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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교화에 나서면 되지
큰스님은 인사하러 들어오시는 스님들에게마다 <인도 네팔 순례기>를 잘 챙겨가라고 당부하셨다.
“용학스님 이거 내가 준비했다. 오늘 온다고 해서 준비했는데 오늘 오나 모르겠다.”
큰스님은 이미 한차례 회장스님에게 각전스님 자랑을 하셨었다.
“행정고시 합격하고 중 된 사람이라. 서울대 나오고 5개 국어하고. 범어사 강원에 있을 때 5개국어 잘한다고 소문이 났어. 그래 내가 법문하는 시간에 이 스님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 5개국어 잘하면 뭐하나 중 되어버렸는데 그랬어. 그런데 그 자리에 이 스님 어머니가 와 있었대.”
옆에 있던 보살님들이 웃었다.
웃음 속에 12월의 햇빛이 환했다.
*
지난 달에 큰스님께서 대원문화상을 받은 것을 기념해서 법일거사님이 준비하셨다는 볼펜도 모두 대중공양으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회장스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밀린 소식을 전하듯이 큰스님이 대원상을 수상하신 거며, 상금이 얼마인지까지를 이야기하면서 모두 웃음꽃을 피웠다.
*
중간중간 스님들이 인사를 오시고 큰스님은 또 생각난 듯이 각전스님 이야기를 하셨다.
“고등고시가 옛날에는 장원급제잖아. 뜻이 있어서 출가해서 스님이 됐으니까. 선방에 가서 공부하는 스님이라. 행정고시 합격하고 잘하면 장관도 되고 뭐도 되고 할 수 있는데. 궁극적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출가를 단행하였다.”
하고 책 날개의 글도 소리내어 읽으셨다.
“이 스님이 범어사 강원 졸업하고 선원에 오래 있었어. 워낙 실력이 뛰어나니까. 이런 것도 자기 나름대로, 안하는 것 같으면서도 준비를 충분히 해가지고 몇 년간 준비를 했어. 인도에 한 번만 간 게 아니야. 역작을 남기려고 그런 거지. 지도 같은 것도 다 그렸잖아. 여기 산치대탑은 얼마나 자세히 잘해놨는지. 산치대탑을 그렇게 자세하게 그려놓은 사람은 없어. 전번에 지상이하고, 지상이가 온다고 약속 받았대. 그래서 내가 타이밍을 맞춰서 말도 안하고 이렇게 책을 준비했거든. 그전부터 내가 생각하고 있다가 요즘 공부하러 오니까. 여기 나와서 얼굴도 한 번 보고 말하는 것도 한 번 들으려고. 앞에 내세워서 말하는 것도 들어보려고 대중성이 있는가 없는가. 안에 실력은 꽉 찼어도.”
하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오늘 와야 할낀데예.”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몰라 내 혼자 괜히 짝사랑하는가 모르지.”
하고 큰스님이 웃으셨다.
“부처님도 중생 짝사랑인데예.”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책 100권을 준비했어. 고맙잖아. 사실 생각하면 얼마나 자랑스러워. 이렇게 책 내려면 공부를 얼마나 했겠어. 입승스님에게 소개하라고 해놨어. 그래갖고 나와서 말하는 소리 좀 들어보려고.”
“편안한 좌석에서는 청산유수입니다. 아는 것도 많고.”
“나이도 꽤 됐지?”
“예 50대 중반입니다. 한참 힘써야 될 땐데.”
“지금 한참 아주 무르익었어. 지금부터 이제 교화에 나서면 되지. 경험도 많고.”
*
큰스님이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금강스님의 화엄경 약찬게를 들으시다가 문득 말씀하셨다.
“저런 염불소리를 ‘팔자로 한다’ 그래. 저런 사람들이 다 전생부터.”
그때 지상스님이 들어오셔서 절을 올리며 말씀하셨다.
“오늘 각전이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타이밍 맞춰서 책 사다놨잖아. 봤나?”
“네 봤습니다.”
“니가 전번에 각전이 시간 맞춰 온다고 해서.”
“오늘도 전화했습니다. 잊어삐릴까 싶어서 전화했더니 모르고 있더라고예.”
“맞아 챙겨야 돼. 모르고 있지. 그 사람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서. 주지해야지, 글써야지, 참선해야지.”
하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따가 각전스님 나와서 이야기하면 사진 여러 카트 찍어라. 염화실 크게 올려. 고대로 찍어서 올리면 돼.”
하고 당부도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인도 네팔 순례기의 저자 각전스님
상강례를 막 마쳤을때 각전스님이 선원에 들어오셨다.
큰스님께서 “입승스님” 하고 부르셨다.
입승스님이 앞에 나와서 마이크를 드셨다.
정오스님 :처음에 소개드리려고 그랬는데, 본인이 참석을 안하셔서 뒷시간으로 미뤘습니다. 지금 도착하셔서 안내 말씀드립니다. 이 책 분량에 깜짝 놀랬고요. 한 사람이 이 많은 성지를 참배하고 순례하기가, 순례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것을 차곡차곡 기록 하시면서 그 많은 시간을 보내시고, 저희들이 가지 않아도 상세히 성지를 알 수 있도록 순례를 해주신 각전스님께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스님을 모시고 이 순례기를 쓰게 된 동기와 순례하시면서 이 책을 쓰겠다고 생각을 하시게 된 동기에 대해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각전스님 나오셔서 직접 설명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큰스님이 각전스님에게 “스님들에게 설명 좀 해.” 하셨다.
각전스님 : 먼저 늦게 도착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제 책을 이렇게 한다는 걸 제가 모르고 왔는데 큰스님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오다가 연락을 받았는데요. 아침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 책이 무슨 상을 받았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큰스님께서 “무슨 상?” 하고 물어보시는데 대중스님들께서는 벌써 박수를 치셨다.
각전스님 : 올해의 불서상(佛書賞)인가.
무비스님 : 상 받을 만한 책이야 내가 봐도.
각전스님 : 그런 연락이 왔습니다.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아주 좀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여행경비가 좀 아까워서 쓴 거예요.
큰스님께서 큰소리로 웃으셨다.
각전스님 : 여행 갔다오는데 한 삼 사백만원 들잖아요. 갔다오면 한 한달쯤 지나면 어디 갔다왔는지 기억도 안나고 그렇더라고요. 그게 너무 아쉽고, 또 여행 순례하면서 또 순례 갔다와서 한달기간은 너무 참 좋고 행복스럽고 부처님에 대한 신심도 일어나고 하는 것 같은데 한달쯤 지나고 나면 내가 갔다왔던 데가 어디였는지 기억도 잘 안나고, 내가 무슨 일로 해서 그런 신심이 한 번 일어났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 게 너무 좀 뭐랄까, 허망하다고 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하게 된 거고요.
