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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霧中)
박 완 서
지독한 안개였다. 일층인데도 베란다에서 땅이 안 보였다. 내가 일층에 있다는 것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막막한 깊이가 고여 있었다. 안개는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었다. 필시 하늘과 땅,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기 전에 혼돈이 그러했으리라. 덫에 걸린 맹수처럼 울부짖는 차들의 소리도 거리감 없이 다만 괴기하게만 들렸다.
나는 베란다의 쇠난간 사이로 다리를 하나씩 넣고 걸터앉았다. 난간 사이는 내 넓적다리가 꼭 낄 만했다. 나의 희고 늘씬한 다리를 안개에 담가보고 싶었다. 안개는 여울물처럼 차고 새벽의 풀섶처럼 눅눅했다. 나도 바람난 계집애였다. 새벽의 풀섶을 헤치고 돌아와 간밤에 빗장 따논 대문을 가만가만 열고 들어서려는데 대문 뒤에 지키고 섰던 어머니의 무서운 눈과 마주친 날 나는 고향을 떠났다.
베란다 난간 사이로 양다리를 내밀고 걸터앉아 발장구 치는 일은 막상 해보니, 남의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부러워한 것처럼 편하지만은 않았다. 나의 엉덩이는 베란다의 좁은 턱에 의지하기엔 너무도 컸다. 그래도 나는 양손으로 쇠난간을 움켜잡고 오래 그러고 있었다. 넓적다리까지 넘실대게 여울물이 흐르고 간밤 동안 더욱 싱싱하게 날이 선 억새풀이 종아리를 할퀴었다.
학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 중의 하나가 우리집 텃밭을 돌면서 물살 센 여울을 이루었다. 그 물은 복중에도 뼈가 시려누구도 오래 미역 감지 못했다. 더군다나 팽나무집 맏며느리 갑순이가 김매다 말고 더위를 먹었는지 비틀비틀 옷 입은 채 곧장 여울물에 뛰어들었다가 당장 시체가 되어 떠올랐다고 전해지고부턴 그곳은 귀신 붙은 여울목이 되어 아무도 미역 감으려 들지 않았다. 나는 여름밤에 미역 감는 일조차 어머니 몰래 해야 했다. 어머니는 물귀신을 안 믿는 딸을 물귀신보다 더 섬뜩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열어놓은 문으로 안개가 밀려들어와 방 속도 눅눅했다. 전등갓 근처에 둥실 떠 있턴 한 다발의 안개가 혼백(魂魄)의 자락처럼 인기척에 무산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도 뒤늦게 소름이 쫙 끼쳤다. 팬티 밑 노출된 살갖엔 온통 모래알처럼 굵고 단단한 소름이 돋아 있고 군데군데 푸릇푸릇 얼어 있기까지 했다. 나의 자랑인 길고 유연한 다리가 남의 다리처럼 울퉁불퉁 징그러웠다.
베란다와 반대쪽 문만 열면 욕실이라는 게 나를 즐겁게 했다. 따뜻한 물에 언 몸을 담그는 행복을 무엇에 비길까?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행복했다.
내가 불 때거나 연탄 갈지 않고도 알맞게 따뜻한 방과 여성잡지 컬러 페이지의 싱크대 선전과 똑같이 생긴 부엌과 언제나 더운물을 쓸 수 있는 욕실이 있는 십팔 평짜리 아파트가 내 거라는 행복감이 쾌적한 온도의 따뜻한 물이 되어 젖가슴까지, 목고개까지 차올랐다.
그맘때쯤 옆집에서도 욕실 쓰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 욕실과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어서 물 트는 소리, 샤워하는 소리, 변기 쓰는 소리, 이 닦는 소리, 물 빠지는 소리를 따로따로 가려 들을 수도 있었다. 나는 옆집의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옆집 사람은 그런 일을 너무 조심스럽게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듣는 소리라 내 집 일처럼 크게 들리지 않는 것을 감안하고도 옆집의 그런 소리는 지나치리만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옆집 사람은 진짜 신산가봐, 나는 옆집에 사는 사람을 남자밖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했다. 일층엔 옆집과 우리 두 집밖에 없었다. 고작 십팔 평짜리 아파트라 복도로 난 문은 여인숙의 방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만 일층에 입주한 가구는 우리 두 가구밖에 없었다. 아파트 경기가 없는데다 일층은 인기가 없어서 나머지는 아직도 미분양 상태였다. 옆집이 먼저 입주하고 우리가 두번째였다. 두 집은 공교롭게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옆집 남자가 수돗물 하나 시원히 못 틀고 신경을 쓰는 건 순전히 나 때문이라고 생각되자 내가 아래층의 수많은 빈집 중에서 하필 그 남자의 옆집을 골라잡은 게 미안해졌다.
신사의 이웃이 됐으니 자연히 숙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수도꼭지를 반쯤만 틀고, 샤워도 소리 안 나게 쓰고 양치질할 때 물을 한 모금 물고 고개를 젖히고 목젖이 울리게 부글대는 상스러운 버릇도 고쳤다. 슬리퍼를 철썩거리고 걷다가도 깜짝 놀라면서 발끝으로 걸었다.
