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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19)살림~삼법인~상속
240. 살림 ☀ 불교에서 나온 말
절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말한다.
산림(産林)이라고도 하지만〈우리말 유래 사전〉에는 불교용어인 산림(山林)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산림은 절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말하며, 이 말이 절의 재산관리만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의
재산을 관리하고 생활을 다잡는 일까지를 가리키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절에서 살림을 맡은 스님은 원주라 하여 그 책임을 귀하게 여겼다.
241. 삼독(三毒) ☀ 불교에서 나온 말
선근(善根)을 해치는 탐내고(貪欲), 성내고(嗔恚), 어리석은(愚痴) <탐(貪)•진(嗔)•치(癡)라고도 하며
음(淫)•노(怒)•치(癡)라고도 한다> 세 가지 번뇌를 말한다. 삼화(三火)•삼구(三垢)라고도 하고 중생을
괴롭히는 악의 근원이기 때문에 삼불선근(三不善根)이라고 한다.
여기서 독(毒)이라 한 것은『대승의장권5(大乘義章卷五)』에 “삼독이 삼계의 일체 번뇌를 거두며, 일체
번뇌는 능히 중생을 해치므로, 독사(毒蛇)와 같으며, 또 독룡과 같아, 그러므로 용에 비유하고 독이라고
말한다. (차삼독통섭삼계일체번뇌 일체번뇌능해중생 기유독사 역여독룡 시고유룡명위독;此三毒通攝三界一切煩惱 一切燔惱能害衆生 其猶毒死 亦如毒龍 是故喩龍名爲毒) <大正藏 44권 565쪽>
⌾ 부처님 말씀
● 뜻으로 세 가지 업을 짓나니 그것은 곧 탐욕 • 진에 • 우치이다.
『중아함경』
● 십악업(十惡業)이 사라진 궁극적인 상태는 탐•진•치가 사라진 경지이다. 팔정도(八正道)의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지는 탐•진•치가 사라진 상태이다.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단계는 먼저 삼독이
끊어지고 아라한에 이르러 치(어리석음)가 끊어진다. 열반이란 탐욕이 영진(永盡)하고 진에가
영진하고 우치가 영진한 것이니 일체번뇌가 영진한 것을 말한다.
『잡아함경』
●마음에는 세 가지 때가 있다. 탐하여 구하는 욕심, 성을 내고 화를 내는 진심(瞋心), 그리고 미련하여
어리석은 마음이 그것이다. 너희들은 이것에 의한 슬픔과 근심의 근본을 끊어야 한다.
『법화경』
● 대승행을 닦는 보살이 대승을 믿어 수행하는 가운데, 한번만 진심(瞋心)을 내어도 그 죄는 강가의
모래알 같은 겁 동안에 지은 탐욕의 죄보다도 중하다. 진심이 발동하면 중생을 버리게 되는 까닭이다.
비록 탐욕을 범했더라도 천천히 버리게 되면 그 죄는 조금 가볍지만, 만일 진심을 내었으면 아무리
빨리 버리더라도 그 죄는 중한 것이다. 또한 어리석음을 범하더라도 빨리 버리면 그 죄는 조금 가볍다.
삼독의 가볍고 무거움이 이러하므로 수행하는 보살은 마땅히 방편 지혜를 잘 수호하여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방등경』
●비구여, 모두가 불타고 있다, 눈과 마음에서. 눈이 물건에 접촉할 때에 감각에서도 불이 타고 있다.
어떤 불에 의해 타게 되는가? 탐욕의 불, 진심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타고 있다. 눈•귀•코 등의 감각기관의 빛깔•소리•냄새 등의 경계에 접촉하여 감각•지각의 의식을 일으킬 때에 삼독의 불이 일어난다.
이러한 삼독의 불을 떠나면 해탈에 이른다. 『아함경』
⌾ 예화
☀ 두 가지 눈물
“나가세나 존자여,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진리를 사랑하기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이 두 사람 중에서 어는 쪽이 약(藥)이 되고 어느 쪽이 약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왕이시여, 한쪽 눈물에는 탐심과 성냄과 미망(迷妄)에 의해 더러워진 뜨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쪽 눈물에는 기쁨과 즐거움에 넘치는 더러움 없는 냉정함이 있습니다. 대왕이시여, 실로 냉정한 것은 약이
되거니와 뜨거운 것은 약이 되지 못합니다.” 『미린다왕문경』
☀ 두 가지를 다 구하려고
옛날에 어떤 사람이 ‘불과 찬물’ 두 가지를 다 구하려고 했다. 그래서 화로에 불을 담고 재를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다 물을 담은 대야를 올려 놓았다. 얼마 뒤에 불을 쓰려고 하였으나 불은 이미 꺼진 뒤였다.
