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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지역선교.........................윤태영
서론
구 소련에 속한 중앙아시아가 열린지 만 사년이 지났다. 개방이전까지 중앙아시아에 대한 접근이
가능지역으로는 터어키 등 몇나라 되지 않았다. 구소련이 개방될 때에 독립국가연합 중 5개
중앙아시아 국가와 아제르 등 이슬람 성향의 독립국가에 대한 선교적인 접근과 이해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럼, 중앙아시아는 어떠한 문화,종교,정치,이념을 가지고 독립국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신중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중앙아시아는 단순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들면,세계대전 이후 열강의 이해와 도움으로 독립을 얻은 것도 아니고 이념의
갈등이나, 민족적인 분규로 나뉘어져 생긴 독립국가도 아니다 또한 중앙아시아에 대한 어떤 이해가
모든 중앙아시아 국가에 적용되는 것도 아닌,그야말로 특수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로
본 발제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를 설명하면서 해당지역에 대한 선교전략 의견을 내고자 한다.
본론
1. 중앙아시아 개념
이번 전략회의에서 다루는 중앙아시아의 개념은 구소련의
우즈벡스탄,카작스탄,기르기르즈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직스탄,다섯개의 공화국이라고 본다. 그 외에
아르메니아나 아제르바이잔,터어키 등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리라 본다. 중앙아시아(다섯나라)는
국가간에 서로 지리적으로 연접해 있고 아직도 자국의 비자가 요구된다. 이들 나라끼리 연결되어 있는
국경선의 개념이 러시아와 가깝게 위치한 지리적 조건보다 중요치 않다. 소련 종주국으로서의 역할을
마감되었다. 해도 중앙아시아에서의 러시아 영향력이 결코 단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각
공화국들의 생산공장 카르텔(단일생상체제)의 본부는 모스크바에 있으며 여전히 재정적인 결재를
한다. 이와 함께 각 공화국 내의 생산공장을 가동하기 위한 원료나 재료 또한 모스크바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경제고리 안에 독립된 각각의 나라가 한 블럭 안에 여전히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러는 반면 각
나라의 통치권은 나름대로 분리되어 독립된 편이다. 권력의 속성상 남의 나라의 간섭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정치적,통치권적 독립을 더 추구하지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제3세계 국가들이 외세의 영향력하에 놓여 있는 것하고는 다른 형편이다. 그러나 이 사실도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은 못된다. 왜냐하면 과거 소비에트 연방국가 때부터 각 공화국의 자치정치가
권면되어 왔기 때문이다. 소연방의 정치적인 통제 아래서 "각 공화국의 인민에 의한 통치"를 70년간
해왔었다. 그래서 독립된 이후에도 독립 민족세력이 아닌 과거 집권세력인 공산당 엘리트 내지는
관료들이 그 경험과 기반 위에서 새공화국의 이름하에(모두가 공화국 형태로) 독립국가로 새단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민족적인, 혹은 그의 세력에 의해 강력하게 반발을 받게 된 경우가 타직스탄이다.
이로 인하여 인근국가들의 공화국 서기장 출신 대통령들은 외부세력을 더 경계하면서 강력한 자기
통치기반을 구축해 왔다. 지금도 이런 정치적인 상황이 중앙아시아에서 진해되고 있다.
이런 정치적인 배경 못지 않게 이곳을 이해하는데 문화,종교적 배경 또한 매우 중요하다. 지중해가
이슬람에 의해 정복된 즈음에 중앙아시아에 이슬람이 들어왔다. 그후 1219년부터 시작된 징기스칸의
원정은 호레즘칸(현재의 사마르캄)과 부하라칸들을 점령한다.징기스칸은 죽으나 사마르칸트에 도읍을
전한 티무르에 의해 손자 울르백은 군주로서보다는 천문학자로 더 유명하다. 이슬람의 실용학문이
유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징기스칸 전에 토착되어 온 이슬람과 계속하여 확장되는
이슬람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종교가 이슬람으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튀르크
민족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고 인접 이란계와 비슷한 민족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제정러시아의 침공과 그후 공산당에 의한 통치에서,종교는 소수 현지 민족의 문화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중앙 아시아에서는 이슬람에 대해 종교적인 헌신보다는 "나는
우즈벡인이다"라는 말은 "나는 무슬림이다"라는 말과 같다. 즉 "우즈벡인이기 때문에 무슬림이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선교적인 접근이 용이한 부분도 없지 않으나 시간이 되면 결국 이슬람과
충돌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2.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점과 특수하게 다른 점
위에서 말한 지역적 배경, 역사적인 상처, 정치적인 통치배경,그리고 이슬람이라는 문화와 종교의
바탕 등 공통적인 이해가 있다. 그러면서도 특수하게 다른 점이 무엇인가?
(1) 언어가 다르다.
튀르크 계통의 언어이지만 각 나라마다 다른 언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어 있다. 러시어가 통용되지만
자기의 민족언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우즈벡스탄 경우에는 공문서 작성에 우즈벡어만을 사용한다.
(2) 이슬람에 대한 수용입장에서 다르다.
타직스탄은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민족주의자들과 구 관료들이 충돌한 예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민족분규를 보면서 인접국가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독립국가의 문제를 보았다.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없는 과거 70년 공산체계의 실존과 민족적인 자립을 인근 국가들이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도 보았다. 공통적인 입장에서는 근본주의 이슬람이 현정국에 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국가의 통치력이나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는 행정력으로 인하여 수도를 제외한 지방에서의
이슬람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3) 중앙아시아를 이슬람 국가들로 보는 것도 타당하지만 정부의 조직이나 저들의
이해,사상,문제해결 방식,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종교기관이나 단체 외국상사들에 대한 태도를
보면 공산당 지배하에 행정 그대로라는 것이다. 과거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이며 통제력이
완화된 감은 있으나 그 기본반응은 4년 전 공산당의 마인드 그대로이다. 거기에다가 민족적인
자긍심까지 덤으로 해서 기묘한 태도들을 보이는게 예사이다. 다시 말하자면 공산주의는
허물어졌어도 그 추종자들이 오늘도 각 나라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형편이기에 공산체계의
습성을 이해해두는게 사역하는데 도움을 준다.
