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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설레발그만
리뷰창간호 인터뷰 강헌 vs 서태지
글쓴이: 강헌
출처: 리뷰창간호 인터뷰 강헌 vs 서태지
서태지 주류 질서의 전복자
대담:서태지VS 강헌
일시:1994년 10월 19일~21일
0. 인트로 : 1994년 10월
- 일본시장진출 그리고 악바숭배파문에 대하여
강 헌: 역시 일본시자이라는 수순인가? 개방박두라는 미묘한
국면에서 혹시 그것이 일본문화산업의 새로운 미끼가 되는 것
은 아닌가? 그동안 조용필을 위시하여 총 12명의 한국 대중음
악인이 진출했지만 그것은 거의가 일본시장 내에서 5% 정도의
비중으로 추락한 엔카(演歌)의 '향수상품'이었으며 개인별 총
판매액에 있어서도 거의 일본인화한 계은숙이 280위, 김연자가
356위를 기록했을 뿐, 그외는 오르콘이 집계한 891위 안에 아무
도 들지 못했는데?
서태지: 10월 21일에 1,2집 베스트앨범이 소니 저팬에서 발매되고
11월 중에 홍보차 건너가 도쿄와오오사카 지역의 20여 개 방송 프
로그램에 출연할 예정이다.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기나긴 협상의
시간이 있었다. 데뷔앨범의 `난 알아요`가 일으킨 선풍을 일본방
송의 뉴스 프로그램에서도 화제로 다루었고 이때부터 계약 의뢰가
들어왔다. 이때부터 미룬 것이 지금 3집까지 온 셈인데, 이렇게
끌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즉 일본어로 노래해야 한
다는 것, 반년은 일본에서 체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쪽의 기획
사가 관리한다는 것, 모든 조건이 마음에 안 들었다.여기선 `내맘
이야`인데 . 이런 조건을 둘러싸고 계속 난항이 있었다.
특히 가사의 문제가 중요한 관건이었는데, 한국말을 반 이상 넣고
나머지를 영어와 일본어로 한다는 것까지 진전되었으나 다시 생각
해봤더니 그것도 안되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결국 끝까지 버틴 끝에 모두 한국어로 부르기로 했으며 그동안의
관례였던 일본 기획사 전속도 일본 국내최고대우의 인세를 보장하는
라이센스 계약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기획과 스케쥴 관리도 ACT 7
이라는 소니의 PR담당 협력회사가 담당 하지만 그것의 최종 결정권은
우리 요요기획이 갖기로 했다. 이 부분 만은 일본측이 '그건 아무 것
도 하지 말자는 말이나 같다'며 난색을 표명했을 정도인데 끝까지 버
텨 관철시켰다. 따라서 음반은 우리측 제작사인 반도음향과 소니간의
라이선스 계약이고 기획결정
권도 우리 기획사에 있기 때문에 우리 그
룹은 일본 제작사에 하등의 종속관계도 없다. 이것은 일본 대중음악계
에서 사상 초유의 일이다. 시장성? 우린 크게 기대하지 않지만 소니측
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성공이나 돈이 아니라 우리 음악을 알리는 것이며,
개인적으로 일본 대중음악을 싫어하지만, 매니지먼트 부분 같이 앞선
부분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강 헌: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개방은 어떻게 보는가? 특히 대중음악
부분은 영화나 비디오, 만화 같은 딴 분야완 달리 유일하게 자국음악이
60%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최후의 보루이다. 여기엔 조심스런 낙관과 비관이
엇갈리고 있다. 낙관적인 쪽은, 우리 대중음악가들의 역량이 일본에 뒤질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상륙한 지 50년이 되어가는 미국 대중음악에도
패권을 빼았기지 않았다는 근거에서 이다.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신은?
서태지: 한마디로 걱정된다. 그러나 나는 걱정보다도 우리가 할 수 있
는 것,해야 할 것만 생각한다. 우리가 한 발 앞서가는 서구음악을 하는
것이 나중에 일본 대중음악이 들어왔을 때 교두보가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이상한 논리에 입각한 우려도 간간이 들려왔지만, 입막고 눈 막고
귀막고 사는 것을 고집하다간 나중에 대처할 길이 없다. 나의 과제는
서구의 음악에 뒤지지 않는 음악의 선진화 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본 음악은 미국 음악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감수성과
대단한 친화력이 있으며 공식적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면 우리 대중 음악
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본다. 게다가 워낙 표절도 많이 하지 않
았는가? 그렇다면 문제는 자명하다.
