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들의 들쥐근성
10.3.31. 지만원
위컴 사령관이 “한국 사람들은 들쥐와 같다”는 말을 해서 설화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국민 자존심을 건드린 표현이기는 하지만, 많은 식자들이 그의 말에 공감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들쥐의 근성은 쏠림 근성일 것이다. 맨 앞에 쥐가 소리를 내고 달리면 그 다음 쥐들도
똑같은 소리를 내며 무리로 따라가는 것이 들쥐 떼라고 한다. 쏠림현상은 유독 우리
나라에 매우 병적으로 확산돼 있다.
가장 최근에 발생했던 쏠림 현상은 법정스님에 있었다. 언론이 법정스님을 띄우자 온
사회가 벌집을 쑤신 듯 법정을 구름위의 신선으로 미화했다.
위컴 사령관의 표현 로라면 TV가 앞에 달리는 들쥐인 셈이고 시청자들은 뒤를 따르는
들쥐 떼가 된 셈이다.
이런 쏠림현상이 선진국들에 비해 한국에 유독 두드러지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독서를
싫어하고, 복잡한 것에 대해 사고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더 배운 사람이나 덜 배운
사람이나 모두 다 획일화된 TV 실력만 보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TV를 더 많이
본 사람이 더 실력자인 것이다.
우리 국민들 사이에는 특히 공무세계에는 높은 사람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알아서 모시는 문화도 확산돼 있다. 대통령의 뜻이 어디에 있는
가를 눈치로 감 잡아 대통령의 뜻에 맞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것이다.
3월 26일 밤 천안함이 사고를 당했다. 사고 발생 한 시간 후라면 누구도 사고원인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점칠 수 있는 시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청와대는 사고 1시간 만에
그야말로 아무런 근거 없이 "이번 사건에는 북한이 연계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28일에도 청와대는 "북한이 연루된 단서는 없다"고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대통령의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를 잽싸게 감지한 사람들이 들쥐 떼가 되어 청와대의 의중을
받들었다.
천안함은 내부 폭발에 의해 침몰됐다는 분위기가 한동안 유지됐다. 내부폭발이면
화약 냄새가 났어야 했는데 그런 냄새 없었다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나타나자, 그
다음엔 암초론이 등장했다.
암초는 사고지점에서 떨어져 있었고, 설사 암초에 걸렸다면 표면이 찢어지지 어떻게
그 육중한 함정이 공중으로 붕 떠서 두 동강이 겠느냐, 반론들이 쏟아지자 이번에는
기뢰론이 탄생했다.
우리 해군이 심어놓은 기뢰이거나 아니면 북한이 6.25때 심어놓은 기뢰 중에 한
발이 떠내려 와 천안함에 걸렸다는 것이다.
기뢰가 있었다면 60년간 크고 작은 배들이 쥐방울처럼 다녔는데 왜 천안함만 골라서
걸려들었느냐, 해류는 북으로 흐르는데 어떻게 지뢰가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떠
내려 올 수 있느냐, 짠 해수 속에서 60년 동안 기능을 보존하는 신기한 기뢰가 다
있느냐, 반론들이 대두되자 이번에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피로파괴론(쇠가 늙어서
스스로 파괴)이 등장했다.(3.31. YTN)
이상의 모든‘이론’(?)들은 오직 하나, 청와대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탄생된 것으로 보인다.
사고가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선동하기 위해 창안된 대한민국만의 기발한
이론들인 것이다. 서울 시내에서는 가끔 30년 전에 생산된 차량들을 볼 수 있다. 피로에
의한 파괴라면 이런 차들도 거리를 질주하다가 두 동강이 날 수 있을 것이다.
20년 동안 바다를 누비고 다니던 군함이 아무런 충격이 없는데도 어느 한 순간 물속에서
저절로 폭발음을 내며 50cm 정도 붕 떠올랐다가 두 쪽으로 갈라진다? 귀신에 홀려도
가망 없이 홀려버린 머리에서나 나올 법한 이론(?)인 것이다.
