 형제요, 자매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즈카 2,14)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누구와 함께 있으면 기쁘고 즐거우세요?
물론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늘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겠지요?
그런 사람이 많이 있을수록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다른 누구에게 함께하고 싶은 사람 생각만 해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고 나와 함께하고 싶어하는 분이 여러분을 찾아 가겠다네요.
그분이 나와 함께 머무르고 싶다네요.
그분이 누구시냐구요?
바로 하느님이시랍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오늘 얼마나 기쁘고 즐거우실까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머무르고자 오시는 그분을 기꺼이 환대하고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무조건 기쁘고 즐거운 날 되십시오!
참된 가정 <참 공동체>
-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피를 나눈 형제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 어머니고 형제다 하심으로 참 공동체의 형성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요사이 메스컴을 통해 장 윤정과 그의 어머니의 공방전을 듣고 롯테 가의 아버지 형 동생의 고소고발을 보면서 주님의 말씀을 더 생각하게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인가?
하느님의 뜻 분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수도원은 하나의 하느님의 공동체이지만 참 공동체라 말을 하기에는 더 필요한 것이 채워져야 합니다.
한 가장이나 공동체에 형제적 삶을 살려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합니다. 생각에 있어 이기심. 무관심, 교만한 마음, 깨끗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참 형제라 할 수 없습니다. 말에 있어 정의롭고 진실 하고 사랑이 넘치는 말이 아니면 형제라 할 수 없습니다.
행동에 있어 억누르고 빼앗고 등을 돌리면서는 참 형제라 할 수 없습니다.
참 형제가 되려면 양보심, 나보다 너를 생각하는 마음, 가난한 마음, 온유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말에 있어 상처를 주는 말이 아니라 긍정적 말, 용기와 힘을 주는 말, 존경하는 말, 사랑이 깃든 말이 상호간에 오고가야 합니다. 행동에 있어 봉사적이며, 서로 나누어 가지며, 사로 받아들이는 삶이여야 참 형제, 참 공동체가 성립됩니다.
같은 집 안에 살면서도 타인일 수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형제가 되고 한 공동체 안에 살게 됩니다. 옆에 있어도 형제에 대한 무관심으로 죽든지 말든지 모르는 사이도 있는 가하면 멀리 있어도 깊은 관심으로 자기일 보다 더 걱정하고 배려해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하고는 다르게 느껴집니다.저는 카독으로 맺어진 사람 증에 매일 안부를 묻고 감기 조심 하세요, 건강 질 지키세요, 감사합니다, 하는 염려와 인사말 속에 형제애를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주님의 제자로 살고 한 공동체 안에 같은 생각, 같은 말, 같은 행동을 하면서 깊고 진실한 형제자매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뜻은
우리들의 정직한
봉헌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봉헌은
하나입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은
봉헌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기 때문입니다.
봉헌이 사랑입니다.
봉헌이 하느님께
가는 길입니다.
우리 자녀를
사랑하는 길은
먼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살리고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 때문입니다.
봉헌안에는
믿음과 사랑, 자유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소통은
봉헌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관계를 아우르는
은총이 있다면 그것은
봉헌입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우리들에게 봉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모든 여정을
사랑으로 이끌어 가실
하느님께 봉헌하는
용기어린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모두가 정직해질 수
있는 길은
봉헌뿐입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환자의 임종을 수십 년 동안 관찰하면서 특별히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억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마지막 순간에 기억나는 것은 평범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어떤 순간’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업, 일, 학위, 명예, 재산 취득 등등.... 그런데 이렇게 평소에 중요하다고 생각된 일들을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기 보다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충만하게 느꼈던 순간을 기억하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순간,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한 순간.... 이런 순간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보면서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때문에 힘들어 했구나 하면서 후회하는 우리가 아닌, 생의 마지막 순간에 미소를 띨 수 있는 ‘어떤 순간’을 많이 만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은 사소하고 쉬운 일상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체조배를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때, 기분 좋은 햇살을 받으면서 자전거를 탈 때, 너무나 피곤한 오후에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식사를 했을 때 등등…….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순간’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문제는 그 ‘어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대신 쓸데없는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소중한 ‘어떤 순간’을 시간이 날 때, 여유가 있을 때에만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성모님과 형제들을 향해,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반문을 던지십니다. 그리고 대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족을 하찮게 여기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육신보다 영혼으로 가까운 것을 더 귀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따르기보다는 주님께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억할 하느님의 뜻과 함께 하는 ‘어떤 순간’을 만들어내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이런 어떤 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거두어들인 수확물로 하루하루를 판단하지 말고 당신이 심은 씨앗으로 하루하루를 판단하라(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말 한 마디의 중요성(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한 어머니가 어린이집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그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아드님은 산만해서 단 3분도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어머니는 아들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선생님께서 너를 무척 칭찬하셨어. 의자에 앉아 있기를 1분도 못 견디던 네가 이제는 3분이나 앉아 있다고 칭찬하시던걸~ 다른 엄마들이 모두 엄마를 부러워하더구나!"
그날 아들은 평소와 달리 밥투정을 하지 않고 밥을 두 공기나 뚝딱 비웠다. 시간이 흘러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어머니가 학부모회에 참석했을 때 선생님이 말했다.
"아드님 성적이 몹시 안 좋아요. 검사를 받아보세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너를 믿고 계시더구나. 넌 결코 머리 나쁜 학생이 아니라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번에 21등 했던 네 짝도 제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
어머니 말이 끝나자 어두웠던 아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훨씬 착하고 의젓해진 듯했다. 아들이 중학교 졸업할 즈음에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아드님 성적으로는 명문고에 들어가는 건 좀 어렵겠습니다."
어머니는 교문 앞에 기다리던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며 이렇게 말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너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더라. 네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명문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어.“
아들은 끝내 명문고에 들어갔고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아들은 명문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아들은 대학 입학 허가 도장이 찍힌 우편물을 어머니의 손에 쥐여 드리고는 엉엉 울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 제가 똑똑한 아이가 아니란 건 저도 잘 알아요. 어머니의 격려와 사랑이 오늘의 저를 만드셨다는 것 저도 알아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예전에 유명했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하는 것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말 한 마디의 소중함을 기억하면서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칭찬의 말, 사랑의 말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믿는 힘이 굳건하면 됩니다. 그럼요!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남북통일을 기대합니까? 쉽나요? 이혼율이 높아가는 걸 보면 걱정됩니다. 함께 살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걸 보면 통일도 그런 맥락 같습니다. 자기를 하느님 자리(최고자리)에 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걱정입니다.
가족이라도 그렇고 동창들끼리도 그렇고 이웃이라도 그러니 한심합니다. 통일 합치 일치 등 이런 일은 점점 멀어지는 우리사회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힘이 굳건하면 됩니다. 그럼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50)”
예수님의 가족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 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고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하셨습니다. 악령을 쫓아내시고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위한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3,2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 더 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학연, 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 믿음에 흔들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서 행복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지킨 분으로 참 가족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잘 실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 생활을 하셨으며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제자들과 더불어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고 행하신 분이십니다. 어느 누가 그분의 모범과 표양에 앞설 수 있겠습니까?
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된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보다 영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4,24). 영적인 사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 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순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형님과 누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 예수님의 참가족이 됩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어 가족이기도 하지만 믿음에 따르는 행실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에 의정부에 있는 어머님을 방문했습니다. 모처럼 집에 있던 앨범을 보았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결혼사진도 보았고, 저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아버님 사진도 보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저의 학생 시절의 사진들도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중학생 때, 고등학생 때, 신학생 때, 군에서 찍은 사진까지 보았습니다. ‘아 옛날이여!’라고 할 정도로 오랜 사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 사진 속 어린 시절의 친구도 있고, 조금씩 얼굴이며, 추억들이 생각나는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40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같은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이름도 변함이 없고, 혈액형도 같고, 부모님과 형제들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40년 전과 다른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생각의 폭과 삶의 태도가 많이 변했습니다. 키도 자랐고, 몸무게도 변했습니다. 그때는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군가를 도우면서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컴퓨터의 기억을 지우고, 다른 기억을 넣는다면 컴퓨터는 같은 컴퓨터이지만 다른 컴퓨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능과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성모님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성모님께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신발, 옷, 책, 전자제품, 악기, 운동기구, 친구, 가족, 이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제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저를 선택해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하면 애착이 있을 수 있고, 욕심이 생길 수 있고, 상실에 대한 아쉬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제 곁을 떠난다고 해도 속이 상하거나, 아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내 것’이라는 패러다임을 ‘하느님의 것’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그럴 때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것 보다 아픈 것도 은총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전투기, 탱크, 총, 대포, 미사일, 잠수함’은 ‘내 것’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또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소중한 것들을 버리고 있습니다. 양심을 버리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버리고 있습니다. 사랑을 버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외롭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지구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새로운 가정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약속했던 대로 가난하나 사랑 많은 분이 겨울 옷을 선물했습니다. 입어보니 정말 좋았습니다. 크기는 X-large, 부피는 작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가벼운 옷이 었습니다.
그대로 그분의 마음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혈육의 가족 이상의 정을 느꼈습니다.
이런 옷처럼 'X-large의 큰 마음에, 작고(little), 부드럽고(soft), 따뜻하고(warm), 가벼운(light)마음의 사람이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러할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 주위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새로운 가정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입니다. 저에게 선물했던 그분이나 저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로운 가정의 주님의 누이요 형제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진정 새로운 가정의 탄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장면은 교회공동체를, 수도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어제 수도원 묘지를 방문했을 때의 평화로움도 잊지 못합니다. 주님 품 안에서 고히 잠들어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 흡사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누리는 한 가정의 형제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이, 주님을 닮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진정 죽음을 넘어 참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새로운 가정 공동체입니다.
주님을 중심한 새로운 가정의 모범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입니다. 아마 오늘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보다 충실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며 주님을 모셨던 분은 없을 것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딸 시온이 상징하는바 성모님이자 주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 모두들입니다. 바로 위의 말씀은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상의 혈육 가정 공동체는 얼마나 허약한지요. 또 요즘 붕괴되고, 파괴되고 있는 가정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제가 자주 드는 직설적 예가 생각납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
돈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육의 가정들을 주변에서 수없이 목격합니다.
'돈 중심', '사람 중심'에서 '주님 중심'의 새로운 가정의 믿음 공동체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할 혈육의 가정이요 세상 공동체들입니다.
미래의 유일한 대안 공동체 역시 주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정의 교회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의 수도공동체입니다. 세상의 우상들이나 허무의 어둠이 도저히 깃들 수 없는 생명과 빛,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 공동체입니다. 아마 세상에 이보다 견고한 이상적 공동체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공동체를 당신으로 중심한 새로운 가정 공동체로 리모델링해 주시며,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루카11,28). 아멘.
당신 마음대로 하소서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바다가 떠오릅니다. 바다의 무게를 느낍니다. 하느님의 ‘섭리’도 바다와 같을 것입니다. 섭리는 한 마디로 하느님의 계획, 사랑의 계획,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섭리의 바다는 장엄합니다. 이 장엄함에 몸을 맡긴 성모님을 생각합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아기 때 성전에 봉헌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신 전 일생을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에 맡겼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섭리는 두렵기도 합니다. 어디로 우리를 인도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더 떨리는 것입니다. 성모님도 분명 두려워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온전히 내어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결단이었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주님의 손에 봉헌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슬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우리 수도원 재속회원의 어린 딸이 병이 재발해서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백혈병으로 몇 차례 골수 이식을 받았지만 또 재발했습니다. 내성이 생겨 이식 수술도 더는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린 생명의 힘겨운 싸움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당신이 불러주셨으니 당신 마음대로 하소서. 당신 섭리의 바다에 봉헌하나이다. 자비의 성모님, 이 어린 생명을 가련히 보시어 당신 아드님께 이 생명을 온전히 봉헌하소서. 그리고 기도해주소서.”