제가 처음 인도 갔다와서 그런 생각으로 기록을 남기려고 했는데 해보니까 안 되더라고요. 글을 쓰려고 하는데 글은 몇 줄 내려가다가 그만 안 나가고 그래서 제가 크게 반성을 해서 그때부터 인도에 대한 공부를 좀 했어요. 그래가지고 두 번째 갔다올 때, 갔다와서 글을 쓰니까 조금 기억이 됐습니다. 그것이 책으로까지 만들어지게 돼서 저로서는 더없이 기쁘고 또 많은 분들께서 책을 읽고 좀 괜찮다고 말씀해 주셔서 더 기쁘고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각전스님이 인사를 하고 마이크를 내려놓자 대중스님들이 박수를 치셨다.
정오스님 : 책분량에 비해서는 말씀이 조금 인색하신데 여러분이 아무쪼록 이 책을 길라잡이로 삼아서 또 풍부한 성지순례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비스님 : 그 상 받았다는 소식을 오늘 오다가 들었다 이거지 오늘?
각전스님 : 네
무비스님 : 뭔가 내가 딱 감이 있잖아. 하하하 그래요.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돌아가는 일이라 그냥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실은 이 책 나오고, 나도 여기에 추천사도 몇 줄 썼지만 일찍이 스님들에게 한 권씩 이렇게 돌리려고 했어요. 스님들에게 너무너무 필요한 내용이고 불교공부 하고도 아주 잘 맞아 떨어지고 공부에 도움도 많이 될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용학스님은 벌써 이것을 여러 권 법공양을 많이 올리고 있는 바가 있지만, 나는 이제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이 시간이네요.
그리고 또 이 책이 올해의 불서상이라고 하는 그거 아주 좋은 상이요. 올해 나온 불서(佛書) 가운데 최고상이라. 최고 좋은 책이라 이런 뜻이지. 열 번 받고도 남을 만한 책입니다. 그 소식을 오다가 그만, 법공부 하러 오다가 들었다니까 공부하러 자주 와야 돼.
그리고 삼 사백만원 여행경비 너무 아까워서 책을 썼다? 나는 그 말이 아주 참 하하하 역시 생각하는 바가 다르구나 하는 하하하 나도 인도를 갔다오긴 했지만 그런 생각은 한 번도 못했어요.
옛날에 나는 슬라이드 필름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때는 한참 비디오 같은 것 이런 것이 없을 때고 하니까 슬라이드로 찍어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슬라이드 상영하는 기구를 사가지고 그 나름대로 편집을 하고 대중들에게 착칵착칵 넘겨가면서 보여줬어요. 옛날에 영화 연사가 이야기하듯 말솜씨 좋은 사람은 그렇게 슬라이드 필름을 보고 설명을 듣고 그런 세월에 우리가 살았어요.
나 중국 갔다온 것 그것을 전부 슬라이드로 찍고, 그 현지에서 중요한 사진들을, 내가 못 찍은 것은 슬라이드 필름을 사가지고, 거기 그 사람들이 파는 슬라이드가 있는데 그것을 사가지고, 사이사이에 끼워서 상영을 하고 그런 것을 몇 번 했어요.
내가 백두산 천지못에서 수영을 했는데 그 슬라이드를 수덕사에서 법화경 강의할 때 슬라이드 상영을 한 번 했어요. 그때 그 시간에 동참했던 스님이 며칠 전에 내한테 와가지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아 그때 스님이 천지못에서 수영하는 것 우리가 다 봤다’ 고 말이야. 슬라이드로 상영하는 것을 봤다고.
나는 옛날에 최남선 백두산 순례기를 읽고는, 몇 번 읽었어요. 그것을 읽고는 ‘야 나도 언젠가 백두산 가면 천지못에 수영 한 번 해야 되겠다.’
내가 어려서 수영을 일찍이 배웠거든 수영은. 그래가지고 초등학생 때는 노트를 한 번도 산 적이 없어. 수영대회에 나가서 노트를 상으로 많이 타가지고 늘 쌓아놓고 썼는데 그래서 수영에는, 요즘 수영하고는 비교가 안되지만, 내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 생각을 해서 ‘천지못에 가서 수영을 한 번 근사하게 해야지’ 하고, 가자마자 그냥 훌렁훌렁 벗어제껴 놓고, 왜냐하면 가이드가 따라오면 못 들어가게 하니까, 가이드를 뒤쳐져 놓고 먼저 올라가서 ‘가이드가 오기 전에 내가 들어가버리면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수영을 했어요.
그런데 아 물이, 옆에는 얼음이 둥둥 떠 있고, 6월 말인가 날짜도 다 잘 아는 스님이 있어. 얼음이 둥둥 떠 있는데 어떻게나 찬지 그래도 내가 원력을 세우고 수영하려고 여기까지 중국 천지를 그때 45일간을 돌았어요. 국교 되기 이전이라. 그래 ‘천지못에서 수영한 번 하기 위해서 45일간 여행을 한다’ 그 마음 하나 가지고 거기서 수영을 했어요. 물이 어떻게나 찬지 나오니까 몸이 빠알간거야. 찬물에 들어가니까 몸이 오히려 빨갛게 되대? 얼지는 않고, 열이 나가지고.
몸을 춥게 하면 이게 내가 요즘 예방의학 자주 이야기 하죠? 예방의학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와. 몸을 차게 하면 오히려 몸에서 열을 발산해서 따뜻하게 한다, 그게 진짜 따뜻한 몸이다, 그래요.
다른 외부적인 조건을 가지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몸을 차게함으로 해서 몸에서 스스로 열을 발산하게 한다, 그래야 어지간한 병균 같은 것도 다 죽고 그런대요. 그래 내가 천지못에 들어가 가지고 야 그때 심장마비 걸려서 죽었어야 옳은데, 저 안에까지 들어가다가 이렇게 내려다 보니까 새카만 거야 밑이, 그래 가지고 겁이 나가지고 되돌아 나왔어.
같이 갔던 스님들은 막 나오라고 나오라고 소리도 치고 그랬는데 그거하고는 상관없이 하여튼 그때 나하고 룸메이트 했던 화엄사 종일스님이 그 슬라이드 사진을 찍어가지고 그래 그 사진이 그때는 있었는데 상영도 몇 번하긴 했어요. 그런데 그 후로 어디 갔는지 지금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런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사진 기술이 뛰어나서 여러가지가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지만 그때는 참 어려웠었어요
그래서 그런 순례기라고 하는 것도 하다못해 슬라이드 사진이라도 찍어서 남기든지 이렇게 책으로 남기면 더욱 좋고. 아니면 요즘 유튜브로 영상편집 잘하는 스님이 있어요. 여기 우리 재무스님이 그거 아주 전문가라. 어디 여행 잠깐이라도 갔다오면 그것을 찍어가지고 편집을 착 해서 내게 보내는데 그런 기술까지도 있고 하니까, 이런 것들도 자기 발전에 상당히 도움이 되는 거예요.
자기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목을 넓히기도 하고 그런 길도 있습니다.
아무튼 스님이 여기 공부하러 와가지고 내가 그 타이밍을 맞춘다고 맞췄는데 너무 잘 맞아 떨어졌네.
오늘 상도 발표된 된 날이기도 하고.
이 책은 그동안 부처님 순례기가 여러 수백 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그런데 요렇게 자세하게 된 책은 내가 처음 봤어요.
