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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 성전에 가득찬 여호와의 영광 | |
1. |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
2. |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대하5:14 |
3. |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있는 것을 보고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
○ 제사 드림과 백성의 기쁨 | |
4. | 이에 왕과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리니 |
5. | 솔로몬왕의 드린 제물이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 이만이라 이와 같이 왕과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전의 낙성식을 행하니라 |
6. | 때에 제사장들은 직분대로 모셔 서고 레위 사람도 여호와의 악기를 가지고 섰으니 이 악기는 전에 다윗왕이 레위 사람으로 여호와를 찬송하려고 만들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감사케 하던 것이라 제사장은 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온 이스라엘은 섰더라 대상15:16, 대하5:12 |
7. | 솔로몬이 또 여호와의 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거기서 번제물과 화목제의 기름을 드렸으니 이는 솔로몬의 지은 놋단이 능히 그 번제물과 소제물과 기름을 용납할 수 없음이더라 왕상8:64 |
8. | 그 때에 솔로몬이 칠일 동안 절기를 지켰는데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온 이스라엘의 심히 큰 회중이 모여 저와 함께 하였더니 창15:18 |
9. | 제 팔일에 무리가 한 성회를 여니라 단의 낙성식을 칠일 동안 행한 후 이 절기를 칠일 동안 지키니라 |
10. | 칠월 이십 삼일에 왕이 백성을 그 장막으로 돌려보내매 백성이 여호와께서 다윗과 솔로몬과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 |
11. |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필역하고 무릇 그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어떻게 만들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
○ 솔로몬과 맺은 주의 언약 | |
12. |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
13. |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대하6:26 |
14. |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
15. |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
16. |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대하6:6 |
17. |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비 다윗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한 모든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규례를 지키면 |
18. | 내가 네 나라 위를 견고케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비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대로 하리라 삼하7:12 |
19. |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이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숭배하면 |
20. | 내가 저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되게 하리니 |
21. | 이 전이 비록 높을찌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렘22:8 |
22. |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셨다 하리라 하셨더라 삿2:13 |
오늘의 역사
① 고려 건국(918) : 왕건이 시조.
음력 6월 15일.
⇨6월 15일.
② 일제 흥선대원군을 지원, 친일정권 수립(1894) : 영조의 현손이며 남연군의 아들로 1843년(헌종 9) 흥선군에 봉해지고 그 후 한직을 역임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신정왕후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건봉되었고 이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선포되자 섭정을 맡았다.
안동김씨의 주류를 숙청하는 한편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 47개 사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하며 국가재정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애 중앙집권적 정치기강을 수립했다.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외래문명의 수용이 뒤늦게 되었다.
그의 섭정 10년 동안 반대 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1873년(고종 10) 그의 실정이 최익현에 의해 탄핵받았다.
그리고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은퇴하였다.
이 때부터 재집권을 노리던 중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다시 잡고 행방불명된 명성황후의 죽음을 선포했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에 의한 청나라 군사의 출동으로 납치되어 청나라 천진에 4년 간 유폐되었다.
1885년(고종 22)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원세개와 협력하여 장남 이재황을 옹립하려다 실패했다.
1895년(고종 32) 재집권을 위해 일본 공사 미우라와 결탁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③ 홍난파 노래 비(1974) : 수원시 남창동 팔달(八達) 공원에 복원됨.
홍난파 노래비는 1868.10월 고향의 봄 작곡 70돌을 맞은 수원시민의 날에 새싹회와 수원시민 학생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것이다.
홍난파 ; 1898 경기도 화성군 남양에서 태어남
1918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귀국
1920 나라없는 민족의 슬픔을 담은 <봉선화> 작곡
대표작 <성불사의 밤><옛 동산에 올라><달마중><고향의 봄> 등.
⇨8월 30일.
⇨4월 10일.
④ 세계 최초 원자탄 실험(1945) :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에는 도이치와 이탈리아에서 쫓겨난 이름 높은 과학자들이 많이 모였다.
이들은 적국이 원자력을 이용한 무서운 폭탄을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여, 미국 정부에서는 원자탄을 만들 연구소를 새로 설치했다.
이곳에서 우라늄의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폭탄의 제조에 성공, 1945.7.23 뉴멕시코주의 알라모고르도 사막에서 세계처음으로 이 폭발을 실험했다.
