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aṃ hoti — ‘ ’ ti
[< ‘ ’ ti)라는 이와 같음이(thus, in this way : evaṃ)> 있다(hoti).]라는 표현이
경문에 많이 나타납니다. 초불의 번역은 대체로
'그에게(tassa) [이런 생각이 있다.(evaṃ hoti — ‘ ’ ti)]'로 번역합니다.
참으로 대책 없는 번역이 '생각'이거나 'think'입니다만 말 그대로 대책이 없습니다.
앞뒤 문맥상 <(지나간)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생각'으로 번역되었지만 반조 혹은 숙고(paṭisañcikkhati)의 의미로 생각되지만
尋伺와는 상관없는 문맥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반드시 語行인 논리적인 '생각'은 아니지 싶습니다.
(그 논리가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닌 것은 제쳐두고)
아니면 낮 동안 일어난 사건들이 밤에 꿈과 같은 방식(尋伺)으로 정리되듯이
쌓인 경험(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총합이 心(citta/cinta)이라고 한다면
心의 생각(cinteti)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고 의도(cetanā)의 생각(ceteti)은 아니지 싶습니다.
이하 관련 경문입니다.
tassa saññagge ṭhitassa evaṃ hoti —
‘ cetayamānassa me pāpiyo, acetayamānassa me seyyo.
ahañceva kho pana ceteyyaṃ, abhisaṅkhareyyaṃ,
imā ca me saññā nirujjheyyuṃ, aññā ca oḷārikā saññā uppajjeyyuṃ;
yaṃnūnāhaṃ na ceva ceteyyaṃ na ca abhisaṅkhareyyan ’ti.
이제 그가 인식의 구경에 서있을 때에 이런 생각이 든다.
' 내가 의도하는 것은 나쁘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만일 내가 의도하고 계속적으로 [업을] 형성해 나가면501)
이런 나의 인식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인식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나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업을] 형성하지 않으리라. '라고,
501) '업을 형성하다'로 옮긴 abhisaṅkharoti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XIV.131의 주해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으므로 참조할 것. 이 문맥에서 주석서에서는 “더 높은 증득[등지]에 매료되는 것(nikanti)을 입을 형성한다고 한다.”(DA.ii.373)라고 주석하고 있다.
tassa evaṃ hoti — ‘ayaṃ vā so dhammavinayo, yatthāhaṃ pubbe brahmacariyaṃ acarin’ti.
dandho, bhikkhave, satuppādo; atha so satto khippameva visesagāmī hoti.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은 내가 전에 청정범행을 닦은 바로 그 법과 율이구나.'라고,
그에게 느리게 마음챙김<*기억>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중생은 재빨리 특별함으로 인도된다.
tassa aññatarena gāḷhena rogātaṅkena phuṭṭhassa evaṃ hoti —
‘piyā vata maṃ kāmā jahissanti, piye cāhaṃ kāme jahissāmī’ti.
s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ayaṃ kho, brāhmaṇa, maraṇadhammo samāno bhāyati, santāsaṃ āpajjati maraṇassa.
그가 혹독한 병에 걸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랑하는 감각적 욕망들은 나를 버릴 것이다.
나도 저 사랑하는 감각적 욕망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그는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바라문이여, 이런 자가 죽기 마련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떠는 자이다.
tassa evaṃ hoti — ‘sace kho maṃ bhikkhū jānissanti —
dussīlo pāpadhammo asuci saṅkassarasamācāro paṭicchannakammanto assamaṇo
samaṇapaṭiñño abrahmacārī brahmacāripaṭiñño antopūti avassuto kasambujātoti,
samaggā maṃ santā nāsessanti; vaggā pana maṃ na nāsessantī’ti.
idaṃ, ānanda, paṭhamaṃ atthavasaṃ sampassamāno pāpabhikkhu saṅghabhedena nandati.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만일 비구들이 내가 계행이 나쁘고 … 오물처럼 되었다라고 알 때
만일 그들이 화합하면 나를 파멸시킬 것이지만 분열하면 나를 파멸시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이것이 사악한 비구가 승가의 분열을 기뻐하는 첫 번째 목적이다.
tassa evaṃ hoti — ‘yaṃnūnāhaṃ ārāmaṃ gantvā bhikkhūnaṃ āroceyyaṃ —
rāgapariyuṭṭhitomhi , āvuso, rāgapareto, na sakkomi brahmacariyaṃ sandhāretuṃ;
sikkhādubbalyaṃ āvikatvā sikkhaṃ paccakkhāya hīnāyāvattissāmī’ti.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참으로 나는 승원으로 돌아가서 비구들에게 아뢰어야겠다.
'도반들이여, 저는 애욕에 물들고 애욕에 휩싸였습니다. 저는 청정범행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공부지음에서 나약합니다. 공부지음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가려 합니다.'라고.
tassa evaṃ hoti — ‘ahaṃ demi; ayaṃ paṭiggaṇhātī’ti. tamenaṃ datvā avajānāti.
evaṃ kho, bhikkhave, puggalo datvā avajānāti.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주고 이 사람은 받기만 하는구나!'라고,
그는 주고 나서 경멸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사람은 주고 나서 경멸한다.
“idha mayhaṃ, bhante, evaṃ hoti —
‘aho vatāhaṃ tadantaraṃ jīveyyaṃ yadantaraṃ assasitvā vā passasāmi passasitvā vā assasāmi,
bhagavato sāsanaṃ manasi kareyyaṃ, bahu vata me kataṃ assā’ti.
evaṃ kho ahaṃ, bhante, bhāvemi maraṇassatin”ti.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시간밖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세존의 교법을 마음에 잡도리하리라. 그러면 참으로 지은 것이 많을 것이다.'라고,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습니다.
idha panāhaṃ, nāgita, bhikkhuṃ passāmi āraññikaṃ araññe pacalāyamānaṃ nisinnaṃ.
tassa mayhaṃ, nāgita, evaṃ hoti —
‘idāni ayamāyasmā imaṃ niddākilamathaṃ paṭivinodetvā
araññasaññaṃyeva manasi karissati ekattan’ti.
tenāhaṃ, nāgita, tassa bhikkhuno attamano homi araññavihārena.
나기따여, 나는 여기서 숲에 머무는 비구가 숲속에서 졸면서 앉아있는 것을 본다.
나기따여, 내게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이 존자는 수면과 피로를 제거하고
숲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전일(全一)하게 될 것이다.'라고,
나기따여, 그래서 나는 숲에 머무는 비구를 기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