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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李族의 수장, 이자성等 동시대 무렵의 사로국 부족연맹장회의, 다음이미지 출처)
李自成은 누구인가ㅡ
바로 신라초의 인물로, 씨족장을 지닌 분이라 할 수가 있다.
내사령이란 직책은 내물왕대에 이른 벼슬의 이름이라하는데
사실 신라초기 내사령의 직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후대에 붙여진 직이라 할수가 있다
즉 족장으로 신라조정에 기여한 인물이나 상대등이나 수상에 가까운 직을
후손이 이름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즉 을사보서와 율정정공파의 언전기록으로 보면
추론이 간다. 본시 우리李족은 자성이족(쇠의 족)으로
기원전 부터에 서라벌에 살았던 조상들로,
신라의 진골에 까까운 품계를 지닌 일가인데
김씨계의 왕족 옹립에 기여하여 족장이란 의미의 내사령 직으로 지내오다가,
눌지왕 이후부터 칠원 지방을 다스린 호족인 것이다
그 이유가 이군린, 이용수, 이동이의 이름자의 자명을 보면 알듯이
부족장의 별칭으로 보아, 이 지역을, 대대로 다스린 것이다
통상 우리나라 성씨의 기록은 신라 초기인물, 신라말, 고려초, 고려말의 인물로 성씨로 하는데
우리 자성李족은 신라 내물왕 대에 확실한 인물로 이자성을 시조로 한다.
그렇다면 慶州 李氏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는데, 慶李는 아니다, 경이는 양산촌의 알평을
시조 설화로 통일신라시대의 말기 소판 벼슬을 한 이거명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이거명의 기록은 익재 이제현의 묘비에 나오는 것을 근거로 경이에서는
1세로 하며, 법흥왕대나 진흥왕대의 인물 후손으로 진골에 가까운 인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李自成은 누구인가, 李自成은 서라벌 초기신라의 부족 연체제 구성원으로
이른 지배층에 가까운 자성이족이다, 즉 이씨족이 아닌 자성이족이란 뜻이다
내물왕대의 인물로 표기한 점으로 보아서 서라벌 族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자성은 "선의 쇠족" 즉 "철기문화의 족"하고 같은 이름인데.
내물왕과 이후의 왕권 옹림에 기여한 족인지라
지속하여 사람들이 우러러 부르기를
"군린, 용수"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군린 용수 時代는 각각 신라 王權의 整備 시기"로써
(군린 용수시대 동 무렵의 신라왕실과 대신의 회의, 이미지 출처 다음)
...
"군린은 눌지왕과 이후 왕권의 옹립에 기야하고,
"용수는 신라의 三國 統一에 기여한 인물이다,
"동이는 신라 문예 부흥에 기여한 인물"로 볼 수가 있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지방 호족장- 향임 방임 방린등 대대로 지내 온다.
(칠원의 마지막 성주 우리 이족은 신라투항을 거부하고 몇달을 거쳐서 왕건군에 맞섰다.
이에 왕건은 병력을 중강하여 성을 함락시키자 칠원이족은 백병전으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군량은 떨어지고, 왕건의 대군대에 대부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살아남은 우리 이족은
포로 신분으로 왕건군에 호송되어 회안에 이주한다....그림은 당시 시대의 신라군의 복장, 다음 이미지출처)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 투항하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무리가 바로 자성이족이다,
그것은 우리 자성이족이 신라초기 내물왕부터 김씨계의 신라왕을 옹립하여
경순왕대까지 이른 사직과 종묘를
고려에게 그냥 넘겨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몇달이 지나도
항복하지 않는 자성이족을 멸하기 위하여 왕건은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칠원 성을 사면 포위하고 밤낮 공격을 하였다
자성이족의 성은 성주룰 포함하여 전부가 물러섬이 없이 싸웠고
수십여일을 버텼다. 백병전으로 맞섰으나 대부분 옥쇄당하고
마침내 함락 당한 것이다.
성을 함락한 왕건은 살아남은 자성이족을 전부 경기도 회안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즉 포로의 몸으로 걸어서 걸어서 경기도로 간다.
