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난 부모님에 대한 좋은 여러 기억들이 있다
그것들 중에 내가 마음에 새겼던 한 가지는 돈을 대하는 법을 말없이 가르치셨고,
또 하나는 내가 잘못했을 때 말없이 지켜봐 주셨던 것이다.
갓을쓴 사진을 남기고 두분다 글도 모르고 돌아가셨지만...
특히 내가 가진 돈의 개념은 부모님의 의도하지 않은 교육내용 때문에 어설프기 짝이 없고 그것이 내 인생을 고달프게도 했고 또 행복하게도 했다. 소화하는 건 내 못인 것이다.
우리 동내엔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지만 60년대였으니 어른들이 필요한 물건은 거의 없고 가게 심부름은 주로 다른 동래에 다녔다
그때는 왜 그리도 먼 곳 이었는지 지금 은 별로 멀지 않는데...
다른 심부름은 정말 싫었지만 유독 싫지않은 심부름이 있었다
높 얻어서 일을 할때면 필수적으로 따르는 것이 참과 막걸리였다 그 막걸리 심부름은 싫지 않았는데 다들 한번쯤 그랬을것 같은 이유다.
몇군데는 찌그러진 것을 망치로 두둘겨 편듯한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 어린 발걸음에 멀고먼길을 돌아오면 심심하기도하고 무겁기도 하고 또 어른들은 무슨 맛으로 먹나하고 한 모금 먹은게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이제 한모금만 더 마시고 그만 먹어야지를 여러번... 한되짜리 주전자는 첨 과는 양이 달라보였다.
한 모금씩 맛을 보았던 그황홀했던 맛을 지금은 느낄 수가 없다,
학교가 파할 때 쯤 밀가루 빵을 받아먹던 그 맛에 견줄 만 했다고나 할까?
그 나눠주던 빵도 맘 졸이면서 기다리다 내 앞 번호에서 끝나고 다음날 종례에 받아 집에 모셔놓고 아끼고 아끼며 먹었던 그 맛!!!
집에 도착했는데 어머님 말씀
“오늘은 왜 가득 채우지 않고 주었다냐?”
“오다가 조금 엎질렀어요”
난 그렇게 가게심부름을 가곤 하다가 1학년때쯤 하루는 땡잡은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350원을 주고 물건을 샀는데 가게 아저씨가 650원을 남겨준 것이다
기억에 일원에 붕어빵두개 공책이 2원쯤 하던 때였으니 땡 잡은거 맞다
난 아버지에게 거금 650원을 드리며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는 항상 그러셨지만 조용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그 아저씨가 계산을 잘못한 것 이구나”
“그 돈 지금 돌려드리고 와라 그리고 남의돈은 모르고 받았더라도 돌려줘야 바른 것이고 앞으로도 세상을 살면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난 아버지가 참으로 고지식 하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아까운 거금을 돌려주러 그 먼길을 다시 가야했다
약삭빠른놈들은 돌려줬다고 거짖말하고 옆으로 셀수도 있었겠지만 착하디 착하기만 했던 어린천수는 그런생각은 꿈에서도 생각못하고 먼길을 다시 가야하는 짜증을참으며 가계를 아까운 마음으로다시 찾아갔다.
“아버지가 계산이 잘못된 돈이라고 돌려드리고 오래요”
그 아저씨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그 노인네 참! 그래 너의 아버지는 법이 없어도 사실 분이란다 고맙다”
난 아버지가 너무 늙으셨기에 우리삼촌은 힘세! 우리형은,우리아버지는...하고 친구들과 입씨름 할 때 아버지예기는 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집 금고를 소개하자면 나무로 된 커다란 앞닫이가 윗목에 있고 그 자물통은 어른 주먹만 하게 달려있다 그 안에는 서랍이 두줄로 여섯개 있고 돈은 왼쪽 서랍에 보관한다.
그밑에 옷을 저장한다 아주 중요한 물건이 생기면 그 옷 속 깊이 넣어두곤 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여섯 가족이 나란히 덮고 자던 커다란 솜이불을 포함 각종 이불이 천정 가까이까지 올려져 있다.
공책이든 연필을 사든 학용품이 필요하니 돈 주세요 라고 하면
우리집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니 알아서 가져가거라”
나는 늙으신 부모님 생각에 눈깔사탕하나 사먹어도 마음이 걸려서 몰래 돈을훔쳐본 기억이 없다.
지금도 내가좀 그렇지만 얼마나 융통성이 없었는지 전과(당시 참고서) 사는게 부모님께 부담될까 못사고
숙제 검사 때 마다 거의 거르지 않고 발발 떨면서 숙제 안한놈에 끼어 빼놓지 않고 매 맞던 이내 차칸? 심정을 누가알까...
