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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항공 운항의 개척기에 일어난 일이다. 한 조종사가 비행을 하는데 기내에 쥐의 갉아대는 소리를 들었다. 쥐가 주요 케이블과 조종 장치를 다 물어뜯을 경우 심각한 기체 결함을 야기할 것을 알았다. 비행기는 이미 출발지로부터 두 시간이나 날아왔고 다음 기착지까지는 최소 두 시간의 비행이 더 필요했다. 일순간 당황했던 조종사는 설치류인 쥐는 땅 위나 땅 밑에서는 살 수 있지만 하늘 높은 곳에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즉각 고도를 높여 2만피트 상공까지 치솟아 올랐더니 쥐는 죽고 말았으며 2시간 후 활주로에 무사히 착륙했다.
쓸데없는 염려는 비행기 기내에 탄 쥐와 같다. 우리의 마음을 사정없이 갉아대어 영과 혼과 육을 병들게 하여 식욕감퇴와 불면증, 신경증과 정신병, 암과 성인병 등을 불러온다.
인간의 생명은 염려의 생명이다. 온 세상은 염려에 휘말려 있다. 염려는 세상을 움직이는 톱니바퀴이며 온 인류 문화를 위한 자극제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가시가 있을 때 그 가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염려이다. 사도 바울도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그의 몸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그에게서 떠나기를 위하여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다”(고후 12:7-9) 고 말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크게 기뻐하였다는 것은 그가 전에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 때문에 걱정과 근심, 즉 염려를 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가시, 즉 염려가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자.
1. 주께 맡김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31: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마 13:22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염려는 세상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염려라고 말한다(마 13:22). 세상은 헬라어로 'kosmos'로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체계인 물질적인 우주를 가리킨다(마 25:14, 요 17:15, 행 17:24, 엡 1:4, 계 13:8). 둘째, 사탄이 부패시키고 강탈하여 그의 악한 세상 체계의 구성원들이 된 타락한 인류를 가리킨다(요 1:29, 3:16, 롬 5:12). 세째, 단장하는 것, 장식품들을 가리킨다(벧전 3:3). 네째, 어떤 질서, 고정된 형식, 질서 있는 배열을 가리킨다(요일 2;15, 요 15:19, 17:14, 약 4:4). 결국 세상은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이 세운) 질서 있게 만든 모든 체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셔서 땅에 살게 하신 것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강탈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타락한 본성을 통하여 그들을 정욕과 쾌락과 일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음식과 의복과 주택과 교통 수단과 같은 생활 필수품에도 빠지게 하고, 종교와 문화와 교육과 산업과 상업과 오락 등과 같은 것으로 사람들을 체계화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 체계를 만들었다(요 12:31). 이러한 사탄적인 체계 전체가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요일 5:19). 이러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한 자를 이기는 근거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것은 악한 자에게 우리를 패배시키고 점유하도록 근거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 대함 염려 때문에 사람들은 수고하고 짐을 진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 세상은 사탄에게 속해 있다. 걱정과 근심, 즉 염려는 사탄의 화신(化身)이다(마 6:25, 빌 4:6, 행 27:13-26).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사탄이 주는 가시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게 된다.
염려의 헬라어 “merimna”는 ‘소 두 마리가 다른 두 방향으로 끌어당기다’란 뜻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한 손은 주님이 한 손은 사탄이 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어떤 때는 사탄이 끄는 데로,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데로 살아가고 있다. 그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주께 맡겨버려야 한다.