그러면서 본의 아닌 이런 숙녀 노릇이 슬그머니 편해지기 시작했다. 숨어 사는 것도 아니겠다, 어엿한 내 집이겠다 이게 무슨 꼴이람, 이러면서 기죽을 펴려고 해도 안 됐다. 어엿한 내 집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누구에겐가 쫓겨 숨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옆집 남자 탓만은 아니었다. 옆집 남자에 의해 내가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싶은 이런 생각이 좀더 분명해졌다뿐 그런 의심은 지금처럼 늘어진 팔자가 시작될 때부터 피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 나를 귀여워해주고 놀고먹도록 돌봐주는 친절한 남자를 나는 그렇게 불렀다 ― 아파트를 하나 사줄 테니 이제 그만 들어앉으라고 말했을 때 나는 축격처럼 갑자기 내가 이 도시에서 몸을 함부로 굴리며 허덕이고 희구하던 소원이 뭔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건 아파트를 하나 갖는 거였다.
내 아파트를 갖게 되다니. 이 도시에서 몸 하나로 벌어먹고 산 지 칠 년이 되건만 이 도시는 조갑지처럼 입을 다물고 나를 약올렸었다. 마침내 조갑지를 열었다는 복수심 같은 게 마냥 나를 즐겁게 했다.
“아빠, 이왕이면 난 강변이 좋아.”
나는 이렇게 아빠에게 응석을 부렸다. 아빠와 나는 곧 아파트를 보러 다녔다. 강변엔 아파트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호화롭고 비싸기로 소문난 아파트만 골라서 아빠는 나를 데리고 다녔다. 아빠는 기분파였다.
도시생활 칠 년 동안에 버는 대로 옷차림에만 집중 투자한 덕으로 명동 한복판에 내놓아도 꿀릴 게 없을 만큼 세련됐지만 먹는 것과 잠자리는 상경했을 당시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게 내 형편이었다.
그런 내 눈에 오십 평, 육십 평 아파트는 눈요기하기만도 벅찼다.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베르사유 궁전도 그 이상을 넘지 못했다. 눈이 뒤집힌다는 과장된 표현이 왜 있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했다. 자주 자신을 됫박과 비유해가며 소유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되보길 잘하는 나의 버릇을 나의 통 큰 친구들은 옹졸하다고 비웃었지만 남이 뭐라든 그건 나의 마지막 미덕이었다.
기분파이면서도 능구렁이기도 한 아빠는 내가 육십 몇 평에서 오십몇 평으로, 오십몇 평에서 사십몇 평으로 자꾸만 낮추는 걸 다만 미소로써 지켜볼 뿐 자신의 의사표시는 전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빠에겐 나나 아파트가 장난감이었다. 드디어 십몇 평으로까지 자신의 값을 하락시킨 날 아빠는 “쇠뿔도 단숨에 빼랬다구…….” 하면서 지금의 아파트를 계약하려 들었다.
그렇다고 아빠와 내가 의견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십몇 평짜리는 십몇 평짜리만 모여 있는 서민 아파트 단지를 원했는데 아빠는 굳이 지금의 이 맨션아파트 단지를 고집했다. 이 단지는 최소가 사십 평인 자타가 공인하는 고급맨션 단지인데 어떻게 된 게 십팔 평짜리 한 동이 혹처럼 붙어 있었다.
“○○동의 × × 맨션이라면 세상이 다 알아주게 돼 있어. 십팔 평 짜리도 있다는 건 아마 한 단지 안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걸.”
아빠는 이러면서 좋아했지만 난 되레 그게 떨떠름했다. 그러나 나는 아빠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최근에 분양된 거라 깨끗한 게 마음에 들었고, 평수가 넓은 동은 높은 경쟁률이 붙어 분양된 후에도 최고 기천만원씩의 프리미엄이 붙었다는데도 십팔 평짜리는 아직도 미분양된 호수가 많아 분양가에 살 수 있어서 좋았다. 아빠는 돈 걱정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럴수록 눈치껏 처신하는 게 귀염을 오래 받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나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일이 다 잘돼가다가 막상 벌집처럼 붙은 무수한 십팔 평 중의 하나를 골라찹을 때 아빠와 나는 또 한번의 의견 충돌을 겪었다. 나는 텅텅 비어 있는 일층에서 하나를 골라잡으려 들었고 아빠는 될 수 있는 대로 높은 층을 원했다.
“이런 바보, 아파트는 일층이 제일 인기가 없고 값도 싸다는 것도 몰라? 높은 층 좋은 자리는 여기도 벌써 프리미엄이 붙었고 사이드나 이삼층도 빈집이 몇 안 남았는데 아래층만 텅텅 비어 있는 것만 봐도 알조지. 딴것도 아니고 집이란 비록 작은 집이라도 투자가치라는 걸 생각해야 돼. 이 남는 건 고사하고 팔고 싶을 때 안 팔릴 집처림 곤란한 것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건 남들의 사정이고 내 사정은 달랐다. 나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면 직사할 것 같은 고층에서 살 수 없었다. 이삼층은 직사는 안 해도 발목이 삐거나 부러질 게 뻔했다. 발목을 삐고는 멀리멀리 도망치지 못한다. 불이 나서 창문으로 뛰어내린 거라면 발목쯤 삐어도 목숨만 살면 그만이지만 나에겐 불보다 더 무서운 게 있었다. 멀리멀리 도망치기 위해 발목을 삐지 않고도 뛰어내릴 수 있어야 했다.