난 내 자식들에게도 돈을 알아서 쓰게한다.
전화도 없는 산속 시골 벽지이니 쓰고 싶어도 쓸일이 별로 없기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보다 통들이 커서 가끔은 가슴 뜨끔한 경우도 있지만
큰놈은 통장째 관리를 하고 돈쓰는 일에 일체 관여를 안 하지만 별탈이 없다
둘째 셋째도 필요하면 더줄까? 하고 물으면 이거면 충분해요 하고 더 욕심부리는 일이 없다. 내가 넉넉히 돈을 벌어본 적이 없으니 여유가 없는걸 애들이 왜 모를까.
기특한 놈들!!!
학교 또한 세놈 다 스스로 알아서 가도록 한다 지각을 하던 학교를 빼먹든...
물론 선생님께는 사전양해를 어렵게 수 년동안 여러번 구했다.
큰애는 학교 가기 싫타고 해서 1년반을 쉬다가 마음변해 복학을 해서인지 가장 열심이고
둘째, 셋째는 첫해 결석 48일 둘째 해 30일 ....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개근상 타겠다고 벼르며 11월인 지금 하루도 결석이 없다.
저집 애들은 비오면 빠지고 눈오면 빠지고 졸리면.... 학부형들까지 우리를 비아냥 거린다.
선생님 친구들 학부형들 눈총을 견디느라 고생도 좀 했지만
인내하고 세월 가니 아무 문제없다.
내 아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그렇게 힘든 학교 왜 갈라고 하느냐 아버지와 농사지으면 누가 뭐라하냐?” 다
하루는 세놈이 늦잠을 자고 9시에 일어났다. 물론 우리부부는 애들 잠깰까봐 조용조용 언재 일어나는지 궁굼해 하면서
기다리는데 큰놈이
“아이고 큰일났다" 를 외치며 일어나니 차례대로 잠이 께더니
"아버지 좀 태워다 주시면 않되요?” 라며 난감해 한다.
학교까지는 7키로나 되니 걸어가기는 너무 멀다
“너희들 일을 왜 아버지에게 시키는 거야? 기름값 들어 시간 소비해 난싫어!
걸어가다가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얻어타고 가던지 계속 자던지 너네일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서울에서 와있는 둘째는 삼촌한데 사정하니 아버지에게 예기해라 난 모른다고 등 돌리는걸 보고 난 논에 일하러 나갔다
조금 있으니 옆집 아줌마가 차를 몰고 오기에 어디 다녀오느냐 물으니 당신네 둘째가 얼마나 간절히 학교가고 싶다고 사정을 하는지 거절할 수가 없어서 태워다 주고 오는 중이라며 웃는다.
그리고 첫째와 셋째는 학교가는걸 포기하고 둘째는 옆집에 가서 사정해서 해결 한것이다.
내가 말로 가르치지 않아도 첫째 셋째가 둘쩨의 문제 해결방법을 아쉬워 하지 안았을까?
자다가 새벽 두시 세시에 벌떡 일어나 시계보고 다시자는 번거러움도 잠시
그 후로 늦잠으로 학교 못가는 일없이 알아서 열심히 가니 얼마나 좋은가
우리의 부모님세대 보다 우리들이 복 있었고 우리보다 우리 자식들 세대가 복 있다고 난 밑는다.
예기가 옆으로 셋다 암튼
선재는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농약사오라고 준 돈으로 서울로 날라서 서울역 지하도를 무상으로 임대하여 종이깔고 지내다가 지금은 청계천 재단사를 거쳐 의류 사업가가 됐는데
새로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가면 꼭!!@~어떤놈이 훔쳐가고 아무거나 다른 거라도 신고 올일이지
내거 없어졌다고 찾다가 애들 다 집에가고 다떨어져 쓰레빤지 고무신인지 같은쪽만 남은걸 발가락에 걸치고 살살끌고 집에 돌아오던 순진하고 순수한 황천수!!!
그래도 집에서 야단맞은 적이 없다 아무말씀 않 하시던 부모님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그게 어린마음에도 더 미안하다....
난 주어진 돈도 한푼 챙길 요령이 어려서부터 없었으니 지금도 세상 살기 팍팍할 밖에...
그래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난 행복하고 부모님의 모습을 십분의 일만 닮아도 난 천국 갈건데 하는 생각을 하고 산다...
그렇게 착하고 순수하고 순진하고 미련 곰탱이 같은 내가
어느날 돈을 훔친 도둑이 된것이다.
4학년 어느날 누군가 50원인지 100원을 잊어버려 담임이셨던 고준열 선생님께 신고를 한것이다
그때 내 기억으로 2교시 이상 수업을 안하시고 자수를 권유하셨다.
