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대부터 1520년대까지의 영토이다.
우리나라의 시대 구분에 원 간섭기가 있을 정도로 원나라에 대해서는 인지도가 매우 높으나 이후 후계국가인 북원에 대해서는 매우 인지도가 낮다. 그래서 북원의 대략적인 역사를 모두 전객하고자 하였다.
북원은 말그대로 북 쪽의 원나라로 쿠빌라이의 후손인 토곤 테무르가 세운 국가이다. 그러나 원나라 복고의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이었는데 쿠빌라이의 후손들은 대대로 대도 즉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화북의 땅을 승계하며 살아왔고 씨족, 부족 통치가 아닌 관료제로 통치하였다. 그래서 중원에서 밀리니 쿠빌라이 가문은 명성과 지지세력을 제외하고는 가진 것이 없었고 거기다가 경쟁자가 있었다.
바로 몽골 제국의 대칸 직을 두고 대결전을 벌이고 이후 몽골이 다스리는 세계관을 결정했던 바로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의 황위계승전쟁의 패자, 바로 아리크부카의 후손이었다. 중원의 방식을 따르자 했던 쿠빌라이와 달리 기존 몽골의 초원의 생활 방식을 따르고자 한 아리크부카의 후손답게 그들은 유목민의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몽골 초원에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북원은 시작부터 쿠빌라이 계와 아리크부카 계가 다시금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아리크부카의 후손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죽이며 황제국이 아닌 칸국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리크부카 계통이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좋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바로 수많은 몽골 부족이 난립했다는 점이었다. 북원의 이명은 44부 몽골 연맹체로 아리크부카 계가 자리잡았다고 해도 그들도 역시 하나의 몽골 연맹체원일 뿐이었다. 거기다가 쿠빌라이 계통과의 경쟁에서 아리크부카 계에게 지지를 했던 세력이 너무 세진 것과 반대했던 세력은 여전히 남고 불만만 쌓였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점차 희미해진 공동체적 의식과 서로간의 차이 의식은 더욱 분열하게 만들고 그 유명한 오이라트 연맹체를 만들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결국 에센 타이시와 같은 인물이 탄생하며 황금씨족 외의 대칸이 탄생하며 북원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오이라트를 제외한 모든 연맹원들이 불안해하고 놀랐기에 에센 타이시는 암살되었고 다시금 권력은 보르기진 가문에 돌아가게 된다. 이때 몽골 연맹 구성원들은 다시 보르기진 가문에 충성을 다 하기 시작하는데 보르기진 가문은 위와 같은 역사를 인지하고 쇄신하게 된다.
그 해결책은 바로 2가지였는데 바로 황족 중심의 정치 구성과 바로 불교였다. 마치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교한다면 바로 신라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국가를 쇄신하고자 했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텡그리를 믿기에 각 지역의 지역신, 자연신을 믿고 각자의 조상신을 믿으며 분열되는 몽골 연맹체에 불교라는 공통된 종교는 기존의 텡그리를 수용하며 잘 퍼질 수 있었다. 불교는 원나라 대 이미 수용된 적이 있었던 장점과 더불어 시대가 잘 따른 점도 있다. 바로 티베트 불교 즉 뵌교에서의 종교 개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티베트 불교 계통의 메이저가 될 겔룩 파의 종교 개혁이었다. 티베트, 위구르 등의 중앙아시아가 불교와 이슬람의 경쟁에서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슬람의 지하드의 영향으로 매우 호전적이며 지역성과 이슬람 율법의 영향으로 매우 금욕적인 면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는 유목제국인 북원에게 안성맞춤의 종교가 되어 완전히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르기진 가문 중심의 정치 체제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몽골의 대부분을 다스리는 가문은 보르기진 가문이었고 그들은 대가 지남에 따라 각지에 퍼지고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 이때 북원의 대칸 다얀 칸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보르기진 중심으로 북원을 결집하기 시작한다. 연맹체를 없애버리는 것은 힘들지만, 북원의 영토 각지에 보르기진 가문원들을 배치하고 대칸의 자식들 역시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닌 각지의 지도자로 세운다. 그래서 차하르부, 호르친부 등의 칸들도 보르기진 가문이 되고 북원은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여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명나라가 역사를 쓰며 평가한 '북로남왜'에서의 북로의 탄생의 배경이었다.
