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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관계를 맺어주시는 분이 관계를 유지할 힘도 주신다>
애완견에 1,200만 달러(약 150억 원)의 유산을 물려준 사람이 있습니다.
헴슬리 호텔 등을 소유한 미국의 부동산 여왕으로 불리는 리오나 헴슬리(Helmsley)입니다.
그녀는 2008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남동생과 손자 2명에게는 1,000만 달러(약 120억 원)씩 상속을 물려주었지만, 그의 애완견 ‘트러블’에게는 1,200만 달러(약 150억 원)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엄청난 유산을 받은 애완견 ‘트러블’은 8년 전 친구가 선물로 준 강아지였습니다.
병원에 데려갔지만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야단법석을 피웠기 때문에 이름을 ‘트러블’이라고 지었습니다.
‘트러블’은 경호원, 간호사, 호텔 손님 등 헴슬리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물어 소송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헴슬리는 ‘트러블’을 개라 부르지 말고 공주라 부르게 하면서 ‘최고의 경호원’이라며 자랑했습니다.
왜 애완견에게 그렇게 많은 액수의 유산을 남겼느냐고 의아해하며 그녀의 정신 상태에 의심하기도 하지만, 그는 40억 달러(약 5조2000억 원)를 사회에 기부함으로써 2008년 미국 최대 기부왕으로 등극한 것으로 보아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애완견 트러블에게 그 많은 액수를 유산으로 준 것도 이해가 갑니다.
말년에 친지와의 별다른 교류도 없이 드넓은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혼자 지내야 했기 때문에 ‘트러블’은 그녀의 유일한 벗이자 절대적인 애정의 대상이었습니다.
트러블은 헴슬리가 외출한 후에는 호텔 방문 앞에서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3시간이 넘도록 꼼짝도 하지 않고 엎드려 자리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트러블은 말썽꾸러기였어도 주인을 따르고 주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인은 그에게 그만한 대접을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면면히 흐르는 의문은 ‘왜 어떤 사람은 표징을 보고 그리스도를 믿지만,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는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내리는 결론은 그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관계의 주체를 아버지로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으실 때도 밤새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물으셨습니다.
또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으로 뽑으실 때도 아버지께서 누구를 교회의 수장으로 정하셨는지 아시기 위해 시험해 보셨습니다.
당신을 누구라고 보느냐고 물으신 다음 베드로만 올바로 대답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성령을 주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관계의 주체를 자신이 아닌 아버지로 두는 것은 세상의 어떤 지혜보다도 높은 지혜입니다.
관계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버리면 자신의 기분에 따라 관계의 친밀함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관계의 주체가 되는 사람은 변덕이 심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관계의 힘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사랑의 열매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성령은 하느님의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 유산을 주시고 싶으시겠습니까?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에게 주고 싶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주고 싶으시겠습니까?
유산을 받으려면 유산을 주는 이를 잘 따라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인 이사악의 신붓감을 찾아오라고 종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종은 주인의 뜻에 따라 레베카라는 여인을 찾고 이사악에게 데려옵니다.
이사악은 아버지가 정해주신 신붓감을 두말없이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것이 이사악이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정해준 신붓감을 두말없이 받아들이는 이사악을 보고 아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로써 또한 둘이 잘 살 수 있도록 모든 유산을 부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뜻을 물어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살 사람을 선택하고 유산만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그 유산을 기꺼이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관계도 쉽게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관계를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사람들 안에는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이런 면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유산인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들이 또한 관계의 주체라는 교만함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성모님처럼 준비된 사람에게만 성령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는 사람은 관계를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선물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의 주체가 자신이라 믿는 이들은 인간관계도 안 되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안 됩니다.
레베카는 모르는 사람에게 물을 길어주고 낙타 열 마리에게도 물을 먹여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관계의 주체가 자신이 아닌 주님께 두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맺어주신 사람들이라고 믿고 최선을 다할 때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성체 성혈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영원한 생명도 주어집니다.
관계를 맺어주시는 분이 그 관계를 유지할 힘도 주십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생명의 빵이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청하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 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육체의 고통을 없애 줄뿐인 육체의 양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입니다.
본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체를 썩지 않게 보존해 주십니다.
곧 당신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믿고 받아먹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그리하여 이 빵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39-40)
예수님의 순명입니다.
곧 예수님의 뜻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행하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 데 전념합니다.
그렇게 당신께 오는 이를 물리치지도 않으시며,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뜻은 순명 안에서 일치를 이룹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을 보내신 분을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요한 6,40)이라고 말씀이 덧붙여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보고”(Θεωρεω)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각 작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참되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십자가 아래서 “이 일들을 보고”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라고 고백할 사용된 동사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아들을 보면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2,45)과 같은 그런 봄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열리는 눈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일입니다.
주님!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그토록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의 취미와 기호에 맞지 않다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그토록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주며
그토록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미처 믿지 못하여도 저를 믿으시고 아직 사랑하지 못하여도 저를 사랑하시니,
오늘, 제가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금 여기서, 오늘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끝까지 순종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준비하는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앙생활은 먼 미래에만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내 삶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전적인 자기 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 가롤로 보르메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저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시자 두근거리던 제 가슴이 진정되었습니다>
언젠가 꽃과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 이어 인접해있는 도시 시에나에 들렀을 때였습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느낌, 시간이 멈춰선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순례객들은 다들 ‘피렌체, 피렌체!’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소박하지만 매혹적인 시에나에 훨씬 더 눈길이 갔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 사이로 빼곡히 들어선 고풍스런 옛 건축물 사이를 걸어 다니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토록 고색창연한 명품 도시 시에나를 더욱 빛나게 하는 인물이 있으니, 아름답고 매력 넘치는 성녀(聖女)로 유명한 시에나의 카타리나 동정 학자(1347~1380)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도미니코회 재속3회 회원으로서 그녀는 탁월한 신앙생활은 즉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 빛나는 수덕생활, 사심 없는 이웃사랑의 실천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지상에서 머물러야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불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단명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후세 사람들은 대신비가, 탁월한 중재자, 위대한 신학자, 명설교가, 간호사들의 수호성인, 최초의 여성 교회 박사 등의 영예로운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카타리나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찾았고 만났으며, 사랑의 합일로서 주님과 일치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그녀의 고백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주님 사랑에 깊이 빠져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벌거벗음을 덮어주시는 의복이십니다.
당신은 쓴맛이 조금도 없는 감미(甘味)이시므로 그 감미로움으로 배고픈 우리를 먹이십니다.
오, 영원한 삼위일체이시여!”
깊은 묵상과 관상기도 안에서 주님의 형상을 뵙고 난 카타리나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시자 두근거리던 제 가슴이 진정되었습니다.
저도 그분을 향해 방긋 웃었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자 제 마음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부활절 아침 성당의 종소리를 들을 때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성탄전야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눕혀드릴 때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길 때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살아생전 언제나 주님을 눈앞에 뵙듯이 살았으며, 살아있는 주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그녀에게 주님께서는 오상(五傷)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천국을 확신한 그녀였기에 임종 직전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이여,
이렇게 울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나는 이 눈물의 세상을 떠나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 속에 쉬러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셔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와 늘 가까이 있겠고, 또 하늘에서는 더욱 열심히 어머니 역할에 충실할 것을 약속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니 가겠습니다.
주님의 귀중한 피로써 나를 구원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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