자발적인 내어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푸르른 생명력을 뿜어대던 잎들이 형형색색 물들어 아름다움을 회상하게 해주더니 어느새 낙엽되어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삶의 근원을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이를 충만히 채워 주신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이다.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은 세 살 때에 성전에 봉헌되셨다고 한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성별이나 연령에 상관없이 평생 또는 일정 기간 성전에서 다양한 일에 봉사하며 사는 이른바 ‘나자레오’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느님 공경을 배우고 공동으로 성경을 공부하며 기도했지만 남녀가 함께 남녀가 숙식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독신의 의무가 없어 언제든 성전 봉사를 마치고 결혼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자녀를 가지려고 하느님께 서원한 경우나, 부모가 자녀에게 하느님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고 굳은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서, 또는 성전 일을 돕기 위해서 이런 봉헌된 삶을 살았다.
오늘 다음 두 가지를 깊이 되새겨 보면 좋을 것 같다. 먼저 성모님의 자헌(自獻)에서 생각해 볼 점은 ‘자발성'이다. 어떤 이들은 매우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봉사하고 성경공부 하면서도 얼굴이 굳어 있다. 그 이유는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 못해서 하고, 의무감이나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겪으시고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십자가상 죽음을 맞는 그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하셨다. 그분은 말과 행동으로 전 생애 동안 하느님 뜻에 스스로 순명하셨다. 바오로 6세 교종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성소는 기쁨이다. 성 프란치스코도 우울함은 바빌론의 악과도 같은 것이라 하며 기쁘게 살 것을 권고하였다. 이 기쁨은 무엇을 하든 하느님께 기꺼이 응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사랑으로 견딜 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봉헌의 의미이다. ‘바친다’는 것은 자신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내놓고 시간을 내놓고 마음을 내놓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이치이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가르쳐주는 사랑과 생명의 진리이다. 내놓은 것은 늘 누군가를 위한 이타적인 것이기에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는 헌신에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봉헌을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할 때 그 봉헌의 정점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축성해주신다. 또 하느님께서 세례와 서약, 서품 등을 통해 축성해주시는 것은 그런 봉헌을 충만히 살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봉헌 없는 축성, 희생 없는 축성과 봉헌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인의 봉헌은 전 존재의 봉헌이어야 하며, 온전한 봉헌을 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봉헌은 사랑의 결정체이자 아름다운 기도이다. 나는 어떤 봉헌을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겨 그 말씀의 힘으로 일생 동안 충만한 봉헌의 삶을 사셨다. 그분은 말씀이 되어 오신 구세주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이집트 피난의 고통을 받아들이셨으며, 나자렛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로 아드님을 돌보셨으며, 아드님의 갈릴래아 여정에 늘 말없이 동반하셨고 죽음에 이르는 수난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하셨다. 그분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말씀으로 되살아났다. 그분은 말씀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참 어머니가 되셨으며(마태 12,50)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다. 성모님은 ‘항구함’, ‘함께함’, ‘견딤과 받아들임’, ‘말씀에 자신을 내맡김’ 등을 통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의 전 여정에 자신을 기꺼이 바치셨다. 나의 일상은 항구하게 이런 자헌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뽑으시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보호자이신 성령과 함께 당신을 축성하셨나이다. 당신 안에는 온갖 은총과 온갖 선이 가득하셨으며 지금도 가득하시나이다.”(동정녀 인사2-3절) 라고 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되신 성모님을 기린다. 오늘 나의 삶과 시간과 만남이 하느님께 봉헌되어 은총과 선이 가득한 축성의 날로 기억되도록 하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즈카르야 예언서 2장 14~17절)
-김기현 요한 신부님-
어제 오늘 대림기도 배달을 했는데요. 마지막 배달지는 전에 있던 본당이었습니다. 점심 즈음에 가서 신자들과 점심을 먹고 신부님을 뵈었는데요. 신부님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내가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정말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강론을 쓸 때 제 삶을 성찰하고 들여다볼 때가 많이 있는데, ‘내가 바라보는 것들이 객관적이었을까.. 제대로 된 평가였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또 너무 내 주관으로 해석하고 판단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본당에 대한 기억이 추억이어서 그런지 좋은 것으로 많이 기억되는데, 선배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보지 못한 문제도 많이 있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무 자만하지 않았나.. 좋았다고 포장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된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요.
그 연장선상에서 떠오른 것들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최근에 제가 작업한 대림기도를 보고 선배 신부님께서 저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 주신 겁니다. 대략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혹시나 네 이야기가 혼자 떠드는 독백이 되지는 않을까.. 신자들을 가르치는 강론 투의 말은 아닐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떨지..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다시 대림기도를 읽어보니 그런 느낌이 많은 거 같더라고요. 어느 순간부턴가 가르치는 느낌과 신자들을 구분하는 느낌, 그리고 내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거 같다.. 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드러나는 느낌이 강해진 거 같은데요.
한 번은 기도회에 가서 다른 신부님의 묵상을 들으면서도 저를 향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뜨끔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드러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정말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군더더기 없이 전하려고 했는지..’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 부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때로 예수님의 이야기와 복음은 빠져있고 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을 때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 느낌이 최근에 겪고 들은 일 때문에 더 강하여진 거 같은데요. 오늘 독서의 말씀도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주님의 고요한 음성이 들리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드러나지 않으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분의 모습이 우리 삶 가운데 드러나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해야만 한다고 고집하던 일들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오히려 그분의 일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목소리가 우리 가운데 들릴 수 있도록 더 깊은 침묵으로 살아가 봅시다. 또 주님의 현존이 우리 가운데 드러날 수 있도록 더 깊은 겸손을 가지고 일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전 본당 신자들이 내 새치를 보고 이런 말을 한다.
“새로 간 본당 신자들이 잘해 준다고 하더니, 속 썩이는 거 아니에요? 신부님 흰 머리가 많아 지셨네~”
또 다른 분은 아니라며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본당에 계실 때부터 그러셨어..
우리 때문에 흰 머리가 나시고 가신 거야~”
나는 그냥 새치가 많은 건데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거 같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시간들이
봉헌의 시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장 큰
사랑입니다.
봉헌은 분열된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줍니다.
봉헌의 시작은
생명의 시작입니다.
부여잡는 것이 아니라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봉헌의 길을 우리들에게
다시금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길은
신앙인들 매일 매일의
삶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봉헌없는 삶은
희망없는 삶과
같기 때문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의 삶은
주님과 함께 나누어야 할
은총의 삶이 됩니다.
떨어져내리는 단풍잎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봉헌은 삶의 가치를 다시금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살면 살수록
우리 모두를
살 게 하는 것이
봉헌임을 깨닫게 됩니다.
봉헌의 길이야말로
서로를 성장시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봉헌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위 성공을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공=행복’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은연중에 간직하고 있는 등식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이 성공에 이르러야 행복할 수가 있을까요? 지구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 바로 미국입니다. ‘성공=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은 미국이 되어야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늘어난 1960년대 이후, 이혼율이 2배 증가하였고 청소년 자살은 3배로 늘었습니다. 폭력범죄는 4배 증가했고, 감옥에 수감된 사람의 숫자는 5배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우울증환자가 1960년대 이전과 비교했을 때 무려 10배 이상 증가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성공한 사람들이 늘어난 것에 대한 결과는 이렇게 처참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시 성공한 사람들이 늘어감에 따라, 점점 미국의 모습과 비슷해지고 있습니다. 이혼율 세계 1위, 저 출산율 1위, 청소년과 40대 사람들의 자살률 세계 1위 등등 어쩌면 1960년 이후의 미국보다도 더 처참한 결과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떠받음을 받으려하는 소위 성공이라는 중독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공은 겉으로만 그럴싸할 뿐, 내 마음의 참된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떤 책을 보니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는 법’이라면서 이런 방법을 가르쳐주더군요.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는 방법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앞에 ‘가난한’을 붙여보라고 합니다. ‘가난한’ 가수, ‘가난한’ 운동선수 등등... 이렇게 ‘가난한’이라는 단어를 붙어도 그 일이 좋다면 그냥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일이라야 열심히 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세상 사람들의 성공이 아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는 기쁜 일을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의 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형제들의 방문을 받고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모님과 그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서운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속적인 관계 안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가 진정한 관계임을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모습을 완벽하게 실천하신 분이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시지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오늘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즉, 하느님께 봉헌되신 성모님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헛된 성공을 쫓는 것이 아닌, 참된 기쁨과 평화를 간직할 수 있는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가장 큰 행복이란,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앙드레 지드).
행복은 정직하다(‘좋은 생각’ 중에서)
행복 지수를 높이는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방법을 한 번 써보세요. 분명히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호주 심리학자 앤서니 그랜트와 에이비시(ABC) 방송은 실험을 했다. 행복 지수를 상승시키는 방법을 찾기로 한 것. 먼저 참가자들의 뇌를 촬영하고 설문 조사 등을 통해 행복 지수를 측정했다. 100점 만점에서 30~50점 정도로 평균보다 낮은 참가자들은 8주 동안 앤서니 박사가 제안한 다음의 방법을 실천했다.
1. 추도사를 쓴다.
눈감고 내 장례식을 상상한다. 아는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루지 못한 꿈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추도사를 적으며 내가 어떤 삶을 살기 원하는지 깨닫는다.
2. 무작위로 친절을 베푼다.
낯선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이웃집 정원에 쌓인 낙엽을 쓸어 준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한 참가자들의 타액 검사 결과, 면역력이 45퍼센트 증가했다.
3. 감사 편지를 읽어 준다.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 편지를 쓴다. 그리고 상대에게 읽어 준다. 이때 편지받은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은 3개월까지 지속될 정도로 효과가 크다. 읽어 주는 사람 또한 만족감이 높아진다.
4. 용서 편지를 쓴다.
과거의 상처가 있다면 상대에게 연민을 갖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 용서 편지를 쓴 뒤 상대에게 부치지 말고 간직했다가 분노가 올라올 때마다 읽는다. 용서는 내 분노를 달래고 놓아 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5. 되돌아보고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단계를 되돌아보고 그 경험을 글로 쓴다. 글쓰기는 뇌에서 쾌락을 담당하는 도파민 수치를 높여 준다. 더불어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배웠고,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또 미래를 어떻게 바로 보게 됐는지 돌이켜 본다.
실험 후 참가자 모두 스트레스 수치와 혈압, 콜레스테롤은 낮아지고 면역력은 높아졌다. 이 과정이 방송된 후 호주에서는 1209만 명이 행복 지수 높이기를 실천했다. 이듬해, 호주는 유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국가 중 행복 지수 1위를 차지했고, 이 순위는 3년째 계속됐다.
앤서니 박사는 이 연구를 통해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이 환경이나 유전적 요인보다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기 나름이다.
<예수님의 참가족>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이 말씀 앞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가족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일종의 상황 설정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가족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가족을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의 '누가' 라는 말은, '어떻게 하는 사람이' 라는 뜻입니다.
또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 앞에 '내 어머니처럼'이라는 말을 넣어야 뜻이 좀 더 정확해집니다.
"내 어머니처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사람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너희가 내 가족이라면(또는, 내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여라."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마태오복음 7장에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또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는 일과 같습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기 위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에서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연상됩니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서자인 그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시의 신분제도 탓이지 홍길동의 잘못은 아닙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아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일이 됩니다.(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남 탓을 할 수도 없고, 성경이나 교리 탓을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신앙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이 은총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들어오지 말라고 그들을 막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거부하고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루카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곧바로 연결됩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싫어서 집을 떠났습니다.
자기 스스로 아버지를 거부한 것이고, 스스로 아들 자격을 버린 것입니다.
그랬다가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서 그를 환영했습니다(루카 15,24).
아버지는 그에게 아들 자격을 다시 주었지만, 작은아들이 그 자격에 걸맞은 진짜 아들이 되는 것은 그 자신이 노력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한테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루카 15,28).
그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우리말 번역과는 달리 원문에서는 큰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아들 자격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또 큰아들은 자기가 '종처럼' 일했다고 말합니다(루카 15,29).
