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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6 - 여진족 건주여진의 누르가치가 여진 제 부족을 규합해 후금을 건국하다!
임계순이 지은 750 페이지에 달하는 “청사(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에 보면 저자는 淸朝(청조)
가 다른 다른 역대 중국 왕조와는 다르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첫째는 소수민족이
건립한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땅을 차지하고 한인(漢人) 들을 268년간이나 통치했다는 점을 듭니다.
둘째는 17세기 청의 지도자들은 명나라를 정복한뒤 명의 정치제도와 사회체제를 계승해 그들의 고유
전통과 제도로 절충해 중앙집권 전제국가를 수립했으니 볼테르는 중국을 합리적인 유교
윤리가 지배하며 자애로운 강희제 같은 계몽군주가 황제가 통치하는 전체국가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셋째는 1680년 부터 1779년 까지 가장 오랜기간 팍스 시니카 (Pax Sinica) 라고
부를 수 있는 평화와 번영을 이룩했으니...... 1650년대에 1억 5천만이던
인구를 1850년대에는 무려 4억 3천만명으로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는 것 입니다.
넷째는 청조는 명나라 영토를 넘어서서 몽골, 신강, 서장(티베트) 를 정복해 효율적으로
통치하면서 중국 어느 왕조 보다 넓은 거대한 영토국가를 이루었으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로 만들어 현대 중국에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다섯째는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열강에 의해 개방되었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붕괴되어 갔으니 중국을 지배했던 유교사회의 가치관이 서서히
변화하고 새로운 국가체제와 가치관이 대두되었으니 청조는 가교역활을 담당했습니다.
금나라가 몽골족에게 망하고 원나라가 명나라군에 패해 북쪽으로 달아난후 여진족은 건주여진 (建洲女眞)
과 해서여진 (海西女眞) 및 야인여진 (野人女眞) 으로 분열돼서 명나라 치하에서
근근이 살아갔으니 명나라 장군 이성량이 요동의 실력자로 군림하던 무렵에는 여진을 휘어잡고 있었습니다.
조선군 기마대가 두만강을 넘어 여진 마을에 들어가 부락상태에 머물던 여진인들을 학살하고 집은 불태우며 숨겨둔
식량까지 꺼내 뒤엎어 버리니 산으로 도망간 여진족 사람들이 마을이 침략자 조선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걸
보면서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명나라는 이를 방관했으니 이런 토벌은 누르하치 건국 직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늘 침략만 당했다고 생각해서 침략은 나쁘고 침략자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한민족
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여기지만... 통일신라 국경선이 황해도에서 원산만 까지 였으니 고려는 평양과
평안남도에 함경도 함흥 그리고 평안북도와 함격남도에 이후 함경북도 까지 쳐들어가서 668년 고구려 멸망후
700년간 조상대대로 살아온 여진족을 학살하고 약탈하며 불질렀으니 여진족에게 조선인들은 침략자인 것입니다?
오이라트와 몽골 세력과 여진 부족들이 요동의 안정을 위협하자, 명나라는 장성지대와 마찬가지로 산해관-
개원- 봉황성을 연결하여 요동도지휘사사를 방어하는 요동변장의 축조를 시작했고, 그리하여 완성된
요동변장은 몽골과 여진을 방어하는 방어선이자 명나라의 내지와 외지를 구분하는 국경으로 설정되었습니다.
명나라는 요동변장 동쪽의 혼하 유역에는 건주삼위(建州三衛)를 두어 관리했는데, 명나라가 혼란스러워
지자 16세기 중반부터 명의 요동 변경을 약탈하는 동시에는 해서여진의 여러 부족과 각축전을
벌이며 팽창을 시도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차하르 몽골의 투먼 자삭투 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던 건주여진의 세력가 왕고 (王杲) 및 왕올 당(王兀堂) 등에 의해 여진의 요동 공격은 빈번해 집니다.