맡겨버리다의 헬라어는 ‘epiripto’는 던져 버리다, 내맡기다, 드리다 라는 뜻이다. 이 동사의 시제는 한 번 행함으로써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 일생의 많은 염려 전체를, 곧 우리의 온 일생과 그 모든 염려, 즉 어깨 위의 짐을 다 주께 던져 버려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탄과 손 잡아 사탄이 끌고 있던 손을 놓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과 손 잡아 주님이 끌고 있는 손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로 이끌려간다. 주님께로 이끌려간 우리의 삶은 어떤 걱정과 근심, 즉 염려가 와도 영영히 요동하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이 맡겨버리다란 뜻의 의미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삶을 살기를 권고하고 계신다. 권고하다 라는 헬라어 단어는 ‘melei’는 돌보다, 관심하다란 뜻으로 이 단어는 엄마가 자식을 가슴에 품고 젖을 먹일 때 쓰는 단어이다. 주님은 우리를 가슴에 소중히 품고(cherish: 엡 5:29절의 보호) 우리에게 젖을 공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 유방(가슴, 젖)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가시, 즉 걱정과 근심, 곧 염려 때문에 요동하고 있을 때 우리를 가슴에 소중히 품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젖(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 3:8))으로 공급하여 주시면서 우리의 모든 짐을 주님께 맡겨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염려하는 우리를 이처럼 애정 어린 마음으로 관심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보살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던져 버릴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누림과 안식과 위로와 만족을 주므로 우리는 그 어떤 염려도 없다.
2. 하나님께 아룀
빌 4:5-7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탄에게서 오는 염려는 인간 생활의 총계이며 그리스도를 사는 믿는 이들의 생활을 어지럽게 한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관용은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의 총계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 반대된다.
그리스도를 사는 믿는 이들은 그들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많은 일들, 즉 가시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고 그런 일들을 그들에게 부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면 우리는 이것들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하나님께 아뢰다 라고 할 때의 ‘~께’는 헬라어로 “pros”인데 이 단어는 자주 “~와 함께”로 번역된다(요 1:1, 막 9:19, 고후 5:8, 요일 1:2). 이것은 누군가를 향한 동작을 나타내며 생생한 연결과 교제의 의미에서 교통, 즉 유기적인 연합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는 가운데’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많은 일들, 즉 가시에 대하여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한 결과는 우리는 그런 일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여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해결책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움직이신다. 사실상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우리 안에 주입된 평안이신 하나님 자신이다(빌 4:9). 하나님의 평안은 고민에 대한 안정제이고 염려에 대한 해독제이다.
3. 생명의 성령의 법의 역사함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법은 작용이다. 법(法)은 ‘물 수(水)+갈 거(去)’이다. 즉 법(法)이란 물 흘러가는 데로 가는 것, 즉 흐름이다. 법(法)은 물이 흘러 바다로 내려가듯이 흘러가는 자동적인 능력, 자연스러운 능력이다. 예를 들면 죄와 사망의 법은 만유 인력의 법과 같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공기 역학의 법과 같다. 만유 인력의 법과도 같은 죄와 사망의 법은 그 자동적인 능력, 자연스러운 능력이 떨어짐이고, 공기 역학의 법과도 같은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 자동적인 능력, 자연스러운 능력이 초월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많은 일들, 즉 가시에 대하여 우리가 염려하면 그것은 사탄과 연합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 안으로 역사하게 한다. 그러면 그것은 만유 인력의 법칙과도 같이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떨어지다 떨어지다 보면 그 결국은 ‘축 사망’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많은 일들, 즉 가시에 대하여 하나님께 아뢰면 그것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으로 역사하게 한다. 그러면 그것은 공기 역학의 법칙과도 같이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들(하나님이 계시는 삼층천 하늘)로 비상하게 한다. 하늘로 비상하면 결국 하늘들(하나님이 계시는 삼층천 하늘)까지 이르게 되고 그 결국은 ‘초월과 자유’이다. 조종사가 쥐를 잡기 위해 고도를 높여 공중으로 올라간 것처럼 뜨겁게 기도하여 하늘 높이 계신 하나님께 올라가면 세상의 염려를 초월하여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 때 우리 안의 염려라는 쥐는 죽게 되므로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되기 마련이다.
첫댓글 선생님, 쪽지 확인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