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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를 돌려보내는 블레셋
삼상 6:1-9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3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6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삼상 6:1-9 / [법궤의 귀환] 법궤가 블레셋 땅으로 옮겨온 지 7개월이 되어서였다. 2)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법궤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려주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법궤를 잘못 다루어 또 다시 무서운 화를 입을까 염려되어 제사장들과 전국의 유명한 점쟁이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우리가 여호와의 법궤를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잘못 다루었다가는 또다시 어떤 변을 당할지 몰라 여러분을 부른 것이오. 법궤를 무사히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없겠소?' 3)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법궤만 그냥 돌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이스라엘 신에게 합당한 예물을 바쳐서 당신들의 과오를 씻어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법궤를 잘못 다루었던 허물도 용서받고 당신들의 병도 고쳐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이 무엇 때문에 계속 당신들만 치고 있겠습니까? 그 신은 틀림없이 당신들에게서 떠날 것입니다!' 4)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이스라엘의 무서운 신을 잘못 건드려서 화를 입었는데, 그분에게 어떤 예물을 바치며 용서를 빌어야 옳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는 다섯 도성의 왕의 숫자대로 여러분의 몸에 난 종기와 이 땅을 망치는 쥐의 모양을 금으로 각각 다섯 개씩 만들어 보내십시오.! 이는 다섯 도성의 주민과 왕들이 모두 똑같은 재앙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5) 당신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신의 우월한 권능을 인정한다는 표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이 노여움의 손길을 당신들에게서 거두어 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6) 당신들은 이제 조금도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오래 전에 애굽 백성과 그들의 왕 바로가 완고하게 고집을 부리다가 오히려 엄청난 재앙만 더 당하였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신은 그들에게 점점 더 무서운 권능을 보여주셔서 결국 그들은 온갖 재앙을 당할 대로 다 당한 뒤에야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보내고 말았습니다. 7) 이제 그와 같은 전철을 다시 밟지 말고 이와같이 해보십시오. 수레를 새로 하나 만들어서 이제 막 새끼를 낳아 젖은 먹이지만 아직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암소 두 마리를 구해다가 새 수레를 끌게 하고, 송아지들은 어미 소로부터 떼어다가 외양간에 가두어 두십시오. 8) 그리고 이스라엘 신의 법궤를 수레에 싣고, 그 신에게 예물로 바치는 물건이 담긴 작은 상자를 법궤 곁에 실은 다음, 그 암소 두 마리에게 제멋대로 수레를 끌고 가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9) 그러면 이토록 무서운 재앙이 어디서 왔는지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 암소 두 마리가 자기 고향 땅을 향하여 벧세메스로 올라간다면, 이번에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신 분은 그 법궤의 주인이신 여호와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우리는 `여호와께 재앙을 당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런 재앙이 우리에게 덮쳐 온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탈취해간 블레셋은 일곱 달 동안 여호와의 궤가 이르는 곳마다 재앙을 당하게 되자 그것을 어떻게 할지를 의논하였습니다. 이에 블레셋의 종교지도자들은 여호와의 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1-2)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서 이스라엘로부터 여호와의 궤를 탈취하여 갖고 있다가 지독한 종기 재앙을 견딜 수 없어서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시 여호와의 궤는 지방에 있었다고 했는데 이 단어는 ‘들’, ‘밭’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이 임하자 처치가 곤란하여 들에서 무려 일곱 달 동안 방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어떻게 보낼 것인지 가르치라고 요구합니다. 여호와의 궤에 대한 블레셋 사람들의 공포가 어느 정도 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거저 보내지 말고(3-6) 블레셋의 종교지도자들은 여호와의 궤를 보낼 때에 거저 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이나 남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그에 대한 속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던 제사였습니다. 근동지역에서는 남의 물건을 불법으로 취했다가 돌려보낼 때에는 보상금을 지불하는 것이 관례가 있었기에 여호와의 궤를 빼앗았다가 다시 돌려보내는 것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라고 한 것입니다. 속건제물로 금송아지 다섯 마리와 금으로 만든 쥐 다섯 마리를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속건제를 알고 드렸으며, 출애굽의 역사도 알고서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7-9) 블레셋 사람들이 준비한 새 수레,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재앙이 임할 때 여호와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던 반면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악함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젖을 떼지 않은 소가 끄는 수레가 이스라엘 지경으로 들어가면 블레셋에 내린 재앙은 여호와가 내린 재앙으로 알고, 그렇지 아니하면 우연히 생긴 일로 여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적 용 :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도 성경의 제사제도와 출애굽 역사를 잘 알고 있었는데 당신은 성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듣고 읽고 공부하는 일에 열성은 있습니까?
블레셋의 무너진 신은 사람이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신은 인간이 세우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다곤은 신이 아닙니다. 신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궤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손을 떠난 여호와의 궤는 혼자서 다곤을 무너뜨리고 가는 곳마다 블레셋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에 있었음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에 패한 것은 무력한 이스라엘 때문이지 하나님이 무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호크마 주석
=====6:1
여호외의 궤 - 여호수아 3 : 14-17 강해, '언약궤에 대하여' 부분을 참조하라. 블레셋 사람의 지방 - 여기서 '지방'( , 사데)은 '들', '밭'을 뜻한다는 점에서(창 2: 5 ;왕하 4:39), 그 당시 언약궤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 들(field)에 보관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언약궤가 들어간 도시마다 여지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들에 보관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 한 것이다. 일곱 달 - 이것은 물론 문자적인 일곱 달(seven months)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의 숫자 표기상 '일곱'(7)이라는 숫자가 보통 '완전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대체없이 빈 들에서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음을 강조한 말로 볼 수도 있다.
=====6:2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잘못 다룸으로써 엄청난 재앙을 만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제 정치적인 방법(5:8, 10, 11)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방식에 의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 '제사장'( ,코하님)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제사 직분자에게 적용되지만, 여기서처럼 이교(異敎)의 제사장을 가리키는 경우에도 사용된다(미 3 : 11). 그런데 이 이교의 블레셋 제사장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다곤(Dagon) 우상 숭배 의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자들이었다. 한편 '복술자'( , 코세밈)는 원래 '몫을 나누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즉 복술자(卜術者)는 작은 나무 가지들을 흔들다가 그것이 나뉘어져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점(占)을 치던 자들이었다(민 23:23;신 18:10).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이 극도로 타락했던 시기에는 이스라엘 안에도 존재했고, 또한 지도층 인사로 분류되기도 하였다(사 3:2). 아무튼 이들이 소집된 것은,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는 구체적인 방법 및 궤를 다루는 요령에 대해, 그리고 복술자들은 궤를 돌려보낼 날짜와 시기 등에 대해 블레셋 방백들에게 조언하기 위함이었다(Pulpit Commentary).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 블레셋 방백들의 이 질문은 또다른 재앙 없이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질문이었다. 본처로 보낼 것을 - 이 말은 법궤를 빼앗기기 이전 법궤가 안치되었던 실로(Shiloh)의 성소가 여전히 본래의 기능을 발휘 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 영토로 쳐들어 갔고, 심지어 그들은 실로의 성소까지도 그때 파괴했던 것 같다(렘 7:12;26:6; Albright). 따라서 여기의 '본처'(本處)는 실로(Shiloh)라는 특정 장소를 뜻하지 않고, 단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6:3
궤를...거저 보내지 말고 - 본 구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 나라 사람들로부터 '은. 금 패물과 의복'을 받아 나왔던 사건과 유사하다(출 3: 21 ; 11 : 2; 12:35, 36; 시 105:37;스 1:6). 더욱이 두 사건의 밀접한 유사성(類似性)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써 명백히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첫째, 본서 6 : 8과 출애굽기 12:35 모두 언약궤 및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려보낼 때 함께 보낼 예물을 언급하면서 공히 '켈리'( , '물건')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둘째,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나 출애굽 시의 상황 모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극심한 징벌을 받은 후에야 (5 :3-12;출 7:10-12:30)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언약궤 및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려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한편 바로 이같은 사실 들은,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실수로 타인의 소유물이나 사람을 취했을 경우에는 그 실수를 깨달은 직후 잘못 취한 물건이나 사람을 돌려 보내면서 실수에 따른 보상금(補償金)을 지불 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Klein). 한편 여기서 '보내지'( , 테솰레후)는 사역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잘못으로 위한 물건이나 사람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보내는 것을 가리킨다(창 20:7; 출 21:34;삼하 9 :7).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 여기서 '그'는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뜻한다. 따라서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무언가 잘못을 범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속건제'( , 아솽)는 모세 율법대로 따른다면 하나님의 성물(聖物)이나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죄를 범했을 경우에 그 죄를 속함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혹은 예물이다(레 5:14-16 강해, 속건제에 대하여). 이때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피해자에게 피해물 외에 별도로 1/5을 배상금 조로 주어야 했다(레 6 : 5, 6). 따라서 모세 율법에서 언급되고 있는 속건제(repayment offering)는 배상(賠償)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견지에서, 여기서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이 모세 율법에서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된 '속건제'(贖愆祭)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의심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아솽'이라는 단어가 '배상'의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볼 때, 블레셋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께 대해 인간적 차원의 배상을 위하여 이와 같은 예물을 생각한 듯하다. 또한 이같은 판단은 본절에서 원상 회복의 의미가 있는
노가 내려진 것으로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란 점을 언급한 것이다.
=====6:4
블레셋 사람의 방백 - 당시 블레셋은 다섯 개의 주요 도시 국가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각 도시는 자체의 방백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5: 8 주석 참조.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 - 여기서 '금독종'(golden tumor)은 여호와의 궤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한 '종처'(腫處) 또는 '종양'(腫瘍)의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이고, '금쥐'(golden mice)는 쥐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이것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당했던 재앙의 종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에 의하여 '쥐'를 통해서 맹렬히 전염되는 '독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였던 것 같다(5 :6). 한편 이와 같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것들을 형상(形像)로 만들어 귀하게 여기는 일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당한 '불뱀 사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민 21: 4-9). 따라서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도 그러한 불뱀 사건의 영향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설사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블레셋 술사들의 이러한 처방은 당시 이방 문화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즉 고대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어떤 소망을 빌거나, 혹은 감사의 표시를 할 때 그 내용을 형상화(形象化)하여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질병의 치료를 원하는 자가 그 질병든 모습을 금이나 은으로 형상화하여 신에게 바치는 경우, 난파선에서 구출된 자가 자신의 옷을 넣툰(Neptune) 신전에 바치는 경우, 해방된 노예가 그 쇠고랑을 신전에 바치는 경우, 승리한 검투사가 자신의 검을 신에게 바치는 경우 등이 있다(Pulpit Commentary;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ii.p. 63). 아무튼 이러한 배경하에서 여기 블레셋 술사들이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자신들의 나라 바깥으로 보내고자 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임할 재앙도 자신들의 나라에서 떠날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Payne).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 '금독종'과 '금쥐'를 방백의 수효대로 다섯개씩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재앙이 임했을 때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5:8)도 일반 백성들처럼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의 대표가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대표의 수효에 따라 금독종과 금쥐 형상을 각파 다섯개씩 만들었던 것이다.
=====6:5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 - 여기서 '땅'은 문자적 의미로 곧 '토지'를 가리킨다고 보기 보다는, 오히려 이것은 블레셋 국가 곧 '블레셋 족속'을 가리킨다고 봄이 좋다. 즉 블레섯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의 근본 재앙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땅을 해롭게 하는 쥐'라고 말한 것이다.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 이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잘 알지 못하여 그분께 범죄했던 자 들이, 이제 하나님의 크신 심판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을 가리킨다(수 7:19;렘 13:16). 그러나 블레셋 술사들의 이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이처럼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영광을 회복하신다. 혹 - 여기서 '혹'( , 울라이)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대로 어떤 행동을 하실 수도 또한 안하실 수도 있는 하나니므이 주권(主權)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암 5:15). 그 손을...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 이것은 배상(賠償) 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진정을 기대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보여준다.