청나라의 황가인 아이신기오로 가문이 이 건주여진 출신이니 태조 이성계 아래에서 싸운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는 조선을 섬기다가 1411년 태종이 무역을 중단하자 경원군을 약탈했는데, 조선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화의를 맺은후 1433년 명 조정으로 부터 우도독으로 임명되는 등 잘나갔지만 여진족
간의 다툼에 휘말려 죽으니 그의 부족과 아이신기오로 가문은 랴오닝성 허투알라에 정착해 건주위에 편입됩니다.
명나라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은 임진왜란으로 명이 7년간 전쟁에 연인원 25만의 대병을 파병하고 더욱
강남에서 조선은 머나먼 거리라 쌀과 무기 등을 운반하느라 허리가 휘고 엄청난 군비로
재정적자가 심하니 만주에 살던 여진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새에 여진족들이 서서히 힘을 기릅니다.
태조 누르가치 곧 천명제 (天命帝) 는 1559년 생으로 건주여진 출신이자 추장 집안의 후손으로 여진 종족들간의
패권 투쟁에서 승리하여, 1616년 자신을 칸으로 선포하고 이후 후금을 건국했으니 휘는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로 조부 기오창가는 기오로 가문 수장이었지만 건주여진 내에 높은 직위는 아니었습니다.
기오창가는 소자하 유역의 숙수후부 (蘇克素滸部) 의 허투아라 (Hetu Ala) 를 중심으로 부족을 통솔하며
다섯 아들을 두었고 이중 4남이 바로 누르하치의 친부 탁시 (搭克世) 였으니 탁시는 1559년
처음으로 아들을 얻었는데, 바로 청의 초대 황제이자 천명제라 불리게 될 누르하치로... 훗날
요동의 지배자인 고려인 출신 요동 총병관 (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梁) 의 지배와 후원을 받게 됩니다.
누르하치의 모친은 아구 (阿古) 도독의 딸이며 이름은 히타라 어머치 (喜塔腊 額穆齊) 로 3남
1녀중 장남인데.... 그가 9살이던 시절 친모가 타계하면서 탁시는 해서여진의
1인자 '완 한' 의 딸인 컨저 (Kenje) 와 재혼했으나 게모인 컨저는 누르하치를 대놓고 핍박했습니다.
요동에서 개원(開原) 동부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해서여진(海西女眞) 을 통합해 하다국(哈達國) 을 설립하고, 여진과
몽골의 지도자들은 물론 명나라의 요동총병 이성량과도 밀접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맺었던 완 한의
족녀 하다나라 컨저가 계모로 와서 핍박하니 18세 나이에 퉁갸씨와 결혼과 동시에 동생 슈르가치 등과 함께 분가합니다.
탁시는 분가하는 누르가치에게 노비 남성 6명, 여성 5명, 마 2기, 소 4마리등 작은 재산만 주었으니, 누르가치는
처가인 퉁갸 가문으로 가서 인삼을 채취하여 명나라 상인들에 파는 등 빈곤하게 살아가다가 6년
뒤에 조부 교창아와 아버지 탁시가 구러산성 공방전에서 명군의 오인으로 살해되자 본성인 허투아라로 귀환합니다.
16세기 말기, 누르가치가 정복하기 직전의 여진 제부는 중국 둥베이와 러시아 연해주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에서, 초기적 형태의 국가를 이루거나 부족 혹은 씨족 단위로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여진 지역에 행정구획인 위소(衛所) 를 200여개 설치하고, 여진의 여러 부족장을 수장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제했는데, 명이 설치한 여진위소는 종족, 인구수 등 모든 면에서 명나라 내지의 위소와는
전혀 다른 전통적 여진부락에 불과하며 여진 종족들의 부락에 위소의 이름을 형식적으로 붙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건주여진은 압록강의 북쪽으로 후너허 강 상류부터 퉁갸 강에 걸쳐 거주했으며, 숙수후· 후너허(渾河)· 왕기얀
(完顔)· 동고(董鄂)· 저천(哲陳) 의 5개의 부(部) 로 나뉘어 있었으니 건주 5부는 별개로 세워진
독립 세력이며,각 집단 사이의 혈연적· 종족적 결합관계는 확인되지 않으며 그 외 백두산 일대의
너연(訥殷)· 주셔리(朱舍里)· 얄루 기양(鴨綠江), 세 부(아이만) 도 건주여진의 일부로 분류되니 그럼 8부 입니다.
