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 그분이 부르는 노래를 들은 것은 다음 해인 2004년 9월 21일 배론 성지에서였다. 그날 원주교구 신앙대회가 있었고, 나는 성지에서 주관하는 피정강의를 맡았었다. 강의 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는 감사미사에서 특송을 부르고, 이어지는 저녁식사에도 초대되었다. 그 즈음은 내 생애를 통해 가장 어둡고 혹독한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건강을 돌보지 않은 채 지치도록 일을 하여 연일 과로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생태보전과 인권회복이라는 두 가지 사회운동에 투신하게 되었고, 결과는 체력소진으로 인한 판정패였다.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무조건 쉬어야한다는 의사의 처방이 있었지만, 전혀 쉬지 못한 채 심한 불면증과 갱년기 우울증으로 4년간이나 병원치료를 받았다. 체중이 10Kg 이상 줄었을 만큼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하던 일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했는데, 그 때 견뎌냈던 시간들의 기억은 아마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엄청난 고통 끝에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삶이란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고, 신앙이란 견뎌내는 시간 속에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감사로움을 늘 새로운 마음으로 거듭거듭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래와 삶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식을 나누고 고취시키는 방식의 「인권회복을 위한 김정식의 노래마당」은 때로 거칠거나 투쟁 일변도였던 사회운동 판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사회운동방식의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2000년 봄에 준비하여 명동성당에서부터 시작하여 전국투어로 계획된 「인권회복을 위한 김정식의 노래마당」과 다음 해부터 시작된 「새만금갯벌을 살리기 위한 김정식의 노래마당」이 그것이다. 모두가 온힘을 다해 애를 썼는데도 갯벌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그토록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모두의 가슴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인권회복운동에 불을 지핀 것은,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이도행을 생각하는 모임」이 구심점이 되어주었다. 1995년에 있었던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과 무죄를 넘나들며 죽음과 지옥을 체험하고 있던 한 형제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모임이 생겼고, 평소 사형폐지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왔던 김수환 추기경은 이 모임에서 진행하는 미사에 자주 함께하셔서, 미사 중 강론을 통해 잘못된 제도와 관행으로 고통 받는 억울한 사법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촉구하였다. 국가가 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때에는 반드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물증 없이 정황증거만으로 억울하게 죄인이 된 이들을 위해 사법부의 증거재판주의 원칙을 거듭 천명하였다. 그분의 열망과 이 모임에 동참하는 많은 분들의 바람이 열매를 맺어,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한 생명의 회생이 가능해졌다. 7년 8개월간 사형과 무죄를 넘나들다 대법원의 마지막 재상고심에서 전례를
깨고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한국판 오제이 심슨 사건’이라고 까지 일컬어진 이 사건의 피해자와 용의자 가족 둘 다 나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고 한쪽은 바로 이웃집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이웃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한 「인권회복을 위한 김정식의 노래마당」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사형폐지, 국가보안법 폐지, 군의문사, 인혁당 사건, 비전향 장기수, 윤금이 살해사건 등 당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인권회복이 필요한 모든 상황을 두루 살피고 끌어안아서, 보다 많은 이웃들이 복음 안에 깨어 살 수 있게 돕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런 운동 판의 심장과도 같아서, 자칫 지치기 쉬운 우리에게 따스한 피를 펌프처럼 수혈해주셨다. 우리 시대에 가장 아프고 소외받는 사람들과 억울하게 누명을 쓴 채 살거나 혹은 죽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당사자들은 물론 모두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신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되거나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해방과 구원의 문을 열어준 예수와 온전히 하나 되는 삶이라고 여겨진다.
바깥 사회적으로나 나의 내면이나 두루 고통이었던 시간을 어렵게 견뎌내고 있을 때, 뜻밖의 장소에서 듣는 그 노래는 또 다시 내게 깊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날 배론 성지에는 원주교구 신자가 다 모인 듯 했다. 그 큰 성당이 자리가 모자라 앞쪽으로는 보조의자를 놓고 않거나 아예 바닥에 앉기도 했다.
<영성체 후 묵상노래>를 부르도록 초대된 나는「호수」를 불렀다.
호수가 산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다 우리가 주님을 안을 수 있는 것은 가슴이 넓어서가 아니라 영혼이 맑아서이다. 오! 주님. 내 영혼 맑게 하소서.
(유경환 시/김정식 곡「호수」전문)
눈을 감으신 채 듣고 계시던 추기경님께서 미사를 계속하기 위해 나오셨다가 눈물을 훔치셨다. “제가 이제 나이가 많아서 다시 여러분과 미사를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많으신데, 우리가 언제 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부디 아프지 마시고 몸 건강히 사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한 곡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저기서 아까 묵상노래를 불러주셨던 김정식 씨가 만든 노래입니다.”