그들보다 나은 음악, 보다 새롭고 독창적인 음악을 만들어 그들 음악이
별거 아니다는 것을 보여줄 수 밖에. 한국 대중음악가의 저력은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 대중음악의 극복은 음악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매니지먼트, 엔지니어링 분야 또한 새로운 인식으로 무장
해야 가능하다.
강 헌: 3집이라는 화제의 잔치는 이제 끝나간다. 예상을 뒤엎은 과격한
음악 스타일, 도매상 에약 백만장, 뉴스데스크에서의 이례적인 판매상황
보도-공식적인 집계가 불가능한 우리 유통구조 때문에 3집의 판매고를
두고 여러 말이 많다. 9월 말쯤 일부 소매상에서의 덤핑 판매도 목격한
바 있는데, 결국 초장에 반짝하고 그친 것인가?
서태지:우리 그룹 앨범 판매의 속성이 그렇다. 1,2집 때도 한 달 안에
살 사람은 다 사기때문에 이 기간이 지나면 뚝 떨어진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생소한 음악스타일 때문에 처음의 열광적인 반응이 70만 장을
넘어서면서 뚝 떨어졌다가 다시 상승해서 130~140만 장 선에서 제자리
걸음하는 그래프를 보였다. 아마 언급한 덤핑 현상도 순간적으로 떨어
졌을때 일어났떤 일로 보인다. 그땐 나도 그전의 경우를 봐서 이것으로
끝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기도 했지만.
강 헌:진짠가?
서태지: 우리같은 경우에는 여러 사정상 내려서 발표하면 했지 부풀려서
발표할 수는 없다.
사실 3집의 경우, 과연 이런 음악이 1,2집 앨범을 샀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감수성에 부합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분에 10만 정도 팔리고 마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도 많이 했다.
물론 '공식 발표'상 1집의 150~160만 장, 2집의 200만 장에 비해 못미치는
수치지만 그것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성과라고 생각한다.
1. 주제의 도입: 어두움과 밝음의 변증법
- 헤비메틀에서 랩과 댄스 뮤직으로
강 헌: 당신의 음악적 출발점은 이제는 전설로만 남아 있는,
김종서와 신대철 등이 멤버로 있었던 헤비메틀 그룹 시나위이다.
뛰어난 음악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의 헤비메틀 음악인
들은 편견과 소외의 그늘에서 형편 없는 대우를 받아왔다.
80년대 말을 기점으로 이들 중 일보는 오버그라운드로의 전향을
선언했고 또 김종서나 당신의 경우처럼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지의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댄스뮤직으로 180도 전환한
당신의 경우가 트로트로 전향한 백두산의 보컬리스트 유현상의
경우만큼이나 경악스러웠는데, 성공을 향한 집념이 당신을 그렇게
이끌었는가?
서태지: 중학교 때의 학교 밴드 활동이 내 인생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을 내 삶의 모든 것으로 결심하고
바로 학교를 그만두었는데, 비교적 빠른 선택이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17살 때 당시의 톱 밴드 시나위에 합류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전반적으로 록 아티스트가 댄스뮤직을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댄스뮤직은 왠지 나약하고 얄팍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보인다.
록은 언제나 최고의 음악이며 최고의 음악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나는 록 밴드를 할 때도 댄스뮤직을,
특히 흑인음악을 좋아했다. 아시다시피 록은 백인들의 전유물
아닌가? 4집 앨범을 끝으로 시나위가 해체되면서 나는 게속 밴드를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멤버 구성이 쉽지 않았다.
어정쩡했던 그 시간을 나는 혼자서 컴퓨터 음악을 공부하면서 보냈고
그러는 도중에 새로운 댄스뮤직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많은
것을 경험해도 될만큼 충분히 젊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두 형을
만났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탄생되었다. 처음엔 시나위 시절을 알고
있는 매니어들로 부터 배신자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데 있어서 나는 까다롭지 않다. 유명하고 노래
좋으면 전부 다 좋다. 헤비메틀 밴드에서 베이스를 칠 때도 머틀리
크루나 아이언 메이든, 신데렐라 같은 록 밴드 뿐만 아니라. 밀리
바닐리나 쟈넷 잭슨 같은 이들의 음악도 즐겨 들었다.
강 헌: 그리고 당신은 3집 발표 후에도 당신 스스로 규정하듯이
댄싱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립싱크 애기 부터 시작하고 싶다. 안무
때문에 라이브 무대에서의 립싱크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밴드 출신으로서 립싱크는 치욕이 아닌가?
