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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상계동 슈바이처 김경희 원장 | ||
[주간한국 2005-01-05 11:17] | ||
1941년 서울 답신리 조선보육원 아이들 치료를 시작으로 광복 후에는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귀국한 무의탁 동포 무료 진료, 영세민과 피난민을 위해 판자촌 봉사 활동 등 60년 동안 인술(仁術)을 베풀던 은명(殷明)내과 김경희(김경희) 원장이 마침내 청진기를 내려 놓았다. 2004년 12월 24일, 그는 마침내 의원의 폐업 신고서를 냈다. 올해 85세인 그의 쇠잔한 육체는 의료 활동에 더 이상 동의해 주지 않았다. 68년 전인 1936년. 식민 치하에서 가난 때문에 치료 한 번 못 받고 결핵으로 세상을 등진 친구들은 물론, 자신도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맨 경험이 오늘의 김 원장을 만들었다. 1940년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세브란스의전(醫專)에 입학하는 것으로 길은 시작됐다. 6.25 전쟁 후에는 일본 교토대학 의학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의학 박사’로 귀국한 그는 1973년에 다시 왕진 가방을 들고 서울 답십리, 청계천, 망원동 등의 판자촌에 뛰어 들었다. 10년 동안 전국을 돌며 무료 진료도 펼쳤다.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달려 가던 그가 한 곳에 정착한 때는 1984년. ‘은명내과’ 간판을 내걸고서였다. 판잣집이 즐비해 서울 빈민촌의 상징이던 상계동이었다. 이웃을 위한 봉사가 끊이지 않자, 세상은 그를 ‘상계동 슈바이처’로 부르기 시작했다. 20년 만에 문은 닫았지만, 은명내과의 진료비는 싸기로 소문난 곳이기도 했다. 진료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진료비가 1,000원이었던 것. 그러나 이 진료비에 숨어 있는 뜻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개원 초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진료를 하자 “누굴 거지로 아느냐”며 되려 반발을 샀던 경험이 준 교훈이었다. 그러잖아도 궁핍한 사람들의 자존심만은 세워 주자며 짜낸 아이디어가 바로 1,000원 진료였던 것이다. 그렇게 몸의 병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보듬어 주고자 했던 것. 가난한 이웃을 향한 그의 박애 정신은 의술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후에도 심장수술후원회를 결성, 선천성 심장병 환자들을 치료했고 은명장학회를 설립, 지금까지 2,000여 빈민 학생들이 혜택을 받았다. ‘빨리 건강을 찾으셔야 할 텐데…….’ ‘이제는 우리가 기도할 차례.’은명내과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속으로 하는 소리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겐 ‘당분간 휴진하오니 양해 바랍니다’라는 문구만이 메아리쳐 올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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