(4) 각 공화국마다 경제적 이윤 추구가 다르다.
우즈벡과 같은 나라는 풍부한 자원과 인력으로 경제적인 도약을 도모하고 카작스탄 경우에는 구
소련의 남은 유산과 러시아 밀접한 지리적인 여건을 십분 활용한 경제블럭을 지향하고 기르기스탄은
얼마간의 가스와 지하자원이 있으나 철저한 홀로서기에는 자신이 없음으로 두 나라와 연합을 늘
지지하는 편이고, 타직이나 투르키스탄과 같은 나라는 다른나라처럼 독립국가로서의 약진보다는
정치적 안정이 더 시급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다른 경제적 이윤추구는 외국인을 보는
시각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선교사역이 경제적인 활동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외국인을 보는 시건에
따라 선교사역의 접근과 그 전략이 달라진다고 본다. 현대의 선교적인 접근과 전략에서는 그 나라의
경제적 지향점을 미리 파악해서 참고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3. 중앙아시아에서 진행되는 선교사역과 그 평가
원칙적으로 현재 사역 중인 사역자가 현지의 사역을 평가하기엔 부담이 된다. 물론 반성과 시행착오
가운데 향상된 사역과 성공적인 사역들을 나눌 수는 있다고 본다. 본인이 언급하고자 하는 평가의
의미는 우선 노출된 문제점들을 미리 들춰내고 그 사역이 바른 궤도에서 성공적이 되기를
바람에서이다.
(1) 교회개척사역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교회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개방된 후
중앙아시아에 세워진 교회의 수효는 헤아일 수 없으리만치 많다. 이 교회개척사역은 주로 두 그룹에서
주도하고 있는 편이다. 하나는 외국에서 들어온 한인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개척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지인들에 의한,즉 러시아 침례교나 오순절교회의 제자들에 의해 세워지는 교회들이다.
한인선교사에 의해 세워지는 교회도 한인중심의 교회와 여러 민족이 함께하는 교회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엔 한인들의 참여는 거의 없다. 현지인에 의해 개최되는 교회도
러시아교회와 지방민족(예,우즈벡 교회,카자흐교회)교회로 나눌 수 있다.
우즈벡의 경우에는 한인교회들이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등록도 되었고 교회의 조직도 갖춰 간다.
이 교회개척 분야에서 가장 큰 관건은 선교사가 언제,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현지인에게 교회의
지도력을 인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는데 한인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의 공통점은
인계하기에 점점 더 어려워지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인선교사들의 다수가
정착자적인 선교사역을 지향하고 있는 점이고 이로 인해 현지인에게 인계할 부담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적인 소유개념과 개척교회의 성공지향적인 사역, 타문화를 수용하기엔 너무 갑갑한
노파심, 혹은 편견이 우리 안에 있자 않나 하는 반성도 해본다. 교회가 개척될 때 우즈벡교회,즉
현지교회가 세워지는 비전과 현지교회의 부흥을 볼 수 있는 안목을 한인선교사가 가져야 되지 않을 까
하는 바람이 있다.
그 외에도 전문인들에 의해 세워지는 교회도 있다. 이들은 한국과 미국 여러 나라에서 온 평신도
사역자들인데 공통적인 것은 현지인 중심의 교회개척을 노력한다는 점이다.대학에서도 구호사역을
통해서도 가능한 한 현지인을 얻으려고 한다.한인교회에서 담당할 수 없는(등록교회에서는 법적으로
현지인을 전도하지 못하게 금한다)현지인을 다른 영역에서 담당할 수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이런 구성원에서의 차이는 있어도 서로 협력할 수 있고 실제로 협력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있다.
(2) 비정부단체의 설립과 구호사역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 중인 CAFE,Vision Internation.PCA는 유럽 선교부에 세운 단체들이고
한국인 사역자에 의해 InterCoop에서 세운 IACD(아시아개발협력기구)의 지부가 있다. 그 외 등록은
받지 않았으나 한국기아대책기구의 우즈벡스탄 지부가 있어 구호사역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이러한 구호단계 혹은 개발을 돕는 단체들은 현지인들에 접촉하는 데 좋은 매개체이며,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중앙아사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역의 방편이다. 현재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기아나 빈곤이
없다고 말하지면 우리가 보기에는 구조적이고 절대적인 가난과 의료시설의 후진성,약품의 품귀들로
인하여 적절한 구호사역이 필요하다.
(3) 지도자 양성
현지 침례교에 의해 신학교가 운영되는데 미남침례교회에서 돕고 그 학생들은 러시아교회와 한인교회
젊은이들이다.지금까지 3년여 동안 공부를 해왔고 졸업생들도 배출되었다. 그러나 교단의 차이가 아닌
과거 다른 신앙노선을 지켜 온 신앙적 배경으로 인하여 현지 신학교와 돕는 선교사와 학생을 보내는
교회와의 갈등이 표출되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우즈벡 현지인들은 신학교육을 무시할 만큼 성령님의
지도와 감동을 앞세우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한인선교사들에 의해 거론된 신학교는 설립신중론에 의해 현재까지 기도 중에 있다.