뭔가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은 아빠한테 종종 귀염받는 거 외엔 내 몸이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게 된 후부터 싹튼 거였지만 앞문으로 쫓아왔을 때 뒷문으로 도망갈 궁리까지 할 만큼 구체적인 게 된 것은 내 집을 사러 다닐 때부터였다.
아빠와 내가 함께하는 생활은 처음부터 떳떳지 못했다. 떳떳지 못한 남녀가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도시는 수많은 여관과 방갈로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떳떳지 못한 생활의 유동적인 습성이 떳떳한 사람들의 붙박이 생활에 끼어들기 직전에 그 정도의 자구책을 강구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아빠에게 이런 자세한 이야기까지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는 나를 큰아기로 불렀다. 그만큼 아빠는 나를 이 풍진 세상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쫓기고 있다니, 그건 아무리 내 망상이라 해도 아빠의 자즌심을 해칠 만했다.
나는 아빠의 자존심을 해칠 만한 사연은 쑥 빼고 덮어놓고 일층을 고집했기 때문에 아빠와의 대립은 좀 심각해지고 말았다. 아빠는 일 주일도 넘어 나한테 발길을 끊었고 나 역시 십팔 평의 내 집이 생기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놓쳐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집을 피우고 있었으니까. 나에게 집이란 은신처를 뜻했고 도망칠 구멍을 터놓지 않은 은신처는 무의미했다.
결국 아빠가 우리 큰아긴 언제 철이 들어 세상물정을 좀 알게 될꼬? 하는 한마디로 낵 고집에 져주어 나는 십팔 평짜리 나의 아파트를 갖게 됐다.
아빠는 나하고 미리 약속한 날만 찾아왔다. 그 밖의 날은 나의 자유였다. 그러나 쫓기고 있다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순 없었다. 화장품장수가, 예수쟁이가, 참기름장수가, 자연식품 선전꾼이 벨을 누를 때마다 나는 일단 나를 쫓는 사람을 연상하고 아울러 도망갈 구멍을 점검하고 나서 문을 열었다. 아직도 나는 나를 쫓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미물이 배우지 않고도 천적의 얼굴을 알 듯이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조강지처라는 여자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고 매력 없는 여자의 얼굴일 수도 있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정의의 사도의 얼굴일 수도 있었다. 나는 내 망상 속에서 자주 그 얼굴과 만났다.
그렇다고 아빠가 나 때문에 조강지처를 박대했다거나 정의를 짓밟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증거는커녕 그런 낌새조차 느낀 적이 없었다. 아빠가 가끔 나를 귀여워하고 싶어한다는 것 하나만 확실할 뿐 그 밖의 아빠는 나에겐 오리무중이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빠가 오기로 된 날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자주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이것저것 먹고 싶은 걸 해먹고 낮잠도 자고 텔레비전도 봤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걸 바라보는 것만으로 한나절이 간 적도 있었다.
밤엔 조금 무서웠다. 아빠가 밤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밤을 보내는 데 익숙했다. 그렇지만 아래층에 아직도 두 집밖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게 휘한 나머지 지나치게 옆집에 신경을 썼다. 도대체 옆집에 사람이 살고 있기나 한지. 욕실에서 물 쓰는 일조차 신경을 써가며 소리 안 나게 가만가만 하는 골수 신사고 보니 그 밖의 인기척이 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상가에 불이 꺼지고 단지를 드나드는 차소리도 멎은 깊은 밤중이면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남자의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건 분명히 쫓기는 자의 거칠고도 짓늘린 숨결이었다. 그건 어쩌면 나 자신의 숨결과 심장의 박동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의 숨결과 내 숨결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 뛰는 소리와 나의 심장 뛰는 소리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로 가슴을 맞대고 쫓기는 불안을 함께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내가 남자와 부둥켜안고 있는 공상을 하면서 전혀 정욕을 안 느껴보기도 처음이었다. 정욕은커녕 그 남자와 함께라면 온 세상이 썩은 내를 풍기며 부패한다 해도 싱싱한 채 청청한 하늘을 우러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이 밝으면 물론 밤사이의 망상은 사라졌다. 특히 그가 쫓기고 있다는 건 터무니없는 추측이었다. 그는 아침에 욕실을 쓰는 거 외엔 온종일 인기척이 없었지만 남자니까 아마 출근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의 아내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없거나 아니면 그를 닮아서 이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조신한 여자일 것이다. 그에게 아내가 있나 없나 확인해보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단 그의 아내를 만나보고 나면 그를 밤마다 부둥켜안을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없는 셈치기도 수월했다.
