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明博의 秘話 증언-아무도 모르는 鄭周永의 진면목을 말한다 *2001년 5월호 월간조선 李淸 소설가 鄭周永은 누구였나 鄭周永(정주영) 현대그룹 前 명예회장(이하 「鄭회장」으로 약칭)이 작고하자 우리 사회는 「한 시대가 갔다」는 느낌과 아울러 「영웅을 잃었다」는 감회로 술렁거렸다. 그와 함께 「鄭周永은 누구였나」하는 의문을 던져놓고 대답을 마련하기 위해 골몰해 있다. 이럴 때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李明博(이명박·60) 前 의원(이하 「李회장」으로 약칭)이었다. 현대가 중소기업이던 시절에 사원으로 입사하여, 현대건설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을 때는 아들도 형제도 아니면서 어느덧 현대건설의 회장으로 浮上(부상)하여 鄭명예회장과 二人三却(이인삼각)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던 인물. 鄭회장의 어떤 아들, 형제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더 오래 기업을 함께 했던 인물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10년 전에 이미 현대와 鄭회장을 떠난 몸이라 「객관적 시각」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때문에 鄭회장이 작고하자 「鄭周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李明博일 것」이라는 판단으로 매스컴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李회장은 오히려 곤혹스러워했다. 「누구보다 鄭회장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데에는 동의했으나 『지금 이 시점에서 鄭회장 얘기를 하기에는 미묘한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매스컴을 기피해 왔다. 그러나 꼭 이야기를 듣자고 한다면 『鄭회장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역사에 맡기고, 지금은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생전의 행적을 되돌아보자』는 정도로 말문을 열었다. 이 글을 위한 만남도 그런 식으로 약간의 실랑이 끝에 이루어졌다. 『위대한 벤처기업인… 그러나 21세기가 열리기 전에 그의 역할은 끝났다』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돌파력, 이것이 鄭회장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그게 잘못됐습니다. 사람들은 鄭회장을 가리켜 「무모할 정도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기업인」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鄭회장에 대한 왜곡된 편견입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면 한두 번이야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30년 동안 그랬겠어요?』 ―밀어붙이는 뚝심을 빼면 鄭회장에게 무엇이 남습니까? 『그 대답에 앞서 鄭周永 회장이 어떤 사람이고 그가 역사적으로 이루어놓은 일이 무엇인지 좀 살펴봅시다. 시대적으로 鄭회장은 20세기 산업사회를 살아온 사람이고 21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라진 사람입니다. 즉 21세기가 열리기 전에 이미 「기업인 鄭周永」의 역할은 끝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농경시대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하고 개화하는 데 주역을 맡았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그것을 체질 속에 익힌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배운 것이라고는 농사 짓는 경험 조금 가지고 산업사회를 일으킨 사람입니다. 그는 오늘날의 그 어떤 벤처기업인보다 더 벤처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젊음, 그의 판단력, 그의 무서운 결단력과 용기, 이런 덕목들은 육체적으로 쇠잔해지지 않았다면, 즉 鄭회장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았다면 그 정신과 그 용기 가지고 21세기의 정보화시대에도 똑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시대가 낳은 요행의 산물도 아니었고, 그냥 밀어붙이는 우직한 용기 하나 가지고 일어난 사람은 더구나 아니었습니다』 李회장은 우선 「鄭周永의 시대」 「鄭周永의 삶」을 그 역할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시기는 鄭회장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기업을 이루고, 그 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시킴과 동시에 한국 경제를 힘차게 견인한 동력으로서의 시기다. 두번째는 鄭회장이 사실상 기업을 자식들에게 쪼개어 분할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政界에 뛰어들어 참패를 맛보는가 하면 소떼를 몰고 고향을 방문하고 북한과의 교류에 힘을 쏟던 말년이다. 이 두 가지 역할은 「인간 鄭周永」이라는 동일인물이 중심이 되어 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성질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 李회장의 분석이다. 앞의 일이 鄭회장의 본분사였다면, 뒤의 일은 70代 고령으로 몇 발 물러난 이후의 일이므로 동일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공평치 못하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말년에 鄭周永이 보였던 몇 가지 행태를 가지고 鄭周永이라는 큰 산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李회장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鄭회장의 본분사」에 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또한 李회장 자신과 鄭회장이 함께 걸었던 그 세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세월에 鄭회장은 대체 무슨 힘으로 그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던가. 뒷날 「王회장」 혹은 「황제」라 불리기도 했던 그 막강한 카리스마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대답은 역시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인데 李회장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한다. 