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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8
구자근 사모(광주 화평교회)
누구의 잣대로 매를 맞았나?
아이들의 하루가 모든 잡다한 놀이 속에서 슬그머니 막을 내린 밤이다. 신이 다인이는 곯아떨어진 시간이고 단이는 잠들기 전 30여분의 공상시간이다. 하루 중 잠들기 바로 직전 이 시간이 단이는 제일 기분이 좋은 것같다. 모두 조용한데 혼자서 겅중겅중(소리 안나게 하느라) 뛰어다니고 심지어는 그 싫어하는 화장실(너무 추워서)에서조차 흥얼흥얼거리며 이도 닦고 풀풀 소리나게 세수도 한다. 깊은 산속 옹달샘, 마치 아무도 없는 새벽에 조용히 달려나와서 물만 먹고 가는 토끼처럼, 달밤에 노루가 숨바꼭질 하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간섭에서 벗어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음악이 흐르는 밤, 어쨌든 하루 동안의 세파에 찌든 단이가 가장 편안해 보이는 밤이다. 그러니 매일밤 이 시간만 되면 저렇게 말이 많지......
잠시 동안의 이불 속의 찬 기운을 참지 못해 오늘밤도 요 밑으로 몸을 밀어넣는다. 오늘 밤은 무슨 말을 할거나...
"어휴---! 지금까지 큰 사고 안나고 겨우겨우 살아왔네."
??? 순간, 모든 위험했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얘는... 사고 날 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
"맞어. 내가 여섯 살 때, 810동 402호에서 살 때 거기 앞에 큰 도로가 있는데, 내가 건널목으로 건너기 귀찮아서 그냥 건너가는데 갑자기 오토바이가 쎄게 달려와서 내 앞에 찍- 멈추는거야. 그때 내 발이 오토바이 바퀴 바로 밑에 있었어. 어휴... 아저씨한테 혼나고... "
"세상에... ! 그런 일이 있었어? "
"...... 아빠는 어디 계셔? "
"응, 교회에서 공부하셔."
"아빠는 왜그렇게 공부를 많이 해? 힘들겠다. "
"그래도 넌 아빠 하는 일이 쉬워서 좋겠다고 그랬잖아. 너처럼 숙제도 안하고, 학교도 안가고... 아빠도 숙제는 싫어해. 공부하는 건 좋아하지만. 그게 공부야. "
"나는 있잖아. 되고 싶은 게 많다?
"......"
"실험실 안에서 쥐 같은 거 가지고 실험도 하고 싶고, 여러 가지 약도 만들고 싶고, 인공두뇌 합신 같은 것도 만들고 싶고, 목사님도 되고 싶고, 과학자도 되고..."
"작년에는, 빵집해서 돈 많이 벌고 싶다고 그랬잖아. "
"히-- 지금은 그런 생각이 안 나."
"하기는, 앞으로도 되고 싶은 것이 계속 변할거야. 사람은 생각이 계속 바뀌거든."
"휴-- 그런데 엄마, 난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 쯧! "
"뭐가 이해가 안가는 일이 생겼어? "
"...... 있잖아, 왜 선생님은 시험지 보고 나서 꼭 손바닥을 때리냐고... 우리가 몰라서 틀리는 건데, 모를 수도 있지, 왜 때리냐고! 난 정-말 정말 그게 이해가 안가."
아니 이런, 이건 또 무슨 얘기람...
"응? 그래? 그럼 너도 맞았겠네? "
"당연하지. 계속계속 시험지를 얼마나 많이 봤는데... 중학교 들어갈 때 우리학교가 제일 꼴찌래. "
"아팠어?"
"... 그럼, 손바닥이 거칠어질 때도 있는데... 나는 있잖아. 너무 아프면 두 손바닥을 다리 사이에 넣고 막 비빈다? 이렇게 이렇게... "
"......"
"난 수학을 못해서 실험실도 실패하고 과학자도 실패할 거야. 공부를 잘할려면 수학을 잘해야 하는데..."
"단이는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해?"
