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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야가가 아니야. 바부시카였어 캐치맘
그날따라 놀이터에는 준호 말고는 아이들이 없었어. 준호는 혼자 집에 있기 싫어서 땡볕에 미끄럼틀을 타러 나왔지. 하지만 혼자서 타는 미끄럼틀은 별로 재미가 없었지. 준호는 미끄럼틀을 타다 그네를 타고 그네를 타다 철봉을 했지. 이것도 재미없고 저것도 재미없었지. “에이, 집에 가야겠다.” 라고 준호는 놀이터를 뒤로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는데 갑자기 크고 뭉클한 뭔가가 앞을 막지 뭐야. “아얏!” “오우! 이즈비니-쩨(미안합니다), 쏘리, 아이 엠 쏘리, 아유 오케이?” 준호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올려다봤지. 준호 앞에는 배가 뚱뚱하고 키가 아주 큰 할머니가 서 있었어. 할머니는 머리가 새하얗고 커다란 코가 우리나라 사람 같지는 않았어. 준호는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어. 그런데 이 할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야.가만히 보니 할머니가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준호는 자기 옆에 떨어진 하얀 메모지를 발견했어. 준호는 그 메모지를 슬그머니 주워 할머니에게 주었지. 그러자 할머니는 크게 웃으며 “쓰파 씨이바, 쓰파 씨이바(감사합니다)” 라며 메모지를 받더라고. 그때 준호는 할머니의 커다란 입속에 하나밖에 없는 이를 발견했지. ‘이상하네. 세상에 이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도 있나?’ 준호는 별난 할머니라고 생각했지. 준호는 할머니가 이상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지. 왠지 모르게 할머니를 놔두고 혼자 휑하니 가기는 좀 그랬어. 메모지를 받아든 할머니는 준호에게 메모지를 보여주었어. ‘태양아파트, 101동 503호’ “101동은 바로 저기에요! 저랑 같이 가세요.” 준호는 놀이터 뒤 쪽 101동을 손으로 가리켰지. 그리고는 땀이 흥건한 할머니 손을 잡고 101동 쪽으로 갔지. 커다란 외국 할머니는 순한 양처럼 준호를 따라 갔지. 준호는 할머니 손이 무척 크고 따뜻하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할머니는 101동 503호로 무사히 가셨지. 준호는 외국할머니에게 길을 가르쳐준 것이 무척 뿌듯했어. 큰일을 해낸 것 같았지. 단지 할머니가 이가 하나라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며칠 뒤였어. 도서관 수업이 있어 모두 도서관으로 갔어. 준호는 읽을 책을 찾던 중 커다란 그림책을 발견했어. 책 제목은 ‘바바야가 이야기’였어. 바바야가는 러시아에 사는 아이를 잡아먹는 할머니 이야기였어. ‘시간이 흘러도 바바야가는 외톨이였어. 바바야가는 어릴 때부터 이가 하나뿐이었어. 그래서 친구들이 하나도 없었어. 바바야가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했어. 하지만 친구들은 바바야가를 좋아하지 않았어. 그래서 바바야가는 아이를 잡아먹기로 했지.’ ‘이가 없어서 친구가 없었다니…….그렇다고 아이를 잡아먹으면 어떡해? ’ 준호는 바바야가 할머니가 참 이상했어. ‘바바야가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불쌍하기도 했지. 놀이터를 가면 준호는 혼자 노는 편이었어. 준호는 아이들과 게임을 해도 늘 졌거든. 아이들은 준호랑 게임하면 재미없다고 끼워주지 않았지. 그래서 준호는 아이들이 많이 없을 때 놀이터에 나갔어. 괜히 끼워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거든. 혼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려고 놀이터에 나갔어. 그때 벤치에서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었어. 커다란 코에 큰 키의 그 외국인 할머니였어. 할머니는 부채를 부치면서 빙그레 웃고 있었지. 준호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어. 