목욕을 끝내고 보디로션을 온몸에 처덕거리고 거울 앞에서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고슬고슬한 걸 내 마음에 드는 웨이브로 푸는 동안 안개가 갰다. 화장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다시 베란다로 난 창을 열다 말고 나는 깜짝 놀랐다. 베란다 옆 녹지대의 어린 나목들, 상록수, 잔디 할 것 없이 온통 은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리 창 앞에 서 있는 삐쩍 마른 어린 벚나무의 가장귀가 그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줄은 미처 몰랐었다. 우리집 앞 녹지대뿐 아니었다. 단지 내의 모든 나무들이 일제히 마술에 걸려 곶감처럼 희디흰 시설을 내뿜은 것처럼 동화적인 은백색을 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눈이 왔나? 그러나 찻길과 보도블록에 눈의 흔적은 없었다. 눈처럼 희되 눈처럼 헤프지 않고, 훨씬 더 결곡했다.
그럼 서리인가? 그러나 서리처럼 차갑되 서리처럼 반지빠르지 않고 훨씬 더 넉넉했다. 눈인들 서리인들 저다지도, 아무리 잔 가장귀나 가시 하나라도 빠뜨릴세라 보탤세라 본디 모양대로 완벽하게 감쌀 즉는 없는 일이었다.
측백나무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그 섬세한 모양 그대로 희디
희게 반짝이고 있어 마치 유리창에 피어난 절묘한 성에꽃을 한필의 직물처럼 걷어다가 걸어놓은 것처럼 환상적으로 보였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안개가 걘 것만 좋아라고 이런 절경엔 관심도 없이 바삐 지나다니는 차와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내 눈이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이때 나는 문득 옆집 베란다 밑에 웅크리고 앉은 남자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오다가다 몇 번 눈길이 마주친 적은 있어도 말을 시켜보긴 처음이었다. 허심 한 눈길이 인상적 일 뿐 보통으로 생긴 남자였다.
“아, 네.”
남자답지 않게 참새처럼 민감하게 놀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허심한 눈길에 아직도 찬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게 반가웠다. 그도 영문 모를 환상의 세계에 도취해 있었다고 알아차렸다.
“뭐 하세요?”
“아, 네 그저…….”
남자가 엉거주춤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파자마 바람이었고 한쪽 가랑이 솔기가 터져 삐쩍 마른 정강이가 벌쭉댔다. 그는 신사가 아냐, 나는 그게 유쾌해서 웃음이 났다.
“뭐 하시냐니까요, 거기서?”
“아, 네. 안개를 보고 있었습니다.”
“안개를요?”
나는 그가 여직껏 그의 베란다 밑의 작은 장미나무 떨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 기상천외의 대답에 적이 당황했다. 그는 신산가봐를 그는 미쳤나봐로 고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두렵진 않았다. 나는 곧 한층 유쾌해졌다. 이제 안개는 흔적도 없이 개고 유난히 맑고 쌀쌀한 아침이었다.
“안개를 좋아하시 는군요?”
“글쩨요.”
“저도 좋아해요.”
“난 뭐…….”
남자가 도망가고 싶은 것처럼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까 난 안개에다 발을 씻었어요,”
“아, 네. 참 지독한 안개였죠?”
“그렇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잖아요?”
“아뇨.”
그가 정말 미친 사람처럼 자신 있게 대들었다.
“아니면?”
“그놈이 드디어 꼬리를 잡혔어요. 아니 온몸을 송두리째. 난 드디어 안개의 입자를 보았습니다. 같이 구경하지 않겠어요?”
그가 베란다 밑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가슴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의 손은 찼지만 그의 가슴은 듬직했고 몸에선 구수한 담배 냄새가 났다.
“자아, 이것 보세요.”
그가 희게 반짝이는 장미 가장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의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그의 눈에서 찬탄이 싱싱하게 되살아났다.
“그게 그럼 안갠가요?”
“네, 안개가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닿았던 자리에 이렇게 얼어붙은 거죠.”
“댁은 그럼 정말 안개를 보았군요?”
“댁도 볼 수 있어요, 자어.”
그가 나를 자꾸 끌어 잡아당겼다. 나는 공부도 많이 안 했는데도 시력이 안 좋았다. 그 남자처럼 안개의 입자를 하나하나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단박 알 수 있었다. 마음으로 본 것도 같았고, 그 남자의 찬탄에 감염된 것도 같았다. 뒤미처 나는 그의 숨결과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내가 꿈속에서 감지한 것처럼 거칠고도 짓늘린 듯한 소리였다. 우린 쫓기고 있다! 밑도끝도없는 그런 생각은 허황하고도 감미로웠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가요?”
나는 그와 나의 너무도 다정한 자세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개에 대해 대답했다.
“곧 사라지겠죠? 햇살이 퍼지고 기온이 오르면…….”
“이웃이 돼서 반가워요. 부인은 안 계신가요?”
나는 그의 손을 놓으며 열린 창문을 통해 그의 집 안을 홈쳐보며 말했다.
“네, 여행중입니다.”
“어머, 멋있는 분인가봐요?”
“왜요?”
“남편을 집 보게 하고 훨훨 여행을 떠나다니 얼마나 멋있어요?”
“그게 그런가요?”
“저녁에 초대해도 되겠어요? 우리 남편도 여행중이거든요. 일 년에 열석 달은 아마 여행으로 보내나봐요.”
“재미 있는 분이군요.”