"그럼... 지민이하고 윤성이는 100점을 맞는거야. 난 어제도 그걸 옆에서 보고 속으로 얼마나 깜짝깜짝 놀랐는지... 세상에 수학을 100점을 맞어?? "
"단이야, 이거 한번 생각해 보자. 단이는 집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 문제집 같은 거 말야. 그러니까... 나도 공부좀 해봐야겠다 생각하고 공부한 적이 있냐고? "
"아니... "
"그래, 수학이든 뭐든 집에서 숙제나 간신히 하지. 따로 공부해 본 적이 없잖아. 사람마다 생각이 틀려. 엄마는 초등학교 단이 나이 때는 많이 뛰어다니고 많이 여행하고 많이 노는 게 가장 즐겁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단이가 싫어하는 공부를 시킬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어떤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 안하시는거지. 단이가 지금 공부를 전혀 안해서 수학점수 70점 맞는거 가지고, 단이 자신이 '난 공부를 못해' 이렇게 생각하는건 잘못이야. "
"70점이 아니고 76점이야."
"...? 단이가 조금 더 커서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질 때, 그때는 밤새도록 공부해볼 수도 있어. 그때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생각해봐야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지만, 지금 겨우 10살 됐는데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판결 내리는 건 무식한 판사밖에 안되지.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해, 맞다고 생각해? "
"맞어... "
"그래, 단이는 지금 겨우겨우지만 잘 살고 있는거야. 50점만 맞아도 되는데 76점이나 맞고... 인생은 수학점수로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단이에게 능력을 보여주셨다면서? 앞으로도 아주 힘들어질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게 될거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끝까지 인도해 가시지. 단이가 76점 맞아도 하나님은 아무렇지도 않아. 아주 요만큼도 끄떡 안하시지. 하나님은 하나님 일을 해나가시는데 단이 점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거야. 100점 맞든 50점 맞든 단이를 계속 인도해 가시지. 단이가 착해서가 아니야 나빠서도 아니야. 하나님이 단이 그릇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끝까지 내세우려고 그러시는 거지..."
"... 지금 내 당장 꿈은, 내 소원은, 이 전라남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거야."
"응? 그래도 너 요즘 하루종일 저녁 늦게까지 슬기 형하고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놀던데? "
"아니... 여기서 노는 건 좋은데 학교가 너무 싫다고..."
목소리가 갑자기 가물가물해진다.
"단이야, 졸려? ..... 잘자라."
"... 예... 안녕히 주무세요."
세상 간 곳 없는 듯, 금새 곯아떨어진 단이 얼굴을 보니 갑자기 코 끝이 찡해 온다. 목이 메인다. 그래... 오죽했으면 사람보다 짐승이 더 좋다고 그랬겠냐? 인간에 대한 두려움만 쌓였겠지. 나쁜 놈들, 아이들 꿈을 이렇게 무산시키고 있다니... 뭐? 쓸데없이 교육과정에 충실하게 가르치지 않고 시험지 나부랑이나 돌려대고 거기에다 많이 틀렸다고 때리기까지 해? 많이 틀리고나면 누가 뭐라고 안해도 스스로 풀이 죽어있을텐데, 거기에다가 때리기까지 해? 그렇게도 아이들 심리를 몰라? 2학년 아이들에게 시험지를 왜 돌려? 자기가 바쁘면 차라리 책을 읽으라고 하던지 하고 싶은거 하라고 그래야지. 도덕적인 잘못으로 때릴수는 있어. 하지만 아직 공부가 무언지 개념도 안잡혀 있는 어린 아이들을 시험 못봤다고 때리면, 그게 곧 공부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되고 공부 못하는 아이로 만드는 첫걸음인지 모르냐고? 지가 뭔데 시험 잘보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냐고? 지가 뭔데 선한 일, 악한 일을 판단하고 때리는거냐고? 때리는 시간에 한 자라도 끼고 가르치지. 27명밖에 안되는데, 교과 수업진도 다 끝낼 때까지 수업시간을 진지하게 채우지 않고 공부가 아주 질리도록 시험지나 돌리고, 뭐? 꿈을 키워? 학교마다 '꿈'이 안들어간 학교가 드물지. 아이들 꿈을 있는대로 짓밟으면서. 도대체 몇십 년 전에 끝났어야 될 이 무식한 교육방식이 언제까지 계속될 건가......