=====6:6
바로가...강퍅케 한 것 같이 - 이것은 블레셋의 술사들이 출애굽 시에 하나님께서출애굽에 대하여 행하신 권능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4:8>.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이 당시 주변 국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역사적 대사건이라는 점을 시사한다(출 15:14-16;수 2:10). 한편 여기서 '강퍅케 한'( , 테카베두)은 '무겁다'의 뜻을 갖는 어근 '카베드'( )에서 파생된 말로서, '마음을 스스로 완악하고 교만하게 하다'란 의미이다(출 7:3;10:20). 그가...기이하게 행한 후에 - '기이하게 행한'( , 히트알렐)은 '욕보이다', '조롱하다'란 뜻의 동사 '알랄'( )에서 파생된 말로서, 곧 상대방을 일개 장난감처럼 천하게 위급하는 것을 가리킨다(31:4;삿 19:25;렘 38:19). 즉 애굽인들과 바로는 마음을 강퍅케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바로 이와 같은 징벌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애굽인과 바로 위에 행하신 기이한 일은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10대 재앙'(출 12:29-36 강해, 도표 참조)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 애굽인들과 바로가 하나님의 엄청난 재앙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내보낸 사실을 가리킨다. 블레셋의 술사들은 이 역사적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더이상의 재난을 당하기 전에 속건제의 예물과 함께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속히 돌려보내야 할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6:7
새 수레를 만들고 - '새 수레'(a new cart)는 한 번도 세속적(世俗的)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적이 없는 수레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같은 수레는 존재치 않았을 것이므로 블레셋의 제사장들은 그것을 새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블레셋 제사장들이 이처럼 법궤를 새 수레에 실어 보내고자 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그에게 경외심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이다(Keil, Fay).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소 둘 - 이것 또한 세속적 목적을 위해서 전혀 사용되지아니한 소를 가리킨다(민 19:2). 모세 율법에서도 정결 의식에 필요한 희생 제물은 이같은 조건에 부응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신 21 :3). 젖 나는 소 둘 - 즉 새끼가 딸린 암소를 가리킨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운반할 짐승으로 이같은 암소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블레셋 제사장들에게 있어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족속들에게 내려진 재앙이 어디서 말미암았는가하는 문제였다. 즉 그들은 그 재앙의 근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부터인지 아니면 다만 우연인지를 궁금해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9절에서 블레셋 제사장들은 재앙의 근원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놓고 있다. 즉 그들은 그 수레의 진행 방향을 보아 그 재앙의 근원을 규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새끼가 딸리지 않은 암소를 사용한다면, 그 암소가 목적지를 향해 곧장 간다고 하더라도, 그 암소는 다만 본능대로 길을 따라 간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새끼가 딸린 암소를 사용할 경우, 그 암소가 새끼를 개의치 않고 그렇게 곧장 간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가 개입됐다고 단정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블레셋 제사장들은 새끼가 있어 그것들에게 젖을 물리는 암소를 법궤 운반용으로 택했던 것이다.
=====6:8
금 보물은...궤 곁에 두고 - 블레셋 제사장들이 이같이 한 이유는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블레셋 족속에게 재앙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 예물로써 여호와의 꿰를 달래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6:9
벧세메스( , 베트 쉐메쉬) - '태양의 집'이라는 뜻. 이 지역이 갖고 있는 이러한 의미는 일찍이 이곳이 가나안인들에 의하여 태양신이 숭배되던 곳임을암시해 준다. 당시 이곳은 예루살렘 서쪽 약 22km지점에 위치하였고, 블레셋 땅으로 연결되는 동서 골짜기에 있었으며, 제사장의 성읍으로 지정된 유다 지파의 땅이었다(수 21 :13-16). 한편 블레셋인들이 언약궤를 이곳으로 보내려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언약궤가 원래 보관되어 있던 실로는 당시 블레셋 족속들에 의하여 심하게 파괴되었고(4:10 주석 참조). (2) 벧세메스는 언약궤로 인해 마지마긍로 재앙을 당한 블레셋 도시 에그론과 제일 가까운 이스라엘의 성읍이며, (3) 벧세메스는 언약궤를 관리할 수 있는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인 듯하다(수 21:16).
< 설 교 >
젖나는 암소 두 마리
삼상 6:1-16 / 김영수목사(늘찬양교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벡 전투(4:1-10)에서 블레셋 군대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궤(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득의 만만해진 블레셋은 그 법궤를 자신들의 신 다곤(Dagon)에게 받쳤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아스돗 사람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신상을 다시 세웠으나 그 이튿날 아침에 보니 다곤 신상이 엎어져서 목뼈가 부러져 있었고, 허리가 잘라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박살나 있었습니다. 또 그 뿐만 아니라 법궤를 갖다 놓은 블레셋의 '아스돗'이라는 마을에는 온역이 번져서 여기 저기서 사람과 짐승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스돗 사람들은 너무 급한 나머지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라는 마을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가드에도 역시 무서운 독종이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법궤는 다시 '에글론'이라는 마을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에글론' 땅에도 무서운 독종이 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독종으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즉시 방백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와 우리와 우리 백성들을 죽이려 한다 (삼상5:10)하며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속히 돌려보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땅에 있은 지 일곱 달 밖에 안되었지만 이미 블레셋 땅 전역은 독종(흑사병)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찼습니다. 곤경에 빠진 블레셋 방백들은 모여서 대책회의를 하였습니다. 이 심상치 않은 독종의 발생이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처럼 섬기는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를 가져와서 우리에게 내린 재앙인지 아니면 우연한 일로 생긴 것인지 좌우간 흑백을 가리자 만일 '벧세메스'로 가게 해서 소가 곧장 가면 정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고, 그렇지 않고 소가 좌우로 치우치면서 그 길로 가지 아니하면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갓 새끼를 떼어 젖이 뚝뚝 떨어지는 암소 두 마리를 구해 가지고 새 수레에 메워서 그 위에 법궤를 싣고 그 수레에다가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만들어 배상(賠償) 형식의 속건제로 삼아 법궤와 함께 이스라엘로 다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금 독종과 금 쥐 형상을 만든 이유는, 블레셋에 다친 재난이 쥐로 인한 독종(흑사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자 결정에 따라 젖나는 암소 두 마리는 여호와의 법궤를 싣은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젖나는 암소 두 마리는 새끼들이 "음메 음메"하며 젖 달라는 소리를 듣고서도 절대로 고개를 뒤로 돌리거나 좌우로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블레셋까지 갔습니다.
이 블레셋은 지금 이스라엘 수도인 텔아비브가 있는 지방입니다. 그리고 벧세메스는 지금 예루살렘이 있는 곳입니다. 그 거리는 약 22㎞ 나 되는 꽤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먼 거리를 이 소는 길도 모르고, 또한 좋은 길도 아니고, 그리고 갓 태어난 새끼를 뗀 암소인데도 불구하고 법궤를 실은 수레를 메고 곧장 블레셋에서 벧세메스까지 도착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벧세메스로 향해 가는 이 젖나는 암소 두 마리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전진하는 삶.
1. 두 암소들에겐 처음 가보는 길이었지만 주저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갔습니다.
이스라엘 신의 궤(법궤)가 머물러 있던 '에글론'땅에서 벧세메스는 지금 예루살렘이 있는 곳으로 그 거리는 약 22㎞나 되는 꽤 먼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평택에서 안성까지의 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먼 거리를 두 마리의 암소는 길도 모르고, 또한 좋은 길도 아니고, 그리고 갓 태어난 새끼를 뗀 암소인데도 불구하고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곧장 블레셋 에글론에서 벧세메스까지 도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좋으나, 어떻게 주님가신 골고다의 길 즉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름 받은 성도들은 믿음의 길은 걷다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도 주를 좇는 제자들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8:22)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은 비록 고난이 있고 핍박이 있고, 죽음이 기다려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첨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0-14)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멸망을 당할 때 롯의 아내가 그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창19:26) 그런고로 우리도 롯의 아내처럼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을 좇다가 뒤를 돌아보아 멸망당하는 일이 없도록 푯대 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담대하게 주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본문의 암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갔습니다.
젖 나는 암소 두 마리가 벧세메스로 향할 때 블레셋 사람들은 과연 저 두 암소가 벧세메스까지 잘 갈 수 있을까? 무척이나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마리 암소는 목적지인 벧세메스까지 아무런 사고나 화를 당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이 같은 기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두 암소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믿음생활을 시작할 때 속으로 코웃음을 칠지 모릅니다. 저가 얼마나 예수 믿다가 그만둘까? 저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며 우리를 불쌍한 눈으로 가엾은 눈으로 쳐다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 즉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의 가는 믿음의 길을 은혜와 축복으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 모두 "나는 할 수 없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엡3:20-21)는 믿음을 가지고 순교하기까지 담대하게 주님의 길을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20:22-24)
3. 이 암소들은 새끼들을 떼어놓고 가면서 울며 갔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들은 사사로운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은 뒤로 묻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 와서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하며 열심히 찬송하고는 돌아 가면서는 다시금 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먼저 사적인 감정과 애정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충성된 자들의 모습입니다. 비록 애처롭고 슬픈 현실이 우리 앞에 있어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위해 암소들처럼 울면서라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3절 말씀에 보면 "좋은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없고 모집한 자만을 기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4. 암소들은 두 마리가 같이 나아갔습니다.
동행자는 세 가지가 일치되어야 됩니다.
① 목표가 일치되어야 됩니다. 하나는 우로 가고, 하나는 좌로 가자고 한다면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② 뜻이 일치되어야 됩니다. 뜻이 서로 다르면 다툼만 일어날 따름입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가 없습니다.
③ 보조가 일치되어야 됩니다. 한 사람이 무거운 짐을 안고 지고 들고 이고 가는데 한 사람이 옆에서 빈손으로 간다면 어떻게 동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직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무거운 짐일수록 서로 짐을 나누어지고 함께 가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더니 죽음을 맞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습니다.(창5:23-24)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이 같은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 두 암소의 동행은 우리 성도들의 협력 정신을 의미합니다. 모세를 협력하여 아론과 훌이 함께 할 때에 아말렉 군대를 이겼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목사님과 성도들이 한마음 되어 주님의 일을 행할 때에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늘찬양교회와 함께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Ⅱ. 자신을 불살라 바치는 헌신의 삶.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마리의 암소를 바라보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 중에 하나는 두 마리의 암소가 벧세메스에 도착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무슨 사건입니까? 그것은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이 두 암소를 잡아 여호와께 감사의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생각에 이 두 암소가 그렇게도 염원하며 기다렸던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이스라엘 땅에 돌아왔으므로 그간의 노고와 수고를 치하해서 맛있는 콩깍지라도 여물로 주던가 아니면 목이 말랐으니 시원한 물이라도 주어야 옳을 텐데 그런 것은 고사하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내려놓은 후에 수레의 나무를 패서 땔감을 삼고, 이어 두 암소를 잡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몰인정한 사람들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두 암소를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암소로 여기고 하나님의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로 값지게 드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보여야할 최후의 모습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성도들은 벧세메스의 암소처럼 이미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된 자들입니다. 더 이상 세속의 삶에 빠져들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제단 위에 자신을 온전히 불사르는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옛 자아와 욕정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거룩히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도록(빌 1:20)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영적 번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마리 암소가 남긴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법계밖에 없었습니다. 즉, 어떠한 보상이나 기념비나 영광도 이 두 암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벧세메스로 향한 젖나는 두 마리 암소가 보여주는 최대의 영적 교훈입니다.
간혹,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의 상급이나 보상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신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신 득의(二信得意)신앙을 버리고 이 두 마리 암소가 보여주었던 최후의 모습처럼 죽기까지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디모데후서 4장 6절부터 8절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豫備)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 게니라."하였습니다.
결 론
기독교는 희생을 통해 새싹을 피워갑니다. 우리가 이 암소들과 같이 철저하게 순종하며 기쁨으로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 때에 진정으로 우리 가운데 참 성령이 역사 하시며 주님의 영광을 그 가운데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는 믿음의 삶,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죽이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같은 삶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장 중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가능한 삶입니다. 이 시간 성령님의 뜨거운 역사로 벧세메스의 암소 같은 기적과 은혜의 삶을 사는 참 성도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연과 섭리
이강웅목사 / 삼상 6:1-12
서론: 세계관(Worldview)이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 즉 ‘세상을 보는 관점’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누구나 세계관을 통해서 세상과 사물과 현상을 보고 인식하며 살기에 우리 삶의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바꾸거나 고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안경과 같습니다.