또 찬물을 쓰려고 하였으나 물은 이미 데워져 있었다. 그리하여 불과 찬물 두 가지를 모두 잃고 말았다. 『백유경』
☀ 모두 잃고 말았으니
옛날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사탕수수를 심으면서 서로 맹세했다. “좋은 종자를 심은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고, 좋지 못한 종자를 심은 자에게는 중한 벌을 주도록 하자”고.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생각했다. ‘사탕수수는 매우 달다. 만약 그 즙을 짜서 그 나무에 도로 주면 그 맛은 다른 것보다
훨씬 달겠지.’ 그는 곧 사탕수수를 눌러 그 즙을 짜서 나무에게 주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 종자만 못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사탕수수를 모두 잃고 말았다. 『백유경』
☀ 나뭇잎과 사자
깊은 산 속에 사자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떤 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더니 바람결에 나뭇잎이 떨어져
사자의 얼굴을 가렸다. 사자는 몹시 노해서 말했다. “어디 두고 봐, 반드시 복수하겠다.”
그런 지 사흘째 되던 날, 한 목수가 수레바퀴를 만들 재목을 얻으려고 산으로 왔다. 사자는 그 앞에
나아가 “이 큰 나무를 베어 가시오.”하고 귀뜸해 주었다. 목수는 그 나무를 베었다. 그 때 베어진 나무가
목수에게 또한 말했다. “사자의 가죽을 바퀴에 입히면 아주 질깁니다.” 목수는 마침내 곁에서 좋아하고
있던 사자까지 잡아버렸다. 『아함경』
☀ 머리가 둘인 새
옛날 설산에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인 새가 살고 있었다. 두 머리의 새 이름은 각각 ‘가루다’와 ‘우바가’라
하였는데, 둘은 언제나 교대로 잠을 자거나 깨어 있게끔 되어 있었다.
하루는 가루다가 깨어 있을 때 바람에 향기로운 꽃이 날라 왔다. 이를 본 가루다는 ‘혼자서 이 꽃을 다
먹는다 할지라도 뱃속에 들어가면 둘이 함께 기운을 얻고 목마름을 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우바가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먹어버렸다.
이윽고 잠이 깬 우바가는 이 사실을 알고 못내 섭섭하고 분한 마음을 누를 길 없었다. 얼마 후 문득
하나의 독을 품은 꽃을 보게 되었을 때 전날의 일을 떠올리며 가루다는 생각했다. ‘전에 너는 맛있는 꽃을 혼자 먹었지. 이 독한 꽃잎을 혼자 먹을테니 어디 두고 봐라.’ 그리하여 가루다가 잠 든 사이에 우바가는
그 독을 품은 꽃잎을 먹고 말았다. 괴로움에 잠을 깬 가루다는 이 사실을 알고 탄식했다.
“너는 어찌 이리도 어리석으냐. 독한 꽃잎을 먹는 것은 우리 둘 다를 죽게 하는 일인 줄을 모르다니!”
그리고 우바가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머리가 둘인 새는 고통속에 신음하며 함께 죽고 말았다.
☀ 어리석은 부자
돈 많은 부자가 있었다. 어느 날 길을 가다 높고 아름다운 삼층집을 보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가진
내가 저렇게 훌륭한 집 지을 생각을 아직 못했을까?’ 부자는 목수를 찾아 말했다.
“저 훌륭한 집처럼 똑같이 집을 지을 수 있겠나?”
“그 집은 제가 지은 집입니다.”
“그러면 저 집보다 더 훌륭한 삼층집을 빨리 지어 주게.”
목수는 서둘러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윽고 터를 닦아 기초를 세우고 일층을 세우고 있는 그를 보고
부자는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니, 뭘 하고 있는 거요! 나는 삼층만이 필요할 뿐이요. 일층과 이층은 필요 없으니, 빨리 훌륭한
삼층만을 지어달란 말이요.”
목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백유경』
☀ 우유와 잔치
한 사람이 잔치를 치르기 위해 손님들에게 대접할 우유를 열심히 짜 모으고 있었다. 우유를 열심히
짜 모으던 주인은 생각했다.
‘날마다 짜 모으려면 우유를 담아 놓을 그릇도 마땅치 않고 그 맛도 변할 것이다. 아예 소 뱃속에 많이
고이도록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짜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드디어 잔칫날이 돌아왔다.
그는 큰 기대에 부풀어 소의 젖을 짜려고 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젖을 짜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하여도 젖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따로 떼어 놓고 있던 송아지마저도 병들고 말았다. 『백유경』
☀ 황금 거위알
매일 한 개씩 황금알을 낳는 신기한 거위 한 마리를 한 사나이가 키우고 있었다. ‘한 알씩은 시시하다.
세 알이라도 낳아야 괜찮은데’라고 사나이는 문득 생각하다가 ‘차라리 한 번에 모두 받아내자꾸나’라는
생각이 들자 급히 거위 목을 쥐고 깃털을 잡아 뜯고 그 배를 갈라 보았다. 그러나 단 할 알도 들어있지
않았다.
☀ 장수하는 비결
98세가 되도록 아직까지 약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노파에게 장수하는 비결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노파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첫번째는 음식에 주의를 하는 것입니다. 배가 부르도록 먹지 않을 것, 그리고 잘 씹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을 많이 하여 몸을 자주 쓰면 자연히 건강해져서 장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얘기했다.