다음에 소리를 낼 들쥐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한 이론을 내놓을 것인지 참으로 기다려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부끄러운 이론(?)들은 청와대가 유발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북한도발가능성을 알고도 처음부터
북한無關說(무관설)을 퍼뜨린 공무원들을 우선 색출, 배제해야. |
|
대한민국 공무원이, 天安艦이 침몰하기 직전에 북한측의 잠수정이 機動(기동)하고 있었고, 이에 천안함과 속초함이 對應(대응)출동하였음을 알고도, 또 그 속초함이 북한의 半잠수정 추정 물체를 향하여 집중사격을 한 사실을 알고도, 그리고 천안함 생존자들이 "배가 폭음과 함께 붕 솟으면서 두 동강 났다.
암초나 내부 폭발은 절대로 아니다"라고 증언한 뒤에도 "북한의 도발 가능성은 없거나 낮다"고 상부에 보고하거나 언론에 이야기하였다면 천안함 진실규명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들을 가려내 처벌해야 한다.
戰時下 국가에서 공무원이나 군인이 중대한 군사적 상황에 대하여 거짓 보고를 하면 최고 死刑(사형)이다. 戰時下에선 정보가 불투명할 때, 安全하고 비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옳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뒤 北進하면서 중공군의 대병력이 만주에 집결중임을 알고도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없다.
개입해도 소규모일 것이며 우리가 요절을 낼 것이다" 고 보고하였다.
이 안일한 상황판단이 北進통일을 좌절시키고 1·4 후퇴와 1000만 이산가족의 비극을 불렀다.
천안함이 침몰하였을 때도 대통령은 안전하게, 즉 비관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어야 하였다. 청와대와 국방부와 合參(합참)은 지난 26일 밤 天安艦이 對北작전중 침몰하였음을 국민들에게 정직하게 이야기했어야 했다.
속초함이 사격한 것은 새떼를 향해서가 아니고 북한의 半잠수정 추정물체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발표하였어야 했다.
이런 정보를 알면서도 비밀로 붙이곤, 청와대의 직원들이 북한無關說(무관설)을 내놓았으니 김정일 정권이나 남한의 빨갱이들을 의식하여 진실을 은폐, 축소하려 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군의 도발에 의한 것으로 밝혀질 것을 걱정하던 남한내의 反대한민국 세력이 청와대發 '북한無關說'을 일제히 확대재생산하는 가운데 李 대통령은 북한군의 도발 가능성을 외면하고 사건을 海難(해난)사고 정도로 취급, 人命구조만 강조하였다.
애국시민들은 지금 기가 막혀 "이게 나라인가"라고 개탄한다.
사건 발생 7일째인 오늘까지 정부의 공식 성명 한 장 나오지 않은 이게 정말 나라인가?
대통령은 측근들과 雜談(잡담)하는 것, 대변인을 통해 간접 발표하는 것, 라디오 연설, 백령도에서 브리핑 받을 때 한 마디 한 것을 국가의 公式(공식)입장을 천명하는 정부성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군사적 위기관리의 경험이 부족하고 그 아래서 군사적 지식이 없는 민간공무원이 대통령의 권력을 업고 군대를 통제하고 있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李 대통령은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위기 대처반을 새로 짜야 할 것이다.
인간이란 자기合理化의 天才(천재)이므로 최초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본능이 강하다. 그런 前歷者(전력자)에 에워싸이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우선 국민들에게 군사적 상황을 허위보고한 자들을 색출, 우선적으로 배제하여야 할 것이다.
머리는 차고 가슴은 뜨거우며 눈에 핏발이 선 사람을 그의 곁에서 보고 싶다. 李明博 정부가 휘청거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실의 끈을 놓쳤고,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이념을 무시하다가 보니 남한내 빨갱이들의 선동전술에 이용된다는 점이다. 북한 잠수정이 한국 영해안으로 들어와 영토의 연장인 軍艦을 격침시켰다면, 이는 停戰협정 파기를 선언한 것이 된다.