⑤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사상 최대의 흑인폭동(1967) : 디트로이트 경찰이 영업시간외 음주를 죄목으로 흑인 민주 집회에 참여한 74명의 흑인을 연행한 것이 발단이 된 이 사태는 분노가 폭발한 수천 명의 흑인을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비롯한 1만 6천명의 정부군이 동원되는 등 때아닌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여전한 인종차별로 인한 이 폭동은 급진적 흑인운동을 폭발기킨 계기를 제공했고 흑인음악의 주류를 사회의식으로 무장된 ''소울''로 변화시켜 놓았다.
사회개혁 및 반전운동 물결이 거세지면서 록음악이 정치성을 띠었듯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도 강성의 소울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미국 디트로이트는 분단의 도시다.
분단의 한가운데를 8마일 로드(eight mile road)가 가로지르고 있다.
1920년대 흑인들이 남쪽 도시 중심부로 몰려들자 백인들은 이 도로를 건너 북쪽 외곽지역으로 옮겨갔다. 8마일 로드는 인종의 경계선인 셈이다.
흑인들의 암울한 삶이 보기 싫었을까. 1950년대 초 백인들은 8마일 로드를 따라 2m 높이의 두꺼운 콘크리트 차단벽을 설치했다.
백인들은 안도감을 얻었고 흑인들은 절망감을 얻었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인종갈등의 용광로는 1967년 7월 23일 폭발했다.
시내의 한 무허가 술집을 단속하던 백인 경찰들이 80여 명에 달하는 흑인 손님 전원을 체포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흑인들의 항의가 폭동으로 번졌다.
닷새 동안 계속된 폭동으로 43명이 사망하고 1200여 명이 부상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흑인폭동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지만 북부 대도시 흑인들의 좌절감은 깊어만 갔다.
남부 흑인의 시민권 획득에 주력했던 흑인운동은 북부 흑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해결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동차회사들이 속속 다른 지역으로 공장을 옮겨가자 일자리를 잃은 디트로이트 흑인들의 불만은 폭력으로 분출됐다.
폭동은 도시의 몰락을 재촉했다.
현재 디트로이트 인구는 1950년대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이 중 백인 인구는 15%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도만 다를 뿐 미국 대도시들의 흑백갈등 지형도는 디트로이트와 비슷하다.
급성장하는 외곽의 백인 주거지와 그 한가운데 포위된 흑인 빈민가. 마치 주변을 둘러싼 백인들이 흑인들을 바라보며 너희들끼리 어떻게 하나 보자며 구경하는 듯하다.
미국 민권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회학자 윌리엄 에드워드 듀보이스는 1900년대 초 일찍이 20세기 미국의 문제는 피부색에서 비롯될 것이다고 내다봤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은 여전히 진실로 다가온다.
아니, 인종문제는 계급이나 성 문제와 얽히고설키면서 100년 전보다 미국사회에 더욱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2005)
⑥ 미국 포드 첫 차 시판(1903) : 헨리 포드는 1903년 6월 자본주들의 자본을 모은 15만 달러로 포드자동차 회사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그러나 당시 자동차는 신기하지만 고장이 잦고 시끄러우며 비실용적인 사치품에 불과 했다.
때문에 포드가 은행에서 대출을 요청하자 은행장은 "멀쩡한 말들이 이렇게 많은데 자동차 사업이 되겠는가?"라며 대출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한편, 포드는 이회사를 세우면서 혼성주주제 라는 새로운 창업법과 경영법을 도입한다.
회사의 일정 지분을 투자자에게 배분하는 방법으로 남의 기술과 돈, 그리고 공장과 기계시설을 이용해 차를 만들었던 것이다.
경쟁사를 이기는 길은 자동차를 서민들이 생활에 이용할수 있도록 값이 싸고 실용적인 차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 포드는 1903년 7월 2기통엔진의 자동차를 시작으로 1908년 혁명적인 자동차 포드 T형을 개발하였다.
1903년 7월 23일 첫차, 그것도 포드가 직접 디자인한 자동차를 팔게 되었다.
그 당시 포드사는 $100.000를 투자하였다.
회사 운영방식은 독특해 자신의 돈을 직접 쓰지 않고 남의 돈과 기술, 그리고 공장과 기계시설들을 이용해 첫차 모델A(2실린더 8마력 엔진)와 모델B, 모델K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먼저 생겨난 회사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 그는 1908년 혁명적인 자동차 T형 포드를 만들어낸다.