그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신앙인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노예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녀가, 또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사랑은 없고 명령과 복종만 있다면, 그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의 관계입니다.
우리는(신앙인은) 날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날마다 참 자녀로서 살고 있는가?
우리들은 어떤 목적지에 가려할 때 다양한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서울에 갈 일이 있을 때 어떤 교통편으로 갈 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직접 운전해서 갈 수도 있고, 전철이나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나 뛰어서 가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을 선택하는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길이 막히지 않는 시간이며 빨리 목적지까지 갈 것이라면 직접 운전하는 방법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이 막힐 것을 예상해서 또는 교통비 절감을 생각한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겠지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며 자신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자전거나 건강한 두 다리를 이용할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쓰는 방법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이용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걸어서 가든 그 사람이 지금 생각하기에 제일 합리적인 것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도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른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그러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지요.
예수님께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기에 사람들이 알려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반문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가족을 무시하며 살아간다는 것, 특히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 듯 한 이 말투는 과거나 지금이나 큰 충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부모를 무시하고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빠짐없이 한 가족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들의 편협된 생각들을 꾸짖으시면서 자유로운 당신의 방법을 통해서 강한 깨달음으로 다가오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주님의 말씀을 새기는 것입니다. 즉,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예수님 말씀이 나를 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되지 않도록, 더욱 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당에 의무적으로 다니는 것만으로는 선택받기 힘듭니다. 또한 입으로만 하느님의 뜻을 운운하는 것 역시 주님의 선택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할 때, 주님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를 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목표를 보는 사람은 소수다. 목표를 보는 자의 성공을 기록한 것이 역사이며 문제를 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보상은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혀지는 것이다.(알프레드 몬타퍼트)
우리는 예수님의 핏줄
-이영춘 신부님-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 족보를 살펴 보면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고, 운운하는 대목에서 이들의 관계가 실제 부자 관계가 아니고 부족들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족보로서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고하는데, 그렇다면 요셉과 성모님, 또 그 위에 있는 조상들과는 피 한방울 안 섞인 관계처럼 보이는데, 이 또한 족보로서의 가치가 없는 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족보를 그렇게 나열한 이유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족보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앙의 연결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신앙의 피로 이루어진 가족관계, 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의 의미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모두가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상에서 흘린 피와 성혈이 되어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같이 모시기에 결국은 예수님의 피로 한 가족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제로 예수님 때문에 한 핏줄로 맺어진 가족입니다.
가족
- 신재용-
아들 하나를 둔 후 이혼하고 혼자 사는 친척 동생이 있습니다. 그 동생이 어느 날 밤 자정이 지난 시간에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들이 보고 싶다고 말입니다. 제 마음이 아팠습니다. 혼자 살고 있으니 외로울 때 보고 싶은 마음이 오죽하겠나 싶었습니다. 밤새 잠을 설쳤습니다. 무엇인가에 꽉 막혀버린 답답한 가슴을 뚫으려 새벽에 일어나 어두운 산책길을 목적 없이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알아서 잘 살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동생이 지금 겪는 고통은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일 것입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동생을 위해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사랑이 특별합니다. 매우 좋은 민족성입니다. 그런데 요즘 주위를 돌아보면 가족이라 하더라도 사랑 없이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화롭지 못한 가족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저는 그런 상황을 보면 언제나 오늘 복음을 기억하곤 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따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 가족,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처럼 그분의 가장 가까운 가족일 것입니다. 내 가족뿐 아니라 이웃, 모든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관계의 재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오늘의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당신을 중심으로 한 관계는 백지화하고 아버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관계의 새 판을 짜시며 우리에게도 관계의 새로운 판을 짜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一家를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속하다가 이제 자기를 중심으로 따로 일가를 이루는 것이지요.
보통 부모가 돌아가시고 자신도 나이가 먹어 자녀들에다가 손자, 손녀들이 많이 생기면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명절이 되면 자신을 중심으로 자녀들이 모두 모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고 반문하십니다.
주님께는 어머니 마리아조차 당신의 어머니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딸일 뿐입니다.
혈육의 관계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안 하고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을 육신 아버지가 반대하자 육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오직 하늘 아버지만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말하자면 관계의 재편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실 어머니 마리아를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어머니 마리아처럼 잘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누구나 당신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요 도전입니다.
관계 재편하라는 도전이요,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란 어떤 곳인가요? 어느 글에서 본 것인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 생각해서 적어 봅니다.
어떤 사람은 산보 삼아 가는 곳
어떤 사람은 시시덕거리며 환담이나 하는 곳
어떤 사람은 친구를 만나는 곳
어떤 사람은 심심한 시간을 보내는 곳
어떤 사람은 애인을 만나는 곳
어떤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찾아가는 곳
어떤 사람은 비즈니스 차 가는 곳
어떤 사람은 명상하러 가는 곳
어떤 사람은 구경하러 가는 곳
어떤 사람은 졸기 위해 가는 곳
어떤 사람은 점심식사 하러 가는 곳
어떤 사람은 유명인과 악수하러 가는 곳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가는 곳.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드리며 찬미하는 곳.
여러분들은 교회에 왜 가시나요? 혹시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서 교회에 가는 것은 아닌지요? 사실 선거 때만 되면 성당에 나오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과 악수를 나눌 때면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성당을 위해서 이러저러한 일도 해보겠다고 말하는데, 왜 지금까지는 성당 한번 나오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아는 정도로는 같은 형제자매가 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가족의 관계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당신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때에만 진정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았고, 미사도 몇 번 나갔다는 약간의 친분으로 모든 것을 얻으려는 욕심 많은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 끊임없이 청원기도를 바치고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저 역시 약간의 친분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으려 했구나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청하기보다 먼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진정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인생을 네가 주도하라. 네 인생의 열매는 네가 맺은 것이라야 그 맛이 황홀하다(배유안).
부모님의 모습
-황지원 신부님-
주일학교의 아이들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신나게 성가를 부르고 율동을 할 때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런 친구들의 모습 가운데서 마음에 걸리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 친구들의 부모님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어린 친구들의 모습에 그 부모님의 모습이 비추어져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신의 어머니로, 당신의 형제들로 맞아주시며,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이며 어머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새로운 가족으로 초대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가족의 조건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불리움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내가 누구 집 자식인지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어머니와 형제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밖에 서 있는
- 박후임 목사-
며칠 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예수님보다 밖에 서 있는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예수님을 만나러 왔으면 안으로 들어오면 될 것을 왜 들어오지 못하고 문 밖에서 예수님 나오기를 기다리는 걸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지? 하는 궁금함이 나를 꽉 채운다. 호미질을 하면서도, 일하다가 쉬고 잠시 하늘을 바라볼 때도 문득문득 말씀이 떠오르면 밖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 나는 왜 이렇게 그들에게 집착하고 있는 거지?’ 하며 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밖에 있는 그들에게서 내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나였다.
도시에서 하던 목회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배운지 4년차가 되어 가지만, 아직도 나는 시골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 서 있다.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처럼. 몸으로 농사를 배우는 것, 호미질·낫질·괭이질·씨뿌리고 가꾸고 김매고 순지르고 가지치기 등은 잘 하지는 못해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허나, 시골마을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대문도 없고, 방안의 잠금장치 하나 없는 시골마을은 마을 사람들의 모든 생활이 손바닥처럼 다 보인다. 어르신들의 애정 어린 관심이 간섭같아 불편한 마음에 조금 거리를 두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밖에 서 있는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을 보면서 관계에서 오는 불편 때문이 아니라 시골 아낙으로, 농사꾼으로 있는 내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처럼 ‘나는 너희와 다르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태어난 곳이 다르고, 말투가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고, 하던 일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뭐. 이렇게 저렇게 다르다고 갈라놓으면서.결국 스스로 나를 공동체로부터 갈라놓은 것이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예, 주님. 보이는 것으로 나누며 살아가는 제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오직 하나뿐인 그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터넷에서 ‘사랑의 전화 사회조사 연구소’에서 전화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설문 결과를 보면 우리들의 생각과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
즉, 남편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사랑해.” “당신은 잘 할 수 있어.” 등의 믿음을 주고 인정해주는 말들입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이와 비슷합니다. 가장 많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사랑해.”였고 다른 누구보다도 아내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였습니다.
반대로 남편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잔소리”였고 남편 또한 아내의 잔소리를 가장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편이나 아내나 모두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돈을 잘 벌어 집을 벌써 샀다는데... 누구는 애를 둘씩이나 낳고도 몸매가 처녀 때 몸매 그대로던데... 누구 아빠는 승진했다던데... 누구 아내는 시댁에 그렇게 잘한다더라...”
재밌는 것은 이렇게 부부싸움을 하고 났을 때 ‘첫사랑’이나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어쩌면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지금 같이 사는 사람과 비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특별히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고 싶어 합니다.
전에 한 가수가 “오직 하나뿐인 그대”라는 노래를 불렀었습니다. 사랑해서 만나 한 몸을 이루는 자신의 반쪽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입니다. 따라서 정말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을 다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배우자는 세상에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아내이고 남편인데, 단 하나밖에 없는데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면 그 사랑은 거짓말입니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전부가 되는 것이고 세상에 유일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단 한 분뿐이십니다.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는 것이 가장 기분 나쁜 일이라면 하느님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너무 길어져서인지 누군가가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있다고 아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형제냐?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다.”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뜻 앞에서는 인간적인 어떤 관계도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됨을 가르치십니다.
물론 어머니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만이 유일하게 합당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어머니와 형제들에게는 커다란 모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만 하느님의 일이 어떤 상황에서든 첫 째를 차지해야 하고 그 다음엔 인간적인 일이 와야 한다는 순서를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도 보좌 때 어머니보고 성당에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찾아오셔서 만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자식을 보고 싶은 어머니 마음이야 완전히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지만 주님의 뜻에 사람의 애정이 방해가 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어떤 것과 비교 당하실 분이 아니시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어떤 것과도 비교당해서는 안 됩니다.
“날씨도 좋은데 미사를 가야하나, 아님, 가족 나들이를 다녀와야 하나?” 혹은 “아이들 성당보다는 공부를 먼저 시켜야하나?”,또 “저녁기도를 함께 해야 하나, 연속극을 보아야 하나?” 등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일은 세상 많은 것들과 비교당하고 저울질 당하고 있습니다.
한 선생님이 자갈과 조약돌, 또 모래, 이 세 가지를 항아리에 다 담아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학생은 작은 것부터 먼저 넣고 큰 것을 넣으려 했지만 항아리가 벌써 다 차 버려서 자갈을 넣을 공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은 처음에 큰 것부터 넣기 시작하여 나중에 모래를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갈 사이로 조약돌이, 조약돌 사이로 모래가 흘러들어가서 항아리를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 먼저 선택해야 하는지 순서가 혼동된다면 우리는 정녕 하느님을 ‘하나뿐인 그대’로 여기고 있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 것들과 당신이 비교 당하고 저울질 당하는 것을 못견뎌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항상 ‘오직 하나뿐인 그대’가 되도록 합시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수모>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서에 나타난 마리아와 관련된 기사들을 종합해볼 때 마리아는 무척이나 생각이 깊고 신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강단이 있고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마리아의 친척들이 마리아를 찾아와 호들갑을 떱니다. "마리아! 큰 일 났네! 큰 일 났어! 예수가 지금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렸네. 지금 안 그래도 정치적으로 상황이 안 좋은데, 이대로 놔뒀다가는 큰 일 나겠어! 빨리 가보세! 얼른 가서 데려와야겠네. 무당을 불러 굿이라도 한 판 하든지, 의사한테 보이든지 해야 되겠어!"
친척들로부터 아들 예수에 대한 근황을 전해들은 마리아도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기에 길을 나섰습니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예수가 머물고 있는 집 문 앞에 선 마리아는 차마 집안까지 들어가지는 못하고 사람을 시켜 예수를 부릅니다.
