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은 항일운동을 벌여 온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냈고, 독립운동과 관련해 일제 치하에서 많은 옥고를 치렀다. 김구 선생은 인천에서 두 번의 감옥생활을 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김구 선생에게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이자 애국청년 김창수를 독립운동가 김구로 바꾸어 민족의 지도자로 이끈 고장이기도 하다. 3·1절을 맞아 인천에 남아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과 탈옥의 루트를 장회숙 인천도시지원디자인연구소 공동대표와 함께 돌아봤다.
1896년 ‘치하포사건’으로 인천서 2년간 옥살이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세가 되던 1896년이다. 일본 군사 간첩을 죽인 ‘치하포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중구 내동에 있던 감리서 옥사에 갇혔고, 여기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 선생은 1898년 3월 9일 인천감리서 감옥을 탈옥한다. 당시 김구 선생은 인천의 지리를 잘 모르는 상태였지만 용동 마루턱, 천주교당 뾰족집, 화개동 마루턱, 북성고지 모래밭, 부평 등의 지명을 통해 자신의 탈옥 경로를 남겼다.
<옛 인천감리서>
김구 선생이 탈옥해 밤새 헤매던 북성고지 모래밭은 인천역 주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인천역은 바닷가였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기껏 달아난다고 다닌 곳이 감리서 뒤 용동 마루턱이었고, 아침이 밝아오면서 천주교당의 뾰족집이 보였다."고 쓰고 있다. 장회숙 대표는 당시 김구 선생이 본 천주교당 뾰족집은 내리교회가 아니라 지금의 답동성당이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탈출했을 당시엔 내리교회가 없었다. 내리교회는 1901년 건립됐다. 김구 선생은 내동에서 중국인묘지를 거쳐 용동 마루턱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탈출로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았던 으슥한 길을 이용했다.
용동 마루턱은 지금의 기독교병원 부근이다. 용동 큰우물과 고유섭 선생의 생가터를 지나 오르다 보면 기독교병원이 보인다. 여기선 답동성당의 뾰족탑이 시원스레 눈에 들어온다. 장회숙 대표는 당시 김구 선생이 보았던 뾰족탑은 답동성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답동성당은 제물포교회, 프랑스교회로 불렸다.
<용마루턱에서 본 답동성당 뾰족탑>
장회숙 대표는 김구 선생이 용동을 탈출로로 택한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 "당시 용동은 물상객주집들이 많이 있었고 객주들 중엔 김구 선생을 돕는 사람들이 있어 안전한 탈출로 중 하나였다."
화개동에서 학익, 문학동 거처 서울로
용동 마루턱을 지난 백범은 율목동을 거쳐 화개동(현재 신흥동) 마루턱에 이른다. 당시 이곳은 꽤나 높은 고지대였다. 당시 그가 다다랐던 화개동 마루턱은 해광사 언덕 주변이다. 해광사 언덕에서는 인천 전경이 한 눈에 내다보인다. 김구 선생은 해광사 언덕배기를 내려와 학익동, 문학동을 지나 부평 만월산을 넘어 서울의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다.
백범은 1911년 안명근 사건과 신민회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두 번째로 인천감옥에 투옥된다. 당시 김구 선생은 감옥에 있으면서 인천 축항공사(인천항 제1부두)에 동원돼 노역에 시달리다 1915년에 가출옥한다.
<김구 선생이 노역을 했던 인천항 제1부두>
백범은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1946년 지방순회를 할 때 인천을 제일 먼저 찾았다. 강화도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열심히 구명운동을 했던 김주경이 살았던 곳이다. 강화 사람 김주경은 백범에게 탈옥을 권유했고, 전 재산을 털어 구명운동을 벌일 정도로 헌신했다. 이외에도 물상객주 박영문, 안호연 등의 인물들도 사형수였던 김구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애쓴 인물들이어서 백범과 인천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인천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의 자취
매년 3월이 되면 우리민족의 독립을 되찾고자 분연히 일어났던 3·1만세 운동을 생각하게 된다. 선열들이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떨치고,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찾고자 했던 저항과 항거의 상징이다. 3월을 맞아 독립과 광복을 위해 애쓴 선열들의 흔적과 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여행이다.
<김진우, 오세창 독립의 혼 스민 '서예작품'을 보다>
송암미술관에는 평생을 항일운동에 바친 묵죽화의 대가 김진우 선생(1883~1950)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김진우는 대나무만을 평생 탐구해 '대나무 화가'로 통한다. 그가 즐겨 그렸던 대나무는 항일운동가로 곧은 기상을 가졌던 작가의 저항의식의 상징이다.
묵죽화가 김진우는 삶 전체를 독립운동과 함께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됐고, 1921년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황해도 서흥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본인만의 묵죽 화법인 죽간이 창처럼 곧고, 죽엽은 칼처럼 삼엄한 금속같은 대나무의 모습을 완성하며 일제를 향한 저항의식을 표출했다. 송암미술관에는 김진우 작가의 8폭 병풍과 대나무 그림을 소장하고 있어 훼절당한 시대를 온몸으로 맞서 싸운 작가의 숭고한 정신을 볼 수 있다. 정부는 2005년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오세창(1864~1953)의 서예작품도 송암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오세창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이다. 이곳에는 오세창의 서예작품 10여 점이 있다. 중국 한자의 원형인 전서체와 그림을 합한 6폭 병풍은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오세창은 서화사 및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여 서화가로써 활발한 활동을 한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엔 조선인 미술가를 위한 대표적 전람회였던 사화협회전에 줄곧 작품을 출품했고,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을 들었다. 정부는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헌신을 기려 1982년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인천 3·1만세운동의 진원지, 창영초등학교와 김명진>
인천공립보통학교(현재 창영초등학교) 김명진 학생은 인천 최초의 만세운동 지도자다. 그는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조선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3학년 재학중에 동급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3월 6일 김명진이 중심이 된 3,4학년 학생들은 정오에 학교를 출발하여 인천공립상업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인천부 중심가를 행진하면서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이 일로 김명진은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동맹휴학 투쟁이후에도 김명진은 일제에 항거하는 조직적인 투쟁을 계획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창영초등학교에는 김명진이 1919년 7월 25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상고문에서 자신의 독립의지를 밝힌 내용을 새긴 비석이 서있다.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바탕한 의사발동이지 범죄가 아니다." 창영초등학교는 선배이자 독립지사인 김명진 선생의 뜻을 잇고자 ‘김명진장학금’을 만들어 어려운 환경에서도 뜻을 펼치고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격려하고 있다. 또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수업교재로 만들어 가르치고 있다. 창영초등학교는 매년 입학식때 만세 삼창을 하고, 3·1절 노래도 부르며 3·1정신을 되새기는 행사를 열고 있다.
<해외에서 항일운동, 독립자금 보내온 이민1세대 >
이민사박물관에는 해외에서 벌인 독립운동과 이민 1세대들이 보내온 독립자금 증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비록 몸은 멕시코로 중남미로 이민을 떠났지만 타국에서 하루도 조국의 광복을 잊지 않던 선열들의 피와 땀이 밴 흔적들이다. 이민 1세대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 군자금과 독립지원금을 모금해 조국에 송금했다.
박물관에는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이 주축이 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역사, 대한독립운동회에 보내는 제1차 의연금 증서, 미국 우정국이 발표한 독립기념우표, 중국 용정,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의 모습 등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당시 해외에 나간 동포들이 얼마나 조국의 광복을 염원했는지 절절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