“전체 눈감아. 그리고 돈을 가져간 사람은 조용히 손들어, 선생님만 알고 비밀을 보장 할테니 자수해!”
선생님은 끈질기게 설득하셨고 누군지 모를 도둑은 끈질기게 버텼다.
용서 해주시고 비밀에 붙이시겠다는데 빨리 자수하지 누군지 몰라도 참으로 끈질기기도 하다 라고 생각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운동장에서 잃어버렸을 수도 있는걸 지금 수사에 방향이 잘못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긴긴시간 눈감고 수사는 계속되었다
“책상에 손올려!”
급기야 가슴에 한사람씩 손을 넣는 것이다.
매 맞을때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운 것처럼 나에게 선생님이 다가올수록 숨막히는 긴장으로 가슴은 정신없이 뛰었다.
왜냐고?
내가 살벌한 욕과 매질에 대한 공포, 그리고 폭력을 경험하는 곳은 유일하게 삼청교육대 같던 학교였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데 내몸에 그것도 순결한 내 가슴에 손을 넣는다니 그것도 한시간 넘게 눈감고 어둠의 공포에 떨고있는 나에게...........
아니 실눈도 뜨고 대부분은 곁눈질도하고 상황파악에 여유를 부렸지만.... 난 다들 알다시피 착하디 착한!!! 헤헤~ 그래 사실 바보스런 나였으니 눈한번 떠보지 못하고 공포감에 시달리응 그 긴긴 하루가 얼마나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이였을지 다른친구들이 느끼는거와는 많이 달랐을거다...
그런 아픈 기억뗌에 군대 생활에 단체 기합을 받다가도 지휘관이 없으면
"야! 쫄병 중대장 오는가 망보고 나머지 다 쉬어!!!" 참 엉뚱한놈덜이 덕을 보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알았다”
이말씀만 하시고 교실을 나가셨고 눈을 떠보니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눈을뜬순간 나만 모범생답게, 차칸학생답게, 교관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었음을 알았고
왜들 날 쳐다보는 거지? 순간 난 내가 도둑 이였음을 알았다.
그 후 오랬동안 난 괴로웠다
지금은 소중한 추억이지만 난 어른이 되어서도 “선생님” 단어만 나오면 가슴 철렁한 느낌이 나도 모르게 날 괴롭혔고 되돌릴 수만 있다면 초등학교 생활은 내인생 에서 지우고 다시 쓰고픈 아쉬움이 남는 여러 기억들중에 하나였다.
공부에대한 처음의 단추가 나에겐 너무 버겁게 끼워진 것이다.
조금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설명을 덧붓이자면 내 공식 아이큐 78에 학창시절내내 성적이 나빴던 지금이라도 바꿀수만 있다면 바꾸고싶은 결과는 너무 반듯하고 차칸 이유라고 강력히 아주 강려키~~주장하는 바이다.
그것도 모르고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성적증명서를 받으러 학교에 갔더니 봉인한 성적증명서를 건네주며 내얼굴을 여러번 쳐다보기에 졸업생이 건장하게 성장해서 모교를 찾아오니 고마운가보다!!! 라고 황천수 다운다운 해석을하고 서울에 돌아와 자취방에서 봉투를 뜻어 확인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걸 참으며 옷보따리 깊숙이 숨겨놓고 취직을 포기 했다.
아니 나는 분명 황가인데 왜 자꾸 양가라는지 아이큐는 그렇다 치고 양 가 가 가 양 가 미.....
하지만 워쩌랴 아픈 만큼 성숙 되는게 인생 이란걸 알아버렸으니 웃을 수밖에...
그때 돈을 잊어버렸던 사람 나한테 조용히 사과해라
그렇게 파장이 커질 줄은 미쳐 몰랐다고...
내가 고무신 비오면 물들어와도 안사 주시는데 면도칼로 살살 찢어서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형길이와 몇몇도 같이 앉아서 면도칼로 찢었다)
새로 살 때마다 우리 부모님 아무말 없이 속상하게 했던사람 조용히 나한테만 자수해라 내가 선물주께... 무슨 선물이냐고?
니 네들이 그런사고 않쳤으면 지금 내가 무슨 추억이 있것냐 지금 돌이켜 보면 모든 일들이
내가 함께 성장하면서 받은 소중한 기억들인걸 어찌 고마운 일들이 아닐까...
먹을것이 부족했던 고창 상하 바닷가 촌놈들!!! 이제 배는 부르쟈나! 즐겁게 살자
그리고 2세들도 우리처럼만 살다가 가면 되지 않을까?
나를 포함해서 자식들 교육비에 등골 휘는 칭구덜 모두 맘 느긋 허게 먹고 힘내자!!!!!
2007.11.15. 0:30 서울 대림동에서 취직해서 독수공방하는 심심한 황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