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호기심 후배 지연의 한줄에 답이 너무 길어져 이곳으로 옮깁니다.
질문의 요지는 이거죠?
'브런치'를 '아점'보다 더 많이 쓰는 것은 외래어가 폼날 것 같아 쓰는 것도 있지만
'아점'이 '브런치'의 단어형성법을 빌려 만들어진 말이라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은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아, 또 지연의 댓글이 또 바로 이어져 열심히 궁리+공부 끝에... 자 지금부터 갑니다.
1.'브런치'란?
브런치(brunch)는 원래 프랑스의 '아침식사 때 회담을 하면서 가볍게 드는 식사'란 말이 미국에서 만들어지면서 '늦은 아침 식사, 조반 겸 점심'의 뜻이 되었고 그 뜻 그대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이 말은 아침을 뜻하는 breakfast와 점심을 뜻하는 lunch가 합쳐진 말입니다.
2.'아점'은 '브런치'의 단어형성을 빌려 만들어진 말인가?
아닙니다. '브런치'처럼 만들어졌다면 '아점'이 아니라 '아심'이었어야죠. 두 단어가 본래 형태를 일부 잘라내고 한 단어가 되는 현상은 영어나 우리나라에나 있지만 그 모습은 약간 달라요. 영어는 smog(smoke+fog)나 motel(motorist+hotel)와 같이 앞단어의 첫음절과 뒷단어의 마지막 음절이 합쳐지는 혼성방식(blends)인데 우리말은 각 단어의 첫머리가 결합하거나 한자어의 경우 의미상 중요한 음절이 남는 절단현상입니다. 찬반(찬성반대), ?? 전엔 한자어에 주로 있었는데 최근엔 입말에서 다양하게(고유어+고유어, 고유어+한자어) 많이 생겨나 쓰이고 있습니다. 불낙, ? 등 //예를 잘못 들어 수정합니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나당'이었고, 국어 영어 수학은 '국영수', 짜장+짬뽕'은 '짬짜', 또... 아 이건 좀더 고민.
3.브런치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없었나?
이걸 별로 고민을 안 해 봤습니다. '참'이란 말이 있지요. 이 말은 원래 '식사때'를 뜻하나 '끼니'의 '끼'도 그렇고 '식사때'는 바로 '식사시간', 또는 '식사' 자체가 되기도 하지요. 아침, 점심, 저녁, 밤에 '참'이 붙는 말(아침참, 점심참 등)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새참'이나 '밤참' 정도만 '식사'의 의미로 쓰이는 게 아니었더군요.
아침참-「명」「1」아침밥을 먹고 잠시 쉬는 동안. 「2」일할 때에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는 샛밥.
점심참-「명」점심을 먹을 시간. ¶점심참에 만나자./어제 점심참에 수리 조합서 사람이 다녀갔네.≪윤흥길, 완장≫ §
저녁참-「명」일할 때에, 저녁을 전후해서 쉬는 동안. 또는 그동안에 먹는 음식. ¶들판에 나가 있는 농군들이라면 저녁참을 먹을 때쯤이니까 세 시 전후였다.≪유주현, 대한 제국≫ §
새벽참-「명」『북』'새벽녘'의 북한어. ¶이튿날 새벽참으로 돌아오다.≪선대≫
우리는 이 말들을 식사보다는 '때'로 더 많이 씁니다. 댓글에서처럼 아예 이 단어들의 존재를 잊어버린 분들도 많았고요. 전라방언에서는 점심과 저녁 사이인 '헤림참'이란 말도 있는데 이 말 역시 '때'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긁어온 저 네 단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복잡해집니다. 내친 김에 '참'과 관련된 모든 단어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새-참02 「명」일을 하다가 잠깐 쉬면서 먹는 음식. ≒샛요기˙중참. ¶새참 시간/일꾼들은 새참을 먹느라 잠시 일손을 놓았다./물치네는 갯것을 하러 오는 김에 가끔 그물 일이나 뱃일을 하고 있는 선원들의 새참을 선주의 머슴들과 함께 내오곤 했었다.≪한승원, 해일≫§ 「본」사이참. 「비」곁두리.「비」참밥. 「참」낮참.
사이-참 「명」'새참'의 본말.