"여보시오! 우리 아들 예수 좀 불러주시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들어가 예수님께 어머니와 친척들이 문 밖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머리가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몇 일 집에도 안 들어 갔겠다. 적어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일단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어머니한테 미안하다고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얼굴도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은 더욱 가관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요 내 친척이란 말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내 친척이다."
보통 어머니 같았으면 당장 뛰어들어가서 그랬을 것입니다. "자네가 아무리 메시아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할 것 아냐? 메시아에 앞서 먼저 인간이 되야지? 네 엄마가 하도 걱정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이까지 너를 찾아왔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당장 밖으로 안나와?"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인간적 수모를 당하면서도 침묵했습니다.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한 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마리아는 예수로부터 야기된 모든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 깊은 상처들, 고통들을 마음 속 깊이 간직했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한 평생 예수님으로 인한 숱한 상처들을 신앙으로 이겨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고통스런 신앙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가슴을 비수처럼 찌르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려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고통스런 믿음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마리아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가족들 가까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그런 사람이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분명히 예수님을 낳아 주신 어머니도, 예수님의 친척들도 함께 합니다. 예수님을 낳아 주신 어머니 마리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심으로써 구세주를 낳으셨으며 사랑하는 아들의 처참한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하셨던 성모님은 진정 예수님의 어머니들 중의 어머니셨습니다.
우리도 흔히 말합니다. "우리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이 우리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랑 담긴 '형제님, 자매님'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며 함께 신앙 생활을 해 나갑니다. 그런데 이 안에 우리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있는지요? 이 안에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 자매가 있는지요? 가족들이 천주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들이 열심히 성당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묻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우리의 신앙 생활 안에서, 성당 활동 안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들과의 즐거움 때문에 가족들을 애써 뒤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을 따름입니다. 가족들을 애써 뒤로 밀어내면서 궁색한 변명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들먹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을 따름입니다.
사제로 살면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할 것을...'이라며 아쉬움에 젖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성당에서는 모든 이에게 성실한 신앙인으로, 열심한 활동가로 인정받았지만, 그만큼 가족들로부터는 멀어졌습니다. 가족들은 나를 너그럽게 이해해주었고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게 느끼기도 했지만, 그만큼 나는 가족들을 이용했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가족들 중에서 "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묻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내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냉담을 하면서도 오히려 성당 활동에 열심인 아들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물심양면으로 밀어주신 부모님의 겸손한 고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히려 어머니 마리아께 대한 한없는 믿음을 느낍니다. 비록 몸은 어머니와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오히려 마음으로는 항상 어머니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이제 비록 가족들과 한 자리에 함께 할 여건이 크게 제한받을 수밖에 사제로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더욱 성실한 삶을 통해,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제가 되기 위한 자그마한 몸짓을 통해, 지난 시절 소홀했던 가족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신부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신부가 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게 되는데, 그때의 사유 대부분이 바로 ‘판단력 부족’입니다. 제가 얼마 전 신학교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판단력이 부족한 신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신학생이 그 교수 신부님께 전화를 걸었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더래요.
“신부님, 제가 이번에 재시험 통지를 받았습니다. 제가 이 기간 동안 **단체에서 봉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따라서 재시험을 미리 좀 보면 안 될까요?”
신부님께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봉사는 땀 흘리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청년들의 모임 연수의 도우미 정도의 역할로 굳이 신학생이 봉사할 필요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신학교의 성적은 자신의 성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도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없어도 될 봉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그럼 너 신학교 그만두고 평생 그 봉사나 해.”
사실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많은 판단의 기로에 서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말씀드리지요.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는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그렇게 야박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 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즉, 세속적인 인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보다 세상의 법칙에 선택의 기준을 둘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 내 판단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금 반성해 보세요. 판단력 부족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실행합시다.
아버지의 뜻
-남상근 신부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님과 가족이 된다 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상관없다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아버지의 뜻이 모든 것에 우선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라고. 하늘 아버지의 뜻은 이렇듯 모든 것에 앞서는 절대적인 목적이고 최상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기도한다면서도 우기곤 합니다.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도 이것을 원하시지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강요합니다. 너무 자주 하느님이 내게 종속된 분이시듯 그렇게 기도합니다.
포콜라레의 금언은 나의 기도가 온전해지려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 이것입니까? 저도 그것을 원해요.’
내가 하느님께 순명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여 분별없는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은혜로운 당신 뜻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미사, 아름다운 기도
-임인자-
저는 세례를 받을 무렵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에 근무를 하고 월요일에 쉬기 때문에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가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도서관을 그만두고 가장 기뻤던 일은 주일마다 가족과 함께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사 때마다 저에게 소중하게 다가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신부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사제와 함께.’라며 응답할 때는 친구처럼 다정한 신부님을 매일매일 뵐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요! 칠레는 신자 칠만 명당 신부님이 한 분이어서 신부님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 때 ‘평화를 빕니다, 사랑합니다.’라며 서로 얼싸안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 어떤 어려움도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입니다.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어떤 것도 용서할 수 있는 평온한 마음이 생깁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영성체를 하기 전, 매번 이 기도를 저는 생생한 느낌으로 바칩니다. 제가 성화의 길로 부름 받았음을 느끼는 동시에 함께 있는 모든 교우들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살아 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져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이렇듯 미사를 드리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입니다. 모든 말씀이 기도이며, 기도 안에서 우리도 함께 거룩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절두산에서 많은 신앙 선조들이 목숨을 바치며 지키려 했던 정신과 긴 세월 동안 교우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온 사랑의 정신이 이 미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든 교우들이 저의 형제이고 어머니입니다. 때론 서로 힘들 때도 있고 분란이 생길 때도 있지만 함께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운 교우이니까요.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샛별을 두려워 말고/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는 정호승님의 시처럼 함께 희망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서랍을 활짝 열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은 난해하기 그지없는 복음이어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조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오늘 복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기껏 걱정 되서 찾아온 어머님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던지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성모님을 비롯한 예수님의 친척들, 주변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 처음에는 이 말씀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해 한동안 난감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한’ 예수님 말씀의 이면에는 작은 시냇가에서의 평화로움을 떨치고 거센 파도가 요동치는 넓은 바다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비장함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한 곳에 머물러 계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에게 나자렛은 너무나 좁은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양에 차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분은 만왕의 왕, 온 세상의 주인, 천지의 창조주이신 주님이시셨기에 언젠가 한번 세속적 인연의 끈을 끊는 아픔이 필요했습니다. 탈바꿈이 필요했습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사명 때문에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아쉽고, 정말 송구스럽고, 정말 안타깝지만,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을 뛰어넘으실 때가 온 것입니다. 세상만물, 인류 전체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은 서서히 혈육의 정을 초월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배경의 표현이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인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더 큰 바다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 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성모님의 모습, 둘 다 ‘짠’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꽤 슬픈 복음을 묵상하면서, 혈육의 정을 단호히 끊고 먼 길 떠나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들의 인생도 생각해봅니다.
우리들의 인생길, 신앙생활, 어찌 보면 나그네길입니다. 늘 떠나야 합니다. 보다 향상된 삶을 향해, 보다 본질적인 삶을 향해, 보다 가치 있는 삶을 향해, 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향해 부단히 떠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물이 한 곳에 오래도록 머물러있으면 썩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한번 실천하고 싶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보다 자주 떠나는 것입니다.
나를 묶어놓는 악습, 과거의 틀,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거듭 성찰해봐야 할 것이며, 거듭 새롭게 시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때로 죽음보다 싫은 것이 떠남이겠지만, 한번 마음 크게 먹고 떠나보십시오. 기적 같은 일이 거기서 생깁니다. 또 다른 세계가 우리 시야 앞에 활짝 열립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혜안이 열리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 그토록 염원했던 하느님을 만나 뵙기도 합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새롭게 영적 여행을 떠나보시기를 권고합니다. 떠나기에 앞서 약간의 노력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서랍을 활짝 열고 깔끔하게 한번 청소도 하십시오. 천국을 위한 여행 가방에 들어가지 못할 짐들은 과감하게 정리도 해보십시오. 무절제, 과도한 욕심, 지나친 자만심, 끝도 없는 자기중심주의...
역설적이게도 고통의 근원은 소유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 번뇌의 출발점입니다. 인연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슬픔의 근원입니다.
철저하게도 모든 것을 버린 예수님, 그토록 정겨웠던 인연마저도 훌훌 털어버린 예수님이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 세상 모든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린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셨기에 그리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권력가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묶인 대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하느님입니다. 비록 모순투성이고, 갖은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은 높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는 비결의 첫 단계는 세상만사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모든 것이 OK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리도 놓기 힘들었던 명예나 직책, 재산이나 학벌도 그저 모두 지나가는 바람이 되고 맙니다. 그토록 놓기 힘들었던 인연도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이 되고 맙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하신 하느님 그분뿐입니다..........◆
<독서> :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경규봉 신부님-
모세가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지팡이를 들고 팔을 바다로 뻗치자 하느님께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시어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밟고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이 바다로 들어서자 주님께서는 그들의 병거 바퀴들을 얽어 놓아 꼼짝도 못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뻗자 물이 도로 덮여 이집트인들을 삼켜버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당신 팔을 펴시어 이집트인들을 치시는 것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며 주님과 모세를 믿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약속과 명령에 따르는 믿음으로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 가운데로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집트 생활이 그리워서 제자리에 멈춰 서있기도 했을 것이고, 믿음 약한 이들은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이 들어났지만 넘실거리는 파도가 무서워서 바다 가운데로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바다를 건너가다가 주저앉거나 뒤로 도망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람은 믿음으로 바다 속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 역시 불안과 초조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갈라진 바다에서 넘실거리는 파도가 언제 덮쳐질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냈던 것이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인간적인 걱정을 떨쳐낼 수 있는 신앙인만이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마태 10,29-31)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릴 수 없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모든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낸다. 뿐만 아니라 믿음 없이 행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잘 볼 수 있다.
이집트인들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바다를 건너려고 했지만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히브 11,29). 그들은 하느님의 약속이나 믿음 없이 무모하게 바다 속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믿음의 백성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고 따라서 행했을 따름이다. 이런 무모한 행동은 하느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며, 그 결과 그들에게는 죽음이 따랐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바다를 건넌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느님의 위대한 힘을 깊이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게 되었다. 기적은 단순히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기적은 일종의 표징으로서 믿는 이들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전하는 이들의 권위를 보증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들을 뒤쫓아 온 이집트 군대를 보고 겁에 질려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홍해 사건을 체험한 후 모세를 하느님의 종으로 굳게 믿게 된다. 홍해의 기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은 한 차원 더 성숙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를 부른다.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 어찌할 수 없는 위험,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누구나 좌절하고 절망하기 쉽다. 그러나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은 오직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에 그는 두려움이 없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머리카락 하나도 손댈 수 없음을 믿고 주어진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삶도 죽음도 하느님의 몫임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긴다. 그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힘이 되어주심을 체험하며, 그 체험을 통해 더 깊은 신앙의 길을 걷는다. 오늘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고, 이를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자...........◆
우리 속담에 피를 나눈 형제라도 멀리 살면
-남을우-
우리 속담에 피를 나눈 형제라도 멀리 살면 이웃 사촌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의 의미를 젊은 시절에는 이해하지도, 그 의미를 헤아려 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부모, 내 형제만이 최고고 영원히 함께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웃은 그냥 옆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 나오는 구절이 절로 생각나는 세상에 요즈음 살고 있습니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전형적인 우리 민족의 정이 듬뿍 담긴 시이지요.
같은 성당에 다니는 반모임의 교우들은 친형제처럼 느껴집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삶의 방향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텃밭에 심은 고추·상추·쑥갓 등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눌 때, 호미로 길게 자란 잡풀을 뽑을 때 행복감에 충만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주님께서 웃으시는 것 같습니다. 참 대견하구나 하시면서….
자신의 잘못과 아픔을 서로 나누며 참회와 격려의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이웃, 이들이 나의 친형제 친자매임을 느낍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50)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하며 행복감에 취해봅니다.