밤새도록 아들 생각하니 괴롭기가 한이 없었다. 저 아이가 앞으로도 감당해야 될 얼토당토 하지도 않는 무거운 짐들이 곧장 내게로 전해져 왔고, 나도 동시에 힘들게 느껴져서 이 운남 초등학교, 전라남도 뿐 아니라 - 어디로 간들 뭐하랴?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옮겨봤자 수평이동은 늘 땅에서 끝나는 걸, 그런 사람들 그런 조직 속에 놓여있는게 인간인데 - 아예 지구를 떠나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겨우겨우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만이 맴맴 돌면서 눈물만 흘러내렸다.
이 못난 아들 하나 때문에 이렇게 잠을 못자고, 사람 죽이는 조직 때문에 이렇게 억울해하고 원통해하는데, 아들 예수를 죽이시기까지 해야 했던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마음은 어떠했을까. 진노의 대상이었음이 마땅하다. 심판의 대상이었음이 마땅하다. 다 죽어 마땅하다. 우리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열매로 나타나는 죄인일 뿐이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일하는 자체가 자기 좋은 대로 선과 악을 나누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죄의 종일 뿐이다. 그게 하나님을 떠난 증거다. 공부는 일러주는대로 잘해야 선한 것이고 못하는 건 악한 일이라 판단하며 때리는 교사도 그렇고, 그거 싫다고 한숨짓는 단이도 그렇고, 같이 부화뇌동하는 나도 그렇다. 다 상대방이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들고 나를 불편하게 하니까 짜증나고 낙심돼고 어찌할 수 없는 벽에 지구를 떠나고 싶은 게다.
*여기에 대한 아빠의 끼여들기
여보! 나도 한마디 허겄는디
그 선생님이 애한테 잘못하는 것은 단이의 꿈을 짓밟아서가 아니지. 그 선생님이 시험점수로 단이를 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잘못이요. 단이가 꾸는 꿈 따위가 대체 무엇인가? 그까짓 인생의 허탄한 꿈정도는 다 짓밟혀도 좋은거요. 임마누엘이 그거 아닌가? 회개가 그거 아닌가 말야. 그런면에서 진짜로 단이의 허탄한 꿈, 세상을 무대삼아 이땅의 주인공이 되어 보려는 망상을 부수어 주고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겸비해진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냐 하는 거요.
그런데 말야. 그 선생님은 하나님앞에서 크게 잘못하는게 있어요. 그것은 단이에게는 물론 아이들에게 잘못된 기준을 심는다는 거지. 이를테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바가지로 욕을 해주었던 바리새인의 신학(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을 열심히 전개하는 것과 꼭 같은 겁니다.
공부잘하는 것은 선이고 공부못하는 것은 악이다.
내가 잘하냐 못하냐의 여부에 따라서 선과악이 결정된다.
인간의 행함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애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선과 악의 기준으로 제시한 하나님의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라는 거요. 그러니까 그 선생님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를 제시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이고, 이게 바로 마귀의 파수꾼 노릇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단이가 말야
앞으로도 그런 까닭으로 매를 맞는다면, 그렇게 기도하면서 맞았으면 좋겠네!
"예수님! 저 선생님(세상)이 공부 못한다고 나를 백날 천날 때려도(죽든지 살든지) 저런 인간선생의 가르침(공부 못하면 저주다. 너의 행함에 따라서 저주와 복이 갈라진다)을 두려워하거나 속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가르침(죄사해 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은 인간의 행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나아가 저런 따위의 마귀생각을 반드시 이겨주신다)만 따르겠나이다. 안맞기 위해서(내 행함으로 저주를 피하려는 진짜 저주에 갇히지 않고) 공부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주의 사랑에 감사해서(주님이 나같이 못난자와 함께 해주시는 것이 고마워서, 매맞든지, 터지든지, 어떤 일을 당한다 해도) 공부하고, 감사해서 학교에 다니게 하옵소서. "
(아빠의 끼여들기는 여기까지)
머리 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교장을 만날까, 아니 통할리 없어. 무안군 교육청? 아니, 교육부장관이 누구지? 어떤 방법으로 이런 낙후된 교육관과 형편없는 교수법과 교육현실을 알리지? 어린 아이들의 꿈을 시험지 점수로 깨버리는 이 무식한 처사를 어떻게 이 사회에 고발하지? 어떤 방법이 좋을까? 그렇게 했을때의 후유증은?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이 당할 피해는 어느 정도? 아마 일을 당하는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모두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접어두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그 다음엔? 그렇게 해서 뭐한담? 현실이 변하냐? 모두 다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 알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해서 끙끙대고 살아가는 판에, 교사 한명의 마음을 어느 누가 바꿀 수 있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할 자격이 누가 있단 말인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다. 죄는 반복되고 점점 더 확산되어 나타난다. 