숙수후부 출신 누르가치의 조부와 부친이 아타이를 공격하던 명군에게 살해를 당한뒤 이성량은 그를
위무했으니 우선 교역 허가서 30통과 말 30필을 수여하고 그를 건주좌위지휘사로 임명했으니
크게 배려한 것인데도 명나라 요동 관원들은 니칸 와이란에게 호의를 베풀어 누르가치의 불만을 삽니다.
당시 건주여진에는 여러 세력이 있었으니 숙수후부, 후너허부, 왕야부, 동오부 등인데 이들 부족은 명 조정에서
니칸 와이란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는 누르가치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같은 닝구타
일족 (조부 가오창가의 여섯 형제) 인 기오창가의 여러 형제들 세력 조차 니칸 와이란에게 귀순해 의지합니다.
누르가치는 계모 컨저 (Kenje) 를 순장시킨후 몰래 니칸 와이란에게 불만이 있거나 원한이 있는 건주 작은 부족
의 수령들과 긴밀한 연계를 취했으니, 갸무후성의 주인 가하샨, 사르후성의 주인 구와라와 그 아우 노미나
등이었으니..... 그들은 서로 힘을 모아 니칸 와이란을 타도하는 대열이 동참하기로 하늘에 맹세했다고 합니다.
다른 한편 누르가치는 명나라 조정에 "내 조부와 부친의 죽음은 사실 니칸 와이란의 사주에 의한 것아다.
그를 사로잡아 나에게 넘겨줘야 비로소 마음이 편하겠다" 는 입장을 전달했지만 명 조정은 회답하지
않았고, 누르가치는 부조의 복수를 위한 군대를 일으키는 빌미로 얼마 후 니칸 와이란에게 전쟁을 선포합니다.
누르가치의 세력은 옛날 몽골의 테무진 처럼 크지 않았으니 그를 지지한 사람은 100명에 불과했고 부친도 고작
갑옷 13벌의 미미한 유산만 물려줬지만 누르가치는 이런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583년 5월에 니칸
와이란이 성주인 투런성으로 진공을 개시했는데 출병 당시 노미나가 니칸 와이란과 내통해 출정 시기를 누설합니다.
이로 인해 니칸 와이란은 누르가치의 예봉을 피해 피신할수 있었지만 투런성은 누르가치에게 점령
당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으니.... 25세의 누르가치가 감히 명나라군이 지원
하는 건주의 주인 니칸 와이란을 패퇴시킨 것은 대사건이라 그의 지위는 급작스럽게 부상하게 됩니다.
누르가치는 계책을 세워 노미나의 세력을 제거한 다음 바르다이 (巴爾達) 성까지 함락했으니 누르가치가
투런성과 사르후성을 얻은 뒤로 숙수후 부민은 대부분 누르가치의 부족으로 편입되자 이들을 아주
잘 대해주니 누르가치의 일족은 불만을 품었고 그의 1대조, 2대조, 3대조, 6대조의 자손들이 종묘
사직에서 맹세한 다음 누르가치를 모살하려고 했으니 누르가치의 시위와 매부 가하샨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가하샨의 복수를 위해 마르둔 성채에서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듬해 동오부를 합병하는 데 성공했고
1585년 2월, 누르가치는 저천부의 자이퍈성을 목표로 출병에 나섰다가 철군하는 과정에서 태란강에
이르렀을 때 자이퍈과 바르다이 등의 성주가 규합한 400여명의 병력을 격파해 자이퍈성의 주인 너신을 죽입니다.