하늘나라 시민
-장동현 신부님-
수도사제로 살아가는 저는 부모님께 큰 자랑거리입니다.
아들 가운데 하나가 사제인 것을 하느님께 늘 고마워하십니다.
누가 저에 대해 말하면 참 기뻐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다며 묻지 않은 것도 이야기하십니다. 부모님은 삶의 매순간에 특별한 연결고리로 저와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뵙기도 어렵고 손자도 안겨드리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가장 가까운 아들인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자랑스러워하는 까닭이 제가 잘나고 똑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을 하고 있어서, 교회의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온 인류가 한가족이 되는 꿈이 실현됩니다.
모두가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며 특별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주님을 찬양하는 나라,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김창대 신부님 -
마르코 복음의 순서에 따르면, 예수 님은 3장 1절에 기파르나움 회당에서 오그라든 손을 펴주십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방할 기회를 찾던 중이었습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3장 6절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직내 세력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투메와 오르단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이라면 식사도 잠도 거를 만큼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를 질시하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자라고 군중들에게 매도했습니다.
이런 저런 소문을 듣고 있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어 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예수님의 건강도 염려되었지만 그가 하는 일이 못마땅했습니다.
밥이 나오나, 돈이 생기나, 그보다도 그들이 마음 쓴 것은 가문의 명예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와 그리스는 물론 팔레스티나에서는 가문의 명예를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가문에서 사회적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 이었습니다.
예수를 찾으러 온 친척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었고, 그 밖에 가문을 이루는 친척들 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여기 낀 것은 아들 예수의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고, 아버지 요셉이 빠진 것은 요셉이 이미 작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찌기 혼자된 성모 마리아는 친척집에 몸을 의지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홀어머니를 혼자 버려두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랑 전도를 하던 예수님의 마음도 아팠을 것입니다.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 싸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친척들은 늦게 도착하여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 틈을 헤집고 한 사람을 들여보냈습니다.
'어머님과 형제들이 밖에서 찾고 있습니다.'라는 전갈이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 그러고는 제자들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 그리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십니다.
그때나 지금 이나 일생을 가족에서 시작하고 가족 안에서 가족을 위해 사는 세속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민족 전체를 한 가족으로 생각하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범죄에 해당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혈육 관계'를 무시하셨습니까 ?
아닙니다. 아주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르게 보셨습니 다.
누가 진정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들입니까 ?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 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내 자매라 했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하나의 신념이지 믿음이 될 수 없고 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신념은 다른 것입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어떤 일이나 사업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 무너지고 또 그대로 뵌다는 보장이나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천지가 변해도 변함이 없는 약속과 보장이 있습니다.
이런 진리를 아는 사람은 예수께 속한 사람이고 예수와 함께 가정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머니를 모시듯이 사랑하며 형제, 자매처럼 대하십니다.
둘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말로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몸으로 복음을 사는 사람입니다.
입술로는 섬기면서 몸으로는 거역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 몸으로 복음을 위해 사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들 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좋은 강론을 들으려 주일마다 성당을 배회하는 이들이 아니라 들은 강론대로 살려고 몸부림하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입니다.
'말씀이 좋다'고 몰려드는 이들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이들이 주님의 가족 입니다.
모두 주님의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모친이요, 주님 의 형제요, 자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남처럼 사는 이들이 아니라 가족처럼 사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다 주님의 가족이 됩니다. ♡
-구경국 신부님-
꽤나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제가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유학을 할 당시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담당하셨던 교수님은 봘터 케른이라는 신부님이셨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매우 온화한 인품을 지니고 계셨을 뿐 아니라, 박사 학위를 두 개나 소지하신 재원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청소를 자진해서 담당할 정도로 겸손하셨던 분으로, 한국 신부, 신학생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보여주셨던 분으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신부님의 인품에 호감을 가졌던 탓인지, 아니면 기초신학의 중요성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 온 십 삼사 명 정도의 신부 신학생들 중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던 사람의 수가 동시에 무려 여섯 명이나 될 때가 있었습니다.
기초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초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치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케른 신부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을 '케른 학파'라고 불렀고, 기초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 약간의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그런데 기초신학이 아닌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어떤 신학생이 하루는 무슨 심통이 났는지 그 말을 아주 강하게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학파라는 것은 지향하는 것과 방법이 같아야 하는 것이지, 단지 한 교수님 밑에서 같은 시기에 공부하고 있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잘 안다'는 속담을 굳이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단지 처해진 외적 상황이 비슷하다는 사실 하나에 의존하여 형성된 공동체는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상황이 변한다거나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갈등을 일으킬 경우 그 공동체는 해체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한다면 단지 외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진 사람들이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이익공동체'일 따름이지 결코 '운명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날 심통을 부렸던 그 신학생은 이러한 사실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적인 일치감에 의한 공동체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운명공동체'를 형성시킬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를 궁극적으로 일치시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득실에 상관없이 오로지 한 마음으로 같은 것을 지향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상황에 달려있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공동체는 우리가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그것에 따른 우리들 삶의 형태가 닮을 경우에야 비로소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다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여야 하는 운명공동체에 속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께서 하신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씀은 결코 예수께서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마리아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도 우리들이 우리의 형제들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욕심을 가능한 한 억제하여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헌신,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어쩌다 한번쯤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의 생애를 걸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여러분이나 저나 할 것 없이 사람이면 누구나 부모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 가정에 속하게 된다.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하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터전이며, 가정 없이는 국가도 인류도 없다. 가정이 중요하고 소중한 이유는 그 가정을 이루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 즉 바로 나 자신을 포함한 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소중하면 너도 소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에 나의 가정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가정도 소중한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가정이 오늘날 소홀히 여겨지고, 사소한 이유로 쪼개지며, 서로 반목하고 불목하며, 경제적 파탄이나 병고나 사고로 말미암아 심적 물적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모든 가정이 오직 나의 가정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이기주의가 날로 팽배하고 있으며, 거치적거리고 빤하다거나 미래가 없다는 이유로 “가정 만들기”를 기피하는 개인주의나 독신주의가 증가일로에 있다는 현실 또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하고 모범적인 가정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성가정이 더욱 그리워지는가 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가정에 소속되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모두 함께 살아간다. 일찍 부모를 잃거나 피를 나눈 형제가 없는 혈혈단신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없어 봉양을 받지 못하는 독고의 노인이라 할지라도, 이 땅위에 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며,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누구나 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그 속에서 노인이 되어 간다.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람과 친분을 쌓으며, 이럴 줄 알았던 사람의 또 다른 저런 면을 체험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주며, 속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다가 삶의 실존과 진면목을 깨달을 때면 원하든 않든 하나씩 순서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뜻하지 않는 불의의 사고로 선뜻 가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은 실로 크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며, 다 똑같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재물이 좀 있고, 권력이 좀 있다하여,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하여 자신의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생명과 삶을 가볍게 여겨 무참히 짓밟고 앗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피붙이인 가족에게도 그럴 수 있을지 묻고 싶다.
사람의 기원을 따진다면 모든 사람은 다 같은 형제요 자매이며, 한 가족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즘은 ‘지구가족공동체’, 또는 ‘글로벌가족공동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때문에 건전한 재벌들이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고, 뜻있는 곳에 기부금을 내며, 재력이 없는 사람은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이루는 가정에서 태어나 30년 동안 가족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자기를 키워준 가족을 떠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린 것은 아니다.
그분은 더 큰 인류가족공동체를 원하셨으며, 나아가 하느님나라의 가족공동체를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우리들이 사는 이 땅위에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사방에 전하면서 그 나라의 가족이 될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모으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분은 특히 가난하고 아파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셨다.
어느 날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문 밖에 서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형제’라는 단어가 히브리 문화권에서 아주 폭넓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계혈족의 2촌만을 형제라 하지 않고 조부, 증조부, 고조부 등 아버지와 1촌의 관계를 갖는 모든 혈족을 관계상 ‘형제’간이라 하는 경우와 같다.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와 보자고 하는 것일까? 오늘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즉 공관복음 모두가 미소한 차이로 보도하고 있는 대목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루가 8,19-21) 마르코는 예수가 악령에 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아 예수를 붙잡기 위해서 왔다(마르 3,20-30)고 이유를 대고 있지만, 마태오와 루가는 그 이유를 의도적으로 삭제하였다. 찾아온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마태오와 루가는 이 대목을 두고 다른 목적을 가진 게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둘러 있던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절)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34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이 말씀이 허공을 가르며 외쳐지던 순간, 어머니와 형제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나마 문밖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했는데,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조상을 두고 함께 자란 형제들을 무시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어머니며 형제들이라니. 정말 예수는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수님의 본의(本意)는 그 다음 말씀에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5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셨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예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혈연적이고 세속적인 가족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족공동체를 택하신 것이다.
이 가족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듣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집합이 아니라, 예수님을 포함한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도 하느님을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점을 자주 강조하셨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자신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우리자신은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뜻을 좇아 행하신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을 뜻을 행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당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지적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피로 맺어지는 혈연은 한번으로 영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가족관계를 허물어버리시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설정하셨다. 그 소속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행하는 것입니다......◆
가장 멋있는 삶은 무엇일까요?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삶? 나만의 만족을 채우며 사는 삶?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이 있겠지요. 하지만 정말로 멋있는 삶은 철학자 니체의 말처럼, ‘지금의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사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지금의 내 인생은 잘못되었다면서 후회하며 살고 있다면 결코 멋있는 삶도 또 행복한 삶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끊임없이 연연하고, 미래를 계속해서 걱정하면서 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멋있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요.
신학생 때 은경축을 맞이하시는 어떤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사제로 살고 싶습니다.”
제가 젊은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은경축을 맞았다고 하면 거의 할아버지쯤으로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25년이나 사제 생활을 하신 신부님께서 다시 태어나도 사제로 살고 싶다는 말을 듣고는 재미없게 똑같은 삶을 다시 왜 사시려고 하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기에 다시 똑같은 삶을 살아도 만족한다는 표현이었고, 정말로 멋진 삶을 사시는 신부님의 모습인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육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만족을 모릅니다. 이러한 것들은 채워지면 또 다른 것을 채워야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부족하고 후회를 하게 되지요. 그러나 반대로 영혼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자리에 대한 만족감이 아주 큽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지금 삶을 다시 살아도 너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전 부분의 내용이 더러운 영에 대한 것입니다. 즉, 더러운 영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더러운 영을 누르시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말씀을 가리기 위해서, 예수님 육신에 따른 가족을 데려 온 것이지요. 예수님도 다른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명확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당신 가족을 하찮게 여기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육신보다 영혼으로 가까운 것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육적인 것만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육적인 것보다는 영혼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삶에 만족할 수 있으며, 가장 멋진 삶 그리고 후회하지 않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 보람은 그 일이 쉬운가 어려운가, 성공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있는 게 아니라, 희망과 인내, 그 일에 쏟아 붓는 노력에 있다(헬렌 니어링).
받는 것보다는 주는 데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형이 취직을 해서 동생에게 좋은 자전거를 사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먼저 말합니다.
“나도 저런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나는 그런 형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 그런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겠어요? 아니면 그렇게 동생을 위한 형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전자의 모습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해하고 또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요?
인류를 한 가족 되게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가족이라는 말보다 식구라 하면 한 지붕 밑에 산다는 맛이 더 강합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겠냐며 부모님의 자식사랑 또한 큽니다. 가족이려면 이렇게 먹고 살기를 부모와 함께 해야 식구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정원리가 인류에게 내재 되어 있음을 극대화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고 자신을 빵, 밥으로 하여 식구를 이루시는 겁니다. 내 몸을 받아먹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 인류를 한 가족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49~50)”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살면서 ‘전환점’을 만나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게 되는 사고, 사건,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살고 함께 살고 있는 배우자일수도 있고, 우연히 읽은 책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았던 사고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인연이라고 하고, 신앙인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것입니다.
