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시간 변화는 동시 패션이다!" 과거의 사실이 현재의 기억 상기와 재 저장의 과정에서 왜곡될 수 있고, 과거의 왜곡된 사실이 현재의 기억 과정에서 바로 잡힐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거울 단계>가 왜 자아의 형성이고, 그것이 6개월 이후 평생을 달고 가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아이의 분열-소외-기억-그 후의 억압-그 그 후의 가끔 드러남... 프로이트의 아이 적 기억과 콤플렉스를 조금 이해한다 해도 이를 성인에까지 적용한다는 것이 과연 맞을까.
-
병오년 새해입니다. 유일한 형제인 주용이 아비도 이제 60줄에 올라섰네요. 모쪼록 건강하고 목회의 지경이 넓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연말에 다녀왔던 왕십리 투어를 한 번에 끝내지 못해서 이어서 가겠습니다. <진국 설렁탕> 집은 이남장보다 먼저 삼은 당골 집인데 성석 교회 시절(25-45세) 공동체에 올-인할 때 자주 다녔습니다.
-
포인트 당구장에서 직빵을 치며 날 밤을 깐 날은 너 다섯 명이 와서 주야장천 설렁탕을 먹었을 것입니다. 40년 동안 주인이 2번 바뀌었는데 지금의 사장님은 나를 기억할까요? <대영 목욕탕> 옥탑방에서 에스더 돌잔치-선친 회갑 연을 했습니다. 태양 당구장은 혜란이네 부동산 건물 3층으로 이사를 했고 목욕탕은 없어졌습니다. 100m 지나서 양철 대문에 3년 정도 살았을 것입니다.
-
현역 제대하고 대우자동차(주) 입사 전(1987-1990)까지 이곳에서 미아리까지 직장을 다니며 서울 살이를 시작했어요. 작은방 한편에 치교 어머니가 브랜드 봉재를 하며 아들 한 명을 키웠는데 그 꼬마도 50이 다 되었을 것입니다. 중화동에서 미용실을 했던 정희라는 친구에게 내가 못되게 했던 기억이 나서 유일하게 미안합니다. 그래도 나랑 결혼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24살에 21살 청춘 남녀가 연애를 했으니 모든 게 서툴렀을 것입니다.
-
다시 왕십리 <쉐르빌>로 돌아왔습니다. 쉐르빌 아파트가 세워지기 전에 왕십리 종합상가가 동대문 종합상가만큼, 혹은 그 이상의 사이즈로 건재했었습니다. 필자는 담양 촌놈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 패밀리들이 이곳에 터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1960대부 터 70년-80년 초까지 일 년에 두 번씩은 이곳에서 방학을 보냈어요. 당시에 종합상가 내 화장실 이용료가 2원인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
쉐르빌을 왼편에 두고 우회전을 하면 <도선사> 건물이 한 20년 전에 지어졌는데 지금은 도선동 지형의 기준점이 된 것 같습니다. 도선사가 본부를 도선동에 둔 것은 우연일까요? 어머니가 10년 넘게 사셨던 길모퉁이 단독주택은 택지 사이즈 만 한 고급 카페 건물이 서 있어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왔습니다. <동해 사우나>도 <보보스>도 모두 없어졌어요. 김흥국의 <59년 왕십리>가 탄생한 먹자골목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전풍 호텔>도 한 5년 전쯤 없어졌는데 이곳 제일은행 앞에서 포차를 했어요.
-
스포츠 가방에 현금 200만 원을 들고 와 대책 없이 시작한 포차는 그 해 겨울에 고생만 새빠지게 하고 망했어요. 조국현이라는 헌병대 쫄따구는 어디서 잘 사는지 가끔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길 건너가 행당동 시장입니다. 그곳엔 잘 가지 않았고 무학교회 시절 찬민이네 화실에서 G.B.S 하느라고 지나다녔을 것입니다. 양지 사거리에서 신당역까지 강북 타운 때 신시가지가 만들어지면서 왕십리는 땅값이 오르는 분깃점이 됐을 것입니다.
-
키다리 조형물 앞에서 한 컷 찍고 고고싱! 이곳에 있던 금형 가게들도 모두 소멸되고 말끔한 주상복합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중앙시장은 포차 할 때(24세) 시장을 봤던 곳이고, 30년이 훌쩍 지나 50대 초반에 미영이라는 여친의 모친이 운영하는 식당에 딱 한 번 밥을 먹으러 온 기억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바카라 게이머였는데 도박을 너무 좋아해서 깨진 것 같습니다. 중앙시장 길 건너 단골 마사지 집이 얼마 전에 없어졌고 신당 사거리에 <광동 수산>이 있었어요.
