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ta : notice(앎/주목)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러나 그 마음은 외부로부터 온 번뇌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 마음을 닦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ṃ.
Taṃ assutavā puthujjano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Tasmā ‘ assutavato puthujjanassa cittabhāvanā natthī ti vadāmī’ ’ti.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는 마음의 수행이 없다'고 나는 말한다.
과거 모든 경험들의 총합을 adjustment(조정/적응)한 것을 내 보내는 出口이면서
새로운 경험들의 총합을 adjustment(조정/적응)하여 받아들이는 入口의 역할도 하여
과거 구업의 결과이자 새로운 업을 짓는
mana(意)는 '측량(to measure)' 혹은 '봄(to see)'으로
'빛'으로도 설명되는,
citta(心)의 의미를 포괄하는 英語 단어는 notice(앎/주목)로 생각된다.
<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감각접촉[觸], 느낌[受], 인식[想], 의도[思], 마음[心],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 마음챙김[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 >에서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를 빼고 manasikāro를 앞줄에 넣으면
(nāmañ ca nāmakāyo ca, ye ca vuccanti cittasaṅkhārā.)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라는 心行(cittasaṅkhārā)이 되고,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manasikāro]라는 心(cittaṃ)이 된다.
여기서 [phasso]을 [대상]이라고 하면
[vedanā saññā]는 대상에 대한 notice(앎)이고
[cetanā]는 대상에 대해 조작(조정/적응)하는 業(行)이고 [心行 → 意行]
[manasikāro]는 대상에 대한 notice(주목)이 된다. [心 → 意]
대부분 이 모든 요소들이 기본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心(cittaṃ)으로 생각된다.
외부로부터 온 번뇌들에 의해 이미 오염된 마음상태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ṃ cittaṃ)에서
먼저 心 차원에서 조작(조정/적응)하는 業이 작동하고서, 대상으로 作意하고
作意가 이루어지고 나서, 意 차원(조정/적응)에서 대상을 '만나게'가 아니라
대상(法)은 意가 '만든 것'(意思, 부정적 측면인 환각/hallucination)이지 싶다.
그러나 [jātūpanisaṃ dukkhaṃ, dukkhūpanisā saddhā
意(6入/태어남)을 기반으로 괴로움이, 괴로움을 기반으로 믿음이 있다.]
[idha, bhikkhave, saddhājāto upasaṅkamati, upasaṅkamanto payirupāsati,
payirupāsanto sotaṃ odahati, ohitasoto dhammaṃ suṇāti, sutvā dhammaṃ dhāreti,
dhatānaṃ {dhātānaṃ (ka.)} dhammānaṃ atthaṃ upaparikkhati,
atthaṃ upaparikkhato dhammā nijjhānaṃ khamanti,
dhammanijjhānakkhantiyā sati chando jāyati, chandajāto ussahati, ussāhetvā tuleti,
tulayitvā padahati, pahitatto samāno kāyena ceva paramasaccaṃ sacchikaroti,
paññāya ca naṃ ativijjha passati.
비구들이여, 여기 스승에 대해 믿음이 생긴 자는 스승을 친견한다. 친견하면서 공경한다.
공경하면서 귀를 기울인다. 귀 기울이면서 법을 배운다. 배우고 나서 법을 호지한다.
호지한 법들의 뜻을 자세히 살펴본다.
(dhammānaṃ atthaṃ) 뜻을 자세히 살필 때에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인다.
[* 법들은<복수 주격> (아래로/확연히) 드러남/보임(禪: 示單)을 허용한다.<*忍辱, 3/복/현>]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이기<*敎法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열의가 생긴다. 열의가 생길 때에 시도한다.
시도할 때 세밀하게 조사한다. 세밀하게 조사한 뒤 노력한다.
노력할 때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그것을 꿰뚫어본다.]
https://en.wikipedia.org/wiki/Dhyana_in_Buddhism Etymology
Dhyāna, Pali jhana, from Proto-Indo-European root *√dheie-,
"to see, to look", "to show".[9][10]
Developed into Sanskrit root √dhī and n. dhī,[10]
which in the earliest layer of text of the Vedas refers to "imaginative vision"
and associated with goddess Saraswati
with powers of knowledge, wisdom and poetic eloquence.[11][12]
This term developed into the variant √dhyā,
"to contemplate, meditate, think",[13][10] from which dhyāna is derived.[11]
부기:
비구들이여, 신들의 왕 삭까는 한 순간에 천 가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사핫삭카(천의 눈을 가진 자)라 불린다.
“sakko, bhikkhave, devānamindo sahassampi atthānaṃ muhuttena cinteti,
tasmā sahassakkhoti vuccati.