서태지: 립싱크, 특히 밀리 바닐리나 금년의 마로니에의 경우
같은 남의 목소리 도용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니까 일단
제쳐놓고 방송 스튜디오나 라이브 무대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얘기하겠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립싱크는 서구에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특히 댄스뮤직의 경우에는 당연
하다고 인식한다. 마이클 잭슨도 아예 마이크 없이 노골적으로
립싱크를 한다. 이 무대에서 보여주는 건 노래가 아니라 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공연에서도 노래하나 마치고 들어와 다음 노래를
위한 의상을 갈아입을 때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아야 될 정도로
격렬하고 힘들다. 노래를 부르는 것만이 우리의 임무는 아니다.
강 헌: 동경 라이브 클립을 보니 마돈나는 립싱크 없이 거의
대부분의 노래를 소화하던데?
서태지: 마돈나의 춤과 우리의 그것은 칼로리 소비가 다르다.
그렇지만 나도 마돈나의 그점은 인정하는데 폴라 압둘의 경우 그리
다르지 않는 춤을 추면서도 대부분 립싱크인 데 반해 마돈나는 80%
이상을 라이브로 소화한다. 물론 어거지라도 동작을 줄이고 노래를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공연을 보러 오는 이들은 우리의 노래만을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춤과 무대 연출, 다시 말해 종합적인 환상의
현실에 참여하러 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팀의 특성이다. 외국의
경우를 볼때 라이브도 성격에 따라 두부류로 정확히 나누어져 있다.
립 싱크를 하는 공연장, 단 여기는 절대로 라이브 콘서트라는 말을
쓰지 않고 콘서트라고 한다. 우리 역시 거의 립싱크를 하지 않았던
1집 공연 이후로는 콘서트라고 표기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없앴던
것이다.
강 헌: 당신은 랩댄스 뮤직이라는 카드를 들고 단 한 번의 베팅으로
경악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었다. 1집의 재킷을 보면 프로듀서를 맡은
이가 나미의 `인디언 인형처럼`등을 통해 한국에서 리믹스 엔지니어의
일인자로 꼽히는 유대영으로 되어 있다 .
서태지: 유대영씨는 우리를 발탁했고 매니저가 된 분이지만, 1집
이후 결별했다. 한국의 상황에서 성공한 뒤에 매니저와 갈라선 다는
것은..... 욕 많이 먹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1집의 재킷엔 말한대로 'Produced by 유대영'으로 되어 있지만
음악에 있어 그분이한 건 사실 없고 2,3집처럼 내가 거의 모두를 담당
했다는 점이다.
강 헌: 당신의 모든 앨범은 Yo! 라는 간투사로 시작한다. 그것은
무슨뜻인가?
서태지: 흑인 속어인데, 별다른 뜻은 없고,'야!' 그런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속해있는 기획사 이름인 요요기획도
이 말에서 비롯된다.
강 헌: 'Yo Taiji'라는 제목의 짧은 연주곡으로 당신은 모든
앨범의 의 프롤로그를 구성한다. 이 프롤로그가 매번
새로움을 보여주려는 당신 앨범의 스타일을 음악적
으로 요약하고 있는 아이디어는 작지만 참신하다.
어디서 힌트를 얻었는가?
서태지: 질문 그대로 이다. 말하자면 '야! 태지야 나와라'
하는 식인데,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런
프롤로그 스타일을 가지고 독창적이라는 말을 할 순
없겠지만 그전에 어디서 본 것 같지는 않다.
강 헌: 프롤로그 뒤어 난 알아요가 등장한다. 이 곡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한국어로 도 랩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확고히
증명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당현한 것으로 받아지고 있지만 이
사실은 우리 대중음악의 미래를 상정할때 매우 중요한 결절점이다.
나는 어떠한 이유로도 한국에서 영어로 노래 부르는 것을
승인할 수 없다. 특히 메틀 앨범이 그런 경향이 심한데, 지금은
다른 장르에서도 교묘히 이경향이 번져가고 있다. 세계시장을
염두에 두는 거창한 꿈을 꾸었다면 음악적으로 성공한 뒤에 얼마
든지 영어버전을 만들어도 될 것이다. 이 앨범엔 똑같은 곡의
영어 버전인 Blind love도 같이 실려 있다. 랩 가사를 만들었던
과정에 대해 알고싶다.
서태지: 곡을 먼저 쓰고 난 뒤 랩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
인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홍서범, 나미 선배가 그전에 시도해
본 바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 말로 랩을 하는 것은 모험에 속했다.