“본인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아내는 쓸쓸하답니다. 댁은 외롭지 않으세요. 부인이 여행중일 때 말예요.”
“아, 네. 별로 못 느껴 봤는데요.”
“저녁 초대, 응해주시는 거죠?”
“아뇨, 아닙니다.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습니다.”
그가 휙 몸을 돌이켜 난간을 휘어잡더니 원숭이처럼 민첩하게 베란다로 기어올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반상회날 나는 처음으로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옆집에선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내가 일층 몇호에 입주한 누구누구라고 자기 소개를 하자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했다.
“팔층 사이드도 비었는데 왜 하필 일층을 했어요'”
“팔층 사이드보다도 이층 한가운데 남향이 낫지, 안 그래요?”
“이층 남향보다는 구층 동향을 더 쳐줄걸요. 구층 동향에 딱 한 집이 남아 있었는데 바로 오늘 나갔답니다.”
“이제 일층 빼고는 거의 다 들어찼죠? 아마.”
“봄만 돼봐요. 일층이라고 마냥 비어 있겠어요?”
“봄 아니라도 저이처럼 일부러 일층 찾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파트 처음 살아보는 사람 중에 더러 저런 사람이 있어요. 땅 떠나면 죽는 줄 알고 경제성 같은 건 고려를 안 하거든요.”
일층 산다고 이건 숫제 무지렁이 취급이었다.
“맨션에선 한겨울에도 반소매에 발 벗고 산다더니 우리 맨션은 올겨울에 왜 그렇게 추웠죠? 참 별꼴이야.”
“정말이에요. 맨션 체면이라는 게 있지. 난 이사 오기 전에 겨울내복을 싹 정리했다가 겨우내 감기 떠날 날이 없었다니까요. 맨션 체면에 남부끄러워 말도 못 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이 십팔 평에 사는 주제에 말끝마다 맨션이었다. 여자들이 맨션, 맨션 할 때마다 그 표정까지 함박꽃처럼 염치없이 피어났다. 대개 처음 집 장만을 했거나, 연탄 때는 작은 땅집 아니면 연탄 때는 서민 아파트에서 옮겨온 걸로 보이는 이들에게 맨션이란 몽매에도 그리던 지상의 목표였음직 했다. 나는 가당치도 않게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들의 맨션 콤플렉스는 반상회 도중에도 문득문득 나타나곤 했다.
집집마다 몇월 몇일 몇시를 기해 일제히 쥐약을 놓자는 반상회의 공지사항을 반장이 읽자 그건 서민 주택에나 해당되는 소리지 맨션에 쥐가 어딨냐고 너도 나도 한마디씩 했다. 집집마다 문패를 달자는 대목도 있었다. 문패도 서민 주택에나 어울리지, 호화 주택이나 맨션의 문패는 하이힐 신고 댕기꼬랑이 늘인 꼴일 거라고 누가 재빨리 농담을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여자들은 박장대 소하면서 좋아했다.
그 밖에 특별히 맨션에 저촉되지 않는 조항들은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진지한 질문도 했다. 반상회의 공식적인 순서가 끝나자 커피와 과일이 나왔다.
“아이 달아, 나는 블랙으로 드는데.”
“나도예요. 요즈음 허리가 굵어져서요.”
“설탕이 몸에 그렇게 해롭다면서요?”
“그걸 인제 알았수. 소금도 설탕 못지않게 해롭다는 게 밝혀지고, 아무튼 야단이야.”
“커피도 하루 석 잔 이상 마시면 심장에 부담을 준다는 게 밝혀졌다면서요?”
“된장이 암을 유발하는 게 밝혀진 건 어떡허구요? 그까짓 커피 끊는 건 문제없지만 된장을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요새 큰 고민이라니까요.”
“그러게 모르는 게 약이에요.”
“그렇지만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게 새록새록 밝혀지는 사실이 신문 텔레비를 통해 쏟아져들어오는 걸 어떻게 모른 척해요.”
“하긴 그래요. 글쎄 우리나라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외국이 미국이고, 제일 싫어하는 외국은 일본이란 게 밝혀졌단 소리를 듣고부턴 우리 옆집의 일본 여자하고 친하게 지내던 게 단박 뜨악해지더라니까요.”
“참, 그 일본 여자 왜 반상회에 안 나와? 제가 뭐라구?”
“글쎄 말이야. 요다음엔 따끔하게 충고를 해야지.”
“일층에도 한 가구 더 있을 텐데요'”
이번엔 반장이 나한테 추궁했다.
“아, 네, 마침 부인이 여행중이라나봐요. 제가 대충 전하죠 뭐.”
“전하는 거야 인쇄물도 있는데 뭐 어려운가요. 반상회란 어디까지나 참석에 의의가 있다는 데 대한 인식이 문제죠.”
“네, 그것도 전할게,요.”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괜히 필요 이상으로 쩔쩔맸다.