이 포드 T형은 1927년 단종 될때까지 1.500만대를 만들어 20세기 전반 전세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한 자동차왕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신제품 차를 소개한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관리방식과 경영시스템을 도입한데 있다.
''부자들의 장난감인 자동차를 서민들의 생필품으로 바꾸겠다''는 신념이 포드의 자동차 왕국 건설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창업 정신은 1913년 컨베이어 벨트 생산방식의 탄생으로 이어져 자동차 대량생산의 기틀이 마련됐다.
그는 컨베이어시스템을 통해 1공정에 18분이 걸리던 제조시간을 5분으로 단축했다.
이를 통해 다은 자동차가 2천달러를 호가할 때 포드사의 모델-T 값을 2백60달러로 낮출 수 있었다.
자동차는 중산층의 대두와 자동차의 대량생산으로 보통사람들의 필수품이 되기 시작했으며 거대한 미국 경제력의 밑받침이 되었다. 그는 1947년 84세의 나이로 뇌졸증으로 사망하였다.
⑦ 그리스 군사통치 종식(1974) : 1967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지 7년 만에 그리스 군사혁명위원회 파에돈 기지키스 의장이 회의를 소집해 군정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프랑스에 망명중이던 전 총리 콘스탄틴 카라만리스가 귀국하게 되는데 카라만리스 전 총리는 귀국 즉시 민간정부를 구성하고 민주체제를 회복했다.
그리스는 지난 1967년 파파도플로스 육군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서구 최초로 군사정권을 수립했으며 그리스인들은 미국이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등 내정에 간섭했다며 비난해왔었다.
⑧ 체코와 슬로바키아 해체 합의(1992) : 1992년 이 날, 바츨라프 체코 총리와 블라디미르 메치아르 슬로바키아 총리가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을 해체하기로 합의한다.
1918년 연방이 되었던 두 나라는 결국 언어와 전통이 달라 74년 만에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이 합의는 1993년 1월 1일, 각자 독립공화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⑨ 중공(中共) 수립(1921) : 중국공산당 출범.
1921년7월23일 마오쩌둥(毛澤東), 둥비우(董必武), 장쿼타오(張國燾), 저우포하이(周佛海) 등 지역대표 13명과 코민테른 주(駐)중국 대표 헨드리쿠스 마링, 코민테른 극동서기처 대표 니콜스키가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공산당을 출범시켰다.
최고지도자인 총서기로는 천두슈(陳獨秀)가 선출됐다.
당원 총 57명의 꼬마정당으로 출발한 중국공산당은 이내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산당으로 자라났고, 역사상 가장 긴 혁명을 통해 중국 대륙을 탈바꿈시켰다.
중국공산당은 냉전 시절 소련공산당과 함께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영수(領袖) 노릇을 했다.
당 스스로 과오를 인정한 문화대혁명(1966~1976)을 통해 수정주의 비판의 최선봉에 서기도 한 중국공산당은 한 때 그 고삐 풀린 극좌 노선 덕분에 제3세계 좌익 정파들만이 아니라 서유럽 좌파 지식인들에게도 어둠의 세계를 비추는 한 줄기 빛으로 여겨졌다.
문화혁명의 종결과 덩샤오핑(鄧小平) 집권 이래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린 중국공산당은 이제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 정당이라고 부르기 어렵게 됐지만, 세계 최대 인구를 지닌 나라에서 여전히 권력의 유일한 원천이 되고 있다.
중국이라는 말이 대만을 가리켰던 1980년대 말까지의 한국 사회에서 대륙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약칭인 중공으로 불렸다.
중공 창당 대회에 참가한 인물들의 뒷날은 크게 엇갈렸다. 마오쩌둥은 1935년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의 당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권을 획득한 이래 1976년 죽을 때까지 당 최고지도자로 있었다.
일본 지역을 대표해 창당 대회에 참가한 저우포하이는 곧 전향해 반공 캠페인에 앞장서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전범으로 기소돼 옥사했고, 코민테른을 대표했던 네덜란드인 마링은 귀국해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다 독일 점령 하에서 게슈타포에 체포돼 총살됐다(고종석,2004).