그러자 할머니는 부채를 흔들며 오라고 손짓을 하는 거야. 준호는 갈까 말까 쭈뼛하다가 할머니 옆으로 갔지. “하이! 히어. 싯 다운.” 할머니는 부채를 옆자리에 탁탁 치며 앉으라고 했지. 준호는 고개를 흔들었어. 왠지 쑥스러웠거든. 할머니는 준호를 보고 씨익 웃더니 “왓츠 유어 네임?”이라고 묻는 거야. ‘왓츠 유어 네임? 어디서 많이 들었던 영언데. 그래! 맞아. 내 이름 묻는 거야.’ 준호는 유치원 때 배웠던 영어를 생각해냈어. 그리고 크게 말했지. “아이 엠 김준호!” 할머니는 “예스, 예스!”하면서 웃었어. 그리고 “준호! 아이 엠 프럼 러시아.” 라고 하는 거야. 준호가 거기까지는 알 수가 없었지. 준호는 고개를 갸우뚱했지. 그리고 준호가 아는 영어를 얘기했지. “아이 엠 나인 이어즈 올드.”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지. 할머니는 재밌다고 깔깔 웃었지. 그리고는 “준호, 코리언 …티칭… 미?” 라고 손으로 할머니를 가리키며 말하는 것을 손짓하는 거야. 준호는 어렴풋이 무슨 뜻인지 알 듯 말 듯 했어. “혹시 저보고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요?” 준호가 할머니에게 되물었지. 그러자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 준호는 자신이 외국할머니에게 말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 설레었어. 사실 오늘 학교에서 받아쓰기도 50점 밖에 못 받았거든. ‘정말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에라 모르겠다.’준호는 약간 고민했지만 “예스, 오케이!”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어.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활짝 웃었어. 그러자 그 하나밖에 없는 이가 선명히 보이는 거야. 준호는 순간 후회를 했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저 할머니와 같이 있으면 안 돼는 거 아냐?’ 하지만 준호는 다시 할머니를 만나고 싶었어. 다음날 준호는 놀이터로 나갔어. 이제 놀이터에는 준호 홀로 있지 않았지. 할머니가 먼저 나와서 준호를 기다리고 있었거든. 준호는 유치원 때 배웠던 한글 떼기 책을 가져갔어. 그리고 할머니에게 기역도 가르치고 니은도 가르쳤어. “할머니, 이 글자는 기역이라는 글자에요. 기역이 들어가는 글자는 가방, 가위, 가지가 있어요. 자, 따라해 보세요. 가방, 가위, 가지.” 할머니는 준호가 하는 말을 무척 재밌어 했어. 단지 이가 없어서 발음은 안 좋았지만. “가방, 가위, 가지” 준호는 그림을 짚어 가며 단어를 읽어줬지.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할머니에게 가르쳐 줬어. 꽤 기분이 괜찮았어. 준호는 마치 선생님이 된 것 같았어. “할머니, 참 잘 하시네요.” 준호는 할머니를 칭찬해주었지. 그러자 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이를 활짝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지. ‘으으, 그 이만 안 보이면 좋겠는데…….’ 준호는 이렇게 생각했지. 어떤 날은 할머니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기도 했어. 준호는 할머니에게 「강아지 똥」을 읽어 주었지. “할머니, 저는 이 부분이 좋아요. 민들레 싹이 강아지 똥에게 부탁하는 거요. 민들레 싹은 강아지 똥이 거름이 되어야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대요. 그래서 강아지똥은 민들레 싹을 꼭 껴안고 부셔지거든요. 강아지똥이 사라져 슬프기는 하지만 강아지똥이 행복해하니 저도 행복한 것 같아요.” 할머니는 준호 말의 내용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준호의 따뜻한 맘은 알 수 있었나봐.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준호를 바라보고 끄덕끄덕 해줬어. 그리고 준호의 작은 손을 꼭 잡아줬지. 준호는 할머니에게 폭 안기고 싶었어. 할머니라면 따뜻하게 안아 줄 것 같았거든.하지만 마음뿐이었지. 그런 뒤 갑자기 할머니 모습을 볼 수가 없었어. 