제 삶에도 몇 번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저에게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분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가겠다고 이야기했던 고등학교 동창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커다란 아픔이 제게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했습니다. 때로는 편안함이 저를 교만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살면서 어떤 ‘전환점’이 있었는지요?
세상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중심은 화려하고 깨끗한 선진국도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은 권력의 핵심이 있는 청와대도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은 부유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사는 부자 동네도 아닙니다. 세상의 중심은 지금 내가 있는 곳입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탈출기의 핵심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를 건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오던 이집트의 군대들은 바다의 거센 물결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사람들의 힘과 능력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믿고 어쩌면 무모한 일일지 모르는 ‘이집트 탈출’을 시도하였고, 그들은 이제 참된 자유를 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불가능 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라오를 상대로 예배를 드리겠다며, 광야로 나가려 했던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새보다 빠른 비행기를 만들고, 돌고래 보다 오래 잠수하는 배를 만들고, 치타보다 빠른 기차를 만드는 것은 불과 200년 전만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고마운 이웃들이 많습니다. 교구의 성소 양성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성소후원회 가족들이 있습니다. 임원들, 지구장님들은 매달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봉사자들은 예비 신학생들의 행사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예비 신학생 모임을 도와주시는 부제님, 학사님들이 있습니다.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새천년 복음화 사도직 협회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회, 피정, 후원회 미사를 함께 합니다. 그분들은 무엇보다 기도로써 저에게 힘을 주고 있습니다. 신자 재교육을 위해서 활동하시는 꾸르실료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가정 성화를 위해서 봉사하시는'ME’ 가족들이 있습니다. 매일 얼굴을 보는 사무실의 직원들이 있습니다. 교구청에서 함께 지내는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분명 저는 독신으로 지내면서 살고 있지만 저와 가족같이 지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제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삶은 축제다 -파스카 축제 공동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축제입니다.
삶은 고해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바로 믿는 이들의 삶이 그러합니다.
믿는 이들은 그냥 공동체가 아니라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 축제 공동체입니다.
매일공동전례기도인 성무일도와 미사은총이 파스카 축제 공동체로, 고해 인생을 축제 인생으로 바꿔 줍니다.
어제 이른 아침 수도원 뜨락 빈터를 가득 채운 야생화 달맞이꽃들을 보는 순간 떠오른 글입니다.
오, 달맞이꽃 축제다/삶은 축제祝祭다
하느님/친히 가꾸신
아침 일찍/수도원 뜨락 빈 터
가득 채운/달맞이꽃들
밤새 깨어/임 맞이했기에
저리도/청초淸楚한/연노랑 달맞이꽃인가 보다
흡사 파스카 축제 전례공동체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하느님의 하늘을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를 달고 함께 기도할 때 수도형제들의 활짝 피어난 얼굴들을 보면 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파스카 주님의 승리를 경축하면서 우리 역시 파스카 승리의 삶을 살게 해주는 전례기도의 은총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찬미 공동체입니다.
비단 수도자만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 탈출기가 믿는 이들 공동체의 찬미를 잘 보여줍니다.
하느님 도움 없이는 이집트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은 언간생심 꿈도 못 꿉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리요 하느님의 결정적 승리입니다.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도자 모세는 바로 파스카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그 무렵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파스카의 구원을 상징하는 참 통쾌한 장면입니다.
하느님의 기적,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하여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중 모세를 믿게 되었고,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주님께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으로 그대로 연결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 찬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찬미공동체로 만든 결정적 역사적 파스카 사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한번으로 끝나는 탈출이, 파스카 사건이 아닙니다.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에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구원해 주심으로 우리 모두 승리의 삶, 자유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매일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이 거룩한 파스카 미사 축제의 은총입니다.
파스카 주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찬미 공동체가 우리 믿는 이들 공동체의 결정적 특징입니다.
오늘 탈출기가 믿는 이들의 '1.찬미 공동체'의 특징을 드러낸다면, 오늘 복음은
'2.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공동체' '3.파스카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라는 두 특징을 드러냅니다.
이 셋을 갖춰야 온전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복음의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물론 예수님도 제자들과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강한 공동체는 없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요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중심의 믿음입니다.
혈연공동체를 뛰어넘어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한, 믿음의 찬미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형제들, 누이들, 어머니들로 이루어진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한 가족 공동체인 우리 믿는 이들의 교회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 찬미와 감사로 하느님의 승리를 경축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천상신비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며 수난에 참여하고,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아멘.
형제와 자매, 어머니를 얻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나라의 인구가 지난 2015년 1월말 5천1백 3십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45년에 이르면 다시 5천만명 이하로 떨어진답니다. 저 출산, 고령화 문제로 이제는 혈육으로서의 형제, 자매라는 관계도 형성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시고 하늘나라의 가족관계를 형성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제자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8,14-15).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폐5,8).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에페5,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형제라 부르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 하겠습니다…….하느님께서 나에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히브2,11-13).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사이에 형제애의 관계도 돈독히 해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실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묵주반지를 끼고 신자라고 폼 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다니며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생각 없이 지니고 다닌다면 부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깊은 관계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사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사는 가운데(갈라2,20) 형제자매의 관계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우리가 알아볼 때
-진슬기 신부님-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기적인 홍해 사건은 오늘날 우리나라 진도에서도 해마다 체험할 수 있는 바닷길 현상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아, 그러면 탈출기의 홍해 이야기는 기적이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기적, 은총의 핵심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기적이나 은총이란 특별히 대단한 일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로서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똑같은 일이라 하더라도, ‘왜 하필 그때 그 장소에서 일어났는가?’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일상 곳곳에 스며 있는 주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경험하고 싶다는 바람을 아뢰기에 앞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무심하게 지나친 것들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서 오늘 복음의 ‘혈육으로 어머니고 친척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곰곰이 새겨 봅니다.
곧 주님은, 하느님의 일이란 어떤 특정한 형식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일이든 그 안에서 우리가 그 의미를 알아보고 실행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50)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오늘 뭘 하고 싶으세요?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이것저것 많지요?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다보면 때론 실수도 나오고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지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고 어떻게 해야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내 뜻대로 하지말라시네요.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며 일하라네요.
내 신분에 걸맞는 일을 할 때 우리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어느 회사 사장의 일꾼입니까?
하느님의 자녀입니까?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 때 나는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일해아겠지요.
자, 오늘도 열심히 일합시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귀한 아들이고 딸임을 잊지말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며 일해 봅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하더라도 기쁨과 보람이 충만할 것입니다.
그런 기쁨과 보람 누리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관계를 잘 진단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죄는 늘 소유하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소유할수록 더욱 목마르고 배 고픈 것이 우리의 관계입니다.
소유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 진정 서로를 위한 사랑의 길이 됩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복음의 길은 서로를 깨어나게하는 성숙의 길입니다.
성숙한 관계는 함께 나눠야 할 행복이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신앙의 결단속에 있음을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강한 협력자의 관계가 필요한 오늘의 교회현실입니다.
건강한 관계의 협력자가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관계의 길을 제대로 찾아 주십니다.
서로를 살리고 풍요롭게 하는 길은 관계의 중심이 주님이 되는 길뿐입니다.
이미 잡고 있는 끈을 놓아야 진정 잡아야 할 끈이 무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뜻은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도와주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건강한 뜻안에 건강한 협력자가 함께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하늘의 뜻을 다시 곧추세우는 봉헌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언젠가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자기도 가톨릭 신자인데 지금 현재는 냉담 중이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이제 다시 성당에 나가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셔야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물론 그렇지요. 저도 언젠가는 다시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일이 더 중요해서요. 먹고는 살아야지요.”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먹고는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고 있답니다. 그리고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은퇴를 하게 되면 그때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나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안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라면서 완전히 분리를 시키면 그만큼 주님의 자리는 없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자리를 만들지 않고 사는 사람이 먼 훗날 힘이 없어져서 할 일이 없어지면 저절로 그 자리가 만들어질까요?
사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주님을 믿는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잘 먹고 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상황이 찾아올 때 혼자의 힘으로 이겨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거뜬하게 이겨내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만 봐도 먹고 살기 위해 주님을 믿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우리의 한 가운데에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뛰어넘어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성모님과 그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연결된 가족관계를 누구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가족관계를 거부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했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긴 시간을 소비했을 어머니와 형제들이었는데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니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인간적인 인간관계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새로운 인간관계, 하늘 나라에서 함께 누릴 새로운 공동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느냐, 실행하지 않느냐로 결정되기에 때로는 지금의 인간관계가 깨질 수 있는 것이지요.
먹고 사는 인간적인 문제의 해결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가슴으로 살아갈 때, 그대의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 된다(혜광).
생각의 반전
미국의 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신인일 때의 일입니다. 영화 ‘죠스’를 찍는데 너무나도 큰 난관에 부딪힌 것입니다. 종일 촬영한 필름 중에서 한 컷도 쓸 수 없는 날이 잦았는데, 결정적인 문제는 제작비 전액을 들여서 만든 상어 장치 때문이었습니다. 이 상어 장치를 만들어서 민물에서 시험 가동했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장치를 바닷물에 넣는 순간, 전기가 합선되고 오작동이 잇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만들 시간도, 무엇보다도 더 이상 돈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망가진 상어를 어떻게 되돌릴지 고민하고 있을 때, 스필버그 감독은 이 상황을 뒤집어서 생각했다고 합니다.
‘상어가 나오지 않는 영화를 만들자. 사실 보이지 않는 게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
이러한 생각의 반전이 바로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생각의 반전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원리원칙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꿔서 또 다른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을 그 자리에 초대한다면 보다 더 넓은 생각을 가질 수가 있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폴란드에서 세계 청년대회가 시작됩니다. 제가 있는 성소국에서도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가기로 하였습니다. 서울교구에서는 80여명이 함께 한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같은 신앙의 이름으로 모일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고,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언어가 달라도, 피부가 달라도, 삶의 자리가 달라도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임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기 때문에 잠자리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젊은이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보편되고,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2005년 11월 4일입니다. 저는 캐나다로 연수를 떠났습니다. 낯선 곳에서 외롭기도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다리가 아파서 잘 걷지도 못했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불편하고, 말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따뜻한 봄바람에 얼었던 땅이 녹듯이, 제게도 봄바람처럼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머물던 숙소에 부부가 찾아오셨습니다.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부부는 저를 가족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주셨고, 여행도 함께 해 주셨고, 외로움의 그늘을 없애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분들이 저의 가족이 되어 주셨습니다.
나뭇잎은 부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태어났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갈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자신을 맡기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도 결국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많은 분열과 대립이 있습니다.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미국은 흑인과 백인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유럽은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굶주림으로 많은 난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도 분열과 대립이 있습니다. 소통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타협과 존중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작은 이 나라에 ‘지역, 이념, 세대, 빈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고, 옳다하여도 나의 편이 아니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소통과 대화를 위한 원칙과 상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세대, 이념, 빈부’의 잣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원칙과 상식이라고 말을 하십니다. 지금은 죽고 못 살 것 같지만 그것도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면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나태주님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 졌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참 외로운 별입니다. 지구별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보듬어 주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입니다.
새가정 공동체 -기도, 말씀, 실행-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새가정’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세상에 가정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과연 내 몸담고 있는 가정은 어떻습니까? 가정도 끊임없이 성장, 성숙해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혈연(血緣) 가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새가정으로의 전환이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이 새가정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함께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고, 어떤 이가 소리 쳐 예수님께 알립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이 참 재미있습니다. ‘밖(outside)’에는 예수님의 가족이, ‘안(inside)’에는 예수님의 새가족인 제자들로 뚜렷이 구별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답변이 충격적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여기서 탄생된 새가정이자 성가정聖家庭이 바로 교회가정, 수도가정, 믿는 이들의 가정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가장이 되시고, 함께 사는 이들은 모두 아버지의 자녀, 그리고 서로 간에는 형제, 자매가 되는 새가정입니다. 어제 표징을 요구하는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새가정 공동체입니다.
