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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전통예절 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선 광 ( 善 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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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太學의 始初/諸賢의 文集)스승/釋奠 始作/15歲 科擧及第/ 등
出典 : 林下筆記(橘山 李裕元 著
우리나라 태학(太學)의 시초
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립 최고학부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年(서기 372년)에 수도에 태학(太學), 신라시대의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국학(國學), 고려시대의 국자감(國子監),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이 유일한 국립대학교의 역사는 바로 이 고구려의 태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주(註)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648)에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가서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의 의식을 구경하고 돌아왔는데,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석전의 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국학을 설립하였는데 신라가 나라를 세운 지 30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국학을 두게 되었다.
제현(諸賢)의 문집(文集)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고,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은 강감찬(姜邯贊)이 지었고, 《구선집(求善集)》은 최충(崔沖)이 지었고, 《소화집(小華集)》은 박인량(朴寅亮)이 지었고, 《김문열집(金文烈集)》은 김부식(金富軾)이 지었고, 《쌍명재일고(雙明齋逸稿)》는 이인로(李仁老)가 지었고, 《백가의집(百家衣集)》은 임유정(林惟正)이 지었는데 조문민(趙文敏)이 서문을 썼고, 《서하집(西河集)》은 임춘(林椿)이 지었는데 아조(我朝)의 최석정(崔錫鼎)이 서문을 쓰기를, “숙종(肅宗) 때에 야승(野僧 시골의 승려)이 땅을 파다가 구리 동이[銅尊]를 얻었는데 그 안에 《서하집》의 인본(印本)인 시문 6권이 들어 있었으므로 후손 임재무(林再茂)가 이를 다시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였다.” 하였다.
그리고 《이상국집(李相國集)》은 이규보(李奎報)가 지었고, 《김거사집(金居士集)》은 김극기(金克己)가 지었고, 《남양집(南陽集)》은 백비화(白賁華)가 지었고, 《묵헌집(默軒集)》은 민지(閔漬)가 지었고, 《홍애집(洪厓集)》은 홍간(洪侃)이 지었고, 《동암집(東菴集)》은 이진(李瑱)이 지었고, 《송파집(松坡集)》은 최성지(崔誠之)가 지었고, 《익재난고(益齋亂稿)》는 이제현(李齊賢)이 지었고, 《예산농은졸고(猊山農隱拙稿)》는 최해(崔瀣)가 지었고, 《근재집(謹齋集)》은 안축(安軸)이 지었고,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은 이암(李嵒)이 지었고, 《가정집(稼亭集)》은 이곡(李穀)이 지었고, 《초은집(樵隱集)》은 이인복(李仁復)이 지었고, 《제정집(霽亭集)》은 이달충(李達衷)이 지었고, 《근사재일고(近思齋逸稿)》는 설손(偰遜)이 지었고, 《둔촌집(遁村集)》은 이집(李集)이 지었고, 《목은집(牧隱集)》은 이색(李穡)이 지었고, 《반양이선생유고(潘陽二先生遺稿)》는 박상충(朴尙衷)과 박소(朴紹)가 지었고, 《포은집(圃隱集)》은 정몽주(鄭夢周)가 지었는데 아조(我朝)에서 노수신(盧守愼)에게 명하여 서문을 쓰게 하였다.
그리고 《석탄집(石灘集)》은 이존오(李存吾)가 지었고, 《운곡집(耘谷集)》은 원천석(元天錫)이 지었고, 《야은집(冶隱集)》은 길재(吉再)가 지었고, 《양천세고(陽川世稿)》는 허금(許錦) 등이 지었고, 《독곡집(獨谷集)》은 성석린(成石璘)이 지었다.
우리나라의 스승
신문왕 12년(692)에 설총(薛聰)을 높은 품계에 발탁하였다. 설총은 박학하여 우리나라 말로 구경(九經)의 뜻을 풀이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후생들을 훈도하였다. 성덕왕(聖德王) 16년(717)에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문선왕(文宣王)과 십철(十哲) 및 72제자의 화상(畫像)을 올렸는데 명을 내려서 이를 태학에 두도록 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6년(747)에는 국학(國學)을 고쳐서 태학감(太學監)이라고 하였다.
사신(史臣)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경덕왕 5년(746)에 비로소 여러 박사(博士)를 두었는데, 이때 강수(強首)와 설총 등이 의리를 통달하여 깨쳐서 구경을 우리나라 말로 강의하여 후학들을 훈도하였으며, 한때 이들이 우리 동방의 영걸(英傑)이 되었다. 그리고 말엽에는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재능이 정민(精敏)하여 학문을 좋아하였고 중국에 유학해서 당시의 제배(儕輩)들이 그의 문장을 대단히 일컬었는바, 그는 능히 천하의 선비들을 두루 벗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신라가 삼국 시대에는 비록 그 문헌(文獻)이 일컬을 만한 것이 있었으나 처음 나라를 세울 때의 정령(政令)이나 제도들은 문교(文敎)에 근본을 둔 것들이 아니었으며, 그 뒤에 와서 비록 중화(中華)의 기풍을 사모하기는 하였지만 볼만한 것은 겨우 한둘에 불과하였다.” 하였다.