준호는 할머니를 찾아서 여기저기 다 찾아봤어. 아이들이 다 집으로 돌아간 깜깜한 밤에도 놀이터에 나와 봤지. 하지만 할머니는 없었어. 준호는 101동을 맴맴 돌았어. 혹시 할머니를 볼 수 있을까 해서. 며칠 동안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덜컥 겁이 나기도 했어. 할머니가 혹시 외국으로 가버리지는 않았을까 하고. 준호는 용기를 내서 101동 문 앞에 섰어. 그리고503호를 눌렀지.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 ‘아니야, 할머니가 아무 말 없이 가버리지는 않을 거야. 설마 아픈 건 아니겠지?’ 할머니가 없으니 놀이터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어. ‘에이, 할머니는 어디 간 거야. 아직도 공부할 게 많이 남아 있는데. 책도 읽어 주고 싶은데.’ 준호는 할머니가 오기 전에 읽어줄 그림책을 골랐어. 하지만 읽을 수가 없었어. 글도 그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오늘은 정말 녹아버릴 정도로 더웠어. 뜨거운 욕조 안에 들어 있는 듯 땀이 비오듯 왔어. 이러다 강아지똥처럼 녹아버리는 건 아닐까 싶었어. 준호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지. 그때 뒤에서 누군가 준호를 부르는 거야. “준호! 준호!” 많이 익숙한 목소리였어. 준호는 뒤를 돌아봤지. 그곳에는 바로 할머니가 있었어. 할머니와 예쁜 아줌마가 나를 부르는 것이었어. 준호는 할머니를 보자 너무 기뻤어. 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뛰어가서 할머니를 안았지. 할머니는 뒤로 넘어질 뻔 했어. 하지만 할머니도 예쁜 아줌마도 하하하고 웃었지. 그리고 할머니는 준호를 꼭 안아 줬어. 할머니의 커다란 가슴속에 작은 준호가 폭 안겼지. 예쁜 아줌마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할머니와 준호와 함께 벤치로 갔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예쁜 아줌마는 준호에게 고맙다고 했어. “준호야, 우리 엄마가 러시아에서 와서 외로웠거든. 내가 직장을 다녀 엄마를 보살펴주지 못 했어. 그런데 준호덕분에 굉장히 행복하셨어. 아쉽게도 내일이면 러시아로 돌아가야 해.” 예쁜 아줌마는 작은 선물을 준호에게 주었다. “준호, 이 인형은 러시아 인형 바부시카야. 바부시카란 러시아말로 할머니란다.” 바부시카 인형은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이 있고 그 인형 안에 또 작은 인형이 있고 맨 나중에는 아기인형이 있었어. 준호는 신기하여 눈이 동그래졌지. 할머니는 그 아기인형을 가리키며 ‘준호. 준호’라고 말했어. 환하게 웃는 할머니의 입안에는 이가 한 가득이지 뭐야. “어, 할머니, 이가!” 준호는 깜짝 놀랐어. 할머니의 입속에는 피아노건반처럼 하얀 이들이 반짝반짝했어. “아, 놀랐어? 할머니 틀니 하셨어. 틀니하고 기념으로 여행하고 왔지.” 예쁜 아줌마는 방긋 웃어보였지. 웃는 모습이 할머니하고 많이 닮았어. 준호도 기분이 좋았어. “나중에 준호가 크면 러시아로 놀러와. 꼭!” 예쁜 아줌마가 준호에게 이렇게 말했지. 러시아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고 준호는 큰 소리로 말했지. “꼭 러시아에 놀러 갈게요!” 그날이후 러시아 할머니를 놀이터에서 볼 수는 없었어. 준호는 혹시나 할머니가 예쁜 아줌마를 만나러 와서 만날 수 있을까하고 101동을 맴맴 돌았지. 괜히 아파트 여기저기도 뒤지기도 했지. 하지만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어. 준호는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준 인형을 찾았어. 바바시카 인형은 할머니처럼 늙지는 않은, 귀여운 소녀 인형이야. 하지만 어딘가 할머니의 미소가 보이는 듯 했어. 할머니의 포근한 품속이 느껴지는 듯 했어. ‘칫, 아직 가르쳐 줄 말이 많은데……. ’ 준호는 갑자기 할머니의 하얀 이가 가득 보이는 미소가 생각났어. ‘바부시카! 그래, 바바야가가 아니라 바부시카였어.’ (30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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