⑩ 나세르 주도 무혈 쿠데타 발발(1952) : 7월 23일 이집트의 나세르는 영국 지배하의 이집트 왕조를 타도하는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밀 혁명조직 '자유장교단'의 89명은 파루크 1세를 망명시키고, 모하마드 나기브 소장이 명목상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나세르가 이끄는 11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혁명평의회는 정부를 장악했다.
1954년 봄 복잡한 정치적 음모에 연루된 나기브는 해임․연금당하고 나세르가 막후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총리가 되었다.
1956년 나세르는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삼는 이집트 헌법을 공포해 통제권을 장악하고,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기도 했다. 나세르는 18년간 이집트의 정치 지도자로 있으면서 아랍 연합공화국을 세우고, 요르단 내전을 중재하는 등 아랍 세계의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사후 안와르 아스 사다트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⑪ 국제포경위원회, 포경전면금지를 결정(1982) : 반(半)인어 모습으로 포경반대를 호소하는 데모대와 3년의 유예기간동안 상업적인 포경을 전면금지하기로 한 국제포경위원회(IWC) 위원이 서로 악수하고 있다.
1982년 7월 23일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6년 이후 상업포경을 전면금지하기로 결정했다.
1972년 스톡홀름 유엔 인간환경회의가 '고래가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며 10년간 포경 금지를 요청하자 10년간의 갑론을박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IWC(국제포경위원회)는 당초에는 고래를 관리해 계속 잡아나가려는 취지에서 1946년 설립됐다.
당시 무분별한 포경으로 고래 자원의 감소 징후가 뚜렷해지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관리 대상은 전체 80여종 중 밍크고래 등 대형 9종. IWC는 산하 과학위원회가 고래 자원 유지가 가능하도록 합리적인 할당량을 제시하면 이에 대한 포경업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본 회의에서 포획량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본회의에서는 보통 할당량을 상향 조정하게 돼 '고래 고갈'에 직면했다.
이같은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 이날의 포경전면금지 결정이다.
⑫ 그리스 군부통치 종식(1974) : 그리스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정으로 복귀한 날이 1974년 오늘이다.
그리스 군사혁명위원회 파에돈 기지키스 의장은 회의를 소집해 군정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8일전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군대를 조종해 쿠데타를 일으켰던 그리스 군사정부!
국제적인 비난과 키프로스를 지원하는 터키와 전면전에 직면하자 스스로 군정을 끝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1967년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선지 7년만이다.
프랑스에 망명중이던 콘스탄틴 카라만리스 전총리는 귀국해 민간정부를 구성했다.
⑬ 인도네시아 와히드 대통령 탄핵(2001) : 압두르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각종 부패 스캔들에 휘말려 탄핵을 받고 대통령직을 실각한 날이 2001년 오늘이다.
집권 21개월 만으로 와히드는 무능력과 부패의혹 연루에 시달려왔다.
인도네시아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국민협의회, MPR은 와히드 대통령 탄핵을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했다.
와히드는 국민협의회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포고령을 발표했으나 군부와 경찰이 포고령을 거부했고 국민협의회 특별총회는 포고령을 무효화하고 탄핵을 전격 결의했다.
이에따라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부통령이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⑭ 일본 무라야마 총리 방한(1994) : 일본 무라야마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1994년 오늘 한국을 방문했다.
한일정상회담은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세번째 일본 무라야마 사회당 정부가 들어선지 첫번째 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청와대에서 90분 동안의 회담에서 한반도 정세와 과거 사 문제, 경제분야 등에 대해 폭 넓은 의견을 교환했다.
무라야마 일본 총리는 북한과 교섭을 할 때 한국과 긴밀한 협조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무라야마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은 한.일 두 나라의 신뢰회복과 협력기반 강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됐다.
⑮ 이스라엘 총선 실시(1984) : 이스라엘에서 임기 4년의 의원 120명을 뽑는 총선거가 1984년 오늘 실시됐다.
선거결과 노동당이 45석, 리쿠드 당이 41석,나머지 13개 군소정당이 34석을 차지했다.
어느 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해 이스라엘은 연정이 불가피하게 된다.
노동당과 리쿠드당은 두 달 뒤 페레스 당수와 샤미르 당수를 총리와 부총리로 각각 선출하고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⑯ 이스라엘 항공기 첫 공중납치(1968) : 그리스 아테네를 출발해 이스라엘 로드로 향하던 보잉 707 기종의 이스라엘 항공기에서 아랍인 3명이 조용히 일어섰다.
