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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8월 8일 수요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주님,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21-28)
"Please, Lord, for even the dogs eat the scraps
that fall from the table of their masters."
Then Jesus said to her in reply,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신다. 예언자는 주님의 영원한 사랑의 열매인 이스라엘의 재건을 희망한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충에도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이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해묵은 전통을 고집하는 이스라엘을 뒤로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신다. 거기에서 믿음이 강한 가나안 부인의 신앙 고백을 칭찬하시면서, 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겸손하게 청하면 들어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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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2009년 예수 성심 대축일(6월 19일)부터 2010년 예수 성심 대축일(6월 11일)까지 ‘사제의 해’를 보내면서 진심으로 이 땅의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사제들이 참으로 참회하고 거룩한 삶을 살며, 자신에게 맡겨진 성무를 거룩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절히 청원하였습니다.
오늘은 모든 사제의 수호성인인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그분의 거룩한 생활을 기억하며, 그분이 즐겨 바치셨던 ‘사랑의 기도’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저의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오로지 하느님만 사랑하기를 바라나이다.
한없이 좋으신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나이다.
한순간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느니보다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기를 더 바라나이다.
저의 하느님,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따스한 위로가 없기에 저는 지옥이 두렵나이다.
저의 하느님, 순간순간마다 제 혀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도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제 마음이 주님을 사랑한다 말하기를 바라나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고통 받고
고통 받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어느 날 하느님을 사랑하다 죽는 은총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느끼며 죽는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제 인생 막바지에 다가갈수록
하느님을 향한 제 사랑을 더하고 채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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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세상이 뿌옇게 보입니다. 산도 나무도 모두 흔들거립니다. 하지만 하룻밤을 자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조용합니다. 강풍은 온데간데없고, 하늘은 어느새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그럴 때의 자연은 분명 ‘모순 덩어리’입니다. 돌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청을 넣습니다. 그들이 더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만큼 여인은 애절하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묵묵부답이십니다. 그토록 다정하시고, 어떤 환자라도 낫게 하시던 분께서 외면하고 계신 겁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끄덕도 하시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에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십니다. 강풍은 지나갔고, 햇볕이 돌아왔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여인은 울먹이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녀의 재치가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녀의 ‘기다림’이 주님의 기적을 모셔 왔던 것입니다. 이방인 여인은 새로운 세상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며 살았을 것입니다. 기다림의 보상은 언제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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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녀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자녀가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선물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섭섭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적을 베풀고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으나, 사람들의 관심은 기적에만 쏠렸지 그 기적의 원인인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이방인 여인이 하느님의 능력을 청합니다. 마귀 들려 고통 받는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십사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이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매달립니다. 여인의 간청은 집요하였습니다. 끊임없는 청원에 제자들이 스승께 말하였습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제자들까지도 의아해 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지혜롭게 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스라엘에 먼저 자비를 베풀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인의 겸손에 예수님께서 움직이셨습니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강아지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표현이 그러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짐짓 이 말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복음관상을 이끌 때마다 ‘보라.’ 고 강조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만 여기서 보라는 것은 비디오 보듯 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보십시오, 저런 것을 살펴보십시오’ 라는 것은 이런저런 것들에 질문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며 좀 머물다 보면 그 질문에 대해 이런저런 느낌이나 생각이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는데, 그것을 일러 ‘본다.’ 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곧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문 사항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할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해 보는데 역시 복음관상을 할 일입니다. 먼저 살펴봤으면 하는 것은 가나안 부인과 그 딸의 평소 생활 모습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살펴봐야 할 대상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이 가족의 생활환경은 어떤가 ? 모녀 간에 어떤 긴장과 갈등이 있는가 ? 평소 생활하는 모습은 어떤가 ?’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좀 머물러 있다 보면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가 떠오를 테고, 그것을 좀 음미한 연후에 이어서 다른 질문들을 던져가며 기도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과 이 여인이 만나는 장면을 살펴봅니다. 예수님 주위에 제자들도 있으니 그들을 포함한 전체적인 분위기 또는 상황 변화 등에 대해 적절한 질문을 던져봅니다. 물론 본인이 관심 있고 알고 싶은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질 일입니다. 제자들, 예수님 그리고 이 부인 간에 오고가는 대화 내용, 그들의 표정, 전개되는 상황변화 등을 좀더 찬찬히 살펴볼 것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참 신앙인의 모범, 가나안 여인>
오늘 복음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이 보여준 자세는 정말 큰 묵상꺼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호되게 마귀 걸린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딸만 치유된다면 하는 마음에서 너무 크게 소리 질러 사도들의 마음까지 상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귀가 따가울 정도였던 제자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겠지만 거듭되는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땅바닥에 철퍼덕 엎드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보십시오. 그녀는 지금까지 딸의 치유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정말 장한 어머니였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딸만 낫게 된다면 지구 반대쪽까지라도 뛰어갔다 올 사람입니다. 정말 극진한 모성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딸을 위해 자신을 모두 버릴 각오, 대신 죽을 각오가 단단히 선 가나안 여인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참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신앙의 바탕인 겸손도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꼭 내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이 그녀 안에는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폭풍의 밤, 조각배로 큰 풍랑을 견뎌내던 베드로, 주님께서 함께 배에 타고 계셨지만, 혹시 이러다가 단체로 익사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며 질책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보여준 이방인 여인은 큰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교부들은 이 이방인 여인에게서 성스런 교회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 여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여자에게서 나는 교회의 겸손, 신앙, 인내를 본다. 자기 딸의 회복을 믿는 믿음, 되풀이되는 거절에도 단념하지 않고 계속 청하는 인내, 자신을 강아지처럼 여기는 지극한 겸손...”