왕건 군대의 호송을 받아서 경기도 회안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서 왕건은
이 자성이족을 전부 역리에 복속시킨다. 이유는 자성이족이 유난히
기마전술에 능하고 말을 잘 부리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 자성이족은 역리로 있기도하고 지역의 호족의 무사로 차출되어
고려무사의 일원에 되기도하고,
영민하여 일부는 고려대신의 문관로 일을 하기도 하고, 관리에 등용하기도한 것이다.
즉, 일찍 고려 대신의 눈에 들어 출사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가 신라 멸망후 고려 말까지
300년의 우리 이족의 역사이다. 이후부터 우리 이족은 광주와 회안 일대에
자자일촌을 이루고 있었다.
망한 신라의 이주민이기에 같은 자성이족에 대한 단결심, 동족 어른에 대한 효성, 나라에 대한 충성,
예의는 타 종족의 선망이 되었다. 고려말 조선조에 수많은 효열정녀을 배출한 우리 이문인데
모두 이때의 풍습이다.
절대로 같은 이씨는 다투지 않았다. 이 전통이 지금까지 천년을 이른 것이다.
우리 이족은 이후에 각각의 촌에서, 우두머리를 선출하여,
향임 방임 존임 호장 영동정 동정을 추대하였다.
이분이 신라말 마지막 칠원이족의 수장이요 고려시대 내내 인물인 한희 선조다.
한희 선조 다음에는 익비 익준 익강의 廣陵 삼익의 아들이 있다.
2.
오늘의 성씨는 한반도 지역이 통일신라로 합쳐지게
되므로 당나라의 漢字의 음원과 표기를 차자하여, 오늘날 같은 姓氏가 나왔다 기실 원래의 발음이다.
우리 이씨는 중국에도 李氏라고 있었고 신라 초기나 백제 초기에도 각각 李氏라는 姓氏가 있었다.
신라지방은 서라벌부의 李氏 또는 李의 부족이름 들에서 나온 것이고
어원은 또한 고을의 이름, 종족의 별칭인데 한자문화의 유입으로 李라 한것이다.
즉 서러벌지역의 부족들이, 지배층의 일부가 되면서, 일부는 김의 종족으로, 일부는 박의 종족으로,
일부는 李의 종족으로 있다가, 唐文化 수입이후 한자표기를 할 때
무리의 부족명을 이, 박, 김이라고 한 것이다.
氏쪽은 부모와 자식의 종족간 연대와 지역적 연고성에서 출발하므로
어디 지역에 모여 살았던 씨족이다 집단이다라는
종조숭본 혈통의식(부계 모계같이) 집단 의식이 강하여
동일 혈통(모계등)이라는 성씨의 개념으로 그것을 취했는데 이것들이 본관의 유래가 된다.
성리학과 중국 문화가 흡수되어 과거를 보거나 출사를 하거나 하니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유래가 필요하고 근원이 필요하여, 소위 8고조도라는 가문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전래 성씨 이외에 현달한 者를 시조로 모시고,
그 성을 차자하는 풍속이 유입 되어, 오늘에 이른것이다 그래서 280여 씨종이 이르지 아니하였던가 !
우리 이씨 자성李족은 초기서라벌 시대에 부터 서라벌 근처에서 發興하다가(자성 용수 군린론)
신라가 亡하자, 고려 建國에 이르러 칠원(?)에서 회안으로 移住하여, 집단을 이룬 것으로,
이 사실은 世傳으로, 전해져 온 것이라 할 것이다.
회고하건데 統一新羅 말기는, 중앙왕권이 약화된 시기이다. 지방에 집단으로 근거를 둔, 호족들이
병권과 행정권을 독점하고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각지의 호족들이,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稱王하기도 하고, 군사를 보유하고 해당지역을 다스린 것이다
독립된 통치영역을 이루며 중앙정부와 병립한 시기라 할수가 있다. 고대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리 李족은 내사령 이자성 선조님의 후대 즉 눌지왕등 김씨 왕조로 체제가 정비된 이후부터
대대로 칠원지방(?)에서 세거하여 왔다. 따라서 넓은 토지와 풍부한 곡식,강과 산촌, 자원을 지닌
자성이족은 서라벌 정부와 유대관계 또한 좋은 사이인 것으로,
태평성대를 누렸는데, 갑자기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고 나라를 바치자
이에 족들(성민)이 왕건 군대에 저항 한 것이다.