『神話엔 진실도 교훈도 없다』 『李秉喆(이병철) 회장은 매우 치밀한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鄭周永 회장은 무모한 모험가로 흔히 대비되곤 합니다. 만약 李秉喆 회장이 치밀하기만 하고 결단력과 모험심이 없었거나, 鄭周永 회장이 무모한 모험심만 있고 치밀하지 못했다면 두 사람 다 오늘의 삼성과 現代라는 거대한 기업집단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고, 국가 경제 발전에 끼친 공로도 별 것 아니었을 것입니다. 鄭회장의 「신화」에 빠질 수 없는 몇 대목이 모두 도박과 같은 모험과 배짱, 그리고 밀어붙이기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돈 500원짜리에 찍힌 거북선 그림을 가지고 영국 로이드은행 사람들을 설득시켜 거액의 차관을 빌어왔다거나, 서산간척지 공사의 최종 물막이공사 때 낡은 유조선을 들이대어 성공시킨 일이라든가… 그런 것들은 과정을 보지 않고 결과만으로 신화를 만든 것일 뿐입니다. 그 이면에는 무서울 만큼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바로 보지 않고 신화 같은 얘기에만 매달리면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차관을 빌거나 공사를 따거나, 또는 공사를 성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화는 될지언정 교훈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 그럼 진실은 무엇입니까? 『무모해 보이는 배짱 뒤에 숨어 있는 치밀함입니다. 영국은 세계 금융의 중심입니다. 그 나라의 은행들이 극동에서 온 이름 없는 사업가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줄 때는 사업 타당성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있은 후에야 가능합니다. 즉 로이드 은행은 500원짜리에 찍힌 거북선 그림 때문에 鄭회장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鄭회장과 함께 간 전문가들이 기술적, 상업적으로 완벽한 계획서를 제시하고 설명을 하여 그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었기에 빌려준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을 결과만 가지고 「500원짜리 거북선의 신화」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 신화가 진실이라면 반대로 거북선 그림만 보고 동양에서 온 이름 없는 사업가에게 거액을 내 준 로이드 은행은 뭐가 됩니까. 봉이 된 것 아닙니까. 일에는 상대가 있는 법입니다. 鄭회장의 「밀어붙이기 신화」와 관련된 상대를 봐야 합니다. 상대가 그렇게 어수룩한 존재들이 아니에요. 그걸 알아야 비로소 鄭회장의 행적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鄭회장의 「치밀한 계산」이 鄭회장 자신의 무기가 아니라 아랫 사람들의 도움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건 鄭회장의 특성이나 장점이라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의 조직을 이끌어 큰 일을 하는 리더가 부하들로 하여금 여러 각도에서 조사하고 계산하게 하여 그 결과를 토대로 결단을 내린다면 그 계산과 연구는 리더의 것입니다. 그런 리더를 「치밀하다」고 해도 잘못된 표현은 아니지요. 전쟁을 총지휘하는 사령관의 성격이 모험심이 강하다는 것과 부하들이 가지고 온 정보를 충분히 활용한다는 것과는 별도의 문제지요. 그런 의미에서 鄭회장은 행동하기 전에 치밀하게 분석하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처음 예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 계획 工期(공기) 안에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鄭회장과 그 멤버들이 가진 치밀한 계획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鄭회장은 자주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조사 분석과 계산에서 나온 충고 및 만류를 뿌리치고 무모하게 밀어붙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의 성공 여부와 관련 없이 추진과정에서 본 鄭회장의 독단과 만용에 가까운 집념은 위험해 보이기도 했는데요. 바레인의 바스라 조선소 시설공사 때 동생이자 유능한 조언자였던 鄭仁永(정인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사를 강행하고, 그 결과 형제가 헤어지는 사태까지 불러오지 않았습니까. 『공사 규모가 커서 현대 내부에서도 반대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어요. 그러나 鄭회장이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 있게 공사를 맡았던 까닭은 이미 국내에서 그 공사보다 훨씬 큰 규모의 토목공사였던 울산조선소 도크공사를 성공시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鄭회장은 자신을 가졌으나 다른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었던 거지요. 鄭회장이 치밀하기만 하고 용기가 없었다면 이 공사는 따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현대의 모습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神話는 없다 ―주베일 산업항을 만들 때의 얘긴데요. 나중에 영화도 만들어져 한국인의 「하면 된다」는 사고와 용기를 상징하는 대표적 신화의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무슨 배짱으로 그 거대한 철구조물들을 울산에서 아라비아 반도까지 바지선으로 끌고 갈 생각을 했던 겁니까.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소요되는 철구조물을 울산에서 제작하여 바지선으로 중동까지 끌고 간 일은 밖에서 보기에는 분명 모험이었고, 바보짓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뿐이 아니에요. 그토록 위험한 수송작전을 감행하면서 鄭회장의 현대건설은 위험에 따른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鄭회장을 비롯한 현대건설 사람들이 모두 미쳤기 때문이었을까요? 반대입니다. 당시 우리는 보험에 들지 않아도 된다는 치밀한 계산과 구상을 했습니다. 울산에서 바지선으로 끌고간 철구조물들은 그 부피가 산 같았습니다. 남지나해와 인도양 등 험한 바다 위로 거대한 산을 끌고 가면서,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수십 번에 걸쳐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바보짓인데 보험조차 들지 않았다는 것은 대체 무슨 배짱이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해요. 