-
노무현 시절 그곳 2층에 있는<바다 이야기>게임장을 2년 동안 주야장천 다녔어요. 동대문 운동장 어딘가에 세븐 포커를 치러 갔다가 짱구 배팅 하는 타자들에게 걸렸습니다. 염병, 방법이 없어서 난생처럼 강도 짓을 했다는 것 아닙니까? 500 정도를 잃었는데 집에 와서 카운터 해보니 550만 원이었어요. 다음날 게임장이 발칵 뒤집어졌는데 놈들이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 경찰서에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
광동 수산 길건너엔 신당동 떡볶이 군락입니다. 디제이가 있던 시절엔(80년대) 가보지 못했고 성석 교회 시절(90년대) 가족들과 서너 번 다녀왔는데 가격이 싸서 갔지, 맛있어서 간 건 절대로 아닙니다. 한국전력을 지나 성동고 앞입니다. 여기만 들어서면 지금도 가슴이 쿵덕거리는 이유를 아시나요? 내가 이곳 청계천 복개 공사를 할 때(5-6세) 보고 삼일 고가 철거-청계천 시대까지 40년을 목격했으니 동묘 프리마켓의 원주민입니다.
-
골프 바지를 하나 구하러 왔는데 물건이 없습니다. "이렇게 일찍 웬일이에요? " "You look good today. Do philosophy!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철학을 하시라!(나)" 라캉의 <주체와 환상의 차이>나 <분열>은 정신을 쏙 빼놓습니다. 생후 6개월 된 아이가 거울 앞에서 완전함이란 <환상>에 붙잡혀 <소외>를 겪게 되고 평생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결핍과 욕망에 진입하게 된다는군요.
-
아이와 침팬지의 거울 앞의 행동이 다르지만 언젠가 돌고래가 거울 앞에서 하는 행동을 본 적이 있는데 마치 아이의 알 수 없는 춤추기에 대한 서술을 너끈히 상상하게 합니다. 이것을 인간이 가진 <게슈탈트>를 소외로 보기도 하더이다. <게슈탈트>는 독일어로 형태, 전체적 구조, 하나의 완결된 모습을 뜻합니다. 전체는 부분들의 합이 아니라,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낸 구조입니다.
-
라캉의 거울 단계에서 아이는 자기 몸의 감각은 산산이 흩어져 있는데, 거울 속에서 하나의 ‘완성된 전체 이미지’를 봅니다. 이때 아이가 붙잡는 것이 바로 <게슈탈트>입니다. 실제의 나는 아직 분절되고 불안정하지만 거울 속 나는 형태가 갖추어진 전체(게슈탈트)입니다. 물론 환상이지만 말입니다. 자아란 내가 실제로 경험하는 나가 아니라, ‘전체로 보이는 나의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입니다.
-
라캉의 <게슈탈트>는 심리학을 넘어서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꿉니다. 우리는 나 자신도 타인도, 삶도, 사실은 조각난 경험들의 집합으로 살고 있지만, 견디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나’로 묶습니다. 혼잣말, 사소한 장면, 불연속적인 사유들은 겉으로 보면 파편이지만, 하나의 삶의 <게슈탈트>인 것입니다. 라캉에 따르면 자아는 내부에서 자라난 실체가 아니라, 외부의 이미지에서 태어난 오해입니다.
-
그 결정적 순간이 바로 <거울 단계>입니다. 아이는 아직 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합니다. 팔과 다리는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감각은 흩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 속에서 완전해 보이는 하나의 형상을 마주합니다. 놀랍게도 아이는 그 이미지를 ‘나’라고 인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자아는 내가 나를 느낀 결과가 아니라, 내가 나를 ‘보았다고 믿은’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
이때 <자아>는 탄생하지만, 동시에 분열이 시작됩니다. 현실의 나는 불안정하고 미완성인데, 거울 속 나는 매끄럽고 통일되어 있습니다. 자아는 처음부터 자기 자신과 어긋난 채 출발합니다. 라캉에게서 자아(Ego)는 결코 주체의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아>는 타자의 시선에 응답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면에 가깝습니다. <자아>는 항상 타자의 언어, 타자의 기준, 타자의 욕망을 거쳐 구성됩니다. 그래서 <자아>는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상처받기 쉬운 구조입니다.