영국 동화작가 콜린 웨스트(Colin West)가 쓴 책 <핑크대왕 퍼시>(Percy the Pink)는 사람이 갖는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이태희의 “세계관 전쟁”에서 발췌)
퍼시대왕은 핑크색을 광적으로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핑크색으로 꾸미도록 했는데, 그래도 만족치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다른 색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퍼시대왕은 고민 끝에 ‘핑크법’을 만듭니다. “세상을 모두 핑크빛으로 물들여라!”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핑크색으로 바꾸도록 법이 집행 됩니다. 공권력 까지 동원하여서 산과 들을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였습니다. 심지어 갓 태어난 동물까지도 핑크색으로 염색하였습니다. 그래서 핑크빛 초원에서 핑크색 송아지가 뛰어 다니고, 핑크색 돼지가 나뒹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핑크대왕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이 핑크빛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며칠을 끙끙 앓다가 자기 스승에게 묘책을 찾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드디어 스승이 묘책을 찾아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안경이었습니다. 핑크색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니 마침내 온 세상이 완벽하게 핑크빛으로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퍼시대왕은 행복감을 느끼며 진정으로 만족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의 색깔이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숭실대 교수 김희권 목사님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눈’ 대신 ‘관점’이란 단어를 넣어 읽어 보도록 했습니다. “관점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관점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관점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때라 해석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우리의 반응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가령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진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인생을 볼 때 참 이해하기 힘들고, 답답할 것입니다. ‘왜 저 사람은 비과학적인 미신을 붙들고 사는가’하며 어리석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적 세계관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우연’으로 여겼던 모든 일들이 실상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우연히 친구를 만나서, 우연히 그의 권면을 받아 교회에 갔는데, 우연히 그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겨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공개적으로 ‘내가 이렇게 섭리한다’고 나팔 부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종종 ‘우연’을 가장해서 나타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책이 룻기서입니다. 룻기서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적적인 기도 응답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으로 흐르는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 곡식을 주우려고 ‘우연히’ 간 일터가 보아스의 밭이었는데 그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그 밭에 온 바람에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그 때 룻이 ‘우연히’보아스의 밭에 가지 않았고, 또 보아스가 ‘마침’ 그 때에 그곳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족보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 이 두 사람의 만남과 그들을 만나게 해준 ‘우연히’와 ‘마침’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그저 이 일이 ‘우연히’와 ‘마침’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일상생활의 우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장엄한 구원의 역사는 전진해 갑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이 세상 모든 일을 관장하시며, 그분의 기쁘신 뜻 가운데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처럼 변덕을 부리거나, 기분 내키는 것처럼 행동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계획을 분명히 알고 계시며, 그 마음의 뜻을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분은 우리 삶과 세상, 그리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이들은 세상이 요동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현재 당하고 있는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끝까지 이를 의심하고 부정하려고 합니다. 불신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십니다.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1. 블레셋의 속건 제물
고대인들의 세계관에서는 전쟁의 승패가 어느 신이 더 우월하고 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도 자기들이 믿는 신 다곤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 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마저 빼앗아 왔으니 얼마나 의기양양했겠습니까? 그렇게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아 온 지 7개월이 흘렀습니다.(1절)
그런데 언약궤를 빼앗아 왔다는 승리감은 잠시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을 당했습니다. 독종 재앙으로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5:12) 이렇게 큰 재앙을 당하면서도 이도 저도 못하고, 언약궤를 들에 방치해 두고 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절박해진 그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언약궤를 어찌해야 할지, 어떻게 본처로 돌려 보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보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4-5절) 독종 재앙이 내렸으니 금으로 된 독종 모양과 쥐의 형상을 만들어 속건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속건제는 율법에서 정한 Guilt offering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성물에 대한 범과하였거나, 하나님의 규례를 어겼거나, 사람에게 해를 끼친 죄과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말하는 속건제와 블레셋 사람들의 속건제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율법에서 속건 제물은 생명 있는 짐승의 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6장 6절입니다. “그는 또 속건 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곧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 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요”
물론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알지 못했지만 현재 그들에게 임하는 재앙이 언약궤를 함부로 모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속건 제물을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자기들이 제안한 것을 신속히 이행할 것을 당부합니다. 6절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2. 하나님을 시험하는 블레셋
그래서 자신들의 방식대로 속건 제물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안하는 것은 궤를 보낼 때 새 수레를 만들고, 거기에 언약궤를 싣고, 그 곁에 속건 제물이 든 상자를 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수레를 끄는 소는 한 번도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암소 둘로 하라고 합니다.(7절)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멍에를 한 번도 메어보지 않았다는 것은 순조롭게 수레를 끌고 가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젖 나는 소라는 것은 새끼 송아지가 있는 암소를 의미하는데, 더구나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젖 나는 암소 둘로 하여금 수레를 끌고 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왜 그런 제안을 했을까요?
아마도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속건 제물을 준비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재앙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일치에 불과한 것이지, 이에 대해 강한 의구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여호와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인지, 시험해 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그리고 젖 나는 암소 둘을 준비하도록 한 것입니다. 언약궤를 실은 새 수레를 끌고서 소들이 곧장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가는지, 아닌지를 통해 하나님으로 부터 온 재앙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를 시험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암소들은 송아지를 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울면서 멛세메스를 향해 곧장 나아갑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본능까지도 다스리시며,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블레셋에게 임한 재앙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3.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나님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서 세상 만사를 주권적으로 섭리하십니다. 믿는 자든지 불신자이든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섭리’(providence)라는 말은 ‘미리’라는 접두어와 ‘보다’는 의미의 단어가 결합 된 것입니다. ‘미리 본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예지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사를 미리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앞일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비교적 해박할 지 몰라도 미래에 관해서는 단 10분 후, 단 하루 후에 벌어질 일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종종 답답해 합니다. 기뻐하다가 쉽게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낙담하다가도 쉽게 의기양양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기뻐하고, 징계를 받으면 금새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하필 내가 이런 곳에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며 살아야 하나?’하고 탄식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우연히 그리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연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아직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또 다른 우연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게 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섭리하지 않는다든지, 하나님께 불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거부된다든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순종함을 통해서 통치하시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불순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먹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적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의 불순종을 오히려 역이용하셔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 곧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불순종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면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칭찬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저들은 악한 의도로 악을 행한 것입니다. 저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들의 불순종과 악한 행위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그 분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생명과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순종함을 통해서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어 갑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연을 가장해서 우리 인생을 섭리하십니다. 어느날 좋은 일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우연을 통한 하나님의 복은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귀히 여기는 사람에게 더 많이 나타납니다. 현재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더 자주 일어납니다. 좋은 만남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무엇보다 순종하는 자에게 풍성하게 임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는 항상 좋은 날씨만 계속되지 않습니다. 궂은 날씨도 있습니다. 거의 나은 줄로 알았던 질병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나타날 때, 우리의 마음은 불안에 휩싸입니다. 은퇴할 때까지 아무 염려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직장으로 부터 갑자기 해고 통지를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합니다.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던 자녀의 결혼생활에 위기가 찾아올 때 우리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집니다.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할 때, 우리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고통에 빠집니다. 악화되는 경제 사정 때문에 우리 마음은 심한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립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릴 때 무엇이 우리를 버티게 하며 견고하게 세워 주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섭리해 오셨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오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넓은 미국 땅에서 하필 몬트레이까지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렇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부름 받은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암담해 보여도, 이 현실 너머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주권을 가지고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모든 인생을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섭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어야 우리는 환란 가운데에서도 견고하게 설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이강웅목사 / 삼상 7:1-12
서론: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고,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전부인 양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연약하여서 할 수 없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분별하게 하십니다. 시련 중에도 능력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시고, 감당치 못할 시험은 허락치 아니하시고, 또 시험이 닥칠 때 피할 길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믿음과 사랑 가운데 장성하여 거룩에 이르게 하십니다. 우리를 영광의 자리에 서도록 하십니다. 이것을 개혁신학은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말합니다. ‘성도의 견인’이란 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거듭났다면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하늘이나 땅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를 떼어낼 수 없을 것(롬 8:39)을 주장하는 교리입니다.
예수께서도 참 신자를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붙들어 주실 것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요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세상의 무엇보다 강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이 꽉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구원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이요, 자기 백성 중에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데려가는 싸움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오시고,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겠다는 것이요, 그리고 결국은 그 분의 뜻대로 이루어 낼 것을 구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6:37-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여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실패하고 넘어져서 찌질하게 산다고 해도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절망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붙들고 일어나는 것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로부터 영광을 거두어 가셨던 하나님께서 20년만에 다시 ‘에벤에셀’로써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는 장면입니다. ‘에벤에셀’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뜻입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가봇’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회개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에벤에셀’하셔서 이스라엘에게 크신 승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에벤에셀’‘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나님이 도우셔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무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기에, 또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반응하였기에, 다시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사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에도 우리 모두가 에벤에셀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을 사모하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가나안의 문화는 당대 최고의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반면에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자랑할 만한 문화가 없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흙과 바람 밖에 없는 광야에서 40여년 동안 생존만을 생각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인류 최초의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는 헷 족속을 비롯한 가나안 족속들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문화 수준이 낮은 나라일수록 우상이 많다고 말입니다.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 우상은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 문화가 발달할 수록 우상이 더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늘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들이 필요한 신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수많은 우상 신들을 만들어 섬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입니다.
우상의 본질은 인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해서 만든 것이 우상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에게 고침을 주고,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게 하고, 자녀가 없는 사람에게는 자녀가 생기게 하고, 이런 모든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과학문명이 발달한 오늘날 현대인들도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 섬깁니다. 자신들의 탐욕을 만족시켜 줄 있는 우상을 마음 가운데 두고 삽니다. 과학의 신, 물질의 신, 사랑의 신, 성공의 신, 쾌락의 신, 출세의 신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점차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고, 지켜 주고, 보호해 주는 정도에서 자기 민족의 수호신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만약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겨우 자신의 필요를 채워 주는 정도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취급한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으로 나가는 길목이 됩니다.
우상과 참된 신앙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필요보다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으로 만도 충분히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설령 나를 가난 가운데 있게 하신다 할지라도, 병이 낫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분은 나의 찬양과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영광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더 부요함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들의 부족신 정도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과 안녕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방신들에게 눈길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 하시고, 미리 경고했던 일을 저들이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제사장 둘이 죽고, 언약궤 마저 빼앗겼습니다.
이제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국경지역 기럇여아림에 있은지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언약궤가 변방지역에 머물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여전히 멀리 있다는 것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했다고 2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모했다’는 말은 원어로 ‘몹시 슬퍼했다. 큰소리로 울부짖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비참한 모습을 회개하고, 울부짖으며 간절히 매달렸다는 말입니다.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있는 동안에도 블레셋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언약궤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블레셋의 압제 아래서 고통 받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부르짖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마음이 가난해졌습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붙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의 죄 문제를 도전하는 사무엘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위기상황이 오히려 우리를 간절한 기도의 자리로 내몰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곧 기회라고 말합니다.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고, 영적 리더십이 실종된 상황 속에서, 어릴 적 부터 성소에서 자라며 하나님을 섬겨온 사무엘이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3절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여기서 ‘돌아온다’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고, ‘전심으로’는 ‘마음의 뿌리까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철저히 회개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려면 제대로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흐트러진 마음을 한데 모으기 위해 민족적 회개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회개의 전제조건은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이방 신들”은 바알 신을 가리키는데, 바알은 풍요를 상징하는 신입니다. 가나안의 많은 신들 중에서 바알이 최고의 남신으로 힘과 폭력과 풍요의 신인 반면, 아스다롯은 다산을 약속하는 최고의 여신으로 음란의 신입니다. 가나안에서는 보통 이 두 신들을 같이 숭배하여 제사 의식에 성행위가 필수적으로 포함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던 이스라엘 백성 안에 어느덧 이 두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음란한 문화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먼저 이 우상들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우상숭배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우상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상당히 매력적인 우상이었습니다. 풍요와 성적인 음란함에서 오는 쾌락을 버리기가 힘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현대인들은 물질의 신인 바알과 쾌락의 여신인 아스다롯을 우상으로 떠받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돈은 알게 모르게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돈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저 돈 많이 벌어서 나와 내 가족이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현세주의가 팽배해져 있습니다. 물론 돈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또 많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돈이 결코 우리 인생의 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돈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보장해 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쾌락’은 가장 환영받는 우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쾌락은 우리에게 일상의 재미와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자신을 잊고, 현실을 잊도록 하는 탈출구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도한 스트레스의 압박 속에서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매혹적인 쾌락의 여신도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열망하는 갈급함을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텅 빈 공간을 메꿀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에 비로서 우리 심령에 만족함과 평안함이 찾아옵니다.
우상은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안녕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는 파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오직 “그만”(only God)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세상적인 것들이 혼합되지 않는 순수한 믿음을 갖도록 도전하도록 촉구한 것입니다. 우리도 자칫 하나님도 섬기고 물질도 섬기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쾌락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몰래 우상을 품고 의지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혼합주의 신앙생활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우상들을 너희 중에서 재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오직 그만 섬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칙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내 안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상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임하지 않습니다. 형통한 삶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처럼 다가오지만 곤고함과 불행을 몰고 올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집안에 있는 우상부터 제거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그들은 남몰래 섬겨온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들을 들고 나와 다 쪼개고 파하고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엘리는 감히 이스라엘가운데 만연된 우상숭배의 죄악에 도전하지 못했지만 사무엘은 과감하게 백성들의 죄에 도전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랬을 때 반발할 것 같았던 백성들은 오히려 순한 양이 되어서 그대로 순종하고 결단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문제를 꿰뚫어 보고,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부터 우상을 제거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시대의 우상의 어두운 세력들과 싸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기를 기도합니다.
3.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
그런데 사무엘은 단지 우상들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스바에 모이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영적대각성기도회를 연 것입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미스바’는 ‘망대’라는 뜻을 가진, 해발 780m높이의 고산지대였습니다. 망대는 파숫꾼이 망을 보는 곳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 위해서 미스바에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께 매달려 부르짖어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기도할 때였습니다. 다른 무엇 보다도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였습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토설하며 하나님앞에 사죄의 은총을 간구할 때였습니다. 모든 지파가 한 곳에 모여서 합심하여 부르짖어 기도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앞에 붓고 그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미스바로 모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되 물을 길어 여호와앞에 붓고 기도했습니다. 물을 길러 부었다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죄와 부정의 오물들을 다 씻어내고 멀리 떠내려 보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부은다는 것입니다.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피상적으로 기도하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얼마가 크고 가증스러운 것인가 자복하며 눈물의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로써 그동안 쌓이고 쌓인 죄의 무더기들이 터지고, 완악한 심령들이 무너지는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점점 하나님을 떠나 돈과 쾌락의 우상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 썩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부패하여서 더 이상 기존 체제나 지도자들에게 소망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돈과 쾌락에 정신이 팔려 헤매는 사이에 다음 세대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둠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미스바의 회개운동과 같은 영적대각성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회개와 각성운동이 우리 시대에 우리로 부터 다시 한 번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 에벤에셀의 하나님
미스바 영적 대각성 기도집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꾸셔서 오합지졸을 강한 군대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하려고 미스바에 모인 것인데, 블레셋은 그것을 군대를 모으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 하며 사무엘에게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께 쉬지 말고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이들이 변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오직 기도만이 모든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해결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9-10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청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간절히 기도했고, 즉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치시니 순식간에 그들은 혼란에 빠져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고통 받고 살던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11-12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수백 년 동안 블레셋의 위협 아래 항상 벌벌 떨던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달라져서 하나님의 강한 군대가 되어 블레셋 사람들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국경 너머까지 몰아붙였습니다. 그들은 기적의 승리를 맛보았고, 너무나 감격하여 승리의 돌탑을 세우며 선포했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이전에 블레셋에 패하여 언약궤까지 빼앗겼던 수치와 패배가 이제는 놀라운 승리로 바뀌었습니다. 미스바의 영적 대각성 운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벤에셀의 역전은 바로 미스바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회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만 이긴 게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에 들어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13-14절)
결론:
한국의 성자로 불렸던 고 한경직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이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상을 받는 자리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죄인이올시다.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그가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본인이 죄인이라고 고백했을 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분을 칭찬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라는 자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뒤를 돌아보면 죄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살아온 연륜 만큼 죄를 짓고 살아왔습니다. 그러함에도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어렵고 힘든 날들도 많았지만 여기까지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온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도와 주셔서, 이기게 해 주셔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노력하고 힘쓴 것도 있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보면 죄뿐입니다. 죄로 얼룩진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자랑하며, 뭔가 된 양 우쭐거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그것도 실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사랑하는 여러분, 코로나팬데믹 상황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송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과 가정에 지난 1년 동안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을 보든지, 우리 교회가 지내온 일을 생각해 보든지, 참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나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하나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여러분의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메울 수 없던 마음의 상처의 웅덩이를 주께서 사랑으로 메꿔 주실 것입니다.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갈 수록 좋은 일이 차고 넘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들은 이제부터는 마음 속에 우상을 버리고, 오직 에벤에셀의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삶을 회복시켜주시는지, 어떤 놀라운 은혜가 내 앞에 펼쳐질 것인지, 그것을 기대하면서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며 전진해 가시기 바랍니다.