사랑으로
-김희준 신부-
놀랍고도 감동적인 기사 하나가 생각납니다. 그것은 한 섬에서 김 양식장
인부로 일하던 50대 남자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그의 아내는 부산에서
암투병 중이었는데, 어느 날 그는 아내가 숨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고
바로 부산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악천후 때문에 어떠한 배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티로폼으로 뗏목을 만들어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악천후로 배도 뜨기 힘든 상황에서 당연히 약하디 약한 스티로폼
뗏목이 안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이내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지만,
다행히 4시간여 만에 해경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 기사를 보고
놀라고 감동했던 이유는, 무엇이 그를 스티로폼 하나에 자신을 맡기고
바다에 뛰어들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 그 소중함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그는 악천후도 험한 파도도
걸림돌로 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스티로폼에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 여자는, 딸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딸에 대한
강한 사랑 때문에 어찌 보면 무모할 수 있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깁니다.
결국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하는 믿음은 강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도 이 이방인 여인과 같은 간절한 사랑을 지닌다면, 강한 믿음이 우리에게
생길 것이고 그 믿음은 놀라운 기적을 선물할 것입니다.
믿음에 믿음으로
-김찬선신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런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저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이런 분이라면
이런 분을 저는 저의 주님으로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저만이 아니라 누구나 저와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얘기가 이방인을 위해 쓰인 루카복음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만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지만
전체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한껏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말씀을 하셨음에도
강아지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아, 여인아!”
이 짧은 말에서 감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감탄을 받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앞서 여인에게 그 모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이 컸지만
예수님도 여인을 믿었고 그 믿음이 컸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서로 믿은 것이고,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전체 대화는
서로 믿는 사람 사이에서나 오갈 수 있는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진 말을 해도
여인이 홱 토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셨고
상처를 받지 않으리라고 믿으셨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믿으셨습니다.
이런 말을 해도 당신의 사랑을 믿으리라고
여인의 믿음을 믿으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상호 신뢰입니다.
제가 양성을 담당할 때입니다.
교육 체제의 변화 문제로 형제들이 화가 나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교육 체제가 바뀌는 중요한 문제를
교육의 한 당사자인 자기들과 왜 얘기하지 않느냐고
떼거리로 몰려와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얘기해 줄만큼 아직 교육진의 안도 나오지 않았음을,
그래서 안이 나오면 얘기하려고 했음을 얘기했지만,
얘기를 하다보니 형제들의 입에서 안 해야 할 말까지 나왔습니다.
“원장님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아 말이 나오지 않았고,
더 이상 얘기해봤자 얘기가 될 것 같지 않아
나중에 더 얘기하자고 하고 그 날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방에 돌아와 마음을 추스르려 하였지만
아무리 해도 화가 풀리지 않아 성당으로 갔습니다.
조용히 성찰을 하고 있는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형제들이 너를 도저히 믿지 못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너를 믿는다는 표시다.”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속에서 들렸습니다.
형제들이 저를 믿지 않았으면 그런 말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한 형제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어떤 불이익을 주거나 수도원에서 퇴회시키거나 할 사람으로
저를 생각했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친부모의 자식은 어미에게 할 말 못할 말을 다 합니다.
어떤 말을 해도 어머니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붓자식은 가려서 말을 합니다.
만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다면 갈라설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과 여인은 서로의 큰 믿음을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시위하신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양승국신부-
<겸손한 사람에게만 기적이>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참으로 견뎌내기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자녀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 앞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귀염둥이, 보물 중에 보물, 내 인생의 가장 큰 결실인 내 자식에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주면 좋으련만, 중병이나 불치병에 걸린다면, 그래서 꽃봉오리가 피어나기도 전에 시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부모의 마음은 말로 표현 못 할 참담한 심정일 것입니다. 죄인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이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언제부턴가 악령의 괴롭힘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정말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악령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딸의 심신은 통제가 불가능했습니다. 딸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고, 발작이 시작되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길길이 뛰기도 하고 아무데나 머리를 짓찢기도 하고, 비명과 괴성을 질러대고, 그런 딸의 기괴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대신 악령이 걸렸으면, 딸 안에 있는 악령이 내게로 왔으면, 하는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이었겠지요.
이런 절박한 심정의 가나안 여인이 오늘 예수님께로 달려왔습니다. 여인의 행동을 보십시오. 딸의 치유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딸만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는 자세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분만이 내가 살길이다, 이분만이 마지막 희망이다, 이분은 꼭 내 소원을 들어주실 분이라는 강한 확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이런 여인의 강한 믿음, 겸손한 태도에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응답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기적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강한 확신뿐만 아니라 철저한 겸손의 덕이 요구됩니다.