“저희 아버님은 궁전의 요리사를 지낸 분으로 어떤 새든지 요리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새들은 뱃속을 살펴보면 이것저것이 가득 차 있었지만 오직 학만은 기특하게도 가득 차
있는 적이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학은 천 년을 산다고 할 정도로 장수하는 새인데, 그것은 과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 요지
현대인은 탐욕과 야망을 혼동하여 탐욕이 없이는 출세할 수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즉 삼독심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는 말이다. 그래서 삼독을 부정하는 불교를 소극적ㆍ염세적ㆍ
비관적이라고 규정한다. 탐ㆍ진ㆍ치가 멸한 인간은 가장 정확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분노가 일지 않는 고요한 마음에서, 어리석음이 가신 지혜에 의해 현실에
일어나는 갖가지 일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그 지도력은 매우 훌륭할 수 있다.
즉 불교에서 탐ㆍ진ㆍ치를 멸하고자 출가를 권유하고 수행을 하는 것은 그러한 인격의 경지를 이루어
보다 안정된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소극적•적극적이라는 개념을 떠나 차원이 다른
인간사회의 지도자적인 길인 것이다. 탐ㆍ진ㆍ치가 없다고 해서 대승(大乘)의 큰 뜻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중생 구제의 원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개인적 인간의 행복이 소흘해지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도 이 세 가지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자만이 인간의 제반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것은 끝없이 끓어오르는 욕망의 불꽃이지, 결코 마음없는 돌이나 무생물처럼
되라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삼독의 극복이 근본이며 불교에서는 이것을 세 가지 배움(三學; 戒ㆍ定ㆍ慧)으로 대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42. 삼동결제방 (三冬結制榜)
증명(證明): 부처님을 대신하는 큰스님.
회주(會主): 이 모임의 주인격이 되는 큰스님.
선덕(禪德): 덕이 높은 분으로 대중의 대표격이 되는 스님.
병법(秉法): 법도와 의식 절차에 밝은 스님.
어산(魚山): 의식과 범패를 집행하는 스님.
범패(梵唄): 주로 범패에 능숙한 스님.
지전(持殿): 법당과 부처님을 시봉하는 스님.
창불(唱佛): 모든 의식이 있을 때 앞에서 먼저 소리를 내는 스님
집금(執金): 의식 집행에 있어 지휘적인 스님.
헌향(獻香): 향로와 향에 대한 책임자.
봉차(奉茶): 다기와 차에 대한 책임자.
간당(看堂): 집안을 항상 살피는 책임자
송자(頌子): 모든 의식에 있어 게송을 범패로 부르는 책임자
시자(侍者): 큰스님 곁이나 대중의 시봉을 맡은 책임자
간병(看病): 병이 난 스님을 수호하는 책임자
종두(鐘頭): 대중의 명령을 집행하는 책임자
판수(判首): 좌석이나 질서를 담장하는 책임자
표백(表白): 대중에게 통고하는 책임자
통알(通謁): 대중 일동이 세배할 때 선두에서 선창하는 책임자
시식(施食): 영가에게 공양드리는 의식 책임자
헌식(獻食): 시식대에 나아가 무주고혼에게 공양시키는 책임자
대령(對靈): 영가를 맞이하는 의식의 책임자
정통(淨桶): 대중의 손 씻을 물을 준비하고 깨끗이 소제하는 책임자
화대(火臺): 땔감과 불에 대한 책임자
지배(地排): 마당 쓸고 도량을 청소하는 책임자
서기(書記): 장부를 맡아 처리하는 책임자
도감(都監): 살림살이 전부를 감찰하는 책임자
별좌(別座): 사중 음식과 기물을 관장하는 책임자
찰중(察衆): 대중의 동태를 살피는 책임자
입승(入繩): 모든 법규와 질서를 확립시키는 책임자
유나(維那): 기율과 법도를 총히 관장하여 지휘하는 책임자
243. 삼법인(三法印)
부처님이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를 세 가지로 요약하여
이를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법(法)이란 범어 다르마(Dharma)를 의역한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인(印)이란 도장을 찍는다는 뜻으로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다.
삼법인(三法印)이란, 불교의 교의를 크게 세 가지의 관점에서 본 것인데 제행무상(諸行無常)ㆍ
제법무아(諸法無我)ㆍ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위의 열반적정 대신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넣어 삼법인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일체개고에 대해서는
사성제중 고성제(苦聖諦)를 참고하면 된다.
1) 제행무상인 (諸行無常印)
제행은 일체 생멸, 변화하는 모든 현상, 즉 유위법(有爲法)을 가리킨다. 모든 법(法)은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 나누는데, 유위법이란 인연으로 생겨서 생멸, 변화하는 물심(物心)의 현상을 말하며, 무위법이란 사상(四相, 生住滅離)의 변천이 없는 법(法)의 진실체를 말한다.
무상(無常)이란 항상 그대로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행무상은 모든 것은 항상 그대로 있지
않다고 하는 진리이다.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네 가지 모습으로 잠시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의 육신은
생노병사(生老病死)하며 정신 또한 생주이멸(生住離滅)을 되풀이 하고 있다.
이처럼 찰나(1/75초)간에도 변화하는 존재의 법칙이 바로 제행무상이다.
2) 제법무아인 (諸法無我印)
제법(諸法)이란 일체 모든 법(存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란 일체법에는 절대적인
내(我)가 없다는 뜻이다.