이런 중대한 사안을 다루는 데는 韓美동맹과 韓日우호 관계가 근본이 되어야 한다.
獨島문제를 놓고 일본과 갈등할 때가 아니다.
韓美연합사 해체를 강행할 때가 아니다.
KBS, MBC, 연합뉴스가 매일 쏟아놓는, 國軍을 불리하게 하는 說, 說, 說을 방치하면 안 된다. 6.25 남침, 1.21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EC-121 격추사건, 문세광 사건, 아웅산 사건, 김포공항 테러, 대한항공 폭파사건, 참수리호 격침사건을 당하고도 '북한無關說'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자가 대통령 주위에 있다는 사실은 전율을 금치 못하게 한다. |
全斗煥으로부터 위기관리법을 배워라! KAL007 피격1983년9월), 아웅산 테러(1983년10월), 대한항공 폭파(1987 년 11월) 같은 대사건이 났을 때 당시 全斗煥 정부는 정보 부족 상태에서도 즉 각적으로 소련과 북한정권의 도발이라고 단정, 국민들의 분노를 슬기롭게 관리 하였다.
趙甲濟
KAL 007 피격(1983년9월),아웅산 테러1983년10월), 대한항공 폭파(1987 년 11월) 같은 대사건이 났을 때 당시 全斗煥 정부는 정보 부족 상태에서도 즉 각적으로 소련과 북한정권의 도발이라고 단정, 국민들의 분노를 슬기롭게 관리 하였다. 그런 신속��대응이 불투명한 조건속에서 이뤄졌으나 결과적으로 정확 한 판단이었음이 확인되었다. 李明博 대통령은 全斗煥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 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젠 "북한측의 도발일 가능성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 를 하고 있다"는 정도의 성명은 내야 한다. 한국은 準戰時 상황인데, 이런 조건 에서 지도자가 가장 크게 실수하는 것은 誤判이 아니라 對應의 타이밍을 놓치 는 일이다. 誤判은 바로잡으면 되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한주호 준위의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반만 가져도 모든 국민들은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용기있 는 행동과 정확한 판단으로 목숨을 거는 모습을 보일 때, 모든 것은 저절로 해 결될 것입니��
전두환은 살인마가 아니며 충직한 군인이었고, 훌륭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광주 사태 당시 그는 단지 합동수사본부장이자 중앙정부부장 서리였을 뿐입니다. 그 는 최규하 대통령을 협박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지시를 따랐던 분이었습니다. 군인 출신들이 대통령을 지낸 시절 나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지금 58세인 본 인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 글을 올립니다.
(2010. 04. 01 17:05)
****************************************************************
대통령 뽑을 때 군사적 지도역량을 가장 重視해야 | |
|
|
한국에서 대통령을 뽑는다 함은 전쟁지도자를 뽑는 것이기 때문이다.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의 지도下에서 한국은 경제발전과 强軍건설을 동시에 이뤘다. |
|
지난 62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세 사람이 軍人 출신 대통령이었다.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 이 세 사람의 지도下에서 한국은 경제발전과 强軍(강군)건설을 동시에 이뤘다. 富國强兵(부국강병)에 성공한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을 바탕으로 自主국방력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全斗煥 대통령은 잇단 북한의 도발에 잘 대응하면서 서울올림픽 성공의 기반을 조성하였고, 在任기간 한국은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直選 대통령인 盧泰愚씨는 서울올림픽 성공의 여세를 몰아 북방정책을 추진, 북한을 배후에서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의 在任 기간엔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한번도 없었다. 天安艦 침몰 사건에 대한 李明博 대통령의 미숙한 대처방식을 보고있으면 역시 한국에선 國軍통수권자를 겸하는 대통령이 군사 지식이 깊은 분이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직업 군인 출신이 아니라도 전쟁과 이념, 그리고 戰略(전략)에 대한 이해가 남달라야 돌발사태나 전쟁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는 대통령 중심제下에선 군사지식이 全無한 대통령을 보완할 방법이 없다. 準戰時下(준전시하)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의 '군사적 지도력'일 것이다. 한국에서 대통령을 뽑는다 함은 전쟁지도자를 뽑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위기 때 한주호 준위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이다. 全斗煥 대통령이 동기생인 盧泰愚 민정당 대표를 후계자로 선택한 이유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군사적 지도역량을 높이 산 것임을 그의 당시 술회에서 알 수 있다. '全斗煥 육성 證言'(1992년, 조선일보 발간)의 필자인 金聲翊(김성익) 당시 비서관의 기록에서 뽑아본다. ........................................................................ 