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4월 22일 서울)
헤이그 특사로 임무를 부여받은 이준은 4월 22일 홀로 길을 나선다.
아내에게조차 부산에 잠시 다녀온다고 말할 정도로 주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애썼다고 전한다.
이준이 서울을 떠난 뒤 헐버트도 곧장 한국을 떠났다.
일본은 헐버트의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일본의 첩보자료에 남아있다.
-자료기록
헐버트는 10일 오전 10시20분경 고베시에 와서 시내 올리비아 호텔에 투숙했고 11일 오전 8시 18분 열차로 쓰루가 항구로 출발하였다.
<김동진 / 헐버트 기념 사업회>
헐버트박사는 나름대로는 자기가 일본에 표적의 대상이 돼고 또 한국특사들은 어...별도로 용이하게 한국을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만드는 결과가 됐어요.
일본이 헐버트만을 주시하는 사이 이준은 무사히 한국을 빠져 나갔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해삼위)으로 향한 '이준'
서울을 떠난지 4일만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이준은 또 한명의 특사를 만난다.
'이상설'
한국으로 미리 연락을 받은 이상설, 그는 을사보호조약이후 만주로 망명해 항일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과 합류한 이준은 시베리아열차에 몸을 싣는다.
두사람은 헤이그로 향하기전 들러야 할 곳이 또 있었다.
기차는 블라디 보스톡에서 출발해 9300KM가 넘는 거리를 쉼없이 달렸다.
목적지는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 부르크, 뱃길로 갔다면 한달이 넘어 걸리는 거리다.
기차를 이용한 덕분에 두사람은 보름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도착즉시 이준과 이상설은 전 러시아 공사인 이범진을 찾았다.
을사보호조약이후 일본은 외국에 있는 한국공관을 폐쇄하고 공관원들에게 모두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은 일본의 명령을 거절하고 러시아에 남아 있었다.
고종의 은밀한 지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을 만나 자리에서 이범진은 자신의 아들 이위종을 소개한다.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생활했던 이위종은 영어.불어.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이위종의 합류로 헤이그특사단은 완전한팀이 이루어졌다.
<쿤 취스테르 교수 / 레이덴 대학>
한국특사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들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게 되는데요.
인물 면면을 살펴보면 먼저 이상설은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될 당시 일본이 한국에 가한 모든 구체적인 상황을 목격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이준을 보면 법률가로서 을사조약의 법적 부당성을 설명할 수 있고 국제법적관점에서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죠.
세번째 이위종을 보면 훌륭한 통역관이었습니다.
당시 외교원이 불어를 아주 능숙하게 했구요 그래서 그는 한국 특사들의 대화창구가 될 수 있었고 그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습니다.
이렇게 세명은 한국의 상황을 잘 대변할 수 있는 완벽한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사일행은 곧장 헤이그로 향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100여일 지체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러시아 문서보관소
그에대한 해답을 러시아 문서보관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사일행은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를 만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고종의 친서만 전달하고 결국 만나지는 못했다.
<박종호 교수 /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그 동안의 (러시아의) 정책변화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독립지지정책을 포기하고 일본과의 화해정책으로 변경됐습니다.
이것을 (한국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못했어요.
지금까지 한국의 독립지지 정책을 변경했다고 한국특사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출장중이다, 바쁘다 이런 식의 변명을 했던 것입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들이 러시아를 찾은 그때 러시아는 일본과 비밀협상을 진행중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위권을 인정하고 어떤 간섭이나 방해도 않는다는 약속을 한다.
대신 만주와 외몽골에서의 권익을 허락받았다.
또한 러시아외상이 반전주의자인 '이즈골스키'로 바뀌면서 일본과 화해무드로 돌아섰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더이상 한국을 도울 이유가 없었다.
결국 러시아 황제와의 만남이 무산되면서 특사들은 일정에 차질을 빚었다.
이준일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브뤼셀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1907년 6월25일 헤이그)
이때가 바로 1907년 6월 25일 이준특사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만국평화회의가 개막한지 열흘이 지난 뒤였다.
B: 서울을 출발한 지 두달만에 12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서 이준특사일행은 헤이그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셨다시피 이들이 도착했을땐 만국평화회의가 이미 시작됐고 한국은 참석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도움을 줄거라 믿었던 러시아측의 배신 그리고 일본의 방해공작 이런 상황속에서 이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907년 6월 29일 )
만국평화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헤이그특사들 이들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만국평화회의의장인 러시아대표 '넬리도프'를 찾아간다.
그러나 넬리도프의장은 이준특사일행을 만나주지 않는다.
*넬리도프 (러시아)
넬리도프는 이미 본국 러시아로부터 한통의 전문을 받은 상황 '이즈골스키'외상이 보낸 전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준과 이상설이라는 2명의 한국인들이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혹시나 이 두사람이 헤이그에 와서 백작께 뭔가 주선을 부탁할 경우 백작께서는 이들과 교섭을 하셔서는 안될것입니다.
-이즈골스키-
특사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길이 없었고 만국평화회의참석은 끝내 거부됐다.
그러나 이들에겐 또다른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시민운동이 태동하던 시기로 식민쟁탈에 열을 올리는 제국주의에 반대한느 목소리도 생겨났다.
그 와중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많은 시민운동가들 언론인들이 헤이그로 속속 모여들었다.
<쿤 취스테르교수 / 레이덴대학>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한 대표들은 각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는데요.
또하나 특이한 점은 회의장 주변에서는 평화.평등을 부르짖는 많은 시민운동가들이 모여들었고 특히 150명 이상의 언론인이 모여들었을 정도로 당시 평화회의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를 기회로 특사들은 장외 외교활동에 들어갔다.
시민운동가들에게 한국의 상황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게된 '윌리엄 스테드' 평화주의자며 언론인인 그는 회의기간동안 일간지인 평화회의보를 발행했다.
한국대표들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스테드는 이들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다.
그리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에 대한 기사를 평화회의보에 실었다.
회의기간중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였던 만국평화회의보 그 일면엔 한국에 관한 기사가 대서특필된 것이다.
신문에는 한국대표들의 사진과 함께 이위종의 인터뷰내용이 상세히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