벧세메스로 가면(1)
양인국목사 / 삼상 6:1-21.
1. 블레셋은 이스라엘로부터 여호와의 궤를 탈취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승리의 상징으로 알고 기뻐했지만, 그들이 여호와의 궤를 취하여 블레셋 땅으로 가지고 온 그 날부터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그들 가운데 재앙이 임하였다. 여호와의 궤가 머무는 곳마다 그곳에는 사망과 큰 고통이 따랐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 중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라는 말은 블레셋이 일곱 달 동안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얼마나 큰 재난을 당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재난을 당한 후 비로소 그 궤는 자신들이 소유해서는 안 될 것으로 깨닫고 그것을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 보내기로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그 궤를 어떻게 본처로 돌려보낼 수 있는지 지혜를 구했고. 그들의 권고에 따라 언약궤를 본처로 돌려보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의 본문을 통하여 삶의 여정에서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과 실패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교훈을 받는다. 오늘은 전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 다음 주는 후자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블레셋 사람들은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소유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포기하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때까지 7개월 동안 그들이 삶의 여정에서 당할 수 있는 재난 가운데 가장 큰 재난을 당했다. 5장 12절은 그들이 탈취한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있는 동안 얼마나 큰 재난을 당했는지 말해 주고 있다.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그들이 이와 같은 재난을 당한 것은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소유함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내용의 본문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교훈은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세상에 사는 동안 소유해서는 안될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소유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축복보다는 재난을 당하게 된다.
만일 솔로몬이 이방여인들을 소유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우상숭배에 빠졌겠는가? 그리고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겠는가? 만일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우상을 위한 전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불명예스런 이름인 “여로보암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림을 받았을까? 마찬가지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더라면 그와 그의 가정이 그토록 비참하게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일서2장 15,16절의 말씀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만일 교회들이 세상에 속한 것들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소유하려고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 밖에 버리움을 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블레셋에게 여호와의 궤를 탈취하여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가? 실제로 그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여호와의 궤를 탈취한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궤는 그들이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한 그들은 결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부터 탈취하여 자신들의 소유로 삼았다.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가? 어쩌면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탈취한 후 삶의 정상에 올라갔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여호와의 궤는 오히려 그들에게 재난이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들이 소유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소유하고 있는 동안은 그들이 삶의 여정에서 당할 수 있는 재난 가운데 가장 큰 재난을 당한 것이다.
우리가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일어난 일들이 모든 시대에 반복하여 일어나고 있고 또한 오늘의 우리들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소유해서는 안 될 것을 소유하고 오히려 그것을 소유함으로 삶의 정상에 올라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들 자신에게 재난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속한 자들에게까지 재난이 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소유해서는 안될 것을 소유했을 때 그것이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재난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히틀러가 권력을 소유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에게 그토록 큰 재난을 가져다주었을까? 동일한 물음은 오늘의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재난을 가져다주고 있는 푸틴에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고 우리가 탐욕에 이끌려 소유해서는 안될 것을 소유함으로 재난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족들이나 이웃들에게도 동일한 재난을 당하게 하고 있다.
그러면 모든 사람, 특별히 믿음의 사람으로서 소유해서는 안될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요한일서2장 15,16절에서 찾았다. 물론 그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다. 모든 사람,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상에 속한 것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한 재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세상에 속한 것들이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매력적이다. 육신의 정욕이란 육신이 원하는 것으로서 힘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더 큰 힘을 추구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말하는 힘이란 권력과 재력과 지력을 말한다. 안목의 정욕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기에 매력적인 것들을 말할 것이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음식, 화려한 삶 등은 모두 안목의 정욕에 속한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많이 소유할수록 이생의 자랑거리도 많아지고 이생의 자랑거리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세상에서 정상에 서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것들은 소유한 사람들에게 복된 삶을 가져다주기 보다는 오히려 재난을 가져다주고 있다. 실제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이끌려 살고 있는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있는 동안 재난을 당했던 것처럼 동일한 재난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매스컴을 통하여 그들이 당하고 있는 재난의 소식들을 듣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재난을 당하고 있다. 블레셋 사람들도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소유할 때 재난을 당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7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7개월 동안 계속되는 재난을 통하여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재난이 바로 자신들이 소유해서는 안 되는 여호와의 궤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궤를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을 소유함으로 당하는 재난은 그것을 포기하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냄으로 멈추게 할 수 있다. 바울은 유대주의의 가치관에 따라 추구하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유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바울의 고백이야말로 믿음의 사람으로서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을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낸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은 본래 세상에 있어야 할 것들이다. 만일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이런 것들을 소유하는 것을 성공적인 삶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면 돌이키자. 주님의 말씀대로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고(눅20:25),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세상에 속한 것들과 결별하자.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믿음의 사람으로서 소유해서는 안될 것들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것들을 본래의 곳으로 되돌려 보낸 바울이 다른 어떤 믿음의 사람들보다 자유에 대하여 더 말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소유해서는 안될 것들을 소유함으로 당하는 재난들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을 포기하고 본래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소유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종여일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신5:29,6:24), 다른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요13:34),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레11:45). 우리가 이것들을 소유하고 있는한 영원히 복된 삶을 살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에게 분별의 지혜를 허락해 주심으로 믿음의 사람으로서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과 소유해야 할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주의 뜻에 따라 소유할 것을 소유함으로 복된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벧세메스로 가면(2)
양인국목사 / 삼상 6:1-21.
1. 지난주 주일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소유할 것과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하여 행할 때 복된 삶을 살 수 있음을 들었다. 오늘은 동일한 본문에서 실패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블레셋은 무지로 인하여 “여호와의 궤”를 탈취했지만, 그 궤로 인하여 재난을 당한 후 오히려 교훈을 얻었다. 그들이 얻은 교훈은 그들에게 “여호와의 궤”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블레셋이 재난을 당한 후 “여호와의 궤”에 대하여 변화된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재난을 당하기 전까지 “여호와의 궤”를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임의대로 대하였다. 그러나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재난을 당한 후부터 그 궤에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대할 때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자신들의 제사장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묻고 그들의 준 권고에 따라 대하였다. 그들은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얻은 것이다.
우리가 블레셋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대하여 주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실패를 실패로 생각하고 있을 뿐,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패를 실패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삶의 낭비일 뿐이지만,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얻는다면, 실패는 오히려 삶을 보다 더 온전함으로 세울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얻는 사람들에게 실패는 또 하나의 삶의 자원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 중에서 두 사람의 예는 실패를 실패로 돌리는 사람과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얻는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해 줄 것이다. 사울은 삶의 여정에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드림으로 실수를 저질렀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흉악한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실패를 통하여 어떤 교훈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삶의 여정에서 동일한 실패를 계속하였고, 이로 인하여 자신과 가족 그리고 자신과 가까이 한 모든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다윗은 언급한 것처럼 흉악한 죄를 범했지만 그것을 회개의 기회로 삼음으로 인하여 오히려 보다 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
그러면 블레셋이 실패를 통하여 얻은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보다 더 깊이 안 것이다. 언급한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은 무지로 인하여 여호와의 궤를 전리품으로 알고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취급함으로 재앙이 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궤를 본처로 돌려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의 궤”를 본처로 돌려보내고자 했을 때도 임의로 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복술가들에게 의견을 묻고 그들이 준 권고에 따라 행하였다. 이와 같은 그들의 변화된 태도는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그들은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깨달은 것이다.
특별히 그들의 제사장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권고는 블레셋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3절은 블레셋 사람들의 물음에 대한 제사장들의 권고다.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6:3)”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권고한 것은 그 궤를 본처에 보낼 때 속건제를 드리고 보내라는 것이다. 여기 속건제란 속죄제의 일종으로 피해를 입힌 것을 보상하며 드리는 제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블레셋이 여호와의 궤 앞에 속건제를 드리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탈취한 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그분의 영광을 가렸기 때문에 그것을 보상할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권고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지 않고는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갈6:7).
제사장들과 복술가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권고의 말에 따라 행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즉 그들에게 임한 재앙이 여호와의 언약궤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앞에 속건제를 드릴 때 재앙이 그들로부터 떠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사장들의 권고에 따라 속건제를 드림으로 재앙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또한 그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시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7-10절 말씀이다.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수례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本地境)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이 권고는 블레셋 제사장들의 지혜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직면한 재난이 언약궤로 인한 것임을 알고 그 궤를 돌려보내고자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온전히 확신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본처로 돌려보내는 것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진실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깊이 아는 은혜를 입은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직면한 모든 일을 신앙과 관련하여 생각하고 것을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것은 지혜중의 지혜일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시험해 볼 수 있도록 정한 것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소가 벧세메스로 올라가면 그들에게 임한 재앙이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확신할 수 있고, 만일 소들이 다른 길로 가면 그것은 우연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수레를 끌게 한 소는 젖 나는 소였다. 여기 “젖 나는 소”란 새끼를 낳고 새끼에게 젖을 주고 있는 소를 말한다. 이런 소를 두 마리 취하여 한 수레를 끌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소들로 하여금 수레를 끌기 위해서는 새끼를 집에 떼어 놓아야 했다. 여기 “젖 나는 소”라는 것과 “소 둘”이라는 것은 여호와의 궤를 실은 수레가 목적지로 향하여 가는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새끼를 집에 떼어 놓은 소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향하는 곳은 새끼가 있는 곳일 것이기 때문이고, 이런 상태에 있는 두 마리의 소로 하여금 하나의 수레를 끌도록 한다면 그 수레가 한 방향으로 갈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레는 벧세메스로 향하였다.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6:12)”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가능성 없는 일을 이루심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셨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다 더 깊이 알게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벧스메스 사람들은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넘어졌다. 그들은 “여호와의 궤”가 돌아옴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거하는 레위인들이 율법에 따라 여호와의 궤를 모시고 합당한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봄으로 칠십인이 죽임을 당하였다. 여기 “여호와의 궤를 들어다 본고로”라는 말은 벧세메스 사람들의 호기심을 말해 준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 가운데 레위인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를 들여다 본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또는 율법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보여 준다.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탈취당하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그것을 통하여 어떤 교훈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 재난이 된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삶의 여정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얻음으로 인하여 실패를 삶의 자원으로 삶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다 더 온전함으로 세워지게 해 주옵소서. 아멘
벧세메스로 가는 소
삼상 6장 1~16절 / 김동호목사
여러분은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신앙은 바라는 것을 이루는 통로라 얘기하기도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라는 말씀을 그 중거로 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라는 말씀을 좋아합니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닌 일부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훨씬 더 다른 차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요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에 그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자세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주셨던 그 돌 판을 사람들이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 이스라엘 사람들 하나님말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십계명이 새겨져 있는 돌 판을 나무 궤에 넣고 금칠을 하여 일명 ‘황금궤’라 불렀고 그 법궤를 지성소 안에 모셔 놓아 지극히 보살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법궤, 즉 하나님의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있는 이 법궤는 곧 이스라엘을 지키는 수호신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생명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소중히 여겼던 이 법궤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적국이었던 블레셋으로 빼앗기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엘리 제사장 시대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블레셋 진영으로 옮겨진 이 법궤로 인해 블레셋은 7개월 동안 독종이라는 재앙에 시달려야 했고, 법궤에 손을 대는 사람마다 죽임을 당하는 혹독한 곤욕을 치러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호신과도 같은 이 법궤를 빼앗아 온 것은 블레셋 입장에서 보면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으나, 그 기쁨도 잠시, 너무나도 큰 재앙으로 인해 온갖 질병으로 백성들이 고생하게 되자 블레셋은 이 속수무책인 법궤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세 차례씩이나 법궤를 보관하는 도시를 옮기다가 결국 회의를 해서 이 골치 아픈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 진영으로 되돌려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빼앗긴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는 광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옮기면서 보여주는 그 방법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수레에다 법궤를 싣고는 젖이 나는 암소 두 마리를 데려다가 그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본문의 말씀은 그저 하나의 역사 속의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지나치기 쉬우나,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들이 가져야 될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 깊이 들어 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에서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오늘날의 성경을 말하는 것이고, 수레에 실린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암소 두 마리는 말씀을 갖고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이 본문의 말씀은 성경을 갖고, 성경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와 그 여정을 아주 정나라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도대체 어떠해야 하는가? 저는 오늘의 본문을 중심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법궤를 끌 소를 찾을 때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⑦ 상)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왜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을까?