하지만 꼭 우리말로 하고 싶었다. 그렇게 과감히 결정하긴 했지만,
예상대로 굉장히 어려웠다. 발음, 띄어쓰기, 휴지부의 호흡 등
고려해야 할 거싱 하나 둘이 아니었고, 하나하나 고쳐가면서
조금씩 만들어 갔는데 완성하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다. 마치고
나서야 아, 되긴 되는 구나, 뿌듯하기도했다. 그리고 `Blind Love`
는 우리 말 작업을 마친 뒤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서 만들어 본
것이다.
강 헌: 특히 애착이 가는 대목은?
서태지: 한글자, 한단어 모두이다. 이때의 데모 테이프는
아직도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는데, 데모 테이프 완성 푸에도 손질
했기 때문에 최종적인 레코딩은 또 다르다. 이제는 요령이 좀
생기기는 했어도 랩 가사는 지금도 힘겹다.
강 헌: "그 어렵다는 편지는 쓰지 ㅎ아도 돼!" 같은 랩 부분의
신선한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후렵 부분의 선율은 대단히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이른바 '대중성에 영합'하려는 의도였는가?
서태지: 데모 테이프 때는 이 부분의 가사가 영어였다. 그때는
몰랐는데 한국어로 바꾸고 나니까 그런 느낌을 나도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밀리 바닐리나 바비 브라운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쉽고
친숙한 선율에 끌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강헌: 해맑음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당신의 음악에는 상업적
성공을 유인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하지만, 이 경쾌한 해맑음 밑에,
당신을 그냥 숱하게 보아온 아이돌스타의 일인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짙고 어두우며 섬뜩한 통찰력이 복류한다.
나는, 어쩌면 언더그라운드의 메틀 밴드 생활에서 무의식적으로
배태되었을 수도있는, 이 두겹의 음악적 빛깔이 당신을 문제적인
화두로 끌어올렸다고 생각한다. 밝음과 어두움, 타협과 고집,
열려짐과 닫혀짐, 광장과 밀실- 이 양립 불가능한 두 축의 이미지
가 솟아오르는 1집의 문제작이 바로 `난 알아요`의 뒤를 잇는
`환상속의 그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계속 언급되겠지만, 이렇게
빚어지는 이미 지의 2중주가 당신의 음악적 전략이라고 생각되는데?
서태지: 글쎄, 모든 사람에겐 이중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나 또한
그러하다. 가령 친한 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땐 재미있고 부드럽
지만 방송국 같은데서 어쩌다 부당한 일이 생겨 싸울 땐 싸늘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성향이 음악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강 헌: 그런데 앞의 두 노래가 의식의 양면을 가로질러 갔다면
또 다른 한편으로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는 음악적인 규칙, 즉
쟝르가 의도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느껴졌다.싱어송라이터이자
편곡자와 음악감독인 당시의 권능이 발휘된 노래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곡의 장르는 무엇인가?
서태지: 지금도 나의 노래들 중 단 한곡을 꼽으라면 이 노래를
꼽는다. 이노래의 가사는 여자 친구랑 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의 절정을
그려 본 것인데, 글쎄 장르는 만든 나도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다.
내가 가장 감상적인 느낌 속에빠져 있을 때 만들었다.
강 헌: 1집의 성공이 우연이 아님을 단 숨에 증명해 버린
이듬해의 두번째 앨범은 우선 何如歌 誰是我같은 제목이 어리둥절
하게 만들었다
서태지: `하여가`와 `수시아`는 대학교수이신 외삼촌이 데모
테이프 제작후에 붙여준 제목인데, 본래는 '변해버린 너'와 '유일
한 나'라는 제목이다.
강 헌: 외삼촌이 도움을? 가족 얘기가 나온김에 한번 쉬어 가자.
당신의 셋째 할아버지가 우리 교향악단의 여명기를 이룬 분이며
연세대 음대 학장까지 역임하신 우리 음악계의 원로라고 들었다.
당신의 음악을 들려드린 적은 없는가?
서태지: 테모 테이프를 한번 들려 드린 적이 있는데, 볼륨 좀
낮추라는 말씀만 하셨다.
강 헌: 하여튼 `하여가`는 메틀적인 요소를 강하게 드러내면서
태평소까지 고용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또 다시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 보면 3집의 방향이 이미 여기서 암시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 노래 중 이태섭이 맡은 기타애드립이 그룹 테스타먼트의 샘플링
이라는 지적도 있었는데?
서태지:샘플이 아니라 거의 카피(표절)적 성격이 농후한 부분
이라고 생각된다. 나머지 모든 트랙에서도 그렇지만 `하여가`의
기타 솔로도 코드 진행의 틀만 제시하고 이 기타리스트에게 직접
맡긴 것인데 녹음할 때는 몰랐으나 나중에 테스타먼트의 앨범을
들어보니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결코 고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아쉬운 느낌은 떨쳐 버릴 수 없다.