승무원 10명과 승객 38명을 태운 항공기가 이스라엘 영공에 들어서기 전이었다.
이들은 좌석에서 일어나자마자 성큼성큼 비행기 앞쪽으로 걸어가 순식간에 조종석을 점거했다.
1968년 7월 23일 이스라엘의 민간 항공기는 그렇게 팔레스타인 테러단체에 의해 처음으로 공중 납치됐다.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소속의 납치범들은 기수를 돌려 항공기를 알제리 공항에 강제 착륙시켰다.
납치범들은 12명의 유대인만 인질로 잡고 나머지 승객과 승무원은 모두 풀어줬다.
PFLP는 즉각 인질 석방 조건으로 기소된 16명의 아랍 테러리스트를 넘겨줄 것을 이스라엘 정부에 요구했다.
쉽게 실마리를 풀지 못한 채 시간만 계속 허비하던 협상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결국 먼저 무릎을 꿇었다.
인질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은 40일 만에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첫 시도에서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자 PFLP는 한층 고무됐고 더욱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3개월여가 지난 12월 26일 PFLP 소속 2명의 테러리스트가 아테네 공항에서 이스라엘 항공기에 총격을 가해 이스라엘 정비사 한 명을 살해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의 대응은 이전과 달랐다.
3일 뒤 즉각 응징에 나선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베이루트 공항에 야간 공습을 감행해 14대의 비행기를 파괴했다.
PFLP도 물러서지 않았다.
1969년 몇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 항공기를 공격하던 PFLP는 이듬해 악명 높은 공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9·11테러가 있기 전까지는 최악의 사건이었다.
9월 6일 유럽 각 공항을 출발해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항공기 4대를 연달아 공중 납치한 것.
그중 한 대는 여객기 안에서 범인이 살해돼 해결됐지만 나머지 항공기 3대는 폭파됐다.
다행히 폭파 전에 인질로 잡힌 승객과 승무원들은 모두 석방됐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전 세계 항공기 승객들을 공포에 떨게 한 PFLP의 항공기 공중 납치 테러는 1976년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6월 27일 PFLP 소속 납치범 4명은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을 출발해 프랑스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항공기를 공중 납치해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켰다.
납치범들은 협상을 요구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특공대를 파견해 납치범들을 모두 살해하고 인질들을 구출했다.
이스라엘의 초강수 대응에다 각국의 검문검색이 강화되면서 PFLP의 항공기 공중 납치 테러는 이후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2008)
⑰ 일본 쌀 소동 : 1918년 7월23일, 일본 도야마(富山)현의 우오조(魚津)항.
선박 이부키마루(伊吹丸)에 홋카이도(北海道)로 내갈 쌀을 실으려 할 때 주부 300여명이 몰려나왔다.
주부들은 선적을 중단하고 쌀을 주민들에게 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관(官)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일본인들이 왜 소동을 일으켰을까. 물가고 탓이다.
1차대전 기간 내내 한섬(150㎏)당 10엔이라는 가격을 유지해온 쌀 값이 연초부터 오르기 시작해 6월 20엔, 7월 들어서는 30엔으로 뛰자 눌러왔던 불만이 터졌다.
쌀 값이 오른 이유는 수요 증가와 투기. 전쟁특수에 따른 호황으로 쌀 소비는 느는 데 비해 농가 인구는 줄어 수급에 변화가 생겼다.
공산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한 시베리아 출병으로 쌀값이 상승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쌀을 매점매석한 미곡상들의 투기도 물가고를 부추겼다.
우오조항 주부들의 봉기는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바로 해산됐지만 불씨가 일본 전역으로 번지며 9월 초까지 연인원 200만명이 참여하는 ‘잇키(一揆ㆍ민중봉기)’로 커졌다.
찬 바람이 불며 봉기는 가라앉았지만 적지 않은 파장을 남겼다.
당장 내각이 사퇴하고 일본 최초로 정당내각제가 선보였다.
민주주의가 반짝했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도 열렸다.
일본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이때부터다.
보도통제에 맞서 쌀 소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한 아사이(朝日)신문은 정론지로서 명성을 굳혔다.
정작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은 조선. 쌀 부족 타개를 위해 일본은 조선에서 산미증식에 적극 나섰다.
덕분에 쌀 생산이 배증했지만 조선인 1인당 미곡 섭취량은 오히려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증산분 이상의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제 것으로 여기는 일본인들의 습성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하다.