철구조물은 거대하지만 직경 1m가 넘는 파이프로 이루어져 있고, 그 양쪽 끝부분은 모두 막혀 있으므로 배가 침몰하여 물에 빠져도 가라앉지 않도록 되어 있어요. 鄭회장의 참모들은 계산했습니다. 필리핀 앞바다는 계절풍이 불면 아주 위험한데 수송작전은 계절풍을 피해서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한가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태풍에 의한 조난을 각오해야 할 텐데 그 경우 철구조물이 해류를 타고 어디까지 흘러가서 멈출 것인가를 계산해 보니 대만해협으로 떠내려갈 것이라는 계산이 나와요. 그렇다면 비싼 보험료를 내는 것보다는 조난당해도 건져서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이고, 시간도 덜 소요되어 중동 공사를 차질 없이 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최종 판단과 각오는 鄭회장의 몫이었지요』 ―실제로 조난당한 일도 있었지요? 『한 번 사고가 났어요. 바로 그 필리핀 앞바다에서 조난을 당했는데, 우리는 대만에서 헬리콥터를 빌어 추적을 했지요. 철구조물은 해류를 타고 흘러 당초 예상했던 대로 대만 근해에서 찾아냈지요. 그걸 다시 실어 중동으로 떠났어요. 보험에 들어도 그 이상의 무슨 수가 있었겠습니까』 鄭周永의 참모습 - 뉴 프런티어 정신 ―그렇다면 鄭周永 회장의 특징, 그의 기업가 정신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뉴 프런티어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鄭회장이 경제개발과 궤를 같이하여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던 1960년대 초의 우리나라는 소득 100달러 시대였습니다. 그때 오늘날 보면 참으로 하잘것없는 중소기업을 하던 鄭회장이 해외의 고속도로 공사에 뛰어들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 무렵 현대건설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의 수준이란 미8군에서 흘러나온 고철 장비를 수리하여 끌고 다니면서 겨우 시가지나 국도의 부분적인 포장이나 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때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공사(1966.1 ~ 1968.3)에 참여한 결단과 용기는 鄭회장의 일생을 통하여 조선소를 세우고,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한 것보다 더 큰 중요성을 지닌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분석해 보면 鄭회장의 그후 모든 행적과 특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공사 자체의 규모나 성공 여부보다 그 공사를 수행한 뒤의 경험과 자신감이 이후 현대그룹을 만든 정신적 초석이 되었다는 뜻인가요. 『현대그룹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됐지요. 그 무렵 다른 기업들에서는 해외진출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해외 쪽으로 앞선 기업들도 기껏 한두 명의 임직원이 출장을 가 있는 정도였으니까. 그런 상황인데 서울의 본사보다 더 큰 진용이 해외 현장으로 나가야 하고, 까다롭고 어려운 국제 시방에 맞추어 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공사에 입찰한 것 자체가 보통 사람의 용기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니 「뉴 프론티어 정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당시 현대건설의 외형이 7~8억원인데 500만 달러짜리 공사를 딴 거예요. 국내의 수십 개 현장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공사였지요. 당시 우리 국가적 환경이나 국가의 수준, 그리고 기술, 인력, 경영능력 등 현대의 수준으로 볼 때 해외에 나가서 그 큰 프로젝트를 수주, 시공한다는 것이 일종의 모험이거나 미친 짓에 가까웠습니다』 李明博 신화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태국 정부가 IBRD 차관사업으로 국제입찰에 부쳐 시행한 공사였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주먹구구로 시공하던 관습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현대건설이 초기에는 회사의 존폐문제가 걸릴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한 일이 있었다. 현장의 경리담당 말단사원이었던 李회장은 이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鄭회장에게 발탁되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의 고속승진을 계속했다. 「李明博의 신화」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는 李회장 자신의 삶에도 큰 분수령이었던 셈이다. ― 결국 현대도 그 공사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지 않습니까. 『수많은 시련이 있었지요. 그 시련을 이겨냈으니 오늘의 현대가 있었던 겁니다. 또한 거기서 피와 땀을 쏟아부어 배운 학습효과가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원천이 되었고요. 경부고속도로는 이미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 경제 도약의 발판이 되었고, 베트남을 거쳐 중동으로 진출하는 출발점이 되었지요. 어쨌든 태국 고속도로 공사는 그때까지 중소기업이던 현대가 세계와의 엄청난 갭을 단숨에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는 훈련장이자 학교였습니다』 태국에서 중동까지 ―鄭회장이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직접적인 동기는 그분의 프런티어적인 정신이었지만, 국내 건설업계가 처한 성장의 한계와 답답한 기업풍토도 鄭회장으로 하여금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나가게 한 요인이 됐다고 봅니다. 당시 건설업계는 정경유착이 극심하여 鄭회장처럼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기업인에게는 목을 죄는 듯 답답한 분위기였을 겁니다. 자유당 시절부터 공화당 초기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도 크게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는 굳이 어려운 해외를 승부의 결전장으로 택했던 거지요』 ―우리 건설업의 해외 진출 역사를 보면 마치 잘 짜여진 한 편의 시나리오를 보는 듯합니다. 태국의 고속도로 공사가 경부고속도로를 가능케 했고, 경부고속도로 공사에서 일을 배운 건설회사들이 베트남을 거쳐 중동으로 들어가 마침내 해외 건설 전성시대를 열었지요. 