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20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열애, 함께 가는 랭보’]
열애, 함께 가는 랭보
나는 파란 연기 은밀한 회랑에서
격자창문에 튀어 오르는 가냘픈 한 생령을 보듬고,
일곱 잔의 알코올에 몽실대는 파리한 네 꿈,
지울 수 없는 영혼의 무지개를 보았어
뜨거운 촉수는 황혼 무렵에 식어들고
은제 마두馬頭에 얼핏 흐르는
아픈 사랑의 줄기 빛에,
한줌 석양의 명운을 걸었지
이렇게 뜨거워져라, 동지나해 깊숙이 숨어있는
백상아리의 턱뼈인 양,
가을날 풀 섶에서 오열하는 갈대의 고혹 낀
몸부림을 보았는가, 그대 뜨거워져봤는가
회랑너머 푸르른 하늘엔 칠색조가
열망을 덮고 있네, 내가 회랑의 이쪽 첨탑에서
저쪽 첨탑으로 내 심장의 핏줄을 이을 때,
찬란하구나 사랑이여 열락이 충만한 사랑이여
푸른 갈기를 뽐내는 유년의 종마여
비통, 희망, 회한, 환희, 오욕이 철철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이여, 내 모든 걸 뿌리리라
널어놓으리라 열애라는 이름으로, 너의 강안江岸에
갈 수 있었으면 갔었을 것이야
내가 얻고 싶어 전율했던 사막의 일우一隅,
그 거친 풀 섶에 천년을 웅크린
내 오래된 사유의 먼지 속으로
유성이 이슬로 쏟아지는 갈색의 초원에
샛노란 신기루가 골판지 뜯는 소리를 내네
그리움과 열애가 죽죽 배설하는 정액의 소리,
명정선酩酊船에 밧줄로 묶이면, 난 세속에서 파산한다네
하해천공夏海天空은, 시승선객詩僧禪客의
콧수염에 달랑거릴 수밖에 없네
심안에 기생하는 애수를 차디찬 빨래로 갑판에 널면
명정선은 기운찬 항해의 노랫소리 토하네
내가 갈망하는 동방의 빛이 있다면
바로 옛적 검푸른 배롱나무 껍데기야
부드러운 황혼의 젖을 듬뿍 들이키며,
하많은 설움에 가슴 태웠던, 시월의 홍단紅丹처럼
이제 알았어 랭보, 모든 것에 대한 그대의 따스한 조응을
어떤 세기 그대와 거닐었던 동방의 빛을,
그 신단수 소도蘇塗 아래 번쩍이던 황금색
그렇게도 알 수 없던 그대의 은유를
(2004 . 11 . 21)
*명정선(酩酊船, Le Bateau ivre) ∼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랭보의 대표시 제명. '취한 배'란 뜻. 졸시 중에 '하해천공'이나 '시승선객'의 사용은 장시 명정선과 관련이 있어 揷했음.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열애, 함께 가는 랭보>**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이단아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의 시적 세계관을 빌려와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뜨겁고도 처절한 고백록입니다.
이 시에 대한 비평적 분석을 세 가지 핵심 키워드로 정리해 드립니다.
1. 랭보의 '취한 배(Le Bateau ivre)'와 시인의 '명정선(酩酊船)’
시 전반을 지배하는 가장 큰 상징은 랭보의 대표작인 **'취한 배(명정선)'**입니다. 랭보가 기성 문명의 구속을 벗어나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는 파괴적 자유를 노래했다면, 한기홍 시인은 이 '취한 배'에 자신을 밧줄로 묶습니다.
⚫세속으로부터의 파산 : "명정선에 밧줄로 묶이면, 난 세속에서 파산한다네"라는 구절은 시적 화자가 현실적 가치(세속)를 포기하고 오직 예술과 열망의 세계로 침잠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자기 정화의 항해 : '심안에 기생하는 애수'를 빨래처럼 널어 말리는 행위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배는 다시 기운찬 항해를 시작합니다.
2. 관능적 이미지와 '열애'의 역설
이 시에서 '열애'는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존재를 불태우는 근원적인 생명력에 가깝습니다.
⚫날 것의 이미지 : '백상아리의 턱뼈', '정액의 소리', '핏줄을 이을 때'와 같은 거칠고 원초적인 시어들은 시인이 지향하는 열애가 얼마나 치열하고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지를 역설합니다.
⚫고혹적인 몸부림 : 가을 갈대의 몸부림을 보았느냐는 질문은, 소멸해가는 존재(가을, 황혼)가 뿜어내는 마지막 섬광에 대한 경외심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가장 뜨거운 순간이 곧 가장 위태로운 순간임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3. 동양적 사유와 서구 상징주의의 만남
이 시의 독특한 지점은 랭보라는 서구적 모티프 위에 '신단수', '소도(蘇塗)', '배롱나무' 같은 동양적, 한국적 토속성을 덧입혔다는 점입니다.
⚫동방의 빛 : 시인이 갈망하는 구원의 빛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검푸른 배롱나무 껍데기'나 '신단수' 아래에 있습니다. 이는 랭보의 방랑 정신을 빌려왔으되, 정착하고자 하는 정신적 뿌리는 동양적 사유의 깊은 곳(천년을 웅크린 먼지 속)에 닿아 있음을 시사합니다.
⚫조응(Correspondances) : 마지막 연에서 언급된 '그대의 따스한 조응'은 보들레르와 랭보로 이어지는 상징주의의 핵심 원리인 '만물은 서로 조응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시인은 시공간을 초월해 랭보와 함께 거닐며, 비로소 은유로 가득 찬 세계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 총 평
한기홍의 **<열애, 함께 가는 랭보>**는 랭보라는 거울을 통해 시인 자신의 내면을 비춰본 작품입니다.
시인은 유년의 종마처럼 거침없이 달려와 유프라테스 강과 사막의 일우를 지나며 자신의 비통과 환희를 모두 쏟아붓습니다. **"그대 뜨거워져봤는가"**라는 시인의 일갈은, 적당히 안주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예술가적 선언이자,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소시키겠다는 처절한 자기 다짐으로 읽힙니다.
세기적 방랑자와 함께 걷는 이 시적 여정은 결국 '열애'라는 이름의 구원을 향한 뜨거운 항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