1987년 6월1일 오후 2시에 全斗煥 대통령은 金聲翊 연설문 담당 비서관을 불러 민정당 중집위(中執委)에서 盧泰愚 대표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천할 때의 연설문 초안에 대해 검토한 뒤 약 50분간 보완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 내가 후임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을 시작하는 뜻이 있다.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시도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우리 5,000년 민족사에서도 이번이 처음이야. 후보 지명을 상춘재에서 하는 것은 이 건물이 전통적인 건물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서양식으로 의자에 앉아서 하는 회합이 아니라 모두 마루에 앉아서 회합을 갖는 게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 부합하듯이 우리의 의식에 맞는 우리 식의 정치 전통을 발전시켜 나가자는 뜻이다. 정치하는 사람은 야심이 있어야 개인이나 黨의 발전이 있다. 그러나 그 야심이 자기의 위치와 분수를 모르는 誤判이나 허욕에만 차서 집권욕에 눈이 어둡다거나 黨利黨略에만 집착하는 것은 안 돼. 그것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시련을 겪은 사례들이 있다. 그 표본이 선조 24년에 일본 통신사로 갔다 온 서인의 黃允吉 정사와 동인의 金誠一이 서로 다른 보고를 내어 그 결과가, 李栗容의 10만 대군 양성 주장을 듣지 못하고 임진왜란을 당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근대 정치사를 봐도 자유당 때 개인 중심으로 주류 비주류로 나뉘어져서 李 대통령께서 하야하신 이후에 자유당이 살아남았나. 공화당에도 주류다, 비주류다, JP, 反JP다 해서 파벌이 있었는데 朴 대통령이 돌아가고 나서 공화당이 지금 있나. 야당만 해도 신파, 구파로 나뉘어서 싸웠는데 이런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 발전에 장애가 된 것이다. 자신의 분수와 실력을 모르고 야심만 채우려 하다가 개인도, 당 자체도 멸망시킨 교훈이 있다. 역사는 우리의 선생이야. 우리 정치인들이 앞으로 이런 사례를 반복하면 우리 역사와 국민한테 큰 죄인이 되고 나라를 망치는 일이 되다. 대통령: 우리 민정당만큼 은 黨 총재가 중심이므로 총재가 지명해야지 그렇지 않고 서구식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면 黨이 분열되고 만다. 우리의 남북 대치 상황과 주변 정세의 격동을 감안해서 黨의 단합을 위해서는 총재인 내가 후임자를 지명하는 하나의 불문율을 중집위원들이 명예롭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인사말에 포함시켜야 되겠다. 그것이 민정당의 전통이 될 수 있다. 정당에서 개인 플레이를 하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가 없어. 결국 신민당도 그래서 分黨이 된 거고 통민당도 역시 개인 중심이 될 거다. 후임자의 자격은 서울올림픽 성공과 선진국 창조 과업을 위해 정치 사회 안정과 국민 단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 정치지도자로서의 역량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安保 역량이 중요하다. 한반도의 남북관계에 비추어 볼 때 국민의 생존권 보장이 제일 어려운 문제 아니냐. 우리는 소련이나 중공과는 國力에 있어서 상대가 안 되고 일본의 國力과도 상대가 안 되니 미국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 우리는 동족간에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지도자는 군부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 아니면 정권을 잡아도 유지를 못 한다. 군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세력이야. 사상적으로도 절대적 反共조직이 군대야. 야당이 아무리 떠들어도 군부 지지가 없으니 안 돼. 군부가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게 65만과 예비군 400만이 있지 않나. 선거에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는 거다. 남북이 死生결단을 하는 우리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대통령이 군부의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하고 作戰에 깊은 지식이 있어야 돼. 盧 대표를 후임으로 하는 것은 내 동기생이고 대장을 지냈기 때문보다도 군의 주요 지휘관을 역임했고 내무, 정무, 체육부 장관을 지내 정부 조직과 군부도 잘 알고, 黨에 있으면서 黨의 생리와 정치인의 생리를 상당히 체험했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나의 후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여러 사람이 있지만 盧 대표가 가장 적임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총재로서 추천한다, 그러니 흔쾌히 받아 들여서 全 당원이 단합해서 盧 대표를 후보로 해주기 바란다고 표현하도록 해봐. ▶ 1987년 6월 2일 저녁 6시 30분 全 대통령은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및 민정당 소속 국회 의장단을 상춘재로 초청하여 盧泰愚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全 대통령은 앉은 자세로 미리 준비해간 ‘추천의 말씀 자료’를 육성으로 낭독해갔다. 