왕건의 군대에 함락을 당한 성은, 결국 城主와 城民들이 회안으로 이주,
회안에 移住를 하였으면서도, 우리 李족들은, 집단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이사금 이사군 향임 방임,당임"과 같은, 영동정, 동정을 뽑아 모시었고 (호족 부족 氏族社會에서 당연한 것)
일종의 자치향을 이루면서, 서로 돕고 살았다, 고려 초기에
일족들은 驛의 吏로, 또는 武士 集團(고려무신정권시 무신들) 집단으로 속하면서
광주 地域에서 모여서 살았는데,
회안 李氏들이 어느 해 부터인가, 出衆한 人物들이 나오게 되고 나라에 공을 세웠다.
그러자 조정의 담로한 중신들이 민망하게 여기어 높은 관리에 오르도록
추천을 하거나 오르게 된 것이다.
회안(광주)에 집단촌을 이루면서, 망한 신라 자성이족이란 부족의 후손들로, 전해오는 것들로
기억하면서 오기를, 이족의 선대는 "신라시대 사람이다. 서라벌의 인근에서 왔다.
內史令 自成이란 분이 先祖이고 우리들은 그 후예"들이다
라는 구전이,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자성 구전의 내용으로, 이자성의 自成은 우리 말의 首長이름으로 보는 것이 史的으로 맞는 말이다.
自成은 쇠족 즉 신라수도 서라벌 금성의 어원과 같은 것이다.
대부분 우리 나라 옛고을의 왕들, 시조들 이름은, 이렇게 部族장을 뜻하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즉 자성이나 내사령이나 부르는 이름들은 전부
각각 고을을 지배하는 伯(干 님금 등)이 었는 지라, 그의 용어는 높임말, 즉 존칭이다
군린, 용수.동이. 향임, 당임라고 한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시대 인명을 분석한,
"이제현은 왕건의 원래 유래, 이름의 고찰에서,
작제 건(왕건의 조부), 용 건(왕건의 아버지・다른 이름은 왕륭), 왕 건 자신까지 3대가
이름에 ‘건(建)’자를 넣은 것은, 신라시대에
통용되어온 존칭어였던 ‘간(干)’(높임말)을 이름 밑에다 붙여서 부른 것이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전(傳)되어 ‘건’으로 바뀐 것이라고 하였다.
즉, 할아버지가 "작제건", 아버지가 "용건", 그 아들(고려태조)이 "왕건"으로서 "건"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서양귀족들이 아들 이름을
아버지, 할아버지와 똑같이 하면서 "2세", "3세" 등의 호칭을 붙이는 것과 같고,
우리나라 조선시대이후에 이름은 원래 외자(1자)로 克, 來-容-載라는 돌림자 항열을 넣듯이,
몽고의 왕들이 징기스 칸 쿠빌라이 칸 저불 칸 아란 것하고 같다.
그리고 자성이 자션의 쇠의 부족의 이름에서 높임말과도 같다, 내사령의 이사금설도 같다.
여기서 율정보서, 석암탄 보서와 율정의 을사보, 한음의 경술보의 별기에 기록된
"자성 군린 용수 동이"는 신라 초기 중기어인 "높임의 의미, 부르는 이름 "임금님" 하듯의 높임"와 가깝고
신라말 또는 고려시대의 의미어인 "향임 당임 한희" 방임 방린"는 중국의 한자가 전래된 이후의
意味語와 같다고 할 수가 있다. 특이한 것은 자성,군린, 용수, 동이는 적어도 왕과 같은 동급의
의미를 지닌 존칭어란 것이다. 신라 초기 대부분 이름들은 전부 종족의 특징, 탄생의 동기, 얼굴모양,
신체의 체구, 설화, 형상의 이름이 대부분인에(대문, 유신, 춘추, 관창,인문) 우리 광이 선조들의
이름은 궁예나 왕건이나 견휀, 김대성과 같이 자성,군린, 용수, 동이 같은 재배층 중에서
수장에 해당하는 이름인 것으로 보아 상당한 지배집단인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러한 자명에 대하여 상당히 귀한 것이란
마음을 지녀야할 것이고 비록은 세전이라도 重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자성의 "成",의 사용은 신라 인물들 표기에도 나오고 마찬가지로
"용수.군린.동이"에서의 용,린,군,동,이도 통일 신라 이전에도 자주 나오는
이름자 명의 하나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나타난 통일신라 이전의
이름자를 분석하면 쉽게 이해 되는 부분이다.