태평소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심없이, 막연하게나마 국악기를
고용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리하여 김덕수씨가 온갖 국악기
를 스튜디오로 가져왔고, 처음엔 실험 삼아 징과 꽹과리를 써보았는데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기를 거듭하다 눈길이 멎은 악기가
태평소였는데, 애초에 넣으려던 신서사이저 하이음과 주파수가
비슷해서 딱맞아 떨어졌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 곡이 발표되자 일각에선 '국악가요'운운하면서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터져나왔는데 언론이 또 나를 갖고 흔드는 구나 하는
생각에 솔직히 말해 기분이 언짢았다. 오히려 국악하시는 분들이
이노래가 국악가요는 아니지만 국악의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다고
격려해 주실때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2집의 곡들 중 맨 마지막 노래인 `마지막
축제`가나 개인적으론 `하여가`보다 더 서태지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강 헌: 또 다른 차원에서 충격받은 것은, 열광적인 객석의
아우성을 배경음으로 시작하는,TAIJI를 Talent, Attention, Intellect,
Joy 등으로 해자(解字)하여 거의 자기도취적인 오만이 분출되는 `우리들
만의 추억`이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유일하게 영어로 랩을 구사하는 노래이기도 한데, 당신의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메세지치곤 자신감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닌가?
달리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이전의 대중음악가와 당신을 구별하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서태지: 랩의 영어부분은 음악선배의 친구가 소개해 준 재미동포
2세인 릴리안 비라는 사람이 썼다. 이 노래는 당신이 느낀 오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에겐 아주 특별한 노래이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아마도 죽을때까지 1집 이후 우리에게 쏟아졌던 팬들의
함성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노래는 이 벅찬 희열에 대한
보답이며 또한 우리 공연의 앵콜 곡이기도 하다.
팬들은 우리가 기성세대의 온갖 편견들로부터 구박받을 때 유일하게
우리를 지켜준 최후의 보루이다.
강 헌: 이 노래의 반대편 맥락에 선 노래가 놀랍게도 뒷면에
바로 나온다. 앞의 곡에서 격정적으로 표출되었던 당신의 팬들에
대한 일체감은 이 `너에게`에서 "니가 아무리 지금 날 좋아한다고
해도 말야 그건 지금 뿐일지도 몰라"로 뒤집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발라드는 1집의 이 장르 곡보다 훨씬 진전했다.
당신에게 발라드는 어떤 것인가?
서태지: 그런가? 어쨌든 발라드는 가장 쓰기 힘든 음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장르에서 독창성을 발휘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1집때도 `이제는`같은 곡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대로 드러나듯이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대목이다.
강 헌: 그리고 화제가 된 곡이 마약문제를 암시하는 `죽음의 늪`
으로 이 화두는 3집에서 `제킬박사와 하이드`로 발전한다. 밝음을
얘기할때 보다 분열적인 상황을 다룰때 당신의 솜씨가 더욱 발휘
되는 것 같은데?
서태지: 마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노래가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한다. 특히 청소년에게 있어 마약 문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이곡의 편곡패턴은 스매싱 펌킨스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
하는 마이클 잭슨, 특히 Dangerous앨범의 스타일에 영향받은 것이다.
강 헌: 1,2집에 걸쳐 당신의 성공은 완벽한 것이었으며 또한 음악
뿐 아니라 모든 부문을 통털어 가장 어린 나이에 이룬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성공의 근거는 무엇인가?
서태지: 습작시절 선배들이 남들보다 빨리 이해하고 흡수한다고
칭찬해 주었는데...... 다른 것은 나도 잘 모르겠다. 오로지 음악만을
사랑해왔다는 것 말곤 달리 말할게 없다.
2.주제의 전개와 발전: 주류의 지각변동
-- 그에게 록(Rock)은 무엇인가
강 헌: 당신의 음악 안에는, 트레쉬 메틀과 얼터너티브 록이
기조를 이루는 3집에 이르러서도 다양한 음향효과가 고용되고
있는데 효과의 남용이 본연의 음악적 생명력을 거세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서태지: 물론 나 역시 꼭 필요한 부분만 쓰기 위해 노력한다.
가령 정신분열의 환청을 묘사하기 위해 `제킬박사와 하이드`의
인트로에서 썼던 효과음향처럼. 당연한 말이지만, 이 효과들이
결코 음악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곡의 분위기
를 전달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기술이라는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하기는 쉽지 않다. 가령 1,2집에서는, 당시에 가장 널리 유행
했던 오케스트라 HIT이나 혼 HIT 같은 프로그램을 많이 사용했다.