그러니까 이거 그냥 집에서 읽어도 재밌고, 첫째 재밌고, 또 여행갈 때는 필히 지참하고 다니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면 따라다니는 신도들이 놀랄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느냐?’ 할 정도로, 현지인들도 모르고 가이드들도 모릅니다 이건.
저 스님이나 되니까 이 정도로 깊이 있게 알지.
가이드들도 모르고 현지인들도 모르고 그렇습니다.
그런 내용이니까 그래도 우리가 같이 동문수학하는 덕택에 또 이런 책을 우리가 받아보게 되어서 너무 고맙습니다.
좋은 책을 써줘서 고맙고 앞으로 화엄경 공부 잘해서 더 깊이 있는 좋은 책을 기대하겠습니다.
큰스님이 당부하신 대로 각전스님 사진을 찍으러 왔다갔다 하는 동안에, 큰스님이 손짓으로 부르셨다.
‘이거 잘 녹음하고 있지?’ 하고 확인차 부르신 것이었다.
1교시가 끝나고 나서 큰방에 오셔서도 “그 스님 총명하게 생겼지? 머리가 어떻게 그렇게 좋은지.” 하셨다.
큰스님이 대중에게 공양해 주신 <인도 네팔 순례기>에 곁들어, 백두산 천지 수영이며, 슬라이드 상영 같은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1교시가 끝나고 나서 여쭤보니 그렇게 ‘아직 안해주신 이야기’들이 또 많다고 하셨다.
경전을 열고 다시 화엄경 공부가 이어졌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四十四
十忍品 第二十九
十一, 如空忍
4. 得益
菩薩摩訶薩이 成就此忍에 得無來身이니 以無去故며 得無生身이니 以無滅故며 得不動身이니 以無壞故며 得不實身이니 離虛妄故며 得一相身이니 以無相故며 得無量身이니 佛力無量故며 得平等身이니 同如相故며 得無差別身이니 等觀三世故며 得至一切處身이니 淨眼等照하야 無障礙故며 得離欲際身이니 知一切法이 無合散故며 得虛空無邊際身이니 福德藏無盡이 如虛空故며 得無斷無盡法性平等辯才身이니 知一切法相이 唯是一相이라 無性爲性이 如虛空故며 得無量無礙音聲身이니 無所障礙이 如虛空故며 得具足一切善巧淸淨菩薩行身이니 於一切處에 皆無障礙이 如虛空故며 得一切佛法海次第相續身이니 不可斷絶이 如虛空故며 得一切佛刹中現無量佛刹身이니 離諸貪着이 如虛空無邊故며 得示現一切自在法無休息身이니 如虛空大海無邊際故며 得一切不可壞堅固勢力身이니 如虛空이 任持一切世間故며 得諸根明利가 如金剛堅固不可壞身이니 如虛空이 一切劫火가 不能燒故며 得持一切世間力身이니 智慧力이 如虛空故라 佛子야 是名菩薩摩訶薩의 十種忍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인을 성취하면 옴이 없는 몸을 얻나니 가는 일이 없는 까닭이며, 남[生]이 없는 몸을 얻나니 사라짐이 없는 까닭이며, 동(動)하지 않는 몸을 얻나니 허망을 여읜 까닭이며, 한 모양인 몸을 얻나니 모양이 없는 까닭이니라.
한량없는 몸을 얻나니 부처님의 힘이 한량이 없는 까닭이며, 평등한 몸을 얻나니 진여의 모양과 같은 까닭이며, 차별 없는 몸을 얻나니 세 세상을 평등하게 보는 까닭이며, 온갖 곳에 이르는 몸을 얻나니 깨끗한 눈으로 평등하게 비추어 장애가 없는 까닭이며, 탐욕의 경계를 여의는 몸을 얻나니 일체 법이 모이고 흩어짐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니라.
허공처럼 끝이 없는 몸을 얻나니 복덕의 창고가 다함이 없음이 허공과 같은 까닭이며, 끊임없고 다함없는 법의 성품이 평등한 변재의 몸을 얻나니 모든 법의 모양이 오직 한 모양이어서 성품이 없음으로 성품을 삼아 허공과 같음을 아는 까닭이니라.
한량없고 걸림 없는 음성의 몸을 얻나니 장애가 없음이 허공과 같은 까닭이며, 모든 교묘함을 구족하여 청정한 보살행의 몸을 얻나니 온갖 곳에서 장애가 없음이 허공과 같은 까닭이며, 일체 부처님의 법의 바다가 차례로 계속하는 몸을 얻나니 끊을 수 없음이 허공과 같은 까닭이니라.
모든 세계에 한량없는 부처님 세계를 나타내는 몸을 얻나니 탐욕과 집착을 여의는 것이 허공처럼 그지없는 까닭이며, 온갖 자재한 법을 나타내어 쉬지 않는 몸을 얻나니 허공과 같은 큰 바다가 끝이 없는 까닭이며, 일체를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세력이 몸을 얻나니 허공과 같이 일체 세간을 맡아 가지는 까닭이니라.
모든 근(根)의 날카로움이 금강(金剛)과 같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는 몸을 얻나니 허공과 같이 모든 겁의 불[劫火]이 태우지 못하는 까닭이며, 일체 세간을 유지하는 힘의 몸을 얻나니 지혜의 힘이 허공과 같은 까닭이니라. 불자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인(忍)이라 하느니라.”
*
득익(得益)
*
오늘 공부는 108쪽(화엄경 제3권 민족사刊) 제일 밑에 세째줄 득익 이익을 얻다 하는 대목인데 이것이 십인품이다.
열 가지 인이라고 하는 존재의 진리성을 표현하는데 비유가 각각 열 가지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뜻은 하나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제행무상이라고나 할까, 또는 연기의 이치라고나 할까, 공의 이치라고나 할까, 눈에 뻔히 보이는 존재인데 그것은 실제적인 입장에서 내면으로 우리가 한 번 이렇게 눈을 돌려 보면 사실은 공(空)이다. 또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연기공이 있고 즉공이 있고 여러 가지 공도 있는데 여기는 그러한 내용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득익에 20종의 몸을 얻는 것을 밝힌다. 이런 열 가지 인에 대해서 제대로 터득하고 나면 이런 몸을 얻게 된다 고 하는 스무 가지 몸을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다.
*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성취차인(成就此忍)에 : 이 인을 성취함에
득무래신(得無來身)이니 : 무래신, 옴이 없는 몸을 얻는다. 우리는 다 왔다. 옴이 없는 몸을 얻음이니
이무거고(以無去故)며 : 감이 없음을 쓰는 까닭이다. 감이 없는 도리, 우리가 간다.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가 다 왔고 또 간다. 그러나 또 한 차원 더 들어가서 보면 옴도 없고 감도 없는 입장이 분명히 있다. 그런 것이 훤히 보이니까 이 화엄경을 결집한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 그런 것이 확실하니까, 이야기를 안하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된다.
경전에는 우리의 수준에 안맞고 이상한 소리 같은 것이 상당히 있는데, 그들 불보살들의 안목에는 분명하게 그렇게 보이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 안 하고 배기겠는가. 못참는다.