겸손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의 처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나약함, 나 자신의 한계, 나 자신의 무능함, 나 자신의 무기력함, 죄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족한 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결국 내가 최종적으로 의지할 곳, 마지막으로 매달릴 곳은 하느님뿐이라는 진리를 확신하고 그분께로 나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신앙의 진리가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하느님 풍요로운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릴 것입니다.
축복의 말
-최영균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방인 여인은 주님의 말씀에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표현했으니까요. 처음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간청을 들어달라며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여인 안에 잠자고 있던 신앙을 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지 마라”는 비유에서 강아지는 유다인들이 이방인을 무시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고, 그리스 문화권에서도 개는 부끄러움이
없는 여인, 도덕적으로 정결하지 못한 여인을 이를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욕처럼 사용하던 단어였기에 좋은 표정, 웃는 얼굴로 말할 수 없는 단어지만
예수님은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따뜻한 미소를 띠며 이 여인에게
말씀을 건네셨을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느님의 축복을
불러옵니다. 여인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좌절을 넘어 딸이 병에서 치유되는
엄청난 은총의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한 번쯤 다른 이들에게
축복의 말을 해주는 하루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구원의 지평 확대
- 이동훈 신부-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의 한판 논쟁이다. 논쟁 주제는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것이다. 당시 유다인들은 선택받은 이스라엘인들한테만 구원이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굳어진 믿음을 확인하며 예수님은 여인에게 빵(구원)과 강아지(이방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도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결국 예수님은 여인의 기지에 두 손을 드신다. 가나안 여인의 한판승이다.
가나안 여인의 극진한 사랑과 인내와 슬기와 진실한 신앙이 구원의 지평을 이스라엘 백성에서 모든 이방인, 곧 모든 인간한테로 확장시켰다. 현대 세계에서도 이러한 가나안 여인이 필요하다. 구원의 지평을 인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로 확대할 수 있는 가나안 여인이 필요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길 고대하고”(로마 8,?19 ? ?21 참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피조물을 돌볼 책임을 뒤로하고, 스스로 창조의 정점이라 여기며 자신만을 위해 다른 피조물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며 착취하고 파괴했다. 그 결과 생태계 파괴로 인해 모든 피조물의 공동의 집인 지구는 곤경에 처해 있다.
곤경에 처한 지구를 살리기 위해 가나안 여인의 극진한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나안 여인의 인내로 생태적 삶을 추구하면서 오는 불편함을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 가나안 여인의 슬기로 이미 오염된 자연을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가나안 여인의 진실한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예수님한테서 얻어야 한다. 그렇게 가나안 여인의 삶을 실천하는 것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아”(에페 1,?10) 모든 창조물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인 겸손과 사랑과 믿음
-김찬선신부-
2년 전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짓는 것에 대해
북측이 몇 년을 애를 먹이다 최종 O.K를 하였을 때
저는 성당에 가서 “주님, 감사합니다.”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계속 기도를 하는데 마음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네가 나에게 감사하다고 하느냐?”
생각해보니 제가 주님께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평화 봉사소가 제 사업이라면
제 사업을 이루어주신 하느님께 제가 감사드려야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사업이라면 하느님께서 제게 감사하다 하셔야 합니다.
“내 일을 네가 해주니 고맙다!”
그러니 감사 기도를 드린 저는 그때
평화 봉사소를 저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전에 아무리 수없이 이것은 내 사업이 아니라고 생각했어도
무의식 중에 저는 그때 제 사업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이후 저는 평화 봉사소를 제 사업으로 생각지 않고
그래서 잘 되어도 안 되어도 지금은 마음 편합니다.
그런데 이 사업이 하느님의 사업이고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북한 사람을 위한 것인데도
평화 봉사소를 도와 달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하지 못합니다.
자존심을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가나안 부인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강아지 취급을 하며 거절을 해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청합니다.
구원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부인에게 다 있습니다.
겸손과 사랑과 믿음입니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자기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과
어떤 어려움도 무릅쓰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열망의 사랑과
하느님은 구원하실 분, 곧 능력과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믿음이
이 가나안 부인에게 있습니다.
희망의 끝
-전삼용신부-
오늘 제가 로마 있을 때 함께 성지 순례 다녀온 신자 분들과 만나서 천안에 있는 성지를 방문하고 미사도 함께 봉헌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암 투병 중인 자매님도 계셨는데 이 모임에 참석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도 잘 가누시지 못하는데 오랜 시간 운전을 하시고 그 곳까지 오셨습니다.
저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우선은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을 해 주어야겠고, 그렇지만 그런 희망으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남은 귀중한 시간들을 허비하게 될까봐 주님의 뜻이라면 어떤 것이든 잘 받아들을 수 있는 것이 더 높은 영성임을 말해주어야 했습니다.
전에 김 재중 요셉이란 개종하신 목사님의 테이프를 들었었습니다. 그 분이 목사님이었을 때는 성모님을 마귀처럼 여겼고 설교 할 때마다 천주교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을 다시 알게 되고 부자 목사가 되기보다는 가난한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택하신 분입니다.
