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에 나는 청주교동 국민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아이들이 자그마치 3000명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제 많은 친구들이 생길 것을 생각하니 무척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잠깐입니다.
아이들이 내가 다리병신임을 알고
"다리병신"
"절름발이"
라고 놀리며 더 심한 것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절룩절룩 흉내를 내는 것인데 나는 그것이 너무 싫었고 창피하였습니다.
그리고 체육시간에는 변소에 가서 숨어 있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키가 작아 맨 앞에 앉았고 내 짝꿍은 김화자라고 하는 예쁘장 하게 생긴 소녀였는데,
그 아이는 절름발이와 같이 앉는 것이 창피한지 항상 나를 싫어하고 나에게 눈을 흘키며 입을 삐죽 거립니다.
어느날은 무엇 때문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를 노려보며 주둥이를 바짝 오무리고 손톱을 고양이처럼 세운후 나의 오른손등에 꽂히며 몸을 부르르 떨며
"에엥"
합니다.
그러자 내 손등에서 5개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데 나는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르며 마구 울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달려와 나를 데리고 가서 약을 발라주고 영단에 전화를 걸어 어마니가 달려오게 합니다.
나는 어머니가 그 계집아이를 야단쳐 주기를 바랬는데 어머니는
"친구에게 너무 나쁜 짓을 하였구나 ! 앞으로는 그러지 말거라"
고 충고만 주시는게 아닌가?
선생님이 그 아이를 다른 자리로 옮겨 주고, 내 옆에는 그 게집아이와는 전혀 다른 아주 착한 아이가 와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쥐어뜯은 아이의 이름이 아직도 김화자라는 것을 기억하지만 착한 아이의 이름은 전혀 기억에 없습니다.
모두 지금은 나와같이 80이 넘었을 텐데 잘 있는지 어디에 사는지 보고싶어 집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나라가 해방이 됩니다.
우리나라가 우리의 힘이 아닌 미국때문에 일본의 압정에서 해방이 되었지요.
그러자 미국 군인들이 한국에 곳곳에 많이 와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청주에도 미국 군인들이와서 머뭅니다.
일본이 항복을 하였고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이 해방이 되었으니 미국은 한국을 통일시켜줄 국제법상의 책임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미국은 북한의 쏘련을 건들기 싫었는지 남한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선진국인 미국이 한국에 와서 본 것은 그 어느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가난이 자르르 흐르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비포장 도로에 다 쓰러져가는 초라한 초가집 천지이고 손바닥만한 밭뙈기에서 농사를 짓고 죽지못해 사는 모습에 경악을 합니다.
인재도 없고, 지하자원도 없고,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잔재들 뿐입니다.
미국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런 나라를 어떻게 잘 살게 해 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 해 보이고 잘 살게 해 줘도 운영을 할 줄도 모르는 바보들만 사는 나라라는 인식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게 됩니다.
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은 착하기만 하고 바보 같기만 한 한국인들이 자기들이 한국에 머무는데는 편하기만 합니다.
여자들은 예쁘고 순수하여 찦차를 타고 다니며 여자들을 납치해 가서 밥새 즐기다가 돌려 보내는 것을 나는 청주에서 흔히 봅니다.
문제는 미국이 그렇게 편하게 태평년월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그들의 무리들이 쏘련을 비밀리에 왔다갔다하며 쏘련에서 비행기며 탱크며 각종 전쟁물자들을 감쪽같이 북한으로 실어나르는데 미국은 까맣게 모릅니다.
그것은 미국의 절대적인 잘못입니다.
미국은 한국을 통일시켜주어야 할 중대한 책임을 다 하지도 못했고, 북한이 전쟁 준비를 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그 책임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거기에 대하여 사과 한마디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이승만후 부터 오늘의 문재인 대통령까지 미국에 책임조차 묻지도 못하고
북한을 질타하지도 못하는 `이상한 엘리스의 나라` 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지금 한국인들은 한국을 자화자찬하기에 바쁩니다.
모두 역사를 옳바르게 알아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대사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을 하지 못했습니다.
곧 있을 6,25 전쟁을 불러온 미국은 한국이 쑥대밭으로 변하게 만들었고
400만명을 죽게(군인들포함)만들었는데 그 책임이 하늘에 닿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리숙하여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그냥 입 꾹 다물고 있을 뿐입니다.
그 역사 이야기를 다 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국민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을 다니면서 때로는 학교에 가기 싫어 들로 무심천으로 헤매다가 집으로 들어가기 일수입니다.
내가 4학년이 되자 철이 조금씩 들면서 최하위로 떨어진 성작이 조금씩 올라가기시작합니다.