왜 일체법에는 내가 없느냐 하면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서로의 상관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아(無我)란 단순히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단지 인연에 따라 어느 한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 변해 가는 ‘변화하는 과정의 나’일 뿐이다.
3)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열반적정이란 온갖 번뇌로부터 벗어나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無常), 나라고 집착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無我)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이상적인 면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깨달음의 세계요, 부처님의 세계이다. 이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한다. 열반이란 니르바나(nirvana)라는 범어의 음역으로 한자로는 멸(滅), 적멸(寂滅), 멸도(滅度), 적(寂)이라고 한다.
그 뜻은 해탈(解脫)과도 같은 것으로 활활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완전히 꺼버리고, 깨달음
즉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강좌85쪽, 대안스님, 보광출판사>
244. 삼보, 삼승 (三寶, rantna-traya),(三乘)
삼보(三寶)란 세 가지 보배라는 뜻으로 깨달음을 연 부처님(Buddha)과 그 가르침인 법(Dharma)과
그것을 받드는 승가(Samgha)를 말하며, 불교를 구성하는 3가지 중요한 요소로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불자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불(佛)은 우주와 진리와 인생(人生)의 참다운 모습을 깨닫고 이에 의해서 다른 이를 가르쳐 인도하는
각자(覺者)로 불교의 교주(敎主), 법(法)은 그 불타가 스스로의 깨달음에 바탕하여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 설한 교(敎), 승(僧)은 그 법에 따라 수학(修學)하는 부처님의 제자 집단이다.
이 셋은 거룩하고 최상의 위덕(威德)이 있어 변하지 않으므로
세속의 보배와 같기 때문에 보(寶)라고 한다.
삼보의 종류에는 별상삼보(別相三寶), 동체삼보(同體三寶), 주지삼보(住持三寶)가 있으며
이를 삼종삼보라 한다.
☀ 삼승(三乘)
삼승은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에 대한 세 가지 교법(敎法)을 말하는 것으로 승(乘)은
짐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말한다.
① 성문(聲聞):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지만 자기 혼자만 해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출가자를 말한다. 또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제(四諦)의 가르침에 따라, 이를 관(觀)하여 해탈을 얻는
사람들이다.
② 연각(緣覺): 독각(獨覺)ㆍ벽지불(辟支弗)등으로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도를 깨달은 이로, 고요한 장소와 고독을 좋아할 뿐 설법 교화하지 않는 성자.
③ 보살(菩薩): 보리살타(菩提薩陀)라고도 하며, 도중생(道衆生)ㆍ각유정(覺有情)이라고 번역한다.
또한 무상보리를 구하여 중생을 이익케 하고, 모든 바라밀(波羅蜜)의 행을 닦아서 미래에 불타의
깨달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
245. 삼보륜, 원이삼점 (三寶輪,圓伊三點)
'원이삼점(圓伊三點)'은 보통 사찰의 지붕 합각에 그려진 것으로 큰 원에 점 세 개를 그린 것을 말한다.
이는 이자삼점(伊字三點)이라고도 말한다.
실담의 이자(伊字)는 3점으로 이루어지고, 이들 3점이 세로줄도 가로줄도 아닌 형태(形態)이므로,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이 원이삼점(圓伊三點)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多樣)한 설명이 있다.
먼저 원이삼점을 둘러싸고 있는 큰 원은 ‘우주법계(宇宙法界)’를 나타낸다고도 하고, 또 다른 설명으로는 큰 원은 ‘원융(圓融)’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원융이란 걸리고 편벽(偏僻)됨이 없이 모든 것에 가득하고 만족(滿足)하며, 완전히 일체가 되어서 서로 융합(融合)하므로 방해(妨害)됨이 없는 것을 뜻한다.
① 안에 위치한 세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있다.
● 이 세 점은 각기 佛ㆍ法ㆍ僧의 삼보를 상징한다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를 삼보륜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 이 세 점은 각기 제행무상ㆍ제법무아ㆍ열반적정의 삼법인을 상징한다고도 설명한다.
그래서 각기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하지도 않으며, 모두 평등하고 서로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② 이 세 점은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三身佛)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상징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법신, 보신, 화신이 합하여 일체로 상관(相關)된 경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 법신(法身)은 해탈의 법인 진리 자체를 뜻한다.
● 보신(報身)은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공덕(功德)이 갖추어진 불신 (佛身)을 뜻한다.
● 화신(化身)은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 특정(特定)한 시간과 장 소에서 나투시는 모습으로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법신, 보신, 화신은 그 어느 것이든 하나 하나가 따로 떨어져서 단독으로는 열반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이 원이삼점(圓伊三點)은 이 세 가지 법이 일체로 상관된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비밀장(秘密藏)이라고도 한다.
246. 삼사칠증 (三師七證) ☀불교에서 나온 말
비구, 비구니(比丘,比丘尼)의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경우 스승으로 청해야 하는 스님의 수를 말한다.
삼사(三師)란 옳은 계(戒)를 주는 전계아사리(傳戒師),
표백(表白) 및 갈마(羯磨)의 글을 교수하는 갈마아사리(羯磨師),
위의작법(威儀作法)을 교수(敎授)하는 교수아사리(敎授師)를 말하고
칠증사(七證師)란 증명(證明)하는 7명의 증명아사리(證明師:立會比丘)를
말한다.
