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의 마디 외 4편
김 대 호
어떤 식으로든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말이 있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내 앞에 서 있던 말이 떠났고 이 일 저 일 시간을 궁리했다
나이들면 표정에 마디가 생기나 보다
나무의 옹이 같은 것이었는데, 단단한 그 안에는
뱉고 싶었던 말이 굳어 있을 것이다
할 말 못하고 있는 생각이 흐르다가 또 다른 마디가 되고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던 분기점을 돌아
아침에 같은 약을 두 번 먹는 지점에 서 있고
어느 날, 마디에서 헛기침이 새나왔다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던 말 말 말들
입만 벌리면 허공에라도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낯설어서,
아니, 민망해서
입을 꽉 다문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은밀함에 대하여
밤이 왔다
어둠은
빛나던 것들이 부식된 붉은 저녁과
붉은 열정이 타오르다 재가 된 시간을 거쳐왔다
어둠을 본거지로 한 은밀한 생이 움직인다
태초에 우리는 은밀하였다
우정과 희망과 결혼제도가 우리의 은밀한 소굴을 점령해 버렸다
희망은 비극에서 나온다는 글귀도 뭉개버렸다
사람들이 일회용 희망에 맛들기 시작하자
오래된 맛집인 비극은 문을 닫아 버렸다
슬픔이 없이 인생을 깨달을 수 없듯이
오래된 비극이 없이는 진정한 희망은 없다
밤은 우리에게 잘 익은 비극을 선물한다
은밀한 거래 은밀한 생이여
지금 은밀함은 해석이 잘못되어 천대 받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은밀함의 자손이다
그대여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밤이 되면
진정 은밀하여라
그늘을 베다
몸에서 나무 한 그루 자란다
대물림된 그 나무는 사춘기 때 성장이 가장 빨랐다
내가 가출했던 며칠 동안
십 년의 성장을 끝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잿빛을 닮아간다
그 나무를 척추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척추를 다쳐 입원했을 때도 나무
는 꼿꼿하게 자라고 있었으니까, 나무옹이가 어떻게 단단한 의지를 숨기
고 사는지 알았고 내 몸을 어둡게 한 것이 나무의 그늘이었다는 것도 알
았다 나무를 베지 않으면 그늘도 사라지지 않을 것
아버지는 그늘을 피해 사막에 갔다 원양어선 타고 구소련에도 다녀왔
지만 어두운 얼굴로 요절했다 그늘이 숙주의 살과 피를 모조리 빨아들인
것은 갓 오십을 넘긴 무렵이었다
뿌리가 끈질기게 흡수한 욕망
핏줄 따라 뻗어나간 독극성 잔가지들
시퍼런 잎사귀들의 허연 입김들
나무를 베면 그늘이 사라지고 쓰러진 나무는 다리가 되어 저쪽으로 날
데려갈 것이다 저쪽 세상엔 일인칭은 없고 무수한 간지러움만
항상 등이 근질근질하다고 말했나요? 꿈속의 아버지
개를 몰고 산책하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간다
어제도 개를 몰고 산책했다
나는 누굴 닮았고
날 닮은 누군가는 지금 어디 살고 있을까
그는 왜 날 닮았을까
산책은 길어지고
난 집으로 가는 지점을 돌았다
내가 책으로 읽었던 문장들은 판타지가 되었다
난 이제 무엇을 읽으며 살아야 하나
사소한 불편을 참지 못해
이 시대는 황홀한 소멸의 길을 걷는다
나는 걷는다
수술 후 증세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매일 산책하는 나는
우익과 좌익을
우회전 좌회전하면서
걷는다 개를 몰고 걷는다
까마귀
고소공포증이 있는 까마귀는
하늘 높이 날지 못하고
창문 밖에서 울었다
나는 까마귀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이 커피는 멀리 케냐에서 날아왔단다
까마귀는 어디선가 본 듯한 표정으로 나와 커피잔을 번갈아 보았다
구도로에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었다
까마귀는 괴로워했다
도대체 난 누구죠? 도대체 나 어디로 흘러가고 있단 말예요
까마귀의 조상은 공황장애였다 불안증이었다
그리고 예측불가능한 미래였다
태생은 어쩔 수 없군!
지나가던 까치 너구리 메뚜기가 욕을 해댔다
아냐 아냐 난 그래도 검은 내 형식과 내용이 좋아
내가 슬퍼하는 건 잃어버린 기억 때문이야
도대체 기억나지가 않아
닭살이 돋던 그 감동들
온몸을 던지던 그 열정들
까마귀가 떠났다
엉금엉금 기어서 큰도로쪽으로 갔다
그의 고소공포증을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읽어버린 그의 기억 역시 내가 어찌해 줄 수가 없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내밀었을 뿐이고
그는 큰길행을 선택했을 뿐이다
오늘도 저녁은 올 것이며 그 전조 뒤
밤이 오면
온 세상은 검은 까마귀 떼로 뒤덮힐 것이다
[당선소감]
내장이 없는 아침, 개를 데리고 산책 나간다.
어제도 개를 몰고 산책했다. 나는 누굴 닮았고, 날 닮은 누군가는
지금 어디 살고 있을까? 그는 왜 날 닮았을까.
산책은 길어지고, 난 집으로 가는 지점을 돌았다.
내가 책으로 읽었던 문장들은 판타지가 되었다.
난 이제 무엇을 읽으며 살아야 하나
사소한 불편을 참지 못해 이 시대는 황홀한 소멸의 길을 걷는다.
나는 걷는다, 수술 후의 증세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매일 산책하는 나는 우회전 좌회전 하면서 걷는다, 개를 몰고 걷는다.
어느새 중간을 돌았다, 중심은 관통하지 못하고 빙빙 돌면서 눈치나 보는 시간을 견디고 있다.
무엇이 자꾸 치밀어 오르는데, 난 그걸 긴 호흡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소곳한 음악과 쾌활한 물줄기가 내 곁에 있다. 그것이 어쩌면 희망이다.
추풍령 아래 조그만 커피집을 차린지 3년이 되었다.
난 그 작은 세계에 담겨 조심조심 시간의 활보를 지켜 보았다.
매일매일 같은 시간이 찾아왔고
12시나 3시 따위, 생기는 순간 중고가 돼 버리는 시간들의 압제를 받으며 난 괴로워했다.
그런 괴로움들이 날 키웠다.
그리고 자문해본다 난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시를 공부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은혜를 입었다 특히 곁에서 지지부진한 성장을 지켜봐 준 아내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같이 공부하고 아파했던 주위의 문우들, 그들에게도 좋은 글로 보답하고 싶다.
부족한 글을 선해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의 절을 올린다.
김대호: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2010년 수주문학상 수상.
첫댓글 자작님이 이렇게 됐네요..식구가 올리기 좀 쑥스럽지만 축하해 주세요.^^~
시가 한알 한알 아름아름 가슴에 콕콕 박힙니다^^ 좋은 문장입니다^^
신인상 수상을 축하 합니다. '시남' 에서의 일상이 시 안에 녹아있는 듯 합니다.^^
저도 축하해요^^
날개를 달았으니
더 높이 나실 거예요!!
감사 드립니다 시상식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앞으로 좋은소식 많이많이 기대할께요
이런 이런... 내 생활에 빠져 지내다 보니 제때 축하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만나네요.
축하합니다! 인재를 몰라본 시단이 원망스럽지만 각고의 노력이 이제서야 제대로 결실을 맺었군요. 참 잘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