메틀이 주조를 이루게 되는 3집에 이르러 이 효과의 고용은 많이
자제되었는데, 3집에서 주로 구사한 효과는 디스토션과 스크래치
이다.
강 헌: 90년대에 들어서서 특히 문제되고 있는 샘플링 기법에
대해서는?
서태지: 역시 마찬가지로 얘기할 수 있다. 1집에서 많이 썼
는데, 샘플링은 어쩔 수 없는 소비성 기법이며 인스턴트 음악이
라고 생각한다. 특히 CD 샘플링은 완벽하게 배체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강 헌: 자 이제 록에 대해 이야기 할 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당신이 생각하는 록 음악이란 어떤 것인가?
서태지: 나는 비평가가 아니라서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
겠는데, 음악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우선 젊고 가장 솔직하며
동시에 깊이있는 음악으로 정의하고 싶다.
강 헌: 우리는 랩과 레게의 흥청거리는 측면만 수입했으며
94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홍보전략의 차원으로만 얼터너티브 록
을 내세워 그 본연의 정신을 모독하는 신인밴드들도 출몰하곤
한다. 음악적인 측면만으로 한정할 때 , 시애틀을 본거지로
발흥한 얼터너티브 사운드 속엔 사이키델릭과 헤비메탈, 그리고
펑크의 핵들이 녹아 흐르고 있다. 이중 사이키델릭은 70년대
초반 신중현에 의해서 시도되다가 외풍으로 인해 중도에서 표류
되었고, 펑크는 아예 수입되지도 않았다. 당신이 얼터너티브
록이라고 규정한 `발해를 꿈꾸며`를 예로 들어가 보자
서태지: 이 곡의 최대 과제는 너댓 개의 모티브를 자연스럽
게 연결하는 것이었다. 새소리의 효과음에 이어지는 어쿠스틱
기타의 서주는 청명한 하늘의 이미지를 의도한 것인데 여기에
지저분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밸런스가 무너진 첼로를 동반시킴
으로써 혼돈을 노렸다. 그리고 양현석의 랩적인 멜로디가 등장
하면서 급격히 메틀로 돌아서며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트윈 기타가 받치는 후렴구로 상승한다. 이는 긴장-긴장-해방의
구성을 꾀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타 애드립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의 여백을
남긴 것인데 이상의 전과정의 반복 이후 가장 맘에 들지 않는
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내가 이 곡을 얼터너티브라고 한 것은
이상과 같은 구성과 선율, 특히 첼로의 멜로디 라인, 연주기법
등이 정통적인 록의 노선에서 이탈해 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
이며, 가사 또한 본격적인 얼터너티브 정신으로 충만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 대중음악의 상황에서는 개중 그래도 몸부림
친 축에 든다고 본다. 하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선 `널 지우려 해`
가 가장 얼터너티브의 정신에 입각해
있다고 본다.
강 헌: 80년대 중반 부터 통일에 대한 숱한 '불온한' 노래
들이 만들어지고 또 불려졌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서태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들어볼 틈도 없었고, 난
다만 나보다 어린 세대들의 통일 불감증 혹은 이해타산에 입각
한 회피적인 태도에 충격을 받았고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심정
을 음악적으로 옮겨 보고 싶었을 뿐이다.
강 헌:사이키델릭을 본격적으로 태클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환각제 문제가 말썽이긴 하지만.
서태지: `내 맘이야`와 `제킬박사와 하이드`에서 약간
시도했지만 그저 효과의 측면에 불과하고, 아직 잘 모른다.
언젠가 본격적으로 도전해 보고 싶다. 그리고 맨정신으로도 얼마
든지 '가서'하는 사람도 많다.
강 헌: 이 곡과 짝을 이뤄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교실 이데아`
는 보다 직설적으로 현재 제도교육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에 십대는 물론 그 이전의 세대까지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교육제도의 모순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제도권 내의 대중
음악에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란 공연윤리 위원회의 검역
의 벽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서태지: 나의 학교생활은 참으로 짧았다. 그러나 교육의 경험
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나는 학교의 경험을
오직 솔직히 쓰고자 했다. `교실 이데아`의 서두인 '됐어!'는 그러한
경험과 기억의 요약이다. 현석 형만 해도 학교 다닐때 춤추고 싶어서
카세트 라디오를 들고 대학로에 나왔다가 다 뺏기고 밤거리를 헤매 다닌
기억이 있다고 한다.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도 이 절망감은
누구나 하나씩 가슴속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 곡을 만들고 났을 때
과연 이 곡이 공윤의 심의를 통과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다.