247. 삼십일비불 (三十日秘佛)
매월 1일부터 30일에 이르기까지 그 당일의 연일불(緣日佛)을 말한다. 불문에 들어올 인연이 있는 날
또는 신불(信佛)에 어떠한 연(緣)이 있어 제사(祭祀)나 공양이 있는 날을 말하며 신불(信佛)에 임시로
명일(命日)을 정하고, 그 날에 참예(參詣)하면 공덕이 있다고 한 달에 한번이나 수일을 정해서
연일(緣日)로 한다.
1일 정광불(定光佛) 2일 연등불(蓮燈佛)
3일 다보불(多寶佛) 4일 아촉불(阿촉佛) 閃?
5일 미륵보살(彌勒菩薩) 6일 이만등불(二萬燈佛)
7일 삼만등불(三萬燈佛) 8일 약사여래(藥師如來)
9일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 10일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
11일 환희불(歡喜佛) 12일 난승여래(難勝如來)
13일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 14일 보현보살(普賢菩薩)
15일 아미타불(阿彌陀佛) 16일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
17일 용수보살(龍樹菩薩) 18일 지장보살(地藏菩薩)
19일 일광보살(日光菩薩) 20일 월광보살(月光菩薩)
21일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 22일 시무외보살(施無畏菩薩)
23일 득대세지보살(得大勢至菩薩)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25일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26일 약상보살(藥上菩薩)
27일 노사나여래(盧遮那如來) 28일 대일여래(大日如來)
29일 약왕보살(藥王菩薩) 30일 석가여래(釋迦如來)
248. 삼십칠 조도품 (三十七助道品)
대승(大乘)·소승(小乘)을 통틀어 깨달음에 드는 수행을 삼십칠(三十七)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를 三十七도품(道品) 또는 三十七조도품(助道品) ·三十七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 함.
五근(根)ㆍ五력(力)ㆍ七각지(覺支)ㆍ八정도(正道)ㆍ四념처(念處)ㆍ四정정근 (正精勤)ㆍ
四여의족(如意足) 등이다
☀ 五根 (오근)
1.신(信): 삼보와 인과의 도리를 믿는 것.
2.정진(精進): 애써 수행함.
3.염(念): 항상 바른 도리를 억념(憶念)하는 것.
4.정(定):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정신 통일하는 것.
5.혜(慧): 지혜로써 도리에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은 번뇌를 누르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뛰어난 작용이 있기 때문 에 根(근)이라함.
☀ 五力 (오력) : 오근(根)을 통해 오력이 생긴다.
1.꾸준히 노력하면 신앙의 힘이 생기고(신력:信力)ㆍ
2.정진의 힘이 생기고(정진력:精進力)ㆍ
3.인욕의 힘이 생기고(염력:念力)ㆍ
4.선정의 힘이 생기고(정력:定力)ㆍ
5.그리고 지혜의 힘이 생긴다(혜력:慧力) 이것을 오력이라 하며,
능히 악(惡)을 없애는 힘이 있음을 말한다.
☀ 七覺支 (칠각지)
七菩提分(칠보리분)라고도 함. 도(道)를 닦을 때 그 진위(眞僞)를 구분하는 데 칠종이 있음을 말함.
1.택법각분(擇法覺分): 법의 진위(眞僞)를 간택함. 모든 법 가운데서 선악 을 구분하여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는 것을 말한다.
2.정진각분(精進覺分): 정법(正法)에 의하여 힘써 노력함. 여러 가지 수행 을 하는 가운데서도 쓸데없는
고행은 그만 두고 바른 도에만 전력투 구해 나가는 것이다.
3.희각분(喜覺分): 진정한 법열(法悅)을 느낌. 참된 법을 알아서 기뻐하는 것이다.
4.제각분(除覺分): 그릇됨을 없앰. 그릇된 견해나 번뇌를 하고 능히 참되고 거짓된 것을 알아서
올바른 선근을 기르는 것이다.
5.사(捨): 들뜨는 마음을 버릴 것. 바깥 경계에 접착하던 마음을 여윌 때에 거짓되고 참되지 못한 것을
추억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6.정각분(定覺分): 선정에 들어 망념(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7.염각분(念覺分): 진리를 계속 상념하여 마음의 평정을 갖는 것. 불도를
수행함에 선정과 지혜를 관계하는 것이다.
☀ 八聖道分 (팔성도분): 팔정도(正道)라고도 함.
1.정견(正見): (바르게 보고) 사제(諦)의 도리를 분명히 알고 바른 견해를 갖는 것.
2.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四제의 도리에 입각하여 생각하는 것.
3.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고) 바른 말을 하는 것.
4.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고) 바른 행위를 하는 것.
5.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고) 바른 생활을 하는 것.
6.정정진(正精進): (바르게 노력하고) 바른 정진을 함.
7.정념(正念): (바른 생각을 일념으로 유지하며) 끊임없이 바른 도리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8.정정(正定): (바르게 선정하고) 마음을 도리에 안주하게 하여 흐트러지 지 않음.