누르가치는 병마를 정돈하고 군비 확충이 나선 뒤 4월 저천부를 재정벌하려고 하자 저천부는 누르가치
를 습격하기로 했는데 토모호, 장갸, 바르다이, 철아호(撤兒湖), 자이퍈의 성주가 800여명의
병사를 규합해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누르가치는 어린 동생 무르가치와 부하를 이끌고 패퇴
시켰으며 1년 후 토모호성을 함락했고, 장수 어이두로 하여금 바르다이성을 공격해 저천부를 합병합니다.
숙수후부와 동오부를 겸병하고 저천부를 멸망시킨 누르가치는 1586년 7월, 니칸 와이란이 은거한 오르혼성
을 공격하니 니칸 와이란은 도주하고 향병 40인이 누르가치에게 30여 군데 창상을 입히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누르가치는 40기를 보내 명나라의 요동도사 (遼東都司) 로 도주하던 니칸 와이란을 추격합니다.
니칸 와이란은 명나라 요동변장의 수수방관으로 자이사에게 참수당하니 누르가치는 이로써 자신의 미래
사업을 위한 공고한 기초를 닦았는데, 명나라 군대가 누르가치가 니칸 와이란을 죽일 때
방치한건 누르가치의 존재를 인정한 까닭이었으니 이에 건주여진 대부분의 부족이 귀순하기 시작합니다.
수완의 우두머리 솔고, 동오 우두머리의 손자 호호리, 야르구 촌장 후르한 등이 모두 1588년에
무리를 이끌고 귀순했으니 같은 해 9월 누르가치는 군대를 이끌고 숙수후강과 동오부
사이 파저강 상류의 작은 부락인 완안성을 공격하여 1589년에 왕야부를 병합하니
건주여진 8부에 대한 통일은 완전히 끝난지라 이듬해 명 조정은 누르가치를 도독첨사로 임명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 1593년, 해서여진 여허의 국주 부자이와 나림불루, 하다의 국주 멍거불루, 울라의
국주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 호이파의 국주 바인다리, 코르친 몽골의 옹가대와 망구스 그리고 밍간,
주셔리의 우두머리 율렁거, 너연의 우두머리 서오원 및 석시는 9부 연합군을 결성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해 옵니다.
이때 누르가치가 강을 따라 난 길이 좁고 험한 구러산에 매복하고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들을 유인한 탓에
연합군은 구러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이 과정에서 부자이는 낙마한 뒤 건주병 우탄에 의해
전사했으며 1595년 누르가치는 명 조정으로부터 임기 3년의 용호장군 (龍虎將軍) 의 직첩을
받아냈으며, 1596년 조선을 상대로 여진국건주위관속이인주 (女眞國建州衛管束夷人之主) 를 자칭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 누르가치는 어르더니 박시와 까까이 자르구치에게 명하여 몽골 문자를 개량한
주션 문자를 창제하게 했고, 10월 말에는 하다가 명의 중재하에 예허와 동맹을 맺고 하다로
파병된 건주의 지원군을 몰살하고 그 장수를 사로잡자 슈르가치와 함께 하다를
공격하여 25일에 하다성을 함락하고 국주 멍거부루를 생포한 뒤 하다부민을 모두 건주여진으로 흡수합니다.
1606년, 내칼카 바야우드의 엉거더르 타이지와 그가 인솔한 5위의 사신이 누르가치에게 쿤두런 한 이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1607년 9월에 호이파(輝發)부를, 1613년에는 울라(烏拉)부를 병합했습니다.
둥베이와 연해주 지역에 독립국간의 패권투쟁에서 승리한 누르가치는 1616년 정월, 허투 아라
에서 팔기 버일러와 여덟 암반에게 가난하여 고통받을 여러 나라를 돌보라는
천명을 받았다는 명분으로 겅기연 한 (英明汗) 으로 추대되며 후금, 즉 아이신 구룬을 건국합니다.