여자들의 화제는 곧 다시 근래에 밝혀진 것들로 돌아갔다. 새록새록 밝혀진 사실들이 돋아나온 루트가 무슨 연구소나 세미나가 아니라 매스컴이었기 때문에 나도 대강은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얼굴의 면적이 유난히 넓은 텔레비전의 앵커맨이란 사람이 그날 새롭게 일어난 사건 보도 끝에 본디부터 있었으되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나 현상을 일러줄 때면 반신반의하면서도 한편 그런 것을 밝혀낸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존경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유명한 앵커맨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고 반신반의밖에 못 했던 것은 그 밝혀진 게 하고많은 사람들이 일으킨 현상 중 너무도 극소수를 대상으로 한 조사나 통계의 결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용에 비하면 코끼리를 구렁이나 기둥 혹은 담벼락으로 밝혀낸 건 오히려 약과였다. 요즈음 유행하는 밝힘증을 애써 비유하자면 오밤중에 정전까지 겹쳐 칠흑에 잠긴 서울이란 거대한 도시 아무 데나를 작은 플래시로 한번 번찍 비춰보고 나서 서울은 이러저러하다는 걸 밝혀냈다고 풍기는 허풍과도 흡사했다. 반신반의라도 해줄 수 있는 건 순전히 매스컴이란 막강한 빽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존경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내 소견으론 아무리 보아도 갈피 잡을 수 없는 막막한 혼돈으로밖에 안 보이는 사람 사는 켯속에 대해 반딧불이든 플래시든 아쉬운 대로 들이대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현상의 의미를 밝혀내려는 노력이 어디선가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데 대해서 였다.
“어제 뉴스시간에 그 끔찍한 얘기 들었어요?”
“아아 그 민여인 살해사건이요?”
“아니 그까짓 살인사건 안 일어나는 날 있나 뭐, 그거 말고 십대의 성(性)경험이 사십 퍼센트나 되는 결로 밝혀졌단 뉴스 말예요.”
“사십 퍼센트나? 난 삼십 퍼센트로 들었는데…….”
“아네요, 사십 퍼센트가 틀림이 없다니까요.”
“그래요, 사십 퍼센트가 맞는 것 같긴 한데 난 우리나라가 아니고 미국 얘긴 줄 알았는데…….”
“아유, 이렇게들 못 믿으시긴. 사십 퍼센트고 우리나라인 게 틀림이 없다니까요. 내 코앞에 닥친 일인데 내가 그걸 비면하게 들었겠어요?”
“코앞에 닥쳤다니요?”
“우리 큰애가 올해 아홉 살이니까요. 십대가 코앞 아네요. 불안해서 미치겠어요.”
“설마 십대 되자마자 무슨 일이 있을라구요.”
“요새 애들 조숙한 것 말도 말아요. 세상은 또 얼마나 빨리 달라지구요. 아마 십대의 성경험도 올해니까 사십 퍼센트지 해가 갈수록 급속도로 늘어날 테니 두고 보세요.”
그 여자의 예언은 인플레의 예언만큼이나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맞았어요. 성교육의 시기도 자꾸 앞당겨지더니 이젠 글쎄 유치원이 적기라는 게 밝혀졌다지 뭐예요? 그 한 예만 보더라도 세상이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하는지 알 만하잖아요?”
“발전이라구요? 그 한심 한 작태가 발전이라구요?”
“그럼 후퇴랍디까?”
“아유, 발전이면 어떻구 후퇴면 어때서들 싸워요? 가만히 있는 건 하나도 없고 시시각각 변하긴 그거나 그거지. 그보다는 우리 아홉 살짜리가 큰일이네. 성교육할 시기까지 이미 놓쳤으니 이를 어쩐다지?”
아무리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들의 걱정은 좀 지나쳤다. 지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의 참뜻을 알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은 십대의 성경험에 대한 걱정이 지나친 나머지 그들의 자녀가 혹시 십대에도 성경험을 못 하고 넘어갈까봐 걱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들이라면 능히 그럴 만했다. 그들은 다만 밝혀진 사실의 신도(信徒)일 뿐이니까. 십대의 성경험이 격증하고 있다고 밝혀진 이상 그들의 자녀가 거기 못 낀다는 건 다행스럽기 전에 우선 불안한 일이 될 터였다.
나는 오싹 무서움증을 느꼈다. 밝혀낸 장본인은 영원히 익명이고, 밝혀진 사실은 비록 우리가 사는 광대무변한 혼돈 중의 극소 부분에 대한 조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머지 대부분이 이렇게 쌍수를 들고 거기 만장일치하고자 할진대 그 극소 부분의 편협한 조명 효과가 어찌 두렵지 않으랴.
나는 그들이 그들의 아이들이 십대에 성 경험을 할까봐 걱정하는 일에서 해방되기 위해 숫제 채찍을 휘두르며 아이들을 미리 십대의 성경험이라는 함정 쪽으로 몰고 가고 있음을 빤히 바라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지난날의 나의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격렬한 분노가 나를 숨가쁘게 했다.
나도 십대에 성경험을 했다. 그러나 밤중에 빗장을 따놓고 나갔다가 새벽에 풀섶을 헤치고 이슬에 젖어 돌아온 날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날 대문 뒤에 숨어 지키고 있다가 다짜고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바람부터 나서 암내를 피우고 다닌다는 쌍욕을 퍼부었지만 바람이 난 건 그후였다.