오늘에 와서는 연합신학교의 설립에 관해 은혜 중에 의견을 나누고 있다. 신학교육기관 설립은 신학교
설립을 위한 전임사역자와 전임교수진이 해야 한다고 사료된다. 현지 사역자들이 이 일에 주도적으로
개입될 경우 분열과 졸속한 교육을 할 수 밖에 없고 개교회 교파주의적인 사역으로 될 소지가 많다고
본다.
4. 중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사역과 그 가능성
(1) 교회개척을 돕는 사역
교회개척사역이 아니라 교회 개척을 돕는 사역이 전략적으로 있어야 한다. 수준높은 영적지도자가
훈련되는 데 우리의 바람이지만,현실적으로 바랄 수 없는 형편이다. 교회개척이 적어도 현지인에
주도적으로 될 수 있다면 중앙아시아에서의 선교는 자립으로 쉽게 설 수 있으리라고 본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개척할 수 있는 지도자를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갖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세계선교협의회에서 교수와 교재와 자료를 준비하고 현지교회에서는 일꾼들을 보내어
단기 혹은 1년 정도 훈련하여 각 교회의 교회개척 계획에 맞춰, 혹은 지역협의회 협의에 의해 교회를
개척해 나가는 방안이다. 물론 교육장소는 중앙아시아 현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발전되면 중앙아시아 연합신학교 혹은 각 나라별 신학교가 설립될 수 있는 비전을 갖게 된다.
신학교의 필요는 현지에서나 현지 사역 중인 선교사가 신학교를 세우는 것보다 신학교육의 전문가와
교수진, 행정요원들이 현지로 파송되어 신학교 사역에만 헌신하는 전략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현지 사역자가 도울 수 있고 어느 부분 참여할 수 있을 것이나,그들은 전담으로 신학교설립 목적으로
파송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지도자 양성에 한계가 있고,분파를 조성하게 되는
염려가 있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에 아직까지 한인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신학교가 없다는 것이 그
가능성이다.
(2) 민족 사이를 넘어서는 전략
광범위한 표현인 것 같지만,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기만 하면 민족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한인 중심의 사역이건 러시아어권 사역이건, 현지인 사역이건 그것을 돕는 사역이건 간에 그 땅이
구원받고 그 땅 거민이 교회를 세워가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사역에 대해 서로 인정하면서 그 궁극적인 비전을 함께 나누고 공유할 협력의 마당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신학교 설립으로 인해 폭넓게 교단과 단체를 수용할 수 있고
구후사역들을 통해 믿음의 형제르리 돌아보는 것과 믿음의 동지가 사회에 대해 함께 긍휼을 베푸는
협력이라던가,외국선교단체와의 협력관계를 갖는 일 등이다. 이런 선교전략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은
선교사의 자기포기 없이는 어려울 것인데 ,선교사의 자기포기야말로 이 전략의 기초라고 본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5. 중앙아시아 사역을 위한 사역자
선교사는 선교지로 떠날 때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언어를
배우고 현지를 알고, 삶의 개척단계를 지나면 현지에 정착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바로는 현지에 잘 정착하는 선교사가 훌륭한 선교사였다. 현지 문화에 잘 적응하고 현지인과
깊숙한 관계를 형성하는 선교사,그래서 자신의 가르침과 교회생활, 주님께 향한 헌신이 다른 사람에게
배움이 되도록 모범을 보여야만 했다.이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기 않으면 안되었다. 그 문화충격과
갈등, 질병으로 인한 고생,동역자 간의 오해,현지인과의 문제들, 이를 극복하고 현지에 정착하는
선교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선교사가 현지에 정착하게 됐을 때 또 포기할 것이 있다. 자기의 정착을 위해 선교지를
합리화시키는 것과 선교지의 신앙적 표현을 자기가 보인 모범으로 강요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성취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세운 개척지를 포기하고 현지인을 개발시켜 그로
하여금 자신이 섰던 그 자리에 서도록 권위와 재산과 존경을 포기하는 개발자적인 선교사를 제의해
보고 싶다.
우제벡에서 4년을 살았다. 그들을 배우고 존중하고 삶을 열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시간으로
드리고 싶었고 또 그렇게 노력도 했다. 어느 정도 정착도 했다. 법의 테두리에서 편리함도 누릴 줄
알고 한국을 선망하는 현지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무리없이 정착해 가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정착하노라고 정의를 내려도 저들과 같이 될 수 없고 생활양식이나 신앙적 표현이(예배,삶의
현장들)정찰될 수 없고 판단이 서는 것이다.
현지인 성도들에게 나를 보고 배우라고 할 만큼 저들의 삶의 기준과 동일시되지도 않았고,저들 인식에
좀 다른 사람으로 인정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들과 같이 되기 위해서 검소하고 불편하기도
해보았다.그러나 아무리 내가 검소하고 불편에 처해도 자기들보다 낫다는데..러시아언어로 설교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러시아언어를 사용하지만 자기들끼리의 감정전달만큼 되지 못하는 것 같은
반응들을 볼 때(이런 노력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니고),자아 중심적인 정착의지를 포기하고 현지인을
세우고 개발하는 개발자적인 지도자가 되어보리라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의식의 전환이며
현지인을 보는 편견과 한국적인 신앙표현방식을 포기하고 저들의 실수와 미숙함을 용납하리라는
마음의 준비이다. 그리고 우리의 도움으로 서가는 제자들을 보면서 기뻐하고 싶은 기대감이다.