그 분이 목사셨을 때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신 것은 물론 두 명의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본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분이 온전한 진리를 깨닫고 있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기적을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이 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이나 세례자 요한은 믿음이 약해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저는 믿음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고 또 그런 기적을 받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해서라고 보지 않습니다. 믿음이 곧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능력들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지 그것으로 그 사람의 영성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저희가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할 것이지만 그들을 악한 사람들로 여겨 주님 나라에서 쫓아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경지는 기적을 행하고 혹은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십자가를 ‘주님의 종이오니 제게 이루어지소서. 혹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 말하고 보니, 또 너무 희망을 꺾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데 한 자매님께서 “제 남편이 10년 전에 하느님나라로 갔어요. 남편이 위독할 때 한 신부님께 병자성사를 청했는데 그 신부님은 상황을 파악하더니 대뜸, ‘임종 준비 하셔야겠네요.’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너무 크게 상처받았습니다. 우리도 죽을 것을 잘 알지만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설령 그렇게 돌아가시더라도 희망을 준 사람에게는 아무런 원망을 안 해요. 신부님들은 이런 마음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그런 의도는 없었음에도 또 한 분의 희망을 꺾은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딸의 병을 고쳐달라는 여인을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개 취급을 합니다. 물론 그 여인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며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끝까지 매달립니다.
왜 오늘 예수님은 유달리 이방인 여자를 개 취급까지 해가며 믿음을 증거하도록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기에 그 여인의 믿음도 잘 알고 계셨고 그래서 바로 고쳐주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끝까지 절망적인 말씀으로 거부하셔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고 계셨기에 그렇게 시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한 믿음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치셨습니다. 당신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왔지만 믿음은 오히려 이방인 여인이 더 강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믿음을 보면서 믿음 약한 사람들만 보아오던 당신도 위로받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여인의 믿음 때문에 본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끌며 청해야 했을 수 있지만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많은 위로와 모범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한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는 위로가 되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경종을 울리는 충고가 됩니다.
저는 그 자매님께,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는 것이 가장 높은 경지가 맞습니다. 그렇더라도 살아있는 한 희망하기를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라고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희망은 예수님까지 위로해 드릴 수 있고 주위 사람들에겐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겐 희망의 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벽을 열며
갑곶성지에 있을 때, 페인트칠을 직접 할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난생 처음 해보는 것이라서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특별히 페인트칠을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망치더라도 직접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어느 정도의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당장 페인트칠을 그만두고 어디를 급하게 가야만 했고, 다음날에야 계속해서 페인트칠을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요. 도중에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한 그 이음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페인트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우리의 인생이 중도에 팽개쳐진 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사실 우리들은 대개 시작하는 것은 잘 하지만 끝마치는 데는 서투른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도에서 포기하는 일로 인해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주님께 끝까지 매달리는 믿음을 간직하라고 우리에게 강조하십니다. 바로 이 점을 오늘 복음은 전해 줍니다.
어떤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딸에게 들린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이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이방인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방해합니다. 또 예수님도 매정한 말씀을 하시지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주변의 방해와 예수님 스스로도 매정한 말씀으로 당신께 다가오는 여인을 쫓아내고 있지만 이 여인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자기 딸을 고쳐줄 수 있다는 강한 믿음에 예수님도 감동을 하시지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영국의 수상 처칠은 팔삭둥이 조산아로 태어나 초등학교 때에는 교사로부터 제일 멍청한 소년이라는 말을 들었고, 중학교 때는 영어에서 낙제 점수를 받아 3년이나 유급했다고 합니다. 그는 명문 가정에 태어났지만, 실력이 되지 않아서 캠브리지나 옥스퍼드에 입학하지 못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요. 그러나 그는 영국의 수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훗날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러한 간단한 축사를 했습니다.
“Never Give Up'(포기하지 말라)
그리고는 다시 청중들을 천천히 둘러보았지요. 청중들은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Never, Never, Never Give Up'(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처칠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고는 강단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부족함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처칠이 그러한 성공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성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Never, Never, Never Give Up!
빠다킹신부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임문철 신부-
사제단 합동 미사를 드릴 때면 신자들이 제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이 제일 시커먼스예요. 제발 어느 신부님 옆에는 서지 마세요. 더 검어 보인다니까요.”
한여름 대낮에도 테니스를 즐기는 통에 관광객들이 미사에 왔다가 “동남아
출신 신부님이 우리말을 어떻게 그리 잘하느냐?”고 경외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이주노동자들과 다문화가정 사목을 겸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주로 필리핀과 베트남 출신들인데, 저를 자기 나라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줘서 이 얼굴도 다 주님의 섭리로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미국으로 유학 간다며 인사를 왔습니다.
잘 다녀오라면서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파란 눈 애인 데리고 오면 안 돼!”
그 학생은 “걱정 마세요”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우스갯소리로 한 이야기지만
아차! 싶었습니다. 인권이니 평등이니 입으로는 잘도 말하지만 한꺼풀만
더 벗겨내면 영락없는 인종차별주의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사회에나 잘 적응한다고 하는 중국인들도 제대로 발 못 붙이게
만드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그 사람의 피부색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이인주 신부-
어느 정도의 간청을 ‘애원’이라 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고 있다. 그런데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시며 거절하신다.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은 표현이다. 이 말씀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첫째는 이스라엘 자손들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여인의 신앙을 알아보고 난 뒤에 당신의 입장을 정하시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은 첫 번째 태도를 취하실 분이 아니다.