대통령: (준비된 자료를 낭독) 오늘 이 자리는 우리나라와 민족의 지나간 역사는 물론 미래 역사에 비추어 실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적인 정부 이양은 우리의 근대사에서, 아니 우리 5,000년의 민족사에서 처음 있는 일일 뿐 아니라 그 후보자를 결정하는 이 순간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발전시키는 데 역사적 이정표를 세우는 엄숙한 순간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겠지만 우리가 모인 이 상춘재는 원래 양식 건물이었던 것을 본인 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청와대에 온 이후에 우리의 전통 양식으로 다시 지은 것입니다. 내가 이 건물을 지으면서 춘양목을 구하고 전문가의 古證을 받았던 것은 국가 원수의 관저에, 後代에까지 문화재가 될 만한 한국식 전통 건물을 세워서 물려주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인이 이 모임을, 다른 회의실이 아니라 이 상춘재에서 가지기로 한 것도 우리 나라 민주주의와 정치를 서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인 전통과 역사적 배경, 그리고 우리 토양에 맞게 발전시켜야 하겠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 민정당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는 지금 본인이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라와 국민을 책임지는 정치인은 누구나 私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물론 야심이 있어야 개인이나 당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야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되어서 자신의 위치와 분수도 모르고 허욕에 빠져서 집권욕에만 눈이 어두워 黨利黨略에 집착하면 개인은 물론 당과 나라까지 파멸시킨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입니다. (중략) 민주국가에서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방법은 그 나라 정치 관행이나 전통, 그리고 국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서양식, 특히 미국식 관행은 말단 당원들의 각급 선거 절차를 거쳐서 후임자를 결정하는 것이고, 일본은 파벌 정치에 따라서 현직 수상의 뜻으로 결정하는 불문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미국식의 관례를 우리 현실에 적용하려 한다면 黨의 분열을 가져올 우려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처한 국가 상황에서는 격동하는 주변 정세의 추이와 특수한 안보 상황, 그리고 정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고 당의 단합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 본인이 國政 최고 책임자로서 뿐만 아니라 창당을 한 총재의 입장에서 후보자 지명에 대한 의사를 밝히고 중앙 집행위원회가 당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이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소망스럽고, 이러한 관례가 민정당의 튼튼한 전통이 되어야 한다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중략) 앞으로 2, 3년은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여건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남북 긴장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는 이 어려운 시기에 제1의 과제는 우리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 안보입니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나라의 안보와 번영을 책임질 지도자는 선진 조국 창조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하고 당과 정부는 물론 광범한 공직사회와 특히 군부 등 여러 분야를 이끌어 갈 통솔력이 있는,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북이 死生결단으로 대처하고 있는 우리의 특수 상황에서 군부의 신뢰와 존경, 그리고 군사 지식을 매우 필요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여 단안을 내릴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는 물론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지도력과 이러한 모든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건강 등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芟� 우리 민정당에는 본인의 후임자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분이 많고 그것이 우리 黨의 자랑이고 저력이기도 합니다. 그간 各界 여러분들과 상의하고 당원들의 의사도 집약해 본 결과 오늘의 국가 상황을 감안할 때 그 동안 우리와 함께 개혁의 선봉에 섰던 救國의 동지이자 조국 선진화 과업을 함께 추진해 온 이념적 실천적 평생동지인 盧泰愚 대표위원이 가장 적임자라는 판단에 이르러 이 자리를 통해 추천하는 바입니다. 