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며칠 너무 늦게 자는 것 같아서, 오늘은 좀 일찍 자려 했더니 잠이 안 온다. 늦게 자는 습관이 벌써 든건가.
잠자는 걸 포기하고 책상에 앉아 <외쪽이> 이야기를 찾아 읽어보았다. 반쪽이 이야기라고도 부르는 이 이야기가 상징하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같이 읽어볼 겸 여기 가장 짧은 내용을 옮겨본다.
넷날에 어드런 낸이 아를 낳디 못해서 아 낳게 해달라구 부테한테 늘 빌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쌔한 넝감이 와서 고기 세 마리를 주면서 이걸 먹으문 아덜 셋을 낳는다구 했다. 낸은 너머너머 기뻐서 그 고기를 받아서 학갑에 낳두구 먹을라구 했다. 그랬더니 광이레 그 고기 세 마리 둥 한 마리를 절반채 먹었다. 낸은 그 고기 온근 거 두 마리와 반 마리를 먹었더니 아를 개저서 삼형제를 났넌데 아덜 들은 온근 아인데 하나는 반편을 났다.
아들 삼형제는 잘 자라고 공부두 잘해서 과개보레 가게 됐다. 두 형은 반편을 데리구 가기가 싫어서 따라오디 못하게 하는데두 반편은 따라가갔다구 뒤를 쫒아갔다. 형들은 반편을 큰 파우에다 꽁제(묶어) 놓구 갔다. 반편은 힘이 여간만 세딜 안아서 낑 하구 힘을 줘서 뽑아서 짊어지구 집이루 와서 뜰막에다 네레놨다. 오마니가 보구 "그건 무엇 할라구 개오네?" 하느꺼니 "내 잔체할 때 떡 받을 떡돌 할라구 개왔다"구 했다. 그리구 또 뛔서 형들을 딸라잡았다. 형들은 저그니를 큰 나무에다 꽁제 매놓구 갔다. 반편은 또 끼잉하구 그 나무를 뽑아서 짊어지구 집으루 와서 뜰악에 내리놨다. 오마니가 그건 뭐하레 갲다 논 능가 하느꺼니 내 잔체할 때 만들 거라구 했다. 그러구 또 뛔가서 형들을 딸아잡았다. 형들은 저근이를 칡이루 꽁꽁 꽁제서 범 앞에 던져 주구 다라났다. 반편은 힘을 내서 꽁젰던 칡이를 끊구 일어서니까 범들은 이 사람은 신신녕인가 하구 잡아먹디 않구 내기 하자구 했다. 반편은 범들보구 우리 다같이 칡이루 몸을 꽁제 개지구 칡이를 끊구 니러서면 날 잡아먹구 그렇디 않으문 나는 너덜 깍대기를 모주리 베끼갔다구 했다. 범들은 그렇가자 하구 칡이루 몸을 꽁제 놓구 범덜은 끊을러구 하는데 끊디 못했다. 그래서 반편은 범에 가죽을 다 베께서 그걸 짊어지구 갔다.
가다가 날이 저물어서 어떤 집에 들게 됐다. 쥔은 반편이 범에 가죽을 많이 가진 걸 보구 구미가 나서 장기 두기 내기 해서 내레 지문 내 딸을 주구 님제레 지문 그 가죽을 다 달라구 했다. 반편은 인차 그카자 하구 장기를 두었다. 그런데 쥔은 세 번 두었는데 세 번 다 졌다. 그래서 아무 날 딸을 데레가라구 날자를 덩해 주었다.