예를 들어서 여기 UFO가 떴다고 하면 아주 신기해서 사진을 찍고 야단법석을 떨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신기한 일인 것이다. 너무나도 확실한 일이고 이야기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안 하고 못 배길 것만 화엄경에 다 이야기해 놓은 것이다.
단 우리에게, 우리 수준에는 그것이 납득이 안될 뿐이다. 우리가 자꾸 정진을 하고, 심성을 맑히면 무래무거라고 하는 것도 금방 알아듣는다.
사실 이것은 그렇게 썩 어려운 것은 아니다.
득무생신(得無生身)이니 : 무생신을 얻음이니
이무멸고(以無滅故)며 :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생멸이 우리의 현상 아닌가. 우리는 전부 생멸의 이치에 의해서 태어났고 또 멸할 것이다. 그런데 무생무멸의 이치가 분명히 있다.
연기의 공식이 무엇인가? ‘차유고(此有故)로 피유(彼有) 차무고(此無故)로 피무(彼無)라.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도 없다’ 그것이 연기 공식 아닌가?
그런데 이것 저것 할 때 그냥 이것 저것 공식대로만 이야기하면 공식은 본래 그런 것이니까 그것대로 이야기하면 얼른 못 알아 듣는다. 나도 처음엔 못 알아 들었다.
거기에다가 좌우 남녀 동서 남북 이런 것을 갖다 대입시키면 그냥 간단하다. 동이 있으므로 서가 있고 남이 있으므로 북이 있다. 이렇게 알면 사실은 그냥 간단한 것이다.
그런 것 없이 차유고로 피유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는다.
동쪽이 있음으로 서쪽이 있다 이렇게 해 버리면 간단하지 않는가. 남자가 있음으로 여자가 있다. 승(僧)이 있음으로 속(俗)이 있다. 그렇게 이해하면 그냥 간단한 것이다.
생멸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그다음에
득부동신(得不動身)이니 : 부동신을 얻음이니
이무괴고(以無壞故)며 : 파괴함이 없음을 쓰는 까닭이며
득부실신(得不實身)이니 : 부실신 실제 아닌 몸을 얻는다 그런 뜻이다.
이허망고(離虛妄故)며 : 허망함을 떠난 연고며
득일상신(得一相身)이니 : 일상신을 얻음이니
이무상고(以無相故)며 : 무상을 쓰는 까닭이다. 본래 무상이기 때문에 무상이라야 일상이 된다 하는 것이다. 그냥 하나의 몸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일상이다.
*
득무량신(得無量身)이니 : 무량신을 얻음이니
불력무량고(佛力無量故)며 : 불력무량고며
득평등신(得平等身)이니 : 평등신을 얻음이니
동여상고(同如相故)며 : 여상하고 같은 까닭이다. 진여의 모양, 여상은 그런 뜻이다.
득무차별신(得無差別身)이니 : 차별이 없는 몸을 얻음이니
등관삼세고(等觀三世故)며 : 과거 현재 미래를 등관한다. 평등하게 관한다. 삼세를 등관하면 그것이 차별이 없는 것이다.
득지일체처신(得至一切處身)이니 : 일체처에 이르는 몸을 얻음이니
정안등조(淨眼等照)하야 : 청정한 눈으로, 텅 빈 눈으로 레이저 같이 이 피부 같은 것을 꿰뚫고 본다. 보통 옷 같은 것도 꿰뚫고 본다 그런 정도다. 정안으로 등조해서
무장애고(無障礙故)며 : 무장애고라. 장애가 없는 연고다. 사실은 그 정도 지혜의 눈은 그렇게 썩 어려운 것은 아니다. 장애가 없는 연고다.
득이욕제신(得離欲際身)이니 : 욕제 욕의 경계를 떠난 몸을 얻음이니
지일체법(知一切法)이 : 일체법이
무합산고(無合散故)며 : 합하고 흩어짐이 없는 연고다.
*
득허공무변제신(得虛空無邊際身)이니 : 허공이 변제가 없다. 내가 코스모스를 옛날에 읽고는 너무 신기해서 그쪽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되었다. 근래에는 허블망원경이 아주 발달해서 코스모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천문학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광대한 우주를 많이 보고 사진도 찍어서 제공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늘 하는 소리가 ‘우주는 끝이 있나 없나’ 그것을 가지고 아직도 왈가왈부를 많이 한다. 우리 불교에서 그것은 이미 답이 나와 있고 너무 간단한 것이다.
우주에 끝이 어디 있는가?
요즘 나온 천문학에 대한 이론을 보면 큰 바구니처럼 그려놓고 그 안에 온갖 은하계, 지금 우리 은하 같은 은하계, 안드로메다 은하니 무슨 은하니 무슨 은하니 그런 것을 그 바구니 안에다가 수 백 개 담아 놓는다. 그래놓고 ‘이것이 우주라고 하자’ 그랬을 때 그 한 바구니 안에는 그렇게 많고 많은 다중 우주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것의 밖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 이런 식으로 아직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은 가설도 보통 엉터리 가설이 아니다. 천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가설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정말 엉터리 가설이다.
우주는 무변이다. 끝이 없는 것이다. 끝이 없는 것이 이해가 안되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한다. 총명한 천문학자들이 ‘변제가 없다, 끝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아무리 커도 거기 가면 ‘그래도 뭔가 한계가 있을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딱 가로놓여 있으니까 ‘끝이 없다, 변제가 없다’ 라고 하는 말이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우리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너무 간단한 이야기다. 득허공무변제신 허공이 변제가 없다고 하는 몸을 얻음이니
복덕장무진(福德藏無盡)이 : 복덕장이 무진한 것이
여허공고(如虛空故)며 : 허공과 같은 연고며
득무단무진법성평등변재신(得無斷無盡法性平等辯才身)이니 : 무단 무진 법성 평등 변재신을 얻음이니
지일체법상(知一切法相)이 : 일체법상이 일체법이
유시일상(唯是一相)이라 : 오직 한모양이다.
무성위성(無性爲性)이 : 성품없음으로 성품을 삼는 것이
여허공고(如虛空故)며 : 허공과 같음을 아는 연고며, 이치는 전부 똑같다. 말이 여러 가지지만 이치는 결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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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무량무애음성신(得無量無礙音聲身)이니 : 무량무애음성신을 얻음이니
무소장애(無所障礙)이 : 장애하는 바가 없는 것이
여허공고(如虛空故)며 : 허공과 같은 연고다.
허공이 제일 많이 나온다. 그런데 허공은 뭔가? 그냥 허공이라고 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 안에 별것이 다 있고, 무엇인든지 어떤 작용도 그 안에서 가능한 것이 또한 허공이다.
득구족일체선교청정보살행신(得具足一切善巧淸淨菩薩行身)이니 : 일체선교를 구족한 청정한 보살행의 몸을 얻음이니
어일체처(於一切處)에 : 일체처에
개무장애(皆無障礙)이 : 다 장애가 없는 것이
여허공고(如虛空故)며 : 허공과 같은 연고다. 일체처에 장애가 없는 것이 허공과 같은 연고다.