"얘 세근아?"
"응 엄마"
"내일 나하고 장호원 가자"
"거긴 홰?"
"네 외삼촌 딸이 시집간다"
(계속)
첫댓글 대하소설 같은 자서전이 연재 중인 걸 몰랐습니다
45년이면 제가 태어 나기도 전이니 아득한 옛일이군요 .
어서오세요 단풍들것네님 찾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나날 되시고요
오타가 너무 많이 고쳤어요 죄송합니다.
교동국민학교 나오셨군요,
어린시절에 겪었던 일들을 생생히 기억 하시는 것 보면
학교 성적은 우수 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께서 외삼촌 집에 두고 오실것 같은 불안감~~?
수지니님 어서오세요
제가 어렸을 일을 쓰니 모두 어렸적이 생각나나봐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지난한 역사의 산증인이시네요.
오늘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기억력도 대단하시지만 비문 없이 펼쳐주시는
필력 또한 대단하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송초님 오셨어요? 어렸을적 기억은 누구나 다 하지요
부족한 글인데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
미군정하의 국민학교 시절을 맞게 되시는군요.
저희 둘째 오빠가 1943년 1월생이신데 서울 서대문 초등학교를 입학하셨습니다.
단기 4282년 9월3일
미국의 학제를 따른다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름 입학이 이루어졌다고하더군요~
지금 우리나라도 코로나사태로인해 여름입학을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장애인의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지요. 비하하고 멸시하고 사회적 배려가 전혀 없는 황무지 같은 환경에서 학교를 다니시는 의지가 가상합니다.
'아는것이 힘이다! 배워야산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외삼촌댁 잔칫집가서 맛난거 많이 드시고
기운 차리셔서
열공하시기 바랍니다^^
자하님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오빠가 6,25 때에는 8살이 되고 국민학교 1학년쯤 되었개ㅔㅆ네요 감사합니다.
@형광등등 6.25때 저희는 서울 한복판에 살았었답니다.
서울역 폭격과, 미대사관과 소련대사관 폭격 다 목도하고
먹을께 없어 무지 고생하셨다네요.
배재학교에 인민군여단이 주둔해
어머니가 부역에 끌려나가 밥해 주고
누룽지도 얻어오셨다 들었습니다.
9.28서울 수복의 기쁨도 잠시..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란..
그래도 아버지 직장이 든든하셨기에 사택에서 살며
고생은 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하 자하님 고생을 하셨네요 특히 가족들이,
6.25의 아픈이야기가 쏟아지네요 부모님들이 무척 고생하셨지요
저도 이제 곧 그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올려주신 모든글 아픈마음으로
잘읽었습니다
저도 부모님 생각
많이 했습니다
항상건강 하시고
보람된 4월 되십시요
형광등듬님 ㅎ^^
제가 아픈 추억을 떠올려드려 죄송하네요
님도 앞으로 다욱 좋은 나날되시기 바랍닞다. 감사
삭제된 댓글 입니다.
환타스틱님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이가 보고 싶답니다 하하하
어린나이에 큰 상처로..이름까지 기억을 하시는것 보니 그 할머니 참 나빴어요
저희 엄마랑 연세가 비슷하시네요
엄마한테 많이 들었던 이야기 인데 실감이 안나네요 그렇게 못살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미국이 손을 뻗치니까요
다음호가 기대됩니다^^
리즈향님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84세예요 엄마가 장수하시네요 더욱 오래 사시길 빕니다.
추억이 깊어시군요 만약
그때 멕아더 원수의 주장대로 만주를 폭격했더라면 어쩌면 통일이 되었을수도 있었겠지요 다만 확전을
싫어하는 트루먼 대통령의
반대로 불발되고 공산치하에서 구해준 멕아더 장군은 해임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는걸
학창시절 배웠던 기억이...
잘읽었습니다
기라성님 어서오세요 맥아더가 바보는 아닌데 중국의 몇군데만 폭격하면 끝나는데
트루만이 바보같이 그를 당장 끌어내리렸지요 그 덕에 한국의 통일은 물건거 갔고요 참으로 원통합니다.
즐감 합니다 그리고 멋집니다 ㆍ선배님 저는고향 충북괴산 칠성면 외사리 입니다
아
저보다 대선배님이시군요.
그 시절에는 제가 태어 난 50년 대보다 훨씬 더 곤궁하고 어려운 분들이 많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우리네 사람들은 누구나 추억을 되새기며 산다고 들었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겠지만 지금은 담담히 되돌아 보실 수 있으심도 행복이실 듯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