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인간들이 부르는 노래들[제1편]
좋은 시인은 항상 생성과 소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24세의 청년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윤동주, 서시」)라고 노래한다. ‘하늘’은 내면의 도덕적 기율, 즉 양심을 비춰보는 절체절명의 준거점이다. ‘하늘’은 깨끗이 닦인 거울이자 이념의 촛대가 되는 것이다. ‘하늘’의 투명함과 고결함은 내면에 숨은 양심에 묻힌 한 점 오탁조차 고스란히 드러나게 했으니, 잎새에 이는 바람에서조차 괴로움을 느꼈을 테다. 나무는 얼마나 많은 잎새를 거느리고, 바람은 또 얼마나 자주 잎새를 흔들어대는가! 크고 작은 바람에 휘둘리는 잎새와 마찬가지로 ‘나’의 크고 작은 괴로움은 얼마나 잦았을 것인가! 시인은 이 끔찍함을 죽는 날까지 감당하겠다고 언명한다. 청년 시인은 마음의 충족과 평화 대신에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양심의 괴로움을 선택한다. 이 괴로움을 감당하려는 마음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의 마음은 하나다. 곧 세상의 오탁과 분리된 고결함을 지향하는 마음이다. 시인은 세속에 포박되었으면서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 즉 제 마음에 ‘별’을 품은 천상의 존재로 산다.
시인은 자기 세계의 한복판에서 산다는 점에서 농부다. 어디에 살든지 농경시대의 농부들은 대지의 자식들, 기후의 예측자들, 씨앗의 수호자들이다. 그들은 자연 세계의 중심에서 제 삶을 꾸리는 탓에 ‘풍경’의 중심을 꿰뚫어본다. 심리학자 에르빈 슈트라우스는 농부의 ‘풍경 감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익히 잘 아는 중심의 둘레에 모르는 것, 낯선 것이 동심원을 이루면서 펼쳐진다. 모든 편에서 세계는 모르는 것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세계의 중심에 살며, 또 이미 아는 것의 테두리 속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에 의하여 혼란되지 아니한다.” 사물과 풍경들은 모르는 세계로 빨려들어가며 사라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 모름 속에서 혼란에 빠질 수도 있지만 농부들은 모르는 것 속으로 사라지는 세계의 모든 사물에 감응하고, 그것을 감각적 명화 속에서 포착해낸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부분
시인은 견자(見者)다. ‘본다’는 것은 지각의 시작점이다. 사물과 세계를 본다는 것은 앎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관조하는 행위이다. ‘본다’는 것은 지각의 단초가 되는 행동이다. 사물이 지각되는 바대로 존재한다면, 시인은 그 지각의 특이성과 확장성으로 주목받는다. 시인이 드러내는 지각의 특이성은 항시 다르게 보기, 낯설게 보기의 결과로 나타난다. 시인은 “새 보는 곡예사(曲藝師)”(정현종, 「세상 초록빛을 다해」)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본다. 비를 “움직이는 비애”(김수영, 「비」)로, 수박을 “물의 보석상자, 과일가게의 냉정한 여왕, 심오함의 창고, 땅 위의 달!”(파블로 네루다. 「수박을 기리는 노래」)로 보는 게 시인이다. 시인은 모래알 따위의 가장 작은 것을 우주적 크기로, 가장 짧은 시간을 우주적 시간으로 바꾼다. 보라, 한 시인에 따르면, 한 알의 모래는 하나의 ‘세계’이고, 한 송이 들꽃은 하나의 ‘천국’이다. 또한 한 점은 ‘무한’이고, 찰나는 ‘영원’을 품는다. 바로 그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시인은 본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