이런 개발자적인 사역자끼리는 선교사간에 불화가 덜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나 중심이 아니라
현지인에게 그 공동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6.아시아에서의 한국교회의 역할
선교지 중앙아시아는 불과 4년 전에 열렸다. 아직까지는 다른 공산권 선교지처럼 졸속적인 선교착오가
심하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은 좋은 선교전략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국교회가 이곳에 열심을 덜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하게 사역이 진행되고 있지 않나 하는 자신감도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의 주님의 부르심은 크고 비젼이 있다. 이슬람 세계를 향한 기지로써 중국선교의
길목으로써,북한선교의 전략기지로써(중앙아시아 한인들이 남한의 한인보다 북한의 동포들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중앙아시아에 있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주님은 한국 교회를
부르신다고 믿는다.어떠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
(1) 중앙아시아를 중앙아시아적인 이해로 접근하며,이곳을 위해 기도를 바란다. 한인중심이라든지
이슬람을 위한 가교 정도가 아닌 중앙아시아의 필요에 민감한 기도를 바란다.
(2) 많은 교회가 지금까지 선교지에 조직교회를 세우는 것에 선교의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선교사들도 이에 부응하여 교회개척에 보람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만 머물지
말고 교회를 위한 사역,개척을 위한 사역에 힘을 모아주기를 바란다. 목사 선교사가 아니어도
가르치는 일과 돕는 사역을 할 수 있다. 파송 보낼 때 전권위임대사와 같은 선교사가 아니라, 필요한
사역에 필요한 선교사를 보내는 욕심 없는 후원을 기대한다(선교사 자녀학교가 미국선교단체에 의해
세워졌는데 한국어린이를 받다 보니 한국아이들이 다수가 되어버렸다. 영어할 수 있는 한국인
교사들을 원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교회에서 교사를 보낼 때가 되었다.)
(3)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으로 진출한 근로자들을 믿음으로 돌보아주는 일이 있다. 얼마전 한국에서
발생한 외국근로자 인권문제에 대해 소식을 들었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사자나 보낸
국가에서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우즈벡스탄에서 혹은 카작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진출한 근로자들이 그와 같은 일을 만났다면 그 경위야 어떻든 한국의 이미지는 물론
한국인 사역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직접 나타나리라 상상해 보았다.
일부 기업인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나 근로자 당사자들의 문제를 따질 수 없고 선교사 입장에서
제의한다면 외국근로자들을 섬기는 선교단체들이 서로 협의체를 구성하여 외국근로자에 대한 정부
통계를 근거로 하여 공장지역별 혹은 직능별,국가별로 나누어 돌보아주며 선교적인 접근을 기도한다면
이 또한 값진 사역일 것이다.현지인이 한국에 가서 보고 받은 소감을 말할 때 그 결과는 -200%이든지
아니면 +200%이상이다.
결론
중앙아시아에서의 선교적 전략은 중앙아시아를 바로 이해하는 기초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중앙아시아
다섯 나라는 공통적인 점도 있으나 각기 다른 형편에 있으므로 각 국가별로 적용을 다르게 해야 한다.
중앙아시아에서 진행되는 사역 가운데 중지되어야 할 일들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 개척에서
너무 개교회 중심적인 노력과 선교사 중심적인 것을 지양하고 현지인으로 하여금 사람을 얻어 더불어
교회를 세워 나가도록 돕는 교회개척을 돕고,개발하는 사역이 세워져야 한다. 이를 위하여 연합단체나
협의회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 지도자 훈련과정 내지는 신학교를 세우는 전략도 세울 필요가 있다.
이에 부응하여 현지에 헌신하는 사역자들은 개척자-정착자를 뛰어넘어 개발자로 세워주고 물러나는
섬기는 선교사,바울과 같은 선교자상을 지향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모교회가 기도와 후원을 통해
헌신자를 일으키고 세워서 주님이 바라는 선교사를 보내야 하며 개교회 명예를 세우는 사역이
아니더라도 돕는 사역자,협동할 수 있는 선교사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이와 함께 현지에서 한국에
입국한 근로자를 위한 선한 이웃으로서의 역할도 나누어지는 것이 한국교회의 몫이 되었다. 주님께서
중앙아시아를 향한 중대하고 세밀한 계획을 당신의 종들을 통해 이뤄가실 것을 믿으면서 지역별
전략을 발제한다.
I.선교일반전략
한국선교사들의 필리핀에서의 선교협력........박기호
인도차이나 복음화와 한국교회의 책임.........강대홍
중동지역 선교전략.........................근바나바
중앙아시아 지역선교.........................윤태영
남방선교현황과 우리의 선교전략..............서만수
파키스탄선교................................전재옥
몽골의 상황과 선교전략.....................천강민
선교사 파송 및 관리........................임순남
한국선교사 자녀의 이해와 양육..............박순남
파키스탄선교................................전재옥
들어가는 말
파키스탄은 이슬람공화국이다. 파키스탄 선교연구의 출발점으로서 첫째 인도대륙의 이슬람 전개와
이슬람 통치를 개관하고자 한다. 둘째로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형성과정을 검토한다. 셋째로
파키스탄 정부의 권력갈등 구조를 이해하고자 한다. 넷째로 파키스탄의 종교들을 간략하게나마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파키스탄의 한국선교사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1.인도대륙의 이슬람 전개와 이슬람 통치
인도대륙의 이슬람 도래는 주로 두 가지 길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하나는 주후 712년경부터
이라크에서부터 동남으로 해안을 거쳐 상인들을 중심으로 들어왔다. 초기에는 평화로운 접근으로
힌두교인과 공존을 하였던 것 같다. 아나마리 쉠밀은 그의 책[인도대륙의 이슬람교]에서 까씸 장군은
그의 인도대륙 점령시기에 힌두교인의 사원을 그냥 두었다고 하였다. 아랍 상인들은 힌두교인들과
함께 인도 남부 해안에 평화롭게 정착하였다고 했다. 다른 길은 주후 1000년경부터 중앙 아시아의
북서쪽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캐시미르 가까이 있는 카이바르 고원지대를 통한 것이었다.1) 이 시기에
지하드 정신에 따라 가즈니 지역의 마하무드 왕은 북쪽 푼잡지대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1750년경에는 인도대륙은 전적으로 이슬람 통치 아래 있게 되었다. 모걸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명목뿐이었지만 1857년까지 왕좌를 지키었다. 그러므로 8세기에서 19세기까지 긴 기간 동안 인도
대륙에서 이슬람 세력은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증가하였다.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할 때 인도대륙의 무슬림 교세는 전체 인구의 25%을 차지하였다 한다.
