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올해의 장애인상’ 시각장애인 마술사 김병휘 씨
- “마술로 일궈낸 작은 행복,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마술사가 표지에 사인을 하자 하얗게 비어 있던 공책에 그림이 나타난다. 아무것도 없던 바구니에서 꽃이며 온갖 예쁜 소품들이 나온다. 이어진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 마술사 김병휘 씨는 15년째 소외계층을 위해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경기도 부천시지회 소속 안마사인 그는 세간의 편견을 깨고 시각장애인 마술사로 활동 중이다. 최근 ‘올해의 장애인상’을 수상한 김병휘 씨를 만났다.
Q. ‘올해의 장애인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A. 상을 받아 기쁘면서도 이렇게 큰 상을 받아도 되나 싶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활동하고 후배 양성에도 힘쓰라는 뜻으로 주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포상금은 시각장애인 단체와 학교, 면사무소 등 봉사활동을 다니며 인연을 맺은 기관에 기부했어요. 그동안에도 마술 공연으로 얻은 수입은 모두 기부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마술사 최현우 씨로부터 배운 카드 마술을 연습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공연을 선보이는 게 목표입니다.
Q. 장애를 인정하기까지 마음고생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A. 어릴 때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고 야맹증도 심했습니다. 그저 ‘남들보다 눈이 좀 몹시 나쁜가 보다’ 했죠. 그런데 병역판정 신체검사를 받다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습니다. 군의관이 ‘시각장애’라며 병명을 설명하는데,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죠. 제가 앓은 망막색소변성증은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는 진행성 질환이라 증상을 병증으로 인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저 또한 제가 시각장애를 가졌는지 모르고 살았던 거죠. 당시만 해도 우리 사회에 장애인 복지 관련 인프라가 아주 부족했죠. 매일 좌절과 막막함으로 몸서리쳤습니다. 꽤 긴 시간을 방황했습니다.
Q. 어떤 마음으로 (장애를) 이겨낼 수 있었나요?
A. 시각장애인이 되고 나니 사소한 일상생활부터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 방법을 배울 길이 없고 능력을 개발할 여건이 안 돼 더욱 좌절했죠.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복지관과 맹학교를 다니며 재활교육을 받았습니다. 서서히 점자로 소식지 등을 읽고, 흰지팡이로 주변을 산책하면서 할 수 있는 게 많아졌어요. 그러면서 자신감이 싹트고 마음도 잡히더라고요. 어느 날 “장애인은 꼭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내가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곧바로 안마사 자격을 취득했고, 동네 양로원을 찾아다니며 안마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자 지금까지도 소외계층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Q. 마술은 어떤 계기로 배우게 됐나요?
A. 한 복지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한 여가생활 프로그램을 통해 마술을 처음 접했어요. 주제가 흔하지 않았던지라 끌리더라고요. 수강생 중 시각장애인은 제가 유일했는데, 확실히 마술이란 분야가 시각장애인에게 쉬운 영역은 아니었습니다. 손동작 익히는 과정도 어렵거니와 묵직한 마술 도구를 떨어뜨리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도전정신을 자극했거든요.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의욕이 솟구쳤습니다.
Q. 시각장애인이 마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나요?
A.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배우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경기도 부천에 있는 마술학원을 찾아갔어요. 학원에서는 “시각장애인 마술사는 본 적도 없고, 시각장애인은 가르쳐본 경험도 없다”며 난색을 표했죠. 그러면서도 제 열의를 보고는 같이 노력해보자며 흔쾌히 저를 받아줬어요. 선생님의 손동작을 촉지하면서 기술을 익혔습니다. 점자 스티커를 붙이기도 하고 소품에 작은 구멍을 뚫기도 하는 등 저만의 노하우를 이용해 마술 도구에 익숙해졌어요. 지금은 ‘장애인 마술단’을 설립해 어린이집과 지역아동센터, 복지관, 소외계층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장애인 마술단은 저를 비롯해 9명의 지적장애인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Q. 말 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로 이뤄낸 결실이군요.
A. 눈이 보이면 두세 번 만에 할 것을 저는 50회 정도 반복해야 할 수 있거든요. 또 시각장애인 마술사는 프로 마술사의 공연이나 강의 영상을 참고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부단한 연습 끝에 이제는 100여 종류의 마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죠. 특히 고급 기술을 습득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요. 저는 스케일이 크고 화려한 기술보다는 운동화 끈이나 흰지팡이 등 일상의 소품으로 재미를 주는 마술을 선호합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확실하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소확행 마술’인 셈이죠. 저와 12년째 함께하는 활동보조 선생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Q. 언제 가장 큰 보람을 느끼나요?
A. 준비 과정이 늘 벅차고 힘듭니다. 그렇기에 관객 앞에서 실수 없이 공연을 마칠 때면 스스로 대견함과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관객이 전하는 박수와 환호는 그간의 고생을 싹 잊게 만들죠. 특별히 시각장애인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에는 더 마음이 쓰입니다. 제가 시각장애인이기도 하고, 또 마술을 배울 때 관객 입장이 되어 보았기에 어떤 부분이 불편하고 어려운지를 압니다. 맹학교나 시각장애인 복지관 등에서 공연할 때면 마술 동작이나 진행 형식을 자세하게 말로 풀어 설명합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A.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마술 공연을 펼치는 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입니다. 또한 제2, 제3의 시각장애인 마술사가 나오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습니다. 마술은 단순한 눈속임이나 트릭이 아니에요. 텅 빈 주머니에서 꽃을 꺼내는 등 변화를 통해 꿈과 환상을 실현하는 종합예술입니다. 앞으로도 마술로 시각장애인의 가능성을 선보이고 싶고, 행복을 선물하는 마술사로 남고 싶습니다. 제 공연으로 변화할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술이겠죠.
김수정·신혜령 기자
* <손끝으로 읽는 국정> 제177호에서 발췌
* 사진 출처는 간행물 아닌 각종 인터넷 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