수정 없이 통과된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강 헌: 그건 아마도 당신의 막강한 위치 때문일 것이다. 나는
무명의 록커가 이 곡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짤렸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만약 짤리거나 수정요청이 떨어지면 어떡할 생각이었는가?
서태지: 한 글자라도 반려되면 몽땅 연주곡으로 채워 굴복하지
않고 싸울 생각이었다. `교실 이데아`는 아예 연주곡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우리는 '무수정 통과'가 떨어질 때까지 이러다가 노래는
단 세곡만 실리는 거 아닌가 하며 내심 초조해야 했다. 사전 사후
심의는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 가사 한마디 가지고 대중들이 어떻게
된다는 사고는 대중들의 의식수준을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제재는 방송이나 향후의 케이블 T.V를 통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강 헌:`제킬박사와 하이드`도 표현의 통념적인 둑을 넘은
노래이다. `죽음의 늪`에서 이미 제시되었던 분열의 양상은 더욱
음영이 짙어졌으며 무엇보다도 이러한 메세지의 내면이 악곡의
구성과 긴밀한 호응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내 맘이야` 와 함께
3집 앨범의 최대성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태지: 대중들은 이 곡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데 매니어와
특히 비평가들이 이 곡을 주목하는 것 같다. 주제는 앞 앨범의
`죽음의 늪`에서 이어지는 것이지만 음악적인 구성에서는 `마지막
축제`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당신이 지적한 대로 이 곡은 서로
말이 안 되는 것들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있다.
내가 노린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이 극단적인 대비에서 분열
과 자기파괴 라는 의도의 효과는 더욱 커진다고 생각한다.
강 헌: 다소 느닷없는 느낌을 주는 `영원`은 어떤가? 이
느닷없음이야말로 음악감독으로서의 당신을 규정하는 또하나의
기준인 것 같은데?
서태지: 나는 '클래식'을 모른다. 제목이나 작곡가 이름은
더욱 더. 그런데 어쩌다 우연히 귀에 들어오는 음악에 눈물이 핑
돌 만큼의 아름다움을 느끼곤 한다. 이건 요즘의 학생들도 마찬
가지라고 본다.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마치 "내가
한 번 해볼테니 들어볼래?"라는 식으로..
하지만 편곡의 어려움을 처음으로 느꼈을 정도로 작업은 어려웠다.
연주를 저팬킹 오케스트라가 맡았기 때문에 어레인지를 일본인이
담당했다더라는 말도 돌았지만 그건 낭설이고, 이 곡이 완성되기
까진 공동으로 편곡을 맡은 이성환씨의 공이 지대하다. 이 곡은
1,2,3,집 통틀어 내가 참여한 부분이 가장 작은 노래이기도 하다.
강 헌: 당신의 앨범에 참여하는 세션 주자들은 매번 새로운
인물들이다. 기타리스트들의 면면만 훑어도 1집에서는 신대철,
손무현 등이, 2집에서는 이태섭과 이토가 그리고 3집에 이르면
팀 피어스가 주로 담당한다. 프로듀서로서 세션 기용의 원칙이
있다면?
서태지: 세션맨이 갈리는 이유는 매 앨범마다 음악의 장르와
스타일이 바뀌기 때문이며, 선택의 기준은 연주를 가장 잘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에 가장 적합한가의 여부이다. 팀 피어스
의 기용은 사람마다 평가가 엇갈릴 수는 있겠지만, 내 판단으로는
얼터너티브 곡에서는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발해를
꿈꾸며` 같은 경우엔 한번에 끝낼 정도로 이곡의 성격에 잘 부합했다.
`교실 이데아`에서 내가 직접 쳤던 것도 꽤 많은세션맨들의 오디션을
거쳤지만 트레쉬 메틀의 영역에서 각각의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어떤 '느낌'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 코다 :부조리한 편견들에 고함
- 방송, 저널리즘 그리고
강 헌: 다시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먼저 대중음악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방송부터. 순식간에 이루어진 당신
의 성공은 이 전지전능한 매체에 꽤 많이 빚지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당신의 관리정신은 브라운관 속의 소모전에
혹사당하는 것을 명민하게 저지했다. 그리고 지존파 사건이터진
요즘, 또 다시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서태지: 우리가 대표적인 타깃이다. 좀 봐 주는 때도 있지만,
작년엔 레게파머가 문제였는데 이번엔 치마와 귀거리가 도마에 올랐다.