신라인들의 이름 표기는 당나라 문물을 수입한 한자 이후에 표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전에는 그냥 마을의 우두머리 정도로 불려진 이름인 것이다
다만" 鄕任 당임 漢希"는 唐문화의 수입시기인 신라말부터 고려시대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조 국자생원 이한(율정공파)이 다닌 고려 국자감이 있는 개성의 성균관 모습)
(시조 고려생원공 이당의 묘소)
(시조 군부좌랑 이전사(석암탄공파) 장군 당시의 고려무장의 복장)
대부분 萬姓譜나 조선시대 사대부家의 世譜를 연구하다보면
전부, 고려중기-말기시대의 인물로 시조를 삼고 있고
그들의 직위가 전부 호장이나 영동정이나 수장의 이름을 사용 한것을 볼 때
1차는 고려초기 고려 건국에 참여한 부류, 2차는 고려 중기 현달한 부류 3차는 조선건국 초기에
현달하여 고려말기의 인물로 시조를 삼는 부류로 나눌수가 있는데,
우리 자성 이족은 고려 중기부터 현달한 자가 있었으나, 세보상으로는 고려말
조선초에 현달한 분들이 전부 명백하다 하므로 , 둔촌공,석탄공,암탄공, 십운공,율정공등,
고려말 학자들을 중시조로 한 것이고, 이는 조선 중기 대부분의 사대부家의 家習인 것이다.
시조 둔촌공 이집
시조 석탄공 이양중
시조 암탄공 이양몽
(이당.이한, 둔촌 이집.자영 이건 등과 이양중 이양몽등이 수학한 고려 성균관대학, 개성 모습)
餘他의 성보중 우리 廣이 성보를 가장 진실하고 깨끗하다고 했다. 불초기 소시적에
인사동 광릉빌딩 대종회를 드나든 적이 있었는데 종욱도유사님과 창순문화유사님이
광이의 한음.동고,복암,시정상공등 국승의 相臣들에 대한 文化사업으로
대학등 학계에 집필을 의뢰한 적이 많았는데
교수 박사등 학계 인사들마다 광이 보서가 가장 확실하고 위서가 없다고 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 기타 사초와 비교시, 관작,응호, 년대가 전부 일치한 것은
오직 광이 보서뿐이다. 위문이나 허서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성씨의 본격적인 보급 시기를
고려 초로 잡고 있다. 주로 지배계층이 성씨를 가졌기 때문에
조선 초기만 해도 전 인구의 90%가 성씨가 없었다. 천민계층까지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성씨의 대중화가 촉진됐고, 일제강점 직전 해인
1909년 민적법의 시행과 함께 누구나 성과 본을 갖게 됐다.
조선 중기부터 천민층을 제외한 양인들에게 성씨가 확대되는바. 16세기 조선에서 성씨가
없는 무성층(無姓層)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였는데.
왜란과 호란 이후 성씨와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져야했기
때문에 양반과 결탁하여 호적과 족보를 위조하려 했다. 조선 중기 이후
매매위조, 공명첩 등을 통해 천민의 양민화가 이루어지는 등 무성층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 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제8권에서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의 하나도 진짜가 없다.”며 이는 세속(世俗)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적고 있고. ... 황현(黃玹)이 저술한《매천야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전주 이씨의 인구를 의도적으로 늘리기 위해 성씨가 없던 백성 중에서 전주 이씨를
희망하는 자들을 모두 대동보에 올려주어 이 때 전주 이씨가 10만 명이 늘면서 흥선군이
기뻐하였다고 쓰여 있다.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어 모든 사람이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국민 모두가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성씨가 없던
노비들은 모시던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고, 자신이 부리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자신의 성씨를 부여해 주었던 양반도 있었다.
무성층에게 성을 갖도록 했더니 대부분이 인구가 많던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하여, 이들 성씨가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용수, 군린, 향의 임 으로 오다가 실제 이한희이요,
고려말에 이르러 다시 광릉 3익이요,이 후손들이
석암탄공과 율정공과 생원공 둔촌공 십운공인 것이다
그런데 알아야할 것은 자성. 용수. 군린. 향임.당임. 한희는 곧
선조들의 이름이다는 것이고 언급한 것으로 "지배자란 의미" 는
그 유래를 분석하기 위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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