자신의 씨족명인 '기오로' 에 '아이신' 을 덧붙여 아이신기오로 (Aisin Gioro) 로
가명(성씨) 을 개창했으며 이후 사르후 전투에서 승전하여 요동 지역을 석권
하고 동시에 해서여진의 예허부를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등 지속적으로 팽창을 거듭합니다.
이제 명나라는 누르가치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해서여진의 강력한 여허부를 지지함으로써
누르가치의 대항마로 삼으려 했는데, 1618년 4월, 누르가치는 "7가지 큰 원한 (칠대한)"
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으니.... 이 문서에는 명나라가 여허에
가담하여 여진국을 공격한 것, 조부 기오창가와 아버지 탁시가 명군에게 사살당한 것이 적혀 있습니다.
이 무렵, 누르가치는 사위인 엉거더리 타이지와 사하랸에게 금나라 황제들의 전례를 언급한 것을 계기로
아골타가 천조제의 거란을 공격한 것과 자신의 대명전쟁을 동일시 하고, 금나라의 황제를 '우리' 라고
부르는 등 금나라와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나라도 '아이신 구룬'(금나라 金) 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1619년 3월 명나라는 여허부 (葉赫部) 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여 수십만에 이르는 여진 토벌군을 결성하고
이듬해 무순에서 가까운 사르후 (薩爾滸, Sarhū) 에서 10만여명 (실제로는 6만 정도) 이라고 칭하는 만주
군대와 격돌했는데 수적으로 불리한 여진이었지만 그들의 기마대는 기동성이 탁월했으니 각개 격파에 나섭니다.
요동경략 양호가 대군을 이끌고 후금 군대를 공격하면서 사방에서 포위작전을 썼는데 그만 공을 탐한 명나라
장군 두송이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공격을 했기 때문에 패하니 사르후전투이며 이후
전투에서도 차레로 패하니 명군은 전사자 4만 5천명, 2만 마리의 말과 노새를 잃고는 공세에서 수세로 밀려납니다.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8기군 6만인데 비해 명군은 임진왜란 7년간 연인원 25만을 동원하는 바람에 재정은
파탄나고 국력이 피폐해져 불과 8만 8천 밖에 동원하지 못하는지라... 조선군 강홍립 1만 3천의
지원으로 10만 군대를 중군은 심양에 두고 4개 군을 편성해 1619년 4월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로 진격합니다.
적군을 사방에서 포위하려고 했지만 보병인지라 대실패로 끝나는데, 후금의 누르하치는 기마대의
기동전으로 각개격파 전략을 세웠으니, 전공을 욕심내 혼자서 진격해온 2만 5천 두송의
서로군 을 薩爾滸(사르후) 에서 격파하고 이어 북로군 마림의 2만을 상간하다 전투에서 무찌릅니다.
중로군 이여백은 황급히 후퇴했으나 이런 사실을 몰랐던 동로군 유정은 계속 진격
했으니 선봉 1만이 오르카시 숲에서 여진 암마일리군 3만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뒤따르던 후군 1만도 연속적으로 기습당해서 패하니 아부달리 전투 입니다.