처음으로 태학(太學)에 행차하다
경덕왕 24년(765)에 태학(太學)에 행차하여 박사(博士)에게 명해서 《상서(尙書)》를 강론하게 하였다. 혜공왕(惠恭王) 12년(776)에는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태학감(太學監)을 다시 고쳐서 국학(國學)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주역(周易)》ㆍ《상서(尙書)》ㆍ《모시(毛詩)》ㆍ《예기(禮記)》ㆍ《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ㆍ《문선(文選)》을 나누어서 수업받도록 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태학을 설립하여 자제들을 가르쳤는데, 나라를 세운 지 4백여 년이 지난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태학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태조(太祖) 13년(930)에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으며, 그 뒤 성종(成宗) 때에는 모든 주(州)ㆍ군(郡)ㆍ현(縣)에 영을 내려서 자제들을 선발해 올려 서울에 와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 2년(983)에 박사 임성로(任成老)가 송나라에서 돌아와 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 한 장과 제기도(祭器圖) 한 권과 72현(賢)의 찬기(贊記)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그리고 6년(987)에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유우씨(有虞氏 순(舜) 임금)는 상상(上庠)과 하상(下庠)을 열었고, 하후씨(夏后氏 우(禹) 임금)는 동서(東序)와 서서(西序)를 두었으며, 은(殷)나라는 우학(右學)과 좌학(左學)을 개설하였고, 주(周)나라는 동교(東膠)와 우상(虞庠)을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나라에서는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간에 모두 사랑과 공경의 기풍을 알았고 그 예악과 시서(詩書)가 족히 경륜(經綸)의 과업을 창출할 수 있었다.
지금 과인이 여러 선왕들의 크신 기업(基業)을 이어받아서 삼한(三韓)의 왕업(王業)을 총리(摠理)하는바, 저 부박(浮薄)한 풍속들을 바꾸어서 사람들이 모두 예양(禮讓)을 알도록 하고 싶은 것이며, 행단(杏壇 교육장소)과 괴시(槐市 학사(學舍))에는 배우러 오는 자들이 더욱 늘어나고 미름(米廩 학교)과 직궤(稷簋 제의(祭儀) 등에서의 예기(禮器), 또는 그 음식이나 잔치 모임)에는 글을 읽는 자들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 경적(經籍)에 통달한 선비와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아는 자들을 뽑아서 12목(牧)에 각각 경학박사(經學博士)를 한 사람씩 보내어서 여러 학생들을 열성으로 가르쳐 이들을 잘 인도해 주도록 하고자 한다. 아, 재능(才能)과 기량(器量)을 가지고 임금을 섬긴다면 그것이 곧 충성의 시작이 되는 것이요, 일신을 확립하여 명예를 드날려서 부모를 영화롭게 한다면 그것이 곧 효도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형창(螢窓 글방)에서 뜻을 연마하고 전사(鱣肆 강학(講學)의 장소)에서 경전(經傳)을 익혀 공손하고 효성스럽다는 소문이 들리는 자가 있다면 그 고을의 수령들은 이를 갖추 기록하여 서울로 추천해 올리기 바란다.”
문종(文宗) 15년(1061)에 왕이 국자감에 행차하여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중니(仲尼 공자(孔子))는 백왕(百王)들의 스승이라 하겠다. 그러니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두 번 절하였다.
15세에 과거에 급제하다
충렬왕 27년(1301)에 산기상시(散騎常侍) 정선(鄭僐)이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였는데, 이때 자신의 글 솜씨를 자부하던 자가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것에 대한 이야 기를 듣고는 그만 의기가 소침하여 감히 선수(先手)를 다투지 못하였다. 과방(科 榜)이 나붙고 보니 과연 이제현이 장원을 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15세였다. 이해에 밀직사 권부(權溥)가 예위(禮闈 과거의 회시(會試))를 주관하였는데 이때에도 이제 현이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권부가 딸을 아내로 주었다.
석전(釋奠)의 시작
인종 7년(1129)에 왕이 국자감에 행차하여 선성(先聖)에게 석전을 올리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제생(諸生)들을 모아서 경학(經學)을 강론하도록 하였다.
[주C-001]석전(釋奠) :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4성(四聖)ㆍ10철(十哲)ㆍ72현(七十二賢)을 제사 지내는 의식으로, 석전제ㆍ석채(釋菜)ㆍ상정제(上丁祭)ㆍ정제(丁祭)라고도 한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하는데, 석전이라는 이름은 ‘채(菜)를 놓고[釋], 폐(幣)를 올린다[奠]’에서 유래하였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채소만 놓고 지냈으나 뒤에는 고기와 과일 등 풍성한 제물을 마련하여 지냈다.
