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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마라나타!
성경 : 고린도전서 16장 21-24절
찬송 : 325장
마라나타! 이 말 많이 들어보셨죠? 이 제목을 가진 찬양이 있어 언젠가부터 이 말은 우리 귀에 너무 익숙한 말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 찬양을 늘 즐겨 부르죠? 하지만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은 아직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뜻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찬양을 하는 거지요.
마나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혹시 벌써부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계셨습니까? 참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뜻을 잘 모르신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과는 시간으로도, 공간으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이나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늘 가까이 대하고 살아가는 영어나 스페인어나 아랍어와는 전혀 다른 고대 언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를 수밖에요. 2000년이나 전, 그것도 지구 반대편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우리가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그런 말이라면 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이 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이유는 이 말이 성경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냥 성경에 나오는 말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있게 된 때로부터 교회는 항상 이 말을 사용해왔습니다. 심지어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잊어버려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계속하여 이 말을 사용해왔습니다. 왜냐하면 마라나타라는 말은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 사용하던 예배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혹시 아멘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아멘이라는 말은 진실로 그러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이 말을 많이 사용합니까? 예배할 때, 기도할 때, 성경을 읽을 때, 수도 없이 이 말을 사용하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모두는 그 말의 뜻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가운데 누군가를 향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상당히 많은 형제자매들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계속해서 그 말을 사용합니다. 참 이상하죠? 왜 우리는 아멘이라는 말의 뜻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해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 걸까요? 왜냐하면 그 말이 예배할 때 쓰는 말, 곧 예배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라나타라는 말처럼 아멘이라는 말도 수천 년 전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늘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곧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면 반드시 한 번 이상 사용하던 말이 바로 아멘이나 마라나타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이 말들은 너무나 익숙한 말이 되어 아예 입에 붙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굳이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기도할 때나 예배할 때, 선배들이 항상 그렇게 하던 버릇대로 아멘! 마라나타! 이렇게 습관적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성경을 다른 말로 번역할 때, 모든 말은 다 번역을 하였습니다. 맞지요? 하지만 이 말들은 번역하지 않고 처음 사용하던 말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들은 교회 안에서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말들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을 넘어 매우 중요한 뜻을 담은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번역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번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든지 번역을 하려면, 그 말이 담고 있는 뜻을 다 담고 있는 말로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번역이 되어 뜻이 바로 전달되겠지요? 그런데 아멘이나 마라나타와 같은 말은 이미 너무 깊은 뜻, 곧 매우 깊은 신학적, 영적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어 그 어디에서도 그 말을 대신할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성경 안에 이 말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말 가운데 아빠(ABBA)라는 말도 있습니다. 마라나타처럼 이 말도 아람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당시 사용하던 말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말 가운데 하나이지요.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어떻게 부릅니까? 아빠 아버지! 이렇게 부르지요? 그래서 이 말도 지금까지 번역이 되지 않고 그냥 옛날 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마라나타처럼 아빠도 교회가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 쓰던 예배 언어였니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마라나타라는 말이 왜 성경에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충분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마라나타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예배 언어였는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 이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아주 특별한 예외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예외 말고 오늘 교회들이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 교회들이 이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고대 교회의 전통과 달리 오늘 우리 교회들은 성경을 번역할 때, 마라나타라는 말을 번역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대신 그 말이 담고 있는 뜻은 오늘 우리 교회들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요. 그리고 여기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마라나타를 번역한 그 말을 만나게 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16:22)
여기 말씀 가운데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 말이 바로 마라나타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이 마라나타라는 예배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말이었으라고는 상상도 못하셨죠? 하지만 성경 원문을 보면, 마라나타라는 말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람어인 마라나타를 굳이 헬라어로 번역하지 않으셨습니다. 번역하는 대신 그 말을 소리 나는 그대로 기록하셨습니다. 앞서 우리가 함께 나눈 이유 때문입니다. 마라나타(Μαρὰνἀθά.)!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이 말을 번역해버렸습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이렇게 소리 나는 대로 남겨두어야 할 말을 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번역해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대로 하면 우리말 성경은 크게 잘못하고 있습니다. 본래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이 말은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훨씬 더 나았습니다. 그리하였더라면 마라나타라는 말은 교회가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 늘 사용하는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멘이나 아빠라는 말처럼 말이죠. 혹 늘 사용하는 말까지는 아니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이 사용하는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라나타라는 말이 왜 예배할 때나 기도할 때 교회가 반드시 사용하던 예배용어가 되었는지 알아봅시다. 우선 마라나타라는 말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집니다. 마라나 타! 이렇게 읽으면 주여, 오시옵소서. 이런 뜻이 됩니다. 마란 아타! 이렇게 읽으면 주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이런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말 성경은 고전 16:22에 나오는 마라나타라는 말을 어떻게 읽고 있는 것입니까? 예, 마라나 타!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번역을 한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읽는 것이 맞습니까? 마라나 타입니까? 마란 아타입니까? 주여, 오시옵소서. 입니까? 주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입니까? 어떻게 읽는 것이 맞습니까? 궁금하시죠?