여인은 자신의 애원을 단호하게 거절하신 예수께 엎드려 절하며 아주 공손하게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말씀드린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제서야 예수님은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시며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다. 여인의 영적이고 지혜로운 애원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이다.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께 애원한 적이 있는가?
중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을 때 성당이 없어 주일미사는 호텔 강당을 빌려서 드리고 평일미사는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드렸다. 그런데도 나를 그냥 두길래 어쩐 일인가 싶었다. 얼마 후 평일미사를 막 끝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요란했다. 중국어로 시끄럽게 해대는 소리가 “빨리 내려와 오라를 받아라.” 하는 것처럼 들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다 알아 듣지는 못했지만 형사 세 명이 와서 차 문을 열어놓고 타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연행이었다. 나는 “이런 법이 어디 있냐? 영장을 보여 달라. 그러면 타겠다. 그렇지 않으면 못 탄다.” “타라.” “못 탄다.” 30여 분을 옥신각신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기도를 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당신께서 저를 보내셨으니 책임지십시오. 저에게 지혜를 내려주십시오.’ 그러자 곧 응답이 왔다. ‘일주일 후에 자진 출두하겠다고 해라.’ 얼른 그대로 말했더니 통했다. 지면 관계상 그 뒷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겠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얼마나 주님께 간구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필요한 것을 간구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 체험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여러분! 참으로 이방 여인처럼 지혜로운 간구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마음을 녹여 그분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다.
<제 딸만 살려주신다면>
-양승국신부-
가끔씩 아주 어려운 부탁을 누군가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청원은 죽기보다 싫지만 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몇 번이나 심호흡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어렵게 ,어렵게 부탁합니다.
어떤 경우, 단호하게,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때도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힘들겠네요.” 이런 말과 함께 거절당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뭐라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네요!”
“그게 어떤 부탁인지 알고나 하세요?”
“지금 제 정신으로 그런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 역시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이 마귀에 걸려 끔찍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몹시 시달리고 있다’는 여인의 말을 통해, 그리고 처절하게도 간청하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귀에 시달리는 모습, 생각하기조차 싫은 모습입니다. 한 사람 안에 마귀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사지가 뒤틀립니다. 몇 시간이고 발작이 계속됩니다. 입에서는 하느님을 모욕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괴상한 말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두렵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가나안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라도 하시려는 듯이 일부러 뜸을 들이십니다. 일부러 냉정한 모습으로 대하십니다. 묵묵부답으로 응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이런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신다 해도 여인은 상관없습니다. 막무가내입니다. 여인은 길길이 뛰고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딸의 치유를 간청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꽤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들었다면 엄청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예수님 앞에 크게 낙담하고 즉시 돌아서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심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 이방인들을 ‘개’라고 칭하는 습관이 있었고, 또 이 텍스트에서는 ‘개’라는 표현보다는 조금 부드럽게 ‘강아지’라고 부르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표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오직 딸만 생각합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만 치유된다면 자신은 개, 돼지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일념으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을 향한 투철한 믿음, 철저한 겸손이 기적을 불러옵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과 겸손의 사람이었던 가나안 여인은 백인대장과 함께 큰 칭송을 받습니다.
교부들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성스런 교회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서 나는 교회의 겸손, 신앙, 인내를 봅니다. 자신의 딸의 치유를 확신하는 믿음, 되풀이되는 거절에도 단념하지 않고 계속 청하는 인내, 자신을 강아지와 똑같이 여기는 겸손...”