조총부대 보병이 주력인 조선군은 후방에 있었으니 돈이 모자라 식량이 구해지지 않으니 출발이
엄청 늦은데다가..... 출발후에 보내 준다던 식량이 제때에 보급되지 못하니 조선군은
굶주린채 행군 하느라 진군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에 명나라 동로군에 합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게 불과 20년 전이니 일본에 점령당한 조선을 명나라는 연인원 25만을
파병하고 은과 쌀을 보내 명나라와 조선군은 물론이고 조선 백성들도
구휼했으니 이제는 조선이 그 은혜를 갚아야 할 차례인지라 신하들이 파병을 재촉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한지라 파병되는 부대에 식량 조차 공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영악한 광해군은...... "명나라가 국력이 충분하다면, 후금 따위는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진압할 수 있을테니 우리 도움은 필요 없을 것이다" 라며 미적거립니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조선에 원조를 요청할 정도라면, 만주를 지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으니
그럼 명나라와의 육로는 끊겨버리고 조선은 후금과 국경을 두고 대치하기 때문에,
군사를 북방으로 보내 소모하기 보다는 압록강 방비를 철저히 하면서 지켜보는게
합리적이라고 계산했으니 "은혜" 를 생각하기에는 임진왜란 후에 조선의 사정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러자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이이첨 조차도 다른 신하들에 호응해 파병을
주장해도 시간을 끄는 중에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병된 총사령관 양호가 여진족 토벌 총사령관이
되어 압력을 가해오자 파병을 하긴 했는데 나라 재정이 엉망인지라 병사들을 먹일 식량조차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니 식량이 없는 군대가 만주로 가면 굶어죽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전투는 무슨....
1269년 서북면의 최탄이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에 귀부하니 평안도와 자비령 이북 황해도는 원나라 동녕부가
되는데 고려 원종과 충열왕이 계속 탄원하니 원나라는 1290년 평안도를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는
만주로 옮겨갔는데 1368년 원나라가 만리장성 북쪽 상도로 패주하니 1370년 1월 공민왕은
이성계에게 북진을 명하니 기병5천, 보병 1만으로 고구려 첫 수도 졸본성이 있었던 오녀산성을 공격했습니다.
그후 공민왕에게 살해당한 권신 기철의 아들인 기사인테무르는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요동에 남아있던 원나라
유민들을 끌어모아 원나라가 버리고 간 만주 동녕총관부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고려는 서북면 도원수
지용수를 총사령관으로 서북면부원수 양바얀, 동북면원수 이성계, 안주상만호 임견미와 함께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1370년 11월 2일 나장탑에 도착해 비장 홍인계가 기병 3천으로 선봉이 되어 요동성의 기사인
테무르와 싸우던 중에 뒤이어 도착한 고려군 본대가 숫자로 밀어붙여 소수의
적병을 물리치고 성을 차지하긴 했는데 성내의 식량창고를 불태우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때 북쪽 심양에서 군벌 나하추가 남하하는데 고려 본국에서 보급은 전혀 오지않으니 식량이
없는지라 이틀만에 황급히 철수하는데.... 지용수는 적군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왔던
방향인 동남쪽 대로를 버리고 서남쪽으로 행군해 요동반도에서 해안가를 따라 철수하는데
식량이 없으니 고려군은 수없이 굶어죽어 나간지라 훗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영향을 끼칩니다.
명군과 김응하의 좌영이 앞장을 서고 중군과 우영이 뒤따르다가 여진군을 마주하자 후미의
중군과 우영은 언덕으로 후퇴했으나..... 좌영은 평지에서 여진군 기마대 를 맞이합니다.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의 여진군이 조선군을 향해 진격해 김응하 좌영이 기습당해 죽으니, 이민환이 쓴 책중일록에
5천에 달하는 조선군이 총 한방을 쏜후 재장전하는 중에 여진 기병이 진중으로 난입하니... 천보 뒤쪽 중영 병사
들은 겁에질려 사시나무 떨듯하며 무기를 버리고 주저앉아 움직이지 못하니 좌영은 우군의 목전에서 괴멸 당합니다.
좌영을 구하라는 지시를 받은 우영 병사들은 이동하는 중에 역시 기습을 받아 흩어지니 좌우영
9천이 몰살당한후 포위된 중군은 장군들이 결사항전을 외쳐도 겁먹은 4천 병사들이
호응하지 않는지라 화약 상자를 모아 폭사 하려는 순간, 적군이 통역사를 찾으니
부원수 김경서가 나서서 출병을 변명한 후에 도원수 강홍립이 항복하니 富車(부차) 전투 입니다.