안유(安裕)가 건의하여 국학을 설치하다
고종 30년(1243)에 찬성사(贊成事) 안유가 건의하여 국학을 설치하고 섬학전(贍學錢)을 두었다. 안유가 학교가 날로 쇠미해져 가는 것을 걱정하여 양부(兩府 재부(宰府)와 추부(樞府))에 건의하기를, “재상의 직분은 인재를 교육하는 일보다 더 긴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현고가 바닥이 나서 이들을 가르쳐 기를 수 있는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이 없습니다. 청컨대 모든 관원들이 그 직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서 은포(銀布)를 내도록 하여 이것을 가지고 저 학자(學資)를 돕는 밑천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왕 또한 내고(內庫)의 재물을 내어 보조하였다.
그런데 밀직 고세(高世)가 자신은 무인(武人)이라 하여 돈을 내려하지 않자 안유가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도(道)는 실로 저 만세(萬世)에 드리운 법도인 것이다. 지금 신하 된 자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식 된 자가 그 아비에게 효도하는 것은 모두 누가 가르친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만약 ‘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고통스럽게도 돈을 내어 학생들을 기르게 한단 말인가.’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공자를 업신여기는 행위이다. 이것이 옳은 일이란 말인가.” 하였다. 고세가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서 즉시 돈을 내었다.
또 안유는 남은 돈을 박사 김문정(金文鼎)에게 주어서 그를 중국에 보내어 선성(先聖)과 70제자의 화상(畫像)을 그리고, 또 제기(祭器)와 악기(樂器)와 육경(六經)과 많은 자사(子史)들을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6월에 국학의 대성전(大成殿)이 이루어졌다. 처음에 원(元)의 야율희일(耶律希逸)이 우리나라의 전우(殿宇)가 좁고 궁색한 데다 특히 반궁(泮宮)의 제도가 심하다 하여 왕에게 권하여 문묘(文廟)를 다시 지어서 유풍(儒風)을 진작(振作)하도록 진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에 이르러서 드디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이 국학에 나아갔는데 제생(諸生)들이 관복(冠服)을 갖추고 길에 나와서 왕을 맞이하여 알현(謁見)하였으며 노래를 불러 임금에게 바치었다. 이에 왕이 대성전에 들어가서 선성(先聖)을 배알한 뒤에 밀직사 이혼(李混)에게 명하여 입학송(入學頌)을 짓게 하고 임원(林元)에게는 애일잠(愛日箴)을 짓게 해서 이를 제생들에게 보여 주도록 하였다.
성균관에 노비(奴婢)를 들이다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그의 노비(奴婢)를 성균관에 시납(施納)하였다. 그 뒤 문성공의 자손들이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자 그 노비가 말하기를, “이 분은 우리 주인이다.” 하였다. 그래서 관관(館官)이 이들을 다른 학생들보다도 다르게 대우하였다.
새로 구입한 서적들을 고열(考閱)하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찬성사 권부(權溥)가 이진(李瑱), 권한공(權漢功) 등과 함께 성균관에 모여 새로 구입한 서적들을 고열(考閱)하였으며 또 경학(經學)을 시험하였다.
그리고 성균관의 제거사(提擧司)가 박사 유연(柳衍)과 학유(學諭) 유적(兪迪)을 보내어 중국 강남(江南)에 가서 서적을 구입해 오도록 하였는데, 이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홍약(洪瀹)이 태자부(太子府)의 참군(參軍)으로 남경(南京)에 가 있다가 유연 등을 만나 보초(寶鈔 중국 지폐의 일종) 150정(錠)을 주어서 경적(經籍) 1만 800권을 구입하여 돌아가도록 하였으며, 원(元)나라가 또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서적 4701책을 보내 주었는데, 이것은 모두 송(宋)나라의 비각(秘閣)에 소장되어 있던 것이다.
태학(太學)의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다
옛날 사람들이 행단(杏壇)의 제도를 모방하여 문묘(文廟) 앞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마주하여 심었는데, 그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반관(泮官 성균관 관원)이 나무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후로 다시는 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를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서울이 오덕(五德)을 갖추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신지비설(神誌秘說)》에서 삼경(三京)을 저울에 비유하였는데, 삼각산(三角山)의 남쪽을 오덕을 갖춘 언덕[五德邱]이라 하여 이를 저울의 추에 비유하였다. 오덕(五德)이란, 중앙에 있는 면악(面岳 남산(南山))은 원형(圓形)이므로 토덕(土德)이고, 북쪽에 있는 감악(紺岳 파주의 감악산을 말함)은 곡형(曲形)이므로 수덕(水德)이고, 남쪽에 있는 관악(冠岳)은 첨형(尖形)이므로 화덕(火德)이고, 동쪽에 있는 양주(楊州)의 남행산(南行山)은 직형(直形)이므로 목덕(木德)이고, 서쪽에 있는 수주(樹州)의 북악(北岳)은 방형(方形)이므로 금덕(金德)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1]수주(樹州) : 지금의 부천시와 인천 부평 지방의 고려 때 이름이다.
追而
韓民族 建國史에는 國立太學史 以前 BC1805年(6,156年前)에 第12世 檀君 (阿漢天皇 30年) 有爲子를 國太師로 任하고 太學館을 세워 國子賢良 養成을 命하였다는 上古史가 存在한다.
<總同門會 首席副會長/成均館副館長 友山 李相吉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