그날 내가 선생님의 숙직실에서 자고 온 건 사실이었다. 젊고 잘생긴 국어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 이 나에게 『데미안』을 빌려주었다. 그걸 다 읽고 난 몽롱하고도 청결한 황홀경에서 선생님한테로 달려갔다. 그때가 밤중이라는 게 나에겐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책다운 책을 읽고 나서의 감동이랄까 충격이랄까 너무 벅차 혼자서는 파열해버릴 것 같았다. 선생님은 다 큰 계집애의 한밤중의 방문에 적이 당황해했다.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했다. 그분으로선 아마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열에 들떠 헛소리하듯 데미안 얘기만 했다. 마침내 선생님도 나를 돌려보내기를 단념한 모양이었다. 이야기 상대를 해 주었지만 붕 떠 있는 나를 끌어내리려는 상식적인 설교가 고작이었다. 선생님과 데미안을 정신없이 혼동하고 있던 나의 눈에도 조금씩 선생님의 범속한 인간성이 드러났다. 마침내 나는 하품을 했고 선생님은 내가 편히 자도록 밖으로 나가 어디를 얼마나 헤맸는지 바짓가랑이가 흠뻑 이슬에 젖어 돌아와 나를 깨웠고, 깨자마자 나는 십 리나 되는 새벽길을 달음질쳐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놈이냐? 응, 어느 놈이야?”
엄마가 눈에 불을 켜고 종주먹을 댔지만 나는 선생님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엄마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내가 그때부터 나쁜 아이였음엔 틀림이 없다. 그때 나는 엄마의 광란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엄마의 지글대는 욕망을 보고 있었으니.
나는 죽도록 얻어맞으면서도 선생님의 이름도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늘땅이 뒤바뀐 걸 믿게 할 수 있을지언정 남자와 여자가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세 번씩이나 개가한 어머니에게 곧이듣게 할 수는 없으리라는 담벼락 같은 절망감이 마침내 나를 출분(出奔)케 했다. 십 대의 성경험은 그후 도시에서의 일이었다.
반상회 다음날 아침 나는 정식으로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남자는 꽤 오랫동안 꾸물대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그는 사람의 방문을 생전 처음 받아보는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모르는데, 꽁무니 빼고 싶은 눈치와 덤벼들 듯 도전적인 기세가 함께 느껴져 그만 용건 대신 웃음부터 났다.
“아무 일도 아녜요.”
나는 우선 이렇게 능쳐주면서 재빨리 안을 기웃거렸다. 규격화된 아파트 살림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지만 이상하도록 썰렁했다. 아내가 여행중이기 때문일 거다.
“아무 일도 아니면?”
남자가 내 눈길을 막았다.
“어제 반상회에 안 나오셨더군요?”
“보시 다시피 아내가 여행중이라서…….”
“반상회는 여자들만 하는 거 아네요.”
나는 장난삼아 시비조로 말했다.
“그렇지만 쑥스러워서…….”
남자가 울상을 했다.
“다음부터 꼭 참석하도록 하세요. 안 그러면 재미없을 테니까.”
나는 복받치는 웃음을 삼키고 위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제 반상회에서 결의한 걸 가르쳐드릴 테니까 잘 듣고 꼭 지키도록 하세요.”
“네, 네.”
“집 집마다 문패를 달기로 했어요.”
“네? 아파트에도 문패를요?”
남자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얼굴에서 핏기마저 가시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또 꿈속에서 감지한 쫓기는 자의 그 거칠고도 짓눌린 듯한 숨결을 들였다. 그의 이마에 늘어진 머리칼엔 적지 않은 새치가 섞여 있었다. 가엾어라. 나는 그를 껴안고 숨결을 나누고, 백발 섞인 머리칼을 긁어올려주고 싶단 충동을 억제하느라 더욱 무뚝뚝해졌다.
“아파트가 무슨 감옥인가요? 이름 없이 번호로만 살게. 그래서 문패를 달기로 만장일치로 결정을 본 거 예요.”
“네, 알겠습니다.”
내 집으로 온 나는 얼른 베란다 쪽으로 가서 옆집 베란다를 망보았다. 그가 나로부터 놓여나기 위해 베란다를 통해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옆집 베란다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 허황한 생각에 실소했다.
그날은 아빠가 오는 날이어서 온종일 바빴고 다음날은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온종일 잠만 잤고 다음다음날 아침 복도를 지나면서 보니 옆집에 문패가 붙어 있었다.
“김철수.”
귀여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평균치의 이름이어서 가짜스러웠다. 나는 또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이번에도 그는 사람을 한참 기다리게 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꼭 도망갈 구멍 터놓고 나서야 문을 여는 사람 같아요.”
“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죠?”
뜻밖에 그가 정식으로 따질 기세였다. 내가 그를 멋대로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너무 만만해서였는데 그는 더이상 만만하게 보이지 않을 기세였다.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말했다.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니까 그렇잖아요. 체면 차리는 분도 아니면서…….”
나는 슬쩍 그의 꾀죄죄하고도 허술한 파자마 차림을 나무랐다. 그러나 이마에 헝클어진 머리에 섞인 흰머리는 보기 좋았다.
그를 끌어안고 내 손가락으로 그걸 빗질해보았으면…… 부질없는 소망으로 가슴이 저렸다.