'굴복이다'는 팬들의 분통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우리가 받아들였지만
이번엔 다르다. 더 이상 동네북이 되는 상황을 감수할 수 없다고 생각
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방송국이 대중에게 뒤져 있다. 6,70년대에 있을
법한 얘기가 90년대에도 여전히 토씨도 마꾸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가장 답답할 때가 외국의 음악 동료들이 이런 제반 규제에 대해 이해
하지 못하고 우리나라를 히틀러 소굴 정도로 인식할 때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대중음악가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방송담당
자들의 보신주의, 이런 풍토를 과감히 잘라내어야 하는데... 아마
대통령도 모를 것이다.
강 헌: 그런데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은 3집 앨범 발표 직후
톱 프로그램인 '일요일 일요일밤에'에 출연하여 `교실 이데아`를
부르기도 했지만 서커스에 가까운 '장기자랑'도 불사하지 않았는가?
시청율 경쟁이 극에 달한 90년대에, 특히 당신들이 질러놓은 랩댄스
뮤직의 아류 선풍 이후로 방송이 대중음악가에 대해 거의 새디즘적인
증후군을 보이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서태지: 음악과 상관없는 프로그램 출연을 거의 안하는 그룹
이지만 새 앨범 발표후에 팬 서비스 차원에서 한번쯤 고려한다. 말하
자면 옆집 오빠 같은 이미지를 주기위해서인데... 언급한 그 프로그램
은 청소년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본연의 태도는 못된다.
강 헌: 록은 부조리한 현실과의 끝없는 긴장이며 그것에 대한
음악적 반동이 아닌가? 당신은 또 모 대기업과 일대 격전을 벌이고
있다고 신문에서 보았다. 이틀에 걸친 당신과의 대담은 아무래도
당신의 투쟁 리포트로 마무리 되어야 할 것 같다.
서태지: 가장 큰 부조리는 초상권 및 저작권 문제 그리고 명예
훼손 같은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무단으로 인형을 만들
어 판다든지, C.F사진이 유출되어 잡지사의 브로마이드 북으로 둔갑
한다든지, 하다못해 학원 홍보용 책받침에 허락 없이 우리 사진을
담는다든지 하는 일들이 셀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나는 이것을
이른바 '스타'가 지불해야 되는 유명세라고 보지 않는다. 연예인들은
그렇게 취급해도 된다는 통념, 이것은 정말이지 가혹한 벽인데, 여
기엔 악착같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대충 합의해 온 선배들의
불가피한 대응방식에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시비를 가린 예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판례도 없고 따라서 재판부
도 미루기 일쑤이다. 우리가 제소한것도 몇 십 건에 이르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이라도 선례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앞으로도 후배들이
계속 이런 대우를 받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대목에서
정말 분통 터지는 것이 있다.
정당한 문제제기를 놓고 우리에게 곱지 못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언론
들이 "너무돈을 밝힌다", "인기유지를 위해 쓸데없이 명예훼손을 남발
하는 것 아니냐" 는 투로 비아냥대는 것은 우리를 한번 더 죽이는
일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스타맥스와의 법정공방도 그렇다. 1집 성공후에 유호
프로덕션이 제작한 뮤직 비디오 클립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는데 그땐
법도 잘 모르고 해서 대충합의를 보고 넘어 간 적이 있다. 그래서 2집
때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꼼꼼히 계약서를 만들었고 완성도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편집권을 가지는 원칙아래 "어떠한 내용물도
일체 삽입해서는 안된다"는 구체적인 조항까지 달았다.
그런데도 오로지 이윤만을 지상명제로 하는 이 대기업에겐 계약서는
휴지나 다름 없었고, 계약 위반사실에 대해서 반품과 재제작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되돌아온 반응은 고작 '합의'였다. 우리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고,'계란으로 바위를 치는'무모함을 실감하면서 이 문제를 법정
으로 옮겼으나 1심결과는 막강한 고문변호사단을 앞세운 스타맥스의
승리였다. 그러자 몇몇 언론에서는 '패소망신' 운운하며 우리의 쓰라린
가슴을 다시 한 번 짓밟았다. 수십년 동안 다져진 이 편견의 벽을 무
너뜨리고 싶다. 아니, 무너뜨리지 못하면 구멍이라도 내고 싶다. 우리는
'판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강 헌 :진심으로 그 태도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음악 정신과 성숙하게 결합되기를 희망한다. 벌써
4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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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헌(음악 평론가)
1962년 부산생
서울대 국문과, 동대학 음악대학원 졸
비평: 통기타에서 블루노트까지- 다시 김현식론
창조와 도전의 발라드 정신-송창식론
현재 한겨레21 시사저널등에 대중음악 리뷰연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