비구들이여, 왕들의 통치자인 제석천은 실로 천 가지 의미들을 순식간에 안다.
그래서 천의 눈(千眼)이라고 불린다.
사카는, 비구들이여, 신-왕은. 천을, 의미(결과)들을 순간적으로, 안다(/주목하다),
그러므로 천-눈인자, 라고, 불린다.
그분은 발을 씻고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앉습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을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을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둘 다를 해 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분 고따마 존자님은 자신의 이로움과 남의 이로움과 둘 다의 이로움과
온 세상의 이로움을 생각하면서 앉아 있습니다.
so pāde pakkhālet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so neva attabyābādhāya ceteti, na parabyābādhāya ceteti, na ubhayabyābādhāya ceteti;
attahitaparahitaubhayahitasabbalokahitameva
so bhavaṃ gotamo cintento nisinno hoti. (* cintayamāno cinteti.)
그는 자신의 불이익으로 의도하지 않고,
타인의 불이익으로 의도하지 않고,
양자의 불이익으로 의도하지 않는다.;
[* 붇다의 관심(關心) 사항]
자신 이익 - 타인 이익 - 양자 이익 - 세상 모두의 이익만을
그, 세존, 고타마, 주목하는 상태(/아는 상태)인 자가 앉아 있다.
*여기서 .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는 '~이익만으로 주의를 기울이리라.'라는 기억을 확립하고서
첫댓글
본문 글의 대부분은 소설입니다.
말귀 알아들으려고 이리 저리 머리를 굴린 내용입니다.
대화의 장이 이루어지기를....
작의-법-마노-마노식
작의-법이 심행이고
그 법을 대상으로 한 마노-마노식이 의행
사띠가 선법, 불선법의 라벨링을 하며 의행에 작용,
이런 도식은 어떤가요?
[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duṭṭhena, bhāsati vā karoti vā.
tato naṃ dukkhamanveti, cakkaṃva vahato padaṃ.
마노(意)가 앞서 가고, 마노가 중요(한 역할을) 하여, 마노가 만든 것들이 법들이다.
타락한 마노에 의해서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그 때문에 그를 괴로움이 따라간다. 수레의 발(牛足)을 바퀴가 (따라가)듯이.]
먼저 manomayā - dhammā에서 法들은 意成이라는 말씀에 의하면
意 - 法 순서는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또한 [manasikārasamudayā dhammānaṃ samudayo 作意의 集, 法의 集]
作意 - 法 순서는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manassa kho, brāhmaṇa, sati paṭisaraṇan”ti.
“바라문이여, 마노[意]는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는 말씀에 의하면
念 - 意 순서는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봄봄
[Phuṭṭho, bhikkhave, vedeti, phuṭṭho ceteti, phuṭṭho sañjānāti. 觸 - 受, 思, 想]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앞에서 觸 - 受, 思, 想 순서로 나타나지만 일반적으로는 觸 - 受, 想, 思 순서로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觸 - 受, 想,) 思하고서 신구意업을 행한다.(意行)
觸, 受, 思, 想 - 意 순서는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단 여기서의 觸은 意(육입)이후 근경식의 觸이 아니라 意 이전의 觸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觸, 受, 思, 想 - 意 - 法
念 - 意 / 作意 - 法
意 기준으로 前은 觸, 受, 思, 想와 念이고 後는 法이지만
作意(manasikāra)는 意 이전인지 이후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봄봄
그러나 [觸, 受, 思, 想]와 [作意]는 모두 名(nāma)에 속하고
남-북방 모든 논에서 모두 변행심소 / 반드시들 / 心行이라고 설명하고
결정적 증거는 아니지만 [Manaṃ manasi karoti 意를 作意하다/마노로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표현도 있기 때문에
[觸, 受, 思, 想]와 [作意] - 意 - 法
그러면 念과 作意의 관계는 경문에 명확하지 않고
결정적 증거는 아니지만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
열의[欲], 결심[信解], 정진, 마음챙김[念], 평온[捨], 마음에 잡도리함[作意]]를 감안하면
변행심소인 [觸, 受, 思, 想]와 [作意]와 별경심소인 念에서
[觸, 受, 思, 想]- <念> - [作意] 순서로 생각합니다.
종합하면
[觸, 受, 思, 想]- <念> - [作意] : 心 - 意 - 法이 된다면
전체적인 그림은 그려지지 싶습니다.
사띠sati念는 문지기doorkeeper입니다.
부처님이 sati를 직접 언설한 경문입니다.