☀ 四念處 (사념처)
1. 신념처(身念處): 몸은 부정하고(身不淨),
2. 수념처(受念處): 받는 것은 고통이며(受是苦),
3. 심념처(心念處): 마음은 무상하고(心無常),
4. 법념처(法念處): 법에는 내가 없다(法無我).
☀ 四正精勤 (사정정근) ‘정근’이란 부지런히 바르게 노력한다는 말이다.
1. 이미 생긴 악을 없애려고 부지런히 참회하고 그것을 꺾어 누르려고 힘 쓰는 것을 말한다
(기생악 금영단:己生惡 今永斷).
2.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이 나타나기 전에 그것을 방지하려고 미리 공덕과 선행을 닦아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미생악 금불생:未生惡 今不生).
3. 이미 자기에게 나타난 선업은 더욱 더 빨라 자라나게 하려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기생선 증장;己生善 增長).
4.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선의 씨앗을 빨리 싹틔우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미생선 금생:未生善 今生).
☀ 四如意足 (사여의족)
사여의족은 네 가지의 불가사의한 능력이다. 다른 말로 사신족(四神足)이라 한다. 여의(如意)는 뜻대로
자유자재한 신통을 말하며, 족(足)은 신통이 일어나는 각족(脚足)이 되는 뜻으로 여의족이라 한다.
1. 욕여의족(欲如意足)이다. 수승한 선정을 얻으려고 간절하게 염원하는 것이고,
2. 정진여의족(精進如意足)이다. 쉬지 않고 한결같이 나아가고자 하는 것 이며,
3. 심여의족(心如意足)이다. 염력으로 선정에 들어 신통을 얻으려 염원하 는 것이고,
4. 사유여의족(思惟如意足)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선정에 드신 그 법을 의 지하여 마음으로 한없는
평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249. 삼악도 (三惡道, durgati)
3종의 나쁜 세계의 뜻으로 즉 악업에 의해 생겨나는 지옥과 아귀와 축생의 3가지 싫어해야 할 세계이다.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이다. 삼악취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의 삼도처를 말한다.
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악한 곳을 말한다.
① 지옥(地獄): 중생들이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특 별히 땅속 감옥의 대표격으로
보통 지옥이라 한다. 8가지, 10가지 등으로 나눈다.
② 아귀(餓鬼): 아귀란 ‘배고픈 귀신’이란 뜻이다. 배는 태산처럼 큰데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작아
비록 음식이 있다해도 먹지를 못해 항상 배고픔을 면치 못하고 굶주린다.
③ 축생(畜生): 벌레나 네발짐승, 날짐승, 물고기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무려 34억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공중, 물 속, 육지의 세 곳 에 각기 나누어 살고 있다고 한다.
250. 삼요경 (三要經)
3요경(三要經)이란 세 가지 중요한 경전을 모아놓은 경전인데,
예를 들면 정토종의
정토삼부경 :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미륵정토삼부경 : (상생경, 하생경, 성불경),
법화삼부경 : (무량의경, 법화경, 보현관경) 같은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금강경> <원각경> <관음경> 같은 것을 넣어 3요경(三要經)이라 부르기도 한다.
251. 삼재팔난 (三災八難)
불교적인 삼재는 ‘아함경’에서 말하기를 삼재를 세 가지 재앙으로 말하는데, 이는 "말법시대가 되어
생기는 일체재앙" 을 말하며, 경에서는 삼재를 대삼재와 소삼재로 나누어
“대삼재”는 풍재(風災), 화재(火災), 수재(水災)의 자연의 삼재를 말하고,
“소삼재”는 전쟁(戰爭). 질병(疾病). 기근(饑饉) 등 인재가 있다고 말한다,
풍재(風災)는 바람으로 인해 일어나는 재앙,
화재(火災)는 불로 인해 일어나는 재앙,
수재(水災)는 물로 인해 일어나는 재앙이다.
또 다른 뜻으로의 삼재 즉 천재(天災)), 지재(地災), 인재(人災)
천재(天災)는 하늘로 인한 재앙으로 지구온난화, 해일. 홍수, 가뭄, 폭설, 태풍에 따른 재산손실,
인명피해 등을 말한다.
지재(地災)는 땅으로 인한 재앙으로 사막화, 공해, 화재, 대지진, 항공, 해상, 교통사고 등에 의한
재산손실, 인명피해 등이다.
인재(人災)는 사람으로 인한 재앙인데 자살, 전쟁, 대립, 종교간 갈등, 노사분쟁, 부부불화, 우울증,
빙의(憑依), 성폭행, 청소년범죄, 성매 매, 술, 도박, 마약, 사기, 송사(訟事), 도적, 음독자살 등을
말한다.
그 외 도병(刀兵) 으로 인한 사망, 사상, 인명손실 그리고 기근으로 인한 어린이. 노약자, 빈민, 역질(疫疾), 사망. 생태교란, 각종 동식물의 질역(疾疫) 등의 유행이 삼재에 포함된다.
다음으로 팔난(八難)에는
배고픔, 목마름, 추위, 더위, 물, 불, 칼, 병란(兵亂)의 여덟 가지의 재난 이 있다.
☀ 불교 팔난
부처님을 뵙지 못하고, 불법을 들을 수 없는 경계의 8가지 종류.