중참 (中-) 「명」=새참02. ¶점심때가 지나고 중참 때도 지났는데 해는 아직 많이 남아서 행랑 뜰에는 뜨거운 여름 햇볕이 튀고 있었다.≪박경리, 토지≫ §
샛-요기 (-療飢) [샌ː뇨-]「명」=새참〔2〕.
곁-두리 [겯뚜-]「명」농사꾼이나 일꾼들이 끼니 외에 참참이 먹는 음식. ¶춘보 며느리가 곁두리로 고구마를 쪄 내왔다.≪송기숙, 암태도≫/언제 점심 먹고 곁두리 먹는가는 해를 쳐다보거나 거짓 없는 자기 배에 물으면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이양하, 이양하 수필선≫ §「비」새참02(-站).「비」참밥.
참-밥 [참ː빱]「명」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에 먹는 밥. ¶참밥을 내왔으니 먼저 먹고 나서 일을 마무리합시다. §「비」곁두리.「비」새참02.
샛-밥 「명」『방』'곁두리'의 방언(경기, 충북).
4.'아침참'을 '브런치'의 우리말로 쓸까요?
처음엔 '브런치' 대신 '아침참'을 쓰면 되겠네 싶었습니다. 문제는 이 말들에게서 의미의 규칙성이 안 잡힙니다. '아침참'의 뜻1은 '아침밥을 먹은 후'로 뜻2와 시간에서 차이가 나고, '점심참'은 점심 먹을 시간, '저녁참'은 '저녁 전후(저녁식사지만 일하면서 먹을 때)'이고 '새벽참'엔 새벽에 먹는 식사란 뜻은 아예 없습니다. 이렇게 그 의미들이 조금씩 다른데 아침참을 과연 사람들이 '아침과 점심의 샛밥'으로 알아들을지.
이런 고민을 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빼먹었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외래어를 우리말로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지요. '브런치'도 다루었습니다. 무엇으로 다듬었을까요? 250명의 누리꾼들이 수많은 단어를 제안했고 여기에 5개의 후보 단어가 선정되고 다시 몇천 명의 투표로 '어울참'이 '브런치'의 다듬은 말로 결정되었습니다.
'어울참' 어떠신지요? 여기서 다듬은 말 중 홍보 부족도 있겠지만 실제 우리 언어생활에 뿌리내리거나 내리고 있는 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댓글, 참살이, 누리꾼, 쪽지창(메신저)가 그나마 성공한 말들이고, 생명을 아예 얻지 못한 말도 있고 외국어와 경쟁 중이나 힘겨워보이는 말들도 있습니다. 물론 국어원의 이런 일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다듬은 말이 '지침'도 아닙니다. 다듬어진 말들도 다시 언중들한테 인정받는 단어들만 살아남게 됩니다. '어울참'도 2년이 다 돼가는데 이 말은 실패작인 것 같습니다.
5.'브런치'를 대신해서 뭘 써야 할까요?
아침참이 있는데 왜 굳이 말을 새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브런치'를 대신해서 우리말 세 개가 싸워야 할 운명이네요. 국어원에서는 '아점'이 속어에 가까워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아침참'을 놔두고 '어울참'을 만들었으나 '아침참', '아점', '어울참'. 이 셋 중 언중들은 '아점'을 선택했고 반면 장사치들은 '브런치'를 선택했습니다. 그 장사치가 파는 '브런치'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브런치'를 선택했고요. 여러분은 뭘 쓰시겠습니까?
6.저라면요?
아까도 말했듯이 '-참'류의 단어들을 사람들이 자주 쓰지 않으니 '아침참'에서 '아침 겸 점심'의 뜻이 잘 안 잡힙니다. 그래도 '어울참'보다는 나았을 텐데... '아점'을 대신할 말은 이제 더 만들어서 홍보하는 일은 힘들 것입니다. '아점'이 속어로 봐야 할지는 모르지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엔 동의하기 어렵네요. 혹시 '브런치'를 흉내냈다는 생각이 선입견이 된 건 아닌지, 아니면 '브런치'보다 '아점'을 먼저 접한 저의 편견일까요? 전 '아점'을 훨씬 먼저 알고 먼저 썼거든요. 1999년에 당시 30대의 남자가 인터넷 동호회에 '아침과 점심의 중간 무렵'이란 뜻으로 '아점'을 쓴 걸 발견했어요. 친절하게 스스로 뜻풀이까지 괄호쳐서 넣은 걸 보면 '브런치'란 말을 모르고 썼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면 최초로 누가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브런치'를 대신할 말로 만들어진 게 아닐 수도 있거든요. 대신해서 만들었다 하더라도 무조건 흉내냈다고 보기도 어렵지만요. 중세국어는 몇 편 안 되는 문헌을 보면 되는데 최근에 생겨난 말이 어원 찾기가 더 힘드네요.