이 시기에 국내에서는 중화학공업시대가 열렸습니다. 또 두 차례의 석유파동에서 우리 경제를 지킨 방파제 역할을 했던 것도 중동건설이었지요. 그 중심에 언제나 鄭회장이 서 있었던 것을 국민들은 기억합니다. 베트남 진출과 중동 진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베트남은 전쟁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정부가 선택하고 예비해놓은 길을 따라 기업들이 참여한 것이고, 중동은 정부와는 상관없이, 미리 다져놓은 어떤 조건도 없이 허허벌판의 사막에 건설업체들이 맨손으로 뛰어들어 부딪쳐 일을 따내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세계적인 명성과 신뢰를 얻어낸 현장입니다. 물론 거기서 수많은 건설업체들이 쓰러져 우리 경제에 큰 주름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한국인들이 역사상 그 때처럼 세계를 향하여 자신감을 얻은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중동 진출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었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국민적인 자신감은 鄭회장이 가져다준 것이었어요』 ―중동 진출이 국내의 경제개발에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후진국이 산업사회를 일으킬 때 자체의 힘으로 인프라를 건설한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중동은 물론이고, 중국, 대만, 싱가포르, 필리핀 등 국가들이 산업사회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자기네 기술과 인력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기간시설 공사를 우리가 가서 했어요.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개발경제시대의 수많은 기간시설 공사를 우리 힘과 우리 기술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그후 수많은 인프라 프로젝트들을 외국 기업들에게 맡겼다면 비용과 속도면에서 그런 성과를 올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후진국이 인프라 건설을 독자적으로 수행한 나라는 아시아에서는 일본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해낸 것 아닙니까』 朴正熙와 鄭周永 ―한국 경제 발전의 상징적 출발점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鄭회장이 수행했던 역할은 어떻게 평가돼야 할까요. 『朴正熙 대통령이 기획, 지휘하고 鄭周永 회장이 충실하게 따랐다고 하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계획단계에서부터 건설부안, 육군 공병감실안 등을 제치고 鄭회장의 현대건설안이 채택되었는데 朴대통령이 鄭회장을 좋게 봐서가 아니라 당시 고속도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단체와 사람이 현대건설, 그리고 鄭회장 뿐이었거든요. 朴대통령의 의지가 없었으면 경부고속도로는 그 시점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朴대통령의 의지가 있었다 해도 현대건설과 鄭周永 회장이 없었다면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업체들이 참여하긴 했지만 결국 경부고속도로의 물량적으로는 절반의 일을 현대가 맡았고, 기술적으로 어려운 공사는 모두 현대가 맡았으니 사실상 鄭회장의 작품이었다고 보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이야기가 잠시 벗어납니다만,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는 경부고속전철 공사를 지지부진하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지금 우리는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 GDP 4000억 달러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던 때에 비해 무려 35배나 늘어났고, 자동차, 반도체를 만들어 세계로 수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고속전철 하나를 만들자고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데 사업비가 당초 5조원에서 20조원으로 불어나고 工期가 두 배로 늘어났는데도 그나마 완성된 경부고속전철을 보기 힘들게 됐습니다. 시작 단계에서는 가장 앞선 고속전철이던 테제베(TGV)가 이제는 가장 낙후된 고속전철이 됐어요. 이런 차질이 왜, 어디서 오는지 근본을 살펴봐야 합니다. 요즘은 입만 열면 지난 개발경제시대를 비판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데, 요즘과 같은 新산업시대에, 모든 조건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은데도 불구하고 왜 고속전철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저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느냐. 기술과 돈이 있다고 뭐든지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경영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의 열쇠입니다. 기업이나 국가나 같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의 국가 경영자는 누구였고, 기업의 경영자는 누구였나 하는 것이 국가적 사업의 성패를 좌우했던 거예요』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던 때의 鄭周永회장이 가졌던 기업가 정신이 고속전철 사업에 투입됐다면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까. 『아무 차질없이 훌륭하게 이루어냈을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것을 일일이 수동계산기로 계산했던 시절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컴퓨터로 완벽하게 계산해 내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그때는 성공했는데 지금은 왜 실패하고 있나. 