오늘 복음 말씀을 아내와 함께 묵상하면서
-권오광 -
오늘 복음 말씀을 아내와 함께 묵상하면서 아내의 경험담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저희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냈던 한 부인이 생각납니다. 남편은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고, 부인은 집에서 동네 어머니들과 꽃꽂이를 하며 세 자녀와 부산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24개월짜리 막내아들은 엄마가 꽃꽂이하는 동안 엄마도 찾지 않고 컴퓨터 게임을 하며 잘 놀아 처음에는 기특하게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가 엄마와 눈도 맞추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폐아인 것 같아 급히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영등포역 근처에 세를 얻어 살며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변화는 없고 여러 기관에서 거절당하자 엄마는 직접 아이를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집안에 자폐아가 있으면 숨기는 분위기였는데다 제대로 된 치료기관도 없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시각도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어린이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여건이 여의치 않았고 치료에 대한 확신도 없었지만 어머니의 간청으로 아이를 맡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노력은 정말 눈물겨웠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누나 둘을 학교에 보내놓고, 아이와 함께 와서 온갖 궂은 일을 하였습니다. 오후에는 아이를 데리고 특수교육을 하는 기관을 찾아다녔습니다. 교육비도 생활비도 만만치 않아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습니다. 가정을 돌볼 시간도 없이 바빴지만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주변의 냉대와 손가락질이었습니다. 하지만 꿋꿋하고 항상 밝게 웃으며 생활하였습니다. 우리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사정사정해서 아이를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뒤 교사와 학부모들의 눈총에도 굴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 운동장에서 율동하고,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노래하고 또 가르쳐 가며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날 영등포역에서 우연히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이를 만났는데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기쁘고 놀라서 어머니를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물론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이젠 글씨도 쓰고 대답도 하고 밥도 혼자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했습니다.”이 가난하고 장애아를 둔 어머니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 어머니에겐 반드시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여건이 뒷받침해 주지 않았지만 이 어머니의 믿음이 자녀를 치유하는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고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신앙인들의 삶에 은연중 배어 있는 ‘내가 다니는 성당이 훨씬 크고 좋으니까’, ‘나는 세례받은 지 오래됐어’, ‘내가 성당 활동을 많이 하니까’와 같은 겉치레로 신심을 표현하는 것에 빗대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외형적인 것들은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의 자세입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겸손되이 간구하는 믿음의 자세를 배워야겠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김홍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어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였다. 22절의 ?λ?ησον은 ?λε?ω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에서 나온 부정과거, 명령법이다. 거기서 ?λεο? ‘자선’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므로 원 뜻은 ‘불쌍히 여겨 달라’=자비를 베풀어 달라. 직접적으로 “낫게 해달라,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말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말한 이유는 뭔가?
1.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병자는 하느님의 벌이었다. 그러므로 치유는 하느님의 벌에서 벗어나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딸을 위해 애절하게 자비를 간구하고 있는 여인, 그렇다면 딸의 병은 어디서 온 걸까? 이 여인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이 에미의 죄 때문에 가엾게도 자신의 딸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하느님의 용서를 빌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먼저 죄를 용서받아야 그 다음 병이 나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죄인인 주제에 자비는 무슨 자비! 당연히 그냥 돌려보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죄인은 자비를 입을 자격이 없다고.
2. 그러면 자비란 무엇인가?
예) 나폴레옹과 한 병사의 어머니 이야기:
군법을 두 번이나 어긴 한 병사가 사형을 선고받고 죽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병사의 어머니는 급히 나폴레옹을 찾아갔다.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네 아들은 두 번이나 큰 잘못을 범했으므로 자비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
“폐하, 제 아들이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자비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닐 것입니다. 자비란 용서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저는 바로 그런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란 그런 것이다. 자비는 그 사람의 자격을 뛰어넘는 개념으로써 용서라는 말보다 훨씬 높고 넓은 개념이다. 용서는 어떤 전제 조건이나 단서가 붙을 수 있지만 자비는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예) 마태복음 10, 24-27절을 보면, 부자가 구원받기는 낙타가 바늘 귀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 했다. 제자들이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자 주께서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자비를 가리킨 말씀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하느님’이라 부른다.
3. 이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려보내려 하든 말든 이 여인은 더욱 가까이 주님께 나아가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애원하며 애절하게 주님의 자비를 간청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걸로 되어 있다.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빵’은 구원을 뜻하며, ‘강아지’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구원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다는 말이 된다. 정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다. 그는 철저히 유다인의 입장에서 복음서를 썼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와 돼지에 비겼든 것이다.
어쨌든 마태오의 복음서에 의하면 이 여인은 그런 모욕적인 언사에도 아랑곳없이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였다. 자신의 딸이 나을 수만 있다면 어떤 말이든 못 받아들이랴. 그리고 지금 자기 딸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이 예수라는 분뿐이지 않는가! 바로 이런 극진한 모성애와 예수께 대한 믿음이 이제 응답받는다.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셨다.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청하면 응답을 받게 마련이다.
4.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어떤 믿음? 단지 자기를 낫게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믿음이라기 보다는, 보다 더 근원적으로 자기들 같은 죄인들에게도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느냐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정말 믿고 있다면 우리도 저 가나안의 여인처럼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 장우영신부-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마귀 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의 딸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또한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드리는 굳은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그 여인은 딸이 마귀 들려 시달리고 있으니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의 태도는 냉냉하기만 합니다.
소란스러이 애걸하는 여인에게 급기야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시며 거절하십니다.
매몰차리만치 거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우리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의아한 생각마저 듭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듯이 거절하셨을까?
또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빵 이야기를 했을까?
당시에 유다인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물로 씻기도 했지만, 식빵으로 손을 닦기도 했습니다.
손을 닦은 빵은 버리지 않고, 주위의 강아지에게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가능했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그 여인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실망하며 돌아갔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억척스러이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지 않습니까?”
딸아이를 낫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온 힘을 다해서 예수님께 매달리며 간청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시며 소녀를 깨끗하게 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겸손과 확실한 믿음을 보시고 딸을 낫게 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이런 여인의 믿음을 갖고 있는가?
몇 번 주님께 도움을 청해 보고는
이내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은 하지 않았는가?
혹은 대답 없는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하고
아예 예수님께서 안 계시는 듯 생활하지는 않았는가?