바로 우리 요셉수도공동체가 새가정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아니 모든 수도가정이 이런 주님의 새가정입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이상이 오늘 복음의 주님의 새가정입니다. 혈연 가정보다 더 깊고 넓은 새가정입니다.
혈연가정의 부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안에서 새가정으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혈연가정만으로는 너무 허약합니다. 제가 피정자들에게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라고 말하면 다들 웃습니다.
돈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관계의 가정을 수없이 보지 않습니까? 특히 유산문제로 한번 불목하면 발을 끊고 내내 원수처럼 지내는 형제자매들도 수없이 목격합니다.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사랑과 믿음으로 결속된 새가정으로 업그레이드 될 때 비로소 온전한 가정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새가정의 가장입니다. 그러니 새가정의 중심은 아버지이시고 맏형은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끊임없이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실행함으로 아버지를 닮아갈 때 비로소 새가정의 일치도 가능해집니다. 이 새가정의 전형적 모델이 우리 정주定住의 분도수도공동체입니다.
하여 수도가정이란 말이 잘 어울립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렇게 평생을 함께 세끼 식사에 기도하고 일하며 사는 가정이 어디 있겠는지요. 이런 새가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자 기적이요, 하늘나라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공부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실행함으로 이뤄지는 새가정 공동체입니다.
미카 예언자처럼 끊임없이 자애로운 아버지를 기억하며 부족한 우리를 보살펴주십사, 또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미카 예언자가 알려준대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와 말씀 실행을 통해 혈연가정을 성가정의 새가정으로 전환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새가정의 성장과 성숙에 공동전례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새가정의 원형적 모델인 수도가정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끊임없이 함께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가 하느님의 뜻을 일깨우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동기와 동력을 제공하며 주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불편하고 어색했던 관계도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면 대부분 주님 안에서 형제애의 친밀감을 느낍니다.
새가정을 이루는데 매일미사보다 더 좋은 수행의 기도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공동체가 당신 안에서 새가정의 성가정 공동체로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형제와 자매, 어머니를 얻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나라의 인구가 5천 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45년에 이르면 다시 5천만명 이하로 떨어진답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로 이제는 혈육으로서의 형제, 자매라는 관계도 형성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시고 하늘나라의 가족관계를 형성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제자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8,14-15).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폐5,8).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에페5,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형제라 부르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 하겠습니다…….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히브2,11-13).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사이에 형제애의 관계도 돈독히 해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실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묵주반지를 끼고 신자라고 폼 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다니고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생각 없이 지니고 다닌다면 부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깊은 관계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사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사는 가운데(갈라2,20) 형제, 자매의 관계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족관계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고 가족을 바라보면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
"자기 자신의 한계, 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를 통과시키는 문입니다. 그 문은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고 재창조 시키는 그분 사랑에 개방된 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진리에 문을 열고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인정할 때 마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성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의롭다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마태 9, 12-13 참조)에 대한 아름다운 체험을 해 봅시다.
인내심이 가득한 그분의 인내와 자상함, 그리고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분의 의지를 체험합시다. 무엇이 표징일까요? 우리가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되었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었다는 표징은 누더기를 벗어버릴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평화와 타인에 대한 봉사, 자애로움과 자상함이라는 깨끗한 옷을 입기 위하여 분노심을 버리고 원수를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신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충실성만이 오직 진정한 새로움, 재창된 새사람, 새로운 사람들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토리노 사목 방문 2015년 6월 21일).
더 큰 바다를 향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큰 뜻을 품고 출가(出家)한 자신의 안부가 너무 걱정되어 찾아온 어머니를 향해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상당히 큰 복음 구절입니다. 그래서 더 깊은 묵상과 말씀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비록 출가를 했지만, 비록 성령으로 인한 잉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나를 낳으셨고, 그 오랜 세월 애지중지 길러주셨습니다. 걱정 되서 찾아오셨으니 열일 제쳐놓고 뛰어나갔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안심시켜드렸을 것입니다.
“어머니, 몸은 괜찮으세요? 저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시간 여유 되면 조만간 찾아뵐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그러면서 가시는 길에 맛있는 것 사드시라고 몇 만원 손에 쥐어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가 아무리 부르고 기다려도 나가보지도 않으시고 하시는 말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너무나 서운해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의 예수님 말씀에 성모님께서 받으셨을 상처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큰 아픔과 상처를 애써 가라앉히시고 그 자리에서부터 또 다시 당신의 신앙여정의 성장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십니다.
“그래 맞아! 예수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류 전체를 위해 파견된 메시야였지. 그는 언제까지나 내 품에서 지내야 할 아들이 아니라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떠나야할 아들이었어. 그래. 아쉽지만 이제 정말 그를 떠나보내야지.”
예수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아쉽고, 정말 송구스럽고, 정말 안타깝지만, 이제 예수님은 나자렛을 뛰어넘으실 때가 온 것입니다. 세상만물, 인류 전체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은 서서히 혈육의 정을 초월하시는 것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더 큰 바다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길과 신앙 여정 역시 동일한 자세가 요구됩니다. 우리 역시 떠나야 합니다.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보다 본질적인 삶을 향해,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향해 부단히 떠나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때로 죽음보다 싫은 것이 떠남이겠지만, 한번 마음 크게 먹고 떠나보십시오. 기적 같은 일이 거기서 생깁니다. 또 다른 세계가 우리 시야 앞에 활짝 열립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혜안이 열리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 그토록 염원했던 하느님을 만나 뵙기도 합니다.
< 겸손하게 나의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옛 대학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친구가 9월에 서울 대치동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집값이 싸서 좋지만 교육 환경이 좋지 않아 아이들이 공부는 안 하고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남에 살던 친구가 자신도 서초동에서 살았었지만 그 분위기상 잘못 성장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하려는 그 친구가 걱정인 것은 대출을 7억 정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현재 경기도 좋지 않은데 아내와 아이들의 성화에 이사를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 교육은 참으로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기에 그런 환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큰 빚을 지는 것도 감수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환경은 어떠합니까?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 뜻대로 살아갈 환경입니까, 아니면 힘들고 어려울 때만 주님을 떠올리며 함께 계셔 달라고 청하는 환경입니까? 오늘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신앙의 환경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는 것 같지만 실제 삶 안에서는 주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위선적인 예배가 아니라 평소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고,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면 예배도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항상 함께 계시는 그분이 나의 환경이 되어 다른 일탈이나 죄의 기회를 피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동시에 유혹이 있는 환경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도미니코회 수사인 요한 타울러가 수도자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라인 강변에서 혼자 선행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서 산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노인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노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언제나 기쁘다. 내게는 모든 날이 선(善)하다. 나쁜 날은 하루도 없다.”
그러자 타울러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당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리신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자 노인은 유쾌하게 대답했습니다.
“지옥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르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주님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오. 한쪽 팔로는 겸손이 주의 인성(人性)을 안았고, 다른 팔로는 사랑이 그의 신성(神性)을 붙잡았고.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 주님도 갑니다. 주님이 없는 황금의 천국에 가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불구덩이 지옥에 있는 것이 더 낫소.”
그 노인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곧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머물러야 하는 강남 8학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참 행복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행하는 삶에는 반드시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주님과 함께 있을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도 기적만 요구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요나의 예언에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삶을 변화시킨 것과 같이, 또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큰 봉헌 물을 가지고 먼 길을 왔던 석 같이 주님과 함께 머물려는 노력을 먼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환경으로 들어가려면 큰 빚을 내는 것을 감수해야 하듯이 주님 안에 머무는 것 또한 우리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가 매우 큰 고통을 겪고 있던 어느 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던 주님께서 내 심장이 찢어질 만큼 괴로운 이때에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다음과 같은 대답이 들렸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너의 심장 속에 있다.”
좋은 환경에 들어가 살다보면 왜 그렇게 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그 곳에 들어오려고 노력했는지를 나중에 알게 되듯이, 주님과 함께 머물러본다면 왜 그런 노력을 해야만 했는지 알게 되어 더 이상 표징이나 이적을 원할 필요조차 없어지게 됩니다. 매순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어버리지 않을 각자의 방법을 찾아내고 그분이 마련해주시는 환경에서 살아본다면 더 이상 세상 속 환경 안에서 주님을 잊어가며 살아가는 그런 속으로는 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순례하는 사랑 덩어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에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12,50)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최상의 법이며 이것이 바로 제자가 되고 예수님께 속하기 위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혈연관계, 가족이나 종족이라는 자연적 관계, 신분 등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일차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보다도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그분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특정한 계명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파견되신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니 좀더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것입니다(10,27). 그것은 또한 예수님에 의해서 해석된 사랑의 계명들이기도 합니다(5,18; 6,10; 12,50).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를 살아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사랑 덩어리가 되는 것, 곧 하느님의 자비가 이 세상과 이웃들 안에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행함으로써 종말론적인 가정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 순례의 호흡이자 목표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사랑의 순례자였습니다. 그는 한 인간에게서 형제를 발견하였고,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실 때 수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영혼이 녹아버렸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가난한 순례자가 되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가 페루지아에서 아씨시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속 눈물을 흘리자 같이 가던 순박한 사람이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그는 “형제여, 나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을 생각하면 이 세상 온 골짜기와 모든 거리를 나의 눈물로 채워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도 덩달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형제가 되신 주님의 육화의 겸손과 헤아릴 수 없는 수난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참을 수 없어 끝없는 순례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수난의 사랑이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고 해야겠지요. 사실 주님 친히 그를 사랑의 전달자로 쓰신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악기가 되어 죽을 때까지 영원한 사랑의 연주를 했던 그를 교회가 ‘제 2의 그리스도’(비오 11세)라 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은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과 정신과 혼을 다해 실행함으로써 진정한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그분의 어머니들이 됨을 상기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소명을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는 사랑 덩어리가 되어 끝없는 사랑의 순례를 시작할 때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형제자매가 되기 위하여...
관계의 재편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때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주님을 뵈러 왔다고 전하자 주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고 물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군중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은 말할 것도 없이 군중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러니 이 말씀은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얘기하듯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무시하는 말이거나 마리아와 형제들과 혈연관계를 끊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로 초대하는 말입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부모와 형제를 버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당신도 혈육의 관계를 끊으셨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이때 부모와 형제와 관계를 끊으라고 하신 것은 마마보이와 같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를 끊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내가 아니라 모두의 나이고, 나는 어머니만을 위한 내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나이며, 나는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위한 나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는 십자가 성 요한의 말씀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모든 것(십자가의 성 요한)
모든 것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맛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지식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하며,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이 아직 맛보지 않은 어떤 것을 찾으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하고,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면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한다.
모든 것에서 모든 것에게로 가려면
모든 것을 떠나 모든 것에게로 가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이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소유하려면 어머니는 물론 모든 것을 버려야 하고,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이신 하느님 안에서 어머니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어머니와 형제로 만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오늘 말씀을 기초로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말씀이나 프란치스코의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때 모든 관계가 재편되어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도 되고 어머니도 될 수 잇다는 말입니다.
이런 관계의 재편을 위해 어떤 때 기존의 관계를 끊어야 할 때도 있겠네요.
이것을 깊이 묵상케 되는 오늘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태 12,4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날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가 무너지고 핵가족화 되면서 가족 개념이 모호해지고 다변화 되고 있습니다.
나 홀로 가정도 많고 다문화 가정 조손 가정 한부모 가정 동성 가정 등 옛적엔 생각지도 못했던 가정 개념들이 많습니다.
저희 수도원 식구들은 영적인 가족이지만 법적으론 동거인들이랍니다.
저에게는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를 아버지요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수도원 식구들이 가장 가까운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200명이나 되는 우리 성심원 한센 어르신들과 장애인들 그들을 섬기는 직원과 봉사자들과 후원자들이 내가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지리산 언저리에서 함께 생명평화 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타종교인들이 나의 길동무들이요 도반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이신 이 알타반의 말씀사랑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바로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내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랬듯이 모든 가난한 이들이 모든 환자들이 모든 민초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아니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들이기에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모든 자연과 피조물이 모두 같은 하느님을 모시기에 나의 형제들이요 자매들이랍니다.