결론부터 말씀드릴까요? 그 대답은 둘 다 맞다. 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누구를 우리 안에 모시고 살아갑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포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그렇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안에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는 늘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마란 아타!(주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과 교회를 바라보면서도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마란 아타!(주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맞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군가 이런 고백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할 수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이런 고백을 하며 살아갑니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런 고백을 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그 안에 누가 계시니까요? 예! 하나님께서 계시니까요.
우리가 평소에도 이런 고백과 선포를 하며 살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할 때는 어떨까요? 그때는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끼리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우리 입에서 반드시 이 고백과 선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배할 때, 누구 앞에 서 있기 때문이죠?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한 새로운 사람과 하나님의 가정의 모습으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할 때마다, 항상 이 고백과 선포를 하였습니다. 아니, 이 고백과 선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란 아타! 우리 하나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고백과 선포가 우리 안에도 있지요? 그렇다면 이런 고백과 선포가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자신의 전부를 다 드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요? 지금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나 예배할 때마다, 마란 아타! 우리 하나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라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그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는데, 어떻게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영적 체험이 너무너무 많지요? 우리는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하는 일을 마칠 때마다 어떤 고백을 합니까? 주님, 제가 주님을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선포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런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믿음 고백과 사랑 고백이 없습니다. 마란 아타! 하나님께서 여기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속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리에 함께 하면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이런 믿음 고백과 사랑 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기 때문이죠?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자기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광스러운 예배의 현장을 전혀 경험하지 못합니다. 교회와 성도 가운데 함께 계시며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기도하며 외칩니다. 마란 아타! 주님께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이렇게 외치는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할 줄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하나님을 사랑할 줄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하나님을 거슬러 대적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합당한 것은 무엇입니까? 저주뿐입니다. 여기 이 모든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고전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마란 아타! (왜냐하면 주님께서 여기 우리와 함께 계기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교회나 가정, 성도가 있다면,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도 속히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고백과 선포가 없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저주뿐이기 때문입니다. 마란 아타! 주님께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하였던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만약 고린도교회가 그와 같이 계속 행한다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16:23-24)
지금 우리 교회와 가정을 향해서도 이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와 우리 가정과 교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향한 거룩한 믿음 고백과 사랑 고백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또한 그 믿음 고백과 사랑 고백을 따라 온전한 성도와 교회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므로 즐거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어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뿐이겠습니까? 온 세상 열방과 민족 가운데도 이런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찌 살 길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온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 가운데도 이런 은혜를 부어주소서. 그리고 온 세상 만물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그날이 속히 오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이런 기도를 항상 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이제 간절히 구하고 또 사모합니다.
마라나 타!(주 예수님, 속히 오시옵소서.)
그가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 분명합니다. 죄로 오염되고 부패한 이 세상 가운데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할 때마다 수도 없이 다짐하고 또 결단하지만, 그 다짐대로 살아갈 수 있던가요? 그 다짐과 결단한 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던가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죄송한 마음을 안고 우리는 고백하고 선포하게 됩니다.
마라나 타!(주 예수님, 속히 오시옵소서.)
어서 속히 오셔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그 모든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고 죄송한 모습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보고 경배하게 하시며,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또한 그 뜻이 이 땅과 이 땅에 살아가는 만물 가운데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뜻을 담은 마라나타라는 말이 항상 우리 입에서 떠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그동안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비록 간접적인 방법이었지만 늘 이 말을 사용해왔습니다. 하지만 아멘이나 아빠처럼 마라나타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그 말의 사용을 교회 가운데서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아멘이나 아빠처럼 마라나타도 아예 우리 입에 붙어 결코 떨어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성도, 이런 가정, 이런 교회는 하나님의 저주에서 영원히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도, 이런 가정, 이런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복되기 때문입니다.
마란 아타! 주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마라나 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