그 차질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개발시대에 빛을 발휘했던 鄭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21세기에도 그대로 통용되는 정신입니다』 "닮지 않았기에 오래 함께 할 수 있었다" ―鄭회장과의 남다른 인연 때문에 그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나는 鄭회장을 비판하고 약점을 찾아내어 매스컴에 떠들고 다니는 역할에는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고, 인간적인 실수도 많았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도 인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우리가 지금 이순신 장군의 私生活을 들추어내어 그의 실수와 인간적인 약점들을 찾아낸다면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지금은 鄭회장의 삶에서 어떤 교훈을 찾아내어 그것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연구해야 할 때입니다』 ―현대에 몸 담고 있을 때의 李회장을 두고 사람들은 「두 사람이 닮았다」고들 했지요. 실제로 닮은 점이 많았습니까? 『일을 즐기는 성격, 목표를 정해 놓고 무섭게 돌진하는 추진력 등 어느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똑같으면 오래 함께 일할 수가 없습니다. 몇 년은 함께 일할 수 있겠지만 27년 간을 함께 일하기는 불가능하지요. 나는 현대건설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갔을 때로부터 치자면 27년, 주력기업에서 대표이사로만 16년을 鄭회장과 함께 일을 했고, 실질적으로 대표이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연수로 치자면 무려 22년 간을 함께 일했어요. 鄭회장과 서로 다른 점이 많았던 것, 이것이 나로 하여금 그의 곁에 오래 있게 했던 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함께 일을 하는 두 사람이 똑같이 실수를 하면 그 조직은 망합니다. 한 사람이 주저하면 한 사람이 밀고 나가고, 주저해야 할 때 한 사람이 무리하게 밀고 나가려고 하면 다른 한 사람이 신중하게 당기고, 이렇게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면서 일의 완성도나 추진력을 두 배로 이끌어내는 것, 이것이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이상적인 관계지요. 상호보완적이지 않으면 역할도 없습니다』 『기업을 같이한다는 것은 폭력조직에 가담하는 것과는 다르다』 ―李회장과 鄭회장의 결합이 이상적인 결합이었다는 얘깁니까. 『鄭회장과 나는 공통점도 있었고, 이질적인 요소도 강했다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는 비슷하게 보였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항간에는 「父子지간 같다」는 말도 퍼졌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개별적인 존재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鄭회장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함께 일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대기업 내에서는 진짜 부자지간에도 냉정하게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李秉喆 회장이 장남 대신에 李健熙(이건희)씨를 후계자로 세운 과정이 그렇지요. 내가 만약 총수를 그대로 닮으려고 애를 썼거나 총수의 생각을 고스란히 좇는데만 힘을 다했다면 나는 설 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이 회사 부도 후 인터뷰를 통해 말하기를 「전문경영인에게 속았다」고 하더군요. 그걸 보고 내가 그랬어요. 「동아건설에도 전문경영인이 있었나」 하고요. 이름이 사장인 사람들은 있었을지 몰라도 전문경영인이라 할 만한 사람은 없었기에 회사가 그 모양이 된 겁니다』 ―일은 함께 한다고 해도 오너와 전문경영인은 위상과 역할이 아주 다를 것입니다. 성격도 다를 것이라 짐작되는데 대기업 총수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성격상의 특징이 있습니까? 『총수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면 냉정하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바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점이기도 한데 실제로 대기업 총수가 냉정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서지도 못했을 것이고 섰다 하더라도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싫증을 잘 낸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잘 갈아치우고 이것저것 새로운 사업을 찾습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성격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좋게 말하면 발전의 원동력이지요』 ―鄭회장이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李회장이 당연히 鄭회장과 같은 배를 탔어야 했다, 그것이 의리 아니냐고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지요. 그것도 전문경영인의 독자성과 관계가 있는 일입니까. 『나는 오너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런 전문경영인과는 달랐습니다. 鄭회장도 그런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나에게 그토록 중책을 오랫동안 맡겼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를 지나치게 종속적인 관계로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 때문에 전문경영인이 자라지 못합니다. 鄭회장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나는 가장 많은 반대를 한 사람입니다. 형제와 자식들도 반대했지요. 그러나 형제와 2세들은 鄭회장의 결심이 굳어지자 결국 鄭회장을 따랐으나 나는 끝까지 반대했고, 마침내 헤어졌습니다. 기업을 같이한다는 것은 폭력조직에 가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전문경영인이 오너에 종속된 존재라면 그것은 조직폭력의 똘마니와 다를 게 없지요. 그런 관계 속에서 기업의 투명성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맹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나와 鄭회장은 두 사람 다 그 점을 알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공연한 오해들을 한 겁니다』 『鄭회장은 나를 이해했다』 ―鄭회장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만약 삼성이나 대우 같은 경쟁회사로 자리를 옮겼다면 「의리 없다, 배신했다」는 소리를 들어도 싸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헤어진 것도 아니었고요. 