여러분의 어머니요 형제는 누구입니까?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 4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관계가 정화되는 것입니다.
참된 정화는 모든 관계에 앞서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가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자유로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실행해야 할 우리의 시간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모든 관계안에서 적용하고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성숙한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뜻이 주체가 되지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끈으로 연결시켜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영적여정입니다.
진정한 관계는 걸어가야 할 길을 힘차게 걸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성장되는 관계는 없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성장한는 관계의 신비입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만 이야기하는 동네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침인사는 “밥을 몇 그릇 먹었니?”였고, 저녁인사는 “오늘 돈을 얼마나 벌었니?”라고 이야기했지요. 어른들끼리 만나서 하는 대화는 “오늘 통장에 남은 돈은 얼마입니까?”라는 인사뿐이었습니다. 아무튼 사람들과의 대화는 주로 이러했습니다.
“너 몇 살이니? 체중은 얼마나 나가니? 키는 얼마지? 너희 집은 몇 평이야? 너의 아버지 차 배기량은 얼마니?”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숫자와 관련지어 질문하고, 또 여기에 숫자로 답변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을에 슬픈 일이 있어도 숫자 계산에만 힘을 쏟기에 슬픈 일 자체에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돌아가시면 “이제 마을에는 217명 남았구나.”라고 이야기할 뿐이고, 마을에 큰 홍수가 나면 몇 명이 죽고 재산 피해는 얼마가 났다고 숫자 계산에만 열을 올립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숫자를 잊어버릴 수 있는 묘약을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고, 이 사랑을 통해 동네 사람들은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주로 이러한 말만 했거든요.
“너는 오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니?”,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슬픈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어떻게든 위로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돕고 나누는 일이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지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만을 따지다보면 당연히 숫자 놀음만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이 세상도 어쩌면 이렇게 숫자 놀음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지요. 그리고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진정한 형제 누이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숫자로 계산하고 숫자로 판단하는 세상의 뜻이 아닌,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서는 것이 진정으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처럼 주님께서도 숫자로 계산하고 숫자로 판단한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너 오늘 죄 일곱 번 지었지? 너 오늘 기도 30분밖에 하지 않았어. 사람을 마음속으로 세 번 미워했구나.”
이런 식으로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다 숫자로 판단하신다면 얼마나 힘들까요? 그래서 미카 예언자는 말하지요.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을 닮아 우리도 이제는 세상의 뜻이 아닌, 아버지 주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진정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지는 우리에게 온갖 책보다 많은 걸 가르쳐준다(생택쥐페리).
참가족
-신효원-
이런저런 소문의 주인공이 된 예수님을 만나러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만류하고 가능하다면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문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진정한 가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가족들이 들었으면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혈육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 것이겠지요. 하늘 나라 백성의 자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구 단체에서 12년째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서른 명이 한 달에 두 번씩 모여서 기도하고 나누기를 하고 활동을 합니다. 자주 만나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한가족이지요. 그분 안에서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었으니까요.
만나면 반갑고 힘이 되어 주어서 든든합니다. 거기에서, 교회 안에 소공동체가 많아지고 활성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실감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형제들 앞에서 굳이 참가족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하늘 나라 백성이 되어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를 바라신 때문입니다.
이웃들을 하늘 나라의 참가족으로 초대하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참가족으로서 부족함이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당부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멀고도 먼 참 사랑의 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멀고도 먼 길이 참 사랑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하나가 참사랑을 향한 여행길을 꾸준히, 평생토록 걸어가는 것입니다.
미성숙한 사랑, 자기중심적 사랑, 유아기적 사랑, 거짓 사랑, 사랑 아닌 사랑에서 참 사랑, 더 큰 사랑, 진정한 사랑에로의 여행길.
참 사랑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자주 착각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사랑에 대한 착각입니다.
내 가정, 내 가족은 완전히 뒷전이면서 어깨띠 두르고 바깥으로만 나돌면서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미성숙한 사랑입니다.
나 자신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나 자신은 조금도 존중하지 않으면서 이웃사랑을 외치고 다닌다면 그것은 뭔가 어색한 사랑입니다. 이웃의 두드러진 결점이나 부족함, 불합리한 처사에 무작정 참아주는 것은 사랑 아닌 사랑입니다.
그래서 참사랑의 길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때로 투쟁도 필요합니다. 때로 상대방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쓴 소리도 참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비논리적인 주장, 몰상식한 행동, 불의한 처사 앞에 싸움닭처럼 갈기를 세우는 일도 참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더 큰 선, 공동선을 위해 사사로운 애정을 자제하는 것도 참 사랑의 길입니다.
성모님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고 성모님 신앙의 더 큰 성장을 위해, 참 사랑의 길을 걷기 위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성모님께서 들으셨을 때 꽤나 야속하게 들릴 말씀 같지만 사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성모님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모님의 신앙을 한 단계 도약시키려는 예수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머님, 이제 아쉽지만 더 큰 뜻을 실천하기 위해 떠나야 할 순간입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아버지의 부름을 따라 나자렛을 떠날 순간입니다. 더 큰 세상을 향해, 인류만민의 구원을 위해 정든 동네를 떠날 순간입니다.”
참 사랑은 아프지만 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아쉽고 안타깝지만 용기를 내어 쓰디 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인이 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부제가 되면, 신학교에서 강론을 합니다. 저도 부제로 두 학기 살면서 4번 정도의 강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강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나의 삶을 뻔히 알고 있는 동료 부제들과 후배 신학생들이 나의 강론을 듣고 있고, 뒤에서는 박사학위를 가지고 계신, 또 오랜 사제 생활을 해 오신 교수 신부님들이 강론을 듣고 계시기 때문에, 강론을 준비하는데 고민을 많이 합니다.
한 번은 오랜 시간 강론을 준비하면서, 강론을 썼다 지웠다 하기를 반복하다가 새벽까지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론을 했는데, 미사가 끝나고 허탈하고 허무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있고 나서, 그 날 오후에 영적독서를 하는데, 거기에 한 글귀가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내용은 “글쓰는 일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책상에 앉아 숭고함에 대해 끄적거리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짧은 글귀는 순식간에 많은 것을 반성하게 해 주었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욕심, 그리고 논리적으로 말이 되고,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려고 너무 신경을 썼던 제 모습을 반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 글귀를 읽은 다음부터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 졌습니다. 그리고 무게 중심을 글을 잘 쓰는데 둘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데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기를 바라십니다. 이탈리아에서 ‘포콜라레’ 한국말로 ‘벽난로’ 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든 끼아라 루빅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에 성경 말씀이 다 없어진다 해도,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다시 복음을 쓸 수 있도록, 우리는 성경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리사이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있습니다.
【포장이 잘된 8차선 도로와 비포장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길로 달리고 싶으십니까? 그런데 어떤 길이냐? 하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길의 목적지입니다. 아무리 포장이 잘된 도로라 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면 그 길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면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끝’은 보지 않고 ‘길’만 비교합니다.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하느님은 나를 왜 이리 험한 길로 인도하시냐고 불평하기도합니다. 또 세속적으로 잘 나가는 악인들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왜 저런 악인들만 평탄한 길로 인도하시느냐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원망이 생길 때,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디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송봉모 신부님의 글)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비틀거리고 절면서 바른길을 가는 것이 편안히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를 참된 생명과 행복으로 이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그 길을 성실히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나를 가리키시며 말씀하신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리아와 주님의 형제들이 주님을 만나러 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님을 둘러싸고 있어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 중 마리아와 형제들을 아는 사람이 이들이 찾아온 사실을 알립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이들의 방문에 언뜻 보면 무심한 듯, 또는 성가신 듯한 태도를 취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당신 어머니, 형제들이라 하십니다.
오늘은 이 복음 말씀 중에 “가리키며”라는 말씀이 새겨졌습니다.
제가 말씀의 청중 중에 끼어 있는데 주님께서 바로 저를 가리키는 것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종종 주님의 말씀은 시냇물이 흘러가듯 흘러갑니다.
나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인 듯 말씀을 흘림으로 주님의 말씀을 흘리는 것입니다.
사랑을 흘리고 사랑이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옆 사람에게 하는 말씀으로 흘림으로 나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주님의 사랑 고백은 말하자면 저에게 퇴짜를 맞는 것입니다.
저는 강의를 할 때 질문을 많이 합니다.
전체에게 질문을 덜질 때도 있지만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개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갑자기 질문을 받으면 싫어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효과가 있습니다.
질문을 받는 그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흘려듣지 않고 적극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흘리려는 저를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형제이고, 네가 내 어머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런 말씀입니까?
그러나 그 다음 말씀은 당신의 형제이며 어머니인 제가 어찌해야할지 묵직한 과제를 턱 얹어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실천.
“주님의 형제된 것, 어머니 된 것만 좋아하지 말고 주님의 형제답고 어머니답게 실천하라!
이것을 무겁게 생각하고 받아들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하느님의 가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침 성무일도 독서(2코린) 시 마음에 와 닿은 구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진정 하느님 가정의 식구가 될 때 퍼져나가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써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진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 가정의 식구가 된 구성원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소개장입니다.
언젠가 읽은 짤막하지만 이보다 좋은 추천사를 본적이 없습니다.
필자의 이름을 대면서 ‘이름 석자가 추천사이다.’ 라는 추천사였습니다.
이름만 대하면 그대로 알 수 있어 사실 이름 석 자만 보고 믿고 무조건 책을 사보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진정 하느님의 사람들, 이름 석 자가 그대로 하느님의 추천장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이상은 유토피아 공동체의 건설입니다.
인류역사상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동체 운동에 헌신했고 오늘 날 또한 곳곳에서 시도되고 있는 공동체 운동인지요.
실패로 끝난 듯이 보이는 공산주의 운동 역시 일종의 유토피아 공동체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진짜 유토피아 공동체 건설의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 모인 하느님의 가정이 바로 유토피아 공동체입니다.
아침 묵상 시 문득 떠오른
‘아, 수도원이 원래의 내 집이었나?
제 집을 찾아 온 수도형제들인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불교의 절이든, 우리 천주교의 수도원이든 우연히 방문했다가 집처럼 편안히 느껴져 눌러앉아 수도승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지 않습니까?
혈연의 가정공동체들,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한지요.
하여 붕괴되는 혈연의 가정들 얼마나 많은지요.
좀 거칠다 싶지만 피정지도 강의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 게 피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사실 돈 욕심으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가정들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때로 혈연의 가정보다 하느님 가정의 교회 내 형제자매들이 가깝게 느껴지는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밥만 먹어 식구가 아니라 하느님을, 주님의 성체를 나눠야 진정한 식구입니다.
불안하고 위태한 가정공동체가 온전하려면 하느님 가정의 공동체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합니다.
바로 유토피아 공동체의 원형은 하느님의 가정인 교회공동체요 수도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마음의 순수를 목표로 하는 우리 수도승공동체입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수도가정에서 ‘순수한 마음’의 식구들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주님은 자신을 찾아 온 혈연의 가족들을 밖에 기다리게 해 놓고 당신 제자들에게 반문하신 후 당신 주변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다음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유토피아 공동체에 대한 답은 이 말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행하며 살 때 비로소 하느님의 가정 유토피아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가정, 유토피아 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가정에서 가장인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예수님을 맏형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넓게 보면 우리 모두 하느님 가정의 한 식구들입니다.
오늘 1독서의 주전 8세기 예언자 미카는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분열, 약화된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하느님의 가정으로 모으고자 온 힘을 다 기울입니다.
하느님 가정의 재건에 우선적인 게 기도입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인 미사와 성무일도입니다.
“주님,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미카의 간절한 기도에 이은 하느님 고백입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 때 자애와 연민의 하느님 가족들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시고 당신 말씀과 성체의 양식으로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한 식구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