힘으로 따지자면 수소, 즉 황소를 택했어야 했습니다. 무거운 수레를 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이 있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황소가 제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궤를 끌기 위해 선택된 것은 황소가 아니었습니다.
또, 법궤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깨끗함과 순결함이 필요했다면 아마 흠 없고 티 없는 어린 송아지를 선택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송아지도 배제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굳이 젖이 나는 암소를 택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아픔입니다.
이제 막 새끼를 낳아 사랑으로 길러야 할 어미 소가 그 분신과도 같은 새끼와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⑦ 하)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⑩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⑫ 암소가 갈 때에 울었다
이 부분은 그 아픔이 얼마나 큰가를 설명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하나 얻게 됩니다. 그것은 법궤, 즉 말씀을 갖고, 말씀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은 큰 슬픔과 아픔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은 힘이 듭니다. 괴롭습니다. 외롭습니다. 많은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그 아픔의 강도는 마치 막 낳은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싫든 좋든 말씀을 갖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차이는 혹 있을지 몰라도, 말씀을 배제하고 살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은 그 아픔에서 이미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 그 아픔은 점점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 아픔의 결국은 젖 먹는 새끼와 이별하는 아픔만큼이나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런 심한 말까지 해야 하는가? 대체적으로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라고 믿고 있는 오늘날의 교인들에게 상식의 반대되는 설교로 인해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 교우들은 신앙의 참된 진리를 이해하고 소화해 나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합니다. 말씀을 갖고 사는 것은 아픔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픔 그 자체입니다.
대기업 임원인 남편을 둔 어느 여 집사님께서 남편이 주일마다 골프를 치러 나가서 속이 상하시다 면서 목사님께서 권면해서 주일날 교회에 나오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해 왔습니다. 그 남편도 명색은 집사인데 교회에 나오시라 권면을 했더니 필드에 나가서도 꼭 예배시간에는 교회를 생각하고 기도도 한다고 그렇게 너스레 말씀하시더니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도록 노력하겠노라고 답을 하였습니다. 몇 주간 교회에 잘 나오시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좋아서 참 좋으시죠? 라고 물었더니 그 집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골프장에 갔을 때는 교회 생각을 많이 했는데, 막상 교회에 나오니까 골프장 생각이 더 나던데 어느 쪽이 좋은 겁니까? 괴롭습니다.”
제 대답은 “둘 다 좋으네요. 고민하고 괴로워 한다는 것은 좋은 징조이지요... ”
신앙에 있어서 이런 갈등과 선택의 괴로움은 누구나 한 번 쯤은 다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결국 신앙이란 본질적인 것을 위해 비본질적인 것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학교나 직장에서 동료들과 점심을 같이 할 때, 사람들이 많은 시내의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식사기도를 해야 하는지 안 해도 되는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우리는 마음 아파했습니다.
주일이 되면 꼭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지, 집에서 좀 쉬어도 되는 것인지를 놓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다가 소득의 열의 하나, 즉 십일조를 떼어 드려야 하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약간의 주일 헌금으로 때울 것인지를 놓고 마음을 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것은 아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요. 이것들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십일조 정도를 뗀다고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이것 보다 더 강하고 심한 강도의 아픔들이 우리의 선택 속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순간의 선택들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들은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며 탈세를 하고 싶습니다.
남들 다 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그렇게 타협을 하면 얼마나 일이 잘 진행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하다 못해 병원만 가도 아는 의사가 있어야 빠르다는 말은 이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빨리 진찰을 받으면, 그만큼 다른 한 사람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에 그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승진심사의 기간에 세상적인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고 그저 깨끗하게 기다리다가 승진이 안되거나 오히려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여러분 그래도 여러분의 그 행동에 후회가 없으십니까?
말씀과 현실 속에서 오는 끊임없는 갈등들, 그리고 세상의 소리 사이사이로 들리는 십자가의 음성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이것은 고통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사는 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통이 싫으시다면 말씀을 버려야 합니다.
이 아픔을 거부하고 싶으면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119:105)” 고백하며 말씀을 사모한다면,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도 함께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도 떠나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프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평생의 밥줄이었던 그물을 버렸습니다. 우리도 다 생업을 접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괴로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낳은 자기의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해 “매이는데 까지 고난을 받으라(딤전1:9)” 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둘째, 그렇다면 그렇게 산 사람들의 결과는 어떠한 것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약간은 충격적인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다 도달한 그 암소들의 최후는 상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번제물로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따라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산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의외로 영광이 아닌 비참한 최후인 것입니다.
⑭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우리는 말씀을 굳게 잡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아이들과 헤어지는 아픔까지도 참으며 주를 위해 일 한 후에는, 이 모든 영광을 한 몸에 받을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말씀을 따르는데서 오는 모든 고통과 희생을 알면서도, 궁극적으로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얻을 영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며 일 한 후의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기쁨의 영광이 아닌 바로 번제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희생제물로 죽임을 당하고 몸은 조각조각 각이 떠지고 불에 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은 결국 영광이 아닌 죽는 순간까지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말씀과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은 애초부터 영광을 받는 삶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 썩어지고 더 희생하고 그리하여 결국은 번제의 제물이 되는 순간까지 봉사하는 것, 이것이 성경을 품고 사는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삶을 사실 수 있겠습니까?
열심으로 주의 일을 한 후에 어떤 형태로든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또 대접받기를 원하는 우리의 체질이 180도로 변하지 않고서는 이 복음의 깊은 진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희생을 모두 드린 후에 어느정도 영광 자리를 원하는 우리의 생리가 변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말씀에 의한 최후의 승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1840년 9월 4일 영국 웨일즈 리야드란 곳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는 1863년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습니다. 중국의 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젊은 목사는 24세 청년으로 신혼의 신부를 데리고 중국 선교사로 갔다가 본격적인 선교사업도 하기 전에 기후와 식사 생활 형편이 맞지 않아 부인이 그만 죽고 맙니다. 큰 슬픔과 괴로움이 있었지만 기도로 극복하고 있다가 마침 조선 땅 황해도 장연에서 건너온 천주교인 김자평 최선일이란 사람들을 만나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후원을 받아 많은 한문 성경을 공급받고는 조선 땅 백령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 도서지방에 성경을 나눠줍니다. 1865년 9월의 일입니다.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1866년 미국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으로 오게 되었는데 강화를 돌아 한강으로 올라가야 할 배가 그만 뱃길을 잘못 알아 북상하며 대동강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배가 정박한 곳은 평양의 만경대 일대로 물이 빠지자 그 배는 그만 대동간 모래사장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다 잡아 죽이게 되는데 이 젊은 목사도 체포되어 백사장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끌려 나오는 순간에도 사람들과 군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었다고 전해졌고 결국 그 곳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의 나이 27세 1866년 9월 2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젊은 목사의 이름은 토마스. 선교사 (Robert J Tomas 1840-1866)한국에 온 선교사로 첫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때 그에게서 성경을 받았던 사람 중 홍신길이란 사람은 후에 강서 교회를 세우게 되고, 최치량이란 사람은 평양교회를 개척하고,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랐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후에 신실한 신자가 되어 그 집이 널다리교회가 되었고, 토마스의 목을 자른 장본인인 박춘권이란 사람은 평양교회 장로가 됩니다.
신앙생활은 아픔입니다.
신앙생활은 희생입니다.
내가 복음을 붙들고 죽어야 그 복음은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볼 때, 우리에게는 과연 말씀이 있는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와 교계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명예를 얻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부끄럽습니다.
장로와 권사와 안수집사 같은 교회의 직분은 본시, 개인의 희생과 사람들의 존경 속에 되어지는 자리인 것을, 오늘날에는 열심히 교회 봉사 한 후 얻게 되는 영광의 보상으로 착각하기에 우리는 말씀 앞에서 가슴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들의 종국은 멸시와 찢김이었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의 인생의 끝은 바로 순교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높은뜻 숭의교회를 왜 오셨습니까? 정담은 ‘건강한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 잘 해보려고’ 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건강한 교회를 찾다가 이 남산의 높은뜻 숭의교회까지 오게 된 것이고 이 곳에서 신앙생활 한 번 잘 해 보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훌륭히 하는 것입니까?
간혹 주차 문제를 비롯해 여러 봉사의 모습들 중에 좋지 않은 소리들이 오가고, 또 예배나 환경 등이 내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쉽게 불평들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너무너무 아픕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을 받들고 실천해야 할 우리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픔을 참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이 일을 내가 하지 않을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평생을 말씀을 갖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다가 종국에는 영광이 아닌 오히려 번제물이 되기 위해 아름다운 준비를 하는 우리가 될 때만이 하나님의 높은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받는 고통과 아픔을 오히려 기뻐하고, 말씀을 따르고 지킨 후에도 대접받거나 영광 받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죽이는, 그런 신앙의 자세를 갖는 높은뜻 숭의교회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말씀을 대충 따르려 했습니다.
말씀을 지킨 후에는 더 큰 영광을 받으려 했습니다.
말씀을 품고 살면 모든 것이 다 풍요로와진다고 믿어 왔습니다.
주님, 오늘 말씀을 향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품고 사는 우리의 자세가 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 벧세메스로 가는 젖 나는 암소와도 같이
평생을 아픈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희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감추고 나를 가리는 삶을 기꺼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주님만이
삼상 6장 1~21절 / 이용효목사
블레셋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자기들의 신을 쳤다고 말하였고, 자기들이 재앙을 만난 것도 이스라엘의 신의 언약궤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제사장들과 무당을 불러 언약궤를 어떻게 처리할까를 의논하였고 그들은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고 예물과 함께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자고 하였습니다.
1. 죄인들의 성향은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5절에는“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볼 때 블레셋 제사장들은 그들의 신 다곤이 하나님과 대결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각 도시에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6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무슨 말입니까 블레셋 제사장들은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애굽 전역이 멸망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애굽왕이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 준 사건을 말하면서 우리들도 그렇게 되기 전에 언약궤를 돌려보내자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신 이 큰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되 섬기려고 하지는 않고 어서 속히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보내버릴 궁리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거 그들이 섬겼고, 현제도 섬기고 있는 그 민족의 우상이 그들의 마음을 여전히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과거 주일학교에서 설교도 듣고, 찬송도 하면서 나름대로 감동도 받았지만 자라나면서 세상길로 내려가 세상에 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명한 파스칼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거리가 먼가”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교인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임금의 초청 잔치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장가들었으니 못가겠다고 하며 사양하였고, 밭을 샀으니 불가불 못가겠다고 하였고, 소 다섯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만 한다고 하면서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하여 임금이 노하였습니다.
세상의 사상과 지식이나 세상 가치관이나 철학에 사로잡히면 이렇게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부두에 밧줄을 메어두고는 배가 바다로 향하여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정에 어려움을 당할 때 이것이 혹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닐까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매여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몸이 병들 때 하나님을 생각해 내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섬겨 온 세상 것들이 그들의 마음과 삶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오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살길이다/ 하나님만이 복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만이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헬라어는 메타노이아 라는 말인데 생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설교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바로 이 주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천지간에 유일하신 신이시오 창조주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복을 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만이 나에게 임한 재앙을 거두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내 좁은 생각을 고쳐먹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나오는 길이 죄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2. 죄인들의 성향은 종교는 다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6절에는 “블레셋 다섯 방백들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제사장들이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로 하여금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게 하여 암소들이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울며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는 말입니다.
다곤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일어난 이 재앙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 분명한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그들의 눈으로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민족의 신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민족들 마다 자기들의 신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 중에 한 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민족주의와 지엽적 생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유목민의 신 혹은 사막신이라고 조롱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멧과 같은 선상에 두고 4대성현 중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온 소위 종교다원주의자들도 다른 종교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종교에도 그들 나름대로 진리가 있고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높은 산에 오르는 길은 코스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정상에서 만나는 것은 같다고 하면서 모든 종교는 선하고, 옳은 길을 가르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종교든지 열심히 신봉하여 선하게 살기만 하면 좋은 곳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입니다.
다른 종교도 그 나름대로 진리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4:12절에 말씀하시기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5:12절에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죄인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단순히 기독교의 창시자 정도가 아닙니다.
그 분은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골로새서1:16절에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1:3절에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유일한 구원주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지옥멸망에서 벗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구주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14:6절)
3. 죄인들의 성향은 마음이 완악하고 굳어 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끝까지 소들을 따라가면서 암소들이 본능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궤를 끌고 벧세메스를 향하여 묵묵히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2절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가니라.”
이쯤 되면 그들은 충격을 받고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다는 듯이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인간의 마음은 완악합니다.