(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⑱ 건국 이래 최악의 해양사고, 씨프린스호 좌초(1995) : LG칼텍스정유㈜의 기름을 적재하고 있던 씨프린스호는 1995년 7월23일 태풍으로 전남 여수시 남면 소리도 덕포해안에 침몰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유와 벙커C유 등 총 5천35t의 원유가 유출돼 3천826㏊의 양식장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해양오염방제비용으로 총 198억원이 투입되는 등 대규모 오염 복원작업이 실시됐으나 사고발생 7년이 지난 현재까지 침몰해역 밑바닥에서는 기름띠가 일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995년 7월 23일 청정해역이라 불리던 전남 여천 앞바다에 온 국민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되었다.
14만톤급의 거대한 원유선이 원유 8만8천톤을 적재한 채 좌초돼, 화재로 시꺼먼 연기와 불꽃을 내뿜으면서 기름이 유출되고 있었고 폭발과 선체절단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절대절명의 위기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남해안 최악의 재난」「죽음의 청정해역」「방제체제도 한심하다」 등, 당시 모든 보도매체에서 사고현장의 오염실태와 기름오염사고의 심각성, 우리 나라 방제체제의 문제점, 방제능력의 취약성, 현장 방제작업의 원시성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피해를 우려한 씨프린스 사고이다.
사고 당시 다행히도 배에 싣고 있던 원유는 많이 유출되지 않고 배의 연료로 쓰이던 벙커 C유만 유출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가해진 피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사고 지역에서 보이는 바다는 모두 검기만 했고 바다 위를 날던 새들과 바다 속에 있던 생물들이 모두 기름을 뒤덮고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왔던 어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겼음은 물론 삶의 희망마저도 버려야 했던 것이다.
(http://www.ienews.net/project/pro25-1.htm)2)
⑲ 기타 오늘의 역사
1863(조선 철종 14) 최시형, 37세의 나이로 동학교단의 북접 대도 주가 됨
1882(조선 고종 19) 임오군란 일어남
1894 대원군, 입각해서 국정참여
1903 포드자동차 첫 판매, '모델 A'
1906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제3회 범미(汎美)회의 열림
1907 도쿄 유학생팀과 기독교청년회원팀의 우리나라 최초의 농구 공식경기 훈련원에서 열려
1908 청년 터키당, 헌법 부활 성명
1925 일제, 한국서의 좌익운동자 대량 검거
1930 이탈리아, 나폴리서 대지진. 2534명 사망, 4264명 부상(6000 여 사상)
1936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1938 총독부, 교원-관공리에게 제복 착용 지시
1942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명령
1951 프랑스 파리에 NATO군 최고사령부 설치
1952 이집트서 쿠데타 발생, 나기브준장 실권장악
1954 국제포경회의, 북극해에서 고래잡이 금지 결정
1956 이집트,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
1961 한국-코트디부아르 국교 수립
1962 라오스 중립선언
1962 미국 텔스타통신 위성통해 첫 TV 우주중계
1963 국민학교 운동장 개방 지시
1963 암의 병원체 발견, 영국
1965 이승만 전 대통령 유해, 하와이에서 돌아옴
1967 터키에 연 2일 대지진 사상자 수천명 발생
1972 미국, 최초의 실험용 지구자원탐사위성인 랜드셋 1호 발사
1974 그리스 군사정권 붕괴 7년 만에 민정복귀
1978 서울 시내버스 한강대교서 추락 33명 사망, 13명 부상
1982 일본정부, 방위력증강 5개년계획(83-87) 확정
1983 바이타브락 제2봉 세계최초 등반 성공
1984 관보 제1호 발행
1985 미국-중국간 핵협력협정 승인
1985 남북국회회담 첫 예비접촉(판문점)에서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가설 등에 합의
1987 북한, 다국적 단계별 군축협상 제의
1988 인천지법 형사2부, 성고문 문귀동 피고에게 징역5년 지격정지
3년 선고
1988 버마 소요사태 악화로 집권사회주의계획당 당수 네윈 사임
1989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 참패로 우노 수상 사임
1992 서울 지검, 정보사 부지 사기사건 발표
1995 유조선 씨프린스호, 전남 여천군 해상에서 좌초
1999 주가 사상최대 71.70포인트 폭락
2001 대한변호사협회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법치주의에서 후퇴
했다"는 결의문 채택
2001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에 취임
2001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직 정지
2002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시티 공습. 15명 사망․150명 부상
오늘의 인물
① 방정환(方定煥 ; 1899.11.9 ~ 1931.7.23) :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
호 소파(小波),
서울 출생이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보성전문(普成專門)을 마친 후 도요[東洋]대학에서 철학과를 수학했다.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 청년구락부, 소년운동협의회 등을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1923)의 창간을 비롯 《신청년(新靑年)》 《신여성(新女性)》 《학생(學生)》 등의 잡지를 편집 ․발간했다.