득일체불법해차제상속신(得一切佛法海次第相續身)이니 : 일체 불법해가 차제로 상속하는 몸을 얻음이니
불가단절(不可斷絶)이 : 가히 단절하지 않는 것이
여허공고(如虛空故)며 : 허공과 같은 연고라. 그냥 허공의 이치만 우리가 잘 파악하면 다 풀리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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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일체불찰중현무량불찰신(得一切佛刹中現無量佛刹身)이니: 일체 불찰 가운데서 무량불찰신을 나타냄을 얻음이니, 무량불찰을 나타내는 몸을 얻음이니, 일체찰중에서 한량없는 세계를 나타내는 몸을 얻는다.
이제탐착(離諸貪着)이 : 모든 탐착을 떠난 것이
여허공무변고(如虛空無邊故)며 : 허공무변한 것과 같은 연고다. 허공무변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자주 나오고 식은 죽 먹듯이 일상적인 이야기다. 허공무변, 끝이 없다.
득시현일체자재법무휴식신(得示現一切自在法無休息身)이니 : 일체 자재한 법을 시현하는 휴식이 없는 몸을 얻음이니
여허공대해무변제고(如虛空大海無邊際故)며 : 허공과 대해가 변제가 없는 것과 같은 연고며. 허공은 변제가 없다. 옛날에 바다에 대해서 그렇게 제대로 파악이 안되었을 때는 바다도 변제가 없다고 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표현상으로는 또 우리 느낌에는 바다가 변제가 없는 것 같이 보여진다.
이것은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 여기에 바다가 변제가 없다고 하면 ‘아, 변제가 없다고 하는 뜻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지 ‘왜 바다가 변제가 없느냐? 저기 가면 서양도 있고 남극도 있고 북극도 있고 가면 또 다른 나라가 있고 다른 육지가 있는데’ 이렇게 잔머리를 돌리면 이 대승경전의 이치는 이해가 잘 안된다.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 뜻으로 이해하면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득일체불가괴견고세력신(得一切不可壞堅固勢力身)이니 : 일체 불가괴 견고세력신을 얻음이니
여허공(如虛空)이 : 여허공이
임지일체세간고(任持一切世間故)며 : 일체세간을 임지 받들어 가지고 있다 하는 것과 같은 연고다.
아무리 은하계가 많고 많다 하더라도 전부 허공에 있다. 허공 위에 있다. 허공이 다 그것을 포섭하고 있다. 어떤 작위를 해서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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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제근명리(得諸根明利)가 : 모든 육근이 아주 명리한 것이
여금강견고불가괴신(如金剛堅固不可壞身)이니: 금강과 같은 견고 불가괴신을 얻음이니
여허공(如虛空)이 : 여허공이
일체겁화(一切劫火)가 : 일체겁화가
불능소고(不能燒故)며 : 불능소고며, 겁화는 우리 불교에서 자주 이야기 하고 있다. 별 하나하나가 탈 때 그것이 타서 없어질 때가 겁화다. 우리 지구도 언젠가 소멸할 때 그것을 겁화라고 한다. 불이 일어나서 파괴가 된다.
지금도 무수한 별들이 파괴되고 있다. 그야말로 성주괴공(成住壞空)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별이 탈 때 지구가 타고 태양이 다 탄다 하더라도 허공이 타는 것은 아니다. 일체겁화가 불능소라. 허공은 못 태운다. 그 자신만 탈 뿐이다. 태양이 탄다 하면 태양 부근의 있는 것만 좀 탈 뿐이지 드넓은 허공은 타지 않는다. 그대로 있는 것이다.
천문학도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요즘은 상당히 연구할 거리가 많이 생겨서 재밌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엊그저께 내가 또 유튜브를 하나 봤는데 태양보다 수천 배가 더 큰 태양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발견된 것이다. 저 태양이 크다고 한다. 저것보다 수천 배가 더 큰 태양, 말이 태양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수천 배가 더 큰 태양이 있다. 활활 타고 있다. 그런 것까지도 망원경으로 이미 본 바다.
득지일체세간력신(得持一切世間力身)이니 :일체세간을 유지하는 역신, 그런 힘의 몸을 얻음이니
지혜력(智慧力)이 : 지혜의 힘이
여허공고(如虛空故)라 : 허공과 같은 연고라. 우주가 그렇게 넓고 끝이 없고 우리 지구 같은 별, 태양 같은 별 이런 것은 이야기할 거리도 안되고, 소위 은하계 같은 은하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은하수보다도 몇 천 배, 만 배 더 많다. 그것을 인식하는 자가 있다. 그것이 뭔가? 지혜력이다. 신기하다. 결국은 우리가 그것을 놓치면 안된다. 천문학자들은 하늘, 우주만 좇아서 연구하지만, 우리는 좇아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자기에게로 돌아와야 된다. ‘결국 근본은 나자신이고 우리의 한마음자리구나, 지혜력이구나, 이 지혜력이 존재함으로 해서 그것이 파악이 되고 그것이 얼마나 크다 작다 하는 것도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논의할 수도 있다’ 이것을 알아야 된다.
능엄경에도 공생대각중(空生大覺中)이 여해일구발(如海一漚發)이라 유루미진국(有漏微塵國)이 개의공소생(皆依空所生)이라. 그런 표현이 있는 것과 같이, 결국은 우리 지혜의 힘이 언제나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여기는 ‘허공과 같다’ 이렇게 표현을 했다. 오히려 허공보다도 더 크다고 능엄경에서는 이야기했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명보살마하살(是名菩薩摩訶薩)의 :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십종인(十種忍)이니라 : 열 가지 인이다. 열 가지 진리, 존재의 허공과 같은 진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十二, 重頌
1. 音聲忍
爾時에 普賢菩薩摩訶薩이 欲重宣其義하사 而說頌言하사대
譬如世有人이 聞有寶藏處하고
以其可得故로 心生大歡喜하야
如是大智慧인 菩薩眞佛子가
聽聞諸佛法의 甚深寂滅相이로다
聞此深法時에 其心得安隱하야
不驚亦不怖하며 亦不生恐畏로다
大士求菩提에 聞斯廣大音하고
心淨能堪忍하야 於此無疑惑이로다
自念以聞此 甚深微妙法으로
當成一切智 天人大導師로다
菩薩聞此音하고 其心大歡喜하야
發生堅固意하야 願求諸佛法이로다
以樂菩提故로 其心漸調伏하야
令信益增長하야 於法無違謗이로다
是故聞此音에 其心得堪忍하야
安住而不動하야 修行菩薩行이로다
爲求菩提故로 專行向彼道하야
精進無退轉하야 不捨衆善軛이로다
以求菩提道로 其心無恐畏하야
聞法增勇猛하야 供佛令歡喜로다
그때에 보현보살마하살이 그 뜻을 거듭 펴려고 게송으로 설하였습니다.
비유하면 세상의 어떤 사람이
보배창고가 있음을 듣고는
찾을 수 있다고 해서
마음에 큰 환희를 내도다.
이와 같이 큰 지혜 있는 보살이
참으로 부처님의 아들이라
모든 부처님 법의 깊고도 깊은
적멸한 이치를 듣고 또 듣도다.