대통령: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盧泰愚 대통령 후보는 그 동안 국군 보안사령관 등 軍의 주요 지휘관을 역임해서 누구보다 군부를 잘 알고 탁월한 안보 식견을 갖추고 있으며 내무 장관과 정무, 체육부 장관 등 행정부의 직책을 맡아 정부 조직에 정통할 뿐 아니라 올림픽 조직위원장과 국회의원, 집권당 대표위원 등을 거쳐 당과 정치인의 생리를 알고 체험을 쌓음으로써 國政을 책임질 수 있는 정치 지도자의 경륜을 두루 쌓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黨에 대한 국민의 지속적인 신뢰를 확보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와 88올림픽의 국가 양 대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적임자로 盧 대표를 추천하는 나의 이 뜻을 여러분이 흔쾌히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훌륭한 지도자는 주위 사람에게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혼자서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략) 오는 6월 10일 黨 대회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선출해서 집권 제2기를 향한 준비를 본격화하게 되는데 이 재창출이란, 출범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 지금과 같이 주변 여건이 순탄치 않은 상황하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국의 안전과 민족의 번영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결코 중단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정(否定)과 청산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그 동안 이룩한 성과를 역사 속에서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과제를 안게 된 것입니다. (중략) 우리에게는 그 동안 이룩해온 빛나는 업적이 있고 국민의 확고한 지지가 있으며 나�窄�구하고 발전시켜온 경험과 저력, 그리고 자신감이 있습니다.
]사 창조에는 전통과 시련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용기와 신념으로 단합한다면 못 해낼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빛나는 신화를 창조해온 성과를 바탕으로 영광스러운 민족사를 창조해 나가는 데 우리 모두 단합해서 매진해 나갈 것을 엄숙하게 당부합니다.
[ 2010-04-01, 10:09 ] ********************************************************************************** |
|
[이상돈 칼럼] 병역 면제자 정권(?)
|
▲ 왼쪽부터 원세훈 국정원장-이명박 대통령-정운찬 국무총리- 모두 병역미필자다. | |
천안함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안보회의를 열었는데, 그 참석자 면면이 병역면제자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이런 문제는 이미 예견된 것이다. 쉽게 납득되지 않는 사유로 병역 면제를 받은 사람들이 국군 통수권과 정보계통의 지휘체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국가안보 위해요소’인 것이다.
◆ 다음은 작년 9월에 정운찬 총리 지명 청문회에서 병역 문제가 거론될 때 쓴 글 두 편입니다. 편의를 위해 다시 전재합니다.
군 경험 없는 ‘국가 지도자’들
정운찬 총리 지명자가 고령을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았음이 드러났다. 정 지명자가 국회 동의를 받으면 현 정권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국정원장이 모두 병역 면제자가 되는 셈이다. 정 지명자의 국회 인준을 다룰 여당의 원내대표도 병역 면제자이니, 현 정권은 ‘병역 면제자 정권’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병역 면제자이고, 오바마 대통령은 징병제가 철폐된 후에 성년이 되었으니 병역은 더 이상 국가 지도자의 덕목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운��총리 지명자는 클린턴과 오바마를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당당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우리는 병역을 국민의 기본의무로 두고 있으며, 아직도 북(北)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병제를 두고 있는 미국과 같이 생각할 수는 없다. 더구나 신념에 근거한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많은 젊은이들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상황이니, 정부 고위직의 병역면제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병역면제 군 총사령관’의 위험성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일뿐더러 국군 통수권자이기도 하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이 미군 총사령관임을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제2차 대전 당시 해군 조종사로 혁혁한 전과(戰果)를 올린 바 있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1993년 초에 대통령직을 병역을 하지 않은 빌 클린턴에게 넘겨 줄 때 “대통령은 경우에 따라 군사력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에 대학생 병역연기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군 복무를 회피한 빌 클린턴이 미군 총사령관이 되는 상황을 걱정했던 것이다.