다 얘기할 수 없으나 어쨌든 아주 이성적인 판단으로 헤어져야 할 때에 멋지게 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鄭회장 자신도 내가 떠나고자 했을 때 속으로는 다소 섭섭해도 깊은 까닭을 다 이해하니까 빙그레 웃고 말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말을 만들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어느 기자가 鄭회장을 여러 날에 걸쳐 밀착 취재하면서 집요하게 물었어요. 「李회장이 떠난 데 대해 배신감이 없느냐」고요. 그러자 鄭회장이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 떠날 때 뭐 손해 끼친 거 있나. 나가서 피해 줄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배신감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기업의 일이나 국가의 일이나 동양적 온정주의에 치우쳐 판단하면 세상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무조건 추종하는 家臣(가신)들만 있고 견제하고 조언하는 파트너가 없는 조직은 건강한 조직이 아닙니다』 ―鄭회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2세들에게 기업을 물려 주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떤 계기로 기업을 자식들에게 알뜰하게 분할 상속하는 구태를 답습하게 되었는지 동기가 궁금한데요. 『2세 승계를 안하겠다고 공언한 것은 사실입니다. 신문사 경제부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선언을 했고, 그룹 내 전문경영인들 앞에서도 여러 번에 걸쳐 같은 뜻을 밝혔어요. 내게도 「현대그룹 회장은 내가 마지막」이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 때는 그 말이 진심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잔해지고, 또 아들들은 성장하여 한 분야의 일을 맡길 만한 나이가 되고 하니까 가족 내부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고…, 또 다른 재벌그룹들의 행태에서 영향도 받았을 것이고 하여 생각이 바뀌었을 것으로 봅니다』 신체적 노쇠 현상 ―전문경영인에게 기업을 맡기겠다고 공언했을 때는 그럴 만한 소신과 계획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당당한 소신이 있었지요. 우리나라 기업들이 굉장히 보수적인데, 나를 파격적으로 기용한 것만 봐도 鄭회장의 앞선 생각, 당당한 신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를 현대건설 사장으로 기용했을 때 인사의 달인이라는 李秉喆 회장이 「鄭회장이 실수하고 있다. 1년 후에 보면 알 것이다」하고 비판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도 鄭회장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밀고 나갔어요. 바로 그같은 앞선 생각이 이어져 「기업은 전문경영인에게」라는 공언이 나왔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합니다. 가장 큰 변화의 요인은 뭐니뭐니해도 신체적 노쇠현상이지요. 왕성한 의욕과 합리적 사고를 가졌을 때의 판단력과 노쇠해진 후의 판단력은 다르게 마련입니다』 ―기업인으로서의 鄭회장에게도 실패의 기록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는 일이고, 다만 鄭회장의 삶에서 정치에 뛰어들었던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벌 오너가 정권을 잡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당시 鄭회장은 명예회장으로서 이미 기업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회장보다 명예회장이 더 실세인 경우가 많은데 鄭회장 역시 어느 부문에서는 현대그룹의 유일무이한 실세이기도 했지요. 그런 鄭회장이 대통령이 됐으면 그의 다른 경쟁자들보다 나은 정치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고 긴 역사를 통해 보면 부정적인 영향이 더 컸을 것입니다. 鄭회장이 정권을 잡았다면 삼성家에서도 대통령이 나와야 할 것이고, 대우그룹에서도 오너가 대통령이 되려고 할 것이고… 기업들이 모두 권력잡는 데 혈안이 된다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방대한 재벌 조직이 본연의 업무를 떠나 잘못 가동된다면 국가 사회에 끼칠 나쁜 영향은 계량하기 힘들 정도였을 거예요. 따라서 鄭회장의 대통령 선거 출마는 正道(정도)가 아니었습니다』 『兩金 없었으면 대통령 출마 않았을 것』 ―만약 鄭회장이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지금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가정이란 필요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만약 鄭회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5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면 지금보다 훨씬 낮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워낙 다 그런 전철을 밟아오지 않았습니까. 사람에게는 각자 역할이 있는 법인데 鄭회장의 역할은 결코 정치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경제 원로로서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역할이 그에게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오너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옆길로 가려고 하는데 그 밑에 있는 전문경영인이 만류하고 반대했다면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은 결국 그 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떤 갈등이 있었나요. 『뭐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이고, 이런 대화를 나눈 일이 있어요. 내가 「회장님께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뜻을 두시고 절더러 같이 나가자고 하시면 현대는 장차 어찌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鄭회장의 대답은 「망하면 내가 망하지」 그래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현대의 법적 주인을 두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입사 이후 지금까지 이 회사를 단 한 번도 내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반론을 펴기는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현대는 鄭회장 쪽에서 볼 때 「내 회사」임이 틀림 없었지요. 