무슬림은 힌두인과 한 지역에 공존하면서 각각 다른 문화 발전을 이루었고 때로는 평화공존으로 또
때로는 억압된 폭력의 표출로 희생자들을 치르며 지내왔다.
인도대륙에서의 이슬람의 위치와 파키스탄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슬림 지도층의 서로 다른
두 가지태도로 인한 갈등을 집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이 갈등은 세속주의와 정통주의와의
마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하나의 태도는 안정을 우선 순위에 둔 세속적 정책과 다른 하나는
이슬람적 주장을 한 이슬람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다른 태도는 갈등과 진통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모걸제국의 아크바르 황제는 인도대륙에서 힌두교,불교와 함께 공존을 위한 혼합주의적
국가종교를 시도하였다. 그 반대로 모걸제국의 아루방제브 황제는 순니파의 하나피 학파의 전통적
입장을 그의 정치에 적용하는 강력한 이슬람 주장을 하였다. 아루랑제브 황제 이후 사실상 인도대륙의
이슬람 통치는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우랑제브 이후 인도대륙은 서구의 세력에 따르게 되었고
1847년 영국은 인도대륙을 전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은 영국통치하에서 가난과 굴욕을
치르었다. 무슬림들은 이 시기에 드릉의 우루드어 사용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소수의 지식층은 영어를
모어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무슬림 언어인 우르드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무슬림들에게 무슬림
정체성의 포기와 같이 느껴졌었다. 우르드어는 아랍어 다음으로 2억이 넘는 무슬림들이 쓰는
문학어인데,식민정치 때문에 사용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우르드어는 모걸제국의 쇠퇴시기에 하나의
이슬람 개혁운동이 새왈리 알라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그는 이슬람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대폭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 제스처는 코란의 우르드어 번역이다. 이 개혁주의 동향은
알라가대학교에서 영어교육과 서구 학문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우르드어를 가르치는 교육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이에 서구 학문의 도입에 반대하여 엄격한 울라마를 배출하는 무슬림 신학교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2세기 인도대륙의 이슬람은 세속주의와 정통주의가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세속주의는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인 무함마드 지나에 의하여 지속되었고 정통주의는 다수의
올라마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2. 파키스탄 형성
파키스탄 형성배경에는 주로 세속주의를 주장한 알라가대학교에서 서구학문을 한 사이어드 아하마드
계보의 세력이 핵심을 이루었다. 사이어드 아하마드(1817-1898)는 전통적인 무슬림 가정에서 성장하여
판사의 신분을 누리면서 서구의 학문과 이슬람교의 "샤리아"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
실현을 위하여 알라가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영국대학을 모델로 하면서 아랍어,우루드어와 이슬람교를
필수과목으로 정하였다. 그는 서구학문을 도입하면서 동시에 무슬림학자들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 다음으로 파키스탄 형성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는 무함마드 익끄발(1873-1938)이 있다.
그는 시인으로서 우르드어로 시를 썼으며 그는 자기 생전에 보지 못한 파키스탄 형성을 꿈꾸면서 시를
썼고 인도대륙의 무슬림들을 일깨웠다. 그는 퍼탄 지역,푼잡 지역, 즐로찌스탄 지역,씬드 지역이
하나의 국가로 연합되기를 꿈꾸었고 궁극적으로 무슬림들은 인도대륙에서 분리 독립되어 하나의
국가로서 무슬림 정체를 표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세속주의자들 이외에도 파키스탄 형성 배경에는
파키스탄 분리 독립운동을 제원한 무슬림인 소수의 울라마들이 있었다.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국가형성을 주장한 이들은 다양한 동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기들을
요약해 보면 첫째 인도대륙에서 무슬림이 소수 공동체로 존속할 경우 힌두교인의 경제적 및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둘째 무슬림들은 힌두교가 강제로 무슬림을 개종하게 하여
힌두교의 계층 밖의 사람들과 같이 억합할 것을 우려하였다. 셋째로 무슬림들은 우르드어를 전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분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무슬림 정체를 위하여 힌두교의 언어인 힌디어
대신에 우르드어 사용이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넷째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세속주의이거나
정통주의이거나 무슬림들은 다 이슬람의 정체가 무슬림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독립국가 안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데 있다.
무함마드 익끄발의 예언을 옮긴이는 무함마드 지나(1876-1948)였다. 이들의 사상적 교량은 우르드였고
이 언어 사용은 모든 무슬림들을 단합시키고 교육시키는데 절대적 역할을 하였다. 무함마드 지나는
파키스탄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지나는 1940년 이슬람연맹(Muslim League)정당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의 취임사에서 파키스탄이라는 이슬람 국가 형성을 암시하였다. 그는 무슬림과
힌두교인이 서로 같은지역에 있으나 서로 이질적 가치관과 문화 속에 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구
종교인들은 같은 도시와 같은 농촌에 살지만 서로 같은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지 않으며 결혼도 같은 종교권에서만 한다.이름으로도 무슬림과 힌두교인은 구별된다. 장례에서도
힌두교인은 화장을 하고, 무슬림들은 시신을 무덤에 묻는다.