-
젊을 때는 거울 속 이미지와 현실의 간극을 욕망으로 덮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 아직 기회가 있다는 믿음, ‘지금은 과정일 뿐’이라는 자기 위로 말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거울 속 이미지도, 사회가 요구하는 자아도 더 이상 쉽게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때 많은 이들이 좌절합니다. 그러니<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을 패배가 아니라 통과의례처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라캉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점은 자아의 해체가 시작되는 자리, 곧 ‘주체’가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의 자리입니다.
-
<자아>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 주체는 말실수 속에서, 침묵 속에서, 글의 행간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밉니다. 결국 죽을 때까지 <거울 단계>는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생 거울을 새로 만듭니다. 사회적 역할, 가족 안에서의 위치, 노년이라는 이름, 글 쓰는 ‘나’라는 이미지까지도 모두 새로운 거울입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자아의 균열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입니다. "나는 나를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긋남 덕분에 나는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
2.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계속 다시 만들어질 뿐이다" 이 글은 이론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길을 걷는다. 왕십리를 걷고, 사라진 목욕탕과 이전한 당구장을 지나며, 사라진 사람들과 남아 있는 기억을 불러낸다. 그리고 그 걷기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 된다.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시간 변화는 동시 패션이다!” 이 문장은 이 글 전체의 숨은 중심축이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겹침이며, 과거는 끝난 적이 없고, 미래는 이미 기억 속에서 예행연습된다.
-
과거는 현재 속에서 다시 기억되며 배 저장되고, 그 과정에서 왜곡되기도 하고, 바로잡히기도 한다. 기억은 보존이 아니라 편집이다. 이 지점에서 글은 자연스럽게 프로이트와 라캉의 문제의식과 접속한다. “아이의 분열-소외-기억-억압… 이것을 성인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라캉은 아이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주체의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
라캉에게서 ‘아이’는 생물학적 연령이 아니라 구조적 위치다. 거울 단계는 “6개월짜리 아이가 겪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 반복해서 겪는 ‘자기 동일시의 형식’이다. 그래서 왕십리의 거리에서 24살의 나-50대 초반의 나-지금의 나가 서로를 낯설게 바라보는 순간, 그 장면 자체가 다시 하나의 <거울 단계>가 된다. 그렇다면 거울 단계는 왜 자아의 형성인가? 라캉의 핵심은 단순하다. 아이는 아직 자기 몸을 하나로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는 완결된 전체 이미지(게슈탈트)를 본다
-
아이는 그 이미지를 ‘나’라고 오인한다. 여기서 자아가 생긴다. 그러나 이 자아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자아는 처음부터 분열적이고 소외적이며 환상적이다. “40년 동안 주인이 2번 바뀌었는데 지금의 사장님은 나를 기억할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이것은 자아의 불안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와, 타자가 기억하는 나는 같은가?” 라캉에 따르면, 거의 항상 같지 않다.
-
이 글에서 <게슈탈트>는 이론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등장한다. 흩어진 장소들-끊어진 관계들-부끄러운 기억과 후회-말하지 못한 사건들, 이 모든 파편들을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야만 견딜 수 있다. 게슈탈트란, 진실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구성이다.“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내 삶은 이런 궤적을 가졌다” 이 말들은 사실이기보다는 버텨내기 위한 형식이다. 그래서 라캉은 <게슈탈트>를 ‘인간적 능력’이면서 동시에 ‘소외의 구조’로 본다.
-
이 글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노년에 대한 태도다. 젊을 때는 욕망으로 자아의 균열을 덮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더 이상 거울 속 이미지가 유지되지 않는다. 이때 선택지는 둘이다. 자아를 붙들고 분노하거나 자아의 균열을 통과로 받아들이는데 이 글은 분명히 두 번째 길을 택한다.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을 패배가 아니라 통과의례로 바라본다.” 라캉적으로 말하면, 이때 비로소 주체가 말하기 시작한다. 말실수 속에서... 혼잣말 속에서... 글의 행간 속에서...
-
이 글은 라캉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라캉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왕십리는 하나의 거울이다. 사라진 장소들은 또 다른 거울이다. 기억은 계속 왜곡되며 다시 저장된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은 정확하다. “나는 나를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어긋남 덕분에 나는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말한다. 자아는 완성되지 않는다/기억은 고정되지 않는다/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다만 우리는 계속 다시 구성될 뿐이다. 그리고 그 재구성의 흔적이 곧 한 인간의 사유이고, 이 글 자체가 하나의 삶의 게슈탈트다.
2026.1.1.thu.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