그래서 「망해도 내가 망하는데 자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런 괴리를 말로서 입에 담고 보니 충격이 오더군요. 鄭회장 자신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미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겠다」고 했던 때의 사고와는 천리나 멀어진 상태였지요』 ―치밀하고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진 鄭회장이 정권 쟁탈이라는 엄청난 도박을 감행하게 된 것을 두고 「신체적 쇠잔」에만 이유를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정치라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이 그 정도로 도전해 볼 만한 매력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와 같은 후진 국가에서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정치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기업활동은 물론이고요. 그래서 정치에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곳에서도 일류들은 기업으로 나가고 이류들이 정치에 모인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鄭회장이 정치로 간 것은 어떤 동기에서였다고 보십니까.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鄭회장이 대통령에 출마한 것은 이른바 「남자의 꿈」도 아니고 시대적인 소명은 더구나 아니었다고 봅니다. 순간적인 판단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鄭회장이 그런 판단을 하기까지 도와 준 외부적인 환경이 몇 가지 있었어요. 우선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의 시대가 가면서 한국 정치는 본격적으로 YS와 DJ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는데 국민들 사이에는 이런 현상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았어요.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데 「민주 투사」들에게만 나라를 맡기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었지요. 그 때문에 「경제대통령」을 大望(대망)하는 분위기가 컸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鄭회장 본인이 자극을 받은 데다 옆에서 밀어 주는 세력들이 있으니 앞으로 나서게 된 거라고 봅니다. 역설적으로 兩金씨가 아니었다면 鄭회장은 대통령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鄭회장은 양金씨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들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보다는 자신이 맡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그 무렵 鄭회장의 행보가 이미 기업인 이상의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를 만나 경제협력을 논의하고, 북방 여러 지역을 돌며 장차 북한을 포함한 광대한 경제지도를 머리에 그리면서 단순한 기업인 차원을 넘어선 국제정치적인 역학구도 속에서 사고하고 활동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盧泰愚 대통령과의 어려운 관계가 자극제가 되었을 거예요』 對北사업 몰두하다가 현대 건설의 위기관리 失機 ―鄭회장이 북한을 방문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지요. 소떼를 몰고가는 멋진 이벤트는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어릴 때 가출했던 사람이 졸부가 되어 으스대며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보듯 치기가 느껴진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였습니다. 평생 기업인으로 살아온 鄭회장이 對北(대북)사업에 그렇게 몰두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내가 현대를 나와 그 분하고 떨어진 뒤의 일들에 대해서는 이렇다고 말할 근거가 별로 없습니다만, 짐작컨대 이렇습니다. 鄭회장의 마음속 한 구석에는 자신이 이 사회에서 기여한 만큼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에 가서 그쪽 지도자로부터 대단한 예우와 환영을 받고는 심리적으로 미묘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돌아와서 「金正日 장군이 어른을 잘 모시는 사람」이라고 칭찬한 것을 뒤집어보면 우리 사회가 「어른을 모실 줄 모르는」 사회라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거기에 민족적인 과제인 통일을 위해 초석을 놓는다는 사명의식이 보태져 남은 여생을 바쳐서 해볼 만한 「사업」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對北사업도 사업가적인 마인드로 접근했을까요. 『鄭회장에게 있어 對北사업은 처음에는 분명 비즈니스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 기업활동 아닌 통일역군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그것은 이미 기업에서는 완전히 은퇴했으니 사업가적인 마인드를 넘어서서 일생의 마지막 기여를 민족의 제단에 바치겠다는 열정으로 그리 된 것이겠지요. 그것은 고도의 정신적 신념이기 때문에 기업 차원에서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鄭회장은 對北사업에 소요되는 자금에 대해서는 「현대가 번 돈 중에서 쓴다」는 안이한 판단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기업활동에서 번 돈을 그냥 두면 세금으로 다 나가고 말 걸 차라리 對北사업이라는 명분 있는 일에 투입하겠다는 통 큰 결단이었겠지요. 다만 그 뒤에서 치밀하게 계산하여 전체 기업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鄭회장이 해야 할 일이 아니고 기업을 맡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했어야지요』 ―對北사업에 투입한 자금이 현대의 발목을 잡을 정도로 막대한 규모였을까요. 