조총은 탄환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으니 오다 노부나가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
에서 조총대를 3열로 편성해 1열 사격, 2열 총구 소제, 3열 총알과 화약 재장전
으로 연속사격을 실시하여 일본 최정예 다케다군 기마대를 몰살 시키고 일본의 패자가 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유성룡이 신립장군에게 일본군 조총 대비책을 묻자 그는“쏜다고 다
맞는답니까?”퉁명스레 대꾸했는데... 조총 재장전 시간을 생각해 두만강에서 여진족을
무찔렀던 조선군 기마대가 돌격하면 1진은 피해를 입어도 2진이 돌파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17년전 오다 노부나가 3단 전법으로 1열 발사후 총구소제, 2열 조준 사격, 3열 탄약
장전으로 이어지는 연속 사격을 실시했으니 조선군 기마대는 적 진지 까지 접근해 보지도 못하고 격파
당하니, 전투의지를 상실해 겁에질린 조선군은 달아나 금강물에 빠져 몰살당했는데도 조선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네요? 그러니까 조선군은 과거의 전투를 전혀 학습하지 않았으니 연구하고 배우는데는 젬병이라?
하다못해 사서에는.... 적 기마대와 접전하면 들판이 아닌 산지나 계곡에 진지를 구축하고 뾰족하게
깍은 말뚝을 세우며 장애물 도랑을 파야하고, 만부득이 평지에서 대전하면 말발굽을
찌르는 쇠붙이 장애물을 뿌리고 장창대를 준비해야 하며 3단 연속사격 해야 하거늘 당황해
한꺼번에 일제히 총을 쏘고는...... 전원이 총구 소제와 재장전을 하는 혼란 중에 전멸당한 것입니다?
그러자 참패를 당한 명나라는 황망한 가운데 다핼스럽게도 명장 웅정필을 파견해 요동을 굳게 지켰으니 웅정필이
화포와 무기를 강화하고 요동 일대를 철통같이 수비하자 한동안 후금은 요동을 크게 침략하지 못합니다.
1621년(천명 4년), 기세가 오른 누르가치는 예허부를 습격해 심양, 요양을 잇따라 함락시켰고 1625년 심양으로
천도했으니 이때 금의 세력권은 요동 전역에 미쳤으며 1626년 연전연승하던 누르가치는 명나라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을 함락시키려고 했는데 그 앞에 있는 영원성에서 장군 원숭환이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홍이포를 대량으로 배치하니 홍이포의 위력에 금군은 패배해 퇴각했으니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원성 전투 이후 누르가치는 몽골의 칼카 원정을 떠났고, 또 코르친과 동맹을 맺었으니누르가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니 영원성 전투에서 포탄으로 인해 사망한 것은 누르가치의 아들이나 비왕으로
기록될 뿐이며 원숭환은 "누르가치가 영원의 패전을 수치로 여겨 이로 인한 화로 종기가 생겼다" 고 말한 바 있습니다.
팽손이 또한 ‘산중문견록’에 "건주국한의 등에 종기가 생겼다" 라고 기록했는데 따라서 누르가치의 사망은
종기가 돋는 피부병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같은 맥락에서 청하에서 온천욕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다만 종기가 발병한 원인이 영원성 전투에서의 포격에 의해 다친 옛 상처가 재발한 것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후금(청나라) 태조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명나라에 대한 원한으로 한족을 가혹하게
다루었으니, 점령지의 한족 생활 공간을 박탈하고 포로로 잡은 한족 대부분을 만주족의 장원내
노비로 만들었으며, 노예들이 버티지 못해 도망가면 즉결 처형시킬 정도로 가혹하게 법을 집행했습니다.