‘낑수까 나무 비유 경(S35:245)’
"dovāriko’ti kho, bhikkhu, satiyā etaṃ adhivacanaṃ. -
비구여, 문지기(dovāriko)이란 sati를 두고 한 말이다."
념처satipaṭṭhānā'의 뜻은 집멸하는 법들(samudayavayadhammā [SN. vol.5. p.183.])처럼 일어남(samuday)과 사라짐(vaya)의 법을 확립한다는 문지기 확립입니다.
citta를 心으로만 보면 안됩니다.
識이 心다음으로 많이 해석되고, 선정에 출정한 뒤 意가 心으로 의미합니다...
부처님 같은 일체지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반 법들인 현상이라는 정신.물질名色들의 식별을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그 심리적 현상들을 모두 citta로 묶어서 말씀한거랍니다.
소부 논서<빠띠삼비다막가>는 samuday일어남의 의미로서 citta을...
분명한 것은요...
감각접촉 느낌 인식 등등 기우는 특징의 정신nama이 사대물질에서 파생된 변형하는 특징의 물질rupa에 의지하는 것으로 구분된 용어
정신.물질namarupa의 일어남이 citta의 일어남이라는 경문을 참조하세요.(앞은 M15대인연경, 뒤는 M9바른 견해경?)
사리뿟다의 “법들을 차례대로 결정한다.”를 계승한 <아비담마>는 마음citta이 대상을 인식하는 법칙을 ① 6가지 토대( 안・이・비・설・신・심장 ) ② 6가지 문(門) ③ 6가지 대상 ④ 6가지 알음알이識 ⑤ 6가지 과정 ⑥ 6가지 대상의 나타남 등으로 구성된 인식과정에 말한다. 모든 ●마음citta에 반드시 공통되는 7가지 마음부수들[감각접촉(phassa), 느낌(vedanā), 인식(saññā), 의도(cetanā), 심일경(ekaggatā), 생명기능(jīvitindriya), 작의(manasikāra)]은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반드시 ●같이 일어난다. 7가지 마음부수로서 마음이 대상을 알 때 4개의 조건이다.<아비담마>는 인식과정에 대한 엄격한 법칙을 알아 마음을 명확히 체계적으로 식별한다. 눈, 코, 귀, 혀, 몸 오문(五門)에는 ‘매우 큰, 큰, 작은, 매우 작은, 선명한, 희미한’ 등 6가지 대상이 나타난다. 일어남-머묾-사라짐의 3개 아찰라에서 매우 큰 대상은 일어남이 매우 빨라서 나타날 수가 없고 머묾으로만 나타난다. 삼매를 개발해서 위빠사나 앎을 가진 수행자가 생멸(生滅)의 지혜에 도달할 때 궁극적인 실재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볼수..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러나 그 마음은 외부로부터 온 번뇌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 마음을 닦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ṃ.
Taṃ assutavā puthujjano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Tasmā ‘ assutavato puthujjanassa cittabhāvanā natthī ti vadāmī’ ’ti.///
에서 마음citta의 의미는 연기(이것에 조건성)에 대한 識이나 안이비설신 감성물질(미립자 칼라파, 투명물질. 소조색)을 작의하는 뜻의 意가 그 숨은 의미에 내포할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한 도 닦음을 위한 비구들에게 경문을 말씀한거니까요.
인도 5단 논법을. . .
@붓다명상mindsati 안이비설신과 mano意를 위해서,
M43 “pañcimāni, āvuso, indriyāni nānāvisayāni nānāgocarāni,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i,
seyyathidaṃ — cakkhundriyaṃ, sotindriyaṃ, ghānindriyaṃ, jivhindriyaṃ, kāyindriyaṃ.
imesaṃ kho, āvuso, pañcannaṃ indriyānaṃ nānāvisayānaṃ nānāgocarānaṃ,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ānaṃ,
mano paṭisaraṇaṃ, mano c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ti.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인 눈의 기능과 귀의 기능과 코의 기능과 혀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시여, 이들 다섯 감각기능이 서로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갖고 있고
서로 다른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는데
마노[意]가 그들 각자의 의지처이고, 마노가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다."
어제 동영상 법문을 들으니까, ‘니밋따, 위딱까, 위짜라, ... 에깍가따’ 에 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혹시 안 들으셨을 수도 있으니 참고로 올려봅니다. (28분 5초에 위딱까라는 말이 나오네요.) (초선에서는 촉, 수, 상, 사, 생명기능이 있다는 것을 안다네요.)
https://youtu.be/4hHEMgoa_vA?si=21qD0yRlQvcd8Rn4
(22분 15초 ~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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