이 암소들은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았던 소들입니다. 더군다나 젖을 먹는 송아지들이었지만 강제로 떼어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젖이 불었을 것입니다. 송아지가 음매하고 울었을 것입니다. 멍에가 몹시 고통스럽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들은 울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끌고 이스라엘 땅으로 향하여 올라갑니다.
우리 가운데는 사명을 감당하다가 힘들면 멍에를 벗어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가 물질 혹은 사람으로 인하여 시험 들어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들은 오직 한길로만 가고 좌우로 치우치지도 않습니다. 자기 사명을 다한 다음에는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 끝까지 하나님을 위해 희생합니다.
짐승들 중에도 은혜를 알고 보은하는 짐승들이 있습니다.
상주에 가면 의우총이라는 소의 무덤이 있습니다.(인터넷 검색 사진 띄움)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서상모씨가 기르던 암소였습니다 이웃집 김보배 할머니는 매일 새벽기도를 가고 오면서 우사와 맞붙은 길목에 나와 외롭게 있는 소를 쓰다듬어주고 주인이 없을 때는 먹이도주며 따뜻한 정을 나누었습니다.
이러던 중 1993년5월23일 할머니(87세)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마친 이튿날 외양간에 있던 소가 없어졌습니다. 소는 집에서 약2키로 떨어진 은치산 중턱의 김보배할머니 묘소에가 있었습니다. 굽은 들길과 수풀이 우거진 산길이라 찾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기계화된 영농으로 우리를 나가 본적이 없던 소가 애도하듯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소를 달래어 마을로 내려왔는데 소는 곧장 우리로 가지 않고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듯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가슴 뭉클한 소의 행동에 상주인 서창호씨는 두부 배추 등으로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습니다.
이소는 19살의 노령으로 2007년 1월 11일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마지막 눈을 감았습니다. 제가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보니 김보배할머니의 사진을 보여주자 눈물을 흘리며 혓바닥으로 핥기 시작하다가 숨을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상주시는 소의 시신을 꽃상여에 태워 경천대 박물관 옆에 의우총을 만들어 안장했습니다.
그런데도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온갖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어 하나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습니다.
이사야1:3절에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로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 은혜였습니다.(에베소서2:8절)
주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그 보배로운 피를 다 쏟아 주셨고 생명을 버리시어 나를 지옥의 멸망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나를 의롭다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나에게 귀한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2:9절에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고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소들이 언약궤를 끌고 이스라엘 지경을 향하여 갔듯이 우리들도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모시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예수님만 전하는 사명의 길을 끝까지 가야만 하겠습니다.
십자군 시대에 영국 길버트라는 청년은 사라센 왕국의 임금에게 잡혀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서 임금의 딸 공주가 그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그 청년을 추방하여 영국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자 공주가 병들어 앓게 되었는데 나라의 유명한 의사가 다 진찰하고 약을 처방했지만 공주의 병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공주는 그토록 사랑하여 보고 싶은 길버트를 찾아 가기로 작정하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남긴 채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공주가 아는 영어라고는 단 두 마디였습니다.
즉 "런던"과 "길버트"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영국에 도착하여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길버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공주의 행색은 남루하여 거지나 다름없었습니다.
런던시내의 사람들은 그를 미친 여자로 생각하였지만 공주는 계속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길버트”라는 이름만 외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길버트의 하인 한 사람이 시내에 나왔다가 공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하인은 그 여자를 데리고 가서 자기 주인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마침내 공주는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길버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 두 사람은 뜻 깊은 결혼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길버트의 아내가 된 이 사라센 공주는 영국교회의 위대한 인물로서 켄터베리의 대주교를 지낸 [토마스 베케]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공주는 자기 조국에 수많은 남자들이 있었지만 길버트 외에 누구도 남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변에 수 없이 나를 지배하고자 하는 돈이 있고,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고, 자랑이 있고, 쾌락이 있고, 이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외에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1)우리는 옛 습관을 벗어버리고 진실로 주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신앙을 회복하여야 하겠습니다.
2)우리는 종교다원주의 잘못된 사상을 배격하고 우직 예수로 신앙무장 해야 하겠습니다.
3)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언약궤를 실은 두 마리 암소
삼상 6장 7-15절 / 권순태목사
I. 소는 지구상에 있는 동물 중 우리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동물일 것이다. 우유와 치즈를 제공하고 스테이크는 물론, 소뼈 곰국, 소족탕, 소머리 국밥을 준다. 소고기장조림, 소갈비, 소등심 숯불갈비도 해 먹을 수 있다. 또한 소가죽으로 옷도 만들고 북도 만든다. 뭐하나 버릴 것이 없다. “소같이 일한다”라고 말하듯이 살아서는 우리에게 노동력을 제공해 준다.
특히 요즘 코로나 시대에 백신이 소망인데 무서운 바이러스에서 인류를 구한 첫 구원투수가 바로 소다. 1796년 영국 시골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는 소젖 짜는 아가씨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고 소를 키우는 목축업자들은 천연두에는 잘 감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천연두에 걸린 소의 상처진액을 짜내어 소량을 인공적으로 사람에게 주입했다. 그것이 불주사라 하는 우두이다. 유럽인구의 30%를 희생시킨 흑사병이나 20세기 초 등장하여 3천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스페인독감보다 더 강력하여 지금까지 10억명 이상 세계인을 희생시킨 천연두는 제너의 그 우두주사로 사라졌고 곰보 얼굴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바로 소가 백신제공자이다. 이후 루이파스퇴르 (Louis Pasteur)는 암소를 뜻하는 라틴어 바카(Vacca)에서 백신(Vaccine)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토록 헌신적인 소가 오늘 본문에 나온다. 이 암소들은 여호와의 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3가지 헌신의 아이콘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II. 첫 번째 헌신의 아이콘은 “멍에” 이다.
멍에는 일을 시키기 위해 소 등위에 걸치는 작업도구이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이제 일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멍에를 메지 아니한 소는 자유분망하게 살던 소이다. 그런 소가 멍에를 메게 되었다는 말은 어떤 일을 위해 구속되었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마리 암소는 지금껏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였다. 아무런 짐도 지어본 적 없이 편히 살았던 소이다. 그런 암소들이 이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나르기 위해 멍에를 메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를 때 이 멍에는 언제나 함께 따라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멍에를 메도록 요청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바울은 빌립보성도들에게 함께 멍에를 멘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빌 4:3).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듯이, 교회의 지체들이나 주의 일을 하는 동역자들은 함께 멍에를 메야 한다.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지체들과 함께 멍에를 맨다고 해도 멍에를 멘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은 부담 지는 것을 싫어한다. 가급적 부담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려 할 때 부담을 갖는 것은 부작용이 아니요 당연한 현상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때 우리 각자가 지어야 할 “십자가 부담”은 늘 있게 마련이다. “멍에”를 메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자 필수적인 일이다. 신앙의 선배들도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다 부담스러워했다. 모세도 부름을 받을 때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한다(출4:10,13). 예레미야를 부르셨을 때 그도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한다(렘1:6).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멍에를 걸자 부담을 느끼고 그 길로 곧바로 니느웨와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멍에를 지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4-5). 이제 우리는 주님을 위해 내가 지어야 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멍에를 피하지 말라. 주님을 홀로 내버려 두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멍에는 없을 것이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메어야 할 미션이며 우리에게 축복의 부담이다. Q.나의 멍에는 무엇인가?
주님의 이름으로 감당하는 교회의 일들 - 성가대, 어린이, 청소년, 경배와 찬양, 행정일, 교회건물을 돌보는 일들...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들 -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등등..., 시간을 부담하고, 물질을 부담하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부담하고, 재능을 써야 하는 것 등등 그 어떠한 것이라도 주님과 멍에를 같이 메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멍에요 부담이다.
III. 두 번 째 헌신의 아이콘은 “송아지”이다.
암소들은 멍에를 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약궤를 나르기 위해 젖을 먹여야 하는 송아지를 떼어내야 했다. 어미 소는 송아지를 돌보아야 했고 송아지는 어미를 필요로 했다. 늘 엄마 옆에서 함께 있고 젖을 빨아먹고 살고 있었던 송아지들은 이제 어미를 잃게 되었다. 젖나는 소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송아지들이었다. 어미 소의 본능은 아직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새끼 송아지들을 떼어 놓고 가는 것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본문12절에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라고 한다.
암소들은 궤를 옮기는 일을 함에 있어 자신들의 가장 귀한 송아지들을 드리는 헌신을 했다. 암소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귀한 것을 희생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찬밥 신세같이 대충 대우받고,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이 아닌 남는 것으로 대충 드리게 될 때 그런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 아니요 내 자신을 위한 인사치례 헌신이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상한 헌신이 된다.
헌신하면 언제나 아브라함의 헌신이 생각난다. 그에게 주문된 것은 은도 금도 다른 가축도 아니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꼭 찍어 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저울에 달아보게 하신 것이다. 아들사랑이 무게가 나가는지 “하나님사랑”이 무게가 더 나가는지 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드리라는 요구를 하셨을 때는 아브라함의 생명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것은 “너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느냐”는 헌신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무리한 요청을 하신 하나님은 이후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증명해 주셨다.
우리의 삶에서 명예, 물질, 재능, 부귀영화... 등등을 언급하면서 그런 것들을 아주 나쁜 것처럼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쁜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경쟁하게 될 때 나쁜 것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비교의 대상이 될 때 우상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아주 불쾌해 하신다. 그래서 좋은 것이 계속 좋은 것으로 남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비교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좋은 것은 우리에게 큰 고민거리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하여야 한다. 젖나는 암소에게 가장 귀한 것은 송아지들이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은 생명과 같은 아들 이삭이다. 가장 귀하기에 고민이 된다.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입다는 암몬족속을 물리쳐서 이스라엘을 구했지만 하나님과 서원한 대로 무남독녀인 딸을 번제물로 드리게 될 때 자신의 옷을 찢으며 그 딸에게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삿11:35) 라고 한다. 그러나 그 고민의 끝에 결정체로 나온 우리의 헌신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비교되는 것을 용납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족집게처럼 집어내셔서 바로 그것을 요구하신다. 두 마리 암소는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장 귀한 송아지를 남겨 두면서 언약궤를 메는 미션을 감당했다. Q.나의 송아지는 무엇인가?
IV. 세 번째 헌신의 아이콘은 “수레”이다.
암소들은 언약궤를 끌었다. 참 훌륭하게 일한 것이다. 그러면 여물도 좀 주고, 물도 주고, 수고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암소들의 운명은 어떠한가? 그 암소들은 새끼 송아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제물로 드려졌다. 완전히 태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태우는 땔감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그 암소들 자신들이 끌고 온 수레나무를 패서 만든 장작이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자기를 태울 나무를 자기가 지고 온 것 아닌가!
그러한 모습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의 한 산으로 갈 때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들었고 아들 이삭에게는 장작을 메게 한 장면이 연상된다. 이삭은 자기를 번제로 태울 나무를 스스로 지고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단계 더 나아가 이런 이삭을 보면서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생각한다. 순종하는 어린희생양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주님의 모습이다. 자기가 매어 달려 죽게 될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 참 어이가 없고 아이러니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참된 순종과 온전한 헌신의 모습이었다.
암소의 헌신은 끝까지 드리는 헌신이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그건 지나칩니다”가 아니라 내 마지막까지 태워드리는 헌신이었다. 암소들이 말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수고했다고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저희를 번제물로 삼으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집에는 젖을 주어야 할 우리 송아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빈수레에 여물을 실어주어야지 그것을 패서 저를 태우는 땔감으로 쓰다니요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 수레를 장작삼아 번제물로 드려진 소들은 헌신은 온전한 헌신이었다.
이렇게 완전히 다 드리고 나면 내게 떨어지는 것은 뭐지라는 본전생각이 나게 된다. 그러나 온전한 헌신은 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 give를 하면서 이미 take를 하려는 의도를 가지게 되면 그러한 헌신은 불순한 헌신이요 상한 헌신이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물은 헌신이지 비즈니스 거래가 아니다. 내가 헌신한 것에 대해 값을 쳐달라고 하면 더 이상 “헌신”이 아니요 “장사”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거래관계로 격하되면 천박스러워진다. 하나님과 우리는 고객과 업주의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요 생명까지 줄 수 있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께 나 자신과 내가 끌던 수레장작까지 드리는 것이다.
32년간 친구로 지내오고 몇 일 전에도 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물었던 인도 나갈랜드 출신의 꼬뻬메로라는 친구가 있다. 1988년도 필리핀 신학교에 처음 갔을 때 만난 친구다. 그는 작곡도 하고 노래도 곧잘 불렀는데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기타를 몹시 갖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내게 그 기타를 팔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값으로 그가 가지고 온 자신 부족 전통의 핸드메이드 쇼울을 주겠다는 것이다. 저의 기타와 그의 쇼울의 실제 값이 어떻게 되는지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나는 안팔겠다고 했다. No I don't want to sell it. 그 친구는 약간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때 저는 But I want to give it to you as a gift 라고 했다. 선물로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타와 쇼울을 서로 주고 받았다. 사고팔지 않고 선물로 주고 받았다. 사고파는 것은 고객관계이지만 선물을 주고받은 것은 친구의 관계인 것이다.“사고팔고”와 “주고받고”는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냉정한 거래가 아닌 따뜻한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값을 지불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마지막 수레까지도 드리는 것이다. Q. 보상을 얻어 가득 실어야 할 수레를 오히려 나를 태울 땔감으로 드릴 나의 수레는 무엇인가?