“용건은?”
“무슨 근심이 있으세요?”
내가 생각해도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네?”
“큰 근심이 있으신 분 같아요. 솔직히 털어놔보세요. 내가 도와드릴게.”
“나 바쁩니다.”
그가 매정하게 문을 닫으려고 했다.
“내가 잘못 봤나요? 흰머리가 저번보다 더 늘어났기에…….”
“아, 이 새치요? 이건 내력이에요.”
그가 약간 안심한 듯 머리를 긁어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구수한 담배 냄새가 났다.
“참 매력있는 내력이네요.”
“농담 그만두고 용건은요?”
그가 눈치도 없이 또 매정하게 굴었다.
“이 문패 이름 가짜죠?”
“네?”
“누가 모를 줄 알구요? 가명을 쓰려면 좀 그럴듯한 가명을 써요. 유치하게 김철수가 뭐예요?”
“당신 정말 왜 이래요?”
그가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고양이를 물려는 쥐의 그것 같은 싸늘한 증오로 그의 눈이 인광처럼 번득였다.
“괜히 겁주지 말아요. 나한테 잘 보여봐요. 작명소에 가서 입신출세할 이름도 지어다줄 용의가 있는 친절한 이웃이 될 테니까요.”
“농담 그만두지 못하겠어요!”
그의 눈 속에서 인광이 파르르 떨었다.
“맞았어요. 농담이에요. 문패 얘기도요. 본명이든 가명이든 아파트에 이름 내걸고 사는 건 웃음거리예요. 세상에, 순진도 하시지.”
나는 그의 어깨를 한 번 정답게 토닥거려주고 그의 문 앞을 물러났다.
저녁때 지나다 보니 문패는 없어지고 아크릴 문패가 붙었던 자리엔 본드 자국이 씹어 붙인 껌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이제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할 구실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밤마다 그의 숨결이 그리웠다. 나의 거칠고 짓눌린 숨결을 그의 숨결인 양 부둥켜안는 일은 너무 허전했다. 나에겐 타인의 숨결이 필요했다. 그를 부둥켜안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숨결을, 타인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었다.
어느 날 밤, 나는 베란다로 나가 난간을 타고 옆집과의 사이의 칸막이벽을 넘었다. 만약 고층이었다면 목숨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도 내 집도 일층이었다. 나는 일층을 골라잡은 나의 선견지명을 대견하게 여겼다. 그의 집 베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도 나는 집에서보다 행복했다. 그의 숨소리를 들은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그후 나는 밤마다 그의 베란다에서 그의 숨결을 엿들었다. 그 역시 인기척에 깨어나 잠 못 이룬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깨어 있는데 그 혼자 쿨쿨 자느니보다 같이 깨어 있는 게 훨씬 더 나를 흡족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맞아들였으면 나는 더 행복했을 것이다. 베란다에서 밤새도록 찬 이슬을 맞으면서도 나는 추운 줄도 몰랐다. 그와 체온이 있는 가슴을 맞대고 거칠고 짓눌린 서로의 숨결을 확인하고, 그의 구수한 담배 냄새를 맡으며 흰머리 섞인 몇 가닥의 앞머리를 애무하고 싶은 뜨거운 갈망 때문이었다.
서로 따로따로 깨어 있음을 점점 더 견딜 수 없어져 드디어 나는 그의 창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풍처럼 가만가만, 점점 태풍처럼 거칠게, 나중엔 광풍(狂風)처럼.
어느 날인가 문득 나는 그의 창문 안이 비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신문에 난 그의 사진을 보았다. 그는 정말 쫓기고 있었다. 그는 현상금 붙은 사내였다. 아깝게도 현상금을 타먹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 년 가까이나 잘도 피해다니던 그가 무슨 심경의 변화에선지 제 발로 걸어가 자수를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은신처이던 우리 아파트 사진도 크게 났다. 신혼살림을 차리자마자 외국 지사로 발령이 나서 집을 비우게 된 사람을 친구인 양 위장하고 부모가 가지고 있던 옅쇠를 교묘히 사취(詐取)해서 아파트에 숨어들 수 있었다고 했다.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 아파트의 문제점에 대해 한마디씩 한 것도 그 사건의 양념처럼 곁들여져 있었다. 물론 그의 어마어마한 죄상도 실려 있었다. 나는 그걸 읽어보았지만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본 그의 유일한 행동은 안개가 사라진 후 안개의 입자를 보려 했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죄상 속에 그 부분은 없었다.
어찌 그에 관해 드러나지 않은 게 그 부분뿐일까? 그는 제 발로 걸어가 자수한 게 아니었다. 그를 그리로 쫓은 건 나였다. 그는 나한테 쫓겨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현상금을 놓친 셈이었다. 그만한 돈이면 지금처럼 쫓기는 불안 없이도 지금 같은 안락을 일 년쯤은 누릴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현상금을 놓친 게 별로 아깝지 않았다. 나 역시 쫓기는 몸이었고, 쫓기는 일로부터 한시인들 자유로워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나는 내가 철들고 덮어놓고 몸을 던진 광대무변한 혼돈 속에서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사람마다 죽자꾸나 쫓고 쫓기고 있다는 거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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