아뭏튼 우진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ㄱ.'브런치'를 대신할 말을 만들기도 전에 '아점'을 속어로 사전에 올려버리고서 나중에 '어울참'을 제안한 분들이 못내 야속하다.
ㄴ.이왕 다른 말을 쓸 거면 '아침참'이 낫고 지금 상황에선 '아점'을 쓰는 게 '브런치'보단 역시 낫다.
ㄷ.명사중심의 언어순화보다 문장구조에 영향을 주는 외국어투 표현들을 바로잡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어설픈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아름다운 우리말 게시판에 가셔서 이대성 선생의 <'드레싱' 대신 '맛깔장' 어때요?>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이구 힘들다.ㅋ 날이 샜네. 새벽참 좀 먹고 잘까나~
역시 단어는 문맥에서 그 의미를 부여받는데 여기서 새벽참이라 하니 딱 어울리네요. 사전에 새벽참은 새벽녁이란 뜻밖에 없는데....(요것과 관련해선 '아름다운 우리말' 게시판 어제 올린 글('-에 대하여'에 대하여 중 '끝없이 이어지는 의미")을 보십시오.)
첫댓글 이 참에 참 좋은 참을 먹었으면 좋겠네요...힛...이른
날새기의 달인... 우진 선배... 잘 읽고 갑니다. 별스럽지 않게 지나치고자 했는데 고민 한방 들어가게 만드셨네... 일단 성공~~^^
^^
헉, 그 댓글 올린 것도 늦은 시간이었는데, 그 이후에 이런 거한 답글을 달아주시다니.. 감사히 읽었답니다. 짬짜, 불낙같은 예도 있었군요. 국립국어원에서 하는 말다듬기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선택된 단어들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점이 많아요..
잘 읽고 갑니다. 다양한 읽을거리에 귀를 쫑긋! 눈을 크게 뜨고...
빨리, 쉽게 전달되는 효과면에서 본다면 '아점'이 우선 눈에 확~ 들어오긴 하네요. 저는 처음 들어본 단어였지만 쉽게 전달이 되니...제가 보기에는 '아침참'은 '아점'을 대신하기에는 그 의미가 좀 달라보입니다. '아침참'의 경우는 아침밥을 먹고도 그 중간(점심)에 가능한 것이지만 (그러니까 두 끼가 가능하죠.)'아점'은 아침과 점심을 통틀어 한 끼만 가능한 것 아닌가요? '어울참'도 뜻은 좋은데 쉽고, 빠르게 전달되는 면에서 보면 어쩐지 '아점'에 밀리는 듯한 느낌...'바른 국어는 전달하고 일반화하기 힘든 반면, 속어는 왜 그렇게 쉽고 빨리 사람들에게 확산되는가를 생각하면...(오잉? 속어 예찬론자가 된 듯한... 아닌뎅...@@
'아침참'의 의미가 약간 다름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고, 전혀 그 의미가 잡히지 않는 '어울참'에 '아침 겸 점심'의 뜻을 새로이 만들어 홍보할 건지, 약간 뜻은 다르지만 '아침참'의 뜻을 더 확대해서 홍보할지 그런 문제를 이야기한 겁니다. '아침참'이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는 식사'이므로 '아침을 거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모두 포괄하는 뜻으로 충분히 쓰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미 '아점'이 퍼진 상태에서 얼마나 경제적으로 또 속어가 아닌 표준어로서 '아침참'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것인가, 또 그것은 가능한가 하는 점입니다.
아...다시 읽어 봤습니다.
캬~~논문을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래서 내가 오라버니를 못 따라 간다니까요.ㅎㅎ
싫어 싫어. 이런 건 잘 써야 주장글(칼럼)이라구. 논문은 일케 쓰면 안 되오.ㅎㅎ
잘 읽었어요~~ 저는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아점이라고 할 것 같아요~~ㅎㅎㅎ
그러고보니 지연이 말했던 '늦은 아침', 이 말도 괜찮네요. 사람들이 늦은 아침도 좀 썼던 것 같아요. '아점'에 빠르게 밀려났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