조지 H. W. 부시의 걱정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탄자니아와 케냐의 미국 대사관이 알케이다에 의해 폭파되었을 때에 클린턴은 토마호크 미사일 수십 발을 쏘는 데 그쳤고, 소말리아에는 경솔하게 지상군을 파견해서 큰 피해를 입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이 같은 실패에는 클린턴의 군대 콤플렉스가 적잖게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클린턴 대통령은 군 관련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재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야 하는 등 병역을 회피한 대통령으로선 곤혹스러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연유로 클린턴 행정부 백악관에는 군(軍)과 안보를 경시하는 풍조가 팽배해 있었다.
병역을 하지 않은 고위 정책담당자들의 오만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클린턴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부시는 주 방위군으로 병역을 이행했지만, 전쟁을 주도한 체니 부통령과 네오콘 그룹은 대부분 ‘병역을 하지 않은 전략이론가들’이었다.
체니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당시에 몇 차례 징집연기를 통해 고령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반면,이라크 전쟁에 비판적이었던 신세키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안토니 지니 전 중부군 사령관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서 부상을 당한 참전용사들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조종사로 활약하다가 피격되어 포로생활을 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도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해선 충분한 병력을 보내야 한다면서 신중론을 폈으니,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이 전쟁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군 출신 대통령이 평화를 유지했다
드골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경우도 전쟁을 경험한 군 출신 지도자들이 전쟁의 한계와 비극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드골은 알제리아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철군을 명령했다.
제2차 대전 중 연합군 총사령관을 지낸 아이젠하원 대통령이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패배하고 물러나자 미국내 반공세력은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면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2차 대전 당시에 82공수 사단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8군 사령관과 유엔군 사령관을 지낸 매튜 리지웨이 장군을 베트남에 보내서 미군 파병의 타당성을 조사하도록 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미군을 베트남에 파병할 이유가 없다고 아 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아이젠하워는 반공 십자군들의 압력을 물리치고 베트남에 미군을 보내지 않았다. 반면,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맥나마라 국방장관 등 민간 보좌관들은 베트남에 성급하게 개입했을 뿐 아니라, 전쟁을 비용 대 효과 분석 같은 경영 마인드로 접근해서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
도덕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정부 고위층에 병역면제자가 많은 정부는 군사력을 사용해야 할 경우와 자제해야 할 경우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수 있으며, 그것이 때로는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고위정책담당자들의 병역면제는 단순히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잠재적 국가안보 위해(危害) 요소’인 것이다.(2009년 9월 14일)
레이건 행정부 고위직의 군(軍) 경력
이명박 정권이 ‘병역면제자 정권’이라고 할 지경이라서 국민들의 군 복무에대한 인식이 왜곡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 점에서 1981년에 들어선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 고위공직자들의 군 경력을 되돌아 볼만하다. 레이건 행정부의 주요 장관들과 CIA 국장의 병역 기록을 보면, 국민들이 레이건 대 통령을 지지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 출범 당시 주요 각료와 보좌관의 병역 기록은 아래와 같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11년-2004년)은 평시인 1937년에 육군 예비역로 응소해서 소위로 임관되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으로 소집되었으나 시력이 나빠서 본국 기지에서 복무를 했고, 예비역 대위로 전역했다.
조지 H. W. 부시 부통령(1924년 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입대해서 18세에 조종사로 임관되었다. 당시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전투 조종사였는데, 그는 항공모함 자신토 호(USS Jasinto)에 배속되어 태평양 전장에서 총 58회 전투출격을 했다.