그런데 쥔은 딸을 주기가 싫어서 딸을 데레가디 못하게 하누라구 지붕에두 사람을 두구 넌지간(연자방아간)에두 사람을 두구 딸이 있는 방 앞에두 사람을 두구 해서 지키구 있었다. 반편은 이걸 알구 그날은 우덩 가디 않구 다음날 농이(노끈)와 북과 베루디와 빈대를 재지구 갔다. 그 집에서는 어느 나즈 밤새두록 한잠두 자디 못하고 지키구 있어서 이날에는 사람덜이 모두 다 자구 있었다. 반편은 지붕에 있는 사람에 상투를 서루 매놓구 넌지간에 있는 사람들은 넌지돌에다 상투를 매놓고 집안에 있는 사람한테는 북을 달아 매놓구 체네 있는 방에다 베루디와 빈대를 뿌레놨다. 그랬더니 체네는 머이 문다 머이 문다 하멘 방에서 나왔다. 반편은 이 체네를 얼릉 업구서 처녀 잡아간다구 과티면서 다라뛨다. 그러느꺼니 지붕에 있던 사람은 내 상투 놔라 내 상투 놔라 하멘 고기만 하구 쫒아오디 못하고 넌자간에 있는 사람은 내 상투놔라 내 상투 놔라 하구만 있구, 집안에서는 북을 치면서 고구만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반편은 그 체네를 채다가 잘 살았다구 한다. (임석재전집1 한국구전설화. 평안북도편1. 114~115쪽)
저 반쪽이의 힘과 지혜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게 궁금하다.
반쪽이는 눈도 하나고 모두가 반쪽이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보이지 않는 반쪽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가. 이게 문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단순히 없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기 쉽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반쪽을 이런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반쪽을 우리는 느낄 수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저 반쪽은 외부 현실을 살아가는 의식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상으로 통해 있는 목숨이다. 한편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는 있는 '없으면서 분명 존재하는 ' 다른 말로 '없이 계시는' 또 다른 반쪽은 신의 영역에 존재하는 목숨이라 보면 좋겠다.
힘과 지혜는 저 눈에 보이는 반쪽과 없이 계시는 신의 영역인 반쪽이 하나로 통합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들은 두 눈을 뜨고 산다. 두 눈을 뜨고 마음 밖 세상을 보면서 산다. 초기 성인기를 거칠 때까지 사람들은 이 두 눈에 의존해서 지식을 쌓아가고 개념을 쌓아가고 감정을 쌓아간다. 그러나 오히려 이 보는 눈에만 의존해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감각과 직관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초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반환점을 돌아 이제 태어난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이가 되면 보는 눈을 감고 안으로 열린 눈을 떠야 한다. 밖으로 열린 눈은 감고 안으로 통하는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내가 꾼 꿈에서 나는 물속 나라로 퇴행해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나는 한 쪽 눈만을 뜨고 있었다. 한 쪽 눈은 감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반환점을 돌아 영혼의 고향으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한편으로는 새롭게 진화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껍데기 현실을 보는데만 사용하던 두 눈 가운데 하나라도 감아서 그 감은 눈 만큼 정신의 에너지가 안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내면을 향한 영적인 여행을 떠나는데 필요한 눈이 거꾸로 하나가 뜨이게 된 것이다. 감긴 눈이 곧 내면의 자리에서 볼 때는 새로 뜬 눈이 되는 것이다.
한 눈은 밖으로 떠 있고, 한 눈은 안으로 뜨는 싯점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사유를 해 본다면, 반쪽이의 눈은 한 쪽은 밖으로 열려 있고,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반쪽의 눈은 태생적으로 안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정신의 고향과 늘 열러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과 신이 합쳐진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로 서 있는 것이다.
꿈을 기록하면서 내 마음 속 우주의 선생님은 자꾸만 나로 하여금 내면으로 열린 존재를 보라고 이런 장면을 올려보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과 밖이 소통하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경고도 하고 보상도 하는 꿈 장면을 계속 올려보내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반쪽이 이야기도 내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을 해 보는 것이다. 이 꿈을 꾸면서 반쪽이도 내 몸에 살고 있는 나의 분신이며, 영혼의 친구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댓글 이야기밥은 아동문학 평론하는 이재복 샘이 운영하는 까페입니다. 반쪽이 이야기를 이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 싶어 옮겨와봅니다.
맞아요, 우리가 사실 두눈으로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느 것을 한번씩 느끼곤합니다.
글에 대한 공감과 이해와 생각을 정말 많이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종종 좋은글 옮겨주세요^^
잘 읽었습니다. 근데 구술한 글은 읽기가 힘드네요.
그래요. 평안북도 사투리인데다 채록한 때가 좀 오래되다보니 원형은 많이 살아있는데 읽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소리내서 읽어보면 좀 나을 듯. 옛이야기 각편 읽어주고 듣고 이야기 나누는 모임 이런 것도 재미있겠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