『鄭회장은 낙관일변도의 시각으로 對北사업에 투입된 자금 자체는 별것이 아니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엄밀하게 보아 對北사업도 현대 부실의 원인 중의 하나였지만 현대 부실의 첫째 이유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그 중에서 금강산 관광사업의 경우 금강산 가는 길만 열리면 우리나라 사람들 전체가 아니가고 못 배길 것이라고 안이한 판단을 한 것이 커다란 실수이고, 이 실수가 그룹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현대가 휘청거려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건설을 비롯한 주력기업을 맡아 분리된 현대그룹의 총수가 된 MH(몽헌)가 너무 많은 시간을 對北사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건설회사는 국내외에 수십, 수백 개의 사업장을 벌여놓고 있는데 현장이 200개면 제조업으로 치면 공장 200개를 운영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제조업의 공장은 일단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관리가 쉬워지지만 건설현장은 늘 새로운 상황이 생겨나고, 상황에 따라서는 최고 경영진이 즉각 결정을 내려야 할 사안이 발생합니다. 특히 해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보고 라인이 정상으로 가동되고 있어도 시차 때문에 차질이 생기는데 최고 경영진이 북한에 들어가서 며칠이고 연락이 되지 않는 사태가 자주 발생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金正日 만나러 간다고 준비에 며칠 소비하고, 평양에 들어가면 소식이 단절되고, 갔다 와서는 정부와 후속조치를 강구하느라 바쁘고, 그동안 건설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겨두었다고는 하지만 최고경영자의 판단과 결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안이 있는 만큼 그만큼 늦어지고 손해를 보게 마련입니다. 총수의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으면 아랫 사람들의 마음도 달라지게 마련이고 회사 전체의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그렇게 진취적이고 자신감에 차있던 현대건설의 분위기가 왜 요즘처럼 바닥에 내려앉았는가, 그 원인은 對北사업 때문이었습니다. 건설은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현대가 북한에 들인 돈의 액수보다는 총수가 그 일을 하느라고 主力사업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 현대의 진정한 위기는 여기에서 왔다고 봅니다』 후계자 결정의 원칙 - 관련된 사람에게 맡긴다 ―鄭회장의 말년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실수가 발견됩니다. 기업의 후계자 결정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鄭회장답지 않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鄭회장은 이미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기업의 일에서는 사실상 손을 뗀 상태였어요. 거동이 어려워 측근이 양쪽에서 부축하여 걸으면서도 회사에 가끔 나타난 것은 「중요한 일은 아직도 내가 결정한다」는 강인한 이미지를 주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鄭회장이 결정권을 행사한 부분은 기업의 일이 아니라 對北사업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도 鄭회장은 평소 「100세까지 일을 하겠다」고 공언한 대로 자신이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했을 법도 합니다. 대기업을 이루었으면서도 死後의 관리를 위해 유언 하나 제대로 만들어두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세칭 「왕자의 난」 때 鄭회장이 우왕좌왕했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후계자를 결정해야 할 단계에 이르기 전에 이미 아들들의 특성과 취향, 경력에 따라 역할분담이 어느 정도 되어 있었던 거예요. 예를 들면 MK(정몽구)는 자동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자동차를 맡기는 것이 옳았고, MH는 남북문제에 깊이 개입해 왔으니 對北사업을 마무리할 위치에 두는 것이 옳았던 겁니다. 「관련된 사람에게 맡긴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자동차를 그룹에서 따로 떼지 않아도 될 형편이었다면 당연히 MK가 공동으로 그룹을 맡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성그룹이 3남에게 승계되는 과정을 보면서 「자식들에게 맡길 때는 반드시 장자가 아니면 말썽이 생긴다」고 늘 말하곤 했으니까요』 李회장이 현대건설에 입사할 당시 현대건설은 직원 80여 명과 외형이 8억여 원이었다. 그 후 회사를 떠나기까지 27년 간 鄭周永 회장과 함께 직원 16만8000여 명, 외형 50조여 원에 이르는 현대그룹의 신화를 만든 李회장이 지금 현대를 보는 심정은 남다를 것이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오늘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鄭회장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별개의 문제라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서울 시장 출마? 李회장은 鄭회장과 비슷한 시기에 정치에 뜻을 두고 현대그룹을 떠났다. 鄭회장의 국민당에 합류하지 않고 1996년 4월 한나라당 소속으로 정치 일번지 종로구에서 15代 총선에 당선되었으나 선거법 위반 문제가 제기되자 1998년 2월 스스로 의원직을 내놓고 그해 가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 객원교수로 연구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초 귀국했다. 귀국한 李회장은 환경학자와 환경전문가로 구성된 학술단체인 亞太환경 NGO한국본부 총재직을 2000년 2월에 맡아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유엔산하 UNEP(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에 가입된 환경단체이다. 李회장은 또한 지난해 10월, 「eBank-Korea」라는 인터넷 금융회사를 설립하여 신경제 시대에 앞서가는 경제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여 주고 있으며, 1994년에 설립된 재단법인 동아시아연구원을 중심으로 국내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한 연구활동도 펼치고 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李회장의 향후 정치활동 계획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내년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라를 한 번 멋지게 경영해 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