북원의 결집, 명나라에 대한 원정 등을 하며 몽골의 강력함을 다시금 보여주는 듯 하였으나 위의 결집책은 결국 문제가 생겼다. 바로 불교보다는 보르기진 중심으로의 정치체 구성이 문제가 되었다. 마치 먼저 말하며 비교한 신라와 거의 상통하는 역사를 보여주었는데 김 씨 중심의 정치체 즉 진골 정치체제가 결국 신라 하대의 혼란을 가져온 것과 같이 북원도 비슷한 역사가 흐르게 된다.
북원의 최전성기이자 쇠퇴기를 상징하는 인물인 알탄 칸의 등장이다. 그는 한 지역의 수장이자 명에 대한 북원의 승리를 만들어 주었으나 그의 업적만큼이나 그의 야망과 인정을 얻는 건 힘들었다. 애초에 보르기진 중심의 정치체는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등장했으나 다른 보르기진 가문원의 목소리와 힘을 키워주는 결과와 같은 보르기진 가문원이지만, 유교와 같은 이념이 없는 몽골인들로서는 대칸에게 힘이 모두 가는 것이 이해도 안되며 불만을 키워주게 된다.
북원의 대칸들은 이런 경우를 두려워 하고 수도 카라코룸이 있는 할하 부를 중심으로 대칸의 직할지를 늘리고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고 외부를 방치 및 견제하였다. 수많은 방치된 북원 내의 칸들은 나중에서의 다양한 역사를 키워주지만, 청의 등장은 북원의 끝을 고함을 알리게 되었다. 북원의 대칸과 청의 황제 중 몽골의 칸들은 누구의 줄을 설지 선택을 하게 되었고 방치와 무시를 받은 튀메드 부, 차하르 부는 그들을 진정한 황금씨족으로 여기며 몽골 팔기로 예우해주는 청을 택하게 되었다.
결국 북원은 분열되어 대칸의 후손은 결국 할하 부의 칸일 뿐이 되었으며 다른 부의 칸들은 청의 황제 역시 황금씨족의 피를 나눈 초원의 지배자로써의 정당성을 남기게 되었다. 결국 할하 부는 독립된 정치체로 있다가 준가르 칸국의 공격을 받고 청나라에 의탁하며 북원이라는 정치체는 완전히 청나라에 부드럽게 흡수되었다. 이는 북원의 종말이었다.
첫댓글 그렇게 역사의 종말을 마지해 사라지는군요.
그럼 지금의 몽골은 어떻게 해서 탄생했을까요.?
외몽골 지역은 청과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상태가 20세기까지 유지되다가 1911년에 한창 신해 혁명하고 그럴 때 독립선언을 했고, 독립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복드 칸국이 세워졌다 사라지고 다시 세워지고, 공산주의 세력이 유입되는 등 혼란기를 거쳤다가 1924년에 공산주의 국가인 몽골 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었습니다. 이후 탈냉전기에 비교적 평화롭게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현재의 몽골이 만들어졌죠. 아주 간단히 정리한거라 중간과정과 디테일은 많이 생략된 설명입니다.
지금의 내몽골 지역은 복드 칸국의 독립때 중국에 잔류했었습니다. 몽골인보다 한족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요. 이에 복드 칸국은 외몽골과 같이 독립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북양정부가 이를 격퇴하고 이후 중화민국도 꾸준히 영향력을 유지 확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후 일본에 줄서면서 몽강연합자치정부가 생기기도 하고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잠시 내몽골인민공화국이 생기기도 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에 흡수당해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로서 존재합니다.
정성글 추
이야 글도 유익하네요
글이 아주 정성스럽네요! 몽골제국의 귀환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나름 큰 땅이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