VI. 결론
올해는 신축년 소의 해다. 12년 전 이맘 때 표어 “벧세메스로 향하는 소와 같이 2009”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 되어 산 것처럼, 벧세메스로 향하는 소와 같이 번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삶이 되어 주의 마음에 합당한 교우들이 되기를 바라고 축복한다. 고기와 우유도 주고, 노동력도 주고, 백신의 구원투수로 인류에게도 유익을 주었던 소와 같이 하나님 앞에 “뭐하나 버릴 것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번제물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멍에는 무엇인가? 거룩한 부담을 지라. 나의 송아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눈속임 하지 말고 가장 귀한 것을 드려라. 어차피 다 아신다. 나의 수레는 무엇인가? 수레에 보상을 채우는 것이 아니요 나를 다 태우는 땔깜이 되는 마지막 자존심의 수레까지 드리라.
이제 1월 셋째주를 맞으면서 번제물로 드려진 소들과 같이 100% 온전한 헌신을 결단하는 우리 모든 지체들의 삶속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와 설레임으로 나아가는 이번 한 주간과 남은 한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법궤를 끄는 소와 성도
박인걸목사(수주중앙교회) / 삼상 6:7-16
황희 정승과‘소’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불언장단(不言長短),‘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음,’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날의 황희가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들판을 지나다 잠시 쉬게 되었습니다. 들판에서는 노인이 소를 몰며 밭을 갈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던 황희가 농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노인장, 그 두 마리의 소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오?”그러자 농부는 밭가의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옷소매를 잡아당기더니 소가 들리지 않도록 귀에 대고 귀엣말을 하였습니다.“누런 소가 검은 소보다는 훨씬 일을 잘합니다.”“그런데 노인장, 어느 소가 일을 잘하던 못하던 그것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귀엣말을 하십니까?”황희의 말을 들은 농부는“젊은 선비, 모르는 말씀하지 마시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기를 욕하고 흉을 보면 기분을 상하게 되는 것이오.”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얼굴이 화끈했습니다. 비록 소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지금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잘한다, 못한다.’하고 흉보는 일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저 노인은 비록 농사를 짓고 있으나 학덕이 높은 선비인 것 같구나. 오늘 나는 저 노인에게 아주 값진 교훈을 받았으니 평생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황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때부터 다시는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 때문에 참으로 큰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소는 이 외에도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동물입니다.
소는 인간들에게 가장 친근한 짐승이며 유익을 크게 주는 가축입니다. 소는 가축들 중에 가장 온유합니다. 덩치가 아무리 커도 아이들에게 끌려갑니다. 평생 일을 합니다. 밭을 갈고, 짐을 나르고, 달구지를 끌고, 사람을 태워 나르고, 새끼를 낳아 주인에게 재산을 불려주고, 젖소는 우유를 주고, 육우는 죽어서 고기를 주고, 가죽을 인간들의 생활 용품으로 주고, 고대 사회에서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소에 대한 이야기기 나옵니다.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과도기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많은 피해를 입히고 전쟁에 메고 나온 하나님이 법궤를 빼앗아 갔습니다. 전쟁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 이겼으나 법궤로 인하여 그 나라에 큰 재앙이 임했습니다. 독종이 만연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블레셋은 극히 당황해 합니다. 그 원인이 법궤에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생각을 합니다. 그 방법이 새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싣고 아직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암소 두 마리를 골라 젖 먹는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보낸 후 법궤 실은 수레를 끌고 가게 한 것입니다.
두 마리의 암소는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가는데 새끼를 떼어 놓았기 때문에 울면서가 갑니다. 하지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갑니다. 끝까지 갑니다. 결국은 두 소는 죽임을 당하고 그곳에서 제물로 드려집니다. 블레셋에 재앙이 멈추었고, 법궤는 결국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이 내용을 신약 적으로 재해석을 한다면 ① 소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동시에 성도의 모형입니다. ② 법궤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모형입니다. ③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은 봉사자의 모형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성도들의 참 된 자세를 본문에 등장하는 소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훈을 우리들에게 줍니까?
(1) 택함 받은 소입니다.(삼상6:7,12)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라고 했습니다. 당시 수많은 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황소, 암소, 젖 나는 소, 새끼 달린 소, 그리고 송아지들입니다. 그런데 법궤를 끌고 가기 위하여 두 마리의 젖 나는 소를 택하였습니다. 많은 소들 가운데 뽑힌 소들입니다. 소들 입장에서는 불행인지, 행운인지 모를 일이지만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간다는 의미에서 영광입니다. 피조물이 조물주인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가게 되었으니 영광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뽑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택하여 부르심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을 위한 택함이고, 하나는 사역을 위한 택함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각각 독립적 사건이 아니라 유기적 사건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어도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수행해야 하고, 사역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어도 구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다만 특수한 사역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부르심 중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특별히 부르신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크고 작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특히 하나님이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택한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오늘날도 주께서 목회자나 신학자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특별한 택함과 부르심이 있어 주의 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르심 중에 부르심입니다. 이와 같은 특수한 목적 외에 부르시는 부름을 일반적 부름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택하여 부름을 받은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 확장, 복음전파, 영혼구원, 하나님 영광, 교회 봉사’를 위함입니다. 출애급기 35-36장에 보면 성막을 짓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일꾼을 선택합니다. 그들을 종류별로 살펴보면 ① 계시 일꾼이 있습니다. 모세가 계시 일꾼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성막 설계도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를 따라 성막을 건축합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교인들이 계시 일꾼을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어느 개인이 중심이 되거나, 어느 단테가 중심이 되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② 지명일꾼이 있습니다. 오홀리압과 브살렐을 모세가 지명하였습니다.(출35:3) 지명한 두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주시고, 지식을 주었습니다. 공교하게 성막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지명하여 세울 때 순종하는 자들에 같은 은혜가 임합니다. ③ 감동일꾼입니다.(출35:34) 오홀리압과 브살렐에게 성령의 강한 감동이 왔습니다. 그들은 성막을 잘 지었습니다. 루디아에게 성령의 감동이왔습니다. 저에게도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서 목회 사역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④ 물질일꾼이 있습니다.(출36:5)“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많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쓰고 남음이 있도록 드리는 일은 축복입니다. 아주 귀한 일입니다. ⑤ 노동일꾼입니다.(출36:27)그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성막을 짓는 일에 봉사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봉사 하는 일에 있어서 어느 교회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축복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구원을 위하여 택하였지만 동시에 수주중앙교회를 섬기게 하기 위하여 택함 받은 주님의 그릇들입니다. 소와 같이 일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2) 역할에 성실한 소입니다.(삼상6:10-12)
본문에서 수레를 끌고 가는 소가 취한 행위들은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의 태도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① 수레를 메었습니다.(10) 원래 법궤는 수레에 싣고 가면 안 됩니다.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몰랐기 때문에 수레에 법궤를 실었습니다. 모르고 하는 행위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수레에 법궤를 싣고 가나다가 웃사가 죽었습니다. 다윗도 그 사실을 몰랐지만 그들을 위하여 주신 율법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된 것입니다. 같은 사안이지만 법 적용은 달랐습니다. 기독교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성경을 몰라서 죄를 졌다는 핑계가 용납되지 않음을 본 사건은 깨우치고 있습니다. 아무튼 수레를 멘 소는 순순히 자기들의 갈 길을 갑니다. 우리는 모두 멍에를 멘 사람들입니다. 직분의 멍에가 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집사, 교사, 구역장, 성가대, 등등의 멍에를 메었습니다. 멍에는 수레에 실은 짐의 중량에 따라 고통의 차이가 다릅니다. 짐이 무거울수록 멍에에 실리는 압력이 큽니다. 지게 짐을 져보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짐이 무거울수록 어깨를 누르는 압력이 큽니다. 소들은 힘들지만 말 한마디 없이 수레를 끌고 갔습니다. 오늘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받거나 임명을 받는 다는 것은 멍에를 멘다는 뜻입니다. 멍에를 수락한다는 것은 고통과 부담을 감수하겠다는 전제아래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멍에를 메었으면 목적을 다 수행할 때 까지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성실하게 그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집에 큰 피해가 돌아가며 다른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짐을 더 짊어지우는 결과가 되며 결국 하나님께 손해를 입히는 일입니다. 아무리 무겁고 힘들어도 그 멍에를 져야 합니다. 땀이 쏟아지고 허리가 휠 정도가 되어도 주인이 쉬라고 할 때 까지 메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멍에를 멘 소의 책임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가정의 가장이 한 가정의 경제와 건강과 자녀들의 교육 등, 전반적인 책임을 메고 가는 소입니다. 밖에서 어떤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집안에 들어와 그 일을 털어 놓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신경질을 내면 그 가정이 건강해 질 수 없습니다. 어느 드라마에서 보니까 직장에서 해고당한 가장이 식구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아파트 경비자리를 구해 일하면서 가족들에게는 실직당한 것을 알리지 않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세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불평 없이 힘들어도 묵묵히 그 일을 소처럼 수행하는 자들을 우리 주님을 기억하십니다. ② 송아지를 떼어 놓고 울며 갔습니다.(12) 주님을 위한 아픔입니다.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 있습니다. 거기엔 아픔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을 위하여 아픔을 참고 눈물을 쏟아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오해도 받고, 미움도 받고, 손해도 보고, 욕도 먹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불렀습니다.“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해, 골고다의 험한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우리는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눈물도, 모욕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부름 받아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희생과 수고도 없이 대접을 받거나 높임을 받으려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들의 땀과 눈물로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려놓음처럼 우리들도 주님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③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목적지 까지 갔습니다.(12) 이는 확고한 신념과 일관된 태도를 칭합니다. 이당 저당 옮겨 다니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철새라고 합니다. 한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시를 옮기는 사람을 사회부적응자라고 합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사람을 갈지자 인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됩니까? 초대교회는 박해가 심했습니다. 세 종류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배교자입니다. 둘째, 은둔자입니다. 셋째, 순교자입니다. 가장 귀한 믿음은 신앙을 지키되 순교를 각오하는 교인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교인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전과자가 있습니다. 시험에 자주 넘어지거나 영적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 낙낙 장송은 부러질 지언즉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관, 인생관, 신앙관, 교회관에 있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합시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확고 부동합시다. 주님처럼“나는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 나의 갈 일을 가리라.”(눅13:33) 이런 신앙이 되길 축원합니다.
(3) 번제로 드려진 소입니다.(삼상6:14)
두 마리의 소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이 있는 곳에서 메고 간 수레를 빠개어 그 위에 제물로 올려 진 후 불에 태워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는 축복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아픔입니다. 젖 먹는 송아지들은 집에 두고 소 두 마리는 죽었습니다. 두 마리 소는 울면서 왔는데 죽으면서도 얼마나 많이 울었겠습니까? 그리고 집에 남은 소들은 또 얼마나 어미를 찾으며 울었겠습니까?
저는 어떤 교회를 압니다. 그 교회가 약 30년 전에 건축 될 때 그 교회를 섬기던 장로님이 자신의 집을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교회를 건축 할 때 발 벗고 나와서 허드렛일을 하며 교회를 지었습니다. 장로님의 부인과 자식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기에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교회를 잘 지었습니다. 교회는 예배당 1층에 방을 꾸며 장로님 가족이 살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교회에 모두 바쳤기 때문에 자녀들을 대학 공부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빚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후 그 가정은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지금은 그 가정의 소식을 알길 없지만 그 가정의 헌신으로 인하여 그 교회는 건강하고 튼튼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인들이 모여 행복하게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장로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어떤 짐을 지고 있습니까? 재정의 짐을 얼마나 졌습니까? 전도의 짐을 얼마나 졌습니까? 봉사의 짐을 얼마나 졌습니까? 짐을 졌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해서 즐거움으로 졌습니까? 억지로나 마지못해 졌습니까? 온갖 불평을 다 늘어놓으며 졌습니까? 우리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바쳐 마지막 피 한 방울과 영혼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며 숨을 거두었는데 나는 주님께 드린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참된 주님의 제자들은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고, 내가 교회를 위하여 어떤 희생과 헌신을 다 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꽃꽂이로 한 번 봉사하였습니까? 주일 낮에 우리가 맛있게 먹는 점심을 한 번 섬겼습니까? 자신들의 가족을 위해서는 뷔페, 갈비, 피자, 오리집에는 수시로 가면서 1년 내내 100,000이면 우리 교인이 먹는 점심 한 번도 안 섬기는 교인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설교 한 편을 준비하려면 하루 종일 시간을 바쳐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설교를 준비하는데 1년이 가도록 드링크 한 박스, 명절이 되어도 사과 한 박스도 선물할 줄 모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우리 주님은“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몸을 주님께 제물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결론입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소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택함받은 소들입니다. 우리도 택함 받은 백성들입니다. 성실하게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맡은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우리의 몸을 주님을 위하여 제물로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멍에를 맨 두 암소처럼
삼상 6장 7-15절 / 임현수목사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라고 일컫는 로이드 죤스 목사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To maintain the balance
이 말은 반대로 "타락한 인간은 언제나 극단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의 극단을 거절 할 때 또 다른 극단에 빠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것도 서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극단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치우치지 않는 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성전에 대한 개념도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다고 하는 너무 구약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해서 성전을 지나치게 성역화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극단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니까 성전은 필요 없다고 해서 무 교회 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건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구약의 성전과 성막 이전에 있었던 "언약궤"에 대한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와 인도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앞세우고 따라 갔으며 그들이 진을 칠 때 이 언약궤를 중앙에 놓고 12지파가 4방으로 3지파식 원형으로 진을 치고 쉼을 얻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가 역사의 한 때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겨 있지 말아야 할 블레셋 땅에 머물고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지경에 들어간 언약궤는 축복과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저주와 재앙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신상인 다곤은 그 앞에 쓰러져 머리와 손목이 끊어지고 몸둥이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의 방백들을 법궤를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암소 두 마리를 택하여 수레를 소에 메우고 언약궤를 싣고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보내고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를 향하여 가게 하였습니다. 이 두 마리의 암소가 걸었던 길, 두 암소가 멍에를 메고 일하는 모습, 이 길이 바로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고 이 암소의 사역이 바로 우리들의 사역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이 법궤는 오늘날의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 입니다. 교회라는 법궤를 소처럼 메고 천성을 향하여 가는 자들이 바로 부름 받은 성도들의 모습이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멍에를 맨 두 암소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두 암소의 사역은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12절 입니다.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이 두 마리의 암소는 바로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야 할 목표를 향해 정확하게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의 소니까 8개의 발이 그것도 한번도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는 암소가 보조를 맞추어 나갔다고 하는 것이 기적 입니다. 충성도 혼자 하기는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둘이 보조를 맞추어 충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교구장과 대교구장이 맘이 맞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목자가 목원이 마음이 맞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사역의 축복 입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서로 협조하면서 하는 충성한다는 것도 참 아름다운 일 입니다. 교회의 제직들이, 권사들이, 목자들이, 당회가 서로 보조를 맞추어 바르게 걷는다는 것도 축복입니다.