영국이 인도대륙의 독립을 선언하자 힌두교인과 무슬림간에 충돌이 심화되었고 힌두교 지도자들은
간디를 위시하여 힌두교를 부흥시키려 하였다. 힌디어를 인도대륙의 언어로 정하며 힌두 문화화하려고
하였다. 무슬림들의 저항과 독립투쟁은 분명해졌다. 무슬림들은 다수 공동체가 아닌 소수 공동체의
열등감 사회적 차별은 이슬람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았으며 종내는 이슬람공화국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파키스탄은 1947년 8월 15일 1억4천4백만의 인구를 가진 이슬람 공화국이 지나의
지도력으로 힌두교의 인도대륙에서 신생국가로 탄생하였다. 당시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방들라데시)으로 구분되었고 지리적으로 인도를 가운데 둔 두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1971년에는 내란과 3회에 걸친 인도와의 전재으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하였다.
파키스탄은 선교지리학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북으로는 중국을 경계로 하고 있고 옛
비단길이 통하는 곳이며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 있다. 8125미터의 낭가-파르바드는 세게에서 가장 높은
아름다운 산맥이며 세계 등반가들의 꿈의 지역이다. 서 북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이 있고 이 지역을
통하여 초기 이슬람 접촉과 전개가 이루어졌던 곳이다. 험한 산악지대로 퍼탄 사람들이 주로 정착하고
있으며 이들은 현재도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곳은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며
동북쪽으로는 푼잡지역이다. 인도와의 경계선 때문에 인도와의 분쟁에서 희생자들이 많았던 곳이다.
아열대지역이므로 농사를 많이 짓고 파키스탄에서는 기후조건이 가장 좋은 곳이므로 교육도시들이
발달하였고 인구도 가장 밀접하여 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몰려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서남쪽으로는
이란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불로찌스탄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가장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서 사막과
고지가 섞여 있으며 인구분포가 다른 지역보다 낮다. 동남지역은 씬드지역인데 인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인더스 강이 바다로 흐르는 지역으로서 사막이지만 강변은 비옥하고 과수와 목장이
아름답다.운하시설이 잘 되어서 목축뿐만 아니라 농사도 지을 수 있다. 씬드사람들은 북쪽 퍼탄과
푼잡 사람들과는 달리 여유가 있고 동작이 느리고 피부가 덜 까맣다. 그들은 느릿한 몸짓으로
살아간다. 이 지역에는 문명 발상지인 모헨조다로가 있고 기독교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다. 그리고
유일한 항구 카라치가 있다. 씬드는 필자의 선교지였다.
3. 파키스탄정부
1) 1947-1971:
1947년 이후 거의 25년간 파키스탄은 새 정부 정비, 난민문제,카쉬미르 문제들로 긍긍하였다. 새
정부는 지나 대통령과 아윱 칸 대통령 그리고 즐르휘카르 알리 부토의 집권을 통하여 헌법재정과
개정으로 진통을 겪으면서 이슬람요소들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유지하였다. 새 정부는 세속주의와
정통주의의 갈등은 해소되지 못한 채 동파키스탄의 결별시기까지 지속되었다.
2) 1971-1977:
부토 정권은 사회주의로 평가되었었지만, 실제로는 이슬람요소가 강화된 때다. 그는 모든 기독교
교육기관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였다. 교육기관에 아랍어는
필수과목으로 설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대 정당들은 그를 이슬람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집권자라고 비판을 하였고 부터 정권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아하미디아파를
비이슬람공동체로 선포하였고 음주금지,도박과 경마 금지, 나이트 클럽의 금지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부토정권의 반대파들은 연합정당을 만들어서 Pakistan National Alliance(PNA)라고
칭하였고 이 PNA는 부토의 정당, Pakistan People's Party(PPP)와 심각한 대립세력이 되었다. 1977년
총선거에서 부토는 부정선거 고발로 인하여 실권하였고 갈등 끝에 투옥되고 처형되었다.
3) 1977-1988 :
1977년 7월 5일 지아 올 학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그의 정당의 주 세력은
즈마엇대 이슬람이었고 이것은 "샤리아"에 의한 정치를 의미하였다. 예를 들면 후드드가 강조되었다.
절도범은 오른 손목이 절단되는 책벌을 받는 것이었다. 폭행을 자행하지 않은 고속도로의 약탈은
30대의 태형이 주어졌다. 간음죄는 기혼자일 경우는 돌로 쳐 죽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100대의
태형, 거짓비방은 80대의 태령,음주는 80대의 태형을 책벌로 정한것이다. 지아 올 학그 정권은
부토정권 때보다 강한 이슬람화, 원리주의에 근거한 이슬람화를 목표로 하였다. 이슬람의 다섯기둥은
정부 관리들에게 필수적이었다.
4) 1988- 현재
1988년 12월 즐르휘카르 부토수상의 딸, 베나지느 부토가 정권을 잡았고 여성으로서 파키스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후 1990년 8월까지 집권하였고 실권의 3년을 반대 정당 Pakistan Muslim
League(PML)지도자 주네조 집권하에 지냈으며,다시 1993년 10월 PPP정권을 회복하여다. 베나지르 부토
정권은 그의 부친의 정책과는 달리 모든 교육기관과 기업체들을 국유화했던 정책을 자유자제로
변경하였다.(Nationalization/den-ation-alization).그 밖에도 여성의 인권을 위한 꾸준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부토수상은 이미 1971년 여성정치가의 꿈을 가지고 무슬림 여권선언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2) 위의 4시기를 통하여 본 파키스탄 정부는 다양한 정책들을 시도하면서 공통적으로 이슬람
부흥을 목적으로 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 이슬람화가 성공인가 아니면 실패인가라는 많은
파키스탄 지성인들의 고민이되고 있다. 그들은 종족간의 내란과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과 파키스탄의
다른 종교인들,특히 기독교인들과 힌두교인들의 불안을 목격하면서 이슬람화의 의미를 묻는다고 본다.