오늘 여인의 모습과 함께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모습에 제자들조차도 눈쌀을 찌푸립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길거리에서 고함치는 여자를
버르장머리 없고 예의 없는 여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지닌 여인을 한시라도 모른척하거나 돌려보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 때문에 하마터면 그 여인은 쫓겨 갈 뻔했습니다.
여인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제자들처럼
우리도 어쩌면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여인의 놀라운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여인의 간절한 모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또한 하마터면 곡해된 모습으로 여인을 돌려보낼 뻔한 제자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혹 나의 모습 안에 오늘 제자들의 모습처럼 잘못된, 편협한 이기심으로
주위의 형제들을 소외시키는 우는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멘
끈기 있는 신앙
-서현승 신부-
예수님께서도 참 짓궂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을 깨려 하시다니….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소리를 지르며 뒤쫓아오다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애걸하는 여인에게 해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설정이 있었기에 여인의 답변이 빛을 발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은 딸을 낫게 하는 데 골몰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모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설사 훨씬 더 심한 표현을 들었다
할지라도 여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미 집요하게 당신을 쫓으며 애걸하는 여인의 태도에서 이미 감동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단지 그 믿음을 좀 더 확실히 드러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하고 감탄하시는 예수님 음성의 떨림이 느껴집니다.
기적은 하늘이 감동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오셨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감동적인 믿음 앞에서는 당신의 원칙을 고집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킬까 고민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하느님 앞에 가서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내세울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처지에 이 여인처럼 겸손해질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겸손한 척하다가도 끈기가 부족합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는 일에 좀 더 집요해져야겠습니다.
-임형락 신부-
저는 신부로 살면서 가끔 신자난 비신자 분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고 믿습니까?> 생각해 보면 정말 황당한 질문입니다.
저는 그 질문에 대해서 이런 답을 합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믿고 생각하고 있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 모르지만, 최소한 당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이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질문을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을 바꾸어서 신부님이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가 하고 물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지금 어떤 관계인가 하고 물어주십시오.>
저는 많은 신자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냉담해 지는 것을 봅니다. 아니 하느님과의 관계가 냉담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냉담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을 찾고 믿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생각 속에서 그려지는 막연한 하느님을 찾고 있고 맏고 있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설사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쉽게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참된 모습을 열어 보여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관해 사고하는 새로운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 줌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아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었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8절의 말씀입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 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그런데 지금 그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변화는 가능한가>라는 역서의 저자인 '존 퓔렌바흐'신부님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해서 3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첫째, 하느님이 우리를 항상 사랑하신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끈질긴 관심과 넉넉한 사랑에 언제나, 어느 때고 의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용서하신다. 내가 아무리 내 삶을 엉망으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제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 있다고 느끼든 간에 나와 함께 느끼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의 태도를 눈여겨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이 열어 보이신 참된 하느님의 모습을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장하다고 칭찬하십니다.
오늘날 하느님을 믿는다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 때문에 하느님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이 새로워졌습니까? 혹시 여전히 자기 생각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고집하면서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강아지’도 교회의 일원이다.
-박상대신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 야훼로부터 간택된 백성이며 자기들만이 구원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에 사로 잡혀있었다. 비참했던 바빌론 유배 생활을 몸소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저버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는 노예생활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리라 기다렸던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은 로마 군인들이 이스라엘의 전역에서 판을 치며 자기 백성들을 억압하여 자유를 박탈해 갔을 때 더욱 고조되어 갔다. 자유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빨리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 제국을 무찔러 자기들을 해방시켜주고 메시아 친히 자기 나라의 왕으로 군림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메시아는 비천한 마구간 출신의 나자렛 평민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왕국을 선포하시며, 로마 군인들을 내어 몰기는커녕 가난하고 구박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지상의 행복 보다는 천상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그분은 스스로 “나는 왕으로 군림하러 오지 않고 오히려 봉사하러 온 종이다.”라고 하신다.(마태 20,28; 마르 10,45) 모세의 율법에만 얽매여 형식만을 중요시하던 백성의 지도자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사람들,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그분을 참된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예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마다 꼬투리를 잡고 올무를 걸어 씌우고 모함하여 결국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로 고발하여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 십자가형을 받게 하고 만다.
이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신 예수께서 오늘은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멀리 지중해 연안의 이방인들의 도시인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고향을 떠나와 이곳에 사는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나신다. 마귀가 들린 딸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인의 도시 구석에 사는 가엾고 불쌍한, 남편도 없어 보이는 한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들이 갖지 못한 눈과 귀를 가졌다. 그것으로 보면 그녀는 누구보다 부자다. 예수를 알아보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의 주인공이다. 예수께 대한 그녀의 태도는 선민(選民)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비난 받던 한 이방인 여인의 전 생애를 건 마지막 희망이기에 이는 참된 믿음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예수께서 분명히 구해주시리라는 확실한 믿음 속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나안 여인의 계속적인 애달픈 간청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예수의 차가운 모습을 우선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 분은 좀더 지체하시면서 그 여인의 마음과 믿음을 살피신다. 자꾸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는 여인을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자들이 예수께 언질하자,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하며 맞장구를 치신다. 예수의 이 말을 곁에서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 사뭇 기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도 이스라엘만이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의도는 다른데 있다. 예수께 다가와 꿇어 엎드려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차가운 말씀을 던지신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약속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나누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말인 것이다. 예수의 부정적인 이 말씀 가운데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나누어질 수 있다는 강력한 긍정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바로 이어지는 여인의 장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인의 믿음에 찬 항구한 간청이다.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강한 믿음인가. 보잘것없는 한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장한 믿음에 탄복한 예수는 그녀의 소원대로 딸을 치유해 주신다.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이 선민으로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구원관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아로 모시고 그 분께 믿음을 두는 자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다. 보잘것없는 한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항구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세례를 받고 미사 때마다 그분의 식탁 주위에 앉아 있는 우리들이 바로 새 이스라엘 백성이며,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를 우리는 교회라 부른다. 오늘부터 이 교회에는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강아지도 속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아 여인아!> (마태 15,21-28)
-유광수 신부-
우리는 오늘 믿음이 큰 여인을 만남으로써 정말 믿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묵상하게 된다. 교회는 이런 큰 믿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 활성화되고, 가르침을 주고, 이어져 나간다. 그리고 병든 이들이 치유 받는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큰 이 여인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하자.