한편 동화대회, 소년문제 강연회, 아동예술 강습회, 소년지도자대회 등을 주재하여 계몽운동과 아동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창작동화뿐만 아니라 많은 번역 ․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하였다.
1940년 《소파전집(小波全集)》을 박문출판사(博文出版社)가 간행하고, 광복 후 조선아동문화협회(朝鮮兒童文化協會)에서 《소파 동화독본》 전5권을 펴냈다.
한편 새싹회에서는 '소파상(小波賞)'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여하고 있다.
⇨11월 9일.
② 조치훈(趙治勳 ; 1956.7.23 ~ ) : 조치훈은 끈기바둑의 대명사로 불리는 세계적 기량의 바둑인이다. 조남철 9단의 조카로 6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1968년 2월 일본 기원사상 최연소로 입단했다.
24살 때인 1980년 일본 최대의 명인전에서 우승해 정상에 올랐고, 1981년 혼인보전[本因坊戰], 1982년 십단전에서 우승했다.
1983년 3월 17일 일본 제1의 기성위를 정복함으로써 일본 바둑계를 천하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해 세계적인 바둑기사로서 자리를 굳혔다.
1986년에는 교통사고로 다리에 중상을 입고서도 대국을 강행했으나, 제1위 기성전에서 2인자로 추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어 명인과 혼인보도 잃었지만 1996년 2번째 대삼관을 이루었다. 바둑을 통한 국위 선양의 공로로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③ 싱거(Isaac Merrit Singer ; 1811.10.27 - 1875.7.23) : 미국의 발명가.
「싱거」재봉침은 그의 이름대로!....
처음엔 기계공이었는데, 재봉침을 발명, 특허를 얻다.
1851년 뉴욕에 공장을 설립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④ 도미니코 스카틀라티(Domenico Scarlatti ; 1685.10.26 - 1757.7.23) : 이탈리아의 작곡가.
첸바르곡․예배용 음악 등을 작곡하였다.
⇨10월 26일.
⑤ 앙리 필리프 페탕(Henri Philippe Petain ; 1856 - 1951.7.
23) : 프랑스의 군인, 원수․정치가.
종신 금고형으로 듀우섬에서 죽음.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베를린을 사수하여 구국의 영웅으로 유명.
제2차 대전에서는 수상.
종전 후 대독 협력의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음.
⑥ 기타 오늘의 인물
1856 인도의 사회운동가 발 간가다르 틸라크 출생
1885 미국 남북전쟁 말기(1864-65)에 북군 총사령관을 지낸 미국 의 장군,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사망
1904 현대 공중보건 서비스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의사 사이먼 사 망
1916 영국의 화학자 램지 사망 - 네온․아르곤․크립톤․크세논 등 4가 지 비활성 기체를 발견
1926 항일투사 박열의 일본인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옥중 자살(의문사)
1951 기록영화의 선구자 로버트 플라어티 사망
오늘의 세시
① 대서(大暑) : 일년 중 가장 더운 계절이다.
24절기의 하나
태양의 황경이 120도에 이르는 계절로 대개 중복 때여서 무덥다.
뇌성벽력이 대단하고 다부지게 소나기가 쏟아지기도 한다.
한 차례 비가 내리면 잠시 더위를 식히기도 하나 다시 뙤약볕의 노염이 뒤통수를 벗긴다.
소나기 한 차례 지나고 난 마당에 난데없는 미꾸라지들이 떨어져 버둥거리기도 한다.
빗줄기 타고 하늘로 치솟았던 녀석들이 비가 그치면서 땅에 떨어진 것인데 그런 놈으로 지져먹으면 기운이 난다고 했다.
②③④⑤⑥
오늘의 샘터
① 조치훈의 말 : "목숨을 걸고 둔다." 바둑 !
②③④⑤⑥
첫댓글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