특히 지아 울 학그 정권은 파키스탄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이슬람화를 강조하였고 이것은 실패로
나타났다.3) 국가와 민족간의 차이가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파키스탄은 170이상의 종족들로
구성되었고 그중 가장 큰 종족들이 자기들의 지역어와 문화를 지키면서 파키스탄 국가 안에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 형성 이후 인도와의 3회에 걸친 전쟁과 불안한 정부의 교체와 군 계엄령 정치,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권위와 군력의 행사는 파키스탄의 불안한 정세를 더해 주었고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다.
4. 파키스탄의 종교들
파키스탄은 이슬람 공화국으로 '샤리아'에 근거하여 이슬람화 정치를 시도해왔다. 1977년 이후
지금까지 강한 극단적 이슬람 정당에 크게 좌우되어 왔다. 점진적으로 '샤리아'법이 헌법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파키스탄의 다른 종교인들이 박해와 억압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초기 파키스탄 형성
때의 지나 정권과 아윱 칸 정권 때와는 달리 상당히 심각한 상황을 빚어주고 있다. UN 의 공식
멤버로서 파키스탄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는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파키스탄 다수의
울리마에 의하면 배교자는 죽음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고 코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모독도
죽음의 벌을 받게 된다. 실제 지난 1994년 14세의 살라마트 마시와 44세의 래해마트 마시는 여론과
탄원으로 간신히 석방되었으나 본토에 있지 못하고 독일에 망명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4)
1) 이슬람
파키스탄 인구는 1990년 122,666,000, 1995년은 141,599,000이다.5) 그중 이슬람은 96.7%의 교세를
가지고 있고 순니가 67.6%,쉬아가 26.1%(이스마일리도 포함함),아하미디아는 공식발표는 0.13% 그러나
비공식 자료에는 3%(줄르휘카르 부토정권 시기에 아하미디아는 비무슬림으로 선포되었다)이다.
아하미디아는 정부 보도에서는 무슬림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다른 소수 종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박해와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들은 비밀리에 자기들의 소속을 지키고 있다.
2) 힌두교
힌두교인은 1.5%이다.이들은 주로 씬드 사막지역의 계층 밖의 천민으로 바스띠를 이루고 산다. 주로
유랑민들로 인더스 강가를 따라 목축을 하며, 더러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다.
거의 100% 문맹이다. 이들은 꼴리,아오와리,바그리,오드,다트키로 전적으로 미전도종족이다. 북 푼잡
지역에서는 쭈르하가 복음화되어 현재 기독교 교세를 형성한 사례 이외에 아직도 힌두교 계층 밖에
종족들은 문맹, 가난, 소외의 상황에 있다.
3) 기타종교
전체 인구의 0.1%로 정령숭배,바하이,조로아스터교,불교를 들수 있다.
4) 기독교
기독교 교세는 1.7%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2.-3%까지 된다고 한다. 기독교 전개는 개신교
선교로서는 1833년부터이다.가톨릭교회와 선교는 별도로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제목이다.
개신교 선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로우리 목사와 사모가 캘커타에 도착하여 푼잡 지역에 있는
씨크교도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한 것이 그 출발이다. 로우리 부인은 병으로 선교지에서 세상을
떠났고 로우리 선교사도 말라리아로 시달리다가 귀국하여 장로교 해외선교부를 조직하였다.
1849년부터는 찰스 포먼과 존 뉴톤이 본격적으로 푼잡지역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성공회
대표선교부(CMS)가 씬드지역에,감리교가 카라치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후 대부분의 교단들이 들어와 활동을 하였다. 의료선교,기독교 변론선교 등을 시도하였지만
교회개척은 극히 어려웠고 초기에는 교인수가 극히 적었다. 그러나 1890년에서 1930년에는 힌두교의
쭈르하 종족이 거의 전부 집단 개종을 하여 현재 파키스탄 교세의 80%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6)
쭈르하 계층의 개종이야기는 [파키스탄,나의 사랑]에서 이야기로 소개되었다.7) 파키스탄 교회에
관하여 도시교회,농촌교회,변두리교회에 관하여 이야기를 이미 소개해 놓은 것이 있다.8)
교단교회는 51개에서 2,883개의 교회들이 있다.9) 개신교 선교사들은 72선교부에서 736명이 파송되어
있다.대표적인 국제 선교부는 Interserve,TEAM, CMS,SIM,OM등이 있다. 현재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직도 서구 선교사들이며,10%미만의 아시아 선교사들이 80년대 후반부터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5. 파키스탄의 한국선교사
한국교회는 1960년에 이슬람권 파키스탄에 파키스탄 연합교회(United Church of Pakistan)의 초대
주교인 챤두래이(힌두교에서 개종한 파키스탄 교회 지도자)의 공식 초청에 의하여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의 비전과 후원으로 3명의 선교사 교사들을 파송함으로 처음으로 이슬람권 선교를 시작하였다.
다음은 파키스탄에 파송되었던 선교사들의 명단이다. 짧은 시간에 조사하는 한계로 인하여 명단에
누락된 선교부와 선교사가 있다면 다음 자료에 포함시킬 수 있도록 협조를 바란다.