인간 역사 이래로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는 한 진정한 자유는 이미 내동댕이 쳐진 것이다. 아니,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어 있다. 죄의 실상을 모르는데, 가두어진 감옥의 의미를 모르는데 그곳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맛을 어찌 알 것인가. 오직 꺼내주시는 은총을 맛본 자만이 가두어졌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래서 꺼내주신 자만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죄의 실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밖에 없다. 말씀 앞에 우리를 가두어두실 수밖에 없다. 그리고나서 보여주시는 주님의 긍휼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한 일이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동의자를 찾고, 합법적인 이유를 찾고...여기서, 이기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이겼다고 하며 우리의 중심에 우리의 승리를 자축한다. '그렇지, 하나님은 역시 내 편이야.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관심에서 떠나 하나님이 과연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로 주목하기를 원하신다. 기드온과 300용사에게, 에브라임 사람들의 갑작스런 출현에 의한 하나님의 붙이시는 전쟁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전쟁의 승리를 인정하게 만드신다(삿 7:24-8:2).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다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 터지도록 이끄신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세상을 의지하지도, 기대하지도 말라. 하나님을 떠난 죄와 그 죄가 나타나는 현장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이 땅에 한 명도 없다. 역사 이래로 없었고,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여 달나라 별나라를 가는 날이 찾아와도 없다. 왜? 그 끝은 다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 죄는 하나님이 친히 담당하셔야 될 일이고, 그래서 오직 한분 그 '의'를 이루신 예수님만 믿으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내가 예수님을 찌른 증거가 되는 것이고, 결국 내가 죽은 것이 된다. 네 의로움을 내세울 것 없다. 심판하신 주님만 봐라. 주님이 십자가 지실 때 이미 세상은 심판 받았음을 알리신 것이다. 이걸 아는 은혜로 예수 믿게 된 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전쟁을 붙이시고,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의만 이루어 가심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끝난줄 알고 담담하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당당하게 살라고 일러주신다.
그래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말로 깜깜한 일이다. 우리는 계속 가두어 있는 상태가 감지되는 삶의 현장 속에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쩔줄 모르는, 지구를 떠나고 싶은, 당장이라도 우리를 억울하게 만드는 어떤 조직을 부수기 위해 나름대로의 조직을 정비해서 일어나고 부수고싶은 이 땅의 정의감에 부르르 떠는 죄악된 내가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속에서 자라나는 아들과의 밤의 대화 속에 늘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도 깜깜한 밤이고 아들도 깜깜한 밤이다. 어둠이 어둠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해봤자 둘 다 멸망길로 빠질 건 뻔한 일이다. 이도 저도, 한순간도 주님의 긍휼 없이는 사망의 험한 골짜기를 더듬어다닐 수밖에 없는 가련한 신세가 인간이다.
여호와 샬롬이 임하는 곳에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긍휼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셨음을 들여다보는 자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하여 다툼하는가. 심판하시는 주님께 맡겨라. 붙이시는 전쟁을 바라보아라. 다툼은 정욕에서 난다고 하였다. 이런 그릇으로 쓰이든지, 저런 그릇으로 쓰이든지, 지음 받은 이가 어찌 지은이를 힐문하겠는가. 아들은 계속 힘든 자리에 세워질 것이다. 그 때마다 말씀 앞에서, 말씀이 우리를 판단해 주시는 걸로 인하여 여호와 샬롬이 터지도록 인도하심을 믿는다.
아들이 시험점수로 매맞은 일 때문에 실험실의 꿈이 깨지든지 어쨌든지, 우리가 언제까지나 예수 믿는 자로 남는다면 그것이 곧 여호와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 것이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인간의 꿈이 깨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수는 언제나 넘쳐난다.
"에브라임의 끝물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사사기 8 : 2)
여호와께서 거두시는 '의'의열매로 기뻐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무엇인가 이루었다는 자신의 '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 언약의 증거물이 곧 성도요, 성도 자체가 하나님의 '의'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단이야, 잘 자거라. 너는 아버지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