이는 여진족 추장이 아닌 후금의 지도자를 자칭하고 나서도 크게 바뀌지 않아서 한족도 관리로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들이 고관대직에 앉을 순 없었고 언제든 만주족 고관들에게 재산과 가솔을 뺏기기
십상에, 아내가 겁탈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누르하치 재위기간동안 후금에서는 수시로
한족에 의해 만주족을 노린 독살, 암살, 반란 시도가 벌어졌고 내부적으로 불안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626년 9월 30일에 누르하치가 급사하자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의 아들로 누르하치의 8남이자 4명의
버일러(귀족) 중 네 번째 버일러(Duici Beile) 였던 홍타이지가 2남이자 대버일러인 다이샨의 지지로
한의 지위를 계승해 2대 황제로 재위에 오르면서 약탈 기마 민족의 방식을 뜯어고치는등 상황을 반전시킵니다.
누르가치는 1583년 거병한후 30여년의 전쟁을 통하여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산재해 있던 퉁구스계
국가간의 패권투쟁에서 승리하였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었으니 동서로는 동해로부터
요변(遼邊)에 이르기까지요, 북으로는 몽골 눈강(嫩江)까지, 남으로는 조선의 압록강까지 였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부족들을 모두 정복해 하나가 된 여진 부족들에 대한 후금의 지배는 영역을 나누어 다스리지
않고 복속된 부족민들을 후금의 중심지인 허투 아라 일대로 이주시켜서 통치하는 독점 경제권을
이용한 인민 지배의 성격이 강했으니 이로 인해 입관하기 수십년 전부터 다른 지역은 황무지가 되어 갔습니다.
일찍이 1115년 여진족들이 金(금)나라를 세우자 자기민족의 발상지는 장백산(백두산)이며 그 천지의
물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 유역이 천년이 넘는 삶의 근거지라 1172년에 금나라는 장백산
(백두산) 에 제를 올렸으며, 1193년에는 장백산을 開天宏聖帝(개천굉성제)로 이름(존호) 을 지어 올립니다.
500년이 지나 청나라 강희제는 장백산(백두산)을 만주족(여진족)의 발상지라 1677년 12월에 백두산을 "장백산
지신" 이라 부르며 천지에 손수 올라 직접 제사를 올렸는데...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만주족들은 장백산 을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가 탄생한 곳 이라 하여 신성시하며 제사를
지낸다" 고 적었으며 그전 우무나의 장백산 탐사보고에 의하면 어허너연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등정했습니다.
시조 누르하치에 대해서는....“장백산(長白山) 동쪽 포이호리 연못에 사고륜과 정고륜, 불고륜(弗庫倫) 천녀(天女)
셋이 목욕을 마쳤을 때, 신작(神鵲)이 붉은 과일을 막내 옷에 떨어뜨리니 입에넣자 홀연 뱃속으로 들어간후
임신되어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어머니는 아이신고로(愛新覺羅 애신각라)로 성(姓) 을 삼으라, 하늘이 너를 탄생
시킨 것은 난국을 평정하도록 함이니 물흐름을 따라가라고 하며 배를 띄운뒤 태우고, 어미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
다산 정약용도 신광하에게 ‘백두산은 산해경에 불함산, 지리지에는 장백산이다’, ‘청 황제가 오악(五嶽)에 백두산
을 더해 육악으로 삼고, 제사를 지내니 존귀함과 중대함이 옛날에 비할 비가 아니다’ 라 했는데 약용
뿐만이 아니니 고려말 목은 이색은 ‘곡주공관신루기 (谷州公館新樓記)’ 에서 “우리 나라의 영토는
삼면이 큰 바다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장백산에 이른다 (我國壤地。 三面大海。北連長白山)” 고 썼습니다.
만주족 (여진족) 청나라 (후금) 의 연표
1588년 누르하치, 건주여진 제패
1606년 누르하치, 쿤두런 한 즉위
1616년 누르하치, 겅옌 한 즉위, ( 후금 건국 )
1618년 국호를 '아이신 구룬(금나라)' 으로 자칭
1619년 사르후 전투 대승, 여진 통일 선포
1621년 요양 천도
1625년 선양 천도
1626년 영원성 전투 패배
1629년 베이징 광덕문 전투
1636년 국호를 '다이칭 구룬 (대청)' 으로 변경 및 칭제 건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