당신 또한 이미 노인반열에 드셨기에 노인들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바람을 하시면서, 또 다시 ‘되게 못 부르는 노래’가 5분간 이어졌다. 두어 소절 부르신 다음부터 내가 가만히 기타 반주로 맞추어 갔다. 삶과 정신을 실어 온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의 느낌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나도 그분의 노래 속으로 들어갔다. 노래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불현듯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그분의 노래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그날 그곳에 모인 분들은 모두 눈시울을 적시는 감동과 은혜를 체험했을 것이고, 이번에 그분의 선종을 남다른 감회로 만나셨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늙고 병들어 힘없는 노인들,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누명을 쓴 사람들의 편에 서서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었다. 그분이 즐겨 불렀던 가요는 잘 알려진 대로「애모」라는 노래인데, ‘그대 앞에만 서면 난 왜 작아지는가?’라는 가사 중에 ‘그대’란 바로 그렇게 편이 되어주어야 할 대상들이었고, 그런 ‘그대’안에 하느님이 스며있었다. 배론 성지에 오신 많은 노인신자들 앞에서 보인 고위성직자의 눈물에는 그런 영성이 담겨있었다. 독일의 영성신학자인 안셀름 글륀 신부님의 저서 이름이기도한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리라.
대부분의 기독신자들은 일상에서 만나는 가족이나 이웃들, 그리고 교회공동체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일을 대할 때, 하느님의 입장과 사람의 입장을 가려서 생각한다. 그리고 굳이 내가 어느 한 쪽의 입장이 되어야한다고 여겨진다면, 성직자들은 물론 평신자 들조차 하느님의 편에 서기를 즐겨한다. 그렇게 그분 편이 되어드려야 그분에게 영광과 흠숭을 드리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높으시며, 굳이 우리가 편이 되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지만, 사람은 우리가 편을 들어주어도 여전히 부족하고 여리고 약한 존재이다. 그런 사람 안에 하느님이 스며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구의 편이 되어야 하는지 더욱 분명해진다. 김수환 추기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느님 편에 서기보다 사람의 편이 되어주었다. 불쌍한 히브리 민중들의 아픔을 보고 사람의 편이 되어준 예수님처럼. 하느님과의 중재자로 나서서 사람의 편이 되어준 성모님처럼.
미사가 끝난 후, 성지 내 수녀원에서 저녁을 함께 하는데, 행사책임신부의 배려로 추기경님과 마주앉아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음식이 자꾸 흘러내릴 만큼 그분이 연로하셨던 기억은 생생하다. “내가 당신 노래 다 망쳐 놓았지?” “아니예요. 제가 그 노래를 그토록 감동 깊게 들은 것은 처음 이예요. 제가 부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는데요. 사실은 제가 부르는 것 보다 감동이 더 했어요.” “좋게 봐줘서 고마워.” 남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이 부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는 말이, 노래하는 사람에게는 최대의 찬사다.
1984년 가을, 미아리 아리랑고개 너머에 있는 ‘상지피정의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에 입대 후 갖게 된 성소의식을 따라 <프라도사제회>의 관심자로 지내다가,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우연한 기회에 가게 된 <맹인선교회>에서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노래선교단>을 만나게 되었고, 당시 신학생이었던 단원과 둘이서 피정을 하기로 했었다. 먼저 도착하여 혼자 방에 앉아 공동번역성서에 실린 시편 139편을 보다가, 주체할 수 없는 감동과 은혜가 밀려왔다. 하느님은 나를 환히 알고 계신다는 시편 내용을 읽어갈수록,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단순한 응답이 선율에 실려 울려왔다.
하느님 난 당신을 알아요. 하느님 난 당신을 느껴요. 하느님 난 당신을 좋아해요. 오! 하느님 난 당신을 사랑해요.
하느님 내겐 당신이 필요해요. 하느님 내겐 당신이 소중해요. 하느님 나를 포근히 안아줘요. 오! 하느님 내 곁에 늘 있어줘요.
때때로 고난이 나를 찾을 때, 피하고 싶은 내 마음은 당신을 멀리 떠났다 느껴도, 어차피 그곳 또한 당신 품안인 것을 알아요. 난 알아요.
(김정식 사 / 김정식 곡「난 알아요」전문)
신학생이 오자 나는 방금 떠오른 노래를 들려주었고, 그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얼기설기 그려놓은 악보를 따라 바로 불렀으며, 우리는 그날 1박 2일의 피정을 그 노래를 부르고 묵상하는 것으로 채웠다. 그 신학생은 얼마 후에 있었던 서울가톨릭신학교 알마축제에서 그 노래를 불러 대상을 받았고, 축제 마지막 날 폐막공연에서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본인에게는 미안하게도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사진 고태환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그리고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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