이 깊은 법을 들었을 때
그 마음이 편안해지고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도다.
큰 보살이 보리를 구할 때에
이 광대한 음성을 듣고
마음이 청정하여 능히 견디고 참아
이 법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도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깊고 깊은 미묘한 법문을 듣고
마땅히 일체 지혜를 이루어
인간과 천상에 큰 도사가 되도다.
보살이 이 음성을 듣고
그 마음이 크게 환희하여
견고한 뜻을 내어
모든 부처님 법 구하기를 서원하도다.
보리(菩提)를 좋아하는 까닭에
그 마음은 점점 조복되고
믿음으로 하여금 더욱 증장하게 하여
법을 어기거나 비방하지 않도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을 듣고는
그 마음 참고 견딜 수 있어
편안히 머물러 동하지 않고
보살의 행을 수행하도다.
보리를 구하기 위한 까닭에
오로지 저 길을 향해 나아가
정진하고 물러서지 않으며
온갖 선(善)의 멍에 버리지 않도다.
보리도를 구하므로
그 마음 두려움 없고
법을 들어 더욱 용맹하며
부처님께 공양하여 환희케 하도다.
*
중송(重頌)
*
화엄경 편찬이 아주 의도적으로 잘했다고 하는 것을 내가 대승경전을 이야기하면서 늘 말씀드린다.
이런 데서는 놓친 부분들을, 반복해서 주입시켜 주고 싶은 부분들을, 아름다운 게송의 형식을 빌려서 또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용은 우리가 보아온 내용하고 똑같다. 이것도 십인을 다 이야기하고 있다.
*
음성인(音聲忍)
*
이시에(爾時)에 : 이시에
보현보살마하살(普賢菩薩摩訶薩)이 : 보현보살마하살이
욕중선기의(欲重宣其義)하사 : 욕중선기의하사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이설송언하사대
*
비여세유인(譬如世有人)이 : 비유하자면 세상에 어떤 사람이
문유보장처(聞有寶藏處)하고 :다이아몬드가 잔뜩 쌓여있는 보배의 창고가 있다고 하는 것을 듣고는
이기가득고(以其可得故)로 : 그것을 가히 얻고자 하는 까닭으로
심생대환희(心生大歡喜)하야 : 마음에 크게 환희를 낸다. 금광을 발견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금광 정도가 아니라 다이아몬드 광맥을 발견했다면 그 기쁨이야 말할 수가 없다.
*
여시대지혜(如是大智慧)인 : 이와 같은 큰 지혜의 사람인
보살진불자(菩薩眞佛子)가 : 보살진불자가
청문제불법(聽聞諸佛法)의 : 모든 부처님 법의
심심적멸상(甚深寂滅相)이로다 : 깊고 깊은 적멸한 상을 청문하도다.
이 두 게송의 비유는 ‘청문제불법의 심심적멸상이로다’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지혜있는 진정한 불자, 진정한 보살, 진짜 지혜 있는 진정한 보살은 진정한 불자고 불법의 심심적멸상을 들으려고 한다.
결론은 이 심오하고 부처님의 깨달음의 궁극을 표현할 수 있는 데까지 표현해 놓은 ‘이 화엄경을 왜들 공부 안하느냐?’ 이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복 받아 마땅하고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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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차심법시(聞此深法時)에 : 이 깊은 법을 들을 때에
기심득안은(其心得安隱)하야 : 그 마음이 편안함을 얻어서
불경역불포(不驚亦不怖)하며 : 놀라지도 않고 공포스럽지도 않고
역불생공외(亦不生恐畏)로다 : 또한 공외 놀랄 경(驚) 두려울 포(怖) 두려울 공(恐) 두려울 외(畏) 이것이 조금 조금씩 뜻은 다르다. 그러나 우리 말로는 ‘두려움, 놀라다’ 라는 뜻이다.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어떤 경우의 두려움도 하나도 없다.
*
대사구보리(大士求菩提)에 : 대사 큰 보살이 보리를 구함에
문사광대음(聞斯廣大音)하고 : 이 광대한 음을 듣고, 천둥 벼락치듯이 큰 소리가 아니라 진리의 소리를 광대한 음이라고 한다. 광대음을 듣고
심정능감인(心淨能堪忍)하야 : 마음이 청정해서 능히 견디고 참아서 진리의 말씀, 아주 차원 높은, 부처님이 깨달으시고, 그 깨달음이 한 오육 백년의 세월이 경과하면서 더 보강되고 보강되어서 대승경전이 성립이 되었지 않는가. 특히 화엄경은 이 대승경전 부처님의 깨달음을 표현할수 있는 데까지,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경지까지 표현한 것이 화엄경이다.
그래서 600년의 세월이 걸렸다. 초기에는 이런 정도의 수준 높은 이야기가 필요치도 않고 들을 사람도 없다.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이미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보강이 되었고 정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소리가 그야말로 큰 소리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소리보다 큰 소리다. 이것은 견디는 마음, 참는 마음이 없으면 안된다. 못 받아들인다.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차무의혹(於此無疑惑)이로다 : 그래서 여기에서 의혹이 없다.
*
자념이문차(自念以聞此) : 스스로 생각하되 차법
심심미묘법(甚深微妙法)으로 : 매우 깊고 미묘한 법으로써
당성일체지(當成一切智) : 일체 지혜인
천인대도사(天人大導師)로다 : 인천 대도사를 마땅히 이룰지로다.
이 심심미묘법을 들어야 일체 지혜를 갖춘 인천의 대도사가 된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경지의 내용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인천의 대도사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이사이에 이런 표현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있다.
*
보살문차음(菩薩聞此音)하고 : 보살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는
기심대환희(其心大歡喜)하야 : 그 마음이 크게 환희해서
발생견고의(發生堅固意)하야 : 견고한 뜻을 발생해서
원구제불법(願求諸佛法)이로다 : 모든 불법 구하기를 원함이로다. ‘불법이 이렇게 좋구나’ 화엄경 한 구절만 들어도 이렇게 신기하고 좋은데 ‘내가 화엄경 다 봐야지, 파고 파고 또 파고 해서 그야말로 책장이 뚫어지도록 봐야지’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원구제불법이고 발생견고의다.
*
이락보리고(以樂菩提故)로 : 보리를 좋아하는 까닭에
기심점조복(其心漸調伏)하야 : 그 마음이 점조복한다. 깨달음을 제대로 좋아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점점 조복되는 것이다. 무슨 세속적인 것에 그렇게 휘말리고 팔릴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영신익증장(令信益增長)하야 : 믿음으로 하여금 더욱더 증장하게 해서
어법무위방(於法無違謗)이로다 : 법에 대해서 어기거나 비방하지 않는다. 비방함이 없다.
모르니까 비방한다. 대승불교는 대승비불설이니 그런 소리나 하고 ‘이것이 부처님의 친설도 아닌데 뭘 그렇게 숭상하느냐’고 소견 좁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지금 이 시대에 했다 하더라도, 정말 제대로 표현된 진리성이 있다면 그것은 깨달은 분의 말씀이다 라고 대승불교는 보는 것이다.