1) 이화여대 선교부:전재옥 선교사(1960.8-1974.8),조성자 선교사(1960-1967),김은자
선교사(1960-1962).이들은 각각 하이드라바드,싸카,쿠에타에서 교사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김은자
선교사는 1962년에 미국 유학으로 선교지를 떠났고 조성자 선교사는 파키스탄에 문을 연 한국 영사관
현지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하와이 한국 대사관 직원으로 1970년에 이전하였다. 전재옥 선교사는
카라치 신학원(Karachi Institute of Theology)에서 1974년까지 신학교육과 대학생선교(PFES-Pakistan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를 하였고 그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선교학교수로 있으면서
이슬람권 선교 증진을 위한 선교훈련과 연구를 하고 있다.
2) 통합선교국:정성균/임평수 선교사(1980-1984).정성균 목사는 구즈란왈라에 있는 신학교(United
Gujranwala Seminary)에서 열렬한 선교활동을 하다가 B형 간염으로 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이화여대 대학교회:박명화 선교사(1983-1985).박명화 선교사는 파키스탄에 매우 필요한 분야인
특수교육선교사로 나가 라호르에 있는 TSA 소속기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건강관계로 갑자기
귀국하였다.
4) 충현교회의 당시 당회장 이종윤목사와 CCC대표 김준곤 목사는 협력선교 프로그램으로 의료선교팀을
파송하였다. 의사였던 선우형식(1989-1994)을 팀장으로 하여
최경순,조재선,강옥희,장원기,송일주,김탁균,김귀자,천혜경,배은희,조경련,좌영희 선교사가 파성되어
카라치 근교에 선교병원,선한사마리아인 병원을 설립하였다. 2회 팀장을 조재선 선교사가 맡고 1993년
주인숙,최숙향,손희연,나수진 선교사를 파송,현재도 지속하고 있다.
5) 인터서브는 정경철/이은숙 선교사(1993.12-),권누가/이영진 선교사(1993.11-) 이강락
선교사(1993.12-)를 파송하였다.
6) 합동총회 선교국은 최명희 선교사(1991.11-)을 구즈란왈라 신학교에 파송하였다.
7) 통합 총회선교국은 명성교회의 단독후원으로 김병교/한경복 선교사(1987.7-)을 해슬라바드에
파송하고 교회개척,학교설립,목회자 재교육 등의 다양한 선교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8) OM은 민명홍 선교사와 백인숙 선교를 단기로 1980년대 중반에 파송하였다. 김덕래/초미성
선교사(1987-1988),최미언 선교사(1989-1990),안정희 선교사(1993-),이옥례 선교사(1993-)을
지원하였고 그 외에 20여명의 OM 선교사들이 파키스탄에서 사역하였지만 이름을 알 수가 없다.
9) 외항선교회는 이경애 선교사(1987.7-1980.9) 를 파송하였다.
10) HOPE는 이름없이 한 선교사를 파송하여 후원하고 있다.
11) 위의 이름으로 소개하는 선교사드래 이외에 카라치와 라호르,이슬람마바드 등 몇 도시에서는 한국
기업인들이 자립선교사로 사역한다고 보아야 한다. 더욱이 카라치와 라호르에 있는 한인 교포교회는
중요한 사역을 하고 있다고 본다.1994년 8월에 밝혀진 선교사들은 31명이었는데 이러한 수는
유동적이며 이슬람권 선교는 선교사로 공식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만을 사역자로 생각하는 협소한
사고에서 다양한 직업의 자립선교요원들을 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맺는 말
파키스탄에서 한국교회의 파송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35년이 되었다. 이제 파키스탄 선교활동을
전반적으로 보고하고 후원하는 협력기구와 연구차원의 직업이 필요하다. 한국선교사들이 이슬람권
상황에 맞는 선교이론과 실제를 펴 나가기 위하여 체계적인 후원과 훈련이 요구된다. 지금까지는
선교사들 자체 내에서 친교정도 이외는 함께 선교정책을 의논 검토하고 선교활동을 평가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분산되어 사역에 전념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키스탄 선교사들은 1994년 7월부터
파키스탄 연구회라는 친교및 협력을 위한 모임을 가지고 서로 소식을 나누고 있다. 국내에서
파키스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하는 선교부와 관련자들이 함께 모여 장기적 선교사역에 대한
비전과 지난 날의 선교활동을 평가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오늘과 내일의 파키스탄
한국선교사들을 위하여 파키스탄 선교의 실제를 보여주는 자료집이 발간되어야 한다.
최근에 파키스탄 선교에 관심 있고 이슬람권 선교를 중요시하는 교회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뜻을
합하여 CCC. 파키스탄기도회, 이슬람연구소 등 선한사마리아선교회를 설치하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회는 다음과 같은 사역 목표를 두게 되기를 바란다. 첫째 파키스탄을 비롯한
이슬람권에 파송된 한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의 활성화를 위한 연구와 후원 및 협력을 하는
것이다.둘째, 파키스탄 교회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선교정책을
세우는 것이다. 셋째 이슬람권 선교사들의 평생선교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넷째 국내
이슬람권 관련자들과 만나고 함께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다.다섯째 이슬람권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관을
마련하는 것이다.
I.선교일반전략
한국선교사들의 필리핀에서의 선교협력........박기호
인도차이나 복음화와 한국교회의 책임.........강대홍
중동지역 선교전략.........................근바나바
중앙아시아 지역선교.........................윤태영
남방선교현황과 우리의 선교전략..............서만수
파키스탄선교................................전재옥
몽골의 상황과 선교전략.....................천강민
선교사 파송 및 관리........................임순남
한국선교사 자녀의 이해와 양육..............박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