① 지옥 ② 아귀 ③ 축생 ④ 장수천(長壽天:장수를 즐겨 구도심을 일으키기 않는다)
⑤ 변지(邊地:이곳은 즐거움이 많음) ⑥ 맹롱음아(盲聾瘖瘂: 감각 기관에 결함이 있기 때문)
⑦ 세지변총(世智辯聰: 세속의 지혜가 뛰어나 정리(正理)에 따르지 않음)
⑧ 불전불후(佛前不後: 부처님이 세상에 안 계실 때 세상에 태어 남)
즉 불교적인 팔난은 부처님을 보고 불법의 진리를 듣는데 장애가 되는 여덟 가지를 뜻한다.
결국 삼재팔난이란 인간세상의 크고 작은 온갖 고통을 말한다. 대체로 삼재는 천재지변을,
팔난은 중생으로서 부처님을 만나지 못해서 불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첫째 재지옥난(在地獄難)으로 지옥에 처한 경우와
둘째 재축생난(在畜生難)으로 짐승의 몸을 받은 경우,
셋째 재아귀난(在餓鬼難)은 주린 귀신이 되었을 경우와
넷째 재장수천(在長壽天)은 장수천에 났을 경우,
다섯째 재울단월난(在鬱單越難)은 울단월국토에 사는 중생인 경우와
여섯째 세지변총난(世智辯聰難)은 세상지식에 너무 팔려있는 경우,
일곱째 농맹음아난(聾盲音啞難)은 귀 먹고 눈 멀고 벙어리인 경우와
여덟째 불전불후난(佛前佛後難)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기 전이나 가신 지 오랜 후의 경우 이다.
또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장애도 있다.
1.장위난(長爲難): 지도자 스승의 지도력 부재로 인한 장애
2.동위난(同爲難): 가족 동료 이웃의 불협화음으로 인한 장애
3.심위난(心爲難): 갈등, 갈애, 허덕이는 마음으로 인한 장애
4.덕위난(德爲難): 하는 일마다 주위 사람에게 욕만 듣는 장애
5.복위난(福爲難): 경제의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장애
6.신위난(身爲難): 육신의 장애로 불편함을 느끼는 장애
7.우위난(友爲難): 친구가 없어 외로움을 느끼는 장애
8.고위난(苦爲難): 마음이나 육신의 고통이 많은 장애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이런 삼재팔난이 들었을 때 어떻게 면해야 하는 것인지가 중요하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마음이 곧 욕심(貪)이다. 그리고 노여움(瞋),
어리석음(癡)이 있다. 이걸 삼독 심(三毒心)이라 한다. 결국 탐, 진, 치 삼독으로 인하여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이 쌓이고 삼업으로 인하여 언젠가는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 원리가 삼재팔난이다.
삼재팔난을 면하는 방법으로 부처님께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제시하였다. 이 네 가지 무량심이란
중생을 차별하지 아니하려는 부처의 마음을 이르는 것이다. 중생에게 헤아릴 수 없는 복을 주는 네 가지 이타(利他)의 마음이다.
즉 즐거움을 베풀고자 하는 자무량심(慈無量心),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비무량심(悲無量心),
중생이 행복을 얻는 것을 기뻐하는 희무량심(喜無量心),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의 마음을 버리고 평등하게 대하는
사무량심(捨無量心)을 말하는 것이다.
곧, 이 네 가지 요소는 무한의식을 쓰는 생명의 본질인 불성(佛性)을 말하는 것이다. 내면에 공유되어
있고, 우주세계에 본유(本有)되어 있는, 이러한 사무량심의 본성을 잘 내어 쓰기만 한다면, 자기 자신이
더욱더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 또한 더욱더 행복하게 만들어 결국 우리는 삼재팔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좋은 네 가지 인연이 있는데 그것을 사연(四緣)이라 한다.
친근선우(親近善友 : 어질고 좋은 벗을 가까이 하는 것)
신문정법(親聞正法 : 항상 바른 법을 가까이 듣는 것)
사유기의(思惟其意 : 정법을 듣고는 그 뜻을 잘 생각하는 것)
여설수행(如說修行 : 설법과 같이 잘 수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삼재팔난을 겪는 것도 알고 보면 스스로 나쁜 업을 지은 결과다.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수자작(自受自作)이다. 그러므로 삼재팔난을 받을 것을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 달게 받으며
악업을 짓지 아니하고 이 ‘사무량심’을 닦아 가면 된다.
252. 삼학 (三學, 梵語 trini-siksani)
삼학(三學)은 불교를 배워 도를 깨달으려는 이가 반드시 닦아야 할 세 가지 즉 계율, 선정, 지혜의
준말로서 계(戒)ㆍ정(定)ㆍ혜(慧)를 말한다. 계(戒)는 신ㆍ구ㆍ의로 범하는 나쁜 짓을 방지하는 것이고,
정(定)은 산란한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하는 것이고, 혜(慧)는 감(感)을 깨뜨리고 진리를 깨닫기 위한
사제(四諦), 십이인연 또는 진여, 실상을 관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ㆍ정ㆍ혜 삼학은 실천 방면에서도
불교의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된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도와 증과(證果)를 얻는 것이므로 계(戒)에 의하여 정(定)을 얻고, 정(定)에 의하여
지혜(智慧)를 얻는다.