그다음에 또 감인대라는 말이 나온다. 비방하면 안된다. 나에게 소화가 안되고 납득이 안된다고 해서 그것을 함부로 비방하면 괜히 구업만 쌓는다. 그래서 감인이라는 말이 필요한 것이다.
*
시고문차음(是故聞此音)에 : 그런 까닭에 이러한 높은 진리성에 대한 말씀을 들음에
기심득감인(其心得堪忍)하야 : 그 마음이 감인을 해서 얻는다. 견뎌야 되고 참고 또 거기다 한 자 더 붙이자면 감인대(堪忍待) 기다리자는 말이다. 좀 더 다음 기회에 다음시간에는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안주이부동(安住而不動)하야 : 안주해서 움직이지 아니해서
수행보살행(修行菩薩行)이로다 : 보살행을 수행하는 도다.
*
위구보리고(爲求菩提故)로 : 보리를 구하는 까닭에
전행향피도(專行向彼道)하야 : 오로지 행해서 저 도를 향해서 깨달음, 보리를 행해서, 보리라고도 했다가 도라고도 했다가 또 두 마디로 하면 지혜와 자비라고도 했다가 그렇게 표현한다.
정진무퇴전(精進無退轉)하야 : 정진해서 퇴전함이 없어서
불사중선액(不捨衆善軛)이로다 : 액이 멍에 액(軛)자다. 소를 끌고 가는데 멍에가 있어야 말을 듣는다.
선멍에라. 선액(善軛) 여러가지 선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다.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멍에가 없고 마음대로 소를 놔주면 그냥 남의 집 밭에 들어가고 논에 들어가고 곡식을 막 뜯고 먹는다. 여기에 멍에 액(軛)자를 하나 놓은 것이 너무너무 절묘하다. 정진무퇴전해서 불사중선액, 여러 가지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인 줄을 누가 모르냐마는 그렇지만 그것이 길들여지지 아니한 중생들이 그렇게 쉽게 되나? 그것이 참 쉽게 안된다.
나부터라도 생각해 보면, 강의를 위해서 공부할 때는 참 재밌게 잘하고, 강의할 때는 더 재밌고, 또 내가 설명이 조금 성에 안 찬다 싶으면 돌아가서 그 구절을 한 번 더 살펴보고 할 때는 되지만, 이것이 한 일주일 지나고 한 열흘 지나고 그러면 화엄경 어디 가버리고 없을 때가 있다. ‘내가 교재 책을 어디다 놔뒀지?’ 할 정도다.
그것이 중생이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우리가 식생활처럼 말 아니해도 배가 고프면 음식 찾아먹듯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참으로 그 멍에가 필요하다. 그래 내가 멍에 액(軛)자를 거기다 놓은 것을 보고는 ‘야 참 불보살들이 정말 절묘하다. 어찌 여기다 이렇게, 중생의 심정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까지 해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화엄경 글귀가 너무 많아 놓으니까 무심코 그냥 술술술 넘기지만, 한 글자 한 획 하나가 그냥 놓아진 것이 아니다.
*
이구보리도(以求菩提道)로 : 보리도를 구함으로써
기심무공외(其心無恐畏)하야 : 그 마음이 두려움이 없어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무슨 굶는 것이나, 무슨 논두렁을 베고 자다가 죽는 것이나 두려워할 바가 없어야 된다.
이구보리도, 보리도 구하기 위해서 의식주 문제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맛을 그렇게 들여야 된다.
맛들이면 그런 당당하고 용기있는 심성이 갖춰진다.
문법증용맹(聞法增勇猛)하야 : 법을 듣고는 더욱더 용맹해서
공불영환희(供佛令歡喜)로다 : 부처님께 공양해서 환희케 하도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 이런 아주 차원높은 대승경전의 가르침을 이렇게 흥겨워하고 하는 것이 곧 공불(供佛)이다.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다.
우리가 무엇으로 부처님께 공양하겠는가? 부처님 말씀에 흥겨워하고, 무릎을 치고 혼자 좋아하고 자다가도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나서 그 구절을 한 번 더 보는 것, 그런 것이 공불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다.
그러면 부처님이 ‘참 기특하다. 귀엽다’하고 환희할 수밖에 없다.
2. 順忍
如有大福人이 獲得眞金藏에
隨身所應服하야 造作莊嚴具인달하야
菩薩亦如是하야 聞此甚深義에
思惟增智海하야 以修隨順法이로다
法有亦順知하며 法無亦順知하야
隨彼法如是하야 如是知諸法이로다
成就淸淨心하야 明徹大歡喜하며
知法從緣起하야 勇猛勤修習이로다
平等觀諸法하야 了知其自性하고
不違佛法藏하야 普覺一切法이로다
志樂常堅固하야 嚴淨佛菩提하며
不動如須彌하야 一心求正覺이로다
以發精進意하고 復修三昧道호대
無量劫勤行하야 未曾有退失이로다
菩薩所入法이 是佛所行處라
於此能了知하야 其心無厭怠로다
如無等所說하야 平等觀諸法하야
非不平等忍으로 能成平等智로다
隨順佛所說하야 成就此忍門에
如法而了知호대 亦不分別法이로다
예컨대 큰 복이 있는 사람이
황금의 창고를 얻음에
몸을 꾸미는 데 필요한
장엄거리를 만드는 것과 같도다.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깊고 깊은 뜻을 듣고는
생각하고 생각해서 지혜의 바다 증장하여
수순하는 법을 닦도다.
법이 있어도 또한 따라서 알고
법이 없어도 또한 따라서 알며
저 법이 이와 같음을 따라서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알도다.
청정한 마음을 성취하여
분명히 깨닫고 크게 환희하며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긴 것임을 알아
용맹하게 부지런히 닦아 익히도다.
모든 법을 평등하게 보고
그 자체 성품을 분명히 알며
부처님의 법을 어기지 않아
일체 법을 두루 깨닫도다.
좋아하는 뜻 항상 견고해
부처님의 보리 청정하게 장엄하며
동요하지 않음이 수미산과 같아서
일심으로 바른 깨달음을 구하도다.
정진할 뜻을 내어
다시 삼매의 길을 닦되
한량없는 겁 동안 부지런히 수행하여
일찍이 물러나지 않도다.
보살이 들어간 법은
부처님이 행하시던 곳이라
이것을 분명히 알아
그 마음 게으름이 없도다.
견줄 데 없는 이의 말씀과 같이
평등하게 모든 법을 관찰하면
평등한 인(忍)이 아닌 것 없어
능히 평등한 지혜를 이루도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수순하여
이 순인(順忍)을 성취하면
법과 같이 분명히 알면서도
또한 법을 분별하지 않도다.
*
순인(順忍)
*
두 번째는 순인이다.