뒤에서는 젖먹이던 어린 송아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눈물은 앞을 가리고 있었지만 암소 둘은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뒤를 돌아 보지 아니하고 앞만 향하여 갔습니다. 우리도 치우침 없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고 나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일에 너무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너무 은사론에 치우치고, 너무 귀신론에만 치우치고, 너무 신학적인 것에만 치우치고, 자기가 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고집을 부리거나 독선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신앙 생활도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좌로 우로 치우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가정을 지키고, 자기 목장을 지키고, 자기교회를 한 마음으로 지키십시오. 끝까지 가십시오. 소는 죽을 때까지 주인을 위하여 충성 합니다. 한 결 같이 충성하며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춘하추동 변함이 없습니다. 충성하되 고집도 없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기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두 마리의 암소의 사역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던 우리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이었습니다.
올해로 우리교회는 2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나온 20년길을 돌아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마리의 암소같이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 하심을 받아온 것 같습니다. 키플링 시절, 킹스웨이 시절, 그리고 렉스데일 시절 이제 앞으로 맞이하게 될 새 성전 프로페셔널 시절도 인도해 주실 것 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시작 하면서부터 이스라엘은 승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입니다. 언약궤도 다시 돌아 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블레셋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련 때문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시련을 도전으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걸음 한 걸은 주의 인도를 받아 전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을 지도자로 하여 미스바에서의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며 감격스런 마음으로 하나의 기념비적인 돌을 세우며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에벤에셀" 이라는 유명한 말 입니다.
7:12절에 보면 사무엘의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지난 20년을 돌아 보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 주셨습니다" "에벤에셀"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둘째로 두 암소의 행진은 협력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상 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이 두 마리의 젖소는 두 가지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이 젖소는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젖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험이 없었다는 말 입니다.경험이 없는 두 마리의 소가 한 멍에를 지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두 암소가 각기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를 원했다면 그리고 다른 속도로 진행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특별히 두 마리의 수소도 아니고… 두 마리의 암소! 두 여자가 의견의 일치를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이 두 소는 각각 새끼가" 있었습니다. 어미 소가 젖 먹는 송아지를 떼어 놓고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젖소는 함께 나란히 같은 목표와 방향을 위해서 행진 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십시오. (어제 축구 팀의 협력/우리문화/팀웍의 중요성)
현대 한국인과 옛날한국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옛날의 우리 문화는 밥상 공동체의 문화였습니다. 한 솟에서 밥을 짓습니다.
그리고 한 밥상에 앉아 한 그릇 찌게를 한 복판에 놓고 숫갈을 다같이 담그고 함께 나란히 먹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한국 음식의 독특한 특성이 있다면 서구음식과 다른 구조적 특성이라고 생각 합니다. 서양 음식은 따로 따로 먹어야만 제 맛이 납니다. 처음에는 음료수를 마시고, 에피타이저를 먹고, 그리고 나서 빵을 먹고, 습을 먹고, 그 다음에도 한 가지씩 먹습니다. 그리고 디저트를 먹고 끝납니다.
그런데 한국음식을 서양음식 식으로 먹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맨 처음에 밥부터 다 먹고, 그 다음에 김치를 몽땅 먹고, 그 다음에 찌게를 전부 먹고, 그 다음에 콩나물을 먹고, 그리고 나머지 밑반찬을 하나 하나 먹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 음식은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닙니다. 밥상에 잔뜩 늘어놓고 이것 먹었다 저것 먹었다 하는 상호보완의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놀라운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서구 문화의 잘못된 이기심"을 받아 들임으로 해서 문화가 변질된 것 입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경쟁적인 민족으로 민족성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분열과 분파가 심한 민족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민족적인 약점에도 불구 하고 지난 20년 동안 우리교회는 놀라운 협력의 사역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교회에는 수퍼스타가 없었습니다.
특정 인물이 없었던 것이 너무 감사 합니다. 온 교우들이 동등한 헌신을 보여 주었습니다. 균등한 참여를 보여 주었습니다. 선교에도 건축에도 교육에도 모두 협력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남겨 주셨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함께 협력하는 한결 같은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전도하러 제자들을 내보내실 때도 "둘씩 둘씩' 짝 지워 내보내신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사역"입니다. 충성도 혼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맞추어 충성 하기는 어렵습니다. 서로에게 보조를 맞추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연합의 전통과 협력의 아름다운 덕을 가지고 함께 주의 제자를 길러내며 함께 교회와 이웃을 섬기고 봉사하며 함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위대한 일을 위해서 헌신 할 수가 있다면 우리는 정녕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놀라운 교회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세번째로 두마리의 젖소의 사역은 멍에를 맨 희생의 사역 이었습니다.
삼상 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이 젖소의 행진에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어린 송아지를 떼어놓고 가야만 했습니다. 이 어린 송아지들을 떼어 놓고 가고 있는 어미 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울었다고 했습니다.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눈물을 흐리며 묵묵히 벧세메스를 향하여 가고 있는 소의 행진을 보십시오. 교회를 섬기며 멍에를 메고 가는 성도들도 때로 눈물을 흘리며 행진 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섬기면서 밤낮 3년 반 동안 눈물로 각 사람을 권했다고 했습니다. 희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삼상 6: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벧세메스에 도착한 소는 "장작더미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소는 자기를 위해 사는 일도 자기를 위해 죽는 일도 없습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 살고 주인을 위해 죽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라는 고백이 생각 나십니까?
그것은 위대한 희생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위대한 사역의 배후에는 위대한 희생이 따르지 않은 적이 역사에 없습니다.
911을 기억하십니까? 소방관 경력 28년, 뉴욕 소방본부의 제11소방대장(Battalion chief) 리처드 피치오토는 암흑과도 같던 그날,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의 북쪽 타워에서 동료들과 함께 민간인들의 구조를 위해 목숨 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공포가 휘몰아치는 굉음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북쪽 타워의 35층에 있었던 그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두려운 그 소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 대의 기차였다. 천대의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천 개의 공포였다. 아니 무수한 공포 자체였다 약 29분 뒤에는 그가 있던 북쪽 빌딩이 천둥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때 그는 6층과 7층 사이 계단 통로에 있었습니다.
“빌딩 전체가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귀청은 찢어질 듯 했고, 뼈가 저려왔으며 무릎은 후들거렸습니다. 온 몸은 주체할 수 없는 공포에 떨고 있었습 니다. 그리고 공포의 바람은 마침내 강하게 귓전을 때렸습니다. 나는 틀림 없이 그 공포의 폭풍이 내 머리를 후려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피가 이루어지는 동안 그는 빌딩 안에 갇혀 있던 수많은 시민들을 구조했습니다. 특히 어떤 층에 별도로 남아있던 장애인들 수십 명을 구조하는 장면 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발을 짚고 있는 사람들, 보행기나 지팡이에 의지하고, 심지어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 그들 곁에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친구들과 동료들이 두 사람씩 붙어 있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야 할 위급한 시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살피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 그 중엔 장애인들을 부축하여 70층을 걸어 내려온 동료들도 있었다.“
전원이 사망한 뉴욕 소방대 300명 그 중에서 잿더미에 묻혀있다가 유일하게 구조된 리처드 피치오트의 증언 입니다.그들의 희생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구했습니다.
주님도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결과로 저와 여러분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새 생활을 설계하며, 사망과 절망에서 영생과 소망의 나라로 옮겨 새 사람을 살게 된 것 입니다. 희생의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큰빛교회가 20년 동안 복음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은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 분들의 수고를 어떻게 다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제직들은 누구보다도 "교회의 멍에"를 그 어떤 것 보다 우선적으로 맬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릴려고 했습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기쁨으로 선택했습니다.
시돈 땅의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대접하기 위해 마지막 남아있던 한 줌의 양식을 아들에게 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종에게 드리는 모험을 감행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희생이었습니다.
주의 제자들은 모두 자기의 직업도 재산도 버리는 희생을 감수 하면서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모든 복음의 역사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의 뒤안길에는 이렇게 아름답고 눈물겨운 희생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행진이 마쳐지고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주님 앞에서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을 발견 할 것 입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진행 되는 동안에 그 주변에서 언제나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사람들 입니다. 구경꾼들도 흥분할 수 있습니다. 구경꾼들도 소리 지를 수 있습니다. 그들도 기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경꾼은 구경꾼일 뿐 입니다.
작은 실천도 한번 못해 보고 죽은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버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격하며 자신의 삶을 드리고 자신의 은사를 드리고 자신의 시간을 드리고 자신의 몸을 드리며 주의 사역에 참여했던 희생의 참여자들이 있습니다.
계시록 20장에 보시면 천년왕국의 찬란한 비젼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희생적으로 복음에 참여 했던 성도들은 주의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때 거기 보좌앞에 주의 복음을 위해서 목베임을 당한 영혼들이 있더라" 그러면서 말씀은 계속 됩니다. "그들이 주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라"
복음을 위해서 희생했던 그들이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스타들이 되어 하늘의 별 같은 빛을 발하며 주님과 더불어 그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수 많은 어린양이 피를 흘려 죽었기 때문에 유월절(逾越節)이 영원한 기념일이 된 것 입니다. 출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유월절이 중요한 이유는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도 유월절 사건이 있었기 때문 입니다. 고전 5장 7절에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유월절 이라고 말 합니다.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어린양과 같이 예수님께서 희생 되셨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이 땅 위에 오셔서 희생당하셨습니다. 만약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진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Social Club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윤리나 도덕강연과 별다를 것 없습니다, 십자가가 빠진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값싼 윤리나 철학에 불과합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가짜입니다. 기독교의 탈을 쓴 종교집단에 불과합니다. 기독교는 어린양의 피가 빠져서는 안됩니다. 이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구원도 있었고, 죄사함과 자유함이 주어졌습니다. 평안함을 누리게 된 것 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축복도 어린 양의 희생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들어간 곳마다 소망이 없던 개인, 가정, 국가가 소망과 축복 의 개인, 가정, 국가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저주에 서 축복의 길로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영국의 아써 대왕의 이야기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한번은 부하들이 어떤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대왕님 이 친구는 대왕님의 기사가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우리들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적의 첩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대왕님이 분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대 아서 대왕은 그 앞에 무릎 끓은 젊은 기사를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팔을 걷어 부치면서" "내 팔에 흉터가 보이는가?" "네 보입니다"
"그대가 만약 나의 기사라면 전쟁터에서 나와 함께 뛰는 가운데 흉터를 가졌을 것임에 틀림이 없네. 나에게 그 흉터를 보여주게나" "show me your scar" "네 흉터를 내게 보이라"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던져 충성했던 바울은 어느날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내 몸에 고난의 흔적을 가졌노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가의 희생과 고난의 흔적을 보여주신 주님을 참으로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그 주님을 위해서 수고와 희생을 바친 여러분의 고난의 흔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의 보좌 앞에 서는 날 주께서 만약 여러분과 저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수고 하고 땀흘리고 희생했던 흉터를 내게 보이라" 이 흉터가 있습니까?
자기중심적인 시대/ 자기의 편리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본받아 주님을 위해서 변변한 희생다운 희생을 해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의 상흔을 보이시며 내 손을 잡아 주실 때 내가 보일 상흔은 있습니까? 선교도 헌신이고, 건축도 헌신을 요구하고,교사로 봉사하는 것도 희생이고, 재정부에서 헌금 계수하는 것도 희생입니다.
몸으로,은사로,물질로,시간으로 희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벧세메스로 향하던 두 암소처럼 주의 인도를 받으며 협력하며 희생을 나누는 성도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