주로 아벤저라는 소형 폭격기를 몰았는데 일본의 소형군함을 침몰시킨 확인된 기록을 갖고 있다. 한번은 일본군 포화에 피격되어 동승했던 다른 승무원들은 사망하고 간신히 낙하산으로 탈출해서 바다 위에서 몇 시간 동안 떠 있다가 지나가던 미군 잠수함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무공훈장을 여러 개 받았고, 전쟁이 끝난 후 GI 장학금으로 예일대학과 예일 로스쿨을 나왔다.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1924년 생)은 1947년에 웨스트포인트 를 졸업해서 육군 장교로 임관됐다. 한국 전쟁 당시에 맥아더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0군단 휘하로 장진호 전투 등에 참가해서 훈장을 받았다. 1965년에는 1보병사단의 대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닉슨 대통령 시절에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 아래에서 일 한 것을 계기로 닉슨 대통령 말기에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고, 육군대장으로 전역했다.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1917-2006)은 하버드 대학과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는데,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사병으로 입대했고, 장교 훈련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됐다. 육군 41 보병사단의 소대장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고, 대위로 제대했다.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낼 때 주정부 각료를 지내서 레이건과 인연을 맺었다.
도널드 리건 재무장관(1918-2003)은 하버드 로스쿨을 다니던 중 2차 대전이 발발해서 해병대에 입대했다. 장교로 임관되어 과달카날, 오키나와 등 치열한 태평양 전쟁에 참가해서 무공훈장을 여러 차례 받은 그는 전쟁 후에 금융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윌리엄 케이시 중앙정보국장(1913-1987)은 포드햄 대학과 세인트 존 대학 로스쿨을 나왔는데, 2차 대전 중 CIA의 전신인 OSS의 유럽 비밀첩보지부장으로 활약했고, 그 업적으로 무공훈장를 받았다. 변호사로 활약하다가 닉슨 행정부에서 국무차관보를 지낸 후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의 선거본부장을 지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폴란드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고, 소련에 대한 압박 정책을 추진했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1920년생)은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이 물러난 후 후임으로 국무장관이 되었는데,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에 입대해서 1945년에 대위로 제대했다.
제임스 베이커 백악관 비서실장(1930년생)은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후 1952년에 해병대에 입대해서 소위로 임관되어 1954년까지 복무했다. 베이커는 조지 부시 부통령의 선거참모를 지냈고, 레이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으며,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
에드윈 미즈 백악관 보좌관(1931년생)은 예일대학을 다니던 중 ROTC를 해서 졸업 후 육군장교로 임관되어 1956년까지 복무했다. 레이건의 2기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냈다.
마이클 디버 백악관 부실장(1938-2007)은 공군 사병으로 군복무를 했다. 베이커, 미즈, 그리고 디버를 레이건 1기 행정부를 성공적으로 이끈 백악관의 3인방(트로이카)이라고 부른다.
레이건 행정부 내에서도 병역을 하지 않은 고위직도 있었다. 유엔 주재 대사로 소련을 상대로 통쾌한 발언을 여러 번 했던 진 커크패트릭이 그러하다. 레이건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커크패트릭은 조지타운 대학 교수 출신으로 여성이었다.(2009. 9. 16)
http://leesangdon.com 2010년 03월31일 01:25분 38초
대통령 이명박 (면제) 국무총리 정운찬 (면제) 간첩잡는 국정원장 원세훈 (면제) 안상수 원내대표 (면제) 최시중 (일병귀휴, 아들 면제) 특별보좌관 강민수 (면제) 윤증현 재경부장관 (면제) 정종환 국토해양부장관 (면제) 이만 환경부장관 (면제) 김경한 법무부장관 (면제) 백용호 국세청장 (이병 소집해제) 김황식 감사원장 (면제) 윤여표 식약청장 (면제) 정정길 대통령실장 (면제) 장수만 국방부차관 (면제)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