*
여유대복인(如有大福人)이 : 예컨대 저 큰 복이 있는 사람이
획득진금장(獲得眞金藏)에 : 진금장을 획득함에
수신소응복(隨身所應服)하야 : 몸의 응당 입을 바를 따라서, ‘몸 꾸미는 데 필요한 대로’ 이것이 응복이다. 소응복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들어 금을 가지고 몸에 귀고리도 하고 목걸이도 하고 팔걸이도 하고 모자도 하고, 온갖 것을 해야되겠다 하는 것이 소응복이다. 그것을 따라서
조작장엄구(造作莊嚴具)인달하야 : 여러 가지 장엄구를 만들듯이
*
보살역여시(菩薩亦如是)하야 : 보살도 역여시 하야
문차심심의(聞此甚深義)에 : 이 심심, 무상심심미묘법의 이러한 도리를 들음에
사유증지해(思惟增智海)하야 : 생각하고 생각해서 지혜의 바다를 증장해서, 사유라고 했다고 해서 두 자를 그냥 넘겨 버리면 맛이 덜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지혜의 바다를 증장해서
이수수순법(以修隨順法)이로다 : 수순하는 법, 수순해야 된다. 수순하는 법을 닦음이로다.
*
법유역순지(法有亦順知)하며 : 법이 있음에 또한 순해서 알며
법무역순지(法無亦順知)하야: 법이 없음에도 또한 순해서 알아서
수피법여시(隨彼法如是)하야 : 저 법이 이와 같음을 따라서
여시지제법(如是知諸法)이로다 :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아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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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청정심(成就淸淨心)하야 : 청정한 마음을 성취해서
명철대환희(明徹大歡喜)하며 : 명철대환희하며, 청정한 마음, 차원 높은 이런 성인의 가르침을 잘 좋아하다 보면 마음이 아주 깊고 맑고 충만해진다. 그래서 명철하고 거기에 크게 환희심도 나게 된다.
지법종연기(知法從緣起)하야 : 그래서 모든 일체 법이 인연으로 좇아 일어남을 알아서
용맹근수습(勇猛勤修習)이로다 : 용맹하게 부지런히 수습함이로다. 지법종연기 익숙한 말이다. 모든 법이 인연으로 좇아 일어남을 알아서 용맹해서 부지런히 수습한다. 우리가 한번 읽을 것 두 번 읽고 두 번 읽을 것 세 번 읽고 세 번 읽을 것 네 번 읽고 그러면 자꾸 깊어질 것이 아닌가.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다. 그게 종연기라. 모든 법이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냥 쉽게 설명해주니까 ‘아 그런가 보다’ 하고 씩 넘어가버리고 하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이해가 깊어지겠는가. 그래서 내가 사경을 권한다. 나는 손이 아파서 사경을 못하지만 불자들에게 사경을 많이 권하는데 한 번 쓰는 것이 열 번 읽는 것보다 더 낫다. 그렇게 마음에 깊이 박힌다. 한 번 쓰는 것이 인연을 더 쌓는 것이다. 열 번 읽는 인연을 쌓는 것이다.
용맹하게 근수습이로다. 그 줄에다 내가 별을 쳐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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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관제법(平等觀諸法)하야 : 평등하게 제법을 관해서
요지기자성(了知其自性)하고 : 그 자성을 요지하고
불위불법장(不違佛法藏)하야 : 불법장을 어기지 아니해서
보각일체법(普覺一切法)이로다 : 일체법을 보각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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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락상견고(志樂常堅固)하야 : 지락이 상견고하야 지락 지(志)자는 참 좋은 자다. 선비의 마음, 선비의 정신 선비의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 항상 견고해서
엄정불보리(嚴淨佛菩提)하며 : 엄정 불보리 하며 부처님의 보리를 엄정하며
부동여수미(不動如須彌)하야 : 수미산과 같이 움직이지 아니해서
일심구정각(一心求正覺)이로다 : 일심구정각이로다. 수미산, 지난 번에 각전스님이 카일라스 갔다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게 경전에 나오는 수미산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바는 없지만 그래도 지상에 있는 수미산이라고들 하니까 거기에 갔다온 이야기를 조금 들었지만 아주 흥미롭게 잘 들었다. 사진도 많이 있을테니까 그 순례기도 조그마한 책자로 하나 써냈으면 좋겠다.
나는 아주 흥미롭게 들었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카일라스산에 순례한 사람들 사진은 많이 올라와 있다. 거기에 큰 호수가 있는데 이 지구를 덮는 사대강이 거기서부터 발원해서 덮는다 하는 이야기가 경전에도 나온다. 여기 화엄경에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것도 연관시켜서 한 번 써 놓으면 아주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수미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부동여수미하야 일심구정각이로다. 일심으로 정각을 구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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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정진의(以發精進意)하고 : 정진하는 뜻을 발하고
부수삼매도(復修三昧道)호대 : 다시 삼매의 도를 닦되
무량겁근행(無量劫勤行)하야 : 한량없는 겁동안 부지런히 행해서
미증유퇴실(未曾有退失)이로다 : 일찍이 퇴실함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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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소입법(菩薩所入法)이 : 보살이 들어간 바 법인
시불소행처(是佛所行處)라 : 시불소행처러라. 보살이 들어간 데가 부처님의 행한 바 곳이지 않은가.
내가 가끔 말씀드리지만 부처보다 한 차원 높은 이가 보살이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 성불하고도 보살행 하기 위해서 성불하는 것이지, 성불이 목적지가 아니다. 성불하고 나서 보살행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보살 소입법이 시불소행처라 그랬다.
어차능요지(於此能了知)하야 : 여기에서 능히 잘 알아서
기심무염태(其心無厭怠)로다: 그 마음이 염태함이 없음이로다. ‘성불하면 끝인 줄 알았더니 왜 또 보살행을 해야 되느냐?’ 본래 보살행 하기 위해서 성불하는 것이다.
그래야 염태함이 없지 안그러고 ‘아이고 또 보살행이 앞에 더 많이 남았다는 말이냐?’ 성불하기까지는 ‘성불하면 다리 뻗고 자는 줄 알았더니 더 많이 세세생생 보살행을 해야된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러면 그만 싫증을 내고 게으름도 내고 거기서 또 물러서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기심무염태 염태가 없어야 된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 성불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성불하면 그다음에 어쩔 것인가? 더 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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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등소설(如無等所說)하야 : 같은 견줄 데 없는 이 무등의 설한 바와 같아서,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설한 바와 같아서
평등관제법(平等觀諸法)하야 : 똑같이 제법을 관해서
비불평등인(非不平等忍)으로: 평등한 진리로써
능성평등지(能成平等智)로다 : 능히 평등지를 이루지 아니함이 없더라. 평등인으로써 평등지를 이룬다. 평등인으로써 평등지를 이룬다. 묘한 표현이다.
그것을 누가 이야기 했는가? 부처님이 이야기한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무등이 소설이라. 무등소설과 같아서 평등하게 제법을 관한다.
아홉 번째 게송인데 그 한 게송은 평등이라고 하는 말로써 표현이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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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순불소설(隨順佛所說)하야 : 부처님의 설한 바를 수순해서
성취차인문(成就此忍門)에 : 이 인문을 성취함에
여법이요지(如法而了知)호대 : 법과 같이 요지하되
역불분별법(亦不分別法)이로다 : 또한 법을 분별하지 아니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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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고맙습니다 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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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화님,새해엔 더욱 건강하고 복된 나날이 되길 서원합니다.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고맙습니다