① 계학(戒學)
계(戒)는 한자(漢字)는 ‘경계한다’ 는 말인데 행위, 습관, 성격 등의 뜻을 가졌다. 그러므로 삼학 가운데
계학(戒學)은 바른 행위, 바른 습관, 바른 성격 등을 배운다고 하는 뜻이 있다.
좋은 습관을 익히는 것을 선계(善戒)라 하고 나쁜 습관을 익히는 것을 악계(惡戒)하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계(戒)라고 하면 깨끗하고 선(善)한 습관 곧, 선계만을 가리킨다.
계(戒)는 불자들이 지켜야 할 올바른 생활규범이다. 계(戒)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릇된 곳에서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형식적인 계목이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습관을 갖도록 노력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오계는 첫째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둘째 도둑질하지 말라(不偸盜). 셋째 사음하지
말라(不邪淫), 넷째 망어하지 말라(不妄語). 다섯째 술 마시지 말라(不飮酒)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누구를 스승 삼아서 공부하오리까?” 하고 묻자 “계(戒)를 스승 삼아
공부하라” 하셨다. 남에게 해로움을 주면서 행복을 바라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불교인은
누구나 계(戒)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계(戒)를 지키는데 있어서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육조 스님은 ‘심지무상계(心地無相戒)’ 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마음에 그릇됨 없는 것이 참다운 계(戒)’ 라는 뜻이다.
② 정학 (定學)
정(定)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서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범어로는 삼마디(samadhi) 라고 하는데 음역하여 삼매라고 한다. 팔정도의 하나인 정정(正定)과 같은 것으로 선정이란
말과도 같은 뜻으로 쓰인다.
정(定)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일종의 정신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함으로써 자기의 본 마음을 찾으려는 것이 참선이다. 참선은 선정을 위해서
가장 좋은 수행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꼭 참선만 해야 정학을 닦는 것은 아니다.
염불을 열심히 하여 염불 삼매에 들어서 정(定)을 닦을 수도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목표는 하나이다.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음으로써, 마음을 번뇌로부터
해방시켜 본래부터 간직하고 있는 불성을 찾아내려는 수행이 바로 정학이다.
③ 혜학(慧學)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어리석은 범부 노릇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왜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가 있는데도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지혜가 있되
그 지혜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 망상, 뒤바뀐 생각,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바로 부처님과 다름없이 한량없는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다.
계를 지키고, 정을 닦는 것도 다름 아닌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개발하여 유익하게 활용하자는 것이다.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분수를 알고, 사물의 이치를 바로 보고,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이런 수행을 쌓아가는 것이 바로 혜학이다.
계ㆍ정ㆍ혜는 각각 수행이기보다는 계(戒)를 닦음으로써 정(定)이 생기고 정(定)을 닦음으로써
혜(慧)가 생기고 혜(慧)를 닦음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이 계ㆍ정ㆍ혜 삼학은 불교수행(佛敎修行)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 덕목이다.
253. 상당 (上堂)
흔히 만날 수 있는 선(禪) 용어 중 하나가 상당(上堂)이다. 어느 날 임제선사나 조주선사가 상당했다는
문구를 흔히 만날 수 있다.
상당(上堂)의 원래 의미는 선종사찰의 제일 큰 어른 선지식인 조실스님이 법당에 올라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이다.
법상에 오른 선사는 많은 대중들 앞에 화두를 펼쳐놓고 법거량을 시작한다. 상당(上堂)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대중들이 인정할 수 있는 큰 선지식일 때 가능하다. 상당(上堂)한 선사는 수많은 대중들로부터 무차별적인 문답을 해야 하고 또한 그동안 공부한 것을 점검해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상당한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의식을 동반해야한다. 잘못하면 수많은 대중들의 공부를
물거품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무간지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상당(上堂)하기를 꺼렸다.
많은 선사들이 법상에 올라 법거량을 하며 이렇게 외쳤다.
‘이 도리를 아는 대중은 일러 보라’
이 문답과 화두를 깨트리는 수승한 선사들이 나타나면 그 선사는 아무 말 없이 상당(上堂)했던 자리를
말없이 양보하고 처소로 돌아간 경우를 우리는 왕왕 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상당(上堂)은 가장 권위 있는 곳이며 가장 열려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곳에 잘못 들어간다면 곧 무간지옥에 빠질 수 있는 가장 위험천만한 곳이기도 하다.
254. 상속 (相續) ☀불교에서 나온 말
범어 ‘samtana' 의 번역으로, 본뜻은 항상 변화하는 연속적 개체라는 뜻이며 개체의 연속을 의미한다.
원인(原因)은 결과(結果)를 낳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낳아 원인과 결과가 차례로
연속해서 끊어지지 않는 상태 그것이 바로 상속(相續)인 것이다.
불교 용어 가운데에는 사람의 죽음 혹은 등불이 꺼지듯이 한동안 상속(相續)하던 법(法)이 결국
없어지고 마는 것을 ‘상속무상(相續無常)’이라 하며 연속적으로 일어나 단절함이 없음을
‘상속부단(相續不斷)’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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