우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라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예수님이 떠난 그곳은 어떤 곳인가? 예수님이 떠나 온 그 곳을 간단히 말하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15,8-9)라고 말씀하셨던 대로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고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주님을 헛되이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눈먼 이들,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사람의 규정을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가르치면서 헛되이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소에 경 읽기와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시어 이방인들이 사는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 가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느님을 믿지 않는 지역인 그곳에서 이번에는 어떤 여인이 주님을 만나러 나왔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그곳에서 떠나 아예 믿음이 없는 지역인 이방인의 지역으로 가셨는데 믿음이 없는 이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에서 여인이 나와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러니까 여인은 믿음이 없는 지역을 떠나 나온 것이고 예수님은 믿는 이들이 있는 곳이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을 떠나 이방인이 사는 곳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과 여인의 만남은 믿는 이의 만남이다. 비록 이방인의 지역에서 사는 여인이었지만 이 여인은 얼마나 큰 믿음이었는 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믿음이 있는 이를 찾아 나서서 결국은 믿음이 있는 이를 만나지만 그래서 더욱 큰 믿음으로 성숙되고 큰 은총도 받지만 반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 믿지 않고 입술로만 공경한다고 하는 진실한 믿음이 없는 이는 오히려 믿음이 있는 이를 떠나 보내고 "자녀들의 빵"마저도 찾아 먹지 못하고 빼앗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이는 비록 신분이 형편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도 없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은혜를 받는다. 결국 은혜는 장소나 신분이나, 지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한 믿음을 갖고 참 믿음을 계속해서 성숙시켜 나가려는 갈망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 여인을 보면서 큰 믿음을 가지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가를 배울 수 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성숙하는데 몇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이 여인은 믿음이 없는 그 곳에서 나와 믿음이 있는 예수님께로 왔다는 것이다. 믿음을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예수님께로 나온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요, 모험이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이 성장되려면 이런 용기와 모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믿음이 없는 이들과 같이 어울리고 다니면 우리의 믿음은 점 점 더 믿음에서 멀어져 간다.
즉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들과 어울리면 나의 믿음 생활도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하는 믿음 생활이 될 것이다. 또 우리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하고 생명인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않고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복음 아닌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이들과 함께 어울리면 나의 신앙생활도 복음이 중심이 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사람의 규정을 마치 복음인양 가르치며 주님을 헛되이 섬기는 신앙생활로 타락할 것이다.
두 번째는 자기가 만나는 어려움을 잘 극복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청하는 대로 금방 무엇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여인이 큰 소리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대로는 우리의 간청에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가 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려면 예수님의 이 침묵을 견뎌내야 한다. 침묵은 무응답이 아니라 무언의 말이다. 무관심이 아니다. 침묵은 우리의 소리를 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침묵의 언어를 알아들으려고 노력하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세 번째는 우리 믿음의 성숙을 방해하는 잡소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 가 "저 여자를 돌려 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듯이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잡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 소리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자주 외딴 곳에 가 주님과 함께 머물도록 해야 한다.
네 번째는 예수님은 때로는 우리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하실 때가 있다.
어떻게 들으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전혀 이치에도 맞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불신하고 조롱하는 듯한 말씀을 하시는 것과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보냄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전혀 당신과는 관계없는 사람처럼 또는 귀찮아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을 때 거부하지 말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알아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 번째는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또 주위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여인처럼 비록 예수님한테 청을 들였다가 오히려 모욕을 받는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가 본래 갖었던 그 믿음으로 그리고 그런 순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고 "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하고 간곡하게 청해야 한다.
여섯 번째는 예수님이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무시하는 듯한 말씀을 하였지만 여인은 그 말씀에 화를 내거나 반항하는 자세가 아니라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무조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이다.
아무튼 우리의 믿음이 큰 믿음으로 성숙되기 위해서는 나의 믿음을 방해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그런 장소나 분위기, 그런 말들과 행동들에서부터 떠나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믿음의 성숙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나의 믿음을 방해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